[연재] 孫世一의 비교 傳記 (1) -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孫 世 一
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 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 「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 政界에 투신하여, 11代, 14代, 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民會議 정책위의장, 원내총무를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 「韓國戰爭勃發背景 연구」, 「金九의 民族主義」 등이 있고, 著書로 「李承晩과 金九」, 「人權과 民族主義」, 「韓國論爭史(編)」, 譯書로 「트루먼 回顧錄(上, 下)」, 「現代政治의 다섯 가지 思想」 등이 있다.

 

 (1) 讓寧大君의 16대손
 
  영락한 조선조 종친의 후손 李璜(이황)이 어떻게 해서 대대로 살아온 한양을 떠나 황해도 해주로 이주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1) 조선시대에 한양에 살던 양반 선비 가문이 지방으로 이주하는 경우는 대개 두 가지였다. 하나는 士禍(사화) 등에 연루되어 일족이 화를 피해 지방으로 피신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생활이 궁핍해져서 낙향하는 경우였다. 李璜의 경우는 후자에 속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전설의 명산 首陽山을 뒤로 하고 망망한 바다에 면해 있는 해주는 고려조 이래로 해서지방의 군사요충지이자 행정의 중심지로 발달해 왔다. 栗谷(율곡) 李珥(이이)가 황해감사로 있을 때에 수양산 밑에서 아름다운 石潭(석담)을 발견하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여기에 집을 짓고 학문을 강론하자 경향 각지의 선비들이 몰려왔었다고 한다.
 
  어떤 기록에는 해주가 「고을이 웅장하게 자리잡아 물산이 많고, 지역이 커서 四民(士, 農, 工, 商)이 모두 모여들고, 여러 고을을 관리하는 곳」이라고도 했다.2) 그리고 지리상으로 해주는 한양과도 그다지 두절된 곳이 아니었다. 이런 조건 때문에 李璜이 이곳을 이주지로 삼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李璜의 가문은 외로웠다. 자손이 많은 것이 곧 가문의 힘이던 시대에 李璜의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그리고 그 자신도 독자였다. 또 아들도 독자요 손자도 독자였다.
 
  李璜의 손자 敬善은 용모가 수려하고, 정이 많고, 씀씀이에 인색하지 않으며, 활달한―그리고 태평스러운 인품이었다.3) 그것은 현존하는 그의 사진으로도 웬만큼 짐작할 수 있다.
 
  敬善은 자신이 어려서 다니던 서당 훈장 金昌殷(김창은)의 외동딸 金海 金씨와 혼인하여 초년에 아들 둘을 낳았으나 천연두로 잃었다. 둘째 아들이 죽자 敬善은 격분한 나머지 역귀한테 올리는 터줏상을 몽둥이로 부수고, 역귀가 머문다는 사당 앞에서 큰 칼을 휘둘렀다. 그가 석달 동안 몸져 눕자 사람들은 그것이 그런 지각 없는 행동 때문이라고 말했다.4)
 
  敬善에게는 딸이 둘 있었다. 큰 딸은 해주의 丹陽 禹氏 집으로, 작은 딸은 平山의 靑松 沈氏 집으로 시집을 보냈는데, 敬善은 뒷날 한양에 올라와 살면서도 이들 딸네 집을 찾아가곤 했다.
 
  해가 거듭되어도 아들을 보지 못하는 敬善 내외가 얼마나 초조해 했을지는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敬善은 좋은 묏자리를 찾느라고 수천 냥의 돈을 썼다. 어떤 지관이 그에게 아버지의 뫼를 잘못 써서 아들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열심히 불공을 드리러 절에 다녔다.5)
 
  敬善은 집을 줄여 평산으로 이사했다. 황해도의 鎭山인 滅岳山(멸악산) 밑자락에 자리잡은 평산은 해주에 버금가는 큰 고을이다. 일찍이 平山都護府가 설치되어 있던 곳으로서, 「딴 지방에서 士族들이 흘러 와서 사는 자가 있다」는 기록도 있다.6) 또한 평산에는 유적지도 많은데, 馬山面의 慈母山城(자모산성)은 丙子胡亂(병자호란) 때에 적병이 공략하지 못했던 좋은 피난처로, 그리고 의적 林巨正(임꺽정)이 웅거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敬善은 이 자모산성에 가까운 大慶里 陵內洞(능안골)에 정주했다. 지명으로 보아 근처에 어떤 능이 있었을 법도 하나 어느 문헌에도 보이지 않는다. 풍수지리에 경도되었던 敬善이 이 자모산성의 지세와 함께 둘째 딸네 집과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새 거주지로 택했는지 모른다.
 
 
  돌상에서 붓을 잡아
 
 
  敬善은 이 능안골에서 마침내 늦둥이 아들을 얻었다. 이렇게 李承晩은 6代 독자로 태어났다. 「은둔의 나라」 조선이 세계를 향해 문을 여는 계기가 된 雲揚號事件이 터지던 바로 그해인 1875년 2월19일(양력 3월26일)이었다. 敬善보다 네 살 위인 그의 아내는 손자를 볼 나이인 마흔 두 살에 아들을 낳은 것이었다.
 
  뒷날 李承晩은 어머니가 자기는 한양 서쪽의 한 절에 모셔놓은 부처님이 주셨다고 말하곤 했었다고 적고 있다. 어머니는 그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난 어느 날 밤에 용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것이 태몽이었다. 그래서 李承晩은 어릴 적에 「용이」로 불렸다.7) 항렬이 承자였으므로 아버지는 承龍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金氏 부인이 아들을 낳기 위해 불공을 드리러 다녔던 한양 서쪽의 절이란 北漢山 기슭의 文殊庵(문수암:지금의 文殊寺)이었다. 文殊寺에 전해져 오는 말에 따르면 金氏부인은 文殊庵에서 100일기도를 드리고 나서 龍꿈을 꾸었다. 李承晩이 출생한 것은 敬善 내외가 평산에 살 때였는데, 어떻게 북한산의 문수암까지 불공을 드리러 왔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얻자 敬善 내외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큰 잔치가 벌어졌고, 동네 사람들은 李씨 집안이 후사를 잇게 되었다고 축하했다. 돌날이 되어 承龍은 큰 돌상에 갖은 음식과 함께 늘어놓은 여러 가지 물건 가운데에서 붓을 잡았다.
 
  李承晩 자신의 추측대로 아마 아기 손이 미칠 수 있는 가장 가까이에 붓을 놓아두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인데도, 金氏 부인은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뒤에 金氏 부인은 承龍에게 커서 큰 학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8)
 
  承龍이 세 살 나던 해에 敬善은 집을 정리하여 한양으로 올라왔다. 李承晩의 전기들에 따르면 敬善이 집을 정리하여 한양으로 올라 온 것은 집안 형편이 더욱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李承晩 자신은 그의 자서전 초고에서 『한때 그(아버지)도 부자였으나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 어머니 말로는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집에 재산이 없었다. 「너의 아버지는 여자나 도박에는 흥미가 없었으나 친구와 술을 위해서는 있는 대로 모두 내 놓았다」는 것이었다. 그가 친구들과 술잔을 주고받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일도 그 보다 더 귀한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9) 다른 한 전기는 敬善이 술값으로 진 빚 때문에 陵內洞의 집마저 정리해야 할 형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10)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머니 金氏 부인이 외아들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남편을 설득하여 한양으로 올라오게 되었다는 설명도 있다.11) 6代 독자로 태어난 承龍이 입신출세해야 가문이 살아날 수 있었으므로 敬善이 아들의 교육을 위해 조상들이 살아온 한양으로 올라올 결심을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오로지 술빚 때문에 집을 처분해야 했을 만큼 가난하지는 않았던 것은 한양에 올라 와서도 承龍이 어릴 때에 집에 일하는 늙은 내외와 하녀 복녀를 부렸던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이화장에는 李承晩 명의로 된 평산의 임야 대장이 보존되어 있다.12)
 
 
  『姓을 바꾸고 싶다』
 
 
  한양으로 올라온 敬善은 처음에 남대문밖 鹽洞(염동)에 자리를 잡았다가 이태 뒤에 駱洞(낙동)으로 옮겼고, 承龍이 열한살 되던 해에 다시 至德祠(지덕사)가 있는 桃洞의 雩守峴(우수현) 밑으로 이사했다. 雩守峴은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을 때에 기우제를 지내는 마루턱이었다. 李承晩은 이 雩守峴 밑의 오막살이집에서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았다.
 
  至德祠는 太宗의 적장자로서 세자에 책봉되기까지 했다가 아우 忠寧大君(충녕대군: 뒤의 世宗)에게 왕위를 넘겨 준 讓寧大君(양녕대군)의 유덕을 전하기 위해 肅宗(숙종) 원년(1675)에 세운 사당이다. 敬善이 至德祠 가까운 곳으로 이사한 것은 그곳에 讓寧大君의 奉祀孫(봉사손) 李根秀(이근수) 대감을 비롯하여 일가들이 모여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李承晩은 양친으로부터 들은 至德祠에 얽힌 이야기를 자서전 초고에 자세히 적고 있다.
 
  <옛날 어느 추운 겨울날 남산골 가난한 이생원 집에 한 중이 동냥을 왔다. 그러나 그 집 주인은 장작이 없어서 추위에 불도 때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데 무슨 동냥을 주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중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건너편 至德祠 앞의 노가주나무를 가리키며 『저기 저 나무라도 베어 때시지요』하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 집에서는 그 겨울에 땔감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至德祠가 있는 골짜기 건너편 언덕에는 거창한 關帝廟(관제묘)가 있었는데, 노가주나무를 잘라버린 얼마 뒤에 임금이 그 關帝廟에 참배하러 행차하게 되었다. 이 행차는 해마다 한 번씩 있는 행사였다. 임금이 關帝廟를 나오다가 건너편에 못 보던 헌 사당이 있는 것을 보고 그 사당의 유래를 묻자 신하가 讓寧大君의 사당이라고 아뢰었다. 임금은 그 낡고 쓰러져 가는 사당을 헐고 새로 짓게 하고, 그 가난한 선비에게는 벼슬을 주고 재산을 하사했다.>
 
  李承晩은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그 임금이 至德祠 중수를 명한 것은 만일 讓寧大君이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지 않았던들 지금 자기가 임금의 자리에 있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讓寧大君을 조선왕조를 창건한 太祖의 장남이라고 잘못 기술하고 있는 것은 흥미 있다.13)
 
  이러한 至德祠는 李承晩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의 교육, 특히 자신이 왕손의 후예라는 의식을 깊이 심어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至德祠는 1912년에 일본인들에 의해 영등포구 상도동 221번지의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李承晩은 청년시절에 高宗과 조선의 조정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과격한 비판자가 되는데, 그러한 비판 정신의 밑바탕에는 개혁에 대한 열정과 함께 자신이 왕위 계승권을 양보한 讓寧大君의 후예라는 의식이 미묘하게 작용하고 있었음은 그의 자서전 초고의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만일 16代 전의 나의 先祖가 그렇게 관대하게 王位繼承權을 동생에게 넘겨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高宗의 위치에 놓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高宗 치하에서 독립을 빼앗겼다. 그래서 나와 李氏 王族과의 먼 관계는 나에게는 영예가 아니라 치욕이다. 그러한 관계로 나는 姓을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바꾸어 버리기라도 하겠다.14)〉
 
  이러한 생각의 밑바탕에는 강화도령이었던 哲宗 이후의 王位繼承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도 깔려 있었을지 모른다.
 
  李承晩은 조상에 관해서 적어 놓기는 했으나 뒷날 자기의 전기를 쓰는 올리버에게 원고를 전할 때에 다음과 같은 메모를 첨부했다.
 
  『나의 조상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시오. 나의 政敵들은 내가 민주제도를 세우려고 하지 않고 (李氏)王朝를 부활시키려 한다는 자기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나의 족보를 캐내려고 애를 많이 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적은 것은 윤곽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올리버는 李承晩의 이러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李承晩 전기에서 「李承晩의 가계는 다년간 그의 울분의 대상이었고 또 어떤 점에서는 핸디캡이기도 했다」고 전제하고 나서 李承晩의 家系를 소개했다.15)
 
  李承晩이 자신의 가계에 대해 울분을 느꼈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李씨 왕족과의 먼 관계를 『영예가 아니라 치욕이다』라고 한 위의 문장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 자신이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 讓寧大君의 후예라는 의식을 反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적들이 자기를 가리켜 (李氏)왕조를 부활시키려 한다고 했다는 말은, 李承晩을 반대한 하와이 동포 가운데 그러한 비난을 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인하기는 어렵다.
 
 
  族譜에 프란체스카 사항 적어
 
 
  譜學(보학)에 능통했던 敬善은 아들에게 자기네가 王孫의 후예라는 것을 주입시키려고 노력했다. 李承晩이 어릴 때에는 말할 나위도 없고 성장하여 獨立協會의 급진 과격파로 萬民共同會를 주도할 때에도 그는 아들을 따라다니며 『너는 6代 독자이다』라는 말을 강조하곤 했다.
 
  그는 24권으로 된 족보를 아름다운 책장에 넣어 놓고 늘 꺼내어보면서 直系는 어떻게 되고, 支派는 어떻게 되었다는 것을 훤히 꿰고 있었다. 그는 자기네 가문뿐만 아니라 다른 명문의 족보에 대해서도 밝았다.
 
  그러나 그는 어린 承龍이 족보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 그리하여 그는 아들에게 고려조 초기 이래의 직계 선조들에 관한 간략한 내용을 손수 적어서 자그마한 책자를 만들어 주었다. 그것이 「世系與四柱幷錄:璿源世譜(세계여 사주병록:선원세보)」인데, 李承晩은 이 책자를 평생동안 간직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대목에 부모와 자기와 아내 프란체스카에 관한 사항을 자기 손으로 적어 넣고 있다.
 
  그런데도 李承晩은 평생동안 족보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지 않게 된 이유라면서 어릴 때에 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자서전 초고에 적고 있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어떤 사람이 죽은 뒤에 그의 혼이 저승에 가서 그곳 궁전의 구석구석을 안내받았다. 그러는 중에 양반들이 살고 있는 어느 한 곳에 들어갔더니 그곳에 있는 양반들은 어찌나 말라빠졌던지 뼈와 가죽만 남아 아주 가엾은 몰골들이었다. 어찌된 영문인가 하고 보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다가왔다. 그리고 하는 말이, 자기들은 양반들의 유명한 조상들인데 자기네 후손들이 스스로 생계를 개척해 나가지 않고 늘 조상들만 뜯어먹어서 이렇게 되었으니 돌아가거든 제발 좀 그러지 말라고 일러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었다.16)>
 
  사실 李承晩의 선조들은 李璜이 해주로 낙향하기 훨씬 전에 이미 몰락양반이 되어 있었다. 李承晩의 가계는 讓寧大君의 서자인 제5남 長平副正 (흔)의 후손들인데, 종친 예우는 讓寧大君의 증손자인 允仁으로 끝났었다.
 
  允仁의 손자 元約이 병자호란 때에 무공을 세워 全豊君에 추증되고, 그 후광을 입은 몇몇 자손들이 무관직에 등용되기도 했으나, 李承晩의 6대조 徵夏(징하)가 陰職(음직)으로 縣令을 지내고 나서부터는 대대로 벼슬이 끊긴 채였다.17)
 
 
  (2) 모반자 金自點의 방계 후손
 
 
  金九의 선조들은 仁祖反正의 공신으로 仁祖 때에 크게 권세를 누렸던 金自點의 방계 후손이었다. 金自點이 孝宗 때에 역모를 꾀하여 일족이 멸문을 당하게 되자 金九의 11대조가 처자를 끌고 처음에는 고향인 경기도 高陽으로 피신했다가 그곳도 한양에 가까우므로 위험하다고 하여 다시 황해도 해주 서쪽 팔십리에 있는 白雲坊(백운방) 基洞(텃골)의 八峰山 楊哥峰(양가봉) 밑으로 옮겨 숨어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金九 조상의 낙향은 李承晩 조상의 경우와 대조적으로 한양에 살던 양반 선비가문이 역모사건에 관련되어 화를 피해서 지방으로 이주한 경우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리고 두 가문이 다 해주로 낙향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때에 낙향한 金九의 11대조 大忠은 관직이 司果(사과)였는데, 司果란 직무가 없는 무장에게 녹봉을 주기 위해 마련한 직위로서 正6품에 해당했다. 大忠의 5대조 終智(종지)가 南平縣監을 지낸 이래로 대대로 副司直, 御侮將軍(어모장군) 등의 직무없는 무관 벼슬을 지냈다.18)
 
  이들은 金自點의 일족임을 숨기기 위해 양반 행세를 단념하고 상민 생활을 했다. 그들은 농삿일을 하고 임야를 개간하여 생계를 유지하다가 軍役田을 경작하면서부터 아주 상놈의 패를 차게 되었다. 軍役田이란 땅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 땅을 부치다가 유사시에 나라에서 징병령을 내리면 병역에 응해야 하는 경작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조선조 때에는 병역이 賤役(천역)이었으므로 이러한 제도가 있었다.
 
 
  『나는 상놈의 아들』
 
 
  朝鮮 封建社會에서 常民은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金九는 어려서부터 자기 집안이 그러한 「상놈」이라는 사실에 대해 심한 콤플렉스를 느끼면서 성장했다. 그의 자서전 「白凡逸志」는 여러 대목에서 그것을 토로하고 있다. 가령 뒤에서 보듯이, 그의 아버지가 숨을 거둘 때에 『연산으로 모시고 가서 만년에나 강씨, 이씨에게 상놈 대우를 받던 뼈에 사무치는 한을 면하시게 할까 하고 속으로 기대하였더니…』하고 슬퍼하고 있는 것 등은 그 대표적인 보기이다. 따라서 金九는 아마 위에 적은 직계 조상들의 신분도 모르고 자랐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뒷날 「白凡逸志」의 국내판(국사원본)을 낼 때에 원문에 없던 다음과 같은 문장을 서두에 적고 있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우리는 안동 金氏 敬順王의 자손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敬順王이 어떻게 고려 王建 太祖의 따님 樂浪公主의 부마가 되셔서 우리들의 조상이 되셨는지는 「三國史記」나 안동 金氏 족보를 보면 알 것이다. 敬順王의 8대손이 忠烈公이고, 忠烈公의 현손이 翼元公(익원공)인데, 이 어른이 우리의 시조요, 나는 翼元公에서 21대 손이다. 忠烈公과 翼元公은 다 고려조의 공신이거니와 李朝에 들어와서도 우리 조상은 대대로 서울에 살아서 글과 벼슬로 가업을 삼고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의 본문 앞에 있는 화보에는 金九가 귀국한 뒤에 敬順王陵을 참배하는 사진이 실려 있고, 「내 시조 敬順王陵에 제를 드렸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는 金九가 敬順王陵을 참배한 행동 그 자체와 함께 한국 사회의 권위주의적 가치관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 이후로 金九의 가계와 관련된 모든 기록은 그가 「敬順王의 후손」임을 강조하고 있다.
 
  가령 李承晩은 金九의 「屠倭實記(도왜실기)」의 국문판에 붙인 서문에서 金九가 「명문의 후예」라고 소개했고,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이었던 安在鴻도 金九가 암살된 직후인 1949년 8월에 쓴 「白凡金九先生略史」에서 「선생의 본관은 안동이니 그 선조는 신라 마지막 임금 敬順王의 후예로서…」라고 서두에 적었다.19)
 
 
  가짜 暗行御使 행세한 증조부
 
 
  金氏 일족은 텃골 주위에 살고 있는 晉州(진주) 姜氏나 德水 李氏 등 토착양반들로부터 핍박과 괄시를 받으며 대대로 살았다. 金氏 집안의 처녀가 姜氏나 李氏 집안으로 시집가는 것은 영광이었으나, 두 집안의 처녀가 金氏 집안으로 시집오는 일은 없었다. 姜氏와 李氏 집안은 대대로 坊長(방장:지금의 面長)을 했으나 金氏 집안 사람은 기껏해야 尊位(존위)가 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존위란 방장의 지시에 따라 세금을 거두는 직책이었다. 姜氏와 李氏 집안 사람들은 비록 머리 땋은 어린 아이라도 칠팔십 세 되는 金氏 집안 노인에게 『하게』를 하는 한편 金氏 집안 노인들은 갓 상투를 튼 姜氏, 李氏집 아이에게도 반드시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金九의 7대조 彦喊(언함)의 부인이 진주 姜氏였던 것은 퍽 예외적인 경우이기는 했겠으나 金氏 가문과 姜氏, 李氏 가문 사이에 통혼이 전혀 없지는 않았음을 보여 준다.20)
 
  한때 金氏 집안이 꽤 창성한 때도 없지 않았다. 20여 호 되는 텃골의 金氏 집단취락에는 기와집이 즐비하고, 또 선산에는 큰 석물을 만들어 놓기도 했었다. 텃골 뒷개(後浦)에 있는 선영에는 金九의 11대조 大忠의 산소를 비롯하여 역대 선조들의 묘가 있었다.
 
  그리고 世傳奴婢(세전노비)를 두고 있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생활이 궁핍해지자 이들 노비들을 해방시켜 주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金氏 집안에 혼사나 장례 등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와서 일을 보는 사람도 있었다.21)
 
  金氏 집안은 해주에 온 이래로 글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으나 이름을 떨칠 만하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이웃 土班들의 핍박은 필연적으로 金氏 집안 사람들의 불평불만과 저항을 촉발시켰다. 金九의 증조부 榮元은 가짜로 暗行御使 행세를 하다가 체포되어 해주 관아에 갇히기도 했는데, 서울 어느 양반의 청탁편지로 형벌을 면했다고 한다.22) 그런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金氏 집안은 金九의 증조부 대까지 서울의 영향력 있는 양반과 연결이 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榮元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 萬默은 4남 1녀를 두었는데, 萬默의 둘째 아들 淳永은 소문난 효자였다. 淳永은 집안이 가난하여 오랫동안 장가를 들지 못하고 있다가 스물네 살이 되어서야 三角婚으로 長淵 牧甘坊 文山村의 열네살 난 玄風 郭氏(뒤에 이름을 「樂園」으로 지었다)와 혼인했다. 삼각혼이란 혼비를 절약하기 위해 세 집안이 서로 딸을 바꾸는 것으로서, 주로 하층사회의 혼인 풍습이었다. 이를 「물레 혼인」 또는 「물레 바꿈」이라고도 일컬었다.
 
 
  아버지 품에 안겨 동냥젖 먹어
 
 
  淳永은 혼인을 하고도 집을 마련하지 못하여 3년 동안 아들 하나뿐인 작은 아버지 집에 더부살이를 했다. 그리하여 따로 살림을 나던 해에 金九가 태어났다. 1876년 7월11일(양력 8월29일). 그것은 李承晩이 태어난 지 한 해 뒤이며, 이 나라의 역사가 크게 달라지는 丙子修好條約(한·일수호조약)이 채결되던 해였다. 郭氏 부인이 꿈에 푸른 밤송이에서 크고 붉은 밤 한 개를 얻어 깊이 감추어 둔 것이 태몽이었다. 그것은 용이 金氏 부인의 품속으로 들어왔다는 李承晩의 태몽과는 퍽 대조적이다.
 
  金九 스스로 술회하고 있듯이, 기구한 일생의 조짐이었는지 그의 출생은 유례 없는 난산이었다. 사람들이 웅덩이 큰 댁이라고 부르는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사는 집에서 해산을 했는데, 진통이 있은 지 일주일 가까이 되도록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고 産母의 생명은 위험했다. 친척들이 모두 모여 온갖 의약을 쓰고 미신 방법을 시험해 보았으나 효력이 없었다.
 
  사태가 황급해지자 집안 어른들은 淳永에게 소길마를 머리에 쓰고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 소울음 소리를 내라고 했다. 그것은 난산의 경우 産母의 고통을 나누기 위한 의식으로서 평안도와 해서지방의 풍속이었다. 淳永은 처음에 거절했으나 어른들의 호통으로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 뒤에야 아기가 태어났다.
 
  그런데 이날은 공교롭게도 淳永의 어머니가 숨을 거두는 날이기도 했다. 淳永은 이때에 왼손 무명지를 칼로 잘라 어머니의 입에 피를 흘려 넣어 사흘을 더 버티게 하고 있었다고 한다.23) 부모나 남편이 위독할 때에 피를 내어 먹이려고 자기의 손가락을 자르는 이른바 斷指(단지)는 허벅지의 살을 베는 割股(할고)와 함께 효행과 정절의 극치로 평가되는 행위이다. 뒤에서 보듯이 金九도 淳永이 죽을 때에 割股를 하고 있다.
 
  郭氏 부인은 체구도 작은 데다가 어린 나이에 고된 일로 많은 고생을 하고 열일곱에 아들을 낳았던 것인데, 젖이 부족하여 암죽을 끓여 먹이면서 차라리 아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하곤 했다고 한다.
 
  郭氏 부인은 그 뒤로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러나 부부의 정분은 좋았다. 淳永은 갓난 아이를 품고 근처의 젖먹이 있는 집을 찾아다니며 젖을 얻어 먹였다. 淳永의 먼 친척 아주머니 뻘 되는 핏개댁(稷浦宅)은 밤중에 찾아가도 조금도 싫어하는 내색을 하지 않고 아이에게 젖을 물려 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모유의 부족은 金九의 유아기 잠재의식에 부족감과 불만을 심어 주었을 것이며, 그것이 그의 인격형성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때의 일과 관련하여 金九 자신은 「내 나이 열 살 남짓에 그분(핏개댁)이 돌아가셔서 텃골 동산에 묻혔는데, 나는 그 묘를 지날 때마다 경의를 표하였다」고 적고 있다.24)
 
 
  (3) 어머니에게서 五百羅漢 이야기 들어
 
 
  이처럼 李承晩과 金九는 두 사람 다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그들의 유년기의 성장에는 부모들의 영향이 압도적으로 컸다. 李承晩이 어릴 때의 이야기를 적으면서 『이 모든 것은 어머니와 두 누이한테서 들은 것이다25)』라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李承晩은 어릴 때에 두 누이의 사랑도 받고 자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 누이는 李承晩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출가해 있어서 함께 생활하지는 않았다.
 
  李承晩은 아버지를 닮아 강건한 체력을 타고 났는데, 이는 육체적 고초를 동반하는 뒷날의 파란만장한 생애에서 큰 자산이 된다. 또한 金氏 부인의 정성어린 양육도 그가 건강하게 자라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李承晩은 어머니 품에서 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자랐다.
 
 
  여든이 넘어서도 누룽지 즐겨
 
 
  金氏 부인은 음식솜씨가 좋았던 것 같다. 대통령 재임시에 李承晩은 이따금 비지찌개나 된장떡을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주방에서 정성껏 만들어 올리면 『우리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그 맛이 아니야』 하면서도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작고하기 얼마 전에도 『내가 남의 나라 음식도 많이 먹어 보았지만 우리나라 음식이 제일이야. 그 중에서도 우리 어머니가 담그셨던 동치미는 정말 맛있었지』 하며 어머니 손맛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金氏 부인은 달걀찜과 두부찌개를 만들 때에는 새우젓 국물로 간을 맞추었는데, 그 맛에 길들여진 李承晩의 입맛에 맞도록 뒷날 프란체스카도 달걀찜과 두부찌개를 만들 때에는 새우젓을 썼다.
 
  李承晩은 여든이 넘어서도 간식으로 누룽지를 먹을 정도로 이가 튼튼했는데, 李承晩은 자신이 이가 좋은 것은 어머니가 담근 동치미와 김치를 먹고 자란 덕분이라고 늘 자랑했다고 한다.26)
 
  承龍은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는 개구쟁이 소년으로 자랐다. 承龍은 끼니 때와 잠자는 시간과 책 읽는 시간을 빼놓고는 집 밖에 나가서 뛰놀았다. 장난은 심했으나 재미있고 용감한 아이였고,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고 같이 자란 李丙胄는 회상하고 있다.27)
 
  承龍은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나막신을 신고 성벽에 올라 아슬아슬하게 걷는 묘기로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기도 했고, 대보름에는 성벽 위에서 돌을 던지며 놀았다. 그리하여 「나막신 선비」라는 별명이 붙었다. 설이 돌아오면 대나무를 다듬어서 연을 만들어 날렸다. 우수현 고갯마루는 바람이 세기 때문에 연날리기가 좋았을 것이다. 노년에 李承晩은 『참 연날리기를 많이 했지』라는 말을 자주 했다.
 
  대통령의 바쁜 일정 속에서도 「한국일보」社 주최 전국 연날리기 대회에 하루 두 번씩이나 들러 손수 얼레짓을 해 보인 것도 이런 어린 시절의 향수에서였을 것이다. 그 얼레짓이 보통솜씨가 아니더라고 옆에서 지켜보았던 張基榮은 말했다.
 
  承龍은 또 남사당패를 따라가 광대놀이를 구경하며 즐기기도 했다. 『어, 사당 놀이야…』하고 남사당패가 흥을 돋우면 구경꾼들은 엽전을 던져 주기도 했는데, 어린 承龍도 따라 엽전을 던져 주기도 했다. 뒷날 그는 『남사당 놀이는 참 재미있었어. 아마 그들(남사당패)은 행복했을 거야』하고 말하기도 했다.28)
 
  흥과 장난기가 많은 承龍은 남사당놀이 구경을 하고 와서 사당패 흉내를 그대로 내며 신이 나서 사람들을 웃기기도 했는데, 어느 날 그런 장면을 아버지에게 들켰다. 敬善은 크게 노하여 『회초리 가지고 내 방으로 오너라』하고 불러 承龍의 걷어올린 종아리를 호되게 때렸다. 아들이 매를 맞을 때면 金氏 부인은 아들이 매를 다 맞을 때까지 문 밖에서 기다렸다.29)
 
  敬善은 동네 사람들로부터 『샌님은 더할 나위 없는 양반이시다』는 말을 듣는 선비였다.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 뒤에도 비틀거리는 일이 없었다. 그가 만취했을 때에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천천히, 그리고 침착하게 걸음을 걸었다.30) 그는 아들에게 고전 詩文이나 名家의 문장을 외우게 하고, 아들이 가다가 막힐라치면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자기가 이어 주곤 했다. 敬善은 어린 承龍에게 경전 말고도 실생활의 교훈이 되는 격언도 많이 가르쳐 주었다. 敬善은 아들에게 「고목에 꽃이 피랴」는 속담의 보기를 들면서 오지도 않을 복을 바라고 있지 말라고 가르치기도 했다고 李承晩의 전기 작가는 적고 있다.31)
 
 
  아버지는 나귀 타고 周遊天下
 
 
  그러나 敬善은 집을 비우는 때가 많았다. 그는 털빛이 서릿발처럼 흰 서산나귀 한 마리를 애지중지하며 먹이고 있었다. 그는 이 나귀를 타고 나침반을 차고 아버지의 뫼를 쓸 명당 자리를 찾느라고 金剛山이고 어디고 두루 찾아 다니는 것이 그의 오랜 습벽이었다. 敬善이 그토록 명당을 찾아 헤맨 것은 과거에 실패하여 가문을 일으키지 못한 한이 맺힌 그로서 늦둥이 외아들 承龍의 입신출세를 그만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명당을 찾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세태를 벗어나 경계 좋은 산천을 周遊하는 것 자체가 그의 취향이 되어 버렸던 것 같다. 불시에 나귀등에 올라 앉아 방울소리를 울리며 집을 나가서는 서너 달, 때로는 한 해가 기울어도 소식이 없다가 문득 어느 눈내리는 날 밤에 다시 방울소리를 울리며 집에 돌아오는 때도 있었다고 한다.32)
 
  이러한 아버지를 李承晩은 그다지 존경하지 않았던 것 같다. 죽은 조상들만 뜯어먹고 사는 양반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 데서 보듯이, 가난한 형편에 족보만 들여다 보고 앉았는가 하면 명당자리를 찾는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는 아버지가 어린 承龍에게는 못 마땅했을 것이다. 성장해서도 李承晩은 아버지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
 
  노후의 敬善은 뒤에서 보듯이 동네아이들을 가르치며 혼자서 궁색하게 살다가 평산의 둘째 딸네집으로 내려가 생애를 마치게 된다. 李承晩이 자서전 초고에서 『그(아버지)는 만년에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나는 그때의 그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33)』고 적고 있는 것도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심리적 갈등을 말해 주는 것일 것이다.
 
  이런 아버지였으므로 어린 承龍은 어머니로부터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자랐다. 金氏 부인은 빗살이 작고 촘촘한 참빗으로 아들의 머리를 빗겨 주었는데, 承龍은 너무 아파서 울곤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李承晩은 이 참빗을 일생동안 저고리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사용했고, 운명하기 전 하와이의 병실에서도 이 빗을 만지며 고국을 그리워했다고 한다.34)
 
  金氏 부인은 독실한 불교신자였고, 또 기본적인 한문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집안 살림도 金氏 부인이 몰래 삯바느질까지 해가며 꾸려 나갔다고 한다.
 
  承龍이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가장 큰 정신적 영향은 불교였다. 承龍은 어머니에게서 들은 釋迦牟尼(석가모니)의 前生譚이나 五百羅漢의 이야기를 어른이 되어서도 자세히 기억했다.
 
 
  절간에 들어서면 제 집에 온듯
 
 
  金氏 부인은 아들에게 五百羅漢 설화를 다음과 같이 들려 주었다.
 
  〈釋迦牟尼가 불교를 설법하고 기도할 때마다 「南無阿彌陀佛(남무아미타불)」을 300번 이상씩 되뇌이며 온 누리를 여행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그는 피곤해서 기장 들판의 한 쪽 구석에 쉬려고 앉았다. 마침 곡식이 아주 잘 익어 이삭들은 낟알이 차서 늘어져 있었다. 지친 釋迦牟尼는 한창 수확 때인 들녘의 아름다운 정경에 감격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기장 이삭을 건드렸다. 낟알 세 개가 그의 손에 떨어졌다.
 
  그는 소중한 낟알을 버리기가 아까워 별다른 생각 없이 그것을 입에 넣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농부가 일년 내내 일해서 얻은 첫 수확을 자기가 먹어버려 농부에게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그는 즉시 제자들을 해산시키고 스스로 큰 소로 변신했다. 이 釋迦牟尼 소는 그 농부의 집으로 가서 낟알 셋을 먹은 代價(대가)로 3년 동안 일을 했다. 그 3년 동안에 농부는 널리 소문이 날 만큼 큰 부자가 되었다.
 
  어느 날 아침에 농부는 그의 소가 자기를 찾아 와서 마치 사람처럼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는 농부에게 그날 밤에 그 집을 찾아오는 손님 500명을 대접해야 한다고 말했다. 농부는 이상스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500명을 위한 잔치를 준비했다. 그날 밤에 500명의 도둑 떼가 그 집에 들이닥쳤다. 굶주린 밤손님들이 한참 음식을 즐길 때에 그 소는 외양간에서 나와 도둑들에게 낟알 셋을 먹었던 것과 그 代價로 3년 동안 일을 했던 것을 모두 이야기했다.
 
  농부에게 충분히 보상을 했으므로 釋迦牟尼는 그와 작별하고 다시 설법에 나섰다. 그 노상강도들은 모두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釋迦牟尼를 따랐다. 그것이 羅漢들의 기원이었다.35)>
 
  그런데 이러한 五百羅漢의 설화는 釋迦牟尼의 일생을 다룬 경전인 「佛所行讚(불소행찬)」이나 그밖의 불교 설화집 등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불교경전에 대한 지식이 대중화되지 못했던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金氏 부인은 아마도 文殊庵의 승려 등을 통하여 불교 교리에 대해서도 웬만큼 통달해 있었던 것 같다.
 
  어린 承龍은 어머니의 말을 사실로 믿었다. 金氏 부인은 承龍의 생일 때마다 그를 북한산 기슭의 文殊庵에 보내어 불공을 드리게 했는데, 불공을 드리러 갈 때에는 사흘 동안 집에서 금식을 하고 사람이나 짐승의 피라든가 시체와 같은 부정한 것을 보지 말아야 했다. 그렇게 한 다음 하녀인 복녀를 따라 文殊庵에 처음 갔을 때의 일을 李承晩은 그의 자서전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북한산에 자리잡은 그 아름다운 절의 첫 인상은 어찌나 좋았던지 나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영적인 분위기와 금욕적인 환경 속에서 모든 것이 어찌나 속세와 다르던지 나는 꿈나라에 간 기분이었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쓴 五百羅漢들이 웅장한 불당에 나란히 앉아 있었고, 벽에는 극락과 지옥의 그림들이 황홀하게 그려져 있었다.36)>
 
  李承晩은 대통령 재임 때에도 노구를 무릅쓰고 이 文殊庵을 찾았다. 어린 시절 불교의 영향은 李承晩이 성장하여 일생동안 직접 간접으로 기독교와 관련된 생활을 하면서도 지워지지 않았다. 뒷날 대통령이 된 뒤에 타락한 사찰의 淨化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어린 시절에 불교로부터 받은 영향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李承晩은 심지어 자기는 교회에 나가지만 『교회에 가면 어쩐지 남의 집에 간 것 같고, 절간에 들르면 제집에 들어서는 것 같다』고까지 토로한 적이 있다.37)
 
 
  여섯 살에 「千字文」 떼어
 
 
  承龍은 한문교육도 어머니에게서 먼저 받았다. 맨 처음은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千字文」을 외우는 것이었는데, 金氏 부인은 어린 아들에게 매질을 해가면서 글을 가르쳤다. 承龍은 총명했다. 여섯 살에 「千字文」을 떼었는데, 그것이 무척이나 대견스러웠던 敬善 내외는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千字文」을 떼자 「童蒙先習」을 익혔다.
 
  金氏 부인은 아들에게 詩도 가르쳤다. 李承晩은 뒷날 어떤 감회를 느낄 때마다 그 자리에서 漢詩를 짓곤 했는데, 이는 어릴 때에 어머니로부터 받은 교육이 원천이 되었던 것같다. 그것은 李承晩이 자서전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나의 첫 詩想도 어머니가 가르쳐 주었다. 내가 어릴 때에 지은 한 구절의 아동시가 나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이 새겨졌던지, 그 뒤에 나는 오랫동안 그런 詩를 지으려고 애를 쓰곤 했다.
 
  風無手而木(바람은 손이 없어도 뭇 나무를 흔들고)/月無足而行空(달은 발이 없어도 하늘을 건너간다)38)〉
 
  李承晩은 자서전 초고를 영어로 썼는데, 이 詩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The wind has no hands but it shakes all the trees;
 
  The moon has no feet but travels across the sky.>
 
  이 영문시는 올리버가 쓴 전기에는 그대로 인용되어 있으나39) 서정주가 쓴 것에는 없다. 金氏 부인은 承龍의 교육에 온 정성을 다 쏟았다. 金氏 부인은 承龍이 글씨를 쓰는 데 행여 지장이 있을까 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지 못하게 하고, 돌팔매질도 못하게 했다.40)
 
  承龍은 열심히 글씨를 썼는데, 敬善은 곧잘 사람들을 불러 아들의 글씨 쓰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야, 그 도령 잘 쓴다』하고 탄성을 올릴 때면 承龍은 여간 기쁘고 자랑스럽지 않았다.41)
 
  金氏 부인의 교육에 의한 빠른 학습의 성취는 「왕손 후예의 6代 독자」임을 강조하는 敬善의 훈계와 함께 承龍으로 하여금 상대적 우월감과 함께 자신의 존재에 대한 특별한 긍지를 느끼게 했으며, 그것이 일생을 두고 그를 남다른 사명감과 자신감에 찬 인간형으로 발전시켰을 것이다.
 
 
  천연두로 視力 잃을 위기 겪어
 
 
  어린 承龍이 여섯 살 때에 천연두를 앓고, 倂發症(병발증)으로 몇 달 동안 실명 상태에 빠졌던 것은 그의 생애 최초의 큰 시련이었다. 이때의 일을 그의 전기들은 매우 극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李承晩이 그만큼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창, 손님, 마마, 홍역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천연두는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조선조의 全시대에 걸쳐 계속 유행했었고 전염 규모도 엄청난 것이어서 사람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리하여 肅宗, 英祖 때에는 내의원에 痘科(두과)의 전문의를 두기도 했었다. 천연두의 예방접종은 正祖 때에 丁若鏞(정약용)에 의하여 처음으로 도입되었으나, 불행하게도 西學 배척의 분위기에 밀려 중단되고, 池錫永(지석영)에 의하여 본격적인 種痘사업이 실시된 것은 1879년에 이르러서였다.42)
 
  그러나 그 종두사업도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承龍도 물론 예방접종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일찍이 천연두로 두 아들을 잃었던 敬善 내외가 承龍이 천연두를 앓고 게다가 눈까지 멀게 되자 얼마나 당황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承龍은 빨갛게 단 쇠붙이가 두 눈을 찌르는 것같이 아팠다고 했다.
 
  소년은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펄쩍펄쩍 뛰어서 한쪽 구들이 내려 앉았다. 집에서 일하는 늙은 부부가 두꺼운 포대기로 햇빛을 가리고 承龍을 업고 달래었다. 敬善 내외는 매일 치성을 드리고 약을 구하기 위해 의원들과 친지들을 찾아 다녔다. 100가지도 더 되는 약을 써 보았을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敬善은 惠民署의 郎官을 지낸 친척 李浩善이 권하는 대로 아들을 외국인 의사에게 데려가 보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은 여간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承龍이 눈을 동여 맨 채 조그마한 가마를 타고 집을 나갈 때에 金氏 부인은 아들을 묻으러 보내기나 하는 것처럼 목을 놓고 울었다.
 
  敬善이 찾아간 사람은 일본인 의사였다. 의사는 진찰을 마치고 물약 한 병을 주면서 하루에 세 번씩 承龍의 눈에 넣어 주라고 말하고, 사흘 뒤에 효과를 잘 살펴보라고 했다. 사흘째 되는 날은 공교롭게도 承龍이 일곱 살이 되는 생일이었다. 그리고 의사의 말대로 이날 承龍은 시력을 되찾았다. 그토록 심하게 앓던 눈병이 어떻게 이처럼 간단히 치료될 수 있었는지 적이 의심스러운 일이기는 하다.
 
  敬善은 감사의 표시로서 달걀 한 꾸러미를 들고 아들과 함께 의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의사는 『댁의 아들이 나보다 더 달걀을 먹어야 합니다』하고 말하면서 사양했다. 이것이 承龍이 외국사람을 만난 첫 경험이었다.43) 李承晩은 대통령 재임 때에 李浩善의 후손을 찾았고, 1957년 6월15일에 경무대로 찾아온 浩善의 손자며느리 연안 金氏에게 어려서 눈병을 앓던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44)
 
  그런데 올리버는 承龍이 천연두를 앓은 것이 아홉 살 때였고, 찾아간 의사는 초대 선교사인 호레이스 N. 알렌(Horace Newton Allen)이었다고 적고 있다.45) 그러나 이는 착오이다. 왜냐하면 알렌이 고종의 허락을 얻어 薺洞(제동)에 廣惠院을 설치한 것은 甲申政變이 나던 1884년의 일이고, 이때에 承龍은 열 살이 되어 있었다.
 
  承龍이 진고개에 있는 일본인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는 徐廷柱의 기술46)이나 讓寧大君派 종회의 전 都有司 李丙圭의 증언47)도 정확하지 않아 보인다. 承龍이 천연두를 앓던 해인 1880년에는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 일본 변리공사가 서대문 밖에 임시공사관을 설치하고 마에다 기요노리(前田淸則)라는 해군 군의관으로 하여금 배속 의관으로서 내왕하게 하고 있었고, 서울에 일본인 병원이 생기는 것은 3년 뒤인 1883년 6월에 일본 공사관 옆에 日本館醫院을 특설하고 거류 日人들과 함께 조선인들에게도 의료를 실시하기 시작하는 것이 효시였기 때문이다.48) 그러므로 李浩善의 주선으로 承龍을 치료해 준 의사는 일본 임시공사관의 군의관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4) 「水滸誌」의 영웅 같은 아버지
 
 
  金九도 아버지를 닮아서 건장한 체구와 강한 의협심과 용맹을 타고 났었고, 그것이 계속되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李承晩과는 또 다른 풍운의 생애를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저력이 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金九 자신도 「白凡逸志」 상권을 마무리하면서 『내 일생에서 제일 행복이라 할 것은 기질이 튼튼한 것이다. 거의 5년의 감옥 고역을 하루도 병으로 쉰 적이 없고 인천 감옥에서 학질에 걸려 반나절 동안 역을 쉰 적이 있을 뿐이다』하고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49)
 
  金九의 아명은 昌巖이었다. 昌巖도 서너 살 때에 천연두를 앓았는데, 「白凡逸志」에 그것과 관련한 특별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심하게 앓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어머니 郭氏 부인이 보통 종기를 치료할 때처럼 대나무 침으로 얼굴에 솟은 돌기에 고름이 맺힌 것을 따고 고름을 짜냈기 때문에 얼굴에 자국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50)
 
  昌巖은 어머니 郭氏 부인보다도 아버지 淳永으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자랐다. 淳永은 金九 자신의 말로는 『학식은 이름 석 자를 쓸 줄 아는 정도』였다고 하나, 그보다는 나은 수준이었던 것 같으며, 허우대가 좋고 성격이 호방했다. 술이 한량이 없었는데, 취기가 오르면 이웃 양반 姜氏, 李氏네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두들겨 패서 1년에도 여러 차례 해주 관아에 구금되어 문중에 소동을 일으키곤 했다.
 
  사람을 구타하여 상해를 입히면 맞은 사람을 떠메다가 때린 사람집에 눕혀 두고 죽는지 사는지를 지켜보는 것이 그 무렵의 지방 관습이었다. 그 때문에 한 달에도 몇 번씩 거의 죽게 된 사람이나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淳永의 집 사랑방에 누워 있기가 일쑤였다. 淳永이 사람을 잘 팬 것은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불평 불만이 남달리 컸고 의협심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金九는 자기 아버지가 『마치 「水滸誌(수호지)」에 나오는 영웅처럼 강자가 약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불친을 불문하고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격이었다』고 적고 있다.51) 그래서 淳永에 대해 인근 상민들은 두려워서 공경하고 양반들은 슬슬 피했다.
 
 
  『너도 술을 먹으면 자살하겠다』
 
 
  淳永 형제의 음주벽에 관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는 어린 昌巖에게 준 가정환경의 영향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昌巖의 넷째 삼촌 俊永도 淳永과 마찬가지로 술이 과했고, 취하면 곧잘 소란을 일으키는 것도 淳永과 비슷했다. 그러나 그는 淳永과 반대로 양반에게는 감히 덤비지 못하고 문중 친척들에게만 위 아래 없이 욕을 하면서 싸움을 걸었다.
 
  昌巖이 아홉 살 때에 큰 아버지 伯永의 장례식이 있었는데,52) 俊永의 행패로 장례식이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俊永이 술에 취해 상여꾼을 모조리 두들겨 패버려 낭패하자 인근 양반들이 큰 생색을 내느라고 노복을 한 사람씩 보내어 다시 상여를 메고 가게 했다. 그러자 俊永은 그들까지 때려서 모두 쫓아버리고 말았다.
 
  마침내 俊永을 결박하여 집에 가두어 놓고 집안 사람끼리 운구하여 장례를 치르고 나서 가족회의를 열었다. 昌巖의 종증조부 주관으로 연 가족회의는 俊永을 앉은뱅이로 만들기로 결의하고 그의 두 발뒤꿈치를 베어버렸다. 다행히 힘줄이 상하지는 않아 병신은 되지 않았다. 아무리 홧김에 내린 결정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가족회의의 결정은 과격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뒷날 金九가 「白凡逸志」에서 이 사실을 두고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이 상놈의 본색이요 所爲라 하겠다」라고 적고 있는 것은, 비록 조락한 시기의 臨時政府이기는 했으나 그 수반인 國務領까지 역임한 뒤인 이때까지도 그가 양반 콤플렉스를 불식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그러면서도 이처럼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이야기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데서 우리는 金九의 솔직한 성품을 느낄 수 있다.
 
  俊永이 종증조부의 사랑에 누워 범같이 울부짖는 바람에 어린 昌巖은 무서워서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이때에 郭氏 부인은 아들을 보고 『우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 때문에 생기는데, 두고 보아 네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을 하여서도 네 꼴을 보지 않겠다』하고 말했다. 이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金九는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하고 맺고 있다.53)
 
  해마다 세밑이 되면 淳永은 닭이며 달걀이며 담배 같은 것을 준비하여 營吏廳과 使令廳 사람들에게 선물을 보냈다. 그러면 그 답례로 책력이나 해주 먹 같은 것이 왔다. 이처럼 미리 손을 써두는 것을 禾契房(계방)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계방을 해두면 소송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고 만일에 營門이나 本衙(본아)에 잡혀가서 옥이나 영청에 갇히더라도 사실은 使令이나 營吏들과 같이 먹고 자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비록 태장이나 곤장을 맞게 되더라도 아프지 않게 때리는 시늉만 하는 것이었다.
 
  옥에서 나와 반대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여 양반토호들을 구속시키고 나면 그들은 재산을 있는 대로 써서 監司나 判官에게 뇌물을 주고 모면하더라도 使令이나 營屬들에게 별별 고통을 당하게 된다. 실제로 그런 수단으로 해서지방에서 1년 동안에 부호 10여 명이 낭패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54)
 
  이러한 淳永이 都尊位에 천거된 것은 인근 양반들의 회유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淳永은 도존위가 된 뒤에도 양반들에게 고분고분한 다른 존위들과는 반대로 그들한테서는 엄격하게 세금을 거두고 빈천한 사람들한테서는 자기가 부담할망정 가혹하게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양반들은 金淳永이라고 하면 부녀자나 아이들까지도 손가락질을 하며 미워했다고 한다. 淳永이 양반들 사랑에 들를라치면 그 주인이 다른 양반들과 같이 있을 때에는 『허, 金존위 왔는가』하고 낮춤말을 썼다가도, 혼자 있을 때에는 이따금 『이랬소』 『저랬소』하고 이른바 머드레 공대를 하곤 했다. 淳永은 결국 3년이 못 가서 공금을 축내었다고 해서 면직되고 말았다.
 
 
  아버지 숟갈 분질러 엿 사먹어
 
 
  이러한 아버지의 외아들로 태어난 昌巖은 말 없는 아이로 자랐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金九의 어릴 때의 에피소드는 그의 타고난 성품과 성장기의 생활 환경을 잘 말해준다.
 
  <昌巖이 네 살 때의 일이다. 郭氏 부인이 화로에 꽂아두고 쓰는 부서리(작은 부삽)를 가지고 놀다가 그만 그것이 손등에 쩍 달라붙었다. 그런데 아이는 울지도 않고 앉아서 『어, 부서리가 손등에 붙었다』하고 말했다.55)>
 
  <郭氏 부인은 昌巖에게 따로 옷을 해 입힐 수 없어서 한참동안 어른의 헌 저고리를 입혀 밖으로 내보내었다. 하루는 날이 저물어 같이 놀던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 올 때에 昌巖이 보이지 않았다. 저쪽 풀밭에 혼자 엉거주춤 하고 서 있기에 아이들이 가 보았더니 『똥구멍에 나무가 박혔다』하고 말했다. 땅바닥에 앉다가 항문에 나무조각이 박혔던 것이다.56)
 
  金九의 아들 金信은 아버지가 어릴 때에 가난해서 열 네 살이 되도록 바지를 입지 못하고 자랐다고 할머니한테서 들었다고 말하고 있으나57) 이 말은 조금 과장이다. 金九는 열두 살 때에 동네 아이들과 함께 훈장을 초빙하여 글공부를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金九가 어려서 한참동안 어른의 헌 저고리만 입고 자랐던 것은 金信의 말로도 확인할 수 있다.〉
 
  위의 두 가지 이야기는 郭氏 부인으로부터 직접 들은 사람들이 전하는 말이다. 그리고 金九 자신은 그의 자서전에서 어릴 때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淳永은 昌巖이 다섯 살 때에 몇몇 일가집들과 함께 康翎의 삼거리로 이주하여 이태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일족이 어떻게 하여 강령으로 이주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또 이웃 토반들을 피하여 새로운 開拓地를 찾아 나섰던 것으로 짐작된다.
 
  淳永의 집은 밤에 호랑이가 사람을 물고 집 앞을 지나갈 만큼 적막한 산 어귀에 있었다. 그리하여 淳永 내외가 농삿일이나 해산물을 채취하러 나가고 나면 昌巖은 가까운 신풍 이생원 집에 가서 그 집 아이들과 놀다오는 것이 일과였다.
 
  하루는 그 집 아이들이 『해줏놈 때려 주자』고 공모하여 昌巖은 몰매를 맞았다. 昌巖은 곧 집으로 돌아와 부엌칼을 가지고 아이들을 찔러 죽일 생각으로 그 집으로 달려갔다. 사랑 앞문으로 들어가면 아이들이 눈치챌까보아 뒤로 돌아 가서 칼로 울타리를 뜯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마침 안마당에 있던 열 일여덟 살 난 그 집 처녀가 보고 놀라 큰 소리로 오라비에게 일렀다. 결국 昌巖은 다시 아이들에게 실컷 얻어맞고 칼만 빼앗기고 돌아왔다.
 
  또 하루는 昌巖이 혼자 집에 있으면서 몹시 심심해 하고 있을 때에 엿장수가 『헌 유기나 부러진 숟갈로 엿들 사시오』하고 외치며 지나갔다. 소년은 엿이 먹고 싶었으나 엿장수가 아이들의 자지를 잘라간다는 말을 어른들에게서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방문을 닫아 걸고 엿장수를 불렀다.
 
  부러진 숟갈이라야 엿을 주는 줄 안 소년은 아버지의 좋은 숟갈을 밟아 분질러 반은 두고 반만 문구멍으로 내어 밀었다. 엿장수는 엿을 한 주먹 뭉쳐서 들이밀어 주었다. 엿을 한참 맛있게 먹고 있을 때에 아버지가 돌아왔다. 사실대로 말하자 淳永은 『다시 그런 짓을 하면 혼을 내겠다』고 꾸짖었다.
 
  그 뒤 어느 날 淳永이 엽전 스무 냥을 방 아랫목 이부자리 속에 넣어 두고 나가는 것을 보고 昌巖이 그 돈을 모두 꺼내어 온몸에 감고 떡을 사먹으러 나섰다가 길에서 삼종조부를 만났다. 그는 돈을 빼앗으며 『네 아비가 보면 큰 매 맞는다. 어서 집으로 들어가거라』하고 昌巖을 집으로 돌려 보냈다.
 
  얼마 뒤에 집에 돌아온 淳永은 말 한 마디 없이 다짜고짜로 빨랫줄로 어린 아들을 동여 들보에 달아매고 사정없이 매질을 했다.
 
  그때에 마침 昌巖을 지극히 사랑하던 재종조부 長連 할아버지가 지나가다 昌巖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 들어와 설명도 듣지 않은 채 『어린 것을 그토록 무지하게 때리느냐』하고 꾸짖으며 昌巖을 때리던 매를 빼앗아 그것으로 淳永을 때렸다. 長連 할아버지는 淳永과 동갑이었으나 親屬의 권위로 淳永을 책망한 것이었다.
 
  어린 昌巖은 長連 할아버지가 고마웠고 자기 아버지가 매맞는 것이 시원하고 고소했다. 長連 할아버지는 昌巖을 업고 들로 나가서 수박과 참외를 사 먹이고 나서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昌巖은 그 집에서 여러 날 묵고 난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58)
 
  한 번은 장마비로 집 근처에 샘이 솟아나 여러 갈래의 작은 시내를 이루었다. 昌巖은 빨강 파랑 물감을 집에서 통째로 꺼내어다가 한 시내에는 빨강이를, 다른 시내에는 파랑이를 풀어 붉은 시내 푸른 시내가 한데 어우러지는 모양을 보며 좋아하다가 어머니에게 몹시 매를 맞았다.59)〉
 
 
  함지박 장수 딸을 며느리 삼기로
 
 
  독자로 태어난 昌巖이 金氏 一家만 모여 사는 텃골 집성취락의 씨족주의 분위기 속에서 양친뿐만 아니라 집안 어른들로부터 특별한 귀여움을 받고 자랐던 것도 그의 성장기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사촌들이 있기는 했으나 어려서부터 집안 농삿일만 거드는 이들 사촌들과는 잘 어울렸던 것 같지 않다. 淳永은 빈한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외아들을 농사꾼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뒷날 河浦事件(치하포사건)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을 때에 金九는 자신이 「7代 독자」라고 진술하고 있고, 淳永과 郭氏 부인이 각각 법부대신에게 올린 탄원서에도 아들이 「7代 독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60)
 
  金九의 과묵한 성품과 대담성과 강한 저항정신은 선천적인 강인한 체력과 함께 성장기의 생활환경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金九의 과묵한 성품은 뒷날 사회활동 과정에서 더러는 오해를 사는 요인이 되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복잡한 상황 속에서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오히려 강점이 되었을 것이다.
 
  郭氏 부인은 金九의 말에 따르면 『비록 하향 농촌에서 생장하셨으나 무슨 일에나 잘 감당해 내시고 더욱 바느질이 능하신61)』 여성이었다. 郭氏 부인은 金九가 어려서 서당에 다닐 때에 김품과 길쌈품을 팔아서 아들의 紙筆墨 값을 벌기 시작하여, 먼 이국땅 重慶에서 『내 원통한 생각을 어찌하면 좋으냐!』 하고 숨을 거두기까지, 고난의 팔십 평생을 오로지 아들을 위해 바치는 것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러나 어릴 때에 金九는 어머니보다 아버지 淳永으로부터 훨씬 큰 영향을 받고 자랐고, 장성해서도 한참 동안 모든 중요한 결정은 아버지의 의견에 따랐다.
 
  淳永은 昌巖이 열 두서너 살 때에 어떤 술집에서 金致景이라는 함경도 사람 함지박 장수를 만나 취중에 말이 오가다가 그에게 열아홉 살 난 딸이 있다는 말을 듣고 농담같이 며느리로 달라고 청혼을 했고 金致景도 승낙했다. 그리하여 淳永은 昌巖의 사주까지 보내고, 여자아이를 가끔 집에 데려오기도 했다. 이무렵 昌巖은 書堂에 다니고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이 그일을 알고 놀려대곤 했다.
 
  『너는 함지박 장수 사위다. 너의 집에 데려온 처녀가 곱더냐?』
 
  이런 놀림을 받을 때에는 昌巖은 몹시 불쾌했다. 하루는 추운 겨울 날 昌巖이 얼음판에서 팽이를 치며 놀고 있는데 그 여자아이가 곁에 와서 구경하다가 자기에게도 팽이를 한 개 깎아 달라고 말했다.
 
  이 말에 昌巖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어머니를 졸라 그 여자아이를 돌려 보내버렸다. 그러나 딱히 약혼을 취소한 것은 아니었다. 金九는 이 일이 자기가 너더댓 살 때의 일이라고 적고 있으나62) 열두 살 때부터 서당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착오일 것이다.
 
  昌巖이 어머니를 졸라 그 여자 아이를 돌려 보낸 것은 그 여자 아이가 굳이 싫어서 그랬다기 보다는 함지박 장수 사위가 되는 것이 더 싫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이 무렵 昌巖은 「상놈」 신분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科擧에 급제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를 졸라 눈물겨운 書堂 공부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만큼 金九는 어릴 때부터 신분상승의 강한 욕구를 가지고 성장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몰락한 양반의 궁핍한 처지에서 立身出世를 위해 여섯 살 때부터 科擧를 목표로 서당공부를 시작하는 李承晩의 경우와 절박성에서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우리는 李承晩과 金九가 서당공부를 어떻게 했고 科擧에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다음호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그런데 淳永의 이 경박한 처사 때문에 金九가 평생의 스승인 유학자 高能善의 손자사위가 되는 연분이 깨어지고 마는 것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다.<계속>●



[연재] 손세일의 비교 평전 - (2)이승만과 김구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서당공부와 과학
 
 

 

 (1) 書堂의 都講에서 번번이 장원
 
 
  李承晩과 金九는 나이가 들면서 당시의 사대부집 아이들이나 웬만한 상민들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書堂공부를 시작했다. 목표는 물론 科擧였다.
 
  과거는 儒敎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은 나라에서 그 經典의 시험을 통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였다. 後周(후주)의 귀화인 雙冀(쌍기)의 건의에 따라 高麗 光宗 9년(958)에 처음 실시된 이후로 과거는 우리나라의 정치·사회·문화의 발달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文官이 武官이나 胥吏(서리)를 누르고 국가권력을 장악하게 했던 文治主義는 근대국가의 기본 틀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이른바 文民優位의 原則을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일찌감치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세계의 역사에서도 특수한 경우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오직 과거에 합격하는 것만이 입신출세의 길이었고, 과거에 합격하려면 유교의 경전과 교양을 열심히 익혀야 했다. 그러한 전통이 오늘날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공통적인 민족의 특성인 높은 敎育熱의 원천이 된 것은 흔히 지적되는 대로이다.
 
  李承晩은 일곱 살 나던 해부터 열아홉 살이 되던 1894년에 甲午更張으로 科擧制度가 폐지될 때까지 서당공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열세 살 때부터 계속해서 科擧를 보았으나 번번이 낙방했다. 그런데 李承晩은 이 시절의 일에 대해 자서전 초고에서나 다른 글로 적어 놓은 것이 없다. 자서전 초고에는 앞으로 쓸 요량으로 적어 놓은 몇 가지 사항 중에 「學校(書堂)生活. 科擧를 위한 敎育. 10권의 詩와 2권의 書를 외웠던 일」이라고만 적어 놓았을 뿐이다.1)
 
  그가 외웠다는 詩와 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李承晩의 공식전기인 올리버의 전기도 이 중요한 시기에 대해, 이 무렵의 한국에는 學校가 없었고 일반 가정에서는 가정교사(훈장)를 고빙하여 자기 아이들과 친척이나 친구 아이들을 가르쳤다면서, 李承晩은 李丙胄(이병주), 申興雨 형제 등과 함께 儒敎經典을 공부했고 열아홉 살이 되기 전에 四書三經의 중요한 부분을 외웠다고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고 말았다.2)
 
  반면에 李承晩의 구술을 토대로 했을 徐廷柱의 전기에는 이 시절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으나, 이 전기는 또 저자의 상상력에 의하여 과장된 부분이 적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徐廷柱의 전기는 출판되자마자 판매금지되었는데, 프란체스카는 올리버에게 보낸 1950년 4월3일자 편지에서 이 책은 李承晩의 어릴 때에 관한 내용이 뒤죽박죽이고 우스꽝스럽게 서술된 것이 있었다고 비판하고 있다.3) 그러므로 徐廷柱의 서술을 뼈대로 하되 관련 인사들의 회고담 등에 의거하여 李承晩의 書堂시절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李承晩은 처음에 駱洞(낙동)에 있는 퇴직대신 李建夏의 서당에 다녔다. 이 서당은 李建夏가 홀로 된 형수의 외아들 範喬(범교)를 가르치기 위하여 연 서당으로서 낙동과 桃洞 등 이웃 동네의 양반집 아이들 이삼십 명을 모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곳은 어린 承龍이 다니기에 너무 멀었으므로 李敬善 내외는 집을 염동에서 서당 근처인 낙동으로 옮겼다고 한다.4)
 
  承龍은 총명할 뿐만 아니라 훈장이 귀찮아할 정도로 파고드는 성미가 있어서 大文(고전의 본문)과 箋註(전주) 말고도 다른 아이들이 모르는 여러 가지를 빠르게 깨우쳤다.
 
  서당에는 書徒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이들의 학업의욕을 북돋우기 위하여 치르는 종합 경시였다. 한 書徒期가 새로 시작되면 훈장은 아이들을 左靑龍과 右白虎의 두 패로 갈라서 그들의 勤勉, 講讀, 筆書 등의 성적을 낱낱이 기록해 두고, 마지막 날에는 都講을 받았다. 도강이란 그 동안 배운 글 전부를 한꺼번에 외우고 또 해석하게 하는 것으로서 이 도강에 점수가 가장 많았다. 그런데 承龍은 도강에 번번이 장원을 하여 자기편이 이기게 했다. 그래서 공부를 못하는 범교와 아울러 별명을 얻었는데, 범교는 「凡甫(범보)」요 승룡은 「龍甫(용보)」였다.
 
 
  賈誼의 긴 上疏文도 외워
 
 
  이 무렵의 어느 날 敬善은 서당의 초대를 받아 아들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러갔다가 승룡이 「通鑑」 셋째권을 도강하여 장원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훈장에게 아들이 건성으로 외우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물었다. 훈장은 대답했다.
 
  『저 아이는 梁太傅(양태부) 賈誼(가의)가 상소한 것뿐만 아니라 賈誼의 집안 내력까지 다 알고 있어요. 궁금하시면 물어보시지요』5)
 
  「通鑑」이란 원래 司馬光의 「資治通鑑」을 말하는 것이다. 다만 조선시대에 서당에서 「千字文」과 「童蒙先習」을 뗀 다음에 교재로 가르쳤던 「通鑑」이란 294권이나 되는 「資治通鑑」을 50권으로 요약한 江贄(강지)의 「通鑑節要」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賈誼는 漢나라 太宗 때의 사람으로서 20여 세에 博士로 천거되어 국기를 튼튼히 하는 제반 정책을 폈었는데, 梁의 태부로 있으면서 太宗에게 국정개혁을 강력히 촉구한 장문의 상소문은 특히 유명하다.6)
 
  李承晩이 이때의 기억을 徐廷柱에게 자세히 구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뒤에 일련의 改革運動을 전개할 때에도 賈誼의 상소문이 머릿속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徐廷柱는 敬善이 아들 承龍이 장원을 하는 것을 목격한 것이 「通鑑」 셋째권을 都講할 때였다고 적고 있으나 賈誼에 관한 내용은 「通鑑節要」의 일곱째 권에 기술되어 있다.
 
  내로라 하는 양반집 아이들 중에서 매번 도강에 장원을 할 만큼 뛰어났었다는 사실은 어린 承龍으로 하여금 집에서 부모들로부터 글을 배우고 글씨를 쓰면서 느꼈던 것보다 더욱 확고한 우월감과 자신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承龍이 서당 공부를 시작한 지 이태째 되는 1882년 6월에 壬午軍亂이 일어났다. 承龍은 서당에서 글을 읽고 앉았다가 발이 저려서 잠깐 일어나 벽에 기대어 섰는데, 꽝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온 서당이 크게 울리는 바람에 방바닥에 쓰러졌다. 아이들은 모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훈장은 『아아, 어디 마른 벼락이 내리쳤나보다』 하고 말했다. 그것은 마른 벼락이 아니라 난을 일으킨 군인들이 동대문 밖 화약고에 불을 질러서 그것이 폭발한 것이었다.
 
  軍亂이 터지자 서당은 찾아오는 어른들로 붐벼서 아이들은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승룡은 몇몇 아이들과 같이 서당에서 나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을 쫓아다녔다. 水下洞 어느 민씨집에는 군인들이 몰려가서 집안 살림살이를 모조리 때려부수고 있었는데, 곳간 문을 열고 독을 깨뜨리자 그 속에서 돈이 쏟아져 나와 마당가에 산더미를 이루며 굴렀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그것을 주우려 하자 병정들이 고함을 쳐 그들을 물리쳤다.7)
 
  壬午軍亂은 밀린 給料紛爭을 계기로 해서 일어난 하급 舊式軍人들의 봉기였으나 그 결과는 東北아시아 정세와 조선왕조의 운명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임오군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조선에 출병한 淸國은 이 봉기를 이용하여 再집권한 興宣大院君을 天津으로 납치한 뒤에 군대를 도성 안에 주둔시키고 본격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했다. 대원군의 납치와 청군의 온갖 행패는 민중들의 反淸意識을 확산시켰다.
 
  다른 한편으로 日本은 조선 조정을 협박하다시피하여 濟物浦條約과 이른바 朝日修好條規續約을 체결하여 자국의 이익을 챙겼다. 조일수호조규 속약 1항은 仁川, 釜山, 元山의 부두를 기점으로 100리까지 일본인의 행보거리를 확정함으로써 일본상인의 서울 침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8) 또한 도성 안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여 국내 정치세력과 결탁함으로써 2년 뒤에는 甲申政變이라는 유혈의 쿠데타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일본은 뭐고 청국은 뭐야?』
 
 
  甲申政變은 金玉均, 朴泳孝 등 양반출신의 젊은 관료층을 중심으로 한 開化派勢力이 1884년 10월17일에 무력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근대적 개혁을 시도한 사건이다. 이들은 淸佛戰爭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청국과 일본의 외교적 대립관계를 이용하여 그 동안 廣州와 北靑에서 양성해 두었던 親軍營 군대 등 1050명의 조선군과 日本公使館 호위병 150명을 동원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 개화파의 권력구상은 14개조의 政綱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 핵심은 일본의 明治維新을 모방한 立憲君主制였다. 政綱은 門閥廢止와 人民平等權의 보장, 租稅制度의 개혁, 근대적인 警察制度의 확립과 軍隊의 創設 등을 표방했다. 그러나 토지개혁 없는 地租法(지조법) 개혁조항은 그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때의 개화파의 쿠데타는 淸國 軍隊의 무력 진압으로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9) 당시 서울에는 1500명의 淸國軍이 주둔하고 있었다.
 
  갑신정변이 터지자 承龍의 식구들은 잠시나마 고대광실에서 살게 되었다. 그 집은 바로 承龍이 다니는 서당을 연 李建夏의 집이었다. 政變 통에 李建夏 일족이 충청도 아산으로 피난을 가게 되어 그 빈 집을 承龍의 식구들이 지켜 주기로 한 것이었다.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敬善은 이때에도 집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承龍은 이때에 範喬네는 왜 피난을 가야 하고 자기네는 왜 피난을 가지 않아도 되느냐는 의문이 생기면서 範喬네와 자기네는 처지가 다르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10)
 
  서당은 문을 닫고 있었다. 承龍은 아침밥을 먹고 나서는 어머니 몰래 집을 나와서 소란한 난리 속의 길거리를 혼자서 구경하고 다녔다. 진고개 뒤 綠川亭 쪽에서는 일본사람들이 사는 집마다 불에 타고 있었는데, 튀어오르는 기왓장의 불꽃이 굉장했다. 청국 병정들은 길거리에 몰려다니고, 군중들은 군중들끼리 몰려가 일본 사람집에서 된장통이며 비누통 같은 것을 꺼내고 있었다. 병정들은 그것들을 낱낱이 청룡도로 쳐부수어 보고야 돌려보냈다.
 
  사람들은 구석구석에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開化黨의 혐의만 받으면 죽인다느니, 말만 더듬어도 창으로 찔러 죽인다느니, 왜놈이 통나뭇단을 안고 숨어 있다가 맞아 죽어서 통나무 귀신이 되었다느니, 별의별 소리가 나돌았다. 어떤 사람은 자기 눈으로 왜년 죽이는 것을 보고 왔다면서 손짓 몸짓으로 시늉을 하기도 했다.
 
  承龍은 한낮이 훨씬 기운 뒤에야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가 어디를 갔다 왔느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밖에 나가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더냐고 나무라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밥상을 차려 주어도 먹지 않고 방 아랫목에 가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밤이 되어 저녁을 드는 둥 마는둥하고 자리를 펴고 불을 껐을 때에 承龍은 비로소 입을 열어, 『일본은 뭐고 청국은 뭐야?』 하고 물었다. 承龍은 어머니의 설명을 건성으로 들으면서 오랫동안 이리저리 뒤척거리고 있었다.11)
 
  李承晩은 그의 자서전 초고에서, 이때의 일과 관련하여 그저 「나는 中國사람들이 한국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고, 또 日本사람들이 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內亂을 보았고 戰爭을 보았다. 나는 여러 차례의 전투를 구경했었다」라고 간단히 메모만 하고 있다.
 
  열 살의 조숙한 소년에게 외국인들과도 관련된 政變의 모습은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때에 느꼈다고 하는 일본은 무엇이고 청국은 무엇이냐는 물음은 일생을 두고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과제가 되었다. 範喬네와 자기네는 처지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중요한 각성이었다. 그리고 갑신정변의 주동자의 한 사람인 徐載弼이 李承晩의 스승이 되어 그를 개혁운동에 앞장서게 만드는 것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다.
 
 
  李根秀 判書의 私塾에 다니며
 
 
  政變이 끝나고 아산으로 피난갔던 李建夏의 가족들이 돌아오자 承龍의 가족은 남산 서남쪽 언덕의 桃洞으로 이사했다. 거기에는 至德祠가 있는 곳으로서 먼 친척들이 몰려 살고 있었다.
 
  敬善은 아들을 근처에 있는 李根秀 判書의 집 서당에 보냈다. 이 서당은 李根秀가 아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연 私塾이었다. 이근수는 讓寧大君의 奉祀孫으로서 承龍에게는 항렬로 치면 조카뻘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承龍은 이 서당에서 과거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傳統的인 書堂교육을 받으며 科擧공부에 열중했다. 이 시기가 李承晩의 성장기에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李承晩이 자신의 아호를 雩南(우남)이라고 지은 것도 이 雩守峴(우수재) 남쪽 도동 시절을 기려서 지은 것이었다.
 
  李承晩은 1956년에 李根秀와 그 부인 안동 權씨의 합장묘에 자신이 비문을 짓고 또 그것을 친필로 써서 묘비를 세우게 했는데, 이 비문은 李承晩이 자신의 서당시절에 대해 직접 적은 유일한 것이다. 원문은 한문으로 되어 있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 집이 南大門 밖 桃渚洞(도저동)의 關王廟 동쪽 담 곁에 있었다. 여러 해 동안 이 지역에 있는 지덕사 앞의 古家私塾에서 수학하였다. 지덕사는 讓寧大君의 묘호이다.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古宅이 그 앞에 있었고, 종손 根秀 판서공이 그 집에 살았다.
 
  판서공은 아들 丙胄군의 학업을 위하여 수원에 사는 일가 어른 可人 李承卨 선생을 교수로 모셔왔고, 북향한 긴 행랑을 강당으로 사용했다. 봄 여름에는 唐, 宋의 詩文을 읽고 詩와 賦(부)의 科文을 지었고, 가을 겨울에는 經과 史와 古文 등을 일과로 삼았다. 당시에 함께 배우는 사람은 늘 예닐곱 명이 있어서 날마다 머리를 맞대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 떼의 물고기와 같았다.
 
  이때에 나의 아버지는 사방을 유람하였고 우리 모자는 여종과 함께 세 식구가 한방에 거처하면서 가난한 처지에서도 편안하게 학업을 즐겼다. 부모님은 내가 학업에 전력하도록 늘 大君의 宗家에 가 있게 하여 판서공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貞敬夫人 權氏께서 특히 愛好와 撫育(무육)을 더하여 때로는 자기 먹을 것을 나에게 먹게 하며 친아들과 같이 돌보아 주셨다. 정경부인의 恩德은 참으로 잊을 수 없다. 타고난 성품이 겸손하고 온화하고 정숙하며, 행동거지가 禮法에 어긋남이 없고 말소리가 문 밖에서 들리지 않아 사람들이 다 감복하였다. 게다가 우리 어머니와는 정의가 동기 간이나 다름없었다.
 
  그 뒤로 나는 海外에 있을 때에도 이따금 그때의 일에 생각이 미치면 뜨거운 눈물이 옷깃을 적시곤 하였다. 나는 甲午年 淸日戰爭 이후부터 詩, 書의 옛 학업을 버리고 英語와 新學問에 전심하여 비로소 世界大勢에 눈을 뜨게 되었다. 뒤에 감옥살이의 화를 입었고, 이어 美洲를 떠돌며 갖은 고초를 다 겪다가 마침내 乙酉年에 光復이 되어 美洲로부터 귀국하였다. 먼저 桃渚洞 옛집을 찾으니 桑田碧海로 변천되어 세월도 바뀌고 사람도 떠나고 祠廟와 古宅도 어디로 가버렸다. 여러 동창 친구들 중에서 오직 丙胄와 德載와 나 세 사람만이 남아 지난 일을 추억함에 感古의 회포를 금할 길 없다. 그래서 詩 한 수를 읊었다.
 
  桃園故舊散如煙
 
  복사골 옛 벗들 연기처럼 흩어졌네
 
  奔走風塵五十年
 
  분주했던 풍진 50년
 
  白髮歸來桑海變
 
  백발로 돌아오니 산과 물 변했구나
 
  東風揮淚古祠前
 
  옛 사당 앞에서 동풍에 눈물짓는다
 
  아! 부모님 선영은 북녘에 있어서 아직도 성묘드릴 길이 없다. 다만 정경부인 묘소가 근교에 있기에 한 조각 돌로써 옛일을 추억하고 은혜를 느끼는 뜻을 표하고자 丙胄군과 협의하여 몇 줄 적어 비를 세워 기념하는 바이다.
 
  丙申年 宗末 承晩 삼가 지음>12)
 
  宗末이란 글자 그대로 일가의 제일 말단이란 뜻이다.
 
  이 글은 어려서 입은 은혜와 정의를 기념하고 싶은 뜻에서 지은 비문이기는 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비문에는 일정한 격식이 있고 내용은 고인의 행적을 칭송하는 것인데 비추어, 李承晩의 이 비문은 「비문」으로서는 너무나 파격이 아닐 수 없다. 貞敬夫人 權씨와 자기 어머니 金씨부인의 정의가 동기 간이나 다름없었다는 말은 金씨 부인이 판서집 일을 거들어 주기 위해 그 집을 드나들면서 權씨 부인과 자별하게 지낸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또한 일찍이 「독립정신」을 한글로 저술하고, 대통령이 되어서도 한글에 대하여 각별한 애착을 가지고 한글전용을 법제화하고 맞춤법 간소화에 대해서 자기 주장을 구체적으로 개진하기까지 했던 李承晩이 왜 비문은 한문으로 지었는지 알 수 없다. 평소에 漢詩를 즐겨 짓고 글자 한 자 한 자에 세심한 신경을 썼던 그였으므로13) 이 비문을 작성하는 데에도 많은 정성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고 나서 서당에서 같이 공부했던 李根秀 판서의 아들 丙胄를 초대 舊皇室財産管理委員長으로 임명한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훈장 李承卨은 육순이 넘은 노인이었다. 그는 늙도록 한 번도 벼슬길에 올라 보지는 못했으나 學識도 풍부하고 성품도 너그러워서 훈장으로서는 적격이었다. 興宣大院君도 李承卨을 초빙하여 뒤에 高宗이 된 둘째아들 載晃(재황)을 가르쳤다는 말도 있다.14)
 
 
  청지기한테서 나비 그림과 소리 배워
 
 
  承龍은 根秀 판서의 아들 曰壽(왈수:丙胄의 아명)와 또 그 친척되는 아이 乙龍 등과 함께 위에서 본 비문의 내용과 같은 글공부를 했다. 서당공부는 科擧 준비가 주된 목적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承龍은 서당의 글공부 말고도 색다른 관심과 재능을 나타내었다. 그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혼자서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글을 읽다가 쉬는 시간에도 다른 아이들과 함께 밖에 나가 놀지 않고 구부리고 앉아서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나비며 꽃이며 또 더러는 훈장의 얼굴 같은 것도 그렸다. 그가 가장 많이 그리는 것은 나비였다. 그것도 나는 나비, 앉은 나비, 호랑나비, 흰나비 등 모양과 종류가 가지가지였다.
 
  훈장은 그림 그리는 것을 그만두라고 몇 차례 일렀으나 承龍은 듣지 않았다. 敬善이 서당에 들렀던 길에 아들의 이 괴벽을 훈장에게서 듣고 꾸짖었으나 역시 듣지 않았다. 훈장은 여가의 심심풀이로는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아 나중에는 내버려두었다. 이처럼 承龍은 어려서부터 고집이 세었다.
 
  어느 날 밤 글공부가 끝난 뒤에 承龍은 낮에 그리다 둔 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었다. 주인집에서 내어온 무를 숟갈로 바닥이 나도록 긁어먹고 있던 훈장은 그 껍데기를 내밀며 『옜다, 이거 承龍이 먹어라』 하고 주어 보았다. 承龍은 덤덤한 표정으로 일어서서 그것을 받아 가지고는 자리에 앉아 한 손에 그것을 쥔 채 다시 그리던 그림을 계속했다. 그토록 열중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承龍은 어느 날 그렇게 몰입했던 그림 그리기를 갑자기 그만두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이들이 자기를 『李나비! 李나비!』 하고 부르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承龍은 이집 청지기 崔應源에게서 그림을 배워 왔었는데, 그 최응원의 별명이 「최나비」였던 것이다.15)
 
  청지기와 같은 별명으로 불리는 것이 싫어서 좋아하던 그림그리기를 그만 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몰락한 양반집 소년 承龍에게도 그만큼 신분에 대한 차별의식이 뚜렷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人間 李承晩 百年④」은 徐廷柱의 증언이라면서 承龍이 서당시절에 「南나비」로 통칭되던 나비 화가 南啓宇(남계우)에게서 나비 그림을 배웠다고 적고 있으나,16)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이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李承晩은 평소에 五園 張承業의 그림을 좋아했다고 한다.17)
 
  열두 살 나던 해 봄까지 承龍은 「通鑑」 열다섯 권을 완전히 익혔다. 이어 「論語」로부터 시작하여 「孟子」, 「大學」, 「中庸」의 四書를 배우는 한편 글씨 공부도 열심히 했다. 承龍이 하루빨리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로 출세하는 것만이 선조들에 대한 도리라고 믿는 敬善 내외는 아들의 과거공부를 더욱 독려했다.
 
  그러나 재주 있고 호기심 많고 한번 집착하면 밤낮을 가리지 않는 성품의 소년 承龍에게는 공부만이 모두가 아니었다. 물론 학과에도 게으르지는 않았고, 글씨와 詩 짓기는 언제나 서당 아이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었다. 독특한 필체의 李承晩의 글씨는 대단한 명필로 꼽히는데, 그는 평소에 秋史 金正喜의 글씨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18) 뒷날 李承晩은 미국에 있을 때에도 붓글씨 연습을 부지런히 하여, 신문지나 못 쓰는 편지 겉봉에까지 붓글씨 연습을 한 것이 지금도 이화장에 보관되어 있다.
 
  같이 공부하던 申肯雨 형제들이 「三國志」를 읽어보라고 주자 承龍은 보름 동안 학과 시간 말고는 그 책을 읽는 데 몰두했다. 그는 이어서 「水滸誌」, 「剪燈新話」 등의 소설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어떤 책은 부모와 훈장의 눈을 피해 청지기 방에 가서 몰래 읽기도 했다.
 
  청지기 방에 가서 읽은 책은 「西廂記(서상기)」였다. 「西廂記」는 元나라 王實甫(왕실보)가 쓴 희곡으로서 나그네 선비 張君瑞(장군서)와 재상의 遺兒(유아) 崔鶯鶯(최앵앵)의 사랑을 그린 걸작이다. 「춘향전」도 이 「西廂記」의 典故(전고)를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선조 이후의 문인으로서 부모 몰래 「西廂記」를 읽지 않은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西廂記」를 다 읽고 나자 承龍은 그림 선생이기도 했던 청지기 崔應源으로부터 소리를 배웠다. 「西廂記」의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난 承龍은 옆에서 嶺南調의 歌詞(가사)를 읊조리고 있는 청지기의 노랫소리에 한참 동안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戎馬(융마)는 關山北(관산북)이오…』 하는 杜律의 1절이 오자 『나 그것 좀 가르쳐 줘』하고 졸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소년은 바로 종이를 가져다가 그 가사들을 청지기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기 시작하여 며칠 뒤에는 그것에 표지를 두텁게 해가지고 날마다 밤만 되면 이 청지기 방에 와서 어린 목청을 뽑고 있었다는 것이다.19)
 
  봄에 풀꽃이 자랄 때쯤이면 承龍은 또 그 풀꽃들을 뿌리째 옮겨다가 서당 앞 마당가에 심어 두고 그것을 가꾸는 데 정성을 쏟았다. 꽃이 피고 거기에 나비와 벌이 날아와 앉을 무렵까지는 날마다 흙을 파다가 풀꽃뿌리를 북돋우고 물을 주었다. 할 일이 없는 때에는 그냥 그 앞에 가서 꽃잎사귀들을 손가락 끝으로 스치며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쪼그리고 앉아서 골똘히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리하여 훈장으로부터 『꽃귀신한테 반한 녀석 같으니라구!』 하는 말을 듣기도 했다.20)
 
  훈장 李承卨은 承龍을 무척 귀여워했고 承龍도 훈장에게 짓궂은 장난을 할 만큼 스스럼이 없었다고 한다. 같은 「承」자 항렬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더 친근감을 느꼈었는지 모른다. 훈장은 바둑을 좋아하여 손님만 오면 사랑방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그럴 때면 承龍은 어깨너머로 바둑을 구경했다. 어느 날 承龍은 바둑에 열중해 있는 훈장의 바둑통을 치우고 그 자리에 타구를 갖다 놓았다. 훈장은 그런 줄도 모르고 바둑알을 집으려고 손을 뻗쳤다가 낭패를 보았다.21)
 
  대통령 재임 때의 李承晩의 바둑 실력은 7급 정도였다고 趙南哲 8단은 평가했다. 李承晩은 서당 시절 말고 일생 동안 바둑을 배웠을 만한 기회가 별로 없었으므로 만일에 서당에서 배운 것만으로 7급 정도의 바둑 실력을 갖게 되었다면 그것은 承龍의 호기심과 재주와 열성의 또 하나의 증거가 될 만하다.
 
 
 
  (2) 兩班되기 위해 아버지 졸라 집에 書堂차려
 
 
  金九의 서당 공부는 李承晩의 경우보다 훨씬 눈물겨운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昌巖은 열두 살이 될 때까지 모두가 농군인 金씨 집성취락에서 농삿일도 거들지 않고 자랐다고 하는데, 이는 좀 특이한 일이다. 이무렵 아버지 淳永은 都尊位로 있었으므로 그럭저럭 생활을 꾸려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까지 昌巖은 國文을 익혀 이야기책 정도는 읽을 줄 알았고, 漢文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千字文」을 배우고 있었다.
 
  昌巖이 열두 살이 되어 글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어느 날 집안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몇 해 전에 집안에 새로 혼사를 치른 집이 있었는데, 그 집 할아버지가 새 사돈을 보려고 서울 갔던 길에 사다 둔 총대우(말총으로 짜서 옻칠을 한 갓)를 밤중에 쓰고 나갔다가 이웃 동네 양반들에게 들켜 갓을 산산이 찢겼고, 그때 이후로 金씨네는 다시는 갓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昌巖은 정색을 하고 어른들에게 물었다.
 
  『그 사람들은 어찌해서 양반이 되었고, 우리 집안은 어찌해서 상놈이 되었습니까?』
 
  『砧山(침산) 강씨의 선조는 우리만 못하지만 현재 進士가 세 사람이나 있지 않느냐. 鼈潭(별담) 이진사 집도 그렇다』
 
  『진사는 어떻게 해서 되는가요?』
 
  『進士 及第는 학문을 연마해서 큰 선비가 되면 과거를 보아서 되는 것이니라』
 
  이 말을 들은 昌巖은 글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하고 아버지 淳永에게 서당에 보내달라고 졸랐다. 淳永은 아들이 기특하고 애처로웠으나 언뜻 결심을 하지 못했다. 텃골에는 서당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네에 서당이 없고, 다른 동네 양반 서당에서는 상놈을 잘 받지도 않거니와 받아 주더라도 양반집 아이들이 멸시할 터이니, 그 꼴은 못 보겠다』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늦게 외아들을 보아 자식사랑이 각별했던 淳永은 마침내 집안 아이들과 인근 친구의 아이들 몇 명을 모아 자기 집에 서당을 열었다. 受講料로는 쌀과 보리를 가을에 거둬서 주기로 하고 이웃 淸水里의 李生員을 훈장으로 모셔왔다. 李생원은 신분은 兩班이나 글이 짧아 양반들 서당에서는 고빙하는 사람이 없어서 결국 昌巖과 같은 아이들의 훈장이 된 것이었다. 훈장을 맞이하던 날의 가슴 설레던 감회를 金九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선생님 오시는 날, 나는 너무 좋아서 머리 빗고 새옷 입고 마중을 나갔다. 저 앞에 오십여 세나 되었음직한 키 큰 老人 한 분이 오신다. 아버님이 먼저 인사를 하고 나서 『昌巖아 선생님께 절하여라』 하시는 말씀대로 절을 공손히 하고 나서 그 선생을 보니 마치 神人이라고 할지 上帝(하나님)라고 할지 어찌나 거룩해 보이는지 感想을 다 말할 수 없더라>22)
 
  이렇게 하여 가난한 淳永의 집 사랑이 공부방이 되었고, 훈장의 식사도 淳永의 집에서 대접했다.
 
  개학하던 첫날 昌巖은 「馬上逢寒食」 다섯 글자를 배웠다. 소년은 뜻은 알든 모르든 관계없이 너무나 기뻐서 밤에 어머니의 밀 메갈이를 도우면서 외우고 또 외웠다. 그는 새벽 일찍 일어나서 누구보다도 먼저 훈장 방에 가서 글을 배우고 도시락 망태기를 메고 멀리서 오는 아이들에게 그 배운 것을 가르쳐 주었다.
 
  「馬上逢寒食」이란 唐代의 시인 宋之問의 「途中逢寒食(길에서 한식을 맞다)」이라는 유명한 詩의 첫 구절인데, 이 詩는 朝鮮時代에 서당에서 唐詩를 가르칠 때에 맨 먼저 가르치던 것이다.
 
  淳永의 집에서 석 달을 지낸 뒤에 書堂은 인근 山洞의 申존위 사랑으로 옮겨 갔다. 淳永은 가난한 형편에 너무나 부담이 되어 申존위에게 서당을 넘겼던 것으로 추측된다. 昌巖은 도시락 망태기를 메고 산고개를 넘어 서당에 다녀야 했는데, 가며 오며 昌巖의 입에서는 글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昌巖보다 學習 정도가 앞선 아이들도 없지는 않았으나 배운 것을 외우는 데에는 언제나 昌巖이 가장 뛰어났다. 그만큼 그는 열심이었다.
 
 
  쫓겨가는 訓長과 눈물로 이별
 
 
  그러나 반년이 지나지 않아 昌巖의 서당공부는 중단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申존위와 훈장 사이에 반목이 생겨서 결국 훈장을 내 보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훈장이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는 것이었으나, 사실은 申존위가 아둔한 자기 아들보다 昌巖의 실력이 훨씬 앞서는 것을 시기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일이 있기 전에 매달 보는 都講을 앞두고 훈장은 昌巖에게 구차한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昌巖이 늘 우등을 했으니까 이번에는 글을 일부러 못 외우는 것처럼 하고 훈장이 물어도 모른다고 대답하라는 것이었다. 昌巖은 훈장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申존위의 아들이 장원을 했다고 하여 닭을 잡고 술상을 차려 내어오기까지 했었다. 그랬는데도 결국은 그 훈장을 申존위가 해고하고 만 것이었다. 이 일을 회상하면서 金九가 『이것은 참으로 소위 상놈의 행실이다』23)라고 적고 있는 것도 그의 양반 콤플렉스를 보여 주는 한 보기라고 할 것이다.
 
  훈장은 어느 날 아침 일찍 昌巖이 아침도 먹기 전에 그의 집에 와서 작별인사를 했다. 소년은 정신이 아득하여 훈장의 품에 매달리면서 큰 소리로 울었다. 훈장도 눈물이 비오듯 했다. 훈장과 작별하고 나서도 소년은 밥도 먹지 않고 울기만 했다.
 
  이러한 昌巖의 태도가 혈기 넘치는 淳永의 가슴을 얼마나 쓰라리게 했을 것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얼마 뒤에 淳永은 李생원과 같은 돌림 선생을 모셔다가 아들의 공부를 계속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淳永은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져서 몸을 전혀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昌巖의 공부는 다시 중단되고 말았다.
 
  워낙 가난한 살림이었으므로 醫員과 藥을 대느라고 가산은 이내 탕진되었다. 淳永은 네댓 달 뒤에 반신불수로 다소 호전되었다. 입이 비뚤어져 발음이 분명하지 못하고 한쪽 팔과 다리는 여전히 쓰지 못했으나 반쪽이라도 쓸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돈이 없어서 고명한 醫員을 불러오지 못하자 마침내 淳永 내외는 비장한 결심을 했다. 無錢旅行으로 문전걸식을 하면서 고명한 의원을 찾아 치료를 받아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집과 솥까지 다 팔아 버리고 昌巖은 큰집에 맡기고 길을 떠났다.
 
  昌巖은 사촌들과 같이 송아지 고삐를 끌고 산허리와 밭두렁에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사촌들은 농가에서 농삿일을 하고 자라면서 서당에 다닐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昌巖에게 공부를 시키려고 애쓴 淳永의 자식 생각은 특기할 만하다. 뒷날 金九는 『나는 시골에서 나고 자랐으나 農軍들의 「김매는 소리」 나 「목동 갈까보다 소리」 한 마디 불러 본 적이 없었고, 기껏 한다고 해야 詩나 風月을 읊은 것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있는데,24) 이는 그가 어릴 때에 농삿일을 전혀 하지 않고 자랐음을 말해 준다.
 
  昌巖은 공부를 하지 못해 서러운 데다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리워서 견딜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부모를 따라 나서서 信川으로, 安岳으로, 長連으로 같이 떠돌아 다녔다. 長連에 머물 때에 昌巖의 할아버지 大喪이 다가왔다. 淳永 내외는 昌巖을 長連 재종조의 누이되는 친척집에 떼어 두고 텃골로 돌아갔다. 그 친척집도 물론 농사를 지었다. 昌巖은 그 집 주인이 九月山에 나무를 하러 갈 때면 같이 가야 했다. 어린 昌巖이 나뭇짐을 지고 다니면 마치 나뭇짐이 걸어가는 것 같았다고 한다.
 
  나무하러 가는 일은 昌巖에게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고통은 그 동네 큰 書堂에서 밤낮으로 책읽는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昌巖은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淳永 내외가 長連으로 다시 오자 昌巖은 텃골로 돌아가 공부를 하겠다고 졸랐다. 淳永의 병세는 호전되어 한쪽 팔과 다리도 조금 자유스러워지고 기력도 회복되어 갔다. 그리하여 淳永은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하는 아들의 열성에 못 이겨 다시 텃골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들 공부 위해 길쌈품 파는 어머니
 
 
  淳永의 식구들은 텃골로 돌아오기는 했으나 衣食住를 스스로 마련하기가 어려웠다. 친척들이 조금씩 추렴하여 겨우 살 곳을 장만해 주었다. 그리고 昌巖도 다시 서당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서당공부는 여간 고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책은 빌려서 읽었고, 먹과 붓값은 곽씨 부인이 김품과 길쌈품을 팔아서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이미 열다섯 살이 된 昌巖의 안목으로 볼 때에 만나는 훈장들이 모두 고루해서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들은 대개 양반집 아이들은 가르치지도 못하고 상놈집 아이들을 상대로 천자문 정도를 가르치는 사람들이었다. 昌巖은 어느 훈장은 벼 열 섬짜리, 어느 훈장은 다섯 섬짜리 하고 수강료의 다소로 훈장들의 학력을 평가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훈장들의 마음 씀이나 일처리가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없어 보였다. 昌巖의 서당공부가 뜻대로 진척되지 않자 淳永은 아들에게 말했다.
 
  『밥 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고, 너도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時行文(실용문서)에나 주력하려무나』
 
  淳永다운 권고였다. 昌巖은 아버지의 권고에 따랐다. 그리하여 土地文券, 呈訴狀(정소장), 祭祝文, 婚書文, 書翰文 등을 틈틈이 연습하여 무식한 金씨 문중에서는 상당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문중 사람들은 昌巖이 앞으로 존위 하나는 할 자격이 있다고들 촉망했다. 昌巖은 자신의 한문실력이 겨우 몇 글자 엮어 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으나 뜻은 존위 따위에 있지 않았다.
 
  「通鑑」이나 「史略」을 읽으면서 『王侯將相(왕후장상)의 씨앗이 어찌 따로 있으리오!』라는 陳勝(진승)의 말이라든가, 칼을 뽑아 뱀을 베었다는 劉邦(유방)의 행동, 빨래하는 부인에게 밥을 얻어먹었다는 韓信(한신)의 사적 등을 읽을 때에는 昌巖은 자신도 모르게 두 어깨가 들썩거려졌다.25)
 
  陳勝의 말이란 陳(진)나라 사람 陳勝이 吳廣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을 때에 무리를 선동하면서 했던 유명한 말로서,26) 고려시대에 崔忠獻의 노비로서 봉기한 萬積도 이 문구를 인용했을 정도로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권력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때에 곧잘 인용되던 말이다.
 
  昌巖은 어떻게 해서든지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이런 아들을 보고 淳永은 이름있는 훈장을 찾아가 배우게 하지 못하는 것이 괴로웠다. 그는 아들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하려고 백방으로 마땅한 훈장을 찾아 보았다. 그런데 텃골에서 동북으로 십리되는 鶴鳴洞에 鄭文哉(정문재)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昌巖의 큰어머니와 재종 남매 간이었는데, 상민이면서도 지방에서 꽤 알려진 선비였다. 그 정씨 집에는 여기저기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어 詩와 賦를 짓고, 한쪽에는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淳永이 정씨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昌巖은 수강료 없이 免費學童으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昌巖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매일 도시락 망태기를 메고 험한 고개와 깊은 계곡을 쏜살같이 넘나들어 서당에서 기숙하는 아이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도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科文을 짓기 위한 공부의 초보인 大古風 十八句27)를 익혔고, 漢唐詩와 「大學」 「通鑑」을 배웠으며, 글씨 연습은 종이를 살 돈이 없어서 粉板(분판: 분을 기름에 개어서 널조각에 발라 결인 것)에다 했다. 뒷날 金九도 李承晩과 마찬가지로 글씨를 많이 썼는데, 떨리는 듯하면서도 기운찬 그의 독특한 필체는 義氣나 憂國의 내용과 함께 높이 評價된다.
 
  昌巖의 서당 공부는 이처럼 궁색하고 불안정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에 좌절하지 않고 계속된 어린 시절의 형설의 향학열은 金九로 하여금 일생을 통하여 교육에 특별한 열의를 갖게 하는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3) 13세에 나이 올려 科擧에 응시
 
 
  承龍은 열세 살 되던 해에 과거에 응시했다.28) 이때에 承龍이라는 兒名을 버리고 承晩으로 이름을 고치고 雩南이라는 아호도 지었다. 과거는 열다섯 살부터 볼 자격이 있는 것이었으나, 高宗 24년(1887)의 과거는 王世子嬪의 冠禮(成人式)에 따른 慶科 庭試였으므로 王世子와 동갑인 열네 살까지 응시할 수 있게 했었는데, 承龍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한 살을 올려서 응시한 것이었다. 敬善은 그만큼 아들이 立身出世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고, 또 아들의 실력을 어지간히 믿었던 것 같다. 承晩은 儒生의 衣冠을 갖추고 과거장인 景武臺로 갔다. 경무대는 景福宮의 북문인 神武門 밖의 후원에 해당하는 지대이다.
 
  과거장에는 청운의 뜻을 품은 젊은 유생들뿐만 아니라 늙은 선비들까지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이때의 庭試에 응시한 사람이 무려 15만8578명이나 되었다는 사실29)은 왕조 말기의 정치적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과거가 얼마나 흠망의 대상이 되고 있었는지를 말해 준다.
 
  徐廷柱는 이때의 과거장의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처음으로 치르는 과거의 인상이 李承晩에게 그만큼 뚜렷이 남아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일 것이다. 응시자들은 이삼십 명씩 그들이 나온 地方이나 書堂 또는 門閥의 이름을 적어 장대 끝에 매어단 사각형의 유지등 밑이나 유지 우산 밑에 모여 궁궐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이러한 한 무리를 「接」이라고 했는데, 接마다 응시자뿐만 아니라 책과 紙筆墨을 들고 따라온 하인들까지 섞여서 큰 혼잡을 이루었다. 또 구석구석에는 장국밥과 설렁탕 장수들이 차일을 치고 있었다.
 
  원래 科擧場에는 응시자 이외의 사람의 접근을 엄금하고, 만일에 함부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붙잡아 水軍으로 삼았었다. 그러던 것이 壬辰倭亂 이후로 시험장의 단속이 소홀해지자 권세 있는 양반자제들은 서책을 든 사람이나 시험지를 베끼는 사람 등의 隨從人을 데리고 들어가기가 예사였다. 그리하여 朝鮮後期의 각종 과거장에서는 이들 수종인들 때문에 큰 혼잡을 이루어 밟혀 죽거나 다치는 등의 사고가 잇따랐다.
 
  드디어 神武門이 열렸다.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몰려가 다시 勤政殿으로 통하는 안문 앞에 섰다. 포졸들은 눈을 번쩍거리며 감시를 하고 있었다.
 
  『대궐 안에서 그렇게 높은 나막신을 신으면 되오?』 하고 한 포졸이 굽 높은 나막신을 신은 承晩을 보고 힐난하듯 말했다.
 
  사람들이 勤政殿으로 가는 안문 앞에서 꽤 오랫동안 기다린 뒤에야 멀리서부터 『고개 숙여라!』하고 소리치는 大殿別監과 武藝別監을 앞세우고 임금의 玉轎가 나타났다. 그 뒤로 王世子의 가마가 따랐다.
 
  임금과 王世子가 근정전에 올라 좌정하고 懸題板(현제판)에 제목을 건 다음에야 응시자들은 근정전 앞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거기에 들어가서도 儒生들은 별감의 호령으로 고개를 숙인 채 현제판의 글 제목을 재빨리 베껴야 했다. 유생들은 저마다 글제를 베껴 가지고 나와서는 정성을 다하여 답안지를 작성했다. 머리가 허연 시골 노인들이 진땀을 흘리고 있는 광경은 옆에서 보기에도 불쌍하여 못 견딜 지경이었다.
 
 
  15만 8578명 응시에 5명 及第
 
 
  불쌍하기는 承晩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낙방했다. 애당초 급제를 기대한 것이 무리였다. 이날의 庭試에서 급제한 사람은 南光熙 등 다섯 사람밖에 되지 않았다.30) 承晩이 과거를 볼 무렵에 와서는 과거제도는 타락할 대로 타락해 있었다. 과거장에 산더미처럼 쌓인 답안지는 제대로 채점도 되지 않았다. 15만8000여 명의 응시자들의 답안지를 그날로 채점해서 다섯 사람을 급제시켰다는 것은 과거제도가 얼마나 形骸化해 있었는지를 말해 준다. 급제자가 미리 정해져 있기도 하고 시험관들에게 바치는 금품에 따라 급제가 결정되기도 하는 그런 형편이었다.
 
  이 무렵의 科擧制度의 가장 큰 폐단은 이른바 借述(차술)이었다. 借述이란 과거장에서 다른 사람의 製述을 비는 것을 말한다. 차술은 다른 사람을 위해 답안지를 제술해 주는 이른바 代述과 함께 원래는 가장 엄하게 금해서 이를 어기는 자는 杖 100에 徒(도: 징역) 3년의 형을 부과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朝鮮朝 後期에 이르러 단속이 허술해지자 권세 있는 양반집 자제들이 글 잘하는 사람 네댓명을 科擧場에 데리고 들어가 각각 제술하게 하여 잘 된 것을 골라 제출하기도 하고, 글 잘하는 사람이 과거장 밖에서 제술하여 과거장의 胥吏나 軍卒의 손을 빌어 응시자에게 전달하기도 하며, 심지어 응시자가 과거장을 빠져나와 집에 가서 제술해 오는 경우도 있게 되었다.31)
 
  그런데 李承晩도 자신은 낙방하면서 몇몇 권세 있는 양반집 자제의 日次儒生 시험 때에 대신 제술을 해주어 그들이 진사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32) 자존심 강한 李承晩이 자기는 낙방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 代述을 해준 것이 사실이라면 거기에는 피하기 어려운 어떤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법을 거리낌없이 자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 무렵의 과거장에서는 그만큼 차술과 대술이 예삿일이 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뒤에서 보듯이 金九도 과거장에서 차술을 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成三文 같은 忠臣 되는 것이 소원
 
 
  과거제도가 이처럼 타락하여 실력만으로는 급제의 희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承晩은 과거시험이 있을 때마다 응시했다고 한다. 아마도 敬善 내외의 간절한 기대와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承晩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응시하게 했을 것이다. 1948년 5월에 制憲國會 議長이 된 李承晩이 상도동의 至德祠를 찾아가는 길에 노량진의 死六臣墓 앞을 지날 때에 동행한 李維善에게 『나는 과거보러 다닐 적에 급제하면 成三文 같은 충신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지』하고 술회했고, 1955년에는 死六臣의 墓碑를 세우게 했는데,33) 李承晩이 서당시절에 지조의 선비 成三文을 숭앙했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朝鮮朝의 과거는 式年試와 각종 別試로 구분되어 있었다. 式年이란 子, 卯, 午, 酉年을 말하는 것으로서 3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게 되어 있는데, 식년시에서는 33명씩 급제시켰다. 각종 別試는 거의 해마다 시행되었다.34) 承晩이 처음 응시한 1887년부터 과거제도가 폐지되는 1894년까지는 25회에 이르는 각종 과거시험이 시행되었다. 이 가운데에서 2차 시험에 해당하는 殿試나 권력층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謁聖試(알성시)와 日次儒生 應製試(응제시) 등을 제외하고 李承晩이 응시할 수 있었던 과거는 11회쯤 시행되었다.35)
 
  과거의 일정은 길게 마련이었다. 밤까지 계속되어 엿장수와 장국밥 장수들이 한몫 톡톡히 보고 끝날 무렵이면 흔히 四大門이 굳게 잠긴 뒤였다. 그렇게 되면 사대문 밖에 사는 응시자들은 모두 성벽을 넘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과거장에서 주는 표를 보이면 성벽을 넘는 것이 허용되기는 했으나 캄캄한 밤에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景福宮 뒤에서부터 南大門까지 걸어와서 다시 성벽을 타고 넘어 桃洞골까지 돌아가기란 낙방한 承晩으로서는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4) 밥 해먹을 좁쌀 지고 科擧보러 海洲로
 
 
  金九는 열일곱 살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과거를 보았다. 鄭文哉에게서 글을 익힌 지 2년째 되는 때였다. 그리고 그것은 李承晩이 科擧를 처음 본 것보다 5년 뒤의 일이다. 壬辰年(1892년) 慶科를 해주에서 실시한다는 공포가 있자 鄭文哉는 그 사실을 淳永에게 알려 주면서 말했다.
 
  『이번 科擧에 昌巖이를 데리고 갔으면 좋겠는데, 글씨를 분판에 쓰는 것같이만 쓰면 제 답안지는 쓸 만하지만 종이에 연습하지 않으면 처음이라서 잘 못 쓸 것이네. 狀紙에 좀 쓰게 해 보았으면 좋겠는데, 老兄은 빈한한 터라 장지를 마련할 도리가 없겠지?』
 
  장지란 두꺼운 한지의 일종으로서 과거 답안지로 쓰이던 종이를 말한다. 과거 답안지는 과거장에서 한 번 쓴 글자를 긁어내면서 수정할 수 있도록 특별히 두껍고 질이 좋은 종이를 썼다. 그런데 이때에 昌巖이 科擧를 볼 수 있을 만큼 실력을 쌓았다고 鄭文哉가 판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淳永과의 다음과 같은 대화로도 알 수 있다.
 
  『종이는 내가 주선해 보겠지만 글씨만 쓰면 되겠나?』하는 淳永의 말에 鄭文哉는 『글은 내가 지어 줌세』하고 대답하고 있다.36)
 
  이처럼 金九의 科擧應試는 아예 借述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鄭文哉의 말에 淳永은 크게 기뻐하여 천신만고로 장지 다섯장을 샀다. 昌巖은 기쁘고 감사하여 筆師의 가르침대로 정성을 다해 흰 종이가 꺼먼 종이가 되도록 글씨 연습을 했다.
 
  과거날이 다가왔다. 과거 비용을 마련할 수 없는 昌巖 부자는 좁쌀을 등에 지고 鄭文哉를 따라 해주로 갔다. 淳永이 이전부터 알고 있던 房(계방)집에 묵으면서 과거날을 맞았다. 과거장의 풍경은 앞에서 본 景武臺의 풍경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규모와 행색이 다를 뿐이었다. 宣化堂(선화당) 옆 觀風閣 주변 사방에는 새끼줄을 둘러치고, 응시자들로 하여금 열을 지어 과거장으로 들어가게 했다.
 
  道袍를 입고 검은 베로 만든 儒巾(유건)을 쓴 선비들이 흰 베에 「山洞接」이니 「石潭接」이니 하는 접이름을 써서 장대 끝에 매달고 큰 종이양산을 들고 자기네 접자리를 먼저 잡으려고 힘이 센 사람을 앞세워 들어가느라고 크게 혼잡했다. 응시자 말고도 이런저런 일을 맡은 隨從人이 따라 들어가기는 지방의 과거장도 마찬가지였다.
 
  昌巖은 과거장으로 들어서면서 늙은 儒生들이 이른바 乞科(걸과)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관풍각을 향하여 새끼줄 그물 밑으로 머리를 들이 밀고 『소생의 이름은 아무개이옵는데, 먼 시골에 살면서 과거 때마다 참여하여 금년에 칠십 몇 살이올시다. 이 다음은 다시 과거에 참여하지 못하겠습니다. 初試라도 한 번 합격하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하며 진정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큰 소리로 외치고, 또 어떤 사람은 목을 놓고 울었다. 昌巖은 그것이 비굴해 보이기도 하고 가엾게 여겨지기도 했다고 한다.
 
  자기네 접이 있는 곳으로 와 보니까 선생과 접장들이 자리잡고 앉아 글짓는 사람은 짓기만 하고 글씨 쓰는 사람은 쓰기만 하고 있었다. 이렇듯 지방의 科擧場에서도 借述과 代述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昌巖이 처음부터 借述을 전제로 하고 과거에 응시하면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는 사실은 李承晩의 경우보다도 더 의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답안지에 아버지 이름 적어
 
 
  昌巖은 선생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제가 아니라 제 아버님 명의로 답안지를 작성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기회가 많지 않겠습니까!』
 
  昌巖은 자기보다도 아버지가 급제하여 양반이 되는 것이 더 소망스러운 일로 생각했던 것이다. 鄭선생은 昌巖의 말에 감동하여 昌巖의 요청을 쾌히 받아들였다. 昌巖의 이러한 효성은 옆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갸륵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이들의 대화를 들은 어떤 접장이 『가상한 일이다. 네가 글씨가 나만 못 할 터이니 네 아버지 답안지는 내가 써 주마. 너는 공부를 더해서 후일 네 과거는 네가 짓고 쓰도록 해라』하며 써주었다.
 
  이처럼 법에 저촉되는 일인데도 그것이 孝道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美德으로 간주될 수 있었던 것은 朝鮮時代의 비뚤어진 家族主義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昌巖은 鄭선생이 짓고 접장이 써준 淳永 명의의 답안지를 새끼줄 그물 사이로 試官 앞을 향해 쏘아 들여보냈다.
 
  그리고 나서 昌巖은 과거장의 광경을 보면서 과거에 관한 이런 말 저런 말을 얻어들었다. 通引(수령의 잡심부름을 하는 사람) 놈들이 試官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과거 답안지를 한 아름 훔쳐갔다고도 했다. 또 과거장에서 글을 짓고 쓸 때에는 남에게 보이지 말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글을 지을 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글을 보고 가서 자기의 글로 제출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들었다. 돈만 있으면 과거도 벼슬도 할 수 있다는 괴이한 말도 들었다. 글을 모르는 부자들이 巨儒의 글을 몇 백량 몇 천량씩 주고 사서 及第도 하고 進士도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昌巖은 과거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위의 몇 가지 이야기만 들어보아도 과거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하고 여겨졌다는 것이다.
 
  과거의 결과는 물론 낙방이었다. 이때의 심정을 金九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심혈을 다하여 장래를 개척하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인데, 선비의 유일한 진로인 과거의 꼬락서니가 이 모양인즉, 나라일이 이 지경이면 내가 詩를 짓고 賦를 지어 科文六體에 능통한다 하여도 아무 선생 아무 접장 모양으로 科擧場의 대서업자에 불과할 것이니 나도 이제 다른 길을 연구하리라 결심하였다>37)
 
  과거에 급제하는 것만이 兩班이 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昌巖은 열심히 서당 공부를 했었다. 그러나 昌巖이 해주 과거장에서 깨달은 것은 그가 지금까지 그토록 열성을 다하여 추구해온 身分上昇의 꿈은 부패한 科擧制度를 통해서는 이룰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다.
 
 
 
  (5) 열여섯 살에 동네의 동갑나기와 결혼
 
 
  承晩은 열여섯 살 때에 같은 동네에 사는 동갑의 陰城 朴氏와 혼인했다. 朴씨 부인과의 혼인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承晩에게 모든 것을 걸고 있는 敬善은 아들의 점을 쳐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나타난 점괘는 『봉사한테 장가들어야 출세한다』는 것이었다. 이 점괘 때문에 걱정하던 敬善의 눈에 띈 것이 외가에 의지하여 지내는 朴씨 처녀였다. 처녀는 아버지 朴白契와 어머니 李씨 사이의 장녀로 경기도 시흥군 五峰山 기슭의 고천마을에서 태어났는데 두 돌이 되기 전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런데 젊은 과부를 업어간다는 말에 겁이 난 어머니 李씨는 딸을 데리고 서울의 친정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 친정집이 바로 도동의 關王廟 곁에 있었던 것이다. 朴씨는 오른쪽 눈언저리에 푸르스름한 반점이 있었으므로, 그것으로 「봉사」라는 점괘를 때우려 했던 것이라고 한다.
 
  이 혼담을 듣고 承晩이 매우 놀란 것은 당연했다. 처녀가 정말로 봉사인지 아닌지 궁금했던 그는 처녀 집 부근에 숨어서 확인하기로 했다. 그것을 눈치챈 처녀는 한동안 문 밖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골탕을 먹이자는 생각이었다. 承晩은 잠복을 계속했다. 사흘이 지나자 처녀는 「안됐다」는 생각과 함께 한편으로는 「볼 테면 보라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물동이를 이고 우물께로 나갔고, 밖을 지키던 承晩은 처녀가 봉사가 아님을 확인하고 돌아왔다고 한다.38)
 
  朴씨 부인은 뒤에서 보듯이 활달하고 당찬 성품이었다. 그것은 현존하는 사진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부부의 사이는 李承晩의 첫 번 渡美 때까지는 좋았던 것 같다. 朴씨 부인은 뒷날 『우리 내외는 결혼한 뒤에 한 번도 말다툼한 적이 없었다』고 양자 恩秀에게 말했다고 한다.39)
 
 
  唐詩 낭송 때에는 동네 아낙네들도 몰려
 
 
  承晩은 혼인한 뒤에도 계속 서당 공부에 열중했다. 承晩이 혼인하던 해에 훈장 李承卨이 돌아가고 뒤를 이어 마을의 늙은 선비 石樵(석초) 金生員이 훈장이 되었는데, 그는 특히 詩를 즐기고 술을 좋아했다. 그는 敬善과는 남달리 뜻이 맞아 거의 날마다 같이 앉아서 詩를 읊고 술잔을 기울였다. 이 훈장 밑에서 承晩은 申應雨, 申肯雨, 申興雨 삼형제와 주인 아들 丙胄 등과 더불어 해마다 夏至에서 7월까지는 오로지 詩만 공부하여 이 방면의 많은 것을 깨우쳤다. 뿐만 아니라 꽃필 무렵이나 녹음철에는 承晩은 훈장과 훈장의 친구들을 모시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회포를 詩로 읊기도 했는데, 다음과 같은 시구는 李承晩이 광복 후 귀국해서까지 기억했다.40)
 
  〈萬樹桃花屋數隣
 
  일만 남긔 복사꽃 서너 가호 이웃집
 
  好酒登宴紅作友
 
  술 즐겨 베푼 잔치
 
  名亭隔樹綠爲隣
 
  붉어진 얼굴 멋진 정자 푸른 녹음 이웃을 하리>
 
  여름밤이면 갓 상투를 튼 홍안의 유생들은 서당 마당에 싱싱한 풀내 나는 모깃불을 피워 놓고 唐詩를 낭송했다. 그들은 마루에 걸터앉기도 하고 마당에 서기도 하여 좋아하는 당시를 목청을 돋우어 읊었다.
 
  또 가령 한 사람이 모깃불 무더기를 끼고 돌면서 『娥媚山月歌(아미산월가)라』하고 나직이 詩 제목을 대면 모두가 그 뒤를 따라 돌면서 『아미산월이 半輪秋(반륜추)하니 影入平羌江水流(영입평강강수류)를…』하고 소리를 맞추어 읊어 넘겼다. 몇 사람이 한 줄을 외우면 나머지 몇 사람이 그 다음 줄을 차례로 받아 넘기기도 했다.
 
  「娥媚山月歌」란 李白이 스물다섯 살에 고향인 蜀(촉)을 떠나면서 지은 유명한 七言絶句로서,41) 조선시대에 서당에서 가장 널리 암송되던 唐詩의 하나였다.
 
  <娥媚山月半輪秋
 
  아미산에 걸린 반쪽 가을 달
 
  影入平羌江水流
 
  평강강 강물에 그림자 비쳐 흐른다
 
  夜發淸溪向三峽
 
  청계를 떠나 밤에 삼협으로 가며
 
  思君不見下州
 
  그대를 생각하나 보지 못하고 유주를 내려간다>
 
  이 짧은 詩에는 地名이 다섯 군데나 나오는데, 朝鮮朝의 儒生들은 이런 中國의 地名들을 바로 가까이 있는 것처럼 친근하게 느끼며 그들의 낭만을 불태웠었다.
 
  여름밤의 唐詩 낭송은 젊은 儒生들의 낭만뿐만이 아니었다. 싱그러운 풀잎마다 달빛이 쏟아져 내리는 밤이면 마을 아낙네들까지 이 唐音 소리를 들으려고 서당 담 밖으로 모여들었다. 承晩은 그 중에서도 목소리가 가장 크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가 먼저 詩 제목을 이끌어 내거나 혼자서 읊어 넘길 때에는 서당 담에 붙어 있던 아낙네들은 서로 옆구리를 찌르며 소근거렸다는 것이다.42)
 
  承晩은 열아홉 살 되던 1893년까지 계속해서 과거를 보았다. 그동안 「詩傳」, 「書傳」, 「周易」 등의 經書도 거의 완전하게 익혔다. 그리하여 이 무렵까지의 그의 儒學經典이나 詩文공부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던 것같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가치판단이나 행동준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일로도 짐작할 수 있다.
 
  6·25 전쟁이 나서 大田으로 피난했을 때의 일이다. 국회 의장단인 申翼熙, 張澤相, 曺奉岩 세 사람이 李承晩을 찾아가 국민이 고난을 당하고 특히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한 약속을 어겼으므로 대통령으로서 국민들에게 사과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했다. 그러자 李承晩은 대뜸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거절했다.
 
  『내가 唐 悳宗이란 말인가?』
 
  당나라 悳宗이 자기의 잘못으로 백성을 戰亂 속에 이끌어 넣고 막대한 피해를 입히게 되자 이른바 罪己詔(죄기소)를 내려 스스로 사과했다는 古事를 두고 한 말이었다. 이때에 그것을 가장 강력히 진언한 사람은 曺奉岩이었는데, 李承晩은 상기된 얼굴로 양팔을 벌려 보이며 『과인이 덕이 없어……하고 말인가?』하면서 흥분했었다는 것이다.43)
 
  이 에피소드는 李承晩의 中國 古典에 대한 지식의 정도만이 아니라 그의 君王意識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6) 아버지 권유따라 觀相 공부
 
 
  과거에 낙방하고 큰 좌절감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 昌巖은 앞으로의 진로문제에 대해 아버지 淳永과 상의했다.
 
  『제가 어떻게든지 공부를 해가지고 입신양명하여 姜가, 李가에게 당한 압제를 면할까 하였더니, 그 유일한 방법이라는 과거장의 폐해가 이와 같은즉, 제가 비록 巨儒가 되어 學力으로는 姜씨, 李씨를 제압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孔方(공방·「엽전」의 다른 이름)의 마력이 있는데 어찌하오리까. 또한 거유가 되도록 공부를 하려면 다소의 금전이라도 있어야 되겠는데, 집안이 이토록 가난하니 앞으로 서당 공부를 그만두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아들의 말에 淳永도 수긍했다. 공방의 마력이란 돈의 위력을 뜻하는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淳永은 아들에게 권했다.
 
  『너 그러면 風水 공부나 觀相 공부를 해 보아라. 風水에 능해 명당에 조상을 모시면 자손이 福祿을 누리게 되고, 觀相을 잘 보면 선한 사람과 君子를 만날 것이다』
 
  昌巖은 아버지의 이러한 말이 매우 이치에 맞는 말이라 생각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공부해 보겠습니다. 書籍을 얻어 주십시오』하고 아버지에게 부탁했다.44)
 
  이렇듯 昌巖이 이때에도 아버지의 권고를 「매우 이치에 맞는 말」이라면서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은 그가 얼마나 아버지 淳永의 영향을 받고 성장했는가를 말해 주는 또 하나의 실례이다.
 
  淳永은 아들에게 우선 「麻衣相書」 한 권을 빌려다 주었다고 한다. 金九가 「麻衣相書」라고 기억하는 책은 정확하게는 「麻衣相法」이었을 것인데, 그 책은 「達摩相法」과 함께 觀相學의 두 경전으로 꼽히는 책이다. 「達摩相法」은 佛敎系, 「麻衣相法」은 道家系의 관상학 경전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상학 책이 그 당시 해주 텃골과 같은 지방에서 그토록 쉽게 구할 수 있을 정도로 보급되어 있었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석 달 동안 들어앉아 自己觀相 관찰
 
 
  관상공부를 했던 때의 일을 金九는 다음과 같이 매우 인상적으로 적고 있다.
 
  <나는 독방에서 相書를 공부했다. 상서를 공부하는 방법은 먼저 거울을 마주하고 자신의 상을 보면서 부위와 名辭(개념을 뜻함)를 익힌 다음 다른 사람의 상에 이르는 것이 첩경이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의 상보다 내 상을 잘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두문불출하고 석 달 동안이나 내 상을 觀相學에 따라 관찰하였다. 그런데 어느 한 군데도 貴格이나 富格 같은 좋은 상은 없고, 얼굴과 온몸에 賤格과 貧格과 凶格밖에 없다. 앞서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相書를 공부했는데, 오히려 그보다 더한 비관에 빠지게 되었다. 짐승과 같이 살기 위해서나 살까, 세상에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그런데 「相書」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이제부터는 외적 修養은 어찌되든지 내적 수양에 힘써야만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 먹으니까, 종전에 공부를 잘하여 科擧를 하고 벼슬을 하여 賤한 身分에서 벗어나 보겠다던 생각은 순전히 虛榮이요 妄想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마음 좋지 못한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 있는가 自問해 보니 역시 막연하였다>45)
 
  그래서 昌巖은 그만 相書를 덮어버렸다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자서전 중에서 이토록 처절한 告白은 그다지 흔하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인격 형성기의 金九의 큰 苦惱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金九가 그토록 감명받았다고 인용한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하는 구절이 「麻衣相法」에 없다는 사실이다. 「麻衣相法」에는 비슷한 내용으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人生의 富貴貧賤은 대개 相貌(상모)와 氣色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善行을 하면 吉祥(길상)이 이르고 惡行을 하면 災殃(재앙)이 이르는 것이니, 形貌(형모)의 좋고 나쁜 것을 살피기에 앞서 마음 바탕을 먼저 살핀 뒤에 상모로써 吉凶을 논해야 한다>46)
 
  이런 구절을 昌巖이 「白凡逸志」에 있는 것과 같은 말로 기억하고 「마음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은 깊이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일가 아이들 가르치며 兵書 외워
 
 
  관상 공부를 포기한 昌巖은 다음으로 地家書(風水地理에 관한 책)를 읽었으나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당시에 風水地理에 관한 책은 중국 東晉의 郭璞(곽박)이 쓴 「葬書」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昌巖이 이때에 본 地家書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자신의 관상에 크게 실망하고 觀相 공부를 포기한 昌巖이 다시 아버지가 권유한 風水 공부를 해보려는 마음을 먹은 것도 그의 효성을 짐작하게 한다.
 
  그는 이어 「孫武子」, 「吳起子」, 「三略」, 「六韜(육도)」 등의 兵書를 읽었다. 어떤 동기에서 이런 兵書들을 읽었고, 또 어떻게 구해서 읽었는지에 대해서는 「白凡逸志」에 언급이 없다. 그리고 金九는 이 무렵 자기 집에 「東國明賢錄」이라는 책이 있었다고 했는데,47) 이는 淳永이 웬만큼 책을 읽는 사람이었음을 말해 준다. 昌巖의 학식 수준으로 이들 병서의 내용을 독학으로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孫武子」나 「三略」을 외울 정도로 열심히 읽었던 것은 뒷날 인천 감옥을 탈출한 그가 방앗간에 숨어서 그것을 암송하고 있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48)
 
  병서 중에서 관심 있게 보았던 대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金九는 적고 있다.
 
  <태산이 앞에서 무너져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泰山覆於前 心不妄動)
 
  병사들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한다.(與士卒 同甘苦)
 
  나아가고 물러섬을 호랑이와 같이 한다.(進退如虎)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지지 않는다.(知彼知己 百戰不敗)>49)
 
  이처럼 昌巖은 難解한 兵書를 1년 동안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일가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 스스로 실의에 빠져 있으면서도 일가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던 것은 그의 열성과 함께 金씨 집성취락에서는 그만큼 昌巖이 촉망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昌巖이 내용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면서도 兵書를 탐독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가 관심 있게 보았던 대목이라고 인용한 위의 구절들이 병서의 정수라고는 할 수 없으며 인용도 부정확한 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병서들이 昌巖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짐작하게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병서를 탐독한 경험은 뒤에서 보듯이 그를 東學農民軍의 선봉장이 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과정에서 그가 외교활동에 더 주력하는 임시정부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武裝鬪爭이나 테러리즘의 정치적 효력에 큰 비중을 두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科擧 낙방이 指導者로 성장하는 계기 돼
 
 
  李承晩은 일곱 살 때부터 열아홉 살 때까지 12년 동안, 그리고 金九는 열두 살 때부터 열일곱 살 때까지 5년 동안 科擧 준비를 위한 공부를 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人格形成期에 이들이 깨우친 中國 古典에 대한 지식은 비록 수준은 달랐으나 두 사람 다 一生을 두고 큰 정신적 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과거제도가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상황에서 李承晩과 金九가 科擧에 급제하기를 기대했던 것 자체가 사실은 무모한 일이었다.
 
  과거에 실패한 두 사람은 큰 좌절감에 빠졌다. 그러나 그 좌절감은 부패한 王朝社會에 대한 혐오와 抵抗意識으로 변하여 두 사람으로 하여금 사회변혁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게 했다. 그런 점에서 科擧에 낙방한 것이 오히려 두 사람이 새로운 시대의 指導者로 급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失意에 빠져 있던 李承晩과 金九가 한 사람은 東學에 入道하여 東學農民戰爭의 선봉장이 되고 또 한 사람은 新學問을 익혀 獨立協會의 改革運動에서 급진 과격파로 활약하는 과정을 뒤이어 살펴보기로 한다.●


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3)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1) 連臂 1000여 명 둔 「애기接主」
 
 
  昌巖(창암)이 과거장에서 목격한 부패한 현실은 무너져가는 朝鮮王朝 사회의 한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朝廷의 부패와 무능에 더하여 급증하는 外國商品의 유입과 米穀의 유출, 그리고 계속된 흉년과 질병 등으로 말미암아 민중의 고통은 날로 심각해져 갔다. 민중의 불만은 들불처럼 번지는 이른바 民亂과 火賊(화적)의 횡행으로 표출되었다. 1876년의 개항부터 1894년의 동학 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농민들의 봉기는 100여 건에 이르렀는데, 극심한 旱災(한재)가 발생했던 1893년 한 해에만 65건이나 되었다.1)
 
  黃海道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880년에는 長淵에서, 1885년에는 兎山(토산)에서, 1893년에는 載寧(8월)과 黃州(11월)에서 농민들이 봉기했다. 특히 황주는 1차 봉기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자 이듬해 1월에 다시 일어났는데, 그것은 사망자 21명과 부상자 70여 명의 많은 희생자를 낸 대규모 봉기였다.2) 이처럼 민중의 분노는 폭발하는 화약고와 같이 잇달았다.
 
  사회적 불안은 민중의 심리적 불안을 부채질했다. 그럴수록 의지할 곳을 잃은 민중은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토피아적인 민간신앙에 빠져들었다. 「鄭鑑錄(정감록)」의 예언이 새로이 부활하고, 이러저러한 流言들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퍼지는 「鄭鑑錄」의 예언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昌巖도 「정감록」의 예언과 관련된 괴이한 소문을 들었다.
 
  〈어디서는 異人(이인)이 나타나서 바다에 떠다니는 화륜선을 못 가게 딱 붙잡아 놓고는 세금을 내어야 놓아 보낸다.〉
 
  〈머지아니하여 鄭都令이 鷄龍山에 도읍을 정하고 李朝 국가는 없어질 것이니 밭은 목에 가서 살아야 다음 세상에서 양반이 된다고 아무개는 계룡산으로 이사했다.〉3)
 
  이처럼 종말론적 세계관을 반영한 「정감록」의 주장은 당시의 정치현실과 사회상을 잘 드러낸 것이었다. 따라서 「정감록」에서 제시하는 방안은 민중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그것은 또한 支配層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선동한 것이어서 그 시대의 민중심리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민중은 적극적인 자기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처럼 초인적인 운명에 따름으로써 현실이 타개되기를 바라고 있었다.4)
 
  이 무렵 昌巖은 東學에 대한 신비한 소문을 들었다. 텃골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浦洞(포동)의 吳膺善(오응선)과 그 이웃 동네의 崔琉鉉(최유현)이 충청도의 崔道明(최도명)이라는 東學선생에게 입도하여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들은 방에 드나들 때에 문을 여닫지도 않고, 문득 있다가 문득 없어지며, 공중으로 걸어다니고, 그 선생 최도명은 하룻밤 사이에 충청도를 왔다 간다는 등의 소문이었다.5)
 
  崔道明이란 천도교의 2세 교조 崔時亨(최시형)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소문은 앞날의 진로를 놓고 정신적 방황을 하고 있던 昌巖을 현혹시켰다. 그는 소문의 주인공을 만나서 사실을 확인해 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소문 듣고 東學道人 집 찾아
 
 
  1893년 정초에 昌巖은 포동 吳膺善의 집을 찾았다. 고기를 먹지 않고 목욕하고 새옷으로 갈아 입고 가야 접대를 한다는 말을 듣고 昌巖은 정성을 들여 그대로 실천했다. 목욕하고 머리 땋고 푸른 道袍(도포)에 綠帶(녹대)를 매고 집을 나섰다.
 
  吳膺善의 집 문 앞에 이르자 방에서 무슨 글 읽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詩나 經典을 읽는 소리와는 달랐고 마치 노래를 합창하는 것 같기도 했으나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東學敎徒들이 경전을 암송하고 있는 것을 처음 듣는 昌巖이 알아차릴 턱이 없었다.
 
  昌巖은 겸손한 자세로 주인을 찾았다. 젊은 청년 한 사람이 나와서 昌巖을 맞았다. 昌巖은 吳膺善도 양반임을 알고 갔었는데, 그는 상투를 틀고 通天冠(통천관)6)을 쓰고 있었다. 昌巖이 공손히 절을 하자 그 역시 공손히 맞절을 하고 나서 『도령은 어디서 오셨소?』 하고 물었다.
 
  난생 처음으로 양반으로부터 존대를 받은 昌巖은 너무나 황송하여 신분을 밝혔다.
 
  『저는 어른이 되었더라도 당신께 공대를 받지 못할 상놈입니다. 하물며 아직 아이인데 어찌 공대를 하나이까?』
 
  그러자 吳膺善은 도리어 감동하는 빛을 보이면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천만의 말씀이오. 나는 다른 사람과 달리 東學道人이기 때문에 선생의 교훈을 받아 빈부 귀천에 차별 대우를 하지 않습니다. 조금도 미안해 하지 마시고 찾아오신 뜻이나 말씀하시오』
 
  金九는 이때의 감회를 〈이 말만 들어도 별천지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7)고 적고 있는데, 이는 그가 얼마나 상놈된 한이 뼈속까지 사무쳐 있었던가를 말해 준다.
 
  『제가 오기는 선생께서 동학을 하신다는 말을 듣고 道理를 알고 싶어 왔습니다. 저 같은 아이에게도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처럼 알고 싶어 오셨다는데, 내가 아는 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동학이란 어떤 宗旨(종지)이며 어느 선생이 천명하셨습니까?』
 
  『동학은 龍潭(용담) 崔水雲 선생이 천명하셨습니다. 선생은 이미 순교하셨고, 지금은 그 조카 崔海月 선생이 大道主가 되어 포교 중입니다. 동학의 종지로 말하면 말세의 간사한 인간들로 하여금 개과천선하여 새 백성이 되게 하여 가지고 장차 참주인을 모시고 鷄龍山에 新國家를 건설하는 것입니다』8)
 
  東學은 1860년에 水雲 崔濟愚(최제우)가 儒敎, 佛敎, 道敎의 원리와 함께 당시에 農民들 사이에서 널리 신앙되고 있던 風水地理說, 귀신 신앙, 鄭鑑錄 사상, 治病術 등 온갖 민간신앙과 샤머니즘을 융합하여 창립한 종교사상이다.9) 崔濟愚는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는 「侍天主(시천주)」의 원리를 定立했다. 2세 교조 崔時亨은 〈사람은 곧 하늘님이다(人是天)〉, 〈사람 섬기기를 하늘님같이 하라(事人如天)〉고 주창했다. 그는 〈베 짜는 며느리가 하늘님이며, 어린이를 때리는 것은 하늘님을 때리는 것이다〉라고 하여 한층 확대된 平等思想을 주창했다. 그는 동학에 입도하면 그날로 身分의 차별없이 맞절을 하게 하고 서로 「接長」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했다.10) 이처럼 동학의 평등사상은 崔濟愚의 「侍天主」에서 출발하여 崔時亨의 「事人如天」 단계를 거쳐서 뒤에 3세 교조 孫秉熙(손병희)의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人乃天(인내천)」을 통해서 완성된다. 이와 같이 동학은 사람을 하느님과 동격에 놓고 人間의 尊嚴性을 강조한 평등사상과 함께 민중에 친근한 부적과 주문 등 주술적인 포교수단 때문에 基督敎보다 더 빠르게 農民들에게 파고 들었다.11)
 
  민중은 동학에 들어가면 굶주림과 온갖 질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三政(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과 빈번한 질병에 시달리던 민중에게는 가장 절박한 생존의 희망이었다. 동학은 병을 고치는 방법으로 주문을 외우는 것 말고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부적을 씹어 삼키거나 그것을 불에 태워 그 재를 물에 타 먹는 등의 방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민중의 治病에 대한 믿음은 全琫準(전봉준)의 진술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동학에 입도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마음을 지키면 괴질에 걸리지 않는다고 진술하고 있다.12) 또한 치병과 함께 免禍(면화)도 민중이 동학에 입도하는 중요한 동기였다. 민중은 부적을 태워 마시면 액운을 막을 수 있다는 崔濟愚의 말13)에 이끌려 동학에 몰려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동학이 경상도 일대를 풍미하게 되자 조정에서도 이를 주목하게 되었다. 특히 동학의 주문이나 그밖의 문장에 「天主」, 「上帝」 등의 말이 있고, 이것이 天主敎와 혼동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여, 崔濟愚는 1864년 3월에 大邱府 남문 밖에서 「惑世誣民(혹세무민)」, 「邪道亂正(사도난정)」이라는 죄명으로 梟首(효수)형에 처해졌다.
 
 
  平等思想과 새 國家建設說에 매료돼
 
 
  吳膺善이 昌巖에게 동학의 敎義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昌巖은 오응선과의 면담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신분차별에 따른 처절한 좌절감을 느끼고 있던 昌巖은 무엇보다도 동학의 평등사상에 마음이 끌렸다. 그는 동학에 입도만 하면 차별 대우를 철폐한다는 말이나 李氏王朝의 운세가 다하였으므로 장차 새 국가를 건설한다는 말에서 지난해에 과거장에서 겪었던 쓰라린 기억이 되살아났다.
 
  金九는 이때의 감회를 〈내 相(상)이 나쁜 것을 깨닫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를 맹세한 나에게는 하늘님을 몸에 모시고 하늘 도를 행한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고 회상했다.14)
 
  昌巖은 동학에 입도할 마음이 불같이 일어났다. 그는 吳膺善에게 입도 절차를 물었다. 오응선은 쌀 한 말과 백지 세 묶음과 누런 초 한 쌍을 가져오면 入道式을 거행해 주겠다고 말했다. 昌巖은 오응선의 집에서 「東經大全」, 「龍潭遺詞(용담유사)」, 「弓乙歌」 등의 동학 경전을 훑어본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흥분된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온 昌巖은 아버지 淳永(순영)에게 오응선을 만난 일을 자세히 보고했다. 淳永은 昌巖의 동학 입도를 흔쾌히 승낙하고 필요한 예물을 준비해 주었다. 이 무렵 淳永이 東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괄괄한 성품인 淳永이 아들의 뜻을 존중하는 모습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 昌巖은 아버지와 함께 준비한 예물을 가지고 가서 곧장 동학에 입도했다.
 
  昌巖은 동학의 敎義를 열심히 배우는 한편 布敎에도 열성을 기울였다. 淳永도 아들을 따라 동학에 입도했다. 동학은 불만에 가득 찬 昌巖의 젊은 열정을 빠르게 흡수해 갔다. 昌巖이 지난날의 자신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이름을 바꾼 것이었다. 그는 동학에 입도하자마자 아명인 昌巖을 버리고 昌洙로 개명했다.
 
 
  外國公館과 敎會堂에 榜文 나붙어
 
 
  昌洙가 동학에 입도할 무렵 동학교단은 확대된 교세를 바탕으로 하여 억울하게 처형된 교조 崔濟愚의 伸寃(신원: 復權)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동학교도들은 1892년 10월과 11월에 公州와 전라도 參禮에서 집회를 열고 崔濟愚의 신원과 정부의 동학교도 탄압 중지를 요구했다. 이어서 1893년 2월에는 孫秉熙 등 40여 명의 교도들이 서울로 올라와서 왕에게 직접 교조 신원과 동학 포교의 공인을 호소하는 伏閤上疏(복합상소)를 올렸다. 동학교도들은 世子의 誕辰日을 기념하여 2월8일에 열리는 慶科(경과)를 이용하여, 과거보러 가는 선비로 가장하고 서울로 들어갔다.16) 사흘 동안 光化門 앞에서 무릎을 꿇고 哭(곡)을 하면서 국왕에게 복합상소를 올린 이들은 『소원대로 시행하겠으니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국왕의 귀가권유의 명을 받고 순순히 해산했다.17)
 
  동학교도들의 복합상소 직후에 「斥洋斥倭(척양척왜)」를 주장하는 榜文(방문)이 서울의 각국 公使館과 敎會堂에 나붙어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2월14일 밤에 미국인 기포드(D. L. Gifford) 학당의 문에 방문이 붙은 것을 시작으로 18일에는 미국인 존스(H. J. Jones)의 집에, 20일에는 프랑스 공사관에, 3월2일에는 일본공사관의 벽에 방문이 붙었다.
 
  특히 존스의 집과 프랑스 공사관에 붙은 방문에는 3월7일까지 철수하지 않으면 聲討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18) 일본 공사관에 붙은 방문은 〈하늘이 이미 너희를 미워하고 우리의 스승이 이미 너희를 경계하라 하였으니 죽느냐 사느냐는 너희에게 달려 있다.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다시 말하노니 급히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19)는 더욱 위협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 변리공사 오이시 마사이(大石正己)는 2월24일에 본국에 군함 파견을 요청했고, 日本 政府는 군함 1척을 仁川에 파견했다. 그러자 淸國, 英國, 美國도 차례로 군함을 조선에 파견했다. 일본인이 느꼈던 위기감이 얼마나 절박했는가는 일본 영사 스기무라(杉村濬)가 2월27일에 서울 거류민들에게 유사시의 행동요령을 시달하는 內諭(내유)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일본 공사관은 자국 상인들의 영업에 지장을 초래할 것을 염려하여 조선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고 엄중한 수사를 요구했다.20)
 
  그리하여 서울의 민심은 흉흉했다. 金允植은 〈서울 시내는 동학당이 洋館에 掛書(괘서)를 하여 초이렛날에 구축하겠다는 설 때문에 자못 소요를 이루었다〉21)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昌洙의 接에는 常民들이 몰려
 
 
  복합상소를 한 東學敎徒들이 해산하자 조정에서는 교조 신원을 해주기는커녕 전라도 관찰사 李耕稙(이경직)을 교도들이 上京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하여 파면하고, 지방관들에게 敎徒들을 엄중히 단속하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東學敎徒들에 대한 탄압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목숨을 건 伏閤上疏가 물거품이 되고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東學敎徒들은 한 달 뒤인 3월11일부터 20여 일 동안 충청도 報恩 帳內里(장내리)에서 2만7000명이 참가하는 대규모의 시위 집회를 열었다. 이것이 유명한 報恩聚會(보은취회)이다. 그리고 이 집회에서 주장한 것은 「교조신원」이 아니라 뜻밖에도 「斥倭洋倡義(척왜양창의)」였다.
 
  그런데 이러한 교단의 움직임이 黃海道地方 동학교도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당시 황해도에서는 양반들이 동학에 가입하는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매우 드물었다. 반면에 억울하고 고통받는 상민들 가운데에서 동학에 입도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다. 昌洙는 상민인 만큼 상민들을 많이 입도시켰다. 그리하여 불과 몇 달 만에 昌洙의 連臂(연비)는 수백 명에 이르렀다.22) 동학에서는 도를 전한 사람을 淵源(연원)이라 하고 도를 전해 받은 사람을 連臂라고 했는데, 연원과 연비의 관계로 맺어져 있는 동학 조직제도를 淵源制 또는 連臂制라고 불렀다.23)
 
  昌洙의 명성이 점차 알려지자 그에 대한 터무니없는 流言이 사방으로 퍼졌다. 호기심에 찬 사람들이 昌洙를 찾아와 물었다.
 
  『그대가 동학을 해보니 무슨 造化가 생기던가?』
 
  그럴 때마다 昌洙는 솔직히 대답했다.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선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 동학의 조화입니다』
 
  그러나 昌洙의 답변은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특별한 조화를 기대하고 찾아온 사람들은 昌洙의 이러한 말을 곧이 듣지 않았다. 그들은 昌洙가 자기네들에게 조화를 보여 주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오히려 그들은 『昌洙가 한 길 이상 공중에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등의 말로 더 근거 없는 유언을 퍼뜨렸다.
 
  昌洙의 신통력에 대한 소문은 黃海道는 물론이고 멀리 平安道에까지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리하여 그의 연비 수는 급속히 증가하여 100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24) 이러한 사실은 東學의 전파가 얼마나 민중의 造化나 異蹟(이적)에 대한 기대심리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가를 말해 준다. 昌洙는 황해도와 평안도의 동학교도 가운데에서 나이 어린 사람으로서 가장 많은 연비를 가졌다고 하여 「애기접주」라는 별명을 얻었다.25) 물론 그때까지 昌洙가 정식으로 接主 첩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2) 報恩에 가 崔時亨에게서 接主 첩지받아
 
 
  昌洙가 동학 포교에 열성을 다하고 있는 동안 해가 바뀌어 1894년 甲午年의 새해가 밝았다. 1894년은 이 나라 역사에 일찍이 찾아볼 수 없는 큰 지각변동이 있었던 해였다.
 
  먼저 1월10일 이른 새벽에 全羅道 古阜(고부)지방에서 농민들이 봉기했다. 고부군수 趙秉甲의 탐학에 견디다 못한 고부 농민들은 全琫準의 지휘 아래 봉기를 감행했다. 고부 농민봉기는 이전의 민란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郡守 처단, 全羅監營 점령, 서울 진격」이라는 구호를 내걸므로써 한 읍의 차원을 뛰어넘어 왕조사회 전체를 부정하는 차원으로 문제를 확대시켰다.
 
  놀란 조정에서는 농민 봉기의 수습을 위해서 李容泰를 按♥使(안핵사)로 파견했으나, 그의 지나친 횡포는 농민들의 가슴속에 새로운 불씨를 지펴, 3월20일에 全琫準을 대장으로 하고 孫和中과 金開南을 總管領(총관령)으로 한 전라도 농민군이 茂長에서 전면적인 봉기를 감행했다. 마침내 東學農民戰爭의 막이 오른 것이었다. 이때에 내건 농민군의 슬로건은 「輔國安民(보국안민)」과 「除暴救民(제폭구민)」이었다.
 
 
  「全州和約」 맺고 물러나 執綱所 설치
 
 
  농민군은 전라도 일대를 휩쓸고, 4월 27일에는 全州城을 점령했다. 그런데 이때의 봉기는 전라도 지방 밖으로 확대되지 못했고, 北接의 중앙교단은 봉기에 호응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조정은 淸國에 借兵(차병)을 요청했고, 이 요청에 따라 淸國이 군대를 파견하자 이에 맞서 日本도 군대를 파견했다. 日本의 군대 파견은 甲申政變 뒤에 맺어진 天津條約에 근거한 것이었으나, 淸國과의 전쟁을 오랫동안 준비해온 日本으로서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었다.
 
  全琫準은 탐관오리의 처벌, 三政의 改革과 부당한 稅金徵收의 철폐, 外國 商人의 不法活動 금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27개조의 폐정개혁안을 兩湖招討使(양호초토사) 洪啓薰(홍계훈)에게 제시했다. 홍계훈이 농민군의 신변보장과 폐정개혁안을 임금에게 올리는 조건으로 개혁안을 받아들이자 농민군은 5월8일에 「全州和約」을 맺고 전주성에서 철수했다. 농민군은 약 4개월 동안 나주를 제외한 전라도의 모든 郡縣에 執綱所(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에 주력함으로써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농민 참여의 개혁정책을 실시했다.26)
 
  그런데 이처럼 삼남지방에서 농민군이 크게 기세를 떨치고 있을 때에 昌洙를 포함한 황해도 지방 東學敎徒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활동했는지는 「백범일지」나 그밖의 자료에도 분명하지 않다.
 
  1894년 가을에 이르러 崔琉鉉과 吳膺善은 교주 崔時亨으로부터 황해도 지역 동학교도들의 명단을 보고하라는 통첩을 받았다. 그들은 곧 崔時亨이 있는 보은을 방문할 대표 열다섯 명을 선정했는데, 이때에 昌洙도 그 열다섯 명 대표에 포함되었다. 어린 昌洙가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선정된 것은 그만큼 布敎를 열심히 하여 많은 연비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昌洙는 길게 땋은 총각머리가 여행에 불편하기 때문에 갓을 쓰고, 연비들이 거두어 준 돈으로 노자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는 해주 특산물인 향먹을 선물로 준비했다.27)
 
 
  黃海道 대표로 報恩 訪問
 
 
  昌洙 일행은 海路와 陸路를 통해 忠淸道 報恩 帳內里에 도착했다. 동학의 성지인 장내리는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지방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로서 삼남 지방 교도들이 집결하기에 유리한 지점이었다. 東學敎門의 중앙본부격인 六任所가 1884년에 이곳에 설치된 이래로 崔時亨이 계속 머물고 있었고, 주위 100리 안에는 崔時亨이 개척한 많은 비밀포교지들이 산재해 있었다.28)
 
  동학교단 역사서인 「侍天敎歷史」는 황해도 대표들을 맞이한 崔時亨이 『북쪽의 교인은 어찌 이리 늦게 나타났느냐』고 크게 반기면서, 그 자리에서 崔琉鉉을 海西首 接主로 임명했다고 적고 있다.29) 崔時亨이 일행에게 했다는 『어찌 이리 늦게 나타났느냐』는 말은 전년에 있었던 보은취회에 황해도 교도들이 참가하지 않았던 사실을 지적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昌洙 일행이 보은을 방문했을 때의 상황은 「백범일지」에 더 자세하다. 마을 안에 들어서자 사방에서 주문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 한쪽으로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나가고, 다른 한쪽으로는 무리지어 들어와 집집마다 사람들로 가득했다.
 
  昌洙 일행은 안내인에게 열다섯 명의 명단을 주어 崔時亨에게 전하게 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일행을 부른다는 연락이 왔다. 일행은 안내인을 따라 崔時亨이 거처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昌洙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崔時亨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백범일지」는 이 때의 일과 관련하여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었겠지만, 내가 천리를 멀다 않고 보은에 간 것은 선생이 무슨 조화 주머니나 주지 않나 하는 기대와 선생의 道骨道風은 어떠한가 살펴보려는 생각이 간절했기 때문이다〉라고 솔직히 적었다.30) 그것은 1000여 명의 연비를 두고 「애기접주」라는 별명을 듣고 있던 이때까지도 실은 金九의 東學 敎義에 대한 이해나 믿음이 투철하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昌洙는 崔時亨의 풍모를 유심히 관찰했다. 崔時亨은 나이가 예순 가까이 되어 보이고, 길게 늘어뜨린 수염은 보기 좋을 정도로 약간 검은 가닥이 있었다. 그는 얼굴은 맑고 야위었으며, 머리에 큰 검은 갓을 쓰고 저고리만 입고 앉아서 일을 보았다. 방문 앞에 놓인 무쇠 화로의 약탕관에서 나는 한약 달이는 냄새가 방 안에 가득했다. 그 약은 崔時亨이 먹는 獨蔘湯(독삼탕)이라고 했다.
 
  昌洙 일행은 일제히 교주에게 절을 올렸다. 그러자 崔時亨도 윗몸을 구부려 손을 땅에 짚고 맞절을 했다. 그리고는 『멀리서 수고시레 왔소이다』하고 인사를 했다. 일행의 대표는 열다섯 명이 각각 만든 敎徒들의 명부를 崔時亨 앞에 올렸다. 崔時亨은 명부를 문서 책임자에게 맡기면서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崔時亨의 방 안팎에는 많은 제자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뒷날 東學 三世 敎祖가 되는 孫秉熙와 金演局(김연국) 두 사위와 유명한 朴寅浩(박인호) 등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김연국은 나이 사십 가까운 순박한 농군 같았고, 손병희는 젊은 청년으로서 지식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天乙天水」라는 부적을 쓴 것으로 보아 그는 글씨 재주도 있어 보였다.31)
 
 
  全琫準의 제2차 蜂起 소식을 듣고
 
 
  昌洙 일행이 장내리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중대한 소식이 날아 들었다. 남도 지방의 각 관청에서 東學黨을 체포하여 학대하고 있는 반면에, 全琫準을 중심으로 한 南接의 동학농민군이 전면적인 再蜂起를 감행했다는 것이었다. 이때는 추수를 막 끝낸 9월 중순이었다.
 
  日本軍은 마침내 1894년 6월21일 밤에 景福宮을 점령하고 이틀 뒤에는 淸日戰爭을 일으킴으로써 朝鮮은 淸國軍과 日本軍의 전쟁터가 되고 있었다. 예상 외로 일본군이 청국군을 쉽게 격파하고 金弘集을 영의정으로 하는 親日開化派 內閣을 발족시키자 농민군은 「斥洋斥倭」의 기치를 내걸고 다시 봉기를 감행한 것이었다. 1차 봉기의 목표가 反封建이었던 것에 비해 2차 봉기의 목표는 이처럼 反外勢였다.
 
  東學農民軍의 2차 봉기에 직면하여 討伐軍은 봉기 참여 여부를 가리지 않고 동학교도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다. 공주로 내려가는 京軍과 日本軍은 충청도 곳곳에서 동학교도들을 수색해서 학살했다. 각 郡縣마다 엄청난 희생자가 났다. 특히 동학농민군에게 피해를 입은 지방 유생들은 民保軍이라는 자체 토벌군을 조직하여 교도들에 대한 보복성 학살을 자행했다. 충청도 지방의 동학접주 辛在蓮(신재련)은 『선비의 무리들이 道人 한 사람 이상을 잡아오면 千金의 상을 준다고 하고는 체포 즉시 참수하니 그 피해가 막심하다』고 호소했다.32)
 
  계속되는 동학교도의 피해로 말미암아 崔時亨을 비롯한 동학지도부는 큰 위기에 직면했다. 특히 토벌군 부대의 남진 방향에 위치한 京畿道의 龍仁, 安城, 長湖院 등지와 忠淸道의 鎭川, 槐山, 陰城 등지의 교도들은 토벌군에 쫓겨 남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벌군에 밀리기 시작한 孫秉熙, 孫天民 등은 보은으로 집결하여 崔時亨에게 봉기할 것을 강력히 건의했다. 이 건의에 따라 崔時亨은 北接 산하의 전국 접주들을 충청도로 소집했다.
 
  崔時亨은 동학교도의 학살 소식을 듣고 진노했다. 그는 순 경상도 말투로,
 
  『호랑이가 물러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서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서 싸우자!』33)
 
  하고 말했다. 그의 이 말은 곧 動員令이었다. 결국 崔時亨은 9월18일에 北接 산하 모든 지도자들의 봉기를 촉구하는 기포령을 내렸다.34) 그것은 南接의 2차 起包(기포)에 대한 호응이었다.
 
  각지에서 와서 대령하던 大接主들이 각자의 근거지로 가기 위해 썰물처럼 밀려 나가기 시작했다. 昌洙 일행 열다섯 명도 각각 「海月印」이 찍힌 접주 첩지를 받고 곧 보은을 출발했다. 갈 때에는 육로와 해로를 이용했으나 올 때에는 육로를 택했다.
 
  돌아오는 길에 昌洙 일행은 여러 곳에서 긴장된 분위기를 목격했다. 길을 가는 도중 곳곳에서 흰옷을 입고 칼을 찬 동학농민군을 만났다.
 
  충청북도 진천군 廣惠院 장터를 지날 때에 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백범일지」는 적고 있다. 이곳에는 동학접주 신재련이 이끄는 1만 명의 농민군이 집결하여 대단한 기세를 과시하고 있었는데,35) 평소에 동학교도들을 학대하던 양반들이 잡혀 와서 길가에서 짚신을 삼고 있는 모습이 『가관이었다』는 것이다.
 
  동학군은 陣營을 설치하고 행인들을 검사하고 있었다. 昌洙 일행은 증거를 보여주고 무사히 통과했다. 진영 부근 촌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밥을 지어 道所로 나르고 있었다. 논에서 벼를 베던 농부들은 동학농민군이 몰려와 집결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낫을 버리고 도망치기도 했다. 昌洙 일행이 서울을 지날 쯤에는 京軍이 삼남지방을 향하여 행군하고 있었다.36)
 
 
 
  (3) 海州城 공략의 선봉장
 
 
  黃海道의 동학농민군은 昌洙 일행이 海州로 돌아오기 이전에 이미 활동을 하고 있었다. 9월부터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던 農民軍은 10월 들어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다.37)
 
  농민군이 처음으로 海州城을 공략한 것은 10월6일쯤이었는데, 이 공격을 주도한 것은 崔時亨의 북접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林宗鉉(임종현)을 중심으로 한 동학세력이었다.38) 이들은 먼저 康翎(강령)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한 뒤에 바로 해주성을 공략했다. 이들 농민군은 거의 한 달 동안 해주성을 점령하고 있으면서 황해도 각 지역의 地方官을 임명하기까지 했다. 官軍이 압수한 농민군의 「都錄(도록)」에 따르면 林宗鉉은 스스로 黃海監司를 자임하고, 成載植(성재식)을 康翎 현감, 李容善을 안악 군수, 崔得秀를 海州 判官으로 임명했다. 그밖에도 이 「都錄」에는 中軍, 兵卒 등의 명단까지 기록되어 있었다.39) 산포수 800명이 東學軍에 가담하여 해주성의 軍器를 탈취하고 성문을 지켰고, 監司는 通引 집에 숨어서 朝廷에 보고도 못 했다.40)
 
  昌洙 일행이 언제 해주로 돌아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백범일지」는 9월에 돌아왔다고 적고 있는데,41) 그랬다면 林宗鉉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이 10월 초부터 한 달 동안이나 해주성을 점령하고 있었던 사실에 대하여 「백범일지」에 一言半句도 언급이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푸른 비단에 「八峯都所」 크게 써 걸고
 
 
  해주에 도착한 昌洙 일행은 즉시 黃海道 地域 동학군 봉기문제를 논의했다고 한다. 황해도에서도 양반과 관리들의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은 혹심했다. 그런데다가 三南地方의 동학농민군으로부터 호응하여 봉기하라는 연락이 잇따라 도착했다. 그리하여 접주 열다섯 명은 회의를 열고 거사하기로 결정했다.42)
 
  그런데 황해도의 東學農民軍도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동학교도들만으로 구성되지는 않았다. 동학농민군에는 봉건적 폐단으로 생활의 기반을 잃은 사람들이 많이 참가했다. 그리고 黃海道 農民軍에는 當五錢 때문에 피해를 입은 농민들과 일자리를 잃은 沙金 광부들이 많은 것이 특색이었다. 원래 당오전은 명목가치가 常平通寶의 5배로 정해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2∼3배밖에 안 되는 조악한 화폐였고, 그나마 또 민간에서 불법으로 당오전을 위조하여 유통시키고 있어서 물가가 폭등했다. 특히 황해도 지역에서는 私鑄(사주)가 많이 행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文化에서는 私鑄에 관계하던 사람이 동학에 입도하기도 했다.43) 또한 1893년에 사금 채굴을 금지하자 먹고 살 길을 잃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스스로 東學軍이라 칭하기도 했는데, 이들 사금 채집 광부가 농민군의 절반에 이를 정도였다.44)
 
  10월까지 산발적으로 움직이던 황해도 동학농민군은 11월에 들어 숫자가 급증하여 도내 13개읍이 농민군의 습격을 받았다.45) 교단 역사서인 「天道敎創建史」는 林宗鉉, 吳膺善, 崔琉鉉 등의 지휘로 총 20명의 접주들이 9개 지역에서 대거 봉기했다고 적고 있는데,46) 그것은 남부와 서부지방을 중심으로 황해도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봉기했음을 뜻한다.
 
  봉기의 중심지는 5개 接이 봉기한 海州였다.47) 崔琉鉉 휘하의 동학농민군은 총집결 장소를 포동 부근의 竹川 장터로 정하고 각지에 통문을 보냈다. 昌洙는 팔봉산 아래 산다고 해서 자신의 接 이름을 「八峯」이라고 지었다. 푸른 비단에 「八峯都所」 넉 자를 큼직하게 써서 걸고, 「斥洋斥倭」의 기치를 높이 내걸었다.
 
  이처럼 昌洙가 봉기를 준비하느라 동분서주하던 때에 집에서 느닷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 집에 들어가니까 淳永 내외는 술과 떡을 장만하고 昌洙의 혼인 준비를 하고 있었다. 淸日戰爭이 일어나자 나이찬 아들 딸을 둔 사람들은 자식들을 혼인시키는 것을 중요한 의무로 알고 혼사를 서둘렀는데, 淳永 내외도 이러한 움직임에 휩쓸린 것이었다. 이때에 昌洙의 나이는 열아홉 살이었다. 그리고 상대는 어릴 때에 집에 데려오기도 했던 예의 함지박 장수 金致景의 딸이었다. 昌洙는 한사코 장가를 들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들의 단호한 태도에 淳永 내외도 단념하고 金致景에게 아들이 혼인을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면서 그의 딸도 다른 집으로 출가시키라고 말했다. 金致景도 무방하게 생각했고, 따라서 淳永과 金致景이 취중에 했던 婚約은 없었던 일이 되었다.48)
 
 
  昌洙의 接에 銃 가진 軍人이 제일 많아
 
 
  崔琉鉉 휘하의 동학교도 간부들은 회의를 개최했다. 우선 동학 연비 중에서 무기 가진 사람들을 모집하여 군대를 편성하기로 했다. 昌洙는 본래 산골 출신인데다가 상민이었으므로 그의 상민 연비 중에는 산포수가 많았는데, 이들 산포수들은 자신들의 銃器를 가지고 있었다. 그밖에 인근 부잣집에서 약간의 護身用 武器를 거두어 오기도 하여 部隊 편성을 하고 보니까 昌洙의 接에는 총 가진 군인이 700여 명이나 되어 다른 어느 接보다 우세한 무력을 확보했다.49)
 
  黃海道 農民軍은 대체로 두 가지 방법으로 무기를 조달하고 있었다. 첫째는 스스로 탄약고와 화약제련소 등의 武器製作所를 설치하여 자력으로 조달하는 방법이었다. 황해도는 무기제작에 필요한 납과 철 등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어서 일찍부터 광산개발이 성행했다. 그리하여 장연부에 灰汁取搾所(회즙취착소)를 만들어 火藥을 제조했고, 松禾(송화) 溫井에는 칼과 창을 만드는 제조소를 설치하여 무기를 만들었다.50)
 
  다른 하나의 방법은 각 官衙의 武器庫를 습격하여 무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당시 日本軍이 〈관아에 있는 총기탄약이 적을 방지하는 무기가 아니라 적에게 공급되는 무기가 되었으니, 즉 관아는 적의 무기공급소였다〉라고 할 정도로51) 농민군의 무기고 습격은 빈번했다.
 
  金昌洙의 산포수부대는 海州城 공략 農民軍의 주력 부대가 되었다. 본래 산포수들은 官砲로서 관에 등록되어 그 통제를 받았는데, 평소에는 농업에 종사하다가 유사시에 동원되는 직업적 성격을 띤 지방의 武裝組織이었다.52) 그런데 이들 산포수들은 농민군에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농민군 진압을 위한 토벌군의 주력부대로 참여하기도 했다. 산포수는 일정한 계급의식을 가진 동질적인 집단이라기보다는 전투에 대한 代價만 받게 되면 그 보수에 따라 농민군과 진압군의 어느 쪽에나 참여할 수 있는 용병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53)
 
  11월 중순이 넘어가면서 각지에서 따로 따로 활동하던 동학농민군이 점차 해주성 주위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11월20일에 崔琉鉉 휘하의 동학농민군 5000명이 해주성 西門 쪽의 竹川 장터에 집결했다.54) 監司의 수기에는 이때에 집결한 농민군의 지휘자가 崔瑞玉이라고 했으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에 崔瑞玉은 崔琉鉉이었을 것이다. 같은 날 南門 쪽의 翠野(취야) 장터에도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이 집결했는데,55) 이들 농민군은 아마도 林宗鉉 휘하의 동학농민군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흘 뒤인 23일 새벽에는 취야 장터의 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아서 두 시간에 걸친 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56) 황해도 동학농민군이 해주성 공략을 위해서 총집결한 것은 11월27일이었다. 昌洙도 산포수부대를 이끌고 竹川 장터로 나아갔다.
 
 
  西門攻擊의 선봉장에 임명돼
 
 
  황해도는 동학교단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57) 농민전쟁기에도 敎壇과 직접적인 연계가 없는 林宗鉉, 元容日 등의 세력과 교단의 지시를 받는 崔琉鉉, 吳膺善 등의 세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58) 그리하여 2차 해주성 공략을 위해 집결한 황해도 동학농민군은 하나의 지도체계에 따라 작전을 수행하지 못했는데, 이는 崔琉鉉 등의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해주성 공략의 전략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한계였다.
 
  농민군은 이처럼 죽천 장터와 취야 장터 두 방향을 중심으로 집결했는데, 장곡면 죽천은 信川, 長淵 방면에서 해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고, 취야 장터는 甕津(옹진), 馬山 방면에서 해주로 들어오는 길과 長淵郡에서 두곡면을 지나 해주로 들어오는 큰 길이 서로 만나는 곳에 위치한 황해도 남부 일대의 가장 큰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였다.59)
 
  이날의 동학농민군의 해주성 공략 전투상황에 대해서는 「백범일지」와 함께 당시의 황해 감사 鄭顯奭(정현석)의 수기인 「甲午海營匪擾顚末(갑오해영비요전말)」과 농민군을 패퇴시킨 日本軍 將校 스즈키 아키라(鈴木彰)의 「東學黨征討略記(동학당정토약기)」의 세 가지 기록이 있는데,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전투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최고회의에서는 海州城을 함락하여 貪官汚吏(탐관오리)와 日本人을 다 잡아 죽이기로 결정하고 昌洙를 先鋒으로 결정했다. 昌洙가 선봉으로 결정된 것은 나이는 어리지만 평소에 武學(곧 兵法)에 연구가 있었고, 또 昌洙의 接이 순전히 산포수로 무장된 정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의 이면에는 지도부가 자기들이 총알받이가 되는 것을 꺼려한 점도 있었다.60)
 
  昌洙는 최고회의의 결정을 수락했다. 그는 말에 올라 「先鋒」이라는 사령기를 잡고 海州城으로 전진하는 농민군의 선두에 섰다. 농민군이 해주성 西門 밖 仙女山에 진을 친 다음 총지휘부는 총공격령을 내리면서 선봉인 昌洙에게 작전계획을 맡겼다. 昌洙는 다음과 같은 작전계획을 제의했다.
 
  〈지금 城內에 京軍은 아직 도착하지 못했고 오합지졸로 편성된 守城軍 200여 명과 왜병 7명이 있다. 先發隊로 하여금 먼저 南門을 향하여 진격하게 하면 先鋒 휘하의 부대는 전력을 다하여 西門을 공략한다. 總所(總司令部)에서는 추세를 보아 아군이 취약한 곳을 응원한다〉61)
 
  昌洙가 제의한 작전계획은 그대로 채택되었다. 이 때에 日本軍이 성 위에 올라가 試驗銃(공포) 네댓 발을 쏘았다. 南門으로 향하던 선발대가 놀라 도주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남문으로 나와 도주하는 군중에게 총을 연발했다.
 
  昌洙는 全軍을 지휘하여 선두에 서서 西門에 도착하여 맹공을 가했다. 이때에 갑자기 總所에서 퇴각을 명령했고, 선봉대가 퇴각을 위해 머리를 돌리기도 전에 군중들은 산과 들로 도망했다. 昌洙가 도망하는 이유를 물으니까 南門 밖에서 서너 명이 총에 맞아 죽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昌洙의 부대도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62)
 
  「백범일지」의 위와 같은 서술만으로는 이날의 전투 상황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려운데,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두 기록이 참고가 된다.
 
  우선 昌洙가 제안한 작전계획이 정보 부족에 의한 중대한 판단착오였던 것이 이날의 동학농민군의 해주성 공략이 실패하는 큰 원인이었다. 昌洙는 적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군이 성 밖으로 빠져나갔다고 생각하고 이때가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최적의 시점이라고 판단했던 것인데, 黃海監司 정현석은 日本軍이 빠져나간 틈을 타서 농민군의 총공세가 있을 것을 예측하고 은밀히 일본군을 성내에 진입시켜 놓고 있었다. 성내에 있던 일반 군졸들과 서리들도 모르게 新式火器로 무장한 일본군 40명이 비밀리에 東門을 통해 성내에 진입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城內의 병력은 日本軍 40명,63) 營砲 200여 명을 주력으로 하고 그밖에 監營에 소속된 각종 하급 서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반면에 이날 해주성 공격에 직접 참가한 東學農民軍은 6, 7천명이었다. 그밖에 10리쯤 떨어진 곳에 1만명, 30리쯤 떨어진 취야 장터에 1만3, 4천명이 집결해 있어서 해주성 공략에 동원된 동학농민군은 무려 3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64) 그것은 과장된 숫자일 수 있을 것이나, 全琫準이 公州城공략을 위해서 동원한 농민군의 병력이 1만여 명이었던 점65)을 감안하면 해주성 공략에 동원된 농민군이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다섯 時間에 걸친 大血戰
 
 
  日本軍 쪽의 기록으로 보면 전투상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남문에 접근해 온 동학농민군 300여 명은 가까이에 있는 솔밭에 숨어서 일본군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서쪽의 동학군은 사격을 해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스즈키는 서쪽의 동학군에게는 총포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40명의 병력을 둘로 나누어 20명은 성안에 남아서 남문 쪽의 동학농민군을 대응하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 20명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와 서문 쪽의 동학군에게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그러자 서문 쪽의 동학군은 모두 도망했다는 것이다. 스즈키가 말하는 서문 쪽의 동학군이란 昌洙가 소속된 최유현 중심의 농민군 부대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남문 쪽의 동학군에 대해 앞쪽과 옆쪽에서 사격을 가하여 4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퇴각시켰다. 일본군은 약 시오리쯤 더 추적했으나 농민군의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이날의 접전은 공략이 시작될 때부터 약 5시간에 걸친 대혈전이었다.66)
 
  감사의 수기에 따르면 이날의 전투에서 산포수 20명이 사망하고, 15명이 생포되었으며, 관군과 일본군의 인명 피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아무튼 昌洙가 참여한 동학농민군의 제2차 해주성 공략은 이처럼 무참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패전의 결정적인 원인은 화력의 열세였다. 동학농민전쟁 당시에 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파견된 일본군이 소지했던 무기는 스나이더(Snider) 소총이었다. 스나이더 소총은 영국제 엔필드(Enfield) 소총을 개량해 만든 것으로서 1867년부터 사용되었는데, 최대 사정 거리가 1800m나 되었다.67) 그것에 비해 동학농민군이 사용한 화승총의 사정 거리는 100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화승총은 격발 과정도 복잡했다. 그리하여 東學農民軍은 적을 빤히 쳐다보면서도 쏘지 못했다.68) 또한 화승총은 장마철이나 한겨울 추위에서는 발사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69) 농민군이 해주성을 공략한 것은 11월27일(양력 12월23일)이었으므로 그러한 화승총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화력뿐만 아니라 戰鬪力의 열세도 패전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동학농민군은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다. 농민군의 주력인 산포수부대는 해주성 공략을 앞두고 새로 조직된 부대였고, 昌洙 역시 총기 사용이나 전투 경험이 전혀 없었다.
 
  呪術(주술)의 힘에만 의지하고자 한 東學敎徒들의 신앙도 문제였다. 1894년 9월부터 7개월 동안 황해도 서북지방에 머물면서 東學敎徒들의 활동을 목격했던 미국인 선교사 벙커(Mrs. A. E. Bunker)는 이들 동학교도들은 〈戰場에서는 적의 탄환도 물로 변해버린다〉고 믿고 있었고, 실제로 1월(양력) 어느 날에 이 지방의 首府(海州를 가리키는 듯)에서 처음으로 20~30명밖에 안 되는 日本軍과 싸운 수천 명의 동학군은 〈그들의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보자 지도자들에게 呪術을 쓰라고 소리쳤다는 말도 들었다〉고 적고 있는데,70) 이는 동학농민군의 제2차 해주성 공략 때의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4) 같은 東學軍의 기습받고 부대 괴멸
 
 
  海州城에서 패퇴한 昌洙는 부대를 해주 서쪽에서 80리 떨어진 回鶴洞(회학동)의 郭監役(곽감역) 집에 집결시키기로 하고 선발대를 파견했다. 昌洙가 군사들을 마지막으로 수습하여 회학동에 도착해 보니까 무장 군인들은 흩어지지 않고 모두 모여 있었다. 郭監役이 어떤 사람이고 昌洙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해주성 패전에 분개한 昌洙는 일단 병사들을 정돈시키고 나서 잘 훈련된 군대를 만들기에 주력했다. 그는 동학교도 여부를 가리지 않고 전투 경험이 있는 장교 경력자를 초빙하여 군사들에게 총술, 행군, 체조 등을 교련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초면의 두 사람이 昌洙에게 면회를 요청했다. 그들은 文化 九月山 아래 사는 鄭德鉉과 禹鍾瑞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두 사람은 昌洙보다 나이가 열 살은 더 많아 보였고,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무엇을 하던 사람들이었는지는 「백범일지」에도 언급이 없다.
 
  昌洙가 찾아온 이유를 묻자 그들은 태연하게 말했다.
 
  『동학군이란 한 놈도 쓸 만한 것이 없는데, 그대가 좀 낫다는 말을 듣고 한 번 보고 싶어서 왔네』
 
  이 소리를 듣고 같이 앉아 있던 昌洙의 연비들이 벌컥 화를 냈다. 동학을 비방하는 자니, 무례한 자니 하는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昌洙는 크게 화를 내며 『손님과 면담하는데 이렇게 무례한 것은 나를 돕는 것이 아니라 멸시하는 것이다』 하고 연비들의 무례함을 꾸짖고, 그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세 사람만 남자 昌洙는 예의를 갖추어 『선생들이 이렇게 먼 길을 오신 것은 저에게 좋은 계책을 가르쳐 주고자 하심이 아닙니까?』하고 말했다. 정덕현은 『내가 설혹 계책을 말하여도 듣고나 말른지, 그대가 실행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네. 요새 동학군 接主라는 자들이 호기 충천해서 선배를 무시하는 판인데, 그대도 그런 접주의 한 사람이 아닌가?』하고 반문했다. 昌洙는 더욱 공손한 말투로 『제가 다른 접주와 같은지 아닌지는 먼저 가르쳐 주신 뒤에 제가 실천하는 것을 보시고 나서 판단하시는 것이 어떠하십니까?』하고 말했다.
 
  그제서야 鄭德鉉은 흔쾌히 昌洙와 악수를 하고 다음과 같은 계책을 말했다.
 
  첫째, 軍紀正肅:병졸들이 서로 절하거나 경어 쓰는 것을 폐지할 것.
 
  둘째, 民心을 얻을 것:東學黨이 총을 가지고 마을을 다니면서 곡식이나 돈을 빼앗는 강도와 같은 행위를 금지할 것.
 
  셋째, 賢者를 초빙하는 글을 발포하여 經綸(경륜) 있는 인사를 많이 얻을 것.
 
  넷째, 全軍을 九月山에 모아 訓練을 실시할 것.
 
  다섯째, 載寧과 信川 두 군에 왜놈이 貿米 수천 석을 쌓아두었으니, 그것을 몰수하여 貝葉寺(패엽사)로 옮겨 양식에 충당할 것.
 
  이 다섯 가지는 金昌洙 부대를 포함한 동학군의 공통적인 과제였다. 昌洙는 매우 기뻐하며 그것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는 당장 全軍을 소집하여 鄭德鉉은 謀主(모주)이고 禹鍾瑞는 從事(종사)라고 선언하고 두 사람에게 경례를 시켰다.71)
 
 
  淸溪洞의 安泰勳進士가 密使 보내와
 
 
  구월산으로 진을 옮길 준비에 분주하던 어느 날 밤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淸溪洞의 安泰勳(안태훈) 진사가 보낸 밀사였다. 「安重根血鬪記」에는 이때에 파견된 밀사가 安泰勳의 장남인 安重根이었다고 적혀 있으나72) 안중근의 자서전인 「安應七歷史」나 「백범일지」에는 그러한 언급이 없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때의 밀사가 安重根이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백범일지」는 安泰勳의 인품에 대해 〈文章과 名筆이 해서지방은 물론이요, 경향에 널리 알려져 있고 智略을 겸비하여 당시 조정 대관들도 정중히 대접하는 이로서〉라고 적고 있는데,73) 그 당시에 昌洙가 安泰勳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安泰勳은 동학군이 봉기하자 청계동 자기 집에 義旅所(의려소)를 설치하고 그의 동생과 아들들로 하여금 병사를 담당하게 하면서 격문을 뿌려 산포수 70여 명과 장정 100여 명을 모아 부대를 조직했다.74) 그는 서울의 어느 대신의 원조 아래 黃海監司와 긴밀히 연락하면서 동학농민군 토벌에 나서서 信川지방의 농민군 토벌에 큰 성과를 거두었고, 11월에는 元容日 부대 2000여 명을 대파하기도 했다.75) 그리하여 황해도 동학군은 안태훈 부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또 동학농민군이 해주성을 공략했을 때에 감사의 요청으로 안태훈이 지원군을 보냈다는 주장도 있으나,76) 이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天峰山 너머 청계동은 金昌洙 부대가 머물고 있는 회학동과는 20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昌洙도 항상 청계동 쪽을 경계하고 있던 참이었다.
 
  정덕현은 밀사를 만나 보고 나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안태훈은 비밀리에 昌洙를 조사하고 난 뒤에 〈군이 젊고 대담한 인품을 지닌 것을 사랑하여 토벌하지 않을 터이지만, 군이 만일 청계를 침범하다가 패멸당하게 되면 人材가 아깝다〉는 후의에서 밀사를 보냈다는 것이었다.77)
 
  安泰勳이 밀사를 보낸 것은 서로 있을 수 있는 피해를 사전에 막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동학군 중에서 規律과 訓練이 비교적 잘된 金昌洙 부대와 바로 가까이에서 대치하고 있는 것은 안태훈으로서도 은근히 불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안태훈은 일본 토벌군의 면담 요청을 거절할 정도로78) 義氣가 강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昌洙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있었다는 말도 거짓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뒤이어 안태훈이 昌洙에게 피신처를 제공해 주기까지 하는 점으로 미루어 보면 그의 행동은 신임 감사로 부임한 趙熙日(조희일)의 동학군 진압책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11월30일에 해주에 도착한 趙熙日은 일본군의 혹독한 농민군 진압책에 반대하여 적극적인 說諭策(설유책)을 폈다.79) 그는 平山府使가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동학군을 토벌하는 데 주력한다는 이유로 파면시켰다.80)
 
  조희일의 설유책은 효과를 발휘했다. 昌洙를 동학에 입도시킨 吳膺善과 崔琉鉉 등이 황해감사에게 올린 소장에서 신임 감사의 설득에 감화되어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영구히 양민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것이나,81) 林宗鉉을 狀頭로 올린 소장에서 조희일의 설유에 응하고 자신들이 지닌 무기를 水營에 반납하겠다고 한 것82)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안태훈이 밀사를 파견했기 때문에 昌洙는 이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모회의를 소집한 결과 이를 수락하기로 하고 다음과 같은 밀약을 체결했다.
 
  〈나를 치지 않으면 나도 치지 않는다. 양쪽 중에 어느 한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83)
 
  동학농민군과 토벌군이 이러한 밀약을 맺었다는 것은 매우 의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밀약대로라면 만일에 동학농민군이 함께 청계동을 공략하는 경우에는 昌洙는 같은 동학농민군과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가능성은 희박했으므로 이 밀약은 昌洙가 관군이나 일본군 등 다른 토벌군에 의하여 위험한 처지에 빠질 경우에 안태훈이 監營 등에 작용하여 昌洙를 구원하겠다는 약속의 성격이 더 강한 것이었을 것이다.
 
 
  九月山 貝葉寺로 부대 옮겨
 
 
  패엽사로 부대를 이동한 昌洙는 절 입구에 초소를 지어 군사들의 산 밖 출입을 엄금했다. 그는 長期戰에 대비하여 軍糧米 확보에 나섰다. 먼저 文化 東山坪에 일본인이 쌓아 둔 쌀을 빼앗아 패엽사로 옮겼다. 쌀을 몰수해 놓고 산 아랫마을에 쌀 한 섬을 져오면 서 말을 준다고 고지하자 그 많은 쌀을 하루 만에 모두 옮길 수 있었다. 그리하여 40석은 운반 경비로 사용되고 나머지 110석을 패엽사로 옮겼다.84) 그런데 「백범일지」에는 이때에 몰수한 군량미가 백미 1000여 석이라고 했으나85) 이는 착오이다.
 
  昌洙는 軍律을 강화하여 동학군으로서 민가에 피해를 주는 무리를 엄격하게 다스렸다. 각 마을마다 〈동학을 빙자하여 돈을 강제로 빼앗거나 행패를 부리는 무리가 있으면 즉각 보고하라〉고 고지하고, 이 훈령에 따라 고발되면 체포하여 무기를 가진 사람은 무기를 빼앗고 곤장과 태장을 가했다. 그러자 금방 사방이 평안해지고 민심이 안정되었다.
 
  九月山에서 昌洙가 가장 역점을 두어 시행한 것은 사격훈련 등의 軍事調練과 널리 人材를 구하는 것이었다. 昌洙는 현인을 초빙하는 글을 포고하고 또 구월산 주위에 평판 있는 인사를 조사하여 혼자 직접 걸어서 찾아가기도 했다. 그리하여 신천군 月精洞의 宋宗鎬(송종호)를 모셔와 자문을 받기도 하고, 豊川郡의 許坤(허곤)이라는 명사가 찾아와서 합류하기도 했다.
 
  송종호는 初試(초시)에 합격한 사람으로서 일찍이 上海 등지를 다녀와서 해외 사정에도 정통했고 사람됨이 걸출하여 영웅의 기풍이 있었다.86) 허곤은 문필이 뛰어나고 사무에 밝은 사람이었다. 우종서, 송종호, 허곤은 이때에 맺은 인연으로 뒷날 金九가 장련지방을 중심으로 新교육운동을 추진할 때에 동지로서 再결합하게 된다.87) 특히 우종서는 뒷날 金九를 기독교에 입교시키는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이때의 이들의 만남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패엽사에는 道僧으로 명성이 높은 주지 荷隱堂(하은당)과 그 제자 등 수백 명의 남녀 승도가 있었는데, 昌洙는 이따금 하은당으로부터 설법을 들었다.88)
 
 
  李東燁 부대와의 갈등
 
 
  구월산 주변에 진을 친 부대는 金昌洙 부대 말고도 여러 부대가 있었다. 그 중에는 李東燁이라는 접주가 이끄는 부대가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李東燁은 앞서 해주성을 점령했던 林宗鉉으로부터 文化 接主에 임명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같은 동학군이면서도 金昌洙 부대와 李東燁 부대는 알력이 심했다. 李東燁 부대는 천민 출신이 대부분이었고, 그들은 동학의 이념이나 사회개혁의 의지보다는 관아를 쳐부수고 관리들을 굴복시키는 데서 심리적 쾌감을 느낄 뿐이었다는 기술도 있다.89)
 
  李東燁 부대의 군사들이 패엽사 부근 마을을 노략질하다가 金昌洙 부대원에게 잡혀 총기를 빼앗기고 벌을 받은 뒤에 풀려나기도 했다. 그런데 昌洙의 부하 가운데 마을로 내려가 재물을 약탈하다가 발각되어 엄한 형벌을 받고는 도망가서 李東燁의 부하가 되거나 아예 노략질을 하고 싶어서 밤중에 도망하여 이동엽의 부하가 되는 자들이 생겨났다. 이렇게 되자 金昌洙 부대는 점점 세력이 약해졌다.
 
  이 무렵에 昌洙의 신상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최고회의에서 昌洙의 東學接主의 감투를 벗기기로 결정한 것이었다.90) 그런데 이러한 중요한 사실에 대해 「백범일지」에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 것은 적이 의아스러운 일이다. 이때의 최고회의란 황해도 지방의 東學指導部를 가리키는 것이거나, 아니면 패엽사 주변에 진을 친 농민군 부대 지휘자들의 연석회의 같은 것을 뜻하는 것 같다.
 
  「백범일지」는 이때의 최고회의의 조치가 〈나에게서 兵權을 박탈하자는 야심이 아니요, 나로 하여금 몸을 보전하게 하려는 방책이었다〉고 적고 있는데,91) 그러한 조치가 어떻게 자신의 몸을 보전하게 하는 방책이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許坤을 평양에 파견하여 張好民의 소개를 받아 黃州兵使의 양해를 얻은 다음 패엽사에 있는 부대를 허곤에게 인도하게 한다는 것이었다.92)
 
  「兵使」란 지방 관군의 兵權을 장악하는 兵馬節度使를 가리키는 말인데,93) 평양에 있던 장호민이 누구이며 그의 소개로 황주병사의 양해를 얻어 부대를 허곤에게 넘겨 준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崔琉鉉, 林宗鉉 등 황해도 동학농민군 지휘부가 감사의 선무책에 순응하겠다는 단자를 보낸 것도 이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94) 金昌洙 부대의 경우도 그러한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아무튼 이 결정에 따라 허곤은 송종호의 편지를 지니고 평양으로 출발했다고 한다.
 
 
  南部地方의 農民戰爭은 막을 내리고
 
 
  1894년 12월2일에 농민전쟁의 최고 지도자였던 全琫準과 金開南이 체포됨으로써 치열했던 남부지방의 농민전쟁은 막을 내렸다. 해주성 공략 이후로도 토벌군과 산발적인 전투를 계속하던 황해도 지방의 동학농민군도 12월 중순을 넘어서면서는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官軍과 日本軍은 해주성을 거점으로 하여 주위의 동학농민군을 소탕해 나갔다. 서쪽의 옹진, 강령 방면의 농민군을 소탕한 토벌군이 북쪽을 향해 鶴嶺을 넘어온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러한 상황에서 金昌洙 부대는 어처구니없게도 토벌군이 아니라 같은 동학군인 李東燁 부대의 기습공격으로 괴멸되고 만다.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1894년 12월이었다. 昌洙는 신열과 두통이 심하여 며칠 동안 꼼짝 못 하고 방에 누워 있었다. 하은당이 문병와서 살펴보고는 말했다.
 
  『홍역도 치르지 못한 대장이로구려』
 
  하은당은 火砲領將(화포영장) 李龍善에게 昌洙의 방에 사람들이 일체 출입하지 못하게 하고는 자신이 직접 치료를 전담하고 홍역에 경험이 있는 나이 든 女僧으로 하여금 간병하게 했다. 그런데 「백범일지」에 따르면 金九는 서너 살 때에 이미 홍역을 앓았으므로 이때의 병은 홍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李東燁이 全부대를 이끌고 습격해 온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보고가 끝나자마자 李東燁의 군사들이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절 안으로 들이닥쳤다. 순식간에 절 안은 양쪽 군사들의 육박전으로 소란해졌다. 수적으로 열세인 昌洙 부대는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무렵 임종현은 문화 달천에 머물고 있었는데,95) 이동엽 부대는 임종현의 휘하에 있었으므로 金昌洙 부대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李東燁이 호령했다.
 
  『金접주에게 손대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이러한 李東燁의 호령에 대해 金九는〈그것은 李東燁이 나를 미워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를 박해하면 뒷날 큰 화를 입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96) 왜냐하면 昌洙 자신은 崔時亨으로부터 직접 接主 첩지를 받은 東學의 正統인 반면에 李東燁은 임시방편으로 임종현으로부터 첩지를 받은 말하자면 「2세 접주」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벌거벗은 몸으로 통곡하는 敗將
 
 
  金昌洙 부대를 격파한 이동엽은 화포영장 이용선만을 사형에 처하라고 했다. 격분한 昌洙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용선은 나의 지휘 명령에 따라 행동한 것뿐이다. 이용선이 죽을 죄가 있다면 그것은 곧 나의 죄이니 나를 총살하라』
 
  그러나 昌洙의 노호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李東燁은 부하에게 명하여 昌洙의 손발을 꽉 껴안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는 이용선만 끌고 나갔다. 잠시 뒤에 마을 어귀에서 총소리가 났다. 뒤이어 이동엽 부대는 퇴각하고, 이용선이 총살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昌洙는 황급히 마을 어귀로 달려갔다. 과연 이용선은 총에 맞아 죽었고, 그가 입었던 옷은 불타고 있었다. 昌洙는 이용선의 머리를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한참 울다가 자기 저고리를 벗어 이용선의 머리를 감싸 주었다. 그 저고리는 昌洙가 동학접주가 되어 지도자 노릇을 한다고 하여 어머니 곽씨 부인이 지어 보낸 생전 처음 입어 본 명주저고리였다.
 
  昌洙는 마을 사람들을 시켜서 이용선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껏 묻어 주게 했다. 昌洙가 눈 속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통곡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 옷을 가져다 주었다. 이용선은 함경도 定平 사람으로서, 장사하러 황해도에 와서 살고 있었다. 그는 사냥하는 총술이 있고 무식한 대로 사람을 다스리는 재주가 있어서 昌洙는 그를 화포영장에 임명했었다.97)
 
  이동엽 부대는 퇴각하면서 金昌洙 부대가 비축해 둔 군량미를 전부 가지고 가버렸다. 동학농민군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군량미 확보였다. 그들은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서 政府와 富豪의 곡식을 탈취하거나 半강제적으로 헌납받았다. 昌洙도 군량미 조달을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었다. 구월산으로 부대를 옮길 때에 일본인이 東山平에 쌓아둔 다량의 쌀을 빼앗은 것은 앞에서 본 대로이다.
 
  그밖에도 그는 해주 檢丹坊(검단방)의 朴泓錫(박홍석)이 쌓아 둔 벼 200석을 빼앗아 송화 접주 方元仲과 나눈 적이 있고, 석담의 李참판 집에서는 돈 250냥을 빼앗기도 했었다.98) 따라서 金昌洙 부대는 군량미를 비교적 넉넉히 확보해 둔 상태였을 것이다. 뒷날 昌洙는 동산평에서 옮겨 온 쌀 110석 모두를 李東燁에게 빼앗겼다고 진술하고 있다.99)
 
  그런데 이러한 李東燁 부대의 기습은 단순히 金昌洙 부대와 李東燁 부대의 알력 때문에 감행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알력까지 포함하여 앞에서 본 이른바 최고회의의 결정, 곧 昌洙의 동학 접주직을 거두는 조치와 관련이 있는 것이나 아닌지 생각해 볼 만하다. 昌洙가 官軍이나 日本軍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토벌군인 安泰勳과 모호한 관계를 갖는 점 등이 최고회의에서 문제가 되었을 수 있고,100) 또 李東燁 부대는 어쩌면 그러한 최고회의 쪽과 연계되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昌洙는 그날 밤으로 缶山洞(부산동)의 鄭德鉉 집으로 피신했다. 정덕현에게 그 동안의 사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복수할 결의를 말했다. 그러나 정덕현은 만류했다.
 
  『이용선의 죽음은 불행한 일이오. 그러나 형은 더 큰 일을 해야 할 장부이외다. 울분을 참으시오. 며칠 동안 홍역을 치료한 뒤에 나와 함께 풍진을 피하여 유람이나 떠납시다』
 
  『아니오. 이용선의 복수를 해야 합니다』
 
  『복수는 의리상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어요. 京軍과 日本軍이 여태 구월산을 공격하지 못한 것은 산 밖 이동엽 부대의 세력이 크고 또한 패엽사의 우리 부대도 험한 산세에 의거하고 있고 비교적 정예부대라고 듣고 있기 때문이오. 이제 두 부대의 싸움 소식을 들은 경군과 일본군은 곧바로 이동엽 부대를 섬멸하고 패엽사를 점령할 것이오. 그러니 복수를 말할 여지가 없어요』
 
  鄭德鉉의 판단은 옳았다. 昌洙는 정덕현의 집에서 며칠 동안 요양하다가 장연군 夢今浦(몽금포) 부근의 마을로 피신했다.101)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
 
 
  昌洙가 몽금포에 피신하고 있는 동안에도 황해도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이처럼 해를 넘겨서도 황해도 지역 농민군의 활동이 수그러들지 않자 조정에서는 대대적인 討伐에 나섰다. 3월에는 江華兵이 파견되어 이미 파견된 일본군과 연합하여 농민군을 토벌했다. 그리하여 농민군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昌洙는 李東燁이 잡혀가 사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한 각 군의 동학농민군도 저항 끝에 거의 패퇴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이런 소식을 들으면서 昌洙는 몽금포에서 석 달 동안 은거하고 있었다. 나는 새도 출입하기 어려운 마을이라는 몽금포 부근의 작은 마을에서 동학군의 잇따른 패전 소식을 들으면서 그 역시 패퇴한 「애기접주」 昌洙의 심경이 어떠했는지는 그의 「백범일지」에도 언급이 없다. 새로운 흥분과 희망으로 東學에 입도한 지 이태 만에 느낀 것은 또 하나의 커다란 좌절감이었을 것이다. 그 좌절감이 과거에 낙방했을 때나 관상책을 읽고 나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던 것은 뒤이어 淸溪洞에 머물 때의 자신의 심경이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한 「백범일지」의 솔직한 술회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먼저 科擧場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觀相書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도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연하던 차에 東學黨의 수양을 받아 新국가 新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102)
 
  이러한 감회는 東學의 교의에 대한 실망보다도 왕조의 교체와 평등사회의 도래에 따른 새로운 身分 상승의 기대가 무산된 데 대한 실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의 일 이후로는 「백범일지」에 동학에 대한 언급이 일체 없다.
 
 
  安泰勳 찾아 淸溪洞으로
 
 
  그러나 동학과 동학농민전쟁이 「바람잡듯 헛된 일」이 아니었음은 그 뒤의 이 나라의 역사가 웅변으로 말해 준다. 다만 金九의 이러한 처절한 술회는 그 뒤의 그의 社會活動과 관련하여 중요한 참고가 된다. 그것은 그토록 치열한 戰鬪經驗에도 불구하고 동학의 교의가 그의 價値觀으로서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것은 아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八峯都所에 높이 내걸었던 「斥洋斥倭」의 창의 구호는 淸溪洞에서 만난 유학자 高能善의 훈도를 통하여 衛正斥邪思想으로 내면화되었다가 그뒤에 金九가 開化論者로 바뀌면서 自己否定된다. 그러나 그 「斥倭」의 정서는 그러한 사상적 전환이 있고 난 뒤에도 新교육운동과 감옥생활과 오랜 독립운동 기간을 통하여 金九로 하여금 抵抗的 民族主義의 표상이 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昌洙는 1895년 2월에 鄭德鉉과 함께 몽금포를 떠나 텃골 집으로 돌아갔다. 淸日戰爭은 끝이 나고 동학농민군의 봉기도 진압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日本軍이 죽천 장터에 진을 치고 농민군을 수색하고 있었다. 淳永 내외는 매우 불안해 하며 昌洙에게 차라리 멀리 떠나 피신하기를 권했다. 그러나 패전의 장수가 찾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鄭德鉉은 궁여지책으로 청계동 安泰勳을 찾아가 보자고 했다. 昌洙는 주저했다. 안태훈이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패전의 장수인 자신이 포로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평생 후회될 것이 염려되었다. 그러나 정덕현은 『안진사가 밀사를 파견한 진의는 군사적인 원조나 계략이라기보다는 나이 어린 형의 담대한 기개를 아낀 것이니 염려 말고 같이 갑시다』 하고 昌洙를 설득했다. 달리 어떤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昌洙는 청계동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103)
 
 
  李承晩의 東學批判
 
 
  그런데 王室과 朝廷에 대하여 강한 불만과 저항감을 느끼면서도 科擧 말고는 달리 진로를 찾지 못하고 계속 書堂에 나가면서 고뇌하고 있던 궁색한 젊은 儒生 李承晩이 東學과 東學農民戰爭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李承晩 자신의 자서전 초고나 전기들에는 이때의 일과 관련하여 전혀 언급이 없다.
 
  李承晩은 동학농민전쟁이 전국을 휩쓴 바로 그해 늦가을부터 新學問을 배워 開化運動의 급진 과격파로 활동하게 되는데, 이때의 李承晩은 東學運動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뒤에 옥중에서 쓴 「청일전기」에서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탐관오리들의 핍박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만일 격분하여 일어날진대 법을 범치 말며 경계를 잃지 말고 옳은 도리로 종용히 조처하려 할진대 정부에서 부득불 전국 민심을 따라 준행하여 주었을지니 전국에 큰 이가 되었을 것이어늘, 이름을 동학이라 하고 어리석게 정감록에 무슨 말이 있다, 혹 무슨 신장을 부린다 하여 천하고 무식한 말을 믿고 도처에 소요하여 필경 난민이 되고 말았으니, 이는 다만 내 나라에만 득죄함이 아니라 세상에 큰 죄인들이 됨이라.
 
  기왕 일은 다 어두워서 모르고 그러하였거니와 한 번 경력한 후에는 저마다 짐작할 만하거늘, 들으니 지금도 어리석은 백성들이 종시 요사한 말을 믿고 작당하여 기도를 한다 하며 부적을 써서 민심을 현혹케 하는 자가 있다 하니, 저의 어리석은 것은 이루 말할 수 없거니와 나라를 위하여 대단 위태히 여기노라.〉104)
 
  그리고 또 옥중에서 쓴 다른 글에서는〈한국의 東匪(동비:동학당)나 淸나라의 義和團은 모두 서양을 배척하고 옛날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내세워 義擧라고 표방하며 천하에 웃음거리를 남기고 스스로 패망을 자초하였다〉105)라고 혹평했다.
 
  東學과 東學農民戰爭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李承晩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開化派들의 공통된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는 李承晩이 어떻게 培材學堂에 들어가서 新學問을 익히고 급진적인 開化派가 되는가를 다음호에서 살펴보기로 한다.〈계속〉●



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과거제도 폐지로 배재학당에 입학

 1894년(고종 31)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추진된 甲午更張(갑오경장)은, 비록 일본 세력이 배후에서 작용한 것이기는 했으나, 우리나라 근대화의 기점이 될 만큼 중요한 制度改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實學에서부터 甲申政變과 東學農民戰爭에 이르는 朝鮮時代 후기의 여러 가지 개혁운동들이 표방한 내용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먼저 정치적으로는 開國紀元을 사용함으로써 淸과의 종속 관계에서 벗어났음을 천명했다. 그리고 議政府와 宮內府를 분리하고 종래에 명확한 구별이 없었던 財政도 분리시켰다. 中央과 地方의 관제를 개혁하고, 司法權은 행정기구에서 분리하여 독립시켰다.
 
  관제개혁과 관련하여 중요한 조치는 科擧制度를 폐지한 것이었다. 경제면에서는 재정을 일원화하고, 銀本位制를 채택했으며, 조세도 종전의 物納制를 金納制로 바꾸고, 도량형을 통일시켰다.
 
  사회면에서는 더욱 획기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門閥과 班常의 구별을 없애고 노비제도를 폐지했다. 조혼을 금지하는 한편 과부의 再嫁(재가)를 허용했다. 인신매매를 금지하고, 刑罰에서 연좌제를 폐지했다.
 
  1895년 1월에 선포된 洪範十四條는 갑오경장의 내용을 총괄한 기본 강령이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성질을 띤 憲法〉1)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淸日戰爭에서 승리한 일본이 갑오경장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더욱 강화함에 따라, 갑오경장은 그 역사적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반발에 부딪쳐 좌절되고 말았다.2)
 
 
  『伯夷 叔齊같이 산채를 씹다 죽을지언정…』
 
 
  갑오경장의 제도개혁 가운데에서 兩班 선비사회에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역시 科擧制度의 폐지였다. 부패할 대로 부패하여 본래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전국 儒生들의 과거에 대한 집착은 줄어들지 않았고, 그것이 갑오경장 전체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 李敬善의 다음과 같은 반응은 그 전형적인 보기였다.
 
  과거를 통한 아들의 입신출세 길이 영영 막혀버린 사실에 대해 울분을 참지 못한 敬善은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치고 책상을 치고 또 자기 무릎까지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흥! 미친놈들! 조상이 천년을 하루같이 지켜오던 聖賢의 길을 폐지하고, 그러고도 그놈들이 벌을 받지 않을까? 人材를 골라서 쓰지 않는다면 어느 개새끼라도 마구 갖다 쓸 작정인가! 無廉(무렴)한 왜놈들! 무렴한 개화당놈들! 그놈들 때문에 인제 나라는 망하고 마느니라! 두고 보아라!』3)
 
  李承晩 자신의 절망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때의 일을 그는 자서전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戰爭(淸日戰爭)이 끝난 직후에 낡아빠지고 많이 악용되어오던 과거제도가 폐지되었는데, 이 조치는 전국 방방곡곡에 묻혀 있던 야망적인 청년들의 가장 고귀한 꿈을 산산이 부수는 조치였다.〉4)
 
  아버지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承晩은 마지못해 한 마디 되뇌었다.
 
  『새로 된 시험제도라는 것이 있기는 한 모양입니다만…』
 
  과거시험 대신에 새로 마련된 시험제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일반 하급관리 채용을 위해서는 보통시험과 특별시험의 두 가지를 두어 전자는 국문, 한문, 寫字(사자: 글씨 베껴쓰기), 산술, 국내 정략, 외국 사정, 發策(발책: 논문) 등의 과목을 시험하고, 후자는 특별한 기술 소유자를 추천하여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급관리 채용은 현임 고급관리의 협의 공천으로 후보자 세 명을 국왕에게 奏聞(주문)하여 그 가운데에서 국왕이 택일하는 勅任官(칙임관)과 대신이 선발하여 都察院(도찰원)의 평의를 거쳐 국왕의 재가를 받는 奏任官(주임관)제도를 두었다.
 
  그러나 새 시험제도라는 말에 경선의 소리는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뭐? 새 시험제도라고? 그래 그깐 놈들에게 붙어서 개화당이 돼? 어림도 없는 소리다. 선비는 죽어도 궁색해선 안 되느니라. 伯夷(백이) 叔齊(숙제)같이 산채를 씹다가 죽을지언정 어찌 그까짓 왜놈배들에게 부동한단 말이냐? 꿈에라도 너는 그따위 시험제도 같은 건 생각지도 말고, 이 난세에 性命을 보존할 생각을 해라. 고르지 못한 때에 묻혀서 사는 것은 예로부터 있던 길이다』
 
  이런 대화 끝에 敬善은 자리에 눕더니 갑자기 목이 메인 듯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스스로 과거 길에 실패하고 家産을 탕진한 뒤에 晩得으로 너 하나를 얻어서 네게나 어떻게 立身의 길이 열리는 걸 보려 했더니, 이젠 그것도 다 틀리고 딴 세상이 되고 말았구나. 그러니 이제 내게 무슨 보람이 있겠느냐. 어떻게 살든 이제는 벌써 구차한 목숨들이 되었다.… 내일 나는 황해도 너의 누이 집에나 다녀올까 한다.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지만 딴 생각 내지 말고 식구들의 연명책이나 생각해 보거라』5)
 
  이렇게하여 承晩에게는 가난하고 암담한 나날이 더해갈 뿐이었다. 일가친척들도 이 출세의 길을 잃은 젊은 선비의 가족들을 돌보아 주는 이가 없게 되어 여섯 식구는 죽도 거르는 날이 많아졌다. 이때 承晩에게는 세 살배기 아들 鳳秀(봉수)가 있었다. 그 어린 7代독자를 굶기는 것은 敬善이나 承晩 내외나 자신들의 허기를 견디기보다 더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桃洞書堂 글동무 申肯雨의 설득
 
 
  그러나 과거제도의 폐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과거에 집착해 온 承晩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큰 행운의 계기가 되었다. 그의 운명의 전환은 培材學堂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承晩이 배재학당에 입학하게 되는 과정을 서정주와 올리버는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承晩은 과거제도가 폐지된 다음에도 한동안은 습관대로 書堂에 나갔다. 그러나 서당은 이미 공허한 장소가 되고 있었다. 학도들도 뿔뿔이 흩어져서 서당에 가야 말벗 하나 없었다. 그리하여 집에 들어앉아서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承晩에게 어느 날 도동서당의 글동무 申肯雨가 찾아왔다.
 
  긍우의 아버지 申冕休(신면휴)는 일찌감치 기독교로 개종하여 개화당에 가담하고 있어서 세 아들에게도 신학문을 공부하게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긍우는 維新派의 명사 玄采(현채)에게서 일본말을 배우고 있었다. 현채는 「東國史略」, 「萬國史記」 등을 저술하고 또 일본학자들이 쓴 역사책을 번역하는 등으로 우리나라 근대 역사학의 성립에 기여한 사람이다.6) 그리고 긍우의 아버지 신면휴는 이경선과도 허물 없는 사이였다.
 
  『오늘은 자네에게 한 가지 꼭 권할 일이 있어서 왔네』
 
  긍우는 자리에 앉자마자 承晩에게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자네도 대강은 짐작하겠지만 때는 이미 바뀌어 가고 있네. 儒學을 닦아 과거를 보던 때는 지나고, 이제는 開化 천지가 되어가고 있단 말일세. 주저하지 말고 자네도 우리하고 같이 개화를 배우세. 일본말도 배우고 英語도 배우고 算學도 배우고 세상 돌아가는 도리도 알아보잔 말이야.
 
  어쩔 텐가? 내일부터라도 같이 玄采 선생한테 갈 텐가? 과거나 볼 생각은 이제 되지도 않을 것이니 그만 집어치우고…』
 
  그러자 承晩은 찾아온 친구가 무안할 정도로 버럭 화를 냈다.
 
  『아따, 자네 말주변이 꽤 늘었네 그려. 그것 모두 玄采라는 사람한테서 배웠나? … 자넨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儒者가 아니고 天主學쟁이고 또 왜놈의 사환인가? 실없는 사람 같으니! … 그런 소리 하려면 아예 두 번 다시 우리 집에 오지 말게!』
 
  그러나 긍우는 단념하지 않고 기차나 기선 등 서양문물의 놀라움을 설명하면서 承晩을 설득하려고 했다. 承晩은 처음에 긍우가 섣불리 자기를 움직이려 하는 것이 불쾌했으나, 그의 너무나도 진지한 태도 때문에 웃음을 띄우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나 좋으면 開化黨을 맘껏 하게. 그렇지만 나한테 권할 생각은 아예 꿈에도 내지 말게』
 
  『고집부리지 말고 좀 생각해 보게. 일본말과 영어를 배워두어서 해로울 건 무에 있단 말인가? 행여 外國使臣으로 가더라도 말쯤은 알아둬야 할 것 아닌가? … 며칠 새 또 올 테니 잘 생각해 보아』
 
  긍우는 그 뒤에도 하루가 멀다하고 承晩을 찾아왔다. 게다가 긍우는 가난한 친구의 처지를 걱정하여 몇 차례 쌀말과 장작짐을 하인에게 들려보낸 일도 있었다. 그리하여 承晩은 그의 열성과 우정에 감복하여 긍우를 이렇게 만든 것이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해 보고 궁금히 여기게끔 되었다.7) 이때의 일을 李承晩 자신은 자서전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당을 떠나 「새것」을 배우러 간 친구들을 반역자로 여기고 있던 나에게 친구들이 때때로 놀러와서 電報며 鐵道며 飛行機 등등 서양에서 발명된 기괴한 것들에 대해 배우라고 역설했으나 나는 『그들이 天地를 개벽해도 나는 어머니의 宗敎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하면서 일축하곤 했다.〉8)
 
  이처럼 承晩은 그때까지도 新學問을 배우는 것은 天主學쟁이가 되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어머니의 종교」를 배반하는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두어 달이 지난 뒤의 동짓달 어느 날 저녁 무렵에 긍우가 다시 承晩을 찾아왔다. 긍우는 承晩에게 培材學堂에 나와 볼 것을 애원하듯이 권했다.
 
  『入學이야 하든 안 하든 꼭 한 번 구경이라도 해보게. 이것까지도 못 들어 주겠는가?』
 
  이때는 긍우가 배재학당에 입학한 직후였다.9) 承晩은 그의 우정도 우정이려니와 한편으로는 그 「培材學堂」이라는 데가 어떤 곳인지도 궁금해졌다.
 
 
  노블이 내미는 손을 처다보기만
 
 
  며칠 뒤에 드디어 承晩은 긍우와 그의 동생 興雨와 함께 배재학당을 방문했다. 긍우는 承晩보다 세 살 위였고 흥우는 承晩보다 여덟 살 아래의 소년이었다.
 
  배재학당 사무실에 당도하자 긍우는 承晩을 미국인 교사 노블(W.A. Noble)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노블은 1892년에 조선에 와서 培材學堂의 교사가 된 사람으로서 承晩이 입학할 무렵에는 學術部長을 맡고 있었다.10)
 
  노블은 웃는 낯으로 흔연히 일어서서 『내가 노블이오. 잘 오셨습니다』하고 조선말로 말하면서 악수를 청했다. 그러나 악수를 아직 모르는 承晩은 적잖이 의아해 하며 생전 처음 보는 이 미국인의 하는 짓과 이상한 생김새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노블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李선생, 우리 학당에 오시는 것을 싫어하신다더니 어떻게 오늘은 이렇게 반갑게 오셨소? 참 잘 오셨소. 부디 좀 잘 살펴보시고 좋으시면 우리 학당에 입학하시오. 그리고 우리 미국사람들에게 조선말도 잘 좀 가르쳐 주시오』하고 말했다. 노블의 이러한 태도는 아마도 배재학당의 서양인들이 李承晩에 대해 웬만큼 예비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긍우로 하여금 承晩에게 입학을 종용하게 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노블은 앞장서서 承晩을 교실마다 안내했다.
 
  처음 承晩이 구경한 곳은 기도실이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나 「今日大城(금일대벽성) 生救主(생구주)」라는 금색 글자가 쓰인 붉은 비단폭을 벽에 걸어놓고 그 밑에 여러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 모습들이 어찌나 우습던지 承晩은 무심결에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긍우를 보고 물었다.
 
  『저게 天主學이지?』
 
  그러나 긍우는 질색을 하며 말했다.
 
  『천주학은 무슨 천주학이야? 그건 기도라는 것일세. 여기선 기도만 하면 그만이니까』
 
  다음에 들어간 곳은 北學班 교실이었다. 거기에서는 地理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칠판 옆에 시간표를 「月 火 水 木 金 土」의 요일별로 큼직하게 써서 붙여 놓고 있었다. 「金 木 水 火 土」의 五行밖에 모르는 承晩의 눈에는 그것이 五行을 잘못 뒤집어놓은 것으로 보였다.
 
  承晩은 또 긍우를 돌아보고 『저게 뭐냐? 오행 하나를 똑바로 쓸 줄도 모르고…』하고 말했다. 그러나 교단에 선 선생이 五大洋 六大洲와 朝鮮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처음 듣는 것이어서 신기했다. 그리하여 그는 北學班 교실에서 한참동안 서 있었다.
 
  옆에서 눈치를 챈 긍우는 承晩의 귀 가까이에 입을 대고 말했다.
 
  『저까짓 것은 아무 것도 아니야. 다녀보면 우리들이 모르던 새 지식이 얼마든지 나오니까. 가령 우리나라나 청국뿐만 아니라 世界 각국의 歷史라든지, 서당에서 못 배운 것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네』
 
  그들이 마지막으로 英語교실에서 한 미국인 교사가 학생들에게 영어단어를 가르치는 것을 보고 다시 노블 교사의 사무실로 돌아온 것은 점심시간이 다 된 때였다. 노블은 承晩에게 점심준비를 시켰으니 같이 먹자고 했다. 그러나 承晩은 굳이 사양하고 긍우 형제와 같이 밖으로 나왔다.11)
 
 
  家族들의 生計문제가 入學 동기
 
 
  培材學堂은 1882년의 韓美修好條約 이후로 본격적인 기독교의 전래에 따라 조선에 온 미국 北監理會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가 설립한 한국 최초의 新敎育機關이었다. 조선에서 기독교의 보급은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통해서 시작되었던 것은 널리 알려진 대로이다. 학당의 설립이 허용될 때까지도 서양종교의 선교활동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펜젤러가 1885년 8월부터 의사 지망생 두 사람에게 자기 집 서재에서 英語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학당의 효시였는데, 이듬해 2월에 高宗으로부터 「培材學堂」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음으로써 사회적으로 입지를 튼튼히 구축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培材」란 당시에 흔히 쓰이던 「培養人材」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었다.12)
 
  배재학당은 1887년 3월에 한국 최초의 르네상스 양식의 校舍(교사)를 신축했는데, 그 비용은 미국 감리교 선교부가 보낸 4,000달러로 충당했다. 그런데 이 새 校舍의 반지하실에 産業部를 두어 가난한 학생들이 학비를 벌면서 공부할 수 있게 한 것은 일찍이 조선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획기적인 일이었다.
 
  학생들은 처음에 붓을 매고 미투리 삼는 일을 했으나 일반시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고 곧 파산했다. 그러다가 그해 12월에 올링거(F. Ohlinger) 목사가 부임하여 이듬해 1월부터 三文出版社(Trilingual press)라는 인쇄소를 경영하게 되면서 학생들은 그곳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이 출판사는 國文, 漢文, 英文의 세 가지 활판시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聖書飜譯이 진전됨에 따라 많은 부수의 성서를 인쇄하게 되고, 주일학교용 교재나 일반 인쇄물도 주문을 받게 되어 학생들의 일거리가 많아졌다. 1896년에 와서는 인쇄소의 부대사업으로 제본소도 시작했다. 이 인쇄시설은 뒤에서 보듯이, 李承晩이 이 나라의 선구적 언론인으로, 그리고 개화운동의 선봉장으로 성장하는 모태가 되었다.
 
  朝鮮政府는 배재학당을 통역관 등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생각했고 학당을 찾아오는 학생들 가운데에도 英語를 배워 당장 출세하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이 무렵 배재학당에 다녔던 尹聲烈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배재학당에 입학하는 學員들은 대체로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는 일찍 개화한 선비집안 자제들이고, 둘째는 영어를 배워 譯官이나 그밖의 정부기관의 관직을 얻어 출세해 보려는 中流層의 청년들이었다. 名門집 자제들 가운데에는 잔심부름을 할 下人을 데리고 등교하는 學生도 있었다. 몇 달 다녀서 영어를 얼마쯤 해득하면 취직이 되어 나가는 學員들이 생기기 시작하자 洋學의 인기가 높아졌다.13) 따라서 처음에는 학생들의 入學과 休學 또는 就學이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펜젤러의 목적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배재학당의 첫 연례보고서(1888∼1889)의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배재학당의 목적은 조선 학생들에게 서구의 科學과 文學, 敎育과정에 대한 철저한 훈련을 제공하는 것이지만, 현재의 조선의 학교체제의 본질적인 특성과 결합시킨 것이다. 이 목적에 따라서 비록 수업의 대부분이 영어를 전달매체로 삼고 있으나, 中國 古典이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모든 학생은 의무적으로 중국 고전과목을 공부해야 한다.〉14)
 
  이때는 물론 과거제도가 폐지되기 전의 일이다. 이렇게 하여 배재학당의 교육은 급속히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기할 만한 사실은 조선인 교사나 학생들이 기독교 지식에 대한 관심을 크게 나타내고, 학교 채플에 모두 참석한 점이었다.15)
 
  1886년에 朝鮮政府에서 세운 최초의 신식학교였던 育英公院이 1894년에 폐교되자 조선 정부는 이듬해 정월 22일(양력 2월16일)에 배재학당과 통역관 양성을 위한 협정을 맺었는데, 그것이 배재학당이 급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협정의 주요 내용은 통역관 양성을 위해 조선 정부가 해마다 200명의 위탁생을 보내고, 학생들의 월사금과 학생 50명 당 조선인 副敎師 1명에 대한 봉급도 부담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협정서의 조선 쪽 서명자가 「外務衙門(외무아문) 主事 玄采」로 되어 있는 것이 주목된다.16) 앞에서 보았듯이 현채는 바로 신긍우의 일본어 선생이었다. 긍우는 처음에 承晩에게 玄采에게 가서 신학문을 배우자고 했다가 뒤에는 배재학당에 입학할 것을 권유한 것이었다. 이 무렵 배재학당은 위탁교육을 시킬 학생을 모집하는 데 각별히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왜냐하면 위의 협정에 따르면 만일에 학생이 200명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에는 조선정부의 보조금 지급조건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17) 그러므로 긍우가 承晩에게 배재학당에 입학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한 것도 그러한 학생모집운동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李承晩이 자서전 초고에서 〈進步派 정권은 여러 가지 학교를 세우고 관비로 운영하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외국어를 배우고 서양문명을 배우도록 온갖 장려를 하고 설득을 하였다〉18)고 적고 있는 것도 그가 배재학당에 입학할 무렵의 사회적 분위기와 그의 입학 동기를 짐작하게 한다.
 
  承晩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여러 가지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에 배재학당에서 노블이라는 사람이 자기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쳐달라고 하던 말도 되새겨졌다.
 
  그는 결심했다. 아버지의 염려가 아니더라도 承晩으로서 당장 절박한 문제는 가족들의 생계였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배재학당 아니라 그보다 더한 데라도 들어가자. 가령 긍우의 말과는 달리 배재학당이 天主學과 開化黨을 하는 곳이라 하더라도 내 마음은 그런 것에 빠져 들 리가 없다. 天主學과 開化黨, 그것이 참으로 어떤 것인가도 똑똑히 알아보자―.
 
  이렇게 그가 마음을 정리하고 누워 있을 때에 긍우가 찾아왔다. 承晩은 긍우에게 물었다.
 
  『아까 노블이란 서양사람이 조선말을 가르쳐달란 말을 했는데 그것이 정말일까? 그리고 또 월사금은 얼마나 줄 작정일까?』
 
  『그야 물론이지. 서양사람은 거짓말은 않네. 아마 적어도 생활비야 받게 되겠지. 그러려면 꼭 배재학당에 입학해야 해. 그래야 조선말 선생으로도 써 줄 테니까』
 
  그러자 承晩은 서슴지 않고 말했다.
 
  『그럼, 나 내일 배재학당에 입학하겠네. 오늘 갔을 때쯤 다시 찾아갈 테니까 자네가 입학절차를 소개해 주게!』19)
 
  이렇게 하여 承晩은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배재학당에 입학한 시기에 대하여 李承晩은 뒷날 1895년이었다고 회고하고 있으나,20) 배재학당에 입학하고 나서 알게된 제중원의 여의사 조지아나 화이팅(Georgiana E. Whiting)의 사진에 있는 李承晩의 친필 사인에 1894년으로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承晩이 배재학당에 입학한 것은 徐廷柱의 기술대로 1894년의 동짓달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21)
 
 
  화이팅에게 朝鮮語 가르치고 20달러 받아
 
 
  李承晩이 배재학당에 입학하고 나서 느낀 심리적 갈등은 역시 基督敎 문제였다. 그는 한동안 어머니에게 배재학당에 입학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천하에 몹쓸 敎理」를 가르치는 學堂에 나가는 것을 金씨부인이 용납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李承晩은 난생 처음으로 아침예배에 참석했을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예배실에서 나는 뒷줄에 앉아서 그 방에 있는 모든 것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키가 큰 아펜젤러씨가 강단에 서서 청중에게 조선말로 이야기를 하는데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물론 나는 그의 말을 경청하려고 갔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고 또 내 마음속에 깊이 느껴진 것은 1900여년 전에 죽었다는 사람이 나의 영혼을 구한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혼자서 생각했다. 아니 그래, 저렇게 놀라운 일들을 한다는 사람들이 정말 그런 바보 같은 교리를 믿는단 말인가. 아마 저 사람들은 자기네는 그것을 믿지 않으면서 그저 무지몽매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왔나 보다. 그러니까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만 교회에 가는구나. 위대한 부처를 알고 孔子의 지혜를 아는 유식한 학자야 어디 저런 교리를 믿을 수가 있겠나….
 
  이렇게 결론을 지은 나는 마음에 편안함을 느꼈고 그래서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알려드렸다.〉22)
 
  承晩이 배재학당에 입학했다는 말을 듣고 놀란 金씨부인은 아들의 손을 붙들고 말했다.
 
  『아가야, 너는 천주학 꾼이 되는 거지? 그렇지?』
 
  金씨부인은 承晩이 장가를 든 뒤인 이때까지도 그를 「아가」라고 불렀다. 承晩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어머니. 저는 그들이 하는 말을 믿기에는 너무 총명합니다. 어디 배운 선비가 그들의 교인이 되는 것을 보셨습니까?』
 
  그제서야 金씨부인은 안도감을 느끼기는 하는 모양이었으나 그래도 마음을 아주 놓지는 못하는 것같았다.23)
 
  承晩이 입학할 무렵인 1895년에 배재학당에 등록된 학생수는 모두 109명이었다. 학생들은 英語部, 漢文部, 神學部의 셋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承晩이 소속된 영어부에 등록된 학생들이 76명으로 가장 많았다.24) 그리고 신학부는 학생수가 적어서 곧 폐지되었다. 영어부에서 가르치는 과목은 讀本, 文法, 綴字法, 歷史, 文學, 化學, 自然科學槪論이었다.25) 영어부에서 古代史, 物理學, 化學, 政治學을 가르쳤다는 기록도 있다.26)
 
  이 무렵의 배재학당은 한국인, 미국인, 청국인, 일본인이 두루 섞여 배우고 가르치는 국제적 분위기의 학교였는데, 이 학교의 가장 큰 장점은 우수한 교사진이었다. 설립자 아펜젤러는 펜실베이니아州의 명문 프랭클린 엔드 마셜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과 드류 神學校(Drew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자마자 한국에 온 소명의식에 불타는 이상주의자였다. 承晩에게 영어를 처음 가르쳐 준 노블 목사나 존스(George H. Jones), 벙커(Dalziel A. Bunker), 헐버트(Home B. Hulbert) 등의 다른 교사들도 아펜젤러 못지않은 학력과 소명의식을 지닌 사람들이었다.27)
 
  承晩이 배재학당에 입학한 가장 큰 동기는, 그 자신이 자서전 초고에서 〈내가 배재학당에 가기로 한 것은 英語를 배우려는 큰 야심 때문이었고, 그래서 나는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다〉고 적고 있듯이,28) 영어를 배우기 위한 것이었다.
 
  承晩은 학생들 사이에서 이내 두각을 나타내어 서양인 선교사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고, 그것은 그에게 서양인 병원인 濟衆院(제중원)의 여의사 화이팅에게 조선어를 가르치고 또 그녀로부터 영어를 배우는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承晩은 처음 얼마 동안은 아침 일찍 제중원에 나가 화이팅에게 조선어를 가르치고 나서 다시 배재학당에 통학했다.
 
  그러나 그 뒤 오래지 않아 제중원의 요청으로 女선교사인 샤트롱을 맡은 李忠求와 함께 그곳에서 하루 내내 있으면서, 오전에는 화이팅에게 조선어를 가르치고 오후에는 그녀에게서 영어를 배우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
 
  화이팅에게 조선어를 가르친 지 꼭 한 달이 되던 날 承晩은 그녀로부터 한 달 사례비로 은화 20달러를 받았다.29) 그것은 앞에서 본 조선정부와 배재학당 사이의 협정에 규정된 배재학당의 조선인 교사 월급과 같은 액수였다.30)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온 承晩은 사례금 봉투를 어머니 앞에 내놓고 그 동안의 경위를 이야기했다. 너무나 엄청난 돈에 기겁을 한 金씨부인은 울음을 터뜨리며 아들을 보고 말했다.
 
  『아가야. 굶어 죽어도 좋으니 행여 천주학은 하지 마라』
 
  承晩은 북받치는 심정을 억누르며 뚜렷하고 자신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어머니 나를 믿으세요!』31)
 
  그런데 承晩이 한 달 사례비로 받은 20달러가 그 무렵 조선에서 얼마나 큰 돈이었던가는, 1896년에 학당 산업부의 인쇄공장에 부설한 제본소 사업에 대해 선교부의 연례보고서에서 〈제본소 사업은 실적이 좋아서 1897년 수입은 151달러 59센트나 되었다〉32)고 적고 있는 것과 견주어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그 당시에 東洋諸國에서 유통되던 달러 은화는 거의 멕시코 은화였는데, 멕시코 은화 20달러는 쌀 열다섯 말(斗)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33) 그것이 미국 은화였다면 액수는 훨씬 더 많아진다. 이렇게 하여 화이팅에게 조선어를 가르치고 받은 사례비는 承晩의 가족들의 생계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회활동에도 큰 힘이 되었다.
 
  화이팅의 조선말과 함께 承晩의 영어도 빠르게 발전하여 6개월 뒤에 承晩은 배재학당의 교사 벙커의 요청으로 배재학당의 新入生班을 맡아 영어를 가르치게 되었다.〈영어공부를 시작한 것이 6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영어선생이 되었다고 하여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고 李承晩은 그의 자서전 초고에서 적고 있다.34)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承晩이 배운 것은 물론 영어만이 아니었다. 新學問의 학습을 통하여 많은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었고, 세상에는 儒敎만이 삶의 원리가 아니라 基督敎도 삶의 원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開化派가 기본이념에서는 옳다는 것도 깨달았다. 나아가 개화파의 여러 친구들을 통하여 조정의 움직임도 그전보다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배재학당에 입학한 뒤에 주로 사귄 친구들은 申肯雨 형제들 외에 李忠求, 尹昌烈(윤창열), 李益采(이익채) 등이었는데, 그들은 개화를 주장하는 열혈청년들이었다. 承晩은 이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1895년 8월20일(양력 10월8일) 새벽에 일본인들이 궁궐에 난입하여 閔妃를 무참하게 시해한 이른바 乙未事變(을미사변)이 발생했을 때에 그 사실을 맨 먼저 承晩에게 알려 주면서 비분강개한 사람은 이충구였다.
 
  충구는 눈물을 흘리며 사건의 경위를 말하고 나서 『국모께선… 놈들에게 무찔려 돌아가시며 친위대를 향해 「날 살려라」하고 고함을 치셨다 하오. 역적놈들, 모두 무얼 하고 있었는지! 형! 나는 기어이 이 원수를 갚으려 하오. 어떻게 해서라도! 인제 두고 보시오…』하고 결연히 말했다.
 
  『충구 형… 일을 꾸미거든 나도 같이 하게 해주시오…』
 
  承晩은 충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러나 충구는 『고맙소. 그렇지만 형은 아직 그대로 계시오. 인제 더 큰 일에 쓰일 날이 있을 테니…』라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때에 承晩은 충구와 같은 개화당이라면 얼마든지 조선에 더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35)
 
  乙未事變은 1895년 7월에 새로 부임한 예비역 장성인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오(三浦梧樓)의 주도 아래 자행된 것이었다. 淸日戰爭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下關)조약에 따라 청국으로부터 臺灣과 遼東半島를 할양받기로 했으나 러시아, 프랑스, 독일 세 나라의 압력으로 요동반도는 청국에 반환되고 청국은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러한 국제환경 속에서 조선의 정국도 급박하게 돌아갔다.
 
  서울에 있는 서양인들의 사교장이었던 貞洞俱樂部는 갑자기 서양인과 조선인의 交歡場이 되고, 정부는 閔妃를 중심으로 하여 親러시아 경향이 뚜렷해져 갔다. 민비와 그 일파는 러시아 공사 웨베르(Carl Weber)와 빈번히 접촉하고, 친러파의 李完用, 李範晋 등이 입각하는가 하면, 高宗도 내정개혁을 위한 칙령이나 재가 사항이 그 자신의 의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행된 을미사변은 청의 세력 대신에 조선에 세력을 뻗치는 러시아와 대결하게 된 일본이 조선정부가 러시아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저지른 만행이었다.36)
 
 
  국모시해 복수 위한 擧事 모의
 
 
  민비시해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헤어졌던 이충구가 제중원으로 承晩을 찾아온 것은 두 달 가까이 지난 10월 11일이었다.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우리 집까지 같이 좀 갑시다』하고 承晩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간 충구는 안방에서 식구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주안상을 보아 오게 한 다음 承晩에게 조용히 말했다.
 
  『사실은 일을 좀 만드느라고 그 동안 형을 찾지 못했소. 이제는 일이 다 되어 내일 새벽에 바로 擧事(거사)하게 되었소. 國母를 손수 모시던 친위대가 우리편이 되었으니 일은 반드시 성사할 것이오. … 우리는 내일 새벽 바로 대궐로 쳐들어가서 국모를 죽게 한 親日派 내각놈들과 그 흉악한 왜놈들을 모조리 없애고 상감을 모실 작정이오만, 혹시 일이 어찌될는지 몰라서…. 형! 만일에 내게 화가 미치는 날이 있으면 내 가족들을 좀 보살펴 주시오』
 
  承晩은 충구를 나무라면서 말했다.
 
  『요전에도 말한 것처럼 형이 하는 일이면 나도 같이 할 각오가 되어 있소. 형만 보내고 낸들 뒤에서 어찌 편안히 앉아 있겠소?』
 
  『그렇지만 이번 일을 맡을 사람들은 이미 다 결정이 되었고 다만 내 뒤를 부탁할 친구만이 없소. 형을 빼고싶어서 뺀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한 것은 역시 부질없지만 내 우정인줄 아시오. 형은 6代독자가 아니오? 그러니 이제 그 값이 될만한 더 큰 일에 몸을 바치시란 말이오…』
 
  承晩은 그의 청을 승낙하는 수밖에 없었다.37)
 
  충구가 말하는 거사란 친러파와 親美派 인사들이 협력하여 1895년 10월12일(양력 11월28일) 새벽에 고종을 美國公使館으로 피신시킨 다음 閔妃弑害 이후에 개편된 親日내각을 타도하려 했던 계획을 말한다. 그것이 이른바 春生門事件이다.38) 이 무렵 고종은 景福宮의 가장 뒤채인 乾淸宮(건청궁)에 거처하고 있었다. 神武門을 들어가면 바로 대궐 후원이고 후원 동쪽에 있는 협문이 춘생문인데, 이 문은 궐밖에서 가장 신속하고 은밀하게 고종의 처소로 접근할 수 있는 문이었다.
 
  충구와 함께 거사를 모의한 주동자들은 侍從 林最洙(임최수), 侍從院卿 李載純(이재순), 前 훈련대 대대장 李道徹, 前 군부대신 安♥壽(안경수), 외부협판 尹致昊의 아버지인 前 남병사 尹雄烈 등이었다. 충구는 러시아 공사관에서 탄환 80발을 얻어오고, 안경수를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 중이던 李範晉과 연결시켜 주기도 한 친러파였다.39)
 
  이들은 고종과도 내밀히 연락이 닿아 〈궁성을 보호하고 凶逆을 살해하라〉는 고종의 밀지까지 받아 놓고 있었다.40) 병력은 東別營(동별영)의 친위대 병력을 동원했고, 또 있을 수 있는 일본군의 방해를 저지하기 위해 외국 공사관에 지원을 요청하여, 러시아 공사관은 거사 당일에 일단의 병력을 대궐로 파견하기까지 했다.41)
 
  그러나 이 계획은 궁궐 안에서 호응하기로 한 친위대 대대장 李軫鎬(이진호)의 배반으로 실패하고, 거사를 주동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러시아와 미국의 공사관과 미국 선교사들의 숙소로 피신했다.42) 이 춘생문사건은 이듬해 2월11일에 실행되는 俄館播遷(아관파천)의 전초였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承晩은 아침 일찍 충구의 집에 가 보았다. 그런데 집에 없어야 할 충구가 집에 있었다.
 
  충구는 의아해 하는 承晩에게 조용히 설명했다.
 
  『애석하게도 일이 다 틀렸소! 새벽에 우리들은 대궐문 앞에 가서 신호의 총을 놓았지만, 안에서 호응하기로 약조한 놈들이 문을 열어 주어야지! 놈들은 하룻밤 사이에 변절하여 도리어 우리를 향해 탕탕 총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니오? …사람들이 이렇게 되어가다가는 이 나라 일이 어떻게 될는지…. 일은 다 글렀소. 인제 오래잖아 포졸들이 우리를 잡으러 올 것이오』
 
  『그럼 어째 도망하지 않고 그러고 계시오?』
 
  承晩은 안타까워 물었다. 그러나 충구는 『도망해선 무엇하오? 내가 달아나면 같이 일하던 사람들만 경을 칠 테니 내가 혼자 총책임을 지겠소』하고 말했다.
 
  이튿날 들으니까 忠求는 李道徹과 같이 체포되고, 尹雄烈은 상해로 망명했다고 했다. 법부대신 張博(장박)이 직접 이충구를 고문하자 『이 역적놈들아, 내가 성공했으면 너희 놈들이 먼저 죽었을 것이다!』하고 외쳤다는 소식도 들렸다.43)
 
 
  女子환자로 변장하고 피신
 
 
  그런데 春生門事件은 承晩이 처음으로 직접 정치 현실과 관련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사건과 관련된 검거선풍이 있고 나서도 承晩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제중원에서 화이팅에게 조선말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承晩의 집 하녀 복녀가 울면서 쫓아 들어왔다.
 
  『서방님, 큰일 났어요. 아까 尹昌烈씨가 서방님을 찾아 왔는데, 그 뒤를 따라 순검들이 셋이나 쫓아 들어오면서 尹선생의 손을 붙들고 「당신이 李承晩씨요?」 하지 않겠어요. 아니라고 하니까 尹선생은 놓아 주고 방으로 들어와서 샅샅이 뒤지고 있어요. 마님께선 어떻게 놀라시는지…. 그러니 서방님, 집에는 오시지 말고 어디 숨으세요, 네!』
 
  『그래 윤창열씨는 어떻게 되었니?』
 
  『尹선생은 순검들이 방에 들어온 틈에 도망했어요』
 
  『알았다. 그럼 어서 집으로 가서 마님께 잘 알아서 할 테니 내 일은 조금도 걱정 마시라고 여쭈어라』
 
  承晩은 곧 피신하기로 결심했다. 이충구를 통하여 거사 계획을 알고 있기는 했으나 직접적으로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承晩이 지명 수배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위에서 보았듯이 충구는 承晩의 참여를 끝까지 배제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충구와의 관계만으로 承晩이 지명 수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 공사 존 실(John M.B. Sill)이 春生門事件과 관련하여 본국에 보낸 보고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는 것이 주목된다.
 
  〈선교사들이 이번 사건에 죄가 없는 것은 확실하다. 다만 선교사들의 朝鮮語 敎師의 일부는 이번 사건에 관계되었고, 또한 선교사들로부터 지나친 동정을 바라는 것 같았다.〉44)
 
  이 말은 承晩이 지명 수배된 것이 미국인 선교사의 조선어 교사였기 때문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사건의 주모자인 李忠求도 미국인 선교사의 조선어 교사였으므로 親日內閣이 이들 조선어 교사들과 미국인들의 연계를 의심했을 것은 당연하다.
 
  承晩은 화이팅의 도움으로 머리에 붕대를 감은 여자 환자로 가장하고 가마를 타고 남대문을 나와 楊花津에 있는 화이팅의 친구 지킵슨 부인 집으로 갔다. 거기에서 하루를 보낸 뒤에 다시 黃海道 平山에 있는 누이집을 찾아 혼자 걸어서 갔다.
 
  춘생문사건에 대한 재판은 사건이 있고 나서 한 달이 지난 11월15일에 특별법원에서 실시되었다. 주모자 林最洙, 李道徹은 사형이었고 李忠求, 李敏宏(이민굉), 全佑基(전우기), 盧興奎(노흥규) 등은 제주도 종신 유배, 南萬里(남만리), 安♥壽, 金在豊(김재풍) 등은 서해 백령도 3년 유배형에 처해졌다. 왕족인 이재순은 특전을 받아 형을 면한 대신에 3년 간 향리로 추방되어 거주 제한을 받게 되었고, 李昌根 등 나머지 23명은 모두 석방되었다.45)
 
  承晩은 1896년 2월 어느 날 화이팅으로부터 안심하고 上京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화이팅은 재판이 있고 나서 달포가 지나도록 承晩이 나타나지 않자 직접 연락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承晩은 불안한 느낌이 가시지 않은 채 서울로 돌아왔다.
 
 
  祖上에게 고하고 상투 잘라
 
 
  한편 을미사변 이후에 새로 개편된 金弘集 내각은 일본 공사와 일본인 고문관이 강박하는 대로 「개혁」 정책을 시행해 나갔다. 11월17일은 양력으로 1896년 1월1일이 되는 날이었는데, 이날을 기하여 음력 사용을 폐기하고 태양력을 쓰고, 「建陽」이라는 새 연호를 쓰게 했다(이 글에서도 지금까지는 음력을 썼으나 1896년 1월 1일 이후의 일부터는 양력을 쓰기로 한다).
 
  여러 개혁정책 가운데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11월15일에 공포한 斷髮令(단발령)이었다. 이 단발령의 강제는 민비 시해에 이어 다시 한번 민심을 자극하여, 『나의 목은 자를 수 있어도 나의 두발은 자를 수 없다』는 유학자 崔益鉉(최익현)의 유명한 말에서 보듯이, 국민적인 저항을 촉발시켜, 1896년에 접어들면서 전국에 걸쳐 義兵이 봉기하게 되었다.
 
  이 무렵의 承晩의 행동 가운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상투를 자른 일이었다. 올리버에 따르면 承晩은 오래 전부터 단발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상투를〈조선이 결별해야 할 낡은 보수적인 과거의 상징〉으로 생각하고,46) 제중원의 의사 에비슨(Oliver. R. Avison)과 단발문제를 상의했다. 제중원 뒤의 언덕에 에비슨의 집이 있었는데, 承晩은 거의 일요일마다 에비슨을 찾아 가서 영어를 연습하고 조선의 장래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에비슨은 李承晩이 대통령이 된 뒤에 보낸 편지에서 그때의 일을 재미있게 회상하고 있다.
 
  〈당신은 내가 격려해 줄 필요가 없었지요. 당신이 그때에 걷고 있던 길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에 대해 내가 경고했던 것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하는 말을 조용히 듣고 한참 있다가 『그래도 나는 그대로 하겠습니다』 하던 당신을 나는 잘 기억합니다. … 나는 내가 처해 있던 거북한 입장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을 수 밖에 없습니다.
 
  王이 편찮거나 병이 있다고 생각했을 때에 그분을 진찰하러 갔다 와서는 王位가 폐기된 뒤의 (조선의) 장래에 대해서 당신과 토론을 하곤 했으니까 말입니다. 분명히 우리 둘은 叛逆者들이었지요.〉47)
 
  이러한 에비슨이었으므로 단발문제로 고민하는 承晩에게 단발을 강력히 권고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承晩은 단발령이 공포되자 〈자의로 단발하기로 작정했다.〉48) 물론 그때까지는 대부분의 배재학당 학생들은 상투머리를 하고 다녔다.
 
  承晩은 아버지가 출타한 어느 날 오후에 어머니에게 단발할 결심을 말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단발을 하는 것은 고래의 신조에 어긋나는 일이기는 하나 世潮의 흐름에 거역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아뢰었다〉고 자서전 초고에 적고 있다.49) 우는 어머니를 보고 承晩도 울었다. 承晩은 정중히 조상의 위패를 꺼내어 그 앞에 고하고 나와 에비슨에게 가서 상투를 잘랐다.
 
  상투를 자를 때의 일을 李承晩은 자서전 초고에서 인상적으로 적고 있다.
 
  〈닥터 에비슨이 가위로 나의 머리를 잘랐다. 그때에 몇몇 외국사람들이 동정어린 눈으로 그것을 지켜 보았는데, 머리카락이 잘리고 상투가 내 앞에 떨어질 때에 나는 싸늘한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病院에 딸려 있는 작은 방에서 이틀밤을 지냈다. … 내가 나타나자 어머니는 무척 놀라고 자식이 죽기나 한 것처럼 통곡을 하였다. 나의 그 귀중한 상투는 어느 女宣敎師가 필라델피아 근처의 자기 친구에게 보냈는데, 그 뒤에 행방불명이 되었다.〉50)
 
  에비슨은 이때의 일을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國王이 머리를 깎은 직후의 어느 일요일 오후에 李(承晩)씨가 우리 집을 찾아와 상투를 잘라 달라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내가 『정말 상투를 자르고 싶습니까?』 하고 묻자, 『물론 싫지요. 그러나 잘라야 하기 때문에 친구가 자르게 하고 싶습니다. 재미로 아는 자들에게 잘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우리는 施藥所로 갔다. 나는 여기서 그의 상투를 단번에 잘라 테이블 위에 얹어두고는 남은 머리카락을 내 기술껏 다듬어 주었다. 내 기술이라야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나 적어도 폐하의 머리를 깎은 사람보다는 더 잘 깎았다.
 
  이발이 끝나자 李氏는 상투를 집어들어 가제에 쌌는데, 두 빰에 눈물을 흘리면서 집에 가져가서 어머니에게 드리겠다고 말했다.〉51)
 
  에비슨은 承晩이 잘린 상투를 어머니에게 갖다 드리겠다고 말했다고 했는데, 아마 承晩이 金씨부인에게 보인 다음에 美國人 여선교사에게 건네 주었던 것 같다.
 
  사실은 高宗도 단발을 몹시 못마땅해 했었다. 단발을 한 직후에 에비슨을 만난 高宗은 『보시오. 그들이 우리 모두를 중으로 만들어 놓았소』 하고 말했다고 한다. 아무튼 단발령이 〈일본인들이 이미 자행한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야기된 조선인들의 적개심에다 극히 불필요한 모욕감을 더 보태게 했다〉고 한 에비슨의 말은 적절한 지적이었다.52)
 
  承晩이 상투를 자른 날짜는 분명하지 않다. 단발령을 공포하는 날 高宗은 王世子와 함께 단발을 했으므로 에비슨의 회고대로라면 承晩이 단발을 한 것은 단발령이 공포된 직후이다. 그러므로 承晩이 平山으로 피신하면서 단발을 했다고 하는 서정주의 기술53)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단발령이 공포된 것은 春生門事件이 있고 나서 한 달이나 지난 1895년 11월15일이었고, 또 바로 그날 춘생문사건에 대한 재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承晩이 상투를 자른 것은 平山에서 돌아온 뒤의 일이었을 것이다.
 
  의료 선교사로 1893년에 조선에 온 에비슨은 이때부터 1935년까지 줄곧 한국에 머물면서 세브란스 醫專과 延禧專門의 교장을 역임하는 등으로 한국의 醫療와 敎育에 생애를 바쳤다. 李承晩은 1952년 3월1일에 피난지 부산에서 애비슨에게 獨立有功勳章을 수여했는데, 그 내용이〈의료 선교사로 세브란스병원 발전에 힘씀과 동시에 기독교 민주주의를 한국 젊은이들에게 불어 넣어준 공로〉54)를 치하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기독교 민주주의」의 고취를 강조한 이 문면은 李承晩이 직접 지시한 것이었을 것이다.
 
  단발령에 반대한 관료들이 벼슬을 내어 던지고 낙향하는 등 전국이 단발 반대로 들끓고 있는 상황에서 承晩이 단발을 결행한 것은 外國人들과 어울려 생활하는 동안에 그가 급진적인 開化派가 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일생을 통하여 크고 작은 많은 결단의 고비에서 보여 준 과단성의 한 보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때에 공포된 단발령은 조선의 정황을 파국으로 몰고 가면서 자신들의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日本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55)을 承晩은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王은 1년동안이나 러시아 公使館에
 
 
  政局은 또다시 급전직하로 바뀌었다. 朝鮮이 다시 日本의 독점적 영향 아래 들어가자 조선의 現狀維持라는 정책목표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는 비상수단을 강구했다. 러시아 공사 웨베르와 李範晉 등 친러파는 각처에서 봉기하는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시위대의 주력이 지방으로 파견되어 궁궐의 경비가 소홀해진 틈을 이용하여 仁川에 정박중인 러시아 군함으로부터 수병 120명을 서울로 진입시키고, 2월11일 새벽에 高宗과 왕세자를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移御(이어)하게 했다.
 
  각국 공사관은 그들의 병력을 모아 러시아공사관을 호위했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이른바 俄館播遷(아관파천)이다.56) 그것은 春生門事件이 있은 지 두 달 남짓 만의 일이었다.
 
  아관파천을 한 그날로 高宗은 총리대신 金弘集 등 親日내각 인물들의 체포와 처형을 명령하고 새 내각을 발표했다. 새로 구성된 내각은 친러파보다는 親美派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들을 기용한 이른바 貞洞派 內閣이었다. 이는 러시아가 朝鮮의 내정에 깊이 개입한다는 인상을 피함으로써 있을 수 있는 열국의 비난을 미연에 방지하려 한 결과였다.
 
  高宗이 총세무사로 고빙했던 영국인 브라운(John Mcleavy. Brown)을 재정고문으로 임명하면서 度支部(탁지부)의 실상을 조사할 권한을 부여하고,57) 外部와 法部의 고문이던 미국인 그레이트하우스(Clarence R. Greathouse)를 고등재판소 감독관으로 임명하여 민비시해사건의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하는 한편 재판제도를 개선하게 한 것도 웨베르의 이러한 방침에 의해 보장된 것이었다.
 
  각국 외교관들은 아관파천이 있고 나서 朝鮮의 財政, 裁判, 敎育制度 등의 분야에서 가장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본국 정부에 보고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러나 러시아의 이러한 방침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李承晩이 뒷날 아관파천에 대해 〈조선이 독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의 하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상황에 대한 과대한 평가에 기인하는 것이었다.58)
 
  그러나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며 러시아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러시아 공사의 조언에 따라 내리는 高宗의 지시가 독자적인 것일 수 없었음은 뒤이어 日本을 제외한 각국에 鐵道, 鑛山, 森林 등의 각종 이권이 허용되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59) 이러한 상황은 이듬해 2월20일에 高宗이 慶雲宮으로 환궁할 때까지 1년 동안이나 계속된다.
 
  金弘集 등 親日내각의 수뇌는 길거리에서 맞아 죽기도 하고 더러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제주도로 유배되었던 이충구는 警務使로 임명되어 서울로 돌아왔고, 사형당한 林最洙와 李道徹은 각각 내부협판과 군부협판에 追贈(추증)되었다. 이충구는 뒤에 한러은행 설립에도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친러파로 활동한다.
 
 
 
 
  承晩이 平山에서 상경한 직후에 배재학당에서 徐載弼(서재필) 박사 환영회가 열렸다. 환영회가 열린 날짜나 모임의 성격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 무렵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발간준비를 위하여 분주하던 때였는데, 그가 귀국한 뒤에 청중들 앞에서 강연을 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미국 시민인 서재필은 아펜젤러 등 미국인들의 협조를 얻어 이 강연회를 한국 정계에 공개적으로 등장하는 계기로 삼았던 것 같다. 그가 이 강연에서 미국의 정치제도를 특별히 소개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의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때를 같이하여 서재필은 서울의 감리교단이 발행하던 영문잡지 「코리언 리포지터리」(Korean Repository) 3월호에 「朝鮮이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현대적 敎育의 긴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承晩도 이 환영회에 참석했다. 이것이 承晩이 서재필을 처음 만나는 자리였는데, 서재필과의 만남은 承晩이 개화기의 주역의 한 사람으로 급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재필은 열아홉 살에 別試 文科에 급제할 만큼 재주가 있었고, 열정이 넘치는 개화파로서 甲申政變에 참여하여 삼일천하의 개화당 정권에서 兵曺參判 겸 後營領官(후영영관)이라는 요직에 임명되기도 했었다.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金玉均 등과 같이 일본으로 망명한 뒤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컬럼비아 의과대학(Columbia Medical College: 조지 워싱턴대학 의과대학의 전신)을 고학으로 졸업하고 워싱턴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온 朴泳孝의 요청으로 1895년 11월 중순(양력 12월 말)에 귀국한 것이었다. 12년 만의 귀국이었다.
 
  그런데 박영효가 서재필의 귀국을 요청한 것은 그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甲午更張 때에 집권한 개화파 내각의 종용에 따른 것이었다.60) 이보다 앞서 그해 5월에 朴定陽이 내각 총리대신으로 취임하면서 서재필을 외부협판으로 임명하고 속히 귀국하도록 요청했었는데, 그때에는 응하지 않았었다.
 
  개화파 내각은 서재필이 정부에 참여할 것을 기대했으나 서재필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아펜젤러의 집에 기숙하여 국내 수구파로부터의 만일의 위해에 대비하면서, 정부 밖에서 안전하게 미국 시민으로 있으면서 민중을 계몽하는 사업을 하고 싶어 했다. 이때의 일을 서재필 자신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金弘集과 兪吉濬은 나에게 외무대신이 되어달라고 요청하였다. 나는… 정계에는 아무런 야심이 없고 還國한 주요 목적이 人民을 가르치고 지도 계몽하려는 데에 있었던 까닭으로 그 요청을 굳게 거절하였다.〉61)
 
  이때는 아관파천 직전에 해당하는 때로서, 서재필로서는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서재필이 귀국했을 때의 나이는 서른 두 살이었다. 그에게는 이미 재회를 반길 친족이 없었다. 갑신정변으로 삼족이 멸문을 당했기 때문이다. 부모와 형과 아내는 음독자살했고, 동생은 참형을 당했으며, 아들은 굶어 죽었다.62)
 
  그는 재혼한 미국인 부인을 대동했고, 美國 市民權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이름을 썼는데, 귀국해서도 이름을 「제손」(한자로는 堤仙)이라고 미국 이름을 그대로 썼다. 그가 공식 활동에서도 「제손」이라는 미국 이름으로 일관한 것은 신변안전을 고려하여 美國 市民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제손」씨가 실크 해트에 모닝 차림을 하고 부인과 같이 길을 걸을라 치면 구경꾼이 몇십명씩 뒤를 따라다니곤 했다.
 
  서재필은 귀국하자마자 정부의 보조를 받아 「독립신문」을 발간할 준비를 시작했다. 金弘集 內閣은 독립신문사의 설립자금으로 4,400圓(「徐載弼 博士 自敍傳」에는 5,000圓)을 정부 예산에서 지급하고, 이와는 별도로 서재필이 앞으로 10년 동안 中樞院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월봉 300圓의 거액을 받도록 조치함으로써 그의 활동을 보장했던 것인데,63) 새로 구성된 貞洞派 內閣은 「독립신문」 발간에 한결 더 적극적이었다.64)
 
 
  서재필이 소개한 美國政治制度
 
 
  承晩은 환영회에서 행한 徐載弼의 강연에서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는데, 특히 다음과 같은 대목이 감명깊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人民의 權利라는 것을 대단히 존중합니다. 각 도, 각 고을에서 백성들이 각기 자기들 마음에 맞는 훌륭한 인물을 選擧해서 政府에 보내면 정부에서는 이들로써 國會를 조직하고, 그들의 정하는 대로 온갖 政治를 운영하게 됩니다. 法도 그렇게 해서 정합니다. 그러니 미국에서는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 백성이 불평을 갖는 일이 없습니다. 그건 왜냐하면 국회는, 즉 그들이 뽑아 보낸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까요』65)
 
  그것은 議會主義의 가장 기초적인 내용을 소개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으나, 전제군주제 아래 있던 당시로서는 대부분의 청중들에게 눈이 휘둥그레지는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강연을 듣는 젊은 청년들은 누구나 美國을 부러워했고, 또 서재필을 통해 미국을 좀더 알아보고 싶어했고, 되도록이면 조선도 그렇게 만들어보고 싶어졌다.66)
 
  이 환영회가 있은 지 석달 뒤인 1896년 5월부터 서재필은 아펜젤러의 요청에 따라 매주 목요일 오후에 배재학당에 나와 世界地理, 歷史, 政治學 등 폭넓은 분야에 걸친 특별 연속강의를 시작했다. 이 특별 연속강의는 1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承晩이 歐美 市民社會와 조선의 정치현실, 그리고 國際社會에서의 조선의 위치 등에 대해 뚜렷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은 이 연속강의를 통해서였다.
 
  서재필의 특강은 학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그것은 학당의 교사 벙커가 그해 8월에 監理敎宣敎部 연례회 석상에서 배재학당에 대한 보고를 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몇 달 전부터 서재필 박사가 학생들에게 실시하고 있는 연속강의에 대해 특별히 말하고 싶다. 이 강의는 예배당에서 실시되고 있는데, 언제나 학생들로 의자가 꽉 메워진다. 강의는 조선말로 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유럽을 설명하려고 할 때에는 지도 위에 그 지역을 표시하고 나서 一般歷史와 敎會發達史를 훤히 알 수 있도록 설명한다. 우리는 서박사가 앞으로도 이 강의를 계속하여 예정했던 계획의 전부를 학생들에게 들려 주기를 바란다.〉67)
 
 
  어머니의 죽음
 
 
  承晩은 이해 음력 7월25일에 어머니를 여의었다.68) 몇달 전에 承晩이 상투를 자를 때만해도 건강에 특별한 문제가 없었던 金씨부인이 어떻게 갑자기 사망하게 되었는지 궁금한데, 李承晩의 전기들이 金씨부인의 죽음에 대하여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때의 부의록이 현재 梨花莊에 보존되어 있는데, 이 부의록은 당시의 葬儀文化를 짐작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부의는 돈뿐만 아니라 백지, 황촉 등 물품을 보내기도 했고, 「李參判」과 「尹參奉」 집에서는 죽을 한 동이씩 쑤어 보내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부의금을 제일 많이 낸 사람은 250兩을 낸 화이팅이었고, 다음은 200兩을 낸 李忠求였다. 承晩과 충구의 관계가 얼마나 각별했는지를 여기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부의록에는 다음과 같은 李承晩의 친필 漢詩 두 수가 적혀 있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重門深鎖日如年 客思秋懷仍渺然
 
  咫尺家山徒夢想 月光遍照兩邊天
 
  중문은 굳게 잠겨 하루가 한 해 같고
 
  나그네 생각 가을 회포 다 묘연하다.
 
  家山이 지척인데 부질없는 夢想뿐
 
  달빛이야 두 곳 하늘을 두루 비추리.
 
 
  鞠育情恩二年 而今身髮正軒然
 
  未奉靈柩安土宅 戴頭寧不愧蒼天
 
  雩南 哭
 
  스물두 해 정성으로 길러 주시어
 
  이제는 몸과 머리 정녕 훤칠하구나.
 
  영구를 받들고 가 장사를 못모시니
 
  하늘을 머리에 이고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
 
  雩南 哭하며 읊음.
 
 
  金씨부인의 묘는 지금도 黃海道 平山에 있는데, 이 詩로 미루어 보면 承晩은 장지까지 가지 않았다. 늘그막에 얻은 6代독자, 그것도 讓寧大君의 16代손인 귀한 외동아들을 위하여 그토록 정성을 쏟았던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면서 장지까지 갈 수 없었던 피치 못할 어떤 사유가 있었는지, 또는 서재필의 특강을 비롯한 학교 수업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는지 알 수 없다.
 
 
  討論會 위한 모임 協成會
 
 
  서재필은 특강을 시작한 지 반년이 지났을 때에 배재학당 학생들로 하여금 討論會를 위한 모임을 조직하도록 권장했다. 그는 미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과외활동으로 「리노니아」(Linonia)라는 文學討論會에 참가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었는데, 그것을 본떠 배재학당의 학생들로 하여금 민주적인 토론방식을 통하여 자발적으로 開化意識을 함양하도록 하고자 했던 것이다.69) 모임의 이름을 協成會라고 정하고 11월30일에 그 첫 회합을 열었다. 그것을 보도한 「독립신문」의 다음과 같은 기사는 協成會에 대한 서재필의 기대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배재학당 학도들이 학원 중에서 협성회를 모아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의회원 규칙을 공부하고 각색 문제를 내어 학원들이 연설공부들을 한다니 우리는 듣기에 너무 즐겁고, 이 사람들이 의회원 규칙과 연설하는 학문을 공부하여 조선 후생들에게 선생들이 되어 만사를 규칙이 있게 의논하며 중의를 좇아 일을 결처하는 학문들을 퍼지게 하기를 바라노라.〉70)
 
  그리고 이틀 뒤에는 다시 「논설」란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하면서 大臣들도 배재학당에 가서 학생들에게 배우라고 권유하기까지 했다.
 
  〈배재학당 학도들은 근일에 협성회를 모아 의회원 규칙과 연설하는 법을 공부들을 하는데, 규칙을 엄히 지키고 속에 있는 말을 두려움이 없이 하며 일 의논할 때에 거조(擧措)가 제제창창하여 혼잡한 일이 없고 꼭 중의를 좇아 대소사무를 결정하니, 우리 생각에는 의정부 대신네들이 배재학당에 가서 이 아이들에게 일 의논하는 법을 배워가지고 가서 일을 의논하면 좋을 듯하더라.〉71)
 
  그런데 協成會가 발족했을 때의 창립회원은 재학생 160명 가운데에서 13명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마 처음에는 학생들이 언뜻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承晩은 협성회의 창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리하여 제1차 임원진을 구성할 때에 회장은 학당의 선임 교사인 梁弘默(양홍묵)이 맡았고, 承晩은 書記로 뽑혔다.
 
  협성회 규칙에 따르면 서기의 임무는 「회의 문서수발 업무를 관장하고 개회 때에 연설과 議事(의사)를 기록하여 다음 회의가 열릴 때에 낭독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이제 承晩은 이나라 최초의 學生會의 간부가 된 것이다. 그만큼 그는 정치적으로 빨리 성숙해 갔다. 앞서 본 尹聲烈의 증언에 따르면 〈周相鎬(뒤의 時經)는 朝鮮語를 연구하러, 李承晩은 政治를 하러 培材를 다닌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72)
 
 
  『學徒들은 洋服을 입음이 可함』
 
 
  토론회는 매주 거르지 않고 열렸다. 주제는 처음에 〈國文과 漢文을 섞어 씀이 가함〉(제1회), 〈學徒들은 洋服을 입음이 가함〉(제2회), 〈學員들은 매일 運動함이 가함〉(제4회) 등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시작하여, 〈우리나라 宗敎를 예수교로 함이 가함〉(제7회), 〈노비를 속량함이 가함〉(제8회), 〈國民이 이십 세 된 자는 일제히 兵丁으로 택함이 가함〉(제13회), 〈士農工商 학교를 세워 인민을 교육함이 가함〉(제17회), 〈우리나라에서 上下議院을 설립함이 급선무로 결정함〉(제24회), 〈財政과 軍權을 남에게 맡기는 것은 곧 나라를 남에게 파는 것으로 결정함〉(제42회), 〈각 고을마다 우체를 설치하고 인민의 서신을 종편 왕래케 하는 것이 요무로 결정함〉(제47회), 〈나라를 開明하자면 新聞局을 각처에 설시하는 것이 요무로 결정하는 문제〉(제50회) 등과 같이 사회구습의 타파, 정치제도의 개혁, 실업 교육의 실시, 체신제도의 확충, 언론 창달 등 근대 시민사회의 필수적인 주요 문제들을 망라했다.
 
  이러한 주제에 대해 右議(찬성자)와 左議(반대자)를 두어 토론하게 하고 또 회의도 공개했기 때문에 토론 참가자들 뿐만 아니라 방청객들도 이 토론회에 큰 흥미를 갖게 되었다. 토론회는 1896년 11월30일부터 1898년 7월16일까지 모두 50회가 열렸는데,73) 회를 거듭할수록 학생들의 변론술도 발전했다.
 
  학생들이 박수치는 법을 배운 것도 이때였다고 한다. 토론회가 진행되던 어느 날 徐載弼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미국에서는 남이 연설할 때에 잘하면 손바닥을 마주 때려 박수라는 것을 하는 법이오. 여러분도 잘한다고 생각되거든 그렇게 해보시오』
 
  이때에 承晩은 아무리 미국 것이 좋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까지 흉내낼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자, 그럼 우리 박수합시다』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서재필은 『좋으면 혼자서 박수하지 남까지 꼭 같이 하자고 권할 것은 뭐야!』하고 호통을 쳤다. 그리하여 강당 안은 한바탕 웃음판이 되었다.74)
 
  토론회가 흥미있게 진행되자 協成會 회원수도 급증했다. 회원은 배재학당 학생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가입도 권장하여, 일년 뒤인 1897년 12월에는 200명, 이듬해 3월에는 3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75) 일반인도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게 된 것은 협성회가 학생회의 범위를 벗어나서 개화운동을 위한 社會團體가 되어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협성회의 활동은 지방에까지 알려지게 되고, 그에 따라 지방 협성회가 조직되기도 했다. 1897년 6월에 長淵 松川에서 협성회를 결성하기 위하여 徐相崙(서상윤)과 金允五(김윤오)가 서울 협성회로 찾아와 약조를 하고 장연 협성회를 결성했다. 회장은 김윤오이고 회원은 25명이었다고 한다. 그 뒤에 장연 협성회는 규칙에 밝은 회원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해와서 서울 협성회에서는 김흥경과 김필원을 파견했다.76)
 
  협성회는 4개월 전에 역시 서재필의 주도로 결성된 獨立協會의 모든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그것을 지원함으로써 가장 강력한 자매단체의 구실을 수행했다.77) 그리고 협성회의 토론회는 독립협회에도 영향을 주어, 독립협회도 정기적인 토론회를 중요한 활동으로 채택하고 1897년 8월29일부터 이듬해 12월3일까지 34회에 걸쳐 토론회를 개최하고 있다.78)
 
  이 무렵에 1년 가까이 朝鮮을 여행했던 英國人 여행가 비숍의 다음과 같은 서술은 培材學堂이 얼마나 외국인들의 관심사가 되고 있었는가를 말해 준다.
 
  〈미국에서 敎育받은 朝鮮人 제이슨 博士는 최근에 1주일에 한 번씩 이 學堂에서 地球의 지리적 구분과 함께 유럽의 政治史와 기독교회사에 대한 강의를 하여 많은 사람들을 눈뜨게 하고 열광시켰다. 英國 上流階級의 자제를 대상으로 한 명예 있는 傳統을 지닌 寄宿制 남자 사립학교의 정신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학생들에게 愛國心을 함양시키고 있다.〉79)
 
 
  졸업생 대표로 英語 演說
 
 
  承晩은 1897년 7월8일에 배재학당을 졸업했다. 입학한 지 2년 반 남짓한 때였다. 이 때에는 졸업식을 「放學禮式」이라고 했었는데, 이 방학예식에서 工課都講(공과도강)을 치렀다.80) 공과란 學科目을 뜻하는 말이고, 도강이란 考査를 뜻하는 말이었음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
 
  그런데 배재학당의 역사서에 따르면 배재학당에서 정규 졸업생을 배출하기 시작한 것은 1909년부터이다. 그 이전의 수료자는 명예졸업생으로 다루고 있는데, 「培材80年史」에는 명예졸업생으로 李承晩을 포함하여 31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81) 그런데 承晩에게 培材學堂에 입학할 것을 강력히 권유했던 申肯雨는 명예졸업생 명단에 없고 그의 동생 興雨는 들어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이 放學禮式은 배재학당이 설립되고 나서 처음으로 거행하는 공식 졸업식이었던 셈인데, 당시에는 큰 사회적 이벤트였다. 「독립신문」은 한글판 「잡보」란과 영문판의 머리기사로 이 방학예식(영문판에서는 ‘commencement exercises’라고 했다) 광경을 자세히 보도하고 있다.
 
  예식은 정동 예배당에서 거행되었다. 식장에는 조선 국기와 미국 국기가 높이 게양된 가운데 왕실을 비롯하여 각부 대신들과 中樞院 議官 등 조선의 정치인들과 관리들, 각국 외교관들, 그리고 외국 부인들을 포함한 600여 명의 내빈들이 참석했다. 대신들은 한 사람을 빼놓고는 모두 참석했는데, 이는 이날의 행사가 얼마나 큰 사회적 관심사였는지를 말해 준다.
 
  조선어와 영어로 된 프로그램이 내빈들에게 배부되고, 아펜젤러가 사회를 보았다. 먼저 교사들과 학생들이 독립가(영문판에는 「축복의 샘으로 오라」는 찬송가)를 부르고, 聖書公會의 영국인 켄무어(Alexander Kenmure)가 영어로 기도를 한 다음, 세 사람의 한문 도강이 있었다. 한 사람은 「朝鮮歷代史略」, 한 사람은 「通鑑」, 한 사람은 「朝鮮史略」을 외었다. 다음은 영어도강이었는데, 신흥우가 영어로 「어떤 사람의 어머니」라는 글을 외웠다. 이어 학생들이 찬송가 4중창을 부르고 나서, 송언용의 「광명단의 사명」이라는 영문 암송이 있었다.
 
  영어도강의 클라이막스는 承晩의 독자적인 연설이었다. 연설 제목은 「朝鮮의 獨立」이었다. 그는 朝鮮과 中國의 관계, 淸日戰爭을 통한 독립의 획득 경위를 개략적으로 말하고 나서, 조선이 당면한 어려움과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의 대담한 발언은 청중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코리언 리포지터리」는 承晩의 연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아직 미숙한 이 졸업생 대표는 「朝鮮의 獨立」을 그의 연설 제목으로 선택했다. 그것은 조선에서 거행되는 첫 대학(college)졸업식 연설의 제목으로서 적절한 것이었다. 나라의 독립만이 이들 젊은이들이 교육받은 것을 실천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줄 것이다. … 李承晩씨의 語法은 훌륭했고, 感情도 대담하게 표현되었으며, 發音도 깨끗하고 명확했다.〉82)
 
  그리고 「독립신문」도 承晩의 연설에 대해 〈리승만이가 영어로 조선독립문제를 연설을 하는데, 뜻이 훌륭하고 영어도 알아듣게 하여 외국사람들이 매우 칭찬들 하더라〉83)라고 보도했다. 또한 「죠선크리스도인회보」는 〈李承晩씨는 조선국 독립한 일을 영어로 연설한 후에 독립가를 노래하니 또한 일좌 회원들이 칭찬하며 손뼉을 치는 소리 회당이 진동하며 크게 기뻐하고…〉라고 하여, 承晩이 연설 끝에 「독립가」를 불렀다고 보도하고 있다.84)
 
  李承晩의 연설에 이어 미국 공사 실의 축사가 있었다. 예식의 제1부행사는 이것으로 끝났다.
 
  계속된 제2부행사는 협성회의 토론회였다. 放學禮式에 협성회 행사를 포함시킨 것은 그만큼 학당에서도 협성회 활동을 대외적으로 자랑할 만한 일로 꼽고 있었음을 뜻한다. 먼저 회장 梁弘默이 협성회의 취지를 소개하고 나서, 〈東洋諸國이 泰西(서양)개화를 채용할 때를 당하였다〉는 토론제목을 제시했다.
 
  관례에 따라 찬성쪽 두 사람과 반대쪽 두 사람이 토론을 했는데, 한 시간 가까이 계속된 토론은 〈깊이 든 잠들을 깨울 만큼〉85)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이어 서재필이 서양역사를 배운 학생들 가운데에서 우수한 네 사람을 시상하고, 학부대신 閔種默이 협성회를 격려하는 축사를 했다.
 
  끝으로 애국가를 부르고 나서 장소를 배재학당 동산으로 옮겨 다과회를 열었다. 내빈들은 학생들의 잘 훈련된 체조를 관람하고 다과를 들면서 담소했다. 배재학당은 1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친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서재필에게 「스탠더드 사전」 한 질을 증정했다.
 
  많은 내외국인이 참가한 방학예식에서 야심적인 영어연설을 함으로써 박수갈채를 받은 것은 承晩에게 그의 자긍심을 더욱 굳혀 주는 감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英語보다 더 중요한 政治的自由 배워
 
 
  서재필을 초청하여 특별 연속강의를 시킴으로써 큰 효과를 거둔 배재학당은 다시 尹致昊를 초청하여 1898년 2월부터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게 했다.
 
  무관 출신으로서 개화파였던 尹雄烈의 아들로 태어나서 조선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되었던 윤치호는 갑신정변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개화당의 일원으로서 金玉均, 朴泳孝 등과 각별히 친밀했기 때문에 정변이 실패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上海의 中西學院을 수료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밴더빌트(Vanderbilt) 대학과 에모리(Emory) 대학에서 서양의 학문을 습득했다.
 
  뒤에 중서학원의 영어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던 그는 1895년에 귀국하여 外部協辦과 學部協辦을 지냈고, 1896년 4월에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는 閔泳煥(민영환)의 수행원으로 갔다가 프랑스를 거쳐 이듬해 1월에 귀국했었는데, 귀국한 뒤에는 서재필, 李商在(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이끌고 있었다.
 
  윤치호도 일주일에 한 번씩 배재학당에 나와서 학생들에게 格物學을 가르쳤다. 그는 단발한 머리에 망건을 쓰고 다녀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격물학이란 자연과학이 처음 소개될 때에 중국에서 그렇게 번역했던 것인데, 조선에서도 한동안 그대로 따라 쓰고 있었다. 윤치호는 자연과학 가운데서도 주로 天文學을 강의했다고 한다.86) 그런데 윤치호 자신은 그의 일기에서 이때에 학생들에게 가르친 것이 「自然地理學」(physical geography)이었다고 적고 있다.87)
 
  承晩이 윤치호의 강의를 들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때는 承晩이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협성회의 운영과 「협성회회보」를 발간하는 일에 열중해 있던 때였는데, 같은 친미파인 윤치호와 李承晩은 그 뒤에 독립협회 활동에 열성적이었던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때부터 친분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李承晩은 배재학당을 기반으로 하여 급진적인 개화파로서의 지도적 지위를 빠르게 구축해 나갔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기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李承晩은 배재학당의 학습과 관련하여 자서전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培材學堂에서) 나는 英語보다도 더 귀중한 것을 배웠는데, 그것은 즉 政治的인 自由이다. 한국의 대중이 무자비한 정치적 탄압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기독교 국가에 사는 사람들은 法에 의해서 그들 統治者의 獨裁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 이 젊은이의 마음속에 어떠한 革命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혼자서 우리도 그런 政治理論을 채택할 수만 있다면 짓밟혀 사는 나의 동족에게 크나큰 축복이 되겠구나하고 생각했다.〉88)
 
  그리고 李承晩이 그렇게 되는 데에는 培材學堂과 濟衆院에 와 있던 미국인들의 도움이 컸다. 李承晩은 그의 개인적인 매력과 적극성에 더하여 누구보다도 빨리 美國式 民主主義에 대한 신봉자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미국인들은 그가 선교사업을 비롯한 미국의 이해관계에도 유용한 인물이 되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들은 承晩이 뒤이어 국내에서 自由民權運動을 할 때에나 옥중생활을 할 때 뿐만 아니라 미국으로 건너가서 공부를 하고 독립운동을 할 때에도 계속해서 그를 지원했다. 李承晩이 제일 먼저 만난 미국인인 노블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아들(Harold Noble)도 해방 뒤의 政府樹立 過程에서 李承晩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것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다.●
 


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이승만과 김구 (5)
 
安重根과 金九의 짧은 만남
 

 

(1) 安重根의 아버지 安泰勳 進士

 父母까지 淸溪洞으로 모셔와
 
 
  金昌洙(金九)와 鄭德鉉은 험하기로 소문난 天峰山을 넘어 淸溪洞 어귀에 도착했다.
 
  黃海道 信川郡 斗邏面(두라면)에 속한 청계동은 의적 鄭來秀(정내수)의 옛 은둔지로서 九月山에 버금가는 천연의 요해지였다. 3면은 산록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동쪽 한 곳으로만 관문이 터져 있었다. 관문 앞에는 望臺山이라는 작은 산이 가로막고, 그 좌우로 좁은 길이 나 있었다. 천봉산 골짜기로부터 흘러내린 청계천의 맑은 물이 마을 한가운데를 돌아 화폭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동구 앞 암벽에 「淸溪洞天」이라는 네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1)
 
  「洞天」이란 산에 둘러싸이고 내에 둘린 경치 좋은 곳으로서 神仙이 사는 곳이라는 뜻인데, 이 글씨는 安泰勳이 쓴 것이었다. 金九는 그 글씨가 흐르는 물소리를 따라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고 「백범일지」에 적고 있다.2) 멀리 바라보이는 마을에는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사오십 채의 민가가 눈에 띄었다.
 
  마을 어귀의 작은 산 위에는 포대가 설치되어 있고, 거기에는 파수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두 사람을 보고 누구냐고 물었다. 두 사람이 이름을 대자 파수병들은 『義旅長(의려장)이 허가했다』면서 통과시켜 주었다. 의려장이란 安泰勳을 가리키는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뒤이어 호위병이 나와서 두 사람을 安泰勳의 집으로 안내했다.
 
  安泰勳의 집 문 앞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고 그 안에 초가정자 한 칸이 있었다. 이곳은 安泰勳의 여섯 형제들이 평소에 술을 마시고 詩를 지으면서 소일하는 장소라고 했다. 대청에 올라서자 安泰勳이 직접 쓴 「義旅所」라는 세 글자의 횡액이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安泰勳은 두 사람을 본채 마루에서 친절하게 영접했다. 그는 간단하게 안부인사를 나눈 뒤에 『金碩士(김석사)가 패엽사에서 위험을 벗어난 뒤에 무척 걱정하였습니다. 애써 탐색하였으나 계신 곳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오늘 이처럼 찾아주시니 감사합니다』하고 말문을 열었다. 碩士란 벼슬 없는 젊은 선비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그러고는 바로 昌洙의 부모 안부를 물었다.
 
  『부모님이 모두 계시다고 들었는데, 어디 편히 계실 곳이 있습니까?』
 
  『달리 갈 곳이 없어 아직 본동에 계십니다』
 
  이 말을 듣고 安泰勳은 즉시 吳日善에게 총을 휴대한 병사 30명을 지정해 주며, 오늘 안으로 텃골에 가서 김석사 부모님을 모시고, 이웃 동네에 있는 우마를 구해서 가산 전부를 옮겨오라고 명했다. 安泰勳은 昌洙의 가족을 위하여 집 한 채를 사주었다. 그리하여 昌洙의 가족들은 그날로 청계동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때가 1895년 2월의 일로서 昌洙가 스무 살이 되던 때였다. 安泰勳은 昌洙에게 날마다 자기 사랑에 와서 놀라고 했다. 혹시 자기가 없을 때에는 자기 동생들과 놀든지 친구들과 얘기하든지 책을 보든지 마음대로 하고 아무 걱정말고 안심하고 지내라고 친절하게 말했다.3)
 
  이렇게 시작된 청계동 생활은 너댓 달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으나 농민전쟁의 패장 金昌洙에게는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 운명의 기간이었다. 그런데 이때에 청계동까지 동행한 鄭德鉉은 어떻게 되었는지 「백범일지」에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이 이상하다.
 
 
  朴泳孝가 선발한 日本 留學 후보생
 
 
  安泰勳의 집안은 대대로 해주에서 살았다. 安泰勳의 아버지 仁壽(인수)는 일찍이 鎭海 縣監을 지낸 적이 있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은 安泰勳의 집을 「安鎭海宅」이라고 불렀다.4) 청계동은 조선시대의 대부분의 집성취락과는 달리 해주에 살던 안씨 일가가 새로 개척한 마을이었다. 그 동기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조금씩 다르나, 안인수는 여섯 아들과 상의하여 좋은 피난처를 찾아 후일을 도모하기 위한 보금자리로 청계동을 새로 개척한 것이었다.
 
  천봉산 골짜기는 해도 볼 수 없는 原始林으로서 낮에도 맹수가 소리쳐 울고, 사는 사람이라고는 화전민 열두세 집뿐이었다. 안인수는 그런 골짜기에 집터와 임야를 사들인 뒤에 차남 泰鉉을 시켜 여러 명의 목수, 미장, 역군들을 데리고 들어 가서 우선 스무남은 칸짜리 집 세채를 짓고, 사오십명의 방문객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사랑과 하인들이 기거할 수 있는 행랑채도 지었다. 또한 우물 세 군데를 파고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을 이용하여 연못을 만들고, 마을 어귀에는 망을 볼 수 있는 누대도 설치했다. 공사가 끝나자 안인수 일가는 家産을 모두 정리하고 300여 석 추수할 농토만 남겨둔 채 칠팔십명의 대가족을 이끌고 청계동으로 이사했다고 한다.5)
 
  安泰勳은 인수의 6남 3녀 가운데 셋째 아들이었다. 여섯 형제가 모두 글재주와 인물이 출중했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安泰勳이 재능이 가장 뛰어났다. 그는 여섯 형제 가운데에서 유일한 初試 합격자였다.6)
 
  安泰勳은 젊었을 때에 서울에서 고위관료인 金宗漢의 집에 머물면서 과거를 준비했고, 金宗漢이 試官일 때에 小科에 합격했는데, 이 때문에 金宗漢의 「문객」이니 「식구」니 하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甲申政變이 일어나던 1884년에 朴泳孝가 일본 유학을 보내기 위해 선발한 70명의 청년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혔으나,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하자 몸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과 벗하며 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7)
 
 
  굼벵이와 모기떼
 
 
  金宗漢은 판서 金啓鎭(김계진)의 아들로서 1876년 式年文科에 급제하고 弘文館 부제학, 吏曹參判 등을 거쳐 1894년에는 都承旨가 되었다가, 日本軍의 왕궁 점령으로 성립된 金弘集 內閣에 참여했던 고종의 측근이었다. 安泰勳이 東學農民軍의 토벌에 나설 때에도 金宗漢과 긴밀한 연락이 있었는데, 安泰勳이 동학농민군으로부터 1000여 푸대의 곡식을 빼앗아 軍糧米로 사용한 것이 뒷날 조정에서 크게 문제가 되었을 때에도 金宗漢의 도움을 받는 것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다.
 
  金宗漢은 또 1896년에는 獨立協會 運動에도 참여했고, 관직에 있으면서도 京江商人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貸金業을 하는가 하면, 朝鮮銀行과 漢城銀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철도용달회사를 설립하는 등 경제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1910년에 李完用의 지휘 아래 조직된 친일단체 政友會의 총재직을 맡았고, 그 공로로 일제의 한국 병합 이후 남작의 작위를 받으면서 친일파가 되었다.
 
  安泰勳은 첫 인상에도 범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찌를 듯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대방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다. 당시 조정 대관들도 그로부터 글로나 말로 비판을 받으면 처음에는 그를 욕하다가도, 일단 그와 한번 얼굴을 마주 대하게 되면 부지불식 간에 외경하는 태도를 가지게 된다고 했다.8) 또한 昌洙가 보기에 그는 성품이 퍽 소탈했다. 그는 무식한 아랫사람들에게도 조금도 교만하지 않고 친절하게 대했다. 그리하여 위아래 모두 安泰勳과 함께 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용모가 맑고 빼어났으나 술이 과하여 코끝이 약간 붉은 것이 흠이었다.
 
  安泰勳은 詩文에도 능했다. 昌洙는 詩客들이 安泰勳이 지은 律詩를 외우는 것을 자주 들었다. 安泰勳 자신도 이따금 昌洙를 불러 자작 詩 가운데에서 잘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읊어 주곤 했다. 그때에 安泰勳이 읊어 준 詩 가운데에서 뒷날 김구가 「백범일지」를 쓸 때까지 기억한 것으로는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지었다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曉蝎求生無跡去(새벽 굼벵이는 살고자 하나 흔적 없이 가버리고)
 
  夕蚊寧死有聲來(저녁 모기는 죽기를 무릅쓰고 소리치며 달려든다.)>
 
  詩의 내용은 아마도 농민전쟁 때에 삶을 좇아 소리 없이 피신하는 사람들과 금방 죽을 줄 모르고 덤비는 동학교도의 무리를 굼벵이와 모기떼에 비유하여 풍자한 것으로 보인다.9) 安泰勳의 동학농민군에 대한 인식을 읽을 수 있는 詩이다.
 
  또한 安泰勳은 黃石公의 「素書」 구절을 직접 써서 벽장문에 붙여 놓고 술이 거나하여 흥취가 일면 그것을 낭송하곤 했다. 황석공은 중국 秦나라 말엽의 병법가로서, 秦始皇을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숨어있던 張良(장량)에게 「太公兵法」을 가르쳤다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黃石公三略」이라고도 불리는 이 책은 장량이 劉邦(유방)을 도와 漢나라를 세울 때에 크게 이용되었다고 한다. 「소서」는 황석공이 지은 것을 송나라 張商英이 老子의 설에 따라 주석을 단 책으로 알려져 있는데, 道, 德, 仁, 義, 禮의 다섯 가지를 一體로 한 이 책은 본문과 주석이 한 사람이 지은 것 같은 내용이 많아서 장상영이 황석공의 이름을 빌어 지은 것이라는 의혹도 있다.
 
 
  사냥솜씨 뛰어난 安重根
 
 
  昌洙는 청계동에서 安重根을 만났다. 중근은 安泰勳의 장남이었다. 安泰勳은 重根, 定根, 恭根(공근)의 삼형제를 두었는데,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혼인을 한 중근은 열일곱의 나이에 상투를 틀고 있었다. 그는 자주색 명주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서 돔방총을 메고 숙부 泰健(태건)과 함께 근처 산으로 날마다 사냥을 다녔다. 그는 사격 솜씨가 뛰어나서 나는 새와 뛰는 짐승을 백발백중으로 맞춘다고 했다. 그리하여 어떤 날은 하루에도 노루나 고라니를 여러 마리 잡아와서 군사들을 먹이기도 했다.
 
  이 무렵 안중근이 메고 다녔다는 돔방총이 어떤 총이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金九는 「백범일지」에서 그것을 「보통 장총이 아니고 메고 다니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것」이라고만 설명하고 있고, 安重根의 傳記類에도 언급이 없다.
 
  安重根의 전기들에 따르면, 이무렵 청계동 安泰勳의 집은 각지에서 몰려드는 산포수들로 붐볐다. 적을 때에는 십여 명, 많으면 사오십명 가량의 식객 포수꾼들이 묵고 있었다. 그들은 개인 기량을 겨루기도 하고 때로는 甲乙紅白으로 편을 갈라 사격술 경연을 벌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安重根은 뛰어난 기량을 과시하여 보는 이들을 감탄시켰다.
 
  특히 열네 살 나던 해의 가을 분반 대항 경연 때에 자신이 소속한 紅班의 성적이 아주 부진하여 도저히 만회할 가망이 없어 보일 때에 마지막 사수인 重根이 다섯 발을 어김없이 적중시켜 紅班이 승리하게 한 것은 당대의 산포수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다는 기술도 있다.10)
 
  安泰勳의 여섯 형제는 거의 다 술과 독서를 좋아하여 중근이 짐승을 사냥해 오면 형제가 반드시 한데 모였다. 이럴 때면 昌洙도 초청을 받았다.
 
  安泰勳은 아들과 조카들의 공부를 위해 서당을 만들었다. 그는 빨간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땋아 늘어뜨린 아홉 살의 定根과 恭根에게는 『글을 읽어라』, 『쓰라』하고 독려했으나 중근에게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꾸짖지 않았다. 중근은 楚(초)나라의 項羽(항우)처럼 장부답게 살기로 결심하고 글공부에 연연하지 않고 사냥에 열중했다고 한다.11)
 
  重根과 昌洙는 세 살밖에 나이 차이가 없었으나 두 사람은 서로를 인식하는 것이 많이 달랐던 것같다. 昌洙는 안씨 집안과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했다. 뒷날 金九는 임시정부 주석이 되었을 때에 위험에 처한 安重根의 가족들을 각별히 보살폈다. 또한 안씨 집안의 안정근, 안공근, 安原生, 安偶生, 安美生 등은 뒷날 金九와 크고 작은 인연을 맺어 함께 활동한다.
 
  안공근은 임시정부 시절에 金九의 핵심참모로 활동했고, 안미생은 그의 큰며느리가 되었으며, 안우생은 그의 비서로 일했다. 그러나 중근은 昌洙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중근은 뒷날 동학군을 「좀도둑」12)이며 친일단체 一進會의 원조라고 할 정도로 동학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동학당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나서,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핑계로 군현을 가로지르며 관리들을 죽이고,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한 것」이 나라가 위태롭게 된 요인이며, 일본과 청국과 러시아가 조선에서 전쟁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13) 그리고 金九에 대해서는, 金九가 「백범일지」에서 안중근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적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자서전에 전혀 언급이 없다.
 
 
  산포수들로부터 놀림받아
 
 
  安泰勳은 昌洙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질의와 담론을 통해 昌洙를 시험했는데, 이때의 일을 金九는 「당시 나는 유치한 수준의 행동이 많은 때였다」고 자괴하고 있다.14)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安泰勳은 술과 안주를 차려 놓고 산포수들을 데리고 놀면서 씨름판을 벌였다. 동학군 토벌을 위해 安泰勳의 의려소에 모였던 산포수들은 그때까지 해산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결승에 오른 두 사람은 재주와 힘이 서로 비슷하여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씨름하는 모습을 구경하던 安泰勳이 昌洙에게 물었다.
 
  『昌洙가 보기에 어느 사람이 이길 것 같은가?』
 
  『키가 크고 힘이 세어 보이는 사람이 질 것 같습니다.』
 
  그러자 安泰勳은 다시 그 이유를 물었다.
 
  『아까 씨름할 때에 키 큰 사람의 바지가 찢어져 볼기가 드러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기운을 다 쓰지 못할 듯합니다. 저는 단연코 그 사람이 질 줄 압니다.』
 
  昌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과연 그 사람이 나가 떨어졌다. 이를 본 뒤에 安泰勳은 昌洙를 더욱 아꼈다고 한다.15)
 
  볼기가 드러날 만큼 찢어진 바지를 입은 씨름꾼이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安泰勳이 昌洙에게 누가 이기겠느냐고 물은 것은 昌洙의 주의력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을 눈여겨 본 것을 자랑스럽게 적으면서, 자기의 짐작이 적중하자 安泰勳이 자기를 더욱 아꼈다고 하고 있는 것은, 金九의 청계동 생활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것이었는가를 말해 준다. 安泰勳은 일찍이 密約을 맺기까지 하면서 그 의기를 아꼈던 이 젊은 東學接主가 자기를 찾아온 것을 반갑게 여겨 그를 환대하면서 여러 가지로 사람됨됨이를 떠보고 있었다.
 
 
  모욕을 참으며
 
 
  安泰勳의 이러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昌洙의 청계동 생활은 편안하지 않았다. 청계동에 들어와 살면서 昌洙는 갈 곳도 마땅치 않고 아는 사람도 없고 해서 주로 安泰勳의 사랑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安泰勳이 자리에 없을 때면 산포수들은 昌洙가 들으라고 일부러 큰 소리로 떠들어대곤 했다.
 
  『저 자는 進士님만 아니었으면 벌써 썩어졌을 것이다. 아직도 接主님 소리 들으면서 여러 사람에게 대접받던 생각이 날걸』
 
  『그렇고말고. 저 자는 우리 같은 산포수들을 초개같이 볼걸』
 
  또 어떤 사람은 입을 삐죽이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여보게 그런 말들 말게. 혹시 귀에 담아두었다가 뒷날 東學이 다시 득세하는 날 앙갚음을 할지 누가 알겠나!』
 
  뿐만 아니라 安泰勳의 아우들도 산포수들의 희롱섞인 말과 행동을 곁에서 보면서도 나무라지 않았다. 이러한 安泰勳아우들의 태도에 대해 金九는 <이것은 처음 만나 술 한 잔씩 나누어 보니 내게 별로 볼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포꾼들의 언동을 형님에게 보고하여 安進士가 무식한 포꾼들을 직접 질책하는 것은 도리어 나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라 판단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16)하고 조심스럽게 적고 있다.
 
  산포수들로부터 모욕을 당할 때에는 昌洙는 당장이라도 청계동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불같이 일었다. 그러나 주인 安泰勳이 그토록 후대하는데 무식한 산포수들의 행실을 탓하는 것은 오히려 용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참고 지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앞날을 생각하면 昌洙는 더욱 암담했다. 金九는 이때의 절박했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이제 패전한 장수의 신세가 되어 安進士의 후의를 입어 생명만은 안전하게 지키게 되었으나, 장래를 생각하면 과연 어떤 곳에다 발을 디뎌야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고 스스로 의심을 느꼈다>16)
 
  그러나 昌洙의 방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것은 昌洙가 安泰勳의 사랑에서 일생동안 정신적 스승이 되는 後凋 高能善을 만났기 때문이다.
 
 
  (2) 海州의 華西學派 後凋 高能善
 
 
  高能善의 門下生이 되다
 
 
 
  ▲ 동학군 패장 金昌洙를 보살펴 준 安泰勳 進士. 그의 장남 이 安秉根이다
 
  당시 安泰勳의 사랑에는 나이가 쉰살남짓 되어 보이는 노인 한 사람이 자주 들렀다. 그는 기골이 짱짱하고 의관이 매우 검소했는데, 安泰勳은 그를 지극히 공경하여 늘 윗자리로 모셨다. 어느 날 安泰勳이 그 노인에게 昌洙를 인사시키고 昌洙의 이력을 소개했다. 高能善은 첫 인상에도 특출한 사람으로 보였다. 昌洙보다 몇 달 뒤에 청계동을 방문한 金亨鎭도 그를 가리켜 「正學君子」17)라고 했을 만큼 그에게는 올곧은 선비의 풍모가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高山林」이라고 불렀다.18) 「山林」이란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山林에 묻혀 사는 큰 儒學者라는 뜻으로서, 벼슬을 하고 있는 사람보다 더 참된 學者로 존경받았다.
 
  어느 날 昌洙는 평소처럼 安泰勳의 사랑에서 高能善과 함께 하루 종일 지냈는데, 헤어질 무렵이 되었을 때에 고능선이 昌洙에게 말했다.
 
  『昌洙, 내 사랑 구경 좀 아니하겠나?』
 
  뜻밖의 제안에 감동한 昌洙는 『선생님 사랑에도 가서 놀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이튿날 昌洙는 고능선의 집을 찾아갔다. 고능선은 반가운 표정으로 昌洙를 맞이하고, 맏아들 元明을 불러서 인사를 시켰다. 원명은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그 사람됨됨이는 명민해 보였으나 비범하고 너그러운 기질은 아버지에게 미치지 못해 보였다. 원명은 딸 둘을 두었는데, 맏딸은 열대여섯 살 되어 보였고, 고능선의 둘째 딸은 너댓 살쯤 나 보였다. 아들은 아직 없다고 했다. 둘째 아들은 혼인한 뒤에 사망하여 과부며느리만 있었다.
 
  고능선이 거처하는 작은 사랑방에는 방안 가득히 책이 쌓여 있었고, 네 벽에는 유명한 옛 선비들이 남긴 좌우명과 고능선 스스로 마음에 깊이 깨우친 글들을 써붙여 놓았다. 고능선은 무릎을 포개고 단정히 앉아서 마음을 닦기도 하고, 때때로 「孫武子」와 「三略」 등의 兵書를 읽기도 했다.
 
  고능선은 昌洙와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말을 했다.
 
  『자네가 매일 안진사 사랑에 다니며 놀지만, 내가 보기에는 자네에게 절실히 필요한 정신 수양에는 별 도움이 없을 듯하네. 그러니 매일 내 사랑에 와서 나와 같이 세상사도 이야기하고 학문도 토론하는 것이 어떻겠나?』
 
  昌洙는 그 말이 황공하고 고마웠다.
 
  『선생님이 이처럼 저를 너그럽게 받아주시지만, 소생이 어찌 감당할 만한 재질이 있겠습니까?』
 
  고능선은 아무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러나 昌洙는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고능선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昌洙는 기쁘기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이때의 심정을 「백범일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高先生이 저처럼 나를 사랑하지만, 참으로 내게 저토록 고명한 선생의 사랑을 받을 만한 소질이 있는가? 내가 선생의 과분한 사랑을 받는다 해도 종전에 科擧니 觀相이니 東學이니 하던 것과 같이 아무 효과도 내지 못하지는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내 자신이 타락됨은 둘째요, 고선생과 같이 순결한 양반에게까지 누를 끼치게 되지 않을까〉.19)
 
  이러한 구절에서 우리는 감수성이 예민한 십대 후반의 몇 년 동안에 인생의 크나큰 좌절을 몇 차례나 경험한 金九의 겸허한 자격지심을 읽을 수 있다.
 
  昌洙는 이러한 속마음을 고능선에게 그대로 고백했다.
 
  『선생님! 선생님은 저를 분명히 살펴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불과 스무 살에 一生의 진로에 대하여 스스로 속이고 그르쳐 허다한 失敗를 거치고 지금에 와서 민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선생님이 저의 자격과 품성을 밝히 보시고 좋은 점이 있어 보이면 사랑해 주시고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나 만일 좋은 사람될 조짐이 없다면 저는 고사하고 선생님의 높으신 덕에 누를 끼치고 말 것입니다. 그리 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말을 하는 동안 昌洙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능선은 昌洙의 마음에 그러한 고통이 있는 것을 보고 지극히 동정하는 말로 昌洙를 위로했다.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자네의 장래를 판단할 힘은 없으나, 한가지 확실히 말할 것이 있네. 그것은 聖賢을 목표로 하고 성현의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라는 것이네. 예로부터 성현의 지위까지 도달한 사람도 있고, 좀 미치지 못한 사람도 있고, 성현이 되는 길이 너무 높고 멀다 하여 중도에 달아나거나 자포자기하여 禽獸(금수)와 그다지 멀지 않은 자리에 있는 사람도 있다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참뜻을 가진 이상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 실패나 곤란을 겪었더라도 그 마음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노라면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는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이 늙은이도 영광이 아니겠나!』
 
  그 말은 昌洙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이때의 심정을 金九는 <마치 주리던 아이가 엄마 젖을 빨아먹는 것 같은>20) 심정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昌洙는 고능선에게 결연히 말했다.
 
  『그러시면 앞길에 대한 모든 것을 선생님 보시는 대로 가르쳐 주십시오. 성심을 다해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자네가 그같이 결심했으면 됐네. 내 눈빛이 미치는 데까지, 자네 力量이 있는 데까지 내 모든 것을 자네를 위하여 진력하겠네. 젊은 사람이 너무 상심 말고 매일 나와 같이 지내세. 갑갑할 때에는 우리 元明이와 산 구경도 다니며 놀게.』
 
  이렇게 하여 昌洙는 高能善의 門下生이 되었다.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픈 줄을 모르고…
 
 
  그날부터 昌洙는 뒷날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픈 줄을 모르고 고선생이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21)고 술회할 만큼 고능선의 가르침을 열심히 배우고 익혔다. 昌洙의 熱情 못지않게 고능선의 姿勢 또한 진지했다. 그는 昌洙가 오기 전에 그날 가르칠 부분의 책장을 접어두었다가 昌洙에게 펼쳐 보일 정도로 가르칠 내용을 준비했다. 그는 經書를 차례로 가르치는 것보다 昌洙의 정신과 재질을 감안하여 <뚫어진 곳을 기워 주고 빈 구석을 채워주는 口傳心授의 교법>으로 가르쳤다.22) 그것은 昌洙의 經書에 대한 학문 수준이 그만큼 빈약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능선은 華西學派(화서학파)에 속하는 유학자였다. 華西學派란 개항기 이후 華西 李恒老(이항로)의 學脈을 잇는 대표적인 衛正斥邪派(위정척사파)로서, 뒷날 독립운동의 한 큰 줄기를 이루는 세력을 지칭하는 말이다. 고능선의 初名은 錫奎(석규)였는데, 1893년께에 錫魯(석로)로 개명했다.23) 能善은 그의 자이며, 호는 後凋(후조)였다. 柳麟錫(유인석)과 동갑인 그는 이 때에 쉰네 살이었다.
 
  金九는 고능선을 유인석의 동문이라고 했으나, 두 사람이 학문을 해 온 경력과 柳重敎(유중교)에게 사사한 시기로 볼 때에 동렬의 동문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柳麟錫은 李恒老의 학통을 계승한 重菴(중암) 金平默(김평묵)과 省齋 柳重敎에게 차례로 사사했다.
 
  그런데 가난한 선비집안에서 태어나 경제적으로 어렵게 생활했고, 젊어서 몇 차례 과거시험에 실패했던 고능선이 유중교의 문하에 들어간 것은 유인석보다 한참 뒤인 1887년 7월이었다.
 
  그는 마흔여섯 살의 나이로 海州에 가족을 남겨둔 채 단신으로 春川 柯亭里(가정리)로 유중교를 찾아가서 1890년 1월까지 2년 반 동안 그의 학문을 전수받았다. 40대 중반의 나이로 가족을 떠나 수학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보기 드문 경우이다. 이때에 그의 生計는 자식들이 감당했었는데, 어려운 처지에서도 그는 그만큼 남다르게 학문의 열의가 있었던 것이다. 1890년 2월에 해주로 돌아온 그는 1892년부터 講會를 열면서 후진을 양성했다.24)
 
  고능선은 유인석을 가장 친한 동문으로 생각했고, 특히 가정리 유학시절에 유인석이 베푼 호의를 고마워 했으나25) 유인석은 고능선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 않다. 고능선의 학문은 그 자신도 <노둔하고 재능이 없다>26)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듯이 유인석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지조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투철한 애국심은 昌洙를 크게 감화시켰다.
 
 
  高能善이 淸溪洞에 온 까닭
 
 
  고능선이 청계동으로 이주한 경위에 대해서 「백범일지」는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安泰勳이 의려소를 설치하면서 고능선을 謀士(모사)로 초빙했던 것이라고 했으나(27) 실제로는 安泰勳이 자기 아들과 조카들을 가르칠 훈장으로 그를 초빙했던 것 같다.28) 훈장으로 있으면서 安泰勳이 의려소를 설치하자 자연히 거기에 참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 金九의 평생의 정신적 스승이 된 華西學派 儒學者 後凋 高能善
 
  고능선이 昌洙에게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고능선은 安泰勳으로부터 昌洙를 소개받았을 때부터 이 젊은 동학농민군 대장을 눈여겨 보았다. 그는 昌洙가 범상(虎相)으로서 앞으로 큰 일을 할 수 있는 자질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렇기는 하나 투항한 패장과 같은 처지의 昌洙의 청계동 생활은 고능선에게도 여간 불안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고능선 자신의 처지도 따지고 보면 昌洙의 경우와 기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능선이 청계동에 오기 전에 安泰勳과 어떤 관계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서로 말을 놓는 것을 보면 親交가 오래된 것 같기도 하다. 安泰勳의 초빙으로 청계동에 와서 그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기는 했으나 그 호의가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또 그만큼 고독했을 것이다.
 
  특히 철저한 위정척사파의 가난한 儒學者인 고능선으로서는 天主學에 관심을 갖는 開化派 安泰勳의 신세를 계속 지고 있는 것 자체가 고민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무렵에 天主敎는 1893년에 安岳郡 文山面 遠星里 마렴을 公所로 정하고 黃海道에서도 포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昌洙가 청계동에 머문 1895년에는 안악군 龍門面 梅花洞(매화동)에 本堂(聖堂)이 건축되었다.29)
 
  고능선은 昌洙에게 古今의 위인들을 비평한 내용을 들려 주기도 하고, 스스로 연구하여 깨달은 요체와 「華西雅言(화서아언)」이나 「朱書百選(주서백선)」에 나오는 긴요한 구절들을 교재로 삼아 昌洙를 가르쳤다.30)
 
  「화서아언」은 金平默과 柳重敎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스승인 이항로의 저술과 어록 가운데에서 중요한 내용을 뽑아 편찬한 책이고, 「주서백선」은 朱熹가 스승, 친우,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에서 가장 요긴한 내용 100편을 뽑아 엮은 책이다.
 
  金九는 이 책을 「朱子百選」이었다고 적고 있으나 이는 착오일 것이다. 「朱子百選」이라는 책은 中國에도 朝鮮에도 없었다. 조선시대에 주희의 글을 모아 편찬한 책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1794년에 正祖가 친히 편찬한 것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李恒老와 위정척사 사상
 
 
  李恒老의 現實認識과 西洋對應論理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중국을 높이고 夷狄(이적)을 물리쳐야 하는 것은 천지가 다할 때까지의 대원칙이다. … 만일에 우리나라의 士民들이 집집마다 중국을 높이고 이적을 물리치는 義理를 講明(강명)하게 하였다면 이적이 몸둘 곳이 없을 것이다. 아! 오늘날은 온 천하가 오랑캐가 되었지만 西洋이라는 것은 이적 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들이다>31)
 
  또한 그는 청국과 서양을 구별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중국의 도가 망하면 夷狄과 禽獸가 밀려오는 것이다. 北虜(북노: 북쪽 오랑캐)는 이적인지라 오히려 말할 수나 있지만 西洋은 금수인지라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32)
 
  이러한 이항로의 사상을 철저하게 계승한 고능선은 <先王의 法이 아니고 先王의 道가 아닌 것은 거론할 필요가 없다>33)고 말하고, <오직 우리나라에만 한 가닥 밝은 맥이 남아 있고 세계 각국이 대부분 被髮左(피발좌임)한 오랑캐들이다>34)라고 강조하여 金九가 「尊中華攘夷狄主義(존중화 양이적주의)」35)라고 표현한 위정척사 사상을 昌洙에게 가르쳤다. 「피발좌임」이란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는 뜻으로서, 오랑캐의 복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위정척사 사상은 옳은 것을 받들고 옳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崇正學 闢異論(숭정학 벽이론)에 입각하여 正統儒學을 받들고 佛敎와 陽明學 등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유교적 정치윤리사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역사적으로는 朱熹가 宋代 이후 女眞族의 무력침공으로 漢族과 中華文化가 위기에 봉착하자 유교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春秋大義로 이적을 응징할 것을 역설하면서 華夷意識(화이의식)을 뼈대로 하여 체계화한 것이다.
 
  그것이 조선에 들어와서는 조선사회의 이데올로그들이었던 性理學者들 사이에 화이론적 세계관과 중화주의적 가치관으로 자리잡았고, 明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朝鮮이 正統이라는 이른바 小中華思想에 입각한 尊明排淸(존명배청)의 北伐論(북벌론)으로 발전했다. 이와 같은 위정척사 사상이 민족운동의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60년대 중반 이후 서양의 通商要求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1866년에 丙寅洋擾(병인양요)와 제너럴 셔먼號 사건이 발생하자 이항로, 奇正鎭(기정진) 등이 서양을 「洋賊」으로 지칭하면서 이들과의 타협을 거부할 것을 주장한 「主戰斥和」의 상소를 올리면서 구체적인 행동을 전개했다. 이항로를 비롯하여 그의 학문을 계승한 김평묵, 유중교, 최익현, 유인석 등이 위정척사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들로 꼽힌다36)
 
 
  斥邪論의 핵심사상은 「華夷人獸之別」
 
 
  이들 척사파들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서양문명과 중화문명의 대립으로 파악하여, 歐美諸國의 강압적인 통상 요구를 小中華文明인 조선문명의 正體性에 대한 도전이자 침략 행위로 인식했다.37)
 
  이처럼 척사론의 이론적 출발점은 華夷論(화이론)에 근거한 소중화론이었는데, 이항로에 와서는 이른바 「華夷人獸之別(화이인수지별)」의 주장으로 발전했고, 그것이 척사론의 핵심사상이 되었다.
 
  이항로는 明은 中華로, 朝鮮은 小中華로, 淸은 중국을 지배하고 있으나 夷(이)로, 그리고 西洋과 그 앞잡이인 日本은 禽獸로 인식했다. 이와 같은 대외인식에서 볼 때에 서양과 일본의 침략은 곧 중화의 이적화나 금수화가 아닐 수 없었다.38)
 
  이처럼 위정척사 사상은 대외적으로는 구미제국을 배척하는 강렬한 反침략사상으로서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三綱五倫에 바탕을 둔 봉건적인 사회질서를 고수하려는 보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정척사파들은 斥洋斥倭를 근간으로 하는 反침략적 배외운동을 전개하기는 했으나 그것이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개혁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척사사상은 反侵略의 강렬한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反封建과 開化와는 대립적인 것이었다. 이 점이 척사운동이 개화운동이나 동학농민전쟁과 구별되는 특징이었다.39)
 
  고능선은 위정척사의 논리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그는 서양옷을 입지 않았고, 서양 물건은 일체 집안에 들이지 않았다.40) 그는 서양 물건이라고는 당성냥 한 가치도 쓰지 않았다.41)
 
  고능선의 가르침을 받은 昌洙는 동학접주로서 팔봉도소에 구호로서 내걸었던 「斥洋斥倭」가 朝鮮의 正統性을 지키는 진리라는 사실을 이제 마음으로부터 확신하게 되었다. 金九는 이때의 일을 「백범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청계동에서 오로지 고선생만을 하나님처럼 숭배하고 있던 때에는 나 역시 척왜척양이 우리의 당연한 천직이라 생각하였다. 이에 반대하는 자는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라고 여겼던 것이다〉42)
 
  그리하여 그는 서양인을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가 우뚝 선 원숭이에서 멀지 않은 오랑캐들」43)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그들을 배척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믿게 되었던 것이다.
 
  金九는 또한 고능선의 訓育과 관련하여<고선생은 주로 義理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셨다>44) 라고 특별히 적고 있다. 고능선은 昌洙에게 아무리 뛰어난 재주와 능력이 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그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되며,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등을 강조했다.45) 그런데 고능선이 昌洙에게 강조한 의리란 단순한 일상의 생활윤리로서의 의리가 아니라 화서학파의 의리론이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義理論은 小中華論과 함께 화서학파의 핵심적인 사상이었다. 이항로는 孔子의 春秋大義, 孟子의 闢異端論(벽이단론), 朱子의 尊華攘夷(존화양이)의 정통론에서 宋時烈의 尊明排淸(존명배청)의 北伐論으로 이어지는 의리를 유학의 正統道脈으로 인식했다.46) 이항로가 조선의 유학자 가운데에서 李滉(이황)이나 李珥(이이)보다도 교조적이고 당파성이 강했던 송시열을 주자의 道統으로 꼽은 것은 북벌론을 통하여 역사의 정통성을 회복하려고 했던 송시열의 의리론에 더 큰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이항로는 「深造默契之言(심조묵계지언)」에서 <배우는 사람은 朱子를 宗主로 하지 않으면 孔子의 문턱에 들어갈 수 없고, 宋子(宋時烈)를 憲章으로 하지 않으면 朱子의 統緖(통서)에 접할 수 없다>47)고 했을 만큼 송시열의 존화양이사상으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와 같은 도통 인식이 고능선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었을 것이다.
 
  고능선은 昌洙에게 의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朴泰輔(박태보)의 보습담근질 일화와 三學士의 절개에 대해서도 설명했다.48) 박태보는 肅宗 때의 문신으로서 仁顯王后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다가 심한 고문을 당하고 유배를 가던 길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노량진에서 죽었다. 고능선은 昌洙에게 박태보는 보습으로 담근질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오히려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너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삼학사는 병자호란 때에 청국과의 화의를 끝내 반대하다가 청국으로 붙들려간 尹集, 吳達濟, 洪翼漢 세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은 청국으로 잡혀가서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절개를 지키다가 처형당했다.
 
 
  과단성 부족이 金昌洙의 결점
 
 
  고능선은 일을 할 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3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고능선은 昌洙의 가장 큰 결점을 과단성의 부족이라고 보았다. 그는 昌洙에게 무슨 일이나 밝히 보고 잘 판단하여 놓고도 실행의 첫 출발점이 되는 과단성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詩를 힘주어 설명했다.
 
  <得樹攀枝無足奇(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懸崖撒手丈夫兒(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이다)49)>
 
  고능선의 통찰은 정확한 것이었다. 金九의 이러한 과단성의 부족은 앞서 상투를 자를 때에 본 것과 같은 李承晩의 경우와는 아주 대조적인 것이어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이러한 대조적인 성향은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생을 두고 그대로 표출되면서 그들이 직면했던 중대한 일들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고능선의 의리에 대한 가르침은 金九가 뒷날 위정척사 사상에서 벗어나 개화론자로 변신한 뒤에도 평생의 행동준거가 될 만큼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점에 대해서는 「백범일지」의 여러 대목에 언급되어 있는데, 가령 개화파로서 新敎育運動에 헌신하다가 安岳事件과 新民會事件으로 17년 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할 때에 다음과 같이 자성하고 있는 것은 그 대표적인 보기이다.
 
  〈너는 일찍이 高後凋에게서 義理가 무엇인지 가까이에서 배웠고, 그이에게서 배운 금언 중에 三尺童子라도 개나 양을 가리켜 절을 시키면 반드시 크게 노하며 불응한다는 말을 강단에서 신성한 제2세 국민에게 연설하던 네가 머리를 숙여 왜놈 간수에게 절을 하느냐? 네가 항상 암송하는 古人의 詩 가운데, 「食人之食 衣人衣(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남이 만들어 준 옷을 입거늘) 所志平生 莫有違(품은 뜻은 평생 어기지 말아야 한다.)」는 구절을 망각했느냐? … 남아는 의로 죽을지언정 구구히 살지 않는다고 평일에 어린 학생을 가르치더니, 네가 오늘 살아 있는 것이냐 죽은 것이냐? 네가 개 같은 생활을 견디어 지내고서 17년 뒤에 장차 공을 세워 죄를 갚을 자신이 있느냐?〉50)
 
  또한 金九는 고능선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를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 슬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까지 30여 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에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당시 淸溪洞에서 高先生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다 기울여 口傳心授하시던 訓育의 덕일 것이다〉51)
 
  그리고 1947년에 「백범일지」 국내본(국사원본)을 출간할 때에 책 머리에 고능선의 사진을 싣고, 그 옆에 <나는 나라에 忠誠하는 법을 高後凋 선생께 배웠다>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그런 점에서 金九는 민족운동 과정에서 華西學派의 마지막 인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망하는 나라 붙들 方略찾아 淸國으로
 
 
  昌洙는 고능선의 가르침을 통하여 정신적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자 청계동 생활에도 점차 적응해 갔다. 安泰勳은 사랑에서 잔치를 벌이고 흥취 있게 놀 때마다 반드시 고능선을 초청했다. 그런데 또 이 자리에는 金九 자신의 말대로 「술로나 글로나 나이로나 겉모양으로나 그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昌洙를 安泰勳은 빠뜨리지 않았다. 만약 昌洙가 조금만 늦어도 安泰勳은 산포수나 하인을 불러 『너 속히 돼지골 가서 昌洙 서방님 모셔오너라』하고 昌洙를 데리러 보냈다.
 
  安泰勳이 昌洙를 이처럼 대우하자 산포수들의 태도도 저절로 공손해졌고, 安泰勳의 아우들의 태도도 바뀌었다. 또한 고능선이 昌洙를 친근히 대접하는 것을 본 마을 사람들의 태도도 차차 달라졌다.52)
 
  安泰勳이 이따금 고능선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安泰勳과 고능선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古今의 일을 講論하는 것이었다. 昌洙는 이러한 강론을 곁에서 듣는 것이 여간 흥미롭지 않았다.
 
 
  더덕뿌리 캐먹고 疝症 나아
 
 
  이 무렵 昌洙는 몇 년 전부터 시작된 疝症(산증) 때문에 고생을 했는데, 청계동에서도 산기가 재발했다. 산증이란 고환이나 음낭 등의 질환 때문에 일어나는 신경통, 요통의 일종으로서, 산증에 걸리면 아랫배가 땅기며 통증이 있고 소변과 대변이 막히기도 한다고 한다.
 
  昌洙가 安泰勳의 사랑에서 만난 吳主簿(주부란 한약방 주인을 가리키는 말)에게 산증의 치료법을 물으니까, 그는 沙蔘(사삼:더덕 뿌리)을 많이 먹으면 완치할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오주부의 말을 듣고 昌洙는 틈나는 대로 고능선의 아들 원명과 함께 약초 캐는 괭이를 메고 뒷산에 올라 가서 사삼도 캐고 바위 위에 앉아서 정담도 나누었다. 이렇게 석 달 동안 사삼을 복용하자 산증이 깨끗이 나았다.
 
  이 소문을 들은 信川郡守가 安泰勳을 통하여 사삼을 구해 줄 것을 당부해 와서 昌洙는 사삼 한 망태기를 캐어 그에게 보내 주었다고 「백범일지」는 적고 있는데,53) 昌洙가 산증으로 고생하던 이야기가 청계동에서 꽤나 화제가 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때의 신천군수는 金商絢(김상현)이었다. 그는 1894년 12월13일에 동학군이 신천관아를 습격했을 때에 가족을 데리고 청계동으로 피신했다가 이듬해 3월에야 관아로 돌아갔는데,54) 동학군에게 관아를 빼앗겼다는 죄목으로 1895년 2월27일자로 파면되었다.55)
 
  昌洙는 날마다 고능선의 집에서 공부를 하면서 고능선과 밥도 같이 먹고, 밤이 깊어 인적이 끊어질 때까지 國事를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능선은 昌洙에게 淸國으로 갈 것을 권유했다.
 
  고능선은 昌洙에게 먼저 시국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만고 천하에 흥해 보지 못한 나라가 없고 망해 보지 못한 나라가 없네. 종전에는 土地와 百姓은 가만 두고 君主 자리만 빼앗는 것으로 興이라 亡이라 하였지. 그러나 지금의 亡國이란 나라의 토지와 백성과 主權을 倂呑(병탄)하는 것이네. 우리 나라도 반드시 망하게 되었는데, 필경은 왜놈에게 멸망당하게 되었네.
 
  소위 朝廷大官들은 전부 媚外思想(미외사상: 외세에 영합하려는 사상)만 가지고, 러시아를 친하여 자기 지위를 보전할까, 혹은 英國이나 美國을, 혹은 프랑스를, 혹은 日本을 친하여 자기 지위를 공고히 할까, 순전히 이런 생각들뿐이거든. 나라는 망하는데, 國內의 최고 학식을 가졌다는 山林學者들도 한탄하며 혀만 차고 있을 뿐 어떠한 救國의 경륜이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큰 유감일세. 나라가 망하는 데도 신성하게 망하는 것과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더럽게 망하게 되겠네』
 
  昌洙가 놀라서 그 까닭을 물었다. 고능선은 대답했다.
 
  『一般 人民이 義를 붙들고 끝까지 싸우다가 적에게 覆沒(복몰)당하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요, 一般 臣民이 적에게 아부하다 적의 꾐에 빠져 항복하고 망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일세. 지금 왜놈의 세력은 온 나라에 차고 넘치고 궐내에까지 침입하여 대신들을 마음대로 들었다 놓았다하고 만반 시정이 第二의 倭國이 아닌가? 만고 천하에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고 만고 천하에 죽지 않는 사람이 없네. 그런즉 자네나 나나 죽음으로써 報國하는 한 가지 일만 남았네』
 
 
  청국行 권유
 
 
  말을 마친 고능선은 슬픈 낯빛으로 昌洙를 보았다. 昌洙도 눈물을 흘렸다. 昌洙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망할 것으로 하여금 망하지 않게 할 방책은 없습니까?』
 
  『자네 말이 옳네. 기왕 망할 나라라도 망하지 않게 힘써 보는 것이 신민된 자의 의무이지. 지금의 조정 대관들 모양으로 外勢에 영합하지 말고 淸國과 서로 돕는 방법으로 결합할 필요가 있네. 지난해 청일전쟁에서 청국이 패했으니 언젠가는 복수전쟁을 한 번 벌이려 할 것이네. 적당한 人材가 있으면 청국에 가서 사정도 조사하고 그곳 인물들과도 연락하여 후일에 대처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니, 자네 한번 가 보려나?』
 
  고능선의 이러한 권유는 昌洙를 매일 만나 가르치면서도 전혀 입 밖에 낸 일이 없었던 것이었다.
 
  『저같이 나이 어리고 지각 없는 것이 간들 무슨 효과를 얻겠습니까?』
 
  그러자 고능선은 웃는 얼굴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거야 그렇지. 자네만으로 생각하면 그렇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지들이 많으면 청국의 政界나 學界나 商界나 각 방면으로 들어가서 활동을 할 때이지만 지금은 누가 그런 뜻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있겠나. 자네 한 사람의 생각이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뒷날 유익하겠다 싶으면 실행하여 보는 것뿐이지』
 
  昌洙는 스승의 권유를 쾌히 받아들였다.
 
  『마음이 항상 울적하니 먼 곳으로 바람도 쏘일 겸 떠나보겠습니다』
 
  고능선은 昌洙의 말에 흡족하여 昌洙가 떠난 뒤에 昌洙 부모의 일은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청계동으로 이사한 뒤로 淳永 내외가 어떻게 생활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백범일지」에도 언급이 없다. 들이나 산에 나가 일을 했다는 말도 없다. 양식은 安泰勳이 보내 주었을 것이나, 淳永이나 곽씨부인이 安泰勳집에 내왕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고능선의 가족과도 별로 교분이 있었던 것 같지 않다.
 
  昌洙 부모의 일을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한 고능선의 말은 昌洙가 인사도 하지 않고 淸國으로 떠나고 나면 安泰勳이 淳永 내외를 돌보지 않을 수도 있음을 상정하고 한 말이었을 것인데, 그러한 경우까지 생각하면서 고능선이 昌洙를 비밀리에 떠나보내고자한 데에는 그만큼 심각한 고려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주목되는 것은 그때까지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아버지와 상의하고 아버지의 의견에 따라 행동해 온 昌洙가 淸國으로 떠나는 이 중대한 일을 결심하면서 아버지와 상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昌洙가 그만큼 정신적으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高能善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安泰勳에게는 비밀에 부치고
 
 
  고능선의 배려를 고맙게 받아들인 昌洙는 『安進士와도 상의를 하면 어떻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나 고능선은 뜻밖에도 반대했다.
 
  『내가 安進士의 의향을 짐작하는데, 그는 天主學을 해볼 마음이 있다네. 만일 洋夷(양이)에 의뢰할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大義에 위반된 행동이지. 안진사에 대한 태도는 뒷날 결정할 날이 있을 것이니, 출국에 대한 문제는 아직은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네. 다만 안진사는 확실한 인재이니, 자네가 청국에 가서 여러 곳을 다녀보고 그 결과로 좋은 동기가 생기게 되면 그때에 가서 상의해도 늦지 않을 것이네. 그러니 이번 일은 비밀에 부치고 떠나는 것이 합당할 것 같네』
 
  그러나 갈 곳 없는 패전의 장수에게 부모를 모시고 안주할 곳을 마련해 주기까지 하면서 호의를 베푼 安泰勳에게 하직 인사조차 하지 않고 훌쩍 떠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高能善이 강조한 의리에 위반되는 행동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능선이 昌洙로 하여금 安泰勳 모르게 떠나게 한 것은 만일에 安泰勳이 알게 되면 昌洙의 청국행이 저지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에게는 昌洙를 청국으로 떠나 보내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昌洙로서도 安泰勳 몰래 떠난다는 것은 여간 주저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고선생의 말을 옳게 여기고 출발을 준비했다>고 한다.56) 昌洙의 이러한 태도에서도 우리는 이때에 그가 얼마나 고능선에게 경도되어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고능선의 권유에 따른 昌洙의 청국행은 화서학파의 구체적인 행동 방안이 논의된 시점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화서학파의 의병봉기의 직접적인 움직임은 1894년 12월에 服制改革이 발표되고 나서부터였다. 복제개혁 문제는 甲申政變 이래로 줄곧 논란이 되어왔었다. 1894년 12월16일자 칙령으로 조선에서 처음으로 흑색의 西洋式服制가 채용된 것이었다.
 
  복제개혁이 발표되자 유인석을 비롯한 화서학파의 유생들은 이에 반대할 뜻을 분명히 했다. 유인석은 1895년 1월에 제천의 朱庸奎(주용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곳의 소장파 유생들에게 의병봉기를 촉구했다.57)
 
  또한 「乙未毁服時立言(을미훼복시입언)」을 지어 <先王의 法服을 고치는 것은 天地와 聖賢과 先王과 父祖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 장차 살아서 무엇하리요. … 선왕의 도를 수호하다가 죽는 것은 선비의 의리이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는 법이지만, 삶보다 영광스러운 죽음이 있다. 금일의 일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58) 라면서 전통복제를 지키기 위해 죽음도 불사한다는 비장한 뜻을 피력했다.
 
  그러다가 1895년 5월에 內務大臣 朴泳孝의 수하인 堤川郡守 金益珍(김익진)이 관내에 있는 화서학파 유생들에게 변복령에 따를 것을 강요하면서 문제가 확대되었다.
 
  유인석은 이에 대처할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5월 2∼3일에 전국의 화서학파 유생 150여 명을 제천 長潭(장담)으로 불러 모아 講習禮와 鄕飮禮 형식의 대규모 집회를 개최했다. 이러한 특별 집회를 통하여 화서학파 유생들은 박영효의 매국적 제도개혁을 성토하고 복제개혁을 주도하는 중앙의 개화파들에게 대항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성토의 대상이었던 박영효가 5월15일에 國王廢立陰謀(국왕폐립음모)에 연루되어 실각하고 나서 일본으로 망명하자 화서학파의 박영효 규탄과 변복령 반대운동은 잠시 주춤하게 되었다.59)
 
  그러나 이러한 집회는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11월15일의 斷髮令 이후에 본격적인 의병운동이 전개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행해졌다.
 
  그런데 5월의 장담 집회에는 화서학파 가운데서도 거의 대부분이 柳重敎 문하의 유생들이 참가한 것이었는데, 이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뒷날 화서학파의 본격적인 의병항쟁이 전개된다.60) 斷髮令에 반대하여 義兵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유인석은 西間島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는 昌洙가 청국을 다녀오고 나서 1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義兵活動의 海外 根據地 구상
 
 
  고능선이 이때의 長潭集會에 참석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유인석과 서신 왕래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그가 장담집회를 알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장담집회가 열린 것이 5월 초였고 昌洙가 청국으로 출발하는 것이 5월 하순이라는 점으로도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昌洙의 청국행은 고능선의 개인적인 구상에 따른 것이었다기 보다는 華西學派의 대응책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화서학파의 유생 가운데에서 의병활동의 해외 근거지 구상을 가장 먼저 제기한 것은 洪在鶴(홍재학)이었다.61)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구상을 가장 먼저 실행한 사람은 昌洙를 淸國으로 보낸 고능선이었던 것이다. 이때에 昌洙가 청국에 가서 살펴보고 온 지형과 정보가 뒷날 유인석 부대가 通化縣 五道溝에 정착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다.
 
  고능선의 만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安泰勳에게 작별인사조차 하지 않고 떠난다는 것이 昌洙로서는 여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아니었다. 安泰勳을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속으로나마 하직인사를 하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았다.
 
  昌洙는 그러한 생각으로 安泰勳의 사랑에 갔다가 우연히 참빗장수 행색을 한 사람을 만났다. 말하는 것과 행동거지로 보아 예사 참빗장수가 아닌 듯했다. 昌洙가 인사를 청하자 그 사람은 자신을 南原郡 耳洞에 사는 金亨鎭이라고 소개했다. 昌洙는 김형진에게 자기 집에 가면 참빗을 살 테니까 같이 가자고 하여 함께 집으로 갔다. 하룻밤을 같이 보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까 과연 그는 단순한 참빗장수가 아니었다.
 
  金九는 김형진의 첫 인상에 대해 <사람됨이 그다지 출중해 보이지 않고 학식도 넉넉하지는 못해 보였으나, 시국에 대한 불평으로 무슨 일을 해보겠다는 결심은 있어 보였다>62)고 적고 있는데, 자기보다 열다섯 살이나 연상이며 初試에 합격한 進士인 김형진의 인품이 昌洙에게 이처럼 대수롭지 않게 보였다는 것은 흥미롭다. 고능선의 훈육 덕택에 그만큼 사람을 대하는데 자신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참빗장수」 金亨鎭을 만나서
 
 
  金亨鎭의 본명은 金元明으로서 金炯模, 金亨振, 金鳳會 등의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김형진은 柳重敎의 문하에서 배웠고,63)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祭文에 명나라 연호를 사용할 정도로 철저한 위정척사파였다.64)
 
  그는 1895년 4월에 척양척왜의 큰 뜻을 품고 상경하여, 武官 출신으로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일본의 강압적인 내정개혁요구에 반대했던 원로 申正熙(신정희)를 찾아 갔으나 별다른 방책을 얻지 못했다. 그는 한양 성안이 온통 왜색천지인 것에 크게 실망했다고 했다.
 
  다음날 昌洙는 김형진을 데리고 고능선의 집으로 갔다. 고능선 역시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본 뒤에 『남의 머리가 될 인물은 못 되나 다른 사람을 도와서 일을 성사시킬 만한 소질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고능선과 昌洙는 김형진이 昌洙의 길동무로 손색이 없다고 판단했다.
 
  김형진 역시 昌洙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는 昌洙가 자기와 같은 종씨인 것이 우선 반가웠다. 척양척왜의 큰 뜻을 함께 할 동지를 구하던 그에게 昌洙는 뜻에 맞는 인물로 보였다. 「백범일지」에는 安泰勳이 당대의 문장가요 대영웅이라는 것이 三南地方에까지 알려져 김형진이 청계동을 찾아온 것이었다고 했으나,65) 김형진 자신은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연히도 하루는 信川에 가게 되었다. 청계동에 사는 安泰勳은 나라의 주권 회복의 큰 뜻을 품고 의병을 널리 모아 수천에 이르고 진지를 본도에 구축하였으며, 병기와 총기와 쌓아 놓은 양곡이 산더미 같았다. 들어가서 의려장 安泰勳을 만나 뵈옵고 그 진중에 머물면서 며칠을 기숙했다. 그런데 우연히도 종씨 昌洙를 만나게 되었다. 이 사람은 왜병 두목과 싸우다 패하여 깊은 산 속에 숨어 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나이는 스무 살이었다. 같이 종가에 돌아가 고락을 함께 할 것과 척양척왜의 계략을 의논했다〉66)
 
  이처럼 청계동을 찾아와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쉽게 뜻이 통할 수 있었던 것은 김형진이 유중교의 문하생이고 金九는 같은 화서학파인 고능선의 훈육을 받아 척양척왜의 시국인식이 일치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함께 청국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67) 이때가 1895년 5월로서 昌洙가 청계동에 은거한지 석 달쯤 지난 때였다.
 
 
  먹이던 말 팔아 여비 마련
 
 
  昌洙가 여행준비를 어떻게 했는지는 「백범일지」에도 자세하지 않다. 다만 집에서 부리던 말 한 필을 내다 팔아서 여비 200냥을 마련했다고 적고 있다.68) 당시의 여행은 거의가 도보여행이었다. 특히 山岳과 國境地方을 거쳐야 하는 험난한 여정을 고려해서 최소한의 준비로 여행경비만을 마련해서 출발했던 것 같다.
 
  「백범일지」에는 이때에 팔았다는 말을 어떻게 해서 먹이고 있었는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다. 昌洙의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미루어 200냥이 나가는 말을 먹이고 있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인데, 뒤에서 보듯이 1차 여행을 떠난 지 불과 넉 달 뒤에 다시 2차 여행을 떠나려고 할 때에는 여행경비가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빌려서 출발한다.69)
 
  이 때에는 일반 농가에서 말을 먹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1900년에 러시아 재무성이 작성한 기록에 따르면 <넓은 들을 지나가더라도 가축은 한 마리도 발견할 수 없었으며, 농부가 황소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면 부자로 간주되고 있다>고 할 만큼 가축은 귀한 존재였다.70)
 
  말은 소보다 가격은 더 비쌌으나 밭갈이에 이용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1904∼1905년경에 실시된 韓國政府의 조사에 따르면 중국의 영향을 받은 압록강 근처에서만 말이 밭갈이 하는 지역이 두 곳 있었을 뿐이고 그밖에서는 牛耕(우경)이 아닌 곳이 없었다.71)
 
  또한 1910년도 「朝鮮總督府統計年報」에는 70호에 말 한 필을 소유했다고 했는데, 아마도 농경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을 농가가 보유한 비율은 이보다 낮았을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가축은 밭갈이와 짐을 실어 나르는 노동력으로 쓸 목적으로 길렀는데, 말은 주로 짐을 실어 나르거나 사람이 타고 다니는 데 사용되었다.
 
  昌洙의 1차 청국행은 고능선의 권유에 따른 것이기는 했으나 뚜렷한 목표와 대상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청국과의 연대는, 金九가 <가는 길에 白頭山을 답파하고 만주를 거쳐 北京을 최종목적지로 정했다>72)고 한 데서 보듯이, 막연한 기대를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므로 1차 청국행은 地形과 周邊情勢도 관찰하고 見聞도 넓힐 수 있는 기회로 생각했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지름길을 택하지 않고 咸鏡道의 동해안을 거쳐 白頭山을 돌아서 가는 우회코스를 선택했다.●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6)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참빗장수로 변장하고
 
 
  金昌洙(金九)와 金亨鎭이 청계동을 출발한 것은 1895년 5월이었다.1) 두 사람은 이때에 관찰하고 경험한 내용을 각각 기록으로 남겼다. 昌洙는 30년 뒤에 쓴 자서전 「백범일지」에, 김형진은 돌아와서 얼마되지 않은 1898년에 쓴 「路程略記(노정약기)」에 상세히 적어 놓았다.
 
  「노정약기」에 따르면 두 사람의 청국행은 5월과 9월의 두 차례였다. 이 책은 두 차례에 걸친 청국행의 코스와 일정을 자세히 밝히고 있어서, 두 번 다녀온 사실을 뭉뚱그려서 한 번 있었던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 「백범일지」의 내용을 보완해 준다. 그러나 「노정약기」의 서술은 전반적으로 과장이 많아서 중요한 내용의 신빙성에 의문이 없지 않다.
 
  두 사람은 먼저 白頭山을 답파하고 中國 東北地方(滿洲)을 거쳐 北京까지 갈 목적으로 출발했다. 청계동을 출발한 두 사람은 載寧의 餘物坪(여물평), 石海(석해), 越津(월진)을 지나서 鳳山을 거쳐 黃州에 이르렀다. 북쪽으로 가는 교통의 요지인 황주는 淸日戰爭의 격전장으로서 많은 피해를 입은 곳이었다. 그러나 전란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황주는 여전히 아름다운 고장이었다. 황주에서 두 사람은 일본 병사 300명 가량이 백성들과 어울려 환담하는 광경을 보고 몹시 불쾌했다.2)
 
  中和를 거쳐 平壤에 도착한 뒤에 두 사람은 여행방법을 협의했다. 平壤을 지나서는 험한 산길인데다가 국경이 가깝기 때문에 변장을 하는 것이 유리할 것 같았다. 김형진은 앞에서 본 대로 이미 고향 南原을 출발하여 황해도에 이르는 과정에서 참빗장수 행세를 한 경험이 있었다. 두 사람은 이번에도 참빗장수로 변장하기로 하고 여비 전부를 털어서 참빗, 붓, 먹 등 산골마을에 요긴한 물품을 사서 저마다 한 짐씩 짊어졌다.3)
 
  江東의 咽派(열파) 장터를 지날 때에 갑자기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졌다. 두 사람은 비를 피하고 하룻밤 쉬어 가기 위해 가까운 齋室(재실)을 찾아 들었다. 그런데 昌洙는 재실에 먼저 들어와 있던 일흔살 가량의 주정뱅이 노인에게 까닭없이 매를 맞았다. 昌洙는 억울한 생각이 들었으나 원대한 목적을 품고 먼 길을 가는 데 사소한 일에 마음 둘 바 아니라고 생각하고, 김형진과 韓信(한신)의 고사를 이야기하며 서로 위로했다.4)
 
  한신의 고사란, 淮陰(회음)의 부랑배가 한신에게 시비를 걸어 자기 가랑이 밑으로 기어서 지나가라고 하자 한신이 모욕을 참고 그 부랑배의 가랑이 밑을 기어서 지나갔다는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다. 成川을 지나 高原으로 내려갈 때에는 험하기로 이름난 麒麟嶺(기린령)을 넘었는데, 종일 걸어도 인기척을 발견할 수 없었다. 목은 마르고 배는 점점 고파왔다. 지나가는 길에 마침 뽕밭이 있어서 오디를 따 먹고서야 겨우 갈증과 허기를 면할 수 있었다.5)
 
  두 사람은 함흥에 도착하여 조선에서 제일 긴 나무다리로 소문난 萬歲橋(만세교)를 건넜다. 이 다리는 함흥평야를 휘감아 도는 城川江을 가로질러 盤龍山(반룡산)의 樂民樓 아래에 가설된 150칸이나 되는 다리인데, 李成桂가 조선 역대 왕들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뜻에서 「만세교」라고 이름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金九는 이 다리를 「南大川다리」라고 적고 있으나 이는 착오이다. 남대천은 北靑에 있는 강이다.
 
 
  김삿갓(金笠)의 詩도 외워
 
 
  金九는 만세교와 관련하여 김삿갓(金笠: 본명은 金炳燕)이 이 다리를 두고 읊은 詩에 〈山疑野窄超超立(산은 들이 좁을까 저어하여 멀리 멀리 서 있고)/水恐舟行淺淺流(물은 배 다니는 것이 두려워 얕게 얕게 흐른다)〉라는 구절이 있다고 소개하면서 이런 구절이「明作이라 한다」고 적고 있는데,6) 華西學派 儒林들과는 거리가 먼 풍자시인 김삿갓의 詩를 암기할 만큼 알고 있었다는 것은 金九가 김삿갓의 반골 정신과 해학을 그만큼 좋아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이 詩句(시구)는 「登咸興九天閣(등함흥구천각)」이라는 詩의 일부인데, 이 구절의 원문은 「山疑野狹遠遠立(산의야협원원립)/水畏舟行淺淺流(수외주행천천류)」로서7) 金九는 「窄超超(착초초)」 「恐(공)」 네 글자를 틀리게 기억하고 있다.
 
  만세교를 건너자 조선의 四大物8)의 하나인 장승 네 개가 길가 좌우에 마주보고 서 있었다. 이성계가 세웠다는 낙민루를 구경하고, 西門樓에 오르자 사방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망망했다. 두 사람이 동문으로 나와서 德山館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서산으로 기울었다. 그런데 「노정약기」에는 여기에서 준비해온 노자가 바닥이 나고 말았다고 했는데,9) 구입한 물품을 이때까지 다 팔지는 못했을 것이므로 아마 현금이 떨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두 사람은 여덟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구걸을 해서야 겨우 끼니를 때웠고, 각자 떨어져서 잠자리를 구하여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 두 사람은 길이 어긋나서 서로 간 곳을 찾을 수 없었다. 昌洙는 할 수 없이 혼자서 咸關嶺(함관령)을 넘었다. 함관령은 함경남도 咸州郡과 洪原郡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로서 골이 깊고 경사가 급하며 굴곡이 많았다. 그러나 길은 폭이 넓고 평탄하여 예부터 洪原과 咸興과 元山을 잇는 중요한 종단교통로로 이용되었다.
 
  고갯마루에서 동쪽으로 오리쯤 떨어진 嶺上里(영상리)에는 고려 恭愍王(공민왕) 때에 이성계가 원나라 군대를 물리친 전공을 기념하여 세운 ♥♥洞 勝戰紀蹟碑(달단동 승전기적비)가 있었다. 昌洙는 고개를 내려오는 길에 승전비를 구경하고 고개 밑 주막에 닿았다. 여기에서 극적으로 김형진을 다시 만났다.10)
 
  두 사람은 함관령을 넘어서 洪原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동해안의 평탄한 해안도로가 이어졌다.
 
  洪原은 은어, 송어, 연어, 게 등 각종 해산물이 풍부한 고장인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유명한 것은 게잡이였다.11) 昌洙는 건장한 한 여인이 광주리에 꽃게 한 마리를 힘겹게 이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광주리에 담긴 게다리 한 개가 자기의 팔뚝보다 더 굵었다고 적고 있다.12) 新浦 부근은 명태, 송어, 고래 등 한대성 어족이 많이 잡히는 곳이었다. 두 사람은 신포를 지나면서 이 지방의 경치와 명태잡이하는 광경을 보았다.
 
  함경도 지방을 지나면서 昌洙에게 인상깊게 느껴진 것은 이 지방 사람들의 높은 교육열이었다. 昌洙의 淸國行은 國土巡禮의 성격이 없지 않았는데, 그가 눈여겨 관찰한 것이 이처럼 교육문제였다는 것은 뒷날 그가 2세 국민의 교육에 힘을 쏟는 것과 관련하여 매우 주목된다.
 
 
  북을 치면 시작하고, 징을 치면 마치고
 
 
  홍원에서는 어떤 큰 동네의 서재를 방문했다. 이 서재는 건물이 크고 웅장한데다가 교사가 세 사람이나 있었다. 한 사람은 경서반, 한 사람은 중등반, 한 사람은 유치반을 맡아 가르치고 있었는데, 대청 좌우에 북과 징을 매달아 두고 북을 치면 독서를 시작하고 징을 치면 마치는 재미있는 방법을 쓰고 있었다.
 
  新浦를 지나서 北靑에 들어섰다. 북청은 자녀교육에 대한 열성이 높기로 특히 유명한 곳이다. 아무리 산간벽지의 빈촌이라도 추수가 끝나고 나서 겨울 동안에는 반드시 훈장을 초빙하여 자녀들을 가르쳤다. 舊韓末에 전국적으로 보기 드물게 북청의 학교수가 무려 80여 개교에 이르렀다는 것은 이곳의 교육열을 웅변으로 말해 준다.13)
 
  북청사람들은 옛날부터 科擧에 열심이었다. 昌洙가 방문했을 때에도 郡 안에 생존한 進士가 30여 명이나 있고 급제자가 일곱 사람이나 된다고 했다.14) 昌洙는 북청지방을 여행하면서 남대천 좌우에 무수히 세워져 있는 솟대를 보았다. 솟대신앙은 三韓時代 이래의 민간신앙으로서 긴 장대 끝에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 매달고 숭배하는 것을 말하는데, 북청지방의 솟대는 이 지방의 교육적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솟대의 한 유형으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자기 집 앞이나 조상의 산소 같은 곳에 세우는 華柱(화주)라는 것이 있었다.
 
  昌洙가 본 북청의 솟대도 이런 화주들이었다. 그것은 기둥에 용의 형상을 새기고 꼭대기에는 날아가는 용의 모양을 만들어 붉은 칠을 해서 꽂아놓은 것들이었다. 남대천 좌우에 그런 솟대가 무수히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金九는 북청이 「가히 文華鄕(문화향)이라 부를 만했다」15)고 감탄하고 있다.
 
  북청을 출발한 두 사람은 端川(단천)을 지나서 白頭山이 있는 서북쪽을 향했다. 단천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해안도로였으나 摩雲嶺(마운령)을 지나서부터는 蓋馬高原(개마고원) 일대의 험산준령이 펼쳐져 있어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험한 고개를 힘들게 넘어야 했다.
 
  마운령을 넘어 甲山에 도착했다. 김형진은 이때가 6월19일이었다고 했고, 金九는 7월경이었다고 적고 있다.16)
 
 
  甲山의 봇껍질 지붕
 
 
  甲山은 높은 지대의 산중에 자리 잡은 큰 읍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관사를 제외한 모든 집들이 지붕에 한결같이 풀이 무성해 있었다. 얼른 보기에 사람이 살지 않는 황폐한 빈 고을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곳 말로 「봇껍질」이라는 것으로 지붕을 이고 그 위에 흙을 덮은 다음 풀씨를 따서 뿌려놓아 무성하게 해놓은 것이었다. 그렇게 해놓으면 아무리 큰 비가 퍼부어도 흙이 씻겨 내리지 않는다고 했다.
 
  봇껍질은 색이 희고 탄력성이 강해서 지붕을 일 때에 반드시 조약돌이나 흙으로 눌러놓아야 하는데, 이렇게 해두면 흙기와나 돌기와보다 오래 가고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곳에서는 죽은 사람을 염습할 때에 봇껍질로 싸는데, 그렇게 해 두면 땅 속에서 만 년이 지나도 해골이 흩어지지 않는다고 했다.17)
 
  두 사람은 갑산을 떠나서 惠山鎭(혜산진)에 도착했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기온이 가장 낮은 곳으로서 겨울은 혹한이다. 혜산진을 지나는 길에 두 사람은 그곳에서 동남쪽으로 오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國師堂과 祭享堂(제향당)을 구경했다. 백두산 줄기가 남쪽으로 뻗치면서 조선산맥의 큰 줄기를 이루는 곳에 있는 국사당은 북방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세운 것이고, 제향당은 봄과 가을에 백두산 산신제를 지내는 곳이었다. 국사당 柱聯(주련)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六月雪色山 白頭而雲霧/유월에도 눈 덮인 산 백두에 운무가 감돌고
 
  萬古流聲水 鴨綠而洶湧/만고를 소리쳐 흐르는 물 압록에 용솟음친다.>18)
 
  惠山은 압록강 건너편의 중국인 민가에서 나는 개 짖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중국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거기에서는 압록강도 걸어서 건너다녔다. 혜산에서 백두산 가는 길을 물으니까 西大嶺을 넘어간다고 했다.
 
  혜산을 출발한 두 사람은 三水를 거쳐서 靑山嶺을 넘어 長津(장진)으로 갔다. 장진으로 가는 길은 인적 없는 길이 200여 리나 되는 험한 길이어서 두 사람은 청국인 王淸山(왕청산)과 동행인 수십명과 함께 여행했다.19) 장진에서 厚昌(후창)을 지나서 慈城(자성)을 거쳐 中江에 이르렀다. 중강에서 압록강을 건너 마침내 중국땅인 帽兒山(모아산)에 도착했다. 모아산은 자성 건너편의 臨江 옆에 있는 산이다.
 
 
  쓰러진 老木 타고 溪谷 건너
 
 
  삼수에서부터 모아산에 이르기까지는 험산준령이 아닌 곳이 없었는데, 어떤 곳은 칠팔십 리나 사람이 살지 않는 곳도 있어서 아침에 출발할 때에 미리 점심밥을 싸 가지고 가기도 했다. 산길은 험하고 산림이 울창하여 지척을 분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맹수는 별로 없었다.
 
  나무 가운데 큰 것은 밑둥 하나를 벤 그루터기 위에 일여덟 사람이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찍어 넘긴 나무를 잘라 곡식을 넣어두는 통을 파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장정이 나무통 안에 들어가서 도끼질을 하고 있었다.20)
 
  또한 이쪽 산꼭대기의 노목이 쓰러져 건너편 산꼭대기에 걸쳐져 있는 것도 많이 눈에 띄었다. 행인들은 깊은 계곡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 외나무다리를 타고 건너가게 되어 있었다. 두 사람도 그렇게 건넜는데, 마치 신선이 다니는 길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金九는 회상하고 있다.21)
 
  이 지방은 인심이 매우 순후하고 먹을 것이 풍부해서 손님을 무척 반가워하고 얼마든지 묵어가게 한다고 했다. 양식은 거의가 귀리와 감자였고, 개천에는 이면수라는 물고기가 많았는데 맛이 무척 좋았다고 했다. 이면수(또는 이민수)는 바닷물고기인데, 어떤 민물고기를 이 지방에서 이면수라고 불렀는지 알 수 없다. 사람들이 짐승 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 것으로 미루어 원시시대 생활을 그대로 하고 있는 듯했다.
 
  모아산에서 서북쪽으로 老人嶺(노인령)이라는 고개를 넘고 또 넘어 西大嶺으로 가는 길에 100리에 두세 사람씩 동포들을 만났다. 그들은 거의가 금을 캐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마다 백두산 가는 것을 말렸다.
 
  서대령에는 嚮馬賊(향마적)이라는 중국인 마적떼가 숲속에 숨어 있다가 길가는 행인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소지품을 빼앗아 가기 일쑤라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도 우리 동포가 피살되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백두산 가는 길을 단념하고 通化縣으로 가기로 했다.
 
  두 사람이 백두산으로 가고자 했던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백두산을 지나서 있는 北間島 地方(지금의 長白朝鮮族自治縣)은 1880년대에 들어와서 韓人越墾民(한인월간민)에 의한 집단적인 개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는데,22) 두 사람이 청국여행을 하게 된 동기의 하나가 華西學派 儒林들의 해외 근거지 구상에 따른 현지 답사였는데도 백두산과 그 너머 北間島 지방으로 가는 길을 쉽사리 포기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북간도 지방 개척과 함께 1880년대 들어 淸國과 朝鮮 사이에 다시 논란이 되고있던 白頭山 定界碑(1712년에 건립)에 대한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高能善이 昌洙를 淸國으로 보낸 이유가 청국이 반드시 복수전을 할 것이므로 청국과 협력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 데서 보듯이, 이 무렵 화서학파 유림들의 관심이 日本軍을 물리치기 위해 淸國軍과의 연대를 도모하는 데에 더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高句麗 遺蹟地에 관심 못 가져
 
 
  두 사람은 婆猪江(파저강:지금의 渾江)에서 배를 타고 통화현에 도착했다. 通化縣城은 세워진 지 오래되지 않아서 관사와 성루문의 서까래가 아직 흰 빛을 띠고 있었다. 성 안팎에는 집이 500여 호쯤 된다고 했다. 동포집은 단 한 집뿐인데, 이 집 남자 주인은 ♥髮(변발)에 중국 복장으로 통화현 군대에 복무한다고 했고, 여인들은 모두 조선옷차림이었다.
 
  그 주인은 이른바 胡通辭(호통사: 만주어 통역인)였다. 서문 밖에서 조선인 주막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찾아 들었더니 주막 안에는 동포가 여나믄 명 있었다. 두 사람은 그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다.23)
 
  두 사람은 통화현의 桓仁(환인), 寬甸(관전), 臨江(임강), 輯安(집안) 일대를 돌아다녔다. 파저강 좌우에는 淵蓋蘇文(연개소문)과 薛仁貴(설인귀)의 보루 遺址(유지)가 있었고, 도처에 천연의 요새가 있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으뜸가는 장군이었고, 薛仁貴는 唐나라 高宗 때의 장군으로서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평양에 설치된 安東都護府의 都護로 부임했던 사람이다. 천연 요새들은 高句麗, 遼, 金, 女眞의 발원지라고 했다. 한 곳에서는 林慶業(임경업)의 비각을 보기도 했는데, 비각 근처에 사는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병든 사람이 있으면 이 비각에 와서 병을 낫게 해달라고 비는 풍습이 있다고 했다.24)
 
  그런데 두 사람은 이 일대 요새지가 고구려의 발원지라는 말을 듣고도 고구려의 유적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輯安은 고구려의 도읍이었으며 輯安 뒷산이 國內城이고 유명한 廣開土王碑와 웅장한 將軍塚도 가까이에 있는데, 찾아보지 않았다는 것은 의아스러운 일이다. 이는 조선조 유학자들의 古代史, 특히 고구려사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빈약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논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토지가 비옥하여 잡곡은 비료를 주지 않아도 무엇이나 잘 되기 때문에 한 사람이 농사를 지으면 열 사람이 먹어도 족할 정도라고 했다. 제일 귀한 것은 소금이었는데, 이 지역에 들어오는 소금은 義州 방면에서 수로를 이용하여 실어온다고 했다.
 
  通化縣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昌洙가 가장 안타깝게 느낀 것은 조선인 호통사들의 횡포였다. 호통사들은 중국어 몇 마디를 배워 가지고 중국사람들에게 붙어서 동포들에게 온갖 행패를 부렸다. 그들은 여자들의 정조를 유린하고 돈과 곡식을 강제로 빼앗는 등의 악행을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
 
  昌洙는 우연히 어느 중국인의 집에서 치마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땋은 한 처녀를 보았다.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까. 이 처녀의 부모가 사윗감을 찾고 있었는데 그것을 눈치챈 호통사가 중국인에게 지고 있는 빚 대신에 그 처녀를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 처녀의 부모를 위협하여 강제로 중국인에게 보낸 것이었다.
 
  이곳에 移住한 동포들은 대부분이 淸日전쟁 때에 환란을 피해 중국 땅으로 건너 간 사람들이었다. 그밖에 더러는 죄를 짓고 도망한 사람들, 민란을 일으켰던 주동자들, 공금을 횡령하고 도망쳐온 평안도와 함경도의 胥吏(서리)들도 있었다. 이들은 중국 사람들이 살지 않는 깊은 산속의 후미진 곳을 택해서 火田을 일구고 조와 강냉이 농사를 지으면서 곳곳에 두세 집씩 모여 오두막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인심은 아주 순후하여 이곳 말로 「앞대 나그네(고국인)」가 오면 무척 반가워했다. 동네에 들어가면 제각기 맞아들이고, 남녀노소가 모여들어 고국 이야기를 하라고 조르기도 하며, 이집 저집에서 다투어 음식을 대접했다.25)
 
  그런데 이때부터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백범일지」와 「노정약기」의 기록에 많은 차이가 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두 사람은 통화현 일대까지만 여행했다. 그러나 「노정약기」는 이때에 두 사람은 통화를 지나서 서쪽으로 西錦州(서금주)까지 간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서금주는 예부터 朝鮮에서 北京으로 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었다.
 
  「노정약기」는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금주에 이르자 어떤 淸國 軍隊가 진을 치고 웅장한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청국 군대를 보자 김형진은 「장부다운 기개」가 발동하여 昌洙를 돌아보고 말했다.
 
  『대장부가 이같은 萬軍의 진을 보고 어찌 무심히 지나칠 수 있겠소』
 
  그리하여 두 사람은 淸軍 진영을 찾아 갔다.
 
 
  「馬統領 馬大人」과 文書로 協約
 
 
  그러나 청군 대장은 이들을 쉽게 만나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일부러 청군에게 잡히기로 했다. 청국 군인들은 두 사람을 체포하고 심문했다. 그들은 두 사람을 첩자로 알고 죽인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당당하게 대장을 만나러 왔다는 뜻을 통역에게 전했다. 얼마 뒤에 朝鮮人을 묶어서 장막 안으로 끌고 오라는 지시가 내렸다. 두 사람 앞에 앉아 있는 인물은 대장 馬統領 馬大人이었다. 두 사람을 보자 馬大人은 호통을 쳤다.
 
  『너희들은 무슨 일로 감히 진중에 들어왔느냐?』
 
  두 사람은 태연히 응수했다.
 
  『우리는 義兵을 모아서 倭兵을 쫓아 싸웠으나 강폭한 왜적에게 패한 바가 되어 외로운 몸이 쉴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上國은 우리 부모의 나라인 까닭에 목숨을 걸고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馬大人은 두 사람의 말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鄭大人이라는 사람이 다시 큰 소리로 호통을 치며 두 사람을 굴복시키려고 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크게 분노하여 청국 군인들을 꾸짖었다.
 
  『우리가 너희 장수와 더불어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찌 이같은 소란을 피우느냐!』
 
  그리고는 웃으면서 馬大人을 보고 말했다.
 
  『우리는 일찍이 上國에는 人材가 매우 많다는 말을 귀가 아프게 들었는데, 오늘 대면해 보니까 용두사미시로구려』
 
  그제서야 馬大人은 황급히 손수 결박을 풀어 주면서 『참으로 내가 좋아할 인물이오. 내가 그대들의 심중을 알고자 잠시 시험한 것이오. 내가 이미 그대들의 뜻을 안 지 오래이오』 하고는 두 사람을 후대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西錦州 馬大人의 진중에 며칠 동안 머물면서 뒷날 서로 도울 것을 文書로 약속했다.26)
 
  얼마 뒤에 두 사람은 귀국길에 올랐다. 갈 때와는 달리 돌아올 때에는 鴨綠江을 건너서 평안도를 거쳐오는 가까운 코스를 택했다.
 
  그런데 청국군 진영을 찾아가서 그 대장을 만나고 뒷날 서로 도울 것을 文書로 약속했다는 이 중요한 사실에 대해 「백범일지」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것은 어쩌면 이때에 서금주까지 간 것은 김형진 혼자였고, 昌洙는 통화현 일대만 여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노정약기」의 이 대목의 서술은 과장된 느낌이 없지 않다. 그리고 이때에 만났다는 「馬統領 馬大人」이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설명이 없다.
 
  이무렵 中國 東北地方에는 독자적인 兵力을 가진 크고 작은 軍閥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淸日戰爭 때에 朝鮮에 出兵한 청국군도 대부분 이들 군벌들의 병력이었다. 淸日전쟁 때에 朝鮮에 출병한 장수 가운데 馬玉崑(마옥곤)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27) 이때에 두 사람이 만났다는 「馬統領 馬大人」이 바로 그 마옥곤이었는지 모른다.28)
 
  또한 두 사람이 출발할 때에는 北京을 목적지로 삼았으면서도 왜 여기에서 발길을 돌렸는지에 대해서 「백범일지」나 「노정약기」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馬大人」의 지원약속을 文書로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으로 淸國行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통화현에서 老人嶺을 넘어 雲山, 安州, 順安을 지나 平讓에 이르렀다. 귀국 길에 도처에서 목격한 일본군의 횡포와 승승장구하는 그들의 모습에 두 사람은 분노했다. 安州에서 淸川江을 건널 때에는 전봇대를 세우는 일본인들의 횡포가 보기 싫어서 다른 배를 타고 건넜다. 平壤에서는 일본인 수천명이 淸日戰爭 전승 1주년 기념축하연을 요란하게 벌이고 있었다. 이를 본 두 사람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서 그날 밤 平壤에서 묵지 않고 곧장 대동강을 건너서 淸溪洞으로 돌아왔다. 이때가 7월 그믐이었다.29)
 
 
 
 
  高能善의 孫女와 約婚
 
 
  昌洙는 청계동으로 오면서 사람들에게 高能善의 안부를 물었다. 사람들은 고능선의 맏아들 원명 부부가 콜레라 때문에 함께 죽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알려 주었다. 昌洙와 김형진이 청국을 다녀 오는 사이에 조선 북부 지방은 콜레라가 만연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다.
 
  1895년 5월에 義州 등 서북지역에서 시작된 콜레라는 전국적으로 4883명의 사망자(6월18일까지의 누계)를 낼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남겼다. 정부는 콜레라에 대한 검역, 소독, 예방의 규칙을 발표했으나 불결한 환경과 근대적 의료기구의 미비로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30)
 
  昌洙는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고능선의 집을 찾아 가서 조문했다. 고능선은 슬픈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침착하고 태연한 자세였다. 이러한 스승을 바라보는 昌洙는 가슴이 답답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직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고능선은 昌洙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곧 成禮를 하기로 하세』
 
  昌洙는 듣기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야 그는 고능선이 한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昌洙가 청국으로 떠난 사이에 淳永 내외와 고능선은 昌洙와 고능선의 맏손녀를 혼인시키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순영 내외는 약혼을 하게 된 경위를 번갈아 가면서 아들에게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순영이 班常의 다름을 들어 사양하자 고능선은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아비만큼 아들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나 내가 노형보다 아드님에 대해 좀더 알지 알겠소? 아드님이 못생겼다고 그다지 근심은 마시오. 내가 보건대 昌洙는 虎相(범상)입디다. 인중이 짧은 것이라든지 이마가 두툼한 것이라든지 걸음걸이라든지… 장차 두고 보시오. 범의 냄새도 풍기고 범의 소리도 질러서 세상을 놀라게 할지 알겠소?』
 
  昌洙는 고능선이 자신을 그처럼 아껴서 손녀 사위로 삼으려는 뜻을 헤아리고 책임감이 더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고, 한편으로는 그 호의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약혼녀의 성품이 뛰어난 점이나 상당한 가정교육을 받은 점을 생각하면 만족했다.
 
  그 뒤로 昌洙가 고능선의 집에 갈라치면 안채에서도 기정사실로 여기는 빛이 보였고, 예닐곱 살 된 둘째 손녀는 昌洙에게 아저씨라고 부르며 『안아 주오』 『업어 주오』하며 따랐다. 또한 약혼녀도 고능선의 밥상에 昌洙의 밥을 같이 차려 들고 昌洙가 앉아 있는 자리에도 들어왔다. 이런 모습을 볼 때에 昌洙는 무척 흐뭇했다. 昌洙가 도와서 원명 부부의 장례도 치렀다.31)
 
  청계동으로 돌아온 지 달포쯤 지나서 昌洙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1895년 8월20일 새벽에 日本人 부랑배들이 궁궐에 난입하여 閔妃를 무참히 시해하는 천인공노할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뒤이어 金弘集을 內閣總理大臣으로 하는 친일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른바 「乙未事變」이었다. 국모시해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인들의 만행에 대한 분노가 전국적으로 끓어 올랐고, 곳곳에서 「國讐報復(국수보복)」의 기치를 들고 의병이 봉기했다.32) 정국은 극심한 혼란상황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때에 金九의 거취에 대해 「백범일지」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 「노정약기」에 오히려 비교적 상세하게 적혀 있다. 민비시해에 따른 정국변화가 예상되어 昌洙와 김형진은 대책을 논의해 보았으나 뚜렷한 방안이 없었다. 그리하여 김형진이 昌洙에게 다시 청국에 가보자고 제의했고 昌洙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러나 여비 한 푼 없는 처지였으므로 당장 실행할 수는 없었다.
 
  이때에 昌洙의 사정을 전해 들은 재종조 金在喜(김재희)가 안악 사람 崔昌祚(최창조)에게 도움을 청했고, 최창조는 昌洙의 여행 목적에 동의하여 靑銅 100여 냥을 여비로 원조해 주었다고 한다.33) 그런데 昌洙와 김형진이 두 번째 청국행의 여비를 김재희와 최창조로부터 지원받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김재희와 최창조는 昌洙와 김형진이 두 번째 청국행에서 돌아와서 같이 참여하는 長淵(장연) 산포수 의병모의의 핵심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미 이 무렵부터 서로 행동을 같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倭賊戰忘功臣之碑」 보고 대성통곡
 
 
  昌洙는 여비를 지원받자 김형진과 함께 두 번째 청국행에 나섰다. 이때가 9월12일로서 첫 번째 청국행에서 돌아온 지 두 달이 채 안 된 때였다.34) 두 번째 청국행은 목표가 분명했다. 첫번째 청국행 때에 서면 약속을 받아 놓은 「馬大人」 진영을 찾아가서 擧兵問題를 구체적으로 의논하자는 것이었다.
 
  청계동을 출발한 昌洙와 김형진은 文化를 지나 安岳에 도착하여 최창조 집에서 며칠 머문 뒤에 龍岡과 江西를 지나서 平壤 감영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平壤성 내도 둘러보았다. 치열했던 淸日戰爭 때의 전투 흔적이 도처에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모란봉 箕子廟(기자묘) 앞에서 「倭賊戰忘功臣之碑(왜적전망공신지비)」를 발견하고 손으로 땅을 치며 대성통곡했다고 김형진은 적고 있다.35) 기자묘 일대는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이다.
 
  그런데 두 사람과 거의 같은 시기에 平壤을 여행했던 비숍(Isabella L. Bird Bishop)은 七星門 근처에서 전사한 奉天사단 최고사령관 左寶貴(좌보귀)의 비를 일본 사람들이 세워놓은 것을 보았다고 적고 있는데,36) 아마도 같은 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칠성문을 나서서 順安과 肅川을 지나 安州에 이르자 날이 저물었다. 두 사람은 가까운 마을로 들어가서 하룻밤 묵고 갈 숙소를 찾았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은 쌀쌀했다.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은 빈 집을 찾아들어 짚을 이불삼아 하룻밤 여독을 풀었다.37)
 
 
  「關東燕王」에게 上書 올려
 
 
  「노정약기」에 따르면 두 사람이 西錦州에 도착한 것은 9월21일이었다.38) 두 사람은 서금주에서 며칠을 묵은 다음 9월 말에 關東燕王(관동연왕) 依克唐阿(의극당아)가 있는 瀋陽(심양)으로 가서 연왕에게 청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다음과 같은 上書를 올렸다.
 
  〈… 朝鮮과 倭는 하늘을 같이할 수 없는 원수로 臣民된 도리로서 어찌 눈물을 뿌리고 통곡하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臣 등은 비록 미련하지만 憤激을 누르지 못하여 義氣를 모아 군사를 일으켜 작년 겨울부터 올 봄까지 왜적과 수십 차례 접전하여 왜놈 수천명을 죽이고 糧道(식량 나르는 길)를 끊었습니다. 그러나 병기가 부족하고 농사일 때문에 陳을 잠시 거두고 天兵(淸國軍을 가리킴)이 원조해 주기를 懇望(간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행히 왜적이 방심하고 추수 또한 다 끝나가므로 가히 병사들을 움직일만한 시기입니다. 兵法에 이르기를 예리한 곳을 피하고 소홀한 곳을 친다고 했는데, 왜와 각국의 要路(요로)인 조선에서 화의 근원을 끊고 곡식의 방출을 막는다면 이것은 진실로 목을 눌러 등을 다스리는 형국이니, 中國의 근심은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兵家의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저희는 산 넘고 바다 건너와 피눈물로 호소하오니, 天朝의 성덕으로 아래를 긍휼히 여기는 자애의 공을 밝히소서. 엎드려 바라옵건대 보잘 것 없는 것들을 굽어 살피시어 위무를 발양하시고, 역적들을 죄 주어 대의를 밝히소서. 天兵이 東으로 건너오고 義士가 西에서 맞이한다면 칼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석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군사를 일으켜서 하늘을 받들고 사람의 뜻을 좇아서 동쪽의 작은 나라를 경고하여 사해의 편안을 도모하시고, 만세토록 견고한 반석을 세우시고, 그 偉勳(위훈)이 海隅蒼生(해우창생)들에게 길이 전승되게 하소서.〉39)
 
  의극당아는 太平天國의 군대를 진압한 공을 세우고 黑龍江將軍(흑룡강장군)을 역임한 장군이었다. 그는 1884년에 渾春副都統(훈춘부도통)으로 있으면서 북간도의 韓人越墾民(한인월간민) 문제로 朝鮮政府(慶源府)에 조회를 보내기도 했고,40) 청일전쟁 때에는 平壤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으나, 이미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東北地方으로 돌아가서 九連城과 寬甸(관전) 등을 수비하다가 1895년 초부터는 遼陽(요양)에 부임하여 海城에서 일본군에 저항하고, 전후에는 복구사업에 노력했다.41) 「노정약기」는 李克康阿(이극강아)라고 적고 있으나, 이는 의극당아의 착오일 것이다. 다만 「관동연왕」이라는 호칭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상서를 보고 난 의극당아는 西錦州의 馬大人 등으로부터 이미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두 사람을 환대했다. 연왕 진중에 얼마 동안 머물고 있을 때에 갑자기 恢恢族(회회족)이 연왕군을 습격했다. 김형진은 이때에 자신이 鄒大人(추대인)과 함께 군사 3000명을 이끌고 나가 회회족을 대파하는 전과를 올리고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적고 있는데,42) 이 무렵에 恢恢族과 같은 小數民族이 중국 동북지방에 준동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兵力의 수나 그밖의 정황 등으로 보아 김형진의 서술을 그대로 믿기는 어려울 것같다.
 
  며칠 뒤에 김형진이 일본의 움직임을 탐지하기 위해 국내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연왕은 서금주 鎭東營(진동영)의 徐敬章(서경장) 앞으로 글을 써 주면서 서로 의논하라고 했다. 「노정약기」에 따르면 서경장은 심양, 雷陽(뇌양), 吉林(길림)의 三道都統令(삼도 도통령) 겸 興部道泰(흥부도태)로 있는 장수인데, 사람됨이 관대하고 대인의 풍모가 있어서 사람들의 공경을 받고, 이 때문에 황제가 그에게 「靑天」이라는 호를 내렸다.43)
 
  그는 寬甸知縣(관전 지현), 遼陽知州(요양 지주) 등을 역임하고, 청일전쟁 때에는 군대를 이끌고 일본군과 싸웠고 이재민 구휼에 힘쓰기도 했다. 1895년 1월에 일본군이 요양 남쪽으로 침략했을 때에는 두 달 동안 치열하게 항전했다.44) 두 사람이 찾아가서 청국 방문의 취지를 설명하자 서경장은 步軍都統令을 상징하는 金子令旗(금자령기) 한 쌍을 주면서 『우리 군대를 차후에 반드시 東國에 보내어 돕겠다』고 문서로 약속했다고 한다.45)
 
  그러면서 徐敬章은 두 사람에게 인신과 직첩을 써 주었다. 이때에 昌洙는 「義兵左統領」이라는 직첩을 받았는데,46) 그는 이 직첩을 귀국한 뒤에도 소중하게 지니고 다녔다.
 
 
  平壤에서 戰死한 徐玉生의 아들 만나
 
 
  그런데 「백범일지」에는 이와 관련된 언급이 없다. 뿐만 아니라 청국군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를 「노정약기」와는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두 사람은 通化縣을 여행하는 동안에 金利彦(김이언)이라는 碧潼(벽동)사람이 청국의 원조를 받아서 의병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힘과 용기가 남달리 뛰어나고 학식도 풍부하다고 했다. 일찍이 瀋陽刺史(심양 자사)가 그의 용력을 높이 사서 준마 한 필과 「三國志」 한 질을 주었고 청나라 고급 장교들로부터도 융숭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일단 김이언을 찾아 보기로 하고, 따로따로 다니기도 하고 함께 다니기도 하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三道溝(삼도구)가 그의 비밀 근거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계성의 서문인 仁風樓(인풍루)에서 80여 리를 더 가서 압록강을 건너면 중국 사람들이 皇城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서 10여 리쯤 되는 곳이 三道溝였다. 두 사람은 김이언의 사람됨이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서로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따로 가는 것이 유리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김형진은 유람객 행색으로 변장하고, 昌洙는 참빗장수 행색을 하고 나섰다.47)
 
  昌洙는 金利彦을 찾아가다가 압록강을 100여 리 가량 앞둔 곳에서 청국 무관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엉덩이에 관인이 찍힌 말을 타고 마라기(청국군 모자)를 쓰고 玉鷺(옥로)를 꽂고 紅絲(홍사)를 드리우고 있었다. 昌洙는 덮어놓고 앞으로 나가서 말머리를 잡았다. 그 무관은 곧 말에서 내렸다. 昌洙는 청국을 방문하는 취지서 한 장을 써서 품안에 간직하고 다니면서 청국 사람 가운데 문자 아는 사람을 만나면 그 취지서를 내보이곤 했었는데, 그 청국 무관에게도 그것을 보였다.
 
  그러자 그 무관은 취지서를 다 읽기도 전에 갑자기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昌洙는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라서 까닭을 물었다. 무관은 취지서 가운데에 〈痛彼倭敵與我 不共戴天之讐(통탄할 바 저 왜적은 나와 함께 같은 세상을 살 수 없는 원수이다)〉라는 구절을 가리키며 다시 昌洙를 붙들고 통곡했다. 昌洙는 황급히 필통을 꺼내어 필담을 시작했다. 먼저 무관이 물었다.
 
  『日本이 어찌하여 그대의 원수이오?』
 
  『일본은 壬辰年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국가의 원수일 뿐 아니라 지난 달에는 우리 國母를 불살라 죽였기 때문이오』
 
  다음에는 昌洙가 물었다.
 
  『당신이 초면에 이같이 통곡함은 무엇 때문이오?』
 
  『나는 지난 甲午年에 平壤싸움에서 전사한 徐玉生의 아들이오. 江界 觀察使에게 부친의 시체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로부터 전갈이 오기를 부친의 시체를 찾아놓았으니까 와서 운구해 가라 하였소. 그런데 가서 보니까 부친의 시체가 아니기에 이렇게 빈 손으로 되돌아오는 길이오』
 
  그는 자기 집이 錦州(금주)인데 부친은 집에 있던 병사 1500명 가운데에서 1000명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전멸했고, 현재 자기 집에는 남은 병사 500명이 있다고 했다. 「백범일지」에는 이때에 昌洙가 徐玉生의 아들에게 平壤 보통문 앞 들녘에서 일본 사람들이 세운 「徐玉生戰亡處(서옥생전망처)」라는 나무비를 보았다고 말해 주었다고 했는데, 昌洙가 보았다는 이 비는 어쩌면 「노정약기」에 적혀 있는 「왜적전망공신지비」나 비숍이 본 左寶貴의 비를 가리키는 것인지 모른다.
 
  徐玉生은 左寶貴 휘하의 장수로서 함께 平壤戰鬪에 참여했던 것은 조선쪽 자료에서도 확인된다.48) 서옥생의 아들은 또한 넉넉한 재산형편이며 자신의 나이며 가족사항 등에 대해서도 상세히 말해 주었다. 그는 昌洙의 나이가 자기보다 아래라고 하여 昌洙를 「弟弟(띠띠:아우)」라 부르면서, 자기더러는 「哥哥(꺼꺼:형)」라 부르라고 昌洙에게 써보였다.
 
  그리고는 昌洙가 짊어지고 있던 봇짐을 그의 말안장에 달아매고 昌洙를 함께 태우고는 복수하는 그날이 올 때까지 자기와 함께 지내자면서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昌洙는 미안한 마음에 자기는 걸어서 가겠다고 했으나 徐玉生의 아들은 걱정 말라면서 10리만 가면 官馬를 잡아탈 수 있다고 말했다.
 
  昌洙는 그와 함께 말을 타고 가면서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와의 인연은 장차 큰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당장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김형진에게 이 사실을 알릴 길도 없고, 더구나 아직 김이언 의병에 대한 내막조차 확인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무턱대고 금주로 가서 그의 집에 머물 수는 없었다. 昌洙는 말에서 내려서 그에게 말했다.
 
  『이봐요 꺼꺼, 내가 고국의 父母를 이별한 지 어느덧 1년이 지났지만 소식을 알지 못하고 있고, 또 王室에서 변을 당한 뒤에 나라 안의 정치 상황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모르고 있소. 내가 먼저 고국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승낙을 얻어 가지고 와서 떳떳이 꺼꺼와 함께 지내며 장래를 도모함이 어떻겠소?』
 
  昌洙는 무척 아쉬운 마음으로 그와 이별하고 다시 金利彦 의병부대를 찾아 발길을 돌렸다.49)
 
  「백범일지」의 자세한 서술로 보아 昌洙는 여행하는 동안에 있었던 중요한 일은 그때그때 적어두었던 것 같은데, 이때 만난 徐玉生의 아들에 대해서는 「이름은 잊었다」50)고 註記하고 있는 것은 이상하다.
 
 
  金利彦 부대의 주력은 산포수
 
 
  대엿새 뒤에 昌洙는 三道溝에 도착했다. 이집 저집 방문하여 참빗장수 행세를 하면서 金利彦의 동정과 그 부하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김이언은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성격인데다가 자신감이 지나쳐서 다른 사람의 계책을 받아들이는 도량이 부족하다고 했다. 또한 쉰 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瀋陽에 있는 500근짜리 화포를 앉은 자리에서 두 손으로 들어올렸다 내렸다 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昌洙는 김이언이 진정한 마음의 용기는 부족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김이언보다는 그의 동지로서 楚山(초산) 이방을 지냈다는 金奎鉉(김규현)이라는 사람이 오히려 의리도 있고 계책도 잘 세우는 것 같아 보였다고 「백범일지」에 적고 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김이언 의병부대의 주력은 산포수들이었다. 김이언은 평안도에서는 초산, 강계, 渭原(위원), 벽동 등지에서 산포수를 모집하고 압록강 건너 청국 지역에서는 이주민 포수를 모집하여, 그 수가 300명이나 되었다. 의병을 일으킨 대의명분은 「국모가 倭寇에게 피살된 것은 국민 전체의 치욕이므로 가만히 앉아서 참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격문은 글을 잘 하는 김규현으로 하여금 지어서 뿌리게 했다.
 
  김이언의 의병뿐 아니라 「乙未義兵」의 주된 전투력은 산포수들이었는데, 그들은 을미의병 뒤에도 의병부대의 주요 구성원이 되어 의병이 무장투쟁으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원래 지방의 산포군은 대원군 집권기에 丙寅洋擾(병인양요)와 같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 설치되었던 것인데, 1876년에 이르러서는 그 규모가 전국적으로 약 3만명에 이르렀다. 산포군은 그 지방의 전략적 가치나 읍의 크기에 따라서 규모에 차이가 있었다. 대체로 戰略的要衝地는 200명 이상, 大邑은 100명 이상, 中邑은 30∼50명, 小邑은 10∼20명을 기준으로 설치되었다. 그 뒤에 각 지방에 도적이 출몰할 때에도 도적의 규모가 크면 이들이 동원될 만큼 지방의 산포군은 강력한 治安兵力이 되기도 했다.51)
 
  산포수들이 의병에 참여하는 계기는 여러 가지였다. 이들은 지방 양반층의 지배력 유지를 위하여, 또는 전투에 대한 보수를 바라서 의병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52) 그보다 더 직접적으로는 甲午更張으로 地方軍隊가 폐지됨에 따라 해산된 산포군들이 의병부대로 몰려 드는 경우가 많았다.53)
 
  1895년 5월의 地方制度 改革에 따라 각 지방에 警察이 설치되면서 지방의 군대는 폐지되었는데, 이에 따른 失職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가는 당시 歸休兵(귀휴병)으로 삼을 예정인 現役兵이 1만여 명이었다는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54) 김이언이 산포수들을 300명이나 모집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상황에 힘입은 것이었다.
 
  昌洙와 김형진은 김이언의 의병에 참가했다. 昌洙는 압록강을 건너 강계성에 숨어들어 화약을 사서 등에 지고 나르기도 했고, 초산과 위원 지역으로 몰래 숨어 들어가서 산포수를 모집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당시에 강계성 같은 벽지에서 화약이 그토록 쉽게 매매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昌洙는 그러느라고 강 속에 빠져서 하마터면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위원에서 일을 마치고 삼도구로 돌아 오던 길에 얇은 얼음을 잘못 밟아서 그만 강 속에 빠지고 만 것이었다. 혼자서 있는 힘을 다하여 겨우 강 건너편에 도착했으나 온몸이 얼어붙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대로 가다가는 얼어 죽을 판이었는데, 그의 고함소리를 듣고 산골짜기에 살던 마을 사람이 달려와서 자기 집으로 데려가 몸을 녹여 주는 바람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55)
 
 
  얼어붙은 압록강 건너 江界城으로
 
 
  김이언 의병이 거사한 것은 1895년 11월 초였다. 추운 날씨로 압록강은 얼어붙어 있었다. 昌洙가 김이언에게 강계성을 공략할 계책을 묻자 그는 이미 江界 兵營에 있는 장교들이 내응하기로 되어 있으므로 성에 들어가는 것은 문제 없다고 했다. 그는 장교들이 내응하기로 한 것은 자기에 대한 淸國 軍隊의 지원 약속을 믿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昌洙가 다시 淸軍이 이번 전투에 참가하느냐고 묻자 그는 의병이 일단 강계를 점령하면 원군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모집한 포수들의 복장문제가 나와서 昌洙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포수 가운데에 청국 말을 잘 하는 사람이 많으니, 그중에서 몇십 명에게 청국 장교의 옷을 입혀 청국 장교나 대장으로 꾸밉시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조선옷을 입혀 뒤에 따르게 합시다. 선두는 심양 자사로부터 하사받은 말을 타게 하고, 청국 장교로 꾸민 군인에게는 긴 칼을 채워서 선두에 입성케 함이 좋은 계책일까 합니다.
 
  이유는 강계성 장교들이 내응한다는 것을 그대로 믿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은 단지 청국 군대가 들어오면 그것을 보고 내응하겠다는 것이지, 의리상 내응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에게서 청국 군대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면 정세는 세부득이하여 반대방향으로 가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병서를 읽고 또 동학농민전쟁 때에 해주성 전투를 경험한 昌洙의 지략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이언은 昌洙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이언은 먼저 국경지대에 있는 高山鎭(고산진)을 쳐서 무기를 탈취한 다음 그 무기를 가지고 강계성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昌洙는 이 계획 역시 불가한 일임을 역설했다.
 
  『지금 우리에게 300여 명의 포수가 있으니까 이 병력만 가지고 질풍뇌우의 형세로 힘차게 돌진해 들어가면 충분히 성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 선발대의 수효가 비록 적기는 해도 저쪽에서는 우리 뒤에 얼마나 많은 병력이 있는지 모를 것이므로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56)
 
  김규현과 白進士라는 경성 사람 등은 昌洙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러나 성격이 독단적인 김이언은 이 의견에도 반대했다. 첫째는 우리가 당당하게 국모를 죽인 원수를 갚기로 한 이상 당연히 백의군인으로 입성하는 것이 옳지 청군 복장과 청군 장교로 가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군인은 있으나 무기가 부족하므로 먼저 고산진을 쳐서 무기를 탈취해 가지고 다음날에 강계성을 점령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었다.
 
  昌洙와 김형진은 김이언의 주장에 끝까지 반대했으나 김이언은 듣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김이언과 결별하지는 않고 일단 전투에 참가하기로 했다. 昌洙와 김형진이 김이언의 인품을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고, 전략에 반대하면서도 김이언 의병부대의 江界城 공략에 참여한 것은 國母시해의 원수를 갚는다는 열정이 더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먼저 밤중에 고산진을 기습하여 무기를 쉽게 탈취할 수 있었다. 탈취한 무기는 빈손으로 따라오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튿날 한밤중에 全軍이 얼음 위를 걸어 강계성으로 진군했다. 선두가 인풍루 밖 10리 가량 되는 곳에 도착했을 때에 강 남쪽 기슭의 솔밭에서 화승총 불빛이 반짝거렸다. 그들은 약속대로 김이언 부대를 마중 나온 강계대 소속 장교들이었다. 그들은 김이언에게 와서 물었다.
 
  『이번에 오는 군대 중에 淸軍이 있소?』
 
  역시 그들의 관심은 청군의 지원이었다. 그러나 김이언은 순진하게 대답했다.
 
  『우선 강계를 점령하고 통지하면 곧 청군이 올 것이오』
 
  그러자 그 장교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자마자 솔밭에서 포성이 터지고, 탄환이 빗발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좌우의 산골짜기 사이의 험준한 빙판 위에서 1000여 명의 사람과 말떼가 큰 혼잡을 빚으며 물밀듯이 밀려 나가고 들어왔다. 어느새 총알에 맞아 죽는 사람, 다쳐서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골짜기에 가득찼다.
 
  昌洙는 김형진과 몇 걸음 후퇴하면서 상의했다.
 
  『김이언의 이번 실패는 치명적인 것이어서 다시 사람들을 모으지 못할 거요. 그러므로 저들과 같이 퇴각할 아무 필요가 없소. 이렇게 낯선 행색으로는 잡히기 쉬울 테니까 잠시 강계성 부근에 몸을 피했다가 고향으로 돌아갑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김이언 부대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그 뒤에 김이언은 진위대장 金東兢(김동긍)을 처단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이내 체포되었다가 옥중에서 자결했다.57)
 
  昌洙와 김형진은 산 언저리로 올라가서 강계성 가까이에 있는 마을로 들어가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 강계를 출발하여 狄踰嶺(적유령)을 넘어 며칠 뒤에 신천 청계동에 도착했다.58)
 
 
 
 
  義兵 반대하는 安泰勳과 絶交
 
 
  두 사람의 귀향시점은 「백범일지」와 「노정약기」에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백범일지」는 김이언 의병의 실패 직후인 11월 무렵으로, 「노정약기」는 진동영에서 연말을 보내고 1896년 정월 4일(양력 2월 16일)에 귀향했다고 적고 있다.59) 그러나 관련 자료를 종합해 보면 두 사람의 귀향 시점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단발령이 내린 1895년 11월15일 이전이었던 것 같다.
 
  뒤에서 보듯이, 長淵 산포수들의 봉기모의 신문조서인 「重犯供招(중범공초)」에 따르면 이들의 거사예정일이 1896년 1월 3일(양력 2월15일)이었고 이를 위해서 모인 것이 12월12일(양력 1896년 1월25일)이었는데, 金亨鎭은 모의 단계인 12월 시점에 해주 墨坊(묵방)의 靑龍寺에 은거하고 있었다.60)
 
  청계동에 돌아온 昌洙는 먼저 高能善을 찾아가서 청국행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히 보고했다.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편의 토지의 비옥함과 그곳의 지세며 인심이며 서옥생의 아들을 만난 일 등을 자세히 보고했다. 그리고 김이언 의병에 참가했던 일도 말했다. 고능선은 이때에 昌洙에게서 들은 것을 적어 두었다가 뒷날 柳麟錫이 황해도를 방문했을 때에 그대로 알려주어 그로 하여금 의병부대를 이끌고 通化縣 五道溝에 정착하게 했다.61) 이때에는 高能善도 유인석과 동행한다.
 
  昌洙가 청계동으로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아서 斷髮令이 선포되었다. 단발령의 충격은 컸다. 전국적으로 단발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지방 어디에서나 단발하는 관리를 습격하는 크고 작은 저항이 잇따랐고, 조직적이고 강력한 무력항쟁도 도처에서 전개되었다. 그것이 이른바 「乙未義兵」이다.62)
 
  을미의병의 발단은 물론 閔妃弑害事件이었다. 그러나 의병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단발령이 공포된 뒤였다. 위정척사파 유생들은 당시 일본의 내정간섭과 개화파의 개혁정책을 유교적 지배체제의 해체라고 인식하고,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復讐保形(복수보형)」의 명분 아래 「賊臣(적신)」을 토벌할 것을 도모했다.
 
  고능선과 昌洙도 단발령에 반대하는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두 사람은 安泰勳과 상의하기로 했다. 안태훈은 동학농민군 토벌에 동원했던 산포수부대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안태훈을 찾아갔다. 그러나 안태훈은 아무 승산 없이 일어났다가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럴 생각이 없고, 天主敎를 믿다가 뒷날 기회를 보겠다면서 두 사람의 제의를 거절했다.
 
  이해 9월에 이미 산포수부대를 해산시킨63) 안태훈은 천주교에 귀의할 뜻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서양문화의 수용에 뜻을 가진 그로서는 봉건적인 명분의 義兵 봉기에 찬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단발에 대해서도 고능선과 다르게 생각했다.
 
  안태훈은 『지금 당장 머리를 깎아야 한다면 깎기라도 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은 고능선에게 모독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안태훈의 도움으로 청계동에 와서 생활하고 있는 처지이기는 했으나 안태훈의 이러한 태도를 보자 고능선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절교를 선언했다.
 
  『진사, 오늘부터 끊네!』
 
  그러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한 마디로 두 사람의 그동안의 교분은 간단하게 끝나버렸다.64)
 
  昌洙 역시 안태훈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東學은 토벌하고 서양 오랑캐가 하는 西學은 배워야 한다는 말이 매우 괴이하게 생각되었다. 昌洙는 단발에 순순히 응하겠다는 안태훈의 태도를 보고 「그에게 의리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하고 생각했다.65)
 
  이무렵 안태훈은 동학농민전쟁 때에 농민군에게서 빼앗은 양곡문제로 매우 난처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度支部(탁지부)대신 魚允中과 전 宣惠廳(선혜청) 당상 閔泳駿(민영준)은 안태훈이 군량미로 사용해 버린 양곡이 자신들이 사 두었던 것이라면서 상환할 것을 요구했다. 안태훈이 이를 거절하자 어윤중은 안태훈이 빼앗은 양곡으로 군대를 길러서 역모를 꾀하려 한다고 고발했다. 이 때문에 안태훈은 서울에 불려 올라가서 몇 차례 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俄館播遷(아관파천)으로 어윤중이 살해되면서 사건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나 외척인 민영준이 또다시 안태훈을 협박했다.
 
  다급해진 안태훈은 천주교당으로 피신하여 몇 달 동안 그곳에 숨어 있었다. 이때에 그는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金宗漢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안태훈은 청계동으로 돌아오면서 많은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왔고, 안씨 일가족은 세례를 받고 천주교인이 되었다.66)
 
  고능선과 昌洙는 상의하여 속히 혼인을 한 뒤에 청계동을 떠나기로 했다. 淳永 내외는 고능선과 같은 훌륭한 가문 출신의 며느리를 맞는 것이 무엇보다도 기뻐서 온 정성으로 혼수와 혼구를 준비하기에 분주했다.
 
 
  淸兵과 산포수 무장력 결합 구상
 
 
  이 무렵에 황해도에서도 여러 지방에서 의병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의병은 거의가 위정척사파 유림과는 관계없는 구 이서층과 산포수들이 결합한 것이었다. 그리고 산포수들 가운데에는 농민전쟁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동학 출신들이 많았다.
 
  안태훈의 협조를 기대할 수 없게 된 昌洙는 새로운 거사방안을 모색했다. 金亨鎭과 함께 徐敬章에게서 약속받은 청국 군대의 출병지원과 황해도 산포수 부대의 무장력을 결합하는 방안을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장연 산포수들의 봉기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거기에 가담한 산포수들의 동기도 昌洙와 김형진의 경우와는 다른 것이었다. 昌洙와 김형진은 단발반대의 대의명분으로 봉기 모임에 참여했으나, 산포수들은 정부의 정책실패에 대한 불만으로 봉기에 가담한 것이었다.
 
  장연 산포수 봉기의 핵심 인물인 金在喜(김재희)와 白樂喜(백낙희)는 昌洙가 청국에서 돌아오기 이전인 11월 무렵에 만나서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에 김재희는 산포 都班首(도반수), 백낙희는 산포 明査班首(명사반수)가 되었다.
 
  사전 논의를 마친 두 사람은 12월12일에 昌洙의 집을 방문하여 그와 함께 청룡사에 머물고 있는 김형진을 찾아갔다. 이 모임에서 김형진은 두 차례 淸國을 방문하여 馬大人과 依克唐阿로부터 鎭東倡義(진동창의)의 인신과 직첩을 받아가지고 온 사실을 설명하고, 馬大人이 머지않아 군대를 거느리고 올 것이라면서 속히 봉기할 것을 촉구했다. 이때에 김형진은 스스로 평안, 전라, 황해 3도 道統官이 되고, 백낙희는 장연 선봉장이 되어 장연 산포수들을 주력으로 삼아 봉기하기로 결정했다.67)
 
  장연 산포수들의 봉기 계획은 크게 3단계로 설정되었다. 1단계는 장연과 안악의 산포수들을 동원하여 장연 관아를 점령하고 무기를 확보하는 단계였다. 그것이 성공한 뒤에는 2단계로 해주로 진격하여 김형진과 昌洙의 지휘 아래 장연과 안악의 산포수들을 주력으로 하고 그밖의 다른 세력과 함께 해주성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3단계로는 약속대로 진격해 오는 청국 군대와 함께 서울로 진격하여 洋倭(양왜)를 토멸하고 각 대신을 誅滅(주멸)한 다음 海島의 鄭氏를 맞이하여 왕으로 추대하는 것이었다.68)
 
  장연 산포수 모의는 당시 민중 사이에 널리 유포되고 있던 「海島眞人說」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예언서인 「鄭鑑錄(정감록)」이나 「道詵秘記(도선비기)」에 바탕을 둔 「해도진인설」은, 책에 따라서 다소 차이는 있으나, 나라가 혼란해져서 삼국으로 분열되면 정씨가 남해의 섬으로부터 군사를 일으켜서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통일왕조를 세운다는 것이었다. 1748년에 일어난 淸州와 文義의 掛書事件(괘서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眞人出現說」은 1812년의 洪景來亂에서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여 그 뒤의 크고 작은 여러 반란 사건에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69)
 
  그러나 이 봉기계획은 어이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1차 거사날인 정월 초하루에 新花坊(신화방)에서 봉기 인원을 동원하던 백낙희 등 주동자 다섯 사람이 안악의 김재희 세력이 합류하기 전에 동네 주민들에게 체포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들을 구출하려고 각 군의 산포수 부대가 집결한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이때에 京軍이 파견되어 산포수 봉기는 실패하고 말았다. 백낙희 등이 체포되자 昌洙와 김형진을 비롯하여 안악 大德坊(대덕방)의 최창조, 김재희, 해주 檢丹坊(검단방)의 柳學先, 문화 차장동의 李씨 등 여섯 명은 바로 피신했다.70)
 
  그런데 昌洙가 장연 산포수봉기 모의에 참여하면서 고능선과 협의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단발령 소식을 듣자 고능선과 昌洙는 바로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고 함께 안태훈을 찾아가 상의했던 것으로 미루어, 비록 동학농민전쟁에 참가했던 산포수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모집하기로 했더라도 昌洙가 고능선과 상의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民衆의 호응 없어 蜂起 실패
 
 
  장연 산포수봉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開化政權을 타도하기 위해서 淸軍과의 연대를 도모했다는 사실이다. 황해도 지방 농민군의 청국군과의 연대 의식은 이미 동학농민전쟁 때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가령 농민전쟁 당시에 海安 수접주가 平山 수접주에게 보낸 經筒(경통)에는 농민군이 빨리 봉기하여 감사 부자의 머리를 베어 청군 진영에 바치자고 한 대목이 있는데, 이때에 이들은 청군을 「天兵」으로 호칭하고 있다.71) 또한 1895년 7월에 봉기한 평안남도 祥原(상원)의병도 청국 군대를 「天軍」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같은 시기의 安東義兵이나 乙未義兵 이후의 의병운동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또한 장연 산포수봉기는 「복수보형」이라는 위정척사파 義兵의 대의명분과 동학농민군 조직이 결합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민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우선 장연 산포수봉기가 같은 마을의 주민에 의해 고발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 준다. 체포과정에서 백낙희는 동네사람들에게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았다.72)
 
  이 무렵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은 청일전쟁의 피해로 말미암아 청국에 대한 인식이 매우 악화되어 있었다. 청일전쟁에 참여한 청군이 패퇴하면서 온갖 노략질을 자행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연 산포수봉기 모의에 대해서 「백범일지」에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은 이상하다. 관련 자료들로 미루어 볼 때에 昌洙가 봉기 모의에 참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선 중요한 것은 昌洙 자신이 얼마 뒤에 치하포 사건으로 체포되었을 때에 해주감영에서 한 진술이다.
 
  〈…일찍이 단발로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할 때에 저는 義兵左旗總이 되어 전라도 김형진과 함께 해주 검단방 청룡사에 머물다가 음력 12월에 안악지방에 가서 이곳 대덕방에 사는 좌통령 최창조와 서로 논의하며 며칠을 머물다가 돌아왔습니다. 또한 치하포 사건에 이르러서는 과시 전연 아는 바가 없으니 잘 살펴서 처리해 주옵소서.〉73)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昌洙가 해주감영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치하포 사건을 부인한 것은 中央官衙(內部)에 가서 대관들 앞에서 자신의 큰 뜻을 말하기 위해서였다.74) 그런데 어떤 까닭에서인지 산포수봉기의 핵심이었던 김형진 역시 「노정약기」에서 이 때의 모의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산포수 봉기 모의에 참여했던 것은 「노정약기」에 첨부된 장연 산포수봉기의 격문으로도 알 수 있다.75)
 
  두 사람은 똑같이 산포수봉기 모의사실을 의도적으로 기술하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백범일지」에서 자신의 여러 가지 실패의 행적까지 비교적 솔직히 술회하고 있는 金九가 이때의 일만은 왜 빠뜨렸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다른 의병운동이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王權을 守護한다는 명분을 전제로 한 것인 데 비하여 장연 산포수봉기 모의는 易性革命(역성혁명)을 기도한 일종의 역모였고, 그러면서도 또 너무나 황당한 모의였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高能善 孫女와의 約婚도 깨어져
 
 
  청군의 지원을 얻어 서울로 진격하여 일본의 마수에 놀아나는 李氏王朝를 뒤엎고 「海島의 鄭氏」를 새로이 왕으로 옹립한다는 대담한, 그러나 너무나도 황당한 꿈을 가지고 계획했던 산포수봉기 계획은 어처구니없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것은 스무한 살의 청년 金昌洙에게 또 한번의 큰 좌절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가슴 아픈 것은 때를 같이하여 고능선의 손녀와의 약혼이 깨어져 버린 일이었을 것이다.
 
  산포수봉기를 준비하느라고 돌아다니던 어느 날 昌洙는 검단방에 있는 친구집에서 자게 되었다. 검단방은 昌洙의 집이 있는 白雲坊과 바로 이웃해 있으며 산포수봉기 모의에 가담한 유학선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근처 청룡사에 김형진이 머물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이 뜻밖에도 高能善이 昌洙를 찾아왔다. 고능선은 어렵게 입을 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네가 어렸을 때에 뉘 집에 約婚을 했다가 자네가 원치 않아서 퇴혼했다고 했던 것이 지금에 와서 문제가 되네 그려. 내가 어제 사랑에 앉았노라니까 성이 김가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왔었다네. 나를 보고 당신이 고 아무개냐고 묻기로 그러하다 했더니 내 앞에다가 칼을 내어놓고 하는 말이 「들으니 당신 손녀를 昌洙에게 허혼했다 하니 첩으로 주는 것이오, 정실이오?」 하고 물었네. 하도 괴상하여 김가를 나무라며 「초면에 그게 무슨 무례한 말이냐?」 했더니, 김가가 노기 등등하여 하는 말이 「昌洙의 정처는 곧 내 딸인데, 이제 들으니 당신 손녀와 혼인을 한다 하기로 첩이라면 가하나, 정실이라면 이 칼로 생사를 가름하겠다」 하지 않겠나?
 
  나는 「昌洙가 종전에 약혼한 곳이 있었으나 이미 파혼된 줄 알고 허혼을 하였소. 그러나 이제 그대의 말을 듣건대 엄연히 약혼 중이라 하니 이 문제는 내가 昌洙를 보고 해결할 터이니 그대는 물러가오」 하여 돌려보냈네. 이 일을 어찌하겠나? 우리 집안 여자들은 큰 난리가 났네』
 
  이 말을 듣는 순간 昌洙는 모든 일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단념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제가 선생님을 믿고 따르는 본래 의도는 선생님의 손자사위나 됨에 있지 않습니다. 저는 정녕코 선생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시는 敎訓을 마음속에 아로새기고 죽을 때까지 그 거룩하신 가르침을 봉행하기로 마음에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니 혼인을 하든 안 하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혼사는 서로 단념하고 의리로만 선생님을 받들겠습니다』
 
  혼인을 단념했으나 마음속으로는 여간 섭섭하지 않았다. 고능선은 昌洙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내가 장래에 몸과 마음을 의탁할 만한 사람을 물색하기에 허다히 마음을 써서 자네를 만났고, 더욱이 미혼이므로 혼사까지 성약한 것인데, 이런 괴변이 어디 있겠나! 그러면 혼사는 다시는 거론하지 않기로 하세』
 
  이렇게 하여 스승의 손녀딸과의 약혼은 깨어졌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昌洙가 어렸을 때에 아버지가 술김에 경솔하게 한 청혼이 화근이었음은 앞에서 본 대로이다.
 
  昌洙가 동학 접주로 바쁘게 활동하고 있을 무렵 순영 내외가 金致景(김치경)의 딸과의 혼례를 서둘자 昌洙는 완강하게 거부했고, 淳永도 김치경에게 그뜻을 전하면서 딸을 다른 자리에 출가시키라고 했었다. 그러자 김치경도 도리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昌洙는 이 문제가 일단락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문제는 김치경이 청계동에서 10여 리밖에 안 떨어진 신천 水踰嶺(수유령)으로 이사하여 술장사를 하고 있다가 昌洙의 혼인소식을 들으면서 불거졌다. 김치경은 속으로 이 혼인을 방해하면 돈푼이나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훼방을 놓은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고능선도 짐작했을 터인데도, 昌洙를 손자사위로 삼으려고 마음먹은 것을 눈물까지 흘리면서 쉽게 단념하는 것도 이상하다. 화가 치민 淳永이 김치경의 집에 쫓아가서 거친 분풀이를 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김치경은 그때 이미 자기 딸을 가까운 마을에 돈을 받고 혼약해 놓은 상태였다.
 
  아무튼 이 일이 있고 난 뒤에 고능선은 비동으로, 순영 내외는 텃골로 이사했고, 昌洙는 서옥생의 아들을 찾아 다시 청국으로 가기로 했다. 그것은 昌洙의 세 번째 청국행이었다. 김형진은 고향으로 돌아갔다.76)●


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7)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1) 國母報讐 위해 變服한 日人 죽여
 
 
  徐玉生집 찾아 나섰다가 발길 돌려
 
 
  급히 피신하여 청국의 徐玉生 집을 찾아 나선 金昌洙는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은 斷髮令 소동으로 어수선했다. 관찰사 이하 모든 관리들이 단발을 하고 길목을 지키고 서서 지나가는 백성들을 붙들고 강제로 머리를 깎고 있었다. 단발령을 피하여 시골이나 산골로 숨어 들어가는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昌洙는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평양을 지나 安州에 도착해서 게시판에 붙어 있는 포고문을 보고서야 단발령이 철회되었음을 알았다. 「백범일지」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소문을 들으니까 경성 종로에서 사람들에게 단발을 시켰다가 대소동이 일어났다고 했다. 일본인들의 가옥을 때려부수고 일본인을 다수 때려죽이는 등 변란이 나고, 당시 政府 當局者들에게도 큰 변동이 일어났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장차 나라 안 사정이 많이 변할 낌새라 굳이 출국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삼남 방면에서 의병이 봉기한다고도 하니까 다시 돌아가서 시세를 관찰하리라 결심하고 회정했다.〉1)
 
  「정부 당국자들의 큰 변동」이란 1896년 2월11일의 高宗의 俄館播遷(아관파천)과 뒤이은 친일파 내각의 와해를 말한다. 아관파천은 단발령으로 술렁거리던 정국을 또 한번 역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高宗은 金弘集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 각료들을 모두 처형하라는 조칙을 발표하고, 이어서 李完用, 李範晉, 朴定陽, 李允用 등 貞洞派를 주축으로 한 내각을 임명했다. 아관파천은 청일전쟁 뒤에 조선의 내정에 깊이 개입해 온 일본에 큰 타격을 주었다.
 
  아관파천 직후에 高宗은 민심 수습을 위한 조칙을 연이어 발표했다. 2월18일에〈단발의 건은 從便(종편)을 허한다〉고 하여 사실상 단발령을 철회하고, 義兵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본업에 힘쓰라고 宣諭(선유)했다. 다시 27일에는 각지의 의병들에게 즉시 해산할 것을 종용하는 조칙을 발표했는데,2) 그것은 단발령에 반대하여 일어났던 反日(반일)의병에 대한 사면을 뜻하는 것이었다.
 
  단발령을 강행하면서 일본인의 피해가 속출하고, 아관파천이 있던 2월11일에는 서울 종로에서 다나카 히데카즈(田中秀一)라는 일본인이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대신 鄭秉夏(정병하)의 처단현장을 구경하다가 살해된 사건이 있었는데,3) 「백범일지」의 위와 같은 서술은 이러한 사실이 口傳(구전)을 통해서 안주와 같은 지방에까지 빠르게 전해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昌洙는 청국행을 단념하고 안주에서 발길을 돌렸다. 3월8일(음력 1월25일)4)에 龍岡郡(용강군)에서 安岳郡(안악군)으로 돌아오기 위해 河浦(치하포)로 가는 배를 탔다. 치하포는 안악에서 동북쪽으로 사십 리쯤 떨어진 작은 포구였다. 강 위에는 녹지 않은 큰 얼음덩이가 곳곳에 떠다니고 있었다. 해마다 해빙기가 되면 사람들이 가끔 나루터에서 큰 얼음덩이에 포위되어 참사를 겪는 일이 있었는데, 불행히도 이날은 昌洙가 탄 배가 얼음덩이에 포위되고 말았다.
 
  배는 얼음덩이에 떠밀려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고 鎭南浦(진남포) 하류까지 밀렸다가 조수를 따라 다시 상류로 밀리곤 하면서 오르락 내리락 했다. 배가 떠밀릴 때마다 선객들은 말할 나위도 없고 뱃사공들까지 모두 당황해 했다. 배 안은 삽시간에 울음바다가 되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찾았고, 또 어떤 사람은 어머니를 부르며 울었다.
 
  昌洙는 살아 나갈 방도를 생각해 보았다. 배 안에는 준비된 식량이 없었기 때문에 얼어 죽는 것보다 먼저 굶어 죽을 판이었다. 다행히 나귀 한 필이 있었다. 얼음덩이의 포위가 오랫동안 계속될 경우에 나귀를 잡아서 열대여섯 사람의 비상식량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昌洙는 사람들에게 무작정 소리내어 운다고 목숨을 구할 길이 열리는 것이 아니니 뱃일을 사공에게만 맡기지 말고 모두 힘을 합해서 얼음덩이를 밀어내자고 말했다. 선객들이 일제히 호응하고 나섰다. 昌洙는 몸을 날려 얼음덩이에 뛰어 올랐다. 그리고는 얼음덩이가 모여 있는 형세를 살펴보고 큰 얼음덩이에 의지해서 작은 것을 힘껏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노력한 끝에 밤이 늦어서야 간신히 강 하류에 닿았다.
 
  배가 하류로 많이 떠밀려 왔기 때문에 치하포에는 닿지 못하고 오리 밖의 강기슭에 닿았다. 서산에 지는 달이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일행은 치하포에 도착해서 주막을 겸하고 있는 나루터 주인 집으로 들어갔다. 풍랑 때문에 유숙하는 손님들이 세 칸 여관방에 가득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으므로 방마다 코고는 소리만 들렸다. 배 안에서 함께 고생했던 일행들도 세 칸 방으로 각자 흩어져 들어가 잠을 잤다.
 
  그런데 昌洙가 막 잠이 들자마자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먼저 들어온 여행객들이 새벽부터 일어나 길 떠날 채비를 하면서 한바탕 수선을 떨었다. 이때의 시간은 새벽 세시경이었다.5) 유명한 金九의 치하포 무용담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치하포사건은 金九의 다른 어떤 행적보다도 「백범일지」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만큼 이 사건은 金九의 일생을 통한 抗日鬪爭에서 勳章과 같은 상징성을 지닌 사건이었다.
 
 
  『저놈 한 명을 죽여서라도…』
 
 
  긴박했던 당시의 상황묘사를 「백범일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조금 있다가 아랫방에서부터 아침식사가 시작되어 가운뎃방과 윗방까지 밥상이 들어왔다. 그때에 가운뎃방에 단발을 하고 조선옷을 입은 사람 한 명이 같이 앉은 나그네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성은 鄭氏라 하고 長淵에 산다고 하는데, 말투는 장연말이 아니고 서울말이었다. 그 무렵 황해도에서는 장연이 단발을 맨 먼저 했으므로 평민들도 단발한 사람이 더러 있었다. 시골 노인들은 그를 진짜 조선인으로 알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왜놈이었다. 자세히 살펴 보니까 흰 두루마기 밑으로 칼집이 보였다. 가는 길을 묻자 진남포로 간다고 했다.〉
 
  먼저 昌洙는 이 일본인의 변복에 주목했다. 그리고 문득 國母報讐(국모보수)를 위해 그를 처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진남포 맞은편 기슭이므로 매일매일 여러 명의 왜인이 자기들의 본래 행색대로 통행하는 곳이다. 그러니 저놈이 보통 장사치나 기술자 같으면 굳이 우리 조선사람으로 위장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저자가 우리 국모를 시해한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아닐까? 서울에서 일어난 분란 때문에 도망하여 당분간 숨으려는 것은 아닌가? 만일 미우라가 아니더라도 미우라의 공범일 것 같다. 여하튼 칼을 차고 숨어 다니는 왜인이 우리 국가와 민족의 독버섯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내가 저놈 한 명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치욕을 씻어 보리라.〉
 
  「백범일지」는 계속해서 당시의 상황과 金九 자신의 심리상태를 다음과 같이 실감나게 적고 있다.
 
  〈먼저 주위 환경과 나의 역량을 살펴보았다. 방 세 칸에 가득찬 손님의 수가 40여 명 되어 보였고, 그놈의 패거리가 몇 명 정도 섞여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이 열 일여덟 살 되어 보이는 총각이 그놈 옆에서 무슨 말인가 하고 있었다.
 
  나는 혼잣 몸에 빈 손이 아닌가? 섣불리 손을 썼다가 내 목숨만 저놈의 칼 아래 끊어 보내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되면 내 의지와 목적은 세상에 드러내지도 못하고, 도리어 도적놈의 시체 하나만 남기고 죽고 말 것이다. 또 내가 빈 손으로 단번에 저놈을 죽일 수는 없다. 만약 죽을 결심을 하고 대들더라도 방안에 있는 사람들이 만류하면 그 틈을 타서 저놈의 칼이 내 몸에 들어오고 말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6)
 
  이렇게 생각하자 昌洙는 가슴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그런데 이 절박한 순간에 마음의 불안을 진정시켜 준 것은 高能善의 가르침이었다. 정신적 혼란에 빠져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홀연히 한 가닥 광선이 가슴속에 비치는 듯했다고 「백범일지」는 적고 있다.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得樹攀枝無足奇)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懸崖撒手丈夫兒)>
 
  昌洙는 스스로 자문자답해 보았다.
 
  『네가 보기에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느냐?』
 
  『그렇다』
 
  『너는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 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느냐?』
 
  『그렇다. 그러나 지금 나는 성공하지 못할 경우를 먼저 걱정하고 있다』
 
  또 한편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다.
 
  『원수 왜놈을 죽이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내가 죽임을 당하면, 한낱 도적의 시체로 세상에 남겨질까 그것을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 소망이었던가?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이 아닌가?』
 
  자문자답 끝에 비로소 昌洙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죽을 각오로 실행할 것을 결심했다. 그제서야 마음의 동요가 사라지고 여러 가지 계책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 접근 못 하게 壯士행세
 
 
  우선 昌洙는 방 안에 있는 40여 명의 손님들과 동네사람 수백 명을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인이 만약 조금이라도 불안한 상태를 느끼게 되면 그것에 대비할 것이기 때문에 일단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하도록 안심을 시키고 자기 혼자서만 자유자재로 연극을 하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연극이란 壯士(장사)의 행세를 하는 것이었다. 실은 이때에 昌洙는, 뒤에서 보듯이, 평양에서부터 동행한 세 사람과 같이 있었다.7)
 
  이윽고 아랫방에 밥상이 도착하여 먼저 밥상을 받은 사람이 숟가락질을 시작했다. 그들이 3분의 1도 채 못 먹고 있을 무렵에 밥상을 받은 昌洙는 네댓 숟갈로 한 그릇 밥을 다 먹어치웠다. 昌洙가 일어서서 주인을 부르자 골격이 준수하고 나이가 서른 일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 문 앞에 와서 물었다.
 
  『어느 손님이 불렀소?』
 
  창수는 주인을 보고 말했다.
 
  『내가 좀 청했소이다. 다름 아니라 내가 오늘 700여 리나 되는 산길을 걸어서 넘어가야 하는데, 아침을 더 먹고 가야겠으니 밥 일곱 상만 더 차려다 주시오』
 
  주인은 아무 대답 없이 창수를 뻔히 보기만 하다가 창수의 말에는 대답도 않고 방 안에서 아직 밥을 먹고 있는 다른 손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젊은 사람이 불쌍도 하다. 미친 놈이군』
 
  그러고는 그는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창수는 한쪽으로 드러누워서 방 안 사람들의 반응을 눈여겨 보면서 일본인의 동정을 살폈다. 방 안에서는 두 갈래 논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유식하게 보이는 청년들은 주인의 말과 같이 昌洙를 미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긴 담뱃대를 붙여 물고 앉은 노인들은 그 청년들을 나무라며 말했다.
 
  『여보게들 말을 함부로 말게. 지금인들 異人(이인)이 없으란 법이 있나? 이런 말세에는 마땅히 이인이 나는 법일세』
 
  청년들이 그 말을 받아 대꾸했다.
 
  『이인이 없을 리야 없겠지요만 저 사람 생긴 꼴을 보세요. 무슨 이인이 저렇겠어요』
 
 
  일본인의 피를 손으로 움켜 마셔
 
 
  일본인은 별로 주의하는 빛도 없이 식사를 마치고 중문 밖에 서서 문기둥을 의지하고 방 안을 들여다보며 총각아이가 밥값 계산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昌洙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음 순간 큰 소리로 호령하며 그 일본인을 발길로 차서 거의 한 길이나 되는 계단 밑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바로 쫓아 내려가서 일본인의 목을 힘껏 밟았다.
 
  세 칸 객방의 문이 일제히 열리면서 문마다 사람들이 다투어 머리를 내어밀었다. 昌洙는 몰려나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소리쳤다.
 
  『누구든지 이 왜놈을 위해 내게 달려드는 자는 모두 죽이고 말겠다』
 
  昌洙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본인이 새벽 달빛에 칼을 번쩍이며 달려들었다. 昌洙는 얼굴로 떨어지는 칼을 잽싸게 피하면서 발길로 왜놈의 옆구리를 차서 거꾸러뜨리고는 칼 잡은 손목을 힘껏 밟자 칼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칼을 빼앗아 든 昌洙는 일본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난도질했다. 아직 3월 초의 날씨라 마당은 빙판이었는데, 피가 샘솟듯 넘쳐서 흘러내렸다. 昌洙는 손으로 일본인의 피를 움켜 마시고 그 피를 얼굴에 발랐다. 그리고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 좌중을 향해 소리쳤다.
 
  『아까 왜놈을 위하여 내게 달려들려고 하던 놈이 누구냐?』
 
  방 안에 있던 손님들 가운데에서 미처 도망가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엎드려 빌었다. 이렇게 하여 昌洙는 좌중을 제압했다.
 
  주인 李化甫(이화보)가 나타났다. 그는 감히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방 바깥에 엎드려서 빌었다. 昌洙는 李化甫에게 일본인이 타고온 배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배의 뱃사람들을 데려오게 했다.
 
 
  日人의 돈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해
 
 
  눈치 빠른 이화보는 재빨리 세면도구를 챙겨왔다. 이어서 밥 일곱 그릇을 한 상에 놓고 다른 한 상에는 반찬을 차려 들여왔다. 昌洙는 얼굴을 씻고 밥상 앞에 앉았다. 그는 큰 양푼 한 개를 가져오게 하여 밥과 반찬을 함께 붓고 숟가락 한 개를 더 가져오게 하여 숟가락 두 개를 포개어 들고 밥 한 덩이가 사발통만큼씩 되게 떠서 먹었다. 한 두어 그릇 분량을 먹다가 숟갈을 던지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먹고 싶던 원수의 피를 많이 먹었더니 밥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뱃사람 일곱 명이 문 앞에 와서 엎드렸다.
 
  『소인들은 황주에 사는 뱃놈들인데, 왜놈을 싣고 진남포까지 뱃삯을 받기로 하고 가던 죄밖에 없습니다』
 
  昌洙는 뱃사람들에게 명하여 일본인의 소지품 전부를 가져 오게 했다. 소지품을 조사해 보니까 살해된 일본인의 이름은 쓰치다 조료(土田讓亮)이고 신분은 육군중위였다고 「백범일지」는 적고 있다. 그가 가진 돈은 엽전 열 섬으로서 천냥 가량 되었다. 昌洙는 그 돈으로 뱃삯을 지불하고, 이화보에게 동장을 불러오라고 했더니 이화보 자신이 그 마을 동장이라고 했다. 昌洙는 동행인 세 사람이 돌아갈 노자를 조금씩 나누어 주고 75냥으로 자신이 타고 갈 나귀를 구입하고는 나머지 돈 800냥을 이화보에게 맡기며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했다.8)
 
  『왜놈의 시체는 어찌하오리까?』
 
  이화보가 물었다. 昌洙는 주저없이 지시했다.
 
  『왜놈들은 우리 조선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생물들의 원수이다. 강 속에 던져서 물고기와 자라들까지 즐겁게 뜯어먹도록 해라』
 
  이어 昌洙는 이화보에게 쓸 것을 가져 오게 해서 포고문을 썼다. 먼저 일본인을 죽인 이유를 〈國母報讐의 목적으로 이 왜인을 죽인다〉고 밝히고, 마지막 줄에 「海州白雲坊基洞 金昌洙」라고 써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거리 벽에 붙이게 했다. 그리고 다시 이화보에게 명령했다.
 
  『네가 이 동네 동장이니 安岳郡守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해라. 나는 내 집으로 돌아가서 하회를 기다리겠다. 왜놈의 칼은 내가 가지고 간다』
 
 
  「義兵左統領」 첩지 꺼내 보이고 떠나
 
 
  昌洙는 겉으로는 태연자약하게 행동했으나 마음속으로 매우 불안했다. 만약 동네사람들이 가지 못하게 막거나 자신이 출발한 뒤에라도 동네 사람들이 뒤쫓아 와서 붙든다면 사실을 설명할 기회도 없이 사람들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昌洙는 위계를 쓰기로 했다. 그는 徐敬章(서경장)이 써준 「義兵左統領」 첩지를 꺼내보이며, 일행 수백명이 곧 도착할 테니까 짚신 등 물건을 미리 준비하라고 이화보에게 지시했다.9)
 
  출발하려고 보니까 의복이 말이 아니었다. 옷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다행히 벗어 걸어두었던 두루마기가 있어서 그것을 입고 허리에 칼을 찼다. 늠름한 태도로 여행자들과 동네사람 수백명이 모여 쳐다보는 가운데 준비된 당나귀를 타고 귀로에 올랐다.10)
 
  昌洙가 信川邑에 도착하자 마침 신천장날이었다. 장터 곳곳에서 치하포 이야기를 하는 것이 들렸다. 그들은 昌洙의 행적을 과장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昌洙는 신천의 동학 친구 柳海純(유해순)의 집에 들렀다. 그의 행색을 본 유해순은 깜짝 놀랐다. 昌洙는 유해순 형제에게 사건의 경위를 대강 들려 주었다. 그들 형제는 昌洙의 행동이 쾌남아다운 행동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지는 말고 빨리 다른 곳으로 피하라고 강권했다. 昌洙는 단호히 거절했다.
 
  『사람의 일은 밝고 떳떳해야 사나 죽으나 값이 있지, 세상을 속이고 구차히 사는 것은 사나이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오』
 
  이렇게 말하고 昌洙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상세히 보고하자 淳永 내외 역시 피신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昌洙는 자신이 왜놈을 죽인 것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한 일이 아니라 국가적인 수치를 씻기 위해 행한 일이라면서 『法司(법사)에서 조치가 있을 터이니 그에 따를 것입니다』하고 말했다.
 
  모든 일에 아버지의 의견대로 행동해온 昌洙였으나 이때는 단호히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淳永도 더 이상 강권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내 집이 흥하든 망하든 네가 알아서 하여라』11)
 
  치하포 사건은 순간적인 의분에서 나온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국모보수」의 명분을 위해서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그러한 사건 자체와 함께 정당한 司法節次를 통하여 만인을 교훈하겠다면서 도피하지 않고 집에서 대기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스물두 살의 의기 남아 金昌洙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2) 外交問題가 된 金昌洙 체포
 
 
  日本公使가 재촉해도 地方官들은 소극적
 
 
  집에서 대기한 지 석달이 지나도록 昌洙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길에 방을 써붙이고 주막집 주인으로 하여금 안악군수에게 보고하도록 하고 왔는데도 昌洙의 체포가 이처럼 늦어진 것은 그만큼 安岳郡이나 海州府가 치하포 사건의 수사에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쓰치다와 동행한 젊은이는 평안도 용강출신의 통역 林學吉이었는데, 나이는 스무 살이었다. 그는 사건 현장에서 도망하여 3월12일 저녁에 평양에 도착했고, 이곳에 출장중이던 京城日本領事館의 히라하라 아쓰다케(平原篤武) 경부에게 쓰치다 살해의 전말을 알렸다. 히라하라 경부는 이튿날 일본순사 두 명과 조선 순검 다섯 명을 데리고 평양을 출발하여 15일에 현장에 도착했다.
 
  그는 핏자국이 낭자한 사건 현장을 확인했으나 이화보는 이미 도피하고 없었다. 그는 엽전을 비롯한 쓰치다의 소지품을 수거하고, 이화보의 아내와 선원 등 동네사람 일곱 명을 데리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화보의 집 담벽에 붙여 둔 포고문은 이미 누군가가 떼어 없애버려 히라하라의 눈에 띄지 않았던 것같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투숙객의 범행이었음을 확인한 히라하라는 각 地方官에게 가해자의 체포를 의뢰했다.12)
 
  일본 공사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는 3월31일에 外部大臣 李完用에게 즉시 평양관찰사와 당해 군수에게 엄중히 지시하여 가해자를 빨리 체포하여 의법 처단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外部에서는 평양부와 개성부와 해주부에 차례로 치하포 사건의 범인을 빨리 체포하라고 지시하고, 그러한 사실을 일본 공사관에 통보했다.13) 그러나 보고를 올린 곳은 해주부뿐이었다.
 
  해주부는 안악군수의 보고를 토대로 하여 4월19일자로 치하포 사건의 범인이 金昌洙라는 것을 확인하는 보고를 올렸다. 이 보고서는 昌洙가 장연 산포수 거사 혐의로 수배중인 인물이라는 사실도 언급했다.14) 그러나 보고를 올린 해주부나 안악군도 수사를 적극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당시 해주부에서는 아관파천으로 정국이 급변하자 관찰사들이 스스로 사직을 원하는 바람에 관찰사의 교체가 빈번했다. 4월1일에 李鳴善(이명선)이 자신의 능력으로는 난국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직했고, 신임 尹吉求(윤길구) 역시 같은 이유로 임기를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17일에 사직했으며, 21일에 윤길구의 후임으로 임명된 李建昌(이건창)은 高宗의 즉시 환궁 등을 건의하는 상소를 거듭 올리며 관찰사직을 사양하다가 6월23일에 유배되고, 그 후임으로 7월15일에 閔泳喆(민영철)이 임명되었다. 이렇게 해주부 관찰사가 자주 바뀌는 동안 參書官(참서관) 金孝益(김효익)이 관찰사 서리로 직무를 대행했다.15) 외부대신 이완용은 평양부와 해주부에 거듭 범인을 빨리 체포하라고 지시했으나 해주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16)
 
  범인 체포가 지연되자 仁川日本領事館은 6월5일에 와타나베 타카지로(渡邊鷹次郞) 등 영사관 소속 순사 세 사람을 치하포 사건 조사와 평양 부근의 일본인 정황 시찰을 위해 평양으로 파견했다.17) 그들은 3주일 동안이나 활동하고 돌아왔다. 그들은 평양부 관찰사 鄭敬源(정경원)을 찾았으나 그 역시 아관파천으로 정국이 바뀌자 사표를 제출하고 성밖에서 숨어 살고 있어서 만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일본 순사들은 참서관을 만나 범인 수색을 소홀히 한다고 항의했으나 참서관은 사건을 관할부인 해주부로 이첩했다고 대답했다. 일본 순사들은 평양부로부터 순검 두 명을 지원받아 해주부로 가서 관찰사 서리 김효익을 만나 범인 수색을 위한 해주부 순검의 지원을 부탁했다.
 
  해주부 순검 네 명을 추가로 지원받은 일본 순사들은 6월18일에 치하포로 갔다. 6월21일 새벽에 사건현장에 도착했으나 李化甫는 기미를 눈치채고 도피한 뒤였다. 순사들은 이화보의 가족들을 어르고 달래어 그를 데려오게 해서 체포했다. 일본 순사들은 조선 순검들에게 이화보의 집을 수색하게 하여 관련 서류를 수거한 뒤에 이화보와 사건을 잘 알고 있는 執綱(집강) 吳龍占(오용점)을 연행했다. 이들은 6월26일에 평양 만경대에서 배편으로 인천으로 돌아왔다.18)
 
 
  昌洙 몸을 쇠사슬로 겹겹이 묶어
 
 
  드디어 金昌洙는 6월21일(음력 5월11일)에 해주부로 연행되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인 이른 아침에 갑자기 들이닥친 30여 명의 순검과 사령들에게 체포된 것이었다. 그들은 쇠사슬로 昌洙의 몸을 여러 겹으로 묶었다. 몇 명은 앞뒤에 서서 쇠사슬 끝을 잡고, 나머지 사령들은 좌우로 에워싸고 해주감영으로 연행했다.19) 昌洙를 체포하기 위해 그처럼 많은 순검과 사령이 동원되고 그를 쇠사슬로 겹겹이 결박한 것은 그의 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淳永 내외는 해주로 와서 아들의 옥바라지를 했다. 곽씨 부인은 밥을 빌어다가 사식을 넣어 주었고, 淳永은 전에 알던 사령청, 영리청, 계방 사람들에게 아들의 석방을 교섭하고 다녔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해주감영에 수감된 昌洙는 곧 신문을 받았다. 그는 大全木(대전목) 칼을 목에 찬 채 신문을 받았다. 신문내용은 세 가지였는데, 첫째는 동학농민전쟁 때에 東山平 농장에 日人이 쌓아둔 미곡을 탈취한 것 등의 행적이었고, 둘째는 장연 산포수 거사 사건이었으며, 셋째가 치하포 사건이었다. 창수는 미곡 탈취와 장연 산포수 거사 모의는 인정했으나 정작 치하포 사건은 부인했다.20) 6월27일에 법부대신에게 신문 내용을 보고한 사람이 관찰사 서리 참서관 김효익인 것으로 보아 신문도 김효익이 했던 것 같다.21)
 
  『네가 안악 치하포에서 일본 사람을 살해하고 도적질을 했다는데, 사실이냐?』
 
  『그런 일 없소』
 
  『네 행적의 증거가 분명한데 부인하느냐!』
 
  昌洙가 사실을 부인하자 김효익은 昌洙의 주리를 틀라고 했다. 갑오경장 이후로 근대적인 사법제도가 시행되었으나 잔혹한 고문은 그대로 자행되고 있었다. 대번에 정강이 뼈가 허옇게 드러났다. 昌洙는 입을 꾹 다물고 아픔을 참다가 마침내 기절했다. 그러자 잠시 고문을 중지하고 얼굴에 찬물을 끼얹어 정신을 들게 하고는 다시 고문을 가했다. 이때에 받은 고문의 흉터는 金九의 일생 동안 없어지지 않았다.
 
  『본인의 체포장을 보면 「內部訓令等因(내부훈령등인)」이라 하였은즉, 본 관찰부에서 처리할 수 없는 사건이니 內部에 보고만 하여 주시오』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昌洙는 끝내 해주감영에서 자신의 살해동기를 자백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백범일지」는 內部에 가서 朝廷 高官들 앞에서 자신의 일본인 살해동기를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22)
 
  海州府는 昌洙가 치하포 사건의 主犯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일본 순사들이 인천으로 압송해간 李化甫와의 대질이 필요하다고 보고 內部와 法部와 外部에 이화보를 해주부로 보내줄 것을 건의했다.23) 외부는 건의를 받아들여 7월7일에 『이화보와 대질하여 金昌洙의 죄악을 모두 밝혀 법부로 보고하라』고 해주부에 지시하는 한편, 인천부에는 『일본영사와 협의하여 이화보를 해주로 압송하라』고 지시했다.24)
 
 
  仁川으로 이송되어 가다 孝子 李昌梅묘 앞에서 눈물
 
 
  그러나 그것은 인천 日本 領事館의 반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일본 영사관의 하기하라 슈이치(萩原守一) 영사대리는 인천부 관찰사에게 이 사건은 日本人을 살해한 중대한 안건이므로 자신이 입회할 필요가 있다면서 오히려 昌洙를 인천으로 압송하여 심문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조회했다.25) 결국 일본 쪽의 강력한 요구로 昌洙는 인천 감리서 순검과 인천 일본 영사관 경찰서 순사에 의하여 인천으로 압송되었다.26) 昌洙가 인천으로 이송된 것은 황해도 일대의 재판관할권이 인천항재판소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淳永 내외는 고향에 있는 집과 세간을 다 팔아가지고 아들을 따라다니며 뒷바라지하기로 결심했다. 淳永은 가산을 정리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고, 곽씨 부인은 인천으로 압송되는 아들을 따라 나섰다.27)
 
  昌洙는 이송 도중에 해주에서 延安(연안)을 거쳐 나진포까지 걸어가다가 연안읍에서 약 오리쯤 되는 길가에 있는 李昌梅(이창매)라는 孝子의 묘를 보았다. 날씨가 몹시 더웠으므로 순검들은 참외를 사서 먹으며 길가에 앉아 쉬었다. 무덤 곁에 있는 비 앞면에 「孝子李昌梅之墓」라고 새겨져 있고 비석 뒷면에는 어느 임금이 이창매의 효성에 감복하여 효자 정문을 내렸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창매의 묘 옆에는 이창매 부친의 묘가 있었다. 묘 근처 사람과 순검들이 昌洙에게 들려 준 이창매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이창매는 연안의 통인(通引:지방 관아에 딸린 하급관리)이었는데, 그는 부친 장례 뒤에 비바람을 맞으면서 지성으로 산소를 모셨다. 얼마나 극진하게 묘를 모셨던지 묘 앞의 신 벗은 자리에서부터 절하는 자리까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갔던 자국들과 두 무릎을 꿇었던 자국과 향로와 향합을 놓았던 자리에 영영 풀이 나지 않았다. 만일 사람이 그 움쑥움쑥 패인 자리를 흙으로 메우면 당장 뇌성이 진동하고 큰 비가 내려 그 흙들을 씻어내곤 했다─.
 
  효자 이창매의 사연을 듣자 昌洙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의 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이때의 안타까웠던 심정을 金九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눈으로 그 비문을 보고 귀로 그 이야기를 듣는 나는 순검들이 알세라 어머님이 알세라 피 섞인 눈물을 흘리며 이창매에게 待罪(대죄)했다. 다 같은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이창매는 부모 죽은 뒤까지 저렇듯 효도한 자취가 있으니, 그 부모 생전에는 어떠했을지를 알 것 같았다.
 
  나의 뒤를 허둥지둥 따라다니시느라 넋이 다 빠져서 내 옆에 앉아 하염없이 한숨만 짓고 계시는 어머님을 차마 뵐 수 없었다. 이창매가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 나와서 나를 보고, 너는 나무는 조용히 있고 싶어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는 구절을 읽지 못했느냐고 책망하는 듯싶었다. 일어나서 출발할 때에 이창매의 무덤을 다시금 되돌아보며 마음속으로 수없이 절을 했다.〉28)
 
 
  바다에 같이 빠져 죽자고 아들 손 잡아 끌어
 
 
  〈나무는 조용히…〉의 詩句(시구)는 〈나무는 조용히 있고 싶어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모시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子欲養而親不待〉는 「韓詩外傳(한시외전)」의 구절로서 어버이가 살아계실 때에 효도하지 못함을 탄식한 것인데, 「백범일지」의 이러한 기술은 金九의 각별한 효성을 짐작하게 하는 또하나의 보기이다.
 
  昌洙는 나진포에서 순검들과 함께 배를 탔다. 달빛도 없고 사방이 온통 캄캄한 속에 잔잔한 물결소리만 들렸다. 江華島를 지날 무렵 종일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걸어왔던 순검들은 지쳐서 모두 잠이 들었다. 이때에 곽씨 부인이 뱃사공도 듣지 못할 만큼 낮은 목소리로 아들에게 속삭였다.
 
  『얘야, 네가 이제 가면 왜놈 손에 죽을 터이니, 맑고 맑은 이 물에 너와 나와 같이 죽어서 귀신이라도 모자 같이 다니자』
 
  이렇게 말하고 나서 곽씨 부인은 아들의 손을 끌고 뱃전으로 나가려 했다. 순간 눈물이 핑 돈 昌洙는 황급히 어머니를 위로했다.
 
  『어머님은 자식이 이번에 가서 죽는 줄 아십니까? 결코 죽지 않습니다. 자식이 국가를 위하여 하늘에 사무치게 정성을 다해 원수를 죽였으니, 하늘이 도우실 것입니다. 분명히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곽씨 부인은 아들의 말을 믿으려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를 위안하여 하는 말인 줄만 알고, 다시 아들의 손을 잡아 끌었다. 昌洙가 거듭 왜 자식의 말을 안 믿으시냐고 간절하게 호소하자, 곽씨 부인은 그제서야 투신할 것을 단념했다.
 
  『너의 아버지와도 약속했다. 네가 죽는 날이면 우리 둘도 같이 죽자고』
 
  곽씨 부인은 아들의 단호한 말을 듣고 어쩌면 아들이 죽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비비고 알아듣지 못할 낮은 목소리로 축원을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昌洙의 마음은 미어질 듯했다.29)
 
 
  (3) 仁川監理署에서 세 차례 裁判
 
 
  金昌洙는 8월13일에 인천에 도착했다.30) 그는 인천옥에 투옥되어 일반 범죄자를 수용하는 감방에 9인용 차꼬에 채워져 갇혔다. 몹시 불결한 감옥 환경에다가 찌는 듯한 무더위로 말미암아 昌洙는 인천옥에 이감되자마자 장티푸스에 걸렸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昌洙는 자살을 기도했다. 그는 동료 죄수들이 잠든 틈을 타서 이마에 손톱으로 「忠」자를 새기고 허리띠로 목을 졸라매어 의식을 잃었다. 그러나 같은 차꼬에 채워진 죄수들이 소란을 피워서 다시 살아났다. 그러는 사이에 열은 내렸으나 보름 동안이나 먹지 못했다.31)
 
  인천에 먼저 잡혀온 이화보와 참고인 오용점은 昌洙의 심문이 있기 전에 별도로 인천 일본영사관 경찰의 심문을 받았다. 그런데 이들의 심문결과를 기록한 인천 일본영사관의 보고서에서 昌洙를 「義兵大將」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은 흥미있다. 이 보고서는 〈李化甫 등의 관련 진술에 애매한 것이 많으나 … 쓰치다의 가해자는 江西郡을 습격한 義兵大將 金昌洙 외 4명이고 이화보가 쓰치다의 소유재산과 韓錢(한전) 몇 섬을 맡은 일은 전적으로 金將軍의 강제명령에서 나온 것만은 판명되었다〉고 적고 있다.32) 昌洙를 의병대장이라고 한 것은 아마 사건현장에서의 昌洙의 행동과 함께 그가 「義兵左統領」이라는 첩지를 보여 주었다는 이화보의 말에 근거한 것이었을 것이다.
 
  얼마 뒤에 金昌洙는 인천 監理署(감리서)에서 신문을 받았다. 개항장의 감리서는 江華島條約 이후로 개항장의 늘어나는 통상업무를 전담하고 개항장 안의 對外관계 사무를 합리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1883년 8월19일에 仁川과 元山과 釜山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1895년 5월의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한때 감리서가 폐지되었다가 이듬해 8월7일에 다시 설치되었다.33)
 
  개항장의 최고책임자인 감리는 行政과 治安은 물론 司法까지 관할하고, 개항장 안에 거류하는 외국인의 인명 재산의 보호와 함께 외국인과 조선인 사이의 詞訟(사송: 민사소송)을 각국 영사와 상호 심사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34) 감리서와 함께 개항장의 치안업무를 담당하도록 1896년 8월10일에 각 개항장에 警務署가 설치되었다. 경무서의 최고책임자는 警務官인데, 경무관은 해당 감리의 지휘를 받았다.35) 이처럼 갑오경장으로 각 도와 개항장에 근대적인 재판소가 설치되기는 했으나 행정과 사법이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각 도의 관찰사는 재판소 판사를 겸임했고, 각 개항장의 감리는 개항장재판소 판사를 겸임했다.
 
  이무렵의 인천감리는 李在正(이재정)이었다. 법부 협판을 역임한 이재정이 仁川府尹으로 발령받은 것은 1896년 8월6일이었는데,36) 이튿날 감리서가 설치되자 그는 인천부윤으로서 인천감리를 겸임하게 되었다.37) 이무렵 감리들은 외교적인 문제가 얽힌 사건을 다루기를 꺼려했는데,38) 그는 부임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치하포 사건과 같은 복잡한 사건을 맡게 된 것이었다.
 
 
  「백범일지」와 공식문건의 審問내용 달라
 
 
  昌洙는 세 차례 신문을 받았다. 그런데 신문의 내용과 심리과정의 분위기에 대해서 「백범일지」와 신문조서 등 당시의 공식 문건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것은 치하포 사건이 일본인 살해라는 외교적으로 중요한 문제였으므로 당시의 상황에서 공식문건들이 사실대로 기록되지 못했거나 생략되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고, 반면에 「백범일지」는 사건이 있은 지 30여 년 뒤에 상해의 임시정부 청사에서 회고한 것이므로 아무래도 주관적으로 서술된 점이 없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첫 심문 때의 경무관 이름부터 「백범일지」와 신문조서에 다르게 적혀 있다. 「백범일지」는 金潤晶(김윤정)이라고 했으나 이는 착오이다. 이때의 경무관은 金順根(김순근)이었다. 김윤정은 1897년 3월에 학부 유학생으로 미국에 유학하여 1903년에 콜로라도 대학을 졸업하고 주미공사관의 서기생, 參書官(참서관), 대리공사를 차례로 역임했다.
 
  그가 귀국한 것은 1905년 乙巳勒約(을사늑약)으로 주미공사관이 폐쇄된 뒤이며, 귀국한 뒤에 泰仁(태인)군수를 거쳐 인천부윤으로 전임된 것은 1906년 11월의 일이다.39) 그는 日本의 韓國倂合 뒤에는 중추원 참의와 고문 등을 역임하며 친일의 길을 걷게 된다. 1869년에 태어난 김윤정이 유학을 떠나기 전 20代 중반의 젊은 나이로 인천항 경무관이라는 중요한 직위에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 하나 다른 것은 경무관의 인품에 대한 설명이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昌洙를 신문한 경무관은 의협심이 강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으로서, 裁判 중에 昌洙에게 여러 가지 감동적인 好意를 베푼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의 기록에 보이는 이때의 경무관 김순근은 전혀 다른 성품의 인물이었다.
 
  김순근은 昌洙의 재판이 있기 한 달 전인 1896년 7월19일에 인천부민 부부를 문초하다가 잘못하여 치사시켰다. 이 때문에 인천항 주민 500∼600명이 관찰부에 몰려가서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었다.40) 또한 〈김순근은 자신의 직무를 돌보지 않고 淸樓酒家에 다니면서 술과 요리나 먹고, 경무서에서 재판을 할 때에도 백성들의 유무죄를 가리지 않고 때린다〉고 호소하는 인천항 주민들의 탄원 편지가 「독립신문」에 실리기도 했다.41)
 
  1차 신문은 1896년 8월31일 오후 1시에 警務廳 마당에서 열렸다.42) 昌洙는 장티푸스를 심하게 앓고 있어서 간수의 등에 업혀 경무청으로 나갔다. 이 첫 신문 때의 상황을 「백범일지」는 아주 자세히 적고 있다.
 
  昌洙는 경무청에 나가면서 비장한 결심을 했다. 『내가 해주에서 다리뼈까지 드러나는 악형을 당하고 죽게 되었으면서도 사실을 부인한 것은 內部에까지 가서 大官들을 대하여 말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 병으로 죽게 되었으니 부득불 여기에서라도 왜놈 죽인 취지를 말하고 죽으리라』하고.
 
  간수가 昌洙를 업어다가 경무청 문 밖에 앉히자 김순근이 물었다.
 
  『어찌하여 저 죄수의 형용이 저렇게 되었느냐?』
 
  열병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간수가 보고하자 김순근은 昌洙에게 물었다.
 
  『네가 정신이 있어서 족히 묻는 말에 대답할 수 있겠느냐?』
 
  『정신은 있으나 성대가 말라붙어서 말이 나오지 않으니 물을 한 잔 주시면 마시고 말을 하겠소』
 
  그러자 청지기더러 바로 물을 가져다 주게 했다.
 
  『네가 안악 치하포에서 모월 모일에 일본인을 살해한 일이 있느냐?』
 
  『본인이 그날 그곳에서 國母의 報讐를 하기 위해 왜구 한 명을 때려 죽인 사실이 있소』
 
  昌洙의 이 말에 경무청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昌洙의 옆 의자에 앉아 심문을 지켜보고 있던 와타나베(渡邊)라는 일본순사가 의아해 하며 옆 사람에게 갑자기 조용해지는 이유를 묻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보자 昌洙는 온 힘을 다하여 『이놈!』하고 호령했다.
 
  『지금 소위 萬國公法이니 國際公法이니 하는 조규 가운데 어디에 국가와 국가가 通商通和條約을 체결한 뒤에 그 나라 임금을 살해하라는 조문이 있느냐? 내가 죽으면 귀신이 되어, 살면 몸으로 너희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서 우리 국가의 치욕을 씻으리라!』
 
  그러자 와타나베는 『칙쇼! 칙쇼!』하면서 대청 뒤쪽으로 사라졌다. 「칙쇼(畜生)」라는 일본말은 「빌어먹을」 또는 「개자식」이라는 뜻의 욕이다.
 
  그런데 金九는 이러한 말은, 앞에서 본 이마에 손톱으로 「忠」자를 새기고 자결하려고 했던 행동과 함께,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만큼 그는 유교적인 忠義思想이 철저했고, 君王의 권위에 대해 정치적 비중을 크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金九의 이러한 사상은 뒷날 開化論者가 된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뒷날 李奉昌이나 尹奉吉의 의거가 다 日本天皇과 관련된 것이었던 사실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蒙白한 監理를 보고 호통쳐
 
 
  정내의 공기가 긴장되기 시작했다. 관원 하나가 경무관에게 와서 말했다.
 
  『사건이 너무도 중대하니 監理 영감께 말씀드려 직접 심문하시도록 해야겠습니다』
 
  몇분 뒤에 감리 李在正이 들어왔다. 경무관은 그때까지 심문한 것을 감리에게 보고했다.
 
  昌洙는 이재정을 보고 힐문했다.
 
  『본인은 시골의 일개 천민이지만 臣民된 의리로 국가가 수치를 당하고 白日靑天 아래 내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명을 죽였소. 그러나 내가 아직 우리 사람으로 倭皇을 죽여 복수했단 말을 듣지 못하였거늘 지금 당신들은 蒙白(몽백:국상을 당하여 흰 갓을 쓰고 소복을 입는 것)을 하였으니, 春秋大義에 君父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몽백을 아니한다는 구절도 읽어보지 못하고 한갓 부귀와 국록을 도적질하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시오!』
 
  昌洙의 추상 같은 호령에 이재정과 김순근을 비롯하여 참석한 관리들 수십 명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이재정이 마치 하소연하듯이 昌洙에게 말했다.
 
  『昌洙의 지금 하는 말을 들은즉, 그 충의와 용기를 흠모하는 반면에 내 당황스럽고 부끄러운 마음도 비할 데 없소이다. 그러나 상부의 명령대로 심문하여 위에 보고하려는 것뿐이니, 사실이나 상세히 공술하여 주시오』
 
  경무관은 昌洙의 병세가 아직 위중한 것을 보고 감리와 귓속말을 하고는 심문을 중단하고 그를 옥으로 데려가게 했다.43)
 
  그러나 당시의 訊問調書에는 이러한 내용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김순근이 주관한 1차 심문의 기록은 매우 간단하다.
 
  『너의 한 일은 이미 공범인 이화보가 명확하게 진술했으니 감추지 말고 모든 것을 이실직고하라』
 
  김순근의 이러한 심문에 昌洙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는 것이다.
 
  『저는 본년 정월 24일에 용강 방면으로 가다가 고향인 안악으로 가기 위해 중도에서 길을 바꾸고 평양에 사는 鄭一明과 함경도 정평에 사는 金長孫과 金致亨(김치형) 세 사람을 만나 배편으로 치하포까지 갔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여 주막집 이화보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잠을 잤으며 새벽 일찍 아침밥을 먹고 길을 떠나려고 했습니다.
 
  주막집 법도가 老少를 분별하여 차례로 상을 내어오는 것인데, 유숙객 중에 머리를 깎고 칼을 차고 있는 수상한 자가 앉아서 먼저 밥을 달라고 한즉 주인이 먼저 밥상을 내기에 심기가 분연하여 유심히 그 자의 행색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日本人이기에 불구대천의 원수란 생각이 들자 심장이 끓어 올랐습니다. 곧바로 마당으로 내려가 일본인이 밥값을 계산하는 틈을 타서 발로 차 넘어뜨린 다음 손으로 때려죽이고는 시체를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동행한 세 사람에게 돈을 가져오게 하여 주막집 주인에게 800냥을 맡기고 그 나머지 돈은 동행인 세 사람이 노자를 청하기에 나누어 주어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일본인의 칼을 탈취하고 당나귀 한 필을 75냥을 주고 사서 혼자서 재령으로 갔습니다. 5월에 집에 돌아와 있다가 해주 순포에게 체포되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44)
 
  「백범일지」에는 치하포에 혼자 왔으며, 쓰치다를 살해한 것도 혼자였다고 했으나, 신문조서에 따르면 이처럼 치하포에 동료 세 사람과 함께 온 것이었다. 이는 쓰치다의 동행인과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한 히라하라의 보고서나 이화보의 공초와도 일치한다.45) 문제는 그 동행인들이 누구였는가 하는 점인데, 昌洙는 이들이 평양에서 우연히 만난 길동무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런데 4월19일에 해주부 관찰사 서리 金孝益이 외부대신에게 올린 보고서에는 이때의 동행인이 장연 산포수 봉기를 같이 모의했던 金亨鎭(김형진)과 崔昌祚(최창조)였다고 했다.46) 그러나 김형진의 「노정약기」에는 치하포 사건에 대한 서술은 전혀 없다.
 
 
  감옥 안의 王이 되다
 
 
  경무청 안의 심문장면 이야기는 이내 바깥에까지 알려졌다. 昌洙는 간수의 등에 업혀 경무청을 나오다가 어머니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간수가 곽씨 부인을 보고 말했다.
 
  『안심하시오. 어쩌면 이렇게 호랑이 같은 아들을 두셨소?』
 
  감옥으로 돌아온 昌洙는 옥중에서도 한바탕 큰 소동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여전히 자신을 도적 죄수칸에다 가두고 차꼬를 채웠기 때문이다. 昌洙는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며 관리들을 호통쳤다.
 
  『지금까지는 내가 아무 의사를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나에 대한 대우를 강도로 하나 무엇으로 하나 잠잠히 입 다물고 있었다마는, 오늘은 정당하게 내 뜻을 발표하였거늘 아직도 나를 이다지 홀대하느냐! 땅에 금을 그어놓고 그것이 감옥이라 하여도 그 금을 넘을 내가 아니다. 내가 당초에 도망하여 살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면, 왜놈을 죽인 그 자리에 내 주소와 성명을 갖추어 포고하고, 또 내 집에 와서 석 달여나 잡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겠느냐! 너희 관리놈들이 왜놈을 기쁘게 하기 위해 내게 이런 나쁜 대우를 하느냐!』
 
  昌洙가 얼마나 크게 요동을 쳤던지 같은 차꼬에 발목이 채워져 있던 죄수들이 일제히 발목이 다 부러졌다고 고함을 치고 야단을 떨었다. 소동을 듣고 온 김순근은 애꿎은 간수를 책망하면서 昌洙를 다른 방으로 옮기고 차꼬도 풀게 했다.
 
  이 소동이 있고 나서야 昌洙에 대한 대우가 달라졌다. 「백범일지」는 〈이때부터 나는 감옥 안의 왕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47) 얼마 뒤에 면회 온 곽씨 부인은 비록 초췌한 얼굴이었으나 희색이 돌았다. 곽씨 부인은 감리서 문 밖에 있는 개성 출신의 물상객주 朴永文 집에 식모로 들어가 거기서 일한 代價로 아들에게 사식을 들여 주고 있었다.
 
  『아까 네가 심문을 받고 나온 뒤에 경무관이 돈 150냥을 보내어 네 보약을 먹이라고 하더라. 오늘부터는 주인 내외는 물론이고 사랑 손님들도 나를 매우 존경하며 대하고, 또 옥중에 있는 아드님이 무슨 음식을 자시고자 하거든 말만 하면 다 해주마고 한다. 일전에는 어떤 뚜쟁이 할미가 와서 당신이 아들을 위하여 이곳에서 고용살이하는 것보다는 내가 중매를 서서 돈 많고 권력도 많은 남편을 얻어 줄 터이니 그리 가서 옥에 밥도 마음대로 해 가져가고 일도 주선하여 속히 나오도록 하여 주는 것이 어떠냐 하기로, 나는 남편이 있고 며칠 안에 이곳에 온다고 말한 일도 있다』48)
 
  이 말을 듣자 昌洙는 천지가 아득했다. 이튿날부터 昌洙를 보려고 면회를 신청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인천항의 유력자들과 노동자까지도 아는 관리에게 昌洙를 심문할 때에는 알려 달라는 청탁을 하기도 했다.
 
 
  2, 3차 심리는 빼앗은 돈과 사용처 집중 추궁
 
 
  닷새 뒤인 9월5일에 2차 심리가 열렸다. 2차 심리도 경무관 김순근이 주재했다. 昌洙는 이날도 간수의 등에 업혀 옥문을 나섰는데, 경무청으로 가는 길에는 昌洙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경무청 안에는 각 관청의 관리와 인천항의 유력자들이 다 모인 것같고, 담장 꼭대기와 지붕 위까지 경무청 뜰이 보이는 곳은 어디나 사람들이 다 올라가 있었다.49)
 
  그런데 2차 심문 내용에 대해서 「백범일지」에는 〈나는 전에 다 말했으니 다시 할 말이 없다〉고 하여 구체적인 심문은 없었다고 적혀 있으나, 신문조서에 따르면 동행인의 범행가담 여부, 범행에 사용한 흉기, 쓰치다를 살해한 뒤에 빼앗은 금전의 액수와 사용처 등을 집중적으로 추궁받았다.
 
  2차 심리에서 경무관은 昌洙가 배 안에 돈과 재물이 있는 것을 미리 알고 쓰치다를 살해한 것이 아니냐고 추궁했고 昌洙는 쓰치다를 살해한 뒤에야 배 안에 돈이 있는 것을 알았다고 대답하고 있다. 그러나 「국모보수」라는 동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데, 이는 1차 심리에서 이미 밝혔으므로 재론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서기가 고의로 생략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쓰치다에게서 빼앗은 금전의 액수와 그 처분에 대해 1차 진술에서는 800냥이라고 했던 것을 2차 진술에서는 엽전 100냥 가량이었다고 대답하고 있는 것도 이상하다. 이 점을 김순근이 추궁하자 昌洙는 처음 진술에서는 졸지에 잘못 진술했으며 800냥을 이화보에게 맡긴 일이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1차와 3차 심문, 이화보의 신문, 그리고 「백범일지」에서는 한결같이 쓰치다에게서 빼앗아 이화보에게 맡긴 금전의 액수가 800냥이었다고 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금전의 처분문제인데, 「백범일지」와 그밖의 공식문건에는 모두 昌洙는 쓰치다에게서 빼앗은 금전을 자신이 탈취하지 않고, 동행인들의 노자로 준 약간의 금전 말고는 나머지 800량 전량을 어음을 받고 주막 주인에게 맡겼다고 했다. 특히 「백범일지」에서는 맡긴 800량을 이화보로 하여금 불쌍한 마을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했다고 했다.50) 昌洙는 나귀 한 필을 샀을 뿐이었다. 昌洙가 이화보에게 맡긴 800냥은 사건 직후 현장을 조사한 일본 순사들이 가져가서 인천 일본 영사관으로 옮겼다.51)
 
  또한 경무관은 昌洙의 「左統領」이라는 첩지의 출처도 추궁했는데, 昌洙는 그것이 徐敬章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2차 심리가 있고 나서는 昌洙를 면회오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다.
 
  3차 심리는 다시 닷새 뒤인 9월10일에 1, 2차 때와는 달리 監理署에서 열렸다. 이날은 심문도 감리 李在正이 인천항 재판소 판사 자격으로 직접 했다. 金九는 3차 심리 때에는 일본인이 보이지 않았다고 했으나,52) 이재정이 외부에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인천일본영사관의 경부 가미야 기요시(神谷淸)가 會同審理했다.53)
 
  李在正은 일본영사관의 경찰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차분하게 심문했다. 쓰치다를 죽인 동기가 국모보수라는 것도 거듭 밝혔다. 뒷날 金九는 이때에 이재정이〈매우 친절하게 말을 묻고, 나중에 신문조서 꾸민 것을 보여 주면서 고칠 것은 고치게 하고 서명시켰다〉고 적고 있다.54)
 
  昌洙는 1, 2차 진술에서는 쓰치다를 혼자서 살해했다고 했으나 3차 진술에서는 동행한 세 사람과 주막에 묵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협력했다고 진술했다. 감리 이재정은 그 말이 1, 2차 진술과 맞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사실 여부를 다그쳐 물었다. 이화보는 2차 심문에서 동행한 세 사람이 昌洙와 함께 범행에 참가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는 또 같은 신문조서에서 당시의 상황을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라 흉기를 판별할 수 없었습니다〉하고 진술하기도 했다.55) 그러나 〈제가 먼저 시작을 하자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쳐 끝을 냈습니다〉고 한 昌洙의 진술과, 1, 2차 진술, 「백범일지」의 서술내용으로 볼 때에 동행한 세 사람과 주변사람들은 쓰치다 살해과정에는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살해 뒤에 사후처리하는 것만 거들었던 것같다.
 
 
  (4) 土田讓亮은 누구인가?
 
 
  이렇게하여 심문은 모두 끝났다. 며칠 뒤에 일본인들이 昌洙의 사진을 찍겠다고 하여 昌洙는 경무청으로 또 업혀나갔다. 그날도 경무청 안팎으로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김순근이 슬쩍 昌洙의 귀에 들리게 말했다.
 
  『오늘 저 사람들이 昌洙의 사진을 박으러 왔으니, 주먹을 쥐고 눈을 부릅뜨고 찍으시오』
 
  그런데 감리청에서는 청사 안에서 촬영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길에서 사진을 찍게 되었는데, 일본인들은 죄인의 표시로 昌洙에게 수갑을 채우든지 포승으로 결박을 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김순근은 『이 사람은 啓下罪人(계하죄인: 임금의 재가를 받은 죄인)이라 대군주 폐하의 분부가 없는 이상 그의 몸에 형구를 댈 수 없소』 하고 거절했다.
 
  옥신각신 끝에 길에서 昌洙가 앉은 옆에 포승을 두고 사진을 찍었다. 이때에 昌洙는 며칠 전보다는 기운이 돌아와 있었다. 그는 큰 소리로 일본인들을 꾸짖고 나서 몰려든 사람들을 향해서 소리쳤다.
 
  『이제 왜놈이 國母를 시해했으니 온 백성들의 대치욕일 뿐만 아니라 왜놈의 독해는 궐내에만 그치지 않고 당신들의 아들과 딸이 필경은 왜놈의 손에 다 죽을 터이니 나를 본받아서 왜놈을 보는 대로, 만나는 대로 다 죽입시다!』
 
  그러자 와타나베 순사가 직접 昌洙에게 물었다.
 
  『네가 그러한 忠義가 있을진대 어찌 벼슬을 못하였느냐?』
 
  『나는 벼슬을 못하는 상놈이기 때문에 작은 놈밖에 죽이지 못했거니와 벼슬하는 양반들은 너희 임금의 목을 베어 원수를 갚을 것이다』
 
  그러자 金順根이 일본인은 죄수에게 직접 심문할 권한이 없다면서 와타나베를 제지했다.56)
 
 
  「독립신문」은 단순 强盜로 보도
 
 
  李在正은 3차 심리를 끝내자 바로 9월12일과 13일에 外部大臣과 法部大臣에게 치하포 사건의 경과와 조속한 사건처리를 요망하는 보고서를 보냈다.57) 이재정의 이 보고내용은 9월22일자 「독립신문」의 「잡보」란에 다음과 같이 간략히 보도되었다.
 
  〈인천감리 이재정씨가 법부에 보고하였는데, 해주 金昌洙가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 장사 토전양량을 때려 죽여 강물 속에 던지고 환도와 은전을 많이 뺏었기로 잡아서 공초를 받아 올리니 照律處辦(조율처판)하여 달라고 하였더라.〉58)
 
  정부는 공식적인 판결을 빨리 내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昌洙는 미결수로서 기약없는 감옥생활을 시작했다.
 
  金九가 변복한 日本人을 보자 대뜸 민비를 시해한 일본공사 미우라이거나 그 공범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순진성과 동시에 국모시해에 대한 조건반사적인 反日感情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日本公使가 혼자서 치하포와 같은 벽지로 피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쓰치다의 소지품을 조사해보니까 그가 일본군 육군 중위였다고 한 대목이다. 그러나 쓰치다가 일본군 육군 중위였음을 증명하는 소지품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백범일지」에도 언급이 없다. 뿐만 아니라 해주부에서나 인천감리서에서의 세차례에 걸친 심리에서도 쓰치다의 신분과 관련된 심문은 없었다.
 
  이 무렵에 조선에 파견되어 있는 日本軍에서 中尉는, 가령 東學農民軍의 海州城 공략 때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상당한 지휘권을 가진 장교였다. 그러한 신분의 일본군 중위가 변복을 하고 혼자서 벽지를 여행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만 이무렵 지방정황을 탐색하기 위하여 하사관급의 군인이나 밀정들이 商人이나 僧侶 등의 행색으로 벽지를 여행하는 경우는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라면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쓰치다가 일본군 육군 중위라는 사실이 그의 소지품에 의하여 현장에서 확인되었다면, 마을 사람들도 그것을 보았을 것이므로, 昌洙가 의병이 곧 들이닥친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도망치듯이 치하포를 떠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하여 쓰치다의 소지품을 챙긴 일본 경찰은 쓰치다가 나가사키(長崎)현 쓰시마(對馬島)의 이즈하라(嚴原)항 사람으로서 조선에 장사하러 온 상인이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보고에 따르면 쓰치다는 이즈하라항의 무역상 오쿠보 키(大久保機)의 고용인으로서 1895년 10월에 진남포에 도착하여 11월4일에 장사를 하러 황주로 갔었으며,59) 사건 당시에 그는 황주 十二浦에서 趙應斗(조응두)의 배 한 척을 세내어 통역을 대동하고 인천으로 돌아오는 참이었다.60)
 
  개항 직후부터 조선에 침투한 일본 상인들은 개항장 밖의 지역에도 상설 점포를 설치하는 등 조약을 위반하고 내륙 깊숙이 침투하여 상행위를 함으로써 조선인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특히 淸日戰爭 이후로는 淸國商人들에 대신하여 日本商人들의 진출이 급증했다.
 
  통계에 따르면 1893년 현재 서울을 제외한 개항장에서 활동하던 일본 상인이 8048명이었는데, 1899년에는 1만3473명으로 증가했다.61) 이 때문에 조선 상인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여러 곳에서 조선 상인과 일본 상인이 충돌하는 일이 빈번했다.62) 특히 乙未事變과 斷髮令으로 反日감정이 전국적으로 고조되면서 이들 일본 상인들이 조선인들의 일차적인 공격목표가 되어 피살자가 속출했다.
 
  일본인의 피해가 속출하자 일본의 요구로 高宗은 일본인 피살에 대한 驚慘(경참)의 勅語(칙어)를 내렸고, 外部에서도 일본 영사관의 재촉에 따라 3월28일에 軍部에 조회를 보내어 각 지역의 군인들로 하여금 일본인의 보호와 匪賊(비적)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도록 했다.63)
 
  한편 일본 정부는 朝鮮 內陸地方에서 장사하는 일본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1896년 2월22일자 訓示로 내륙지방에 들어가 있는 일본인들의 철수를 명령했다. 이 철수령에 따라서 많은 일본 상인들이 인천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일본 상인들은 신변의 위험을 느껴 변복을 하고 조선 사람으로 위장하기도 했는데,64) 쓰치다도 이때의 철수명령에 따라 변복을 하고 인천으로 철수하던 길이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日本人 피살자 43명, 부상자 19명
 
 
  日本公使館은 3월24일에 그때까지의 피살자 18명의 신분과 피해상황을 상세히 조사하여, 朝鮮政府에 일본인 살해자의 조속한 체포와 처벌을 요구하는 공한을 보냈다.65) 다시 5월31일에는 늘어난 피해자의 명단과 함께 조선 정부에 被害賠償을 요구할 것을 본국 정부에 보고하고 있다.66) 이 보고서에는 피해 일본인이 62명(피살자 43명, 부상자 19명)으로 집계되어 있는데, 피살자 43명을 직업별로 구분해 보면 漁民 19명, 電信工夫 9명, 상인 7명, 군속 3명, 陸軍測量手 2명, 役夫 1명, 촉탁 1명, 의사 1명이었다. 어민의 숫자가 많은 것은 불법어로를 하다가 울진에서 조난당한 어부 15명과 강원도 고성군에 정박한 어부 3명이 의병들에게 집단적으로 살해되었기 때문이다.67)
 
  이 보고서에는 쓰치다가 「賣藥商人」으로 분류되어 있다.68) 피해 일본인 가운데에서 매약상은 세 사람인데, 당시 황해도는 일본인 매약 행상자가 많은 곳이었다.69) 日本藥品은 개항 직후의 수입품목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았으나 조선 내륙에서 행상하는 일본 상인들로서는 매력 있는 품목이었다. 근대적인 의료시설이 없던 당시의 상황에서 일본 약품은 조선인들 사이에서 효능이 뛰어나다는 평판이 있어서 잘 팔렸다. 이 때문에 일본 도매약 상인 가운데에는 품질이 떨어지는 약을 함부로 속여 팔아서 신용을 잃게 되므로 단속을 해야 한다는 그들 자체의 논의도 있었다.70)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그렇게 빈번했던 테러 가운데에서 일본인 이외의 외국인의 피해는 한 건도 없었다는 점이다. 가령 강릉의병 閔龍鎬(민용호)는 일본인을 습격한다는 것을 다른 외국 공사들에게 알리면서 일본인들 이외의 외국인에 대해서는 다른 뜻이 없음을 표명하는 것같은 것이 그러한 사정을 짐작하게 한다.71)
 
  오지에서 철수하여 인천항에 집결한 일본 상인들은 5월에 이르러 상권을 되찾는다는 명분 아래 鷄林奬業團(계림장업단)을 조직했다.72) 치하포 사건이 있은 지 두 달 뒤의 일이다. 그런데 혹시 쓰치다가 이 계림장업단과 어떤 관련이 있었겠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비록 장업단이 일본 관리들의 적극적인 비호 아래 결성되기는 했으나 철수령 이전에 그것을 준비한 것 같지는 않다. 설령 그러한 준비가 일부에서 추진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오지에 가 있는 매약상인 쓰치다가 장업단 결성준비에 관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朝鮮人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日本人에 대한 배상문제는 사건 발생 직후부터 중요한 외교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요구가 알려지자 獨立協會는 萬民共同會를 통하여 일본인 피해자 배상금 요구를 저지시키는 것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다(제9장 「독립협회의 급진 과격파」 참조).
 
  그 뒤로도 日本은 한국 정부에 대해 자국인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으나, 한국 정부는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건이 발생한 지 9년이 지난 1905년 2월에 이르러 한국 정부는 배상금을 지불하고야 말았다. 이때는 한국이 이미 일본의 「保護國」으로 전락하고 있던 때였다. 이 때에 한국 정부는 배상금 액수를 감해줄 것을 요청하여 청구액에서 4분의 1을 감한 18만3750원을 皇室金庫에서 지불하게 되었다.73)
 
  외교적인 문제가 타결되자 1905년 3월에 일본인 피해자들은 개별적인 보상을 받았다. 이때에 피해보상 대상자는 피해자의 직계가족인 正常相續人과 公定委任狀을 가진 사람으로 제한했는데, 쓰치다의 유가족은 정상상속인으로서 다른 피해자들과 같이 3,778圓 59錢의 배상금을 지급받았다.74) 만일에 쓰치다가 육군중위의 신분이었다면 배상금 지급에서 차등이 있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현재 알려진 기록으로 보는 한 그는 商人으로서 다른 민간인 피해자들과 똑같은 금액을 지급받았을 뿐이다.
 
  치하포 사건은 당시에 빈번했던 일본인에 대한 테러와 다른 중요한 특징이 있다. 우선 昌洙가 쓰치다를 살해한 뒤에 그가 소지한 거액의 금전을 확인하고도 금전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대로 돈을 이화보에게 맡기며 동네의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지시했다. 이 돈은 사건 직후에 현장을 조사한 일본순사들에 의해 인천 일본 영사관으로 그대로 옮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공식보고서나 신문에서 昌洙의 이러한 행동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昌洙는 國母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는 쓰치다 살해동기와 자신의 주소까지 떳떳이 밝혔다. 이것은 일본인을 살해한 뒤에 금품을 탈취하고 현장에서 도주한 다른 사건들의 경우와는 크게 다르다.●
 
 
 
  1)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1997, 90∼91쪽. 2) 「承政院日記」 建陽 元年 양력 2월18일조, 2월27일조. 3) 「日本外交文書(29)」, 日本外務省, 1954, 691쪽 ; 「東京日日新聞」 1896년 2월18일자, 「新聞集成明治編年史(9)」, 1946, 374쪽. 그런데 일본공사관 기록에는 이때에 살해된 일본인을 田中秀一의 동생 田中彌市라고 했다(「日本人殺傷者의 逮捕處罰要求件」, 「駐韓日本公使館記錄(9)」, 國史編纂委員會, 1993, 270쪽).
 
  4) 「在仁川萩原事務代理發信 原外務次官宛 公信要旨」 1896년 4월6일조, 「白凡金九全集(3)」, 대한매일신보사, 1999, 199∼200쪽. 「백범일지」는 이때를 2월 하순이라고 했으나(91쪽), 이는 착오이다. 5) 「公文 第20號 日本人 土田讓亮의 被害事件과 犯人逮捕要求件」 1896년 3월31일조, 「駐韓日本公使館記錄(9)」, 272쪽.
 
  6) 「백범일지」, 92∼93쪽. 7) 「海州居 金昌洙 年21 初招」 1896년 8월31일조, 「白凡金九全集(3)」, 250쪽.
 
  8) 「백범일지」, 93∼97쪽. 동행인들에게 노자를 나누어 주고 나귀를 구입한 사실은 「백범일지」에는 적혀 있지 않으나 裁判과정에서 自白했다. 9) 「金昌洙 再招」 1896년 9월5일조, 「白凡金九全集(3)」, 256∼257쪽. 10) 「백범일지」, 99쪽. 11) 위의 책, 99∼100쪽.
 
  12) 「在仁川萩原事務代理發信 原外務次官宛 公信要旨」 1896년 4월6일조, 「白凡金九全集(3)」, 199∼200쪽. 13) 「日本人 土田讓亮의 被殺事件과 犯人逮捕 요구건」 1896년 3월31일조 및 「土田讓亮의 被殺事件과 犯人逮捕 요구에 대한 照覆」 1896년 4월4일조, 「駐韓日本公使館記錄(9)」, 國史編纂委員會, 1993, 272쪽. 14) 「報告 第2號: 海州府觀察使署理 海州府參書官 金孝益이 外部大臣께」 1896년 4월19일조, 「白凡金九全集(3)」, 202∼204쪽. 15) 「日省錄」 建陽元年 2월20일조, 2월29일조, 2월30일조, 3월5일조, 3월9일조, 3월17일조, 3월30일조, 5월9일조, 6월5일조. 16) 「指令第1號: 外部大臣 李完用이 海州府觀察使署理 參書官 金孝益에게」 1896년 5월1일조, 「白凡金九全集(3)」, 205쪽. 17) 「在仁川萩原事務代理發信 小村外務次官宛 公信要旨」 1896년 6월29일조, 「白凡金九全集(3)」, 220쪽. 18) 「在仁川萩原事務代理發信 小村外務次官宛 公信要旨」 1896년 6월29일조, 「白凡金九全集(3)」, 224∼225쪽. 19) 「백범일지」, 100∼101쪽.
 
  20) 「海州 白雲面居 金昌洙 年二十一供案」 1896년 6월27일조, 「白凡金九全集(3)」, 235∼236쪽. 21) 「海州部觀察使署理 海州部參書官 金孝益 報告: 法部大臣에게」 1896년 6월30일조, 「白凡金九全集(3)」, 226∼236쪽. 22) 「백범일지」, 101∼102쪽. 23) 「報告 第3號: 海州府觀察使署理 參書官 金孝益이 外部大臣에게」 1896년 6월28일조, 「海州府觀察使署理 參書官 金孝益 報告: 法部大臣에게」 1896년 6월30일조, 「照會: 內部大臣 朴定陽이 外部大臣 李完用에게」 1896년 7월 12일조, 「白凡金九全集(3)」, 216∼217쪽, 226∼234쪽, 244∼246쪽. 24) 「指令: 外部大臣 李完用이 海州府觀察使署理 參書官 金孝益에게」 1896년 7월9일조, 「訓令 第25號: 外部大臣 李完用이 仁川府觀察使署理 參書官 任午準에게」 1896년 7월9일조, 「白凡金九全集(3)」, 237∼238쪽, 241∼243쪽. 25) 「在仁川萩原事務代理發信 小村外務次官宛 公信要旨」 1896년 7월18일조, 「白凡金九全集(3)」, 249쪽. 26) 「報告 第1號: 仁川港裁判所判事 李在正이 法部大臣 韓圭卨께」 1896년 9월13일조, 「白凡金九全集(3)」, 273쪽. 27) 「백범일지」, 102쪽. 28) 위의 책, 102∼103쪽.
 
  29) 위의 책, 103∼104쪽. 30) 「京第37號 仁川港情況報告」 1895년 8월25일조, 「駐韓日本公使館記錄(10)」, 國史編纂委員會, 1994, 514쪽. 31) 「백범일지」, 106쪽. 32) 「機密第10號 仁川港情況 追加報告」 1896년 7월10일조, 「駐韓日本公使館記錄(10)」, 468쪽. 33) 李鉉宗, 「韓國開港場硏究」, 一潮閣, 1975, 29∼41쪽. 34) 「勅令 第50號 各開港場監理署 復設官制 및 規則」 建陽 元年 8월 7일조 및 「各開港場監理가 該地方府尹을 兼任하는 件」 建陽 元年 8월7일조, 「韓末近代法令資料集(Ⅱ)」, 國會圖書館, 141∼145쪽. 35) 「日省錄」 建陽 元年 7월2일조. 36) 都冕會, 「1894∼1905年間 刑事裁判制度硏究」 서울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8, 131쪽. 37) 「官報」 建陽 元年 8월8일조 ; 「承政院日記」 建陽 元年 6월28일조. 38) 「仁川港情況報告」 1896년 8월25일조, 「駐韓日本公使館記錄(10)」, 513쪽.
 
  39) 「大韓帝國官員履歷書」, 國史編纂委員會, 1972, 155쪽. 40) 「舊韓國外交文書(第三卷, 日案)」 4094호 建陽 元年 7월 19일조, 4095호 建陽 元年 7월20일조, 4096호 建陽 元年 7월 20일조, 4097호 建陽 元年 7월 20일조. 41) 「독립신문」 1896년 9월 5일자, 「잡보」. 42) 「仁川港監理 李在正이 外部大臣 李完用께」 1896년 9월12일조, 「白凡金九全集(3)」, 271쪽.
 
  43) 「백범일지」, 107∼109쪽. 44) 「海州居 金昌洙 年21 初招」 1896년 8월31일조, 「白凡金九全集(3)」, 250쪽. 45) 「日本人 土田讓亮의 被殺事件과 犯人逮捕 요구건」 1896년 3월 31일조, 「駐韓日本公使館記錄(9)」, 272쪽 ; 「安岳郡 河浦店主 李化甫 年48 初招」 1896년 8월31일조, 「白凡金九全集(3)」, 199∼200쪽. 46) 「報告 第2號: 海洲府觀察使署理 參書官 金孝益이 外部大臣께」 1896년 4월19일조, 「白凡金九全集(3)」, 203쪽. 47) 「백범일지」, 110쪽.
 
  48) 위의 책, 109∼110쪽. 49) 같은 책, 111∼112쪽. 50) 같은 책, 98쪽. 51) 「日本人 土田讓亮의 被害事件과 犯人逮捕要求件」 1896년 3월31일조, 「駐韓日本公使館記錄(9)」, 272쪽. 52) 「백범일지」, 112쪽. 53) 「金昌洙 三招」 및 「仁川港監理 李在正이 外部大臣 李完用께」 1896년 9월12일조, 「白凡金九全集(3)」, 264∼267쪽, 271쪽. 54) 「백범일지」, 112쪽. 55) 「李化甫 再招」 1896년 9월5일조, 「白凡金九全集(3)」, 262∼263쪽.
 
  56) 「백범일지」, 112∼114쪽. 57) 「仁川港 監理 李在正이 外部大臣 李完用께」 1896년 9월12일조 및 「仁川港裁判所判事 李在正이 法部大臣 韓圭卨께」 1896년 9월13일조, 「白凡金九全集(3)」, 270∼275쪽. 58) 「독립신문」 1896년 9월22일자. 59) 「在仁川萩原事務代理 發信 原外務次官宛 公信要旨」 1896년 4월6일조, 「白凡金九全集(3)」, 199∼200쪽. 60) 「報告 第2號: 海洲府觀察使署理 參書官 金孝益이 外部大臣께」 1896년 4월19일조, 「白凡金九全集(3)」, 202쪽. 61) 「독립신문」 1899년 10월30일자, 「잡보」. 62) 愼鏞廈, 「獨立協會硏究」, 一潮閣, 1976, 529∼550쪽 참조. 63) 「日案 3951號」, 「舊韓國外交文書(第3卷)」 建陽 元年 2월11일조 ; 「照會 第11號: 外部協辦 高永喜가 軍部協辦 白性基에게」 1896년 3월28일조, 「軍部去來案(第2冊)」.
 
  64) 「公第33號 吉州地方의 賊徒狀況報告」, 「駐韓日本公使館記錄(8)」, 260쪽. 65) 「日本人殺傷者의 逮捕處罰要求件」 1896년 3월 24일조, 「駐韓日本公使館記錄(9)」, 269쪽. 66) 「機密第41號 我人民被害에 관한 件」 1896년 5월30일조, 「駐韓日本公使館記錄(9)」, 283∼285쪽. 67) 「蔚珍地方에서의 日本人 15명 被殺事件에 대한 眞相糾明과 加害者嚴罰要求」 1896년 4월4일조, 「高城地方에서의 日本人殺害事件에 대한 眞相糾明과 加害者嚴罰要求」 1896년 4월9일조, 「駐韓日本公使館記錄(9)」, 273쪽, 274쪽. 68) 「機密第41號 我人民被害에 관한 件」 1896년 5월 30일조, 「駐韓日本公使館記錄(9)」, 285쪽. 69) 「平壤開城地方情況視察報告件」, 「駐韓日本公使館記錄(8)」, 304쪽. 70) 「公信第36號 平壤開城地方情況視察報告件」 1896년 9월11일조, 「駐韓日本公使館記錄(8)」, 580쪽 ; 「仁川領事館소속 巡査의 出張報告書」 1896년 9월1일조, 「駐韓日本公使館記錄(10)」, 519쪽. 71) 「露國人과 日本人에 대한 暴徒의 態度」 1896년 4월29일조, 「駐韓日本公使館記錄(8)」, 268쪽. 72) 계림장업단의 조직과 활동에 관해서는 「機密第48號 鷄林奬業團ニ關スル報告ノ件」 1896년 7월29일조, 「駐韓日本公使館記錄(12)」, 12쪽 ; 「鷄林奬業團ノ實況調査報告ノ件」 1897년 4월29일조, 「日本外交文書(第三十卷)」, 外務省, 1954, 1181∼1186쪽 ; 「平壤開城地方情況 視察報告件」, 「駐韓日本公使館記錄(8)」, 307쪽 ; 「機密第9號 仁川港情況報告書 送付件」, 1896년 6월24일조, 「駐韓日本公使館記錄(10)」, 465쪽 참조. 73) 「損害賠償問題解決件」 1905년 1월25일조, 「損害賠償金減額裁可에 대한 陳謝 및 本國政府通報件」 1905년 1월25일조, 「賠償問題解決에 대한 謝意轉奏要請件」 1905년 2월5일조, 「賠償金支拂通告」 1905년 2월7일조, 「駐韓日本公使館記錄(9)」, 305쪽, 306쪽, 309쪽, 310쪽. 74) 日本外務省外交史料館所藏, 「外務省記錄」, 「外務省告示第一號」 1905년 3월15일조.


孫世一의 비교 評傳 - 이승만과 김구(8)
 
李承晩, 日刊紙시대를 열다
 
 

 

 李承晩은 졸업을 한 뒤에도 계속해서 배재학당에 나와 초등반 영어를 가르치는 한편 協成會 활동에도 열성을 쏟았다. 그는 토론회에서 가장 자주 연설자나 토론자로 선임되었고, 연설 예정자가 다른 일로 불참할 때에는 연설을 대신하기도 했다. 토론의 주제에 따라 결론이 찬성쪽으로 나든 반대쪽으로 나든 이승만이 참가하는 쪽이 연설을 잘한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財政과 軍權을 남에게 맡기는 것은 곧 나라를 남에게 파는 것으로 결정함」(42회)이라는 주제의 토론에서 이승만은 본의와는 물론 다르게 반대쪽 연사로 토론을 했는데, 결론은 可便(찬성쪽)으로 결정되었으나 토론은 不便(반대쪽)이 잘한 것으로 판정된 것이 그러한 보기이다.1) 그것은 이승만의 웅변이 그만큼 뛰어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토론회 제목은 이 무렵의 외교현안이었던 러시아인 財政顧問과 軍事敎官의 철수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회보」 발행으로 協成會 급성장
 
 
  협성회 회원들은 자신들의 토론회가 회를 거듭할수록 사회적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토론회의 내용과 결과를 회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一般國民과 政府官僚들에게도 알릴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그리하여 제29회 토론회는 「우리 중에 일주일 간 會報를 발간함이 가함」이라는 주제를 두고 토론한 끝에 회보를 발간하기로 결정했다. 제33회 토론회는 「新聞局을 각처에 배설하여 인민의 이목을 넓힘이 가함」이라는 주제로 新聞의 중요성을 더욱 폭넓게 토론하고 있다.
 
  신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開化派 知識人 사회에서 보편화하고 있었다. 독립협회도 1897년 12월의 토론회에서 「인민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을 열리고 밝게 하려면 본 나라와 다른 나라들의 신문지를 널리 발표하는 것이 제일 긴요함」이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고 있다.2) 국내신문뿐만 아니라 외국신문들도 많이 보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898년 1월1일을 기하여 주간신문 「협성회회보」(당시의 표기는 「협셩회회보」)가 발간되었다.
 
  「회보」의 발행으로 토론회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토론의 주제는 2주일 전에 결정하고 「회보」에 1주일 전에 게재하여 회원들 모두가 사전에 주제를 알도록 하고, 또 토론회가 끝난 다음에는 그 결과를 보도했다. 이렇게 하여 회원들도 급속히 불어나 3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협성회회보」 창간호에는 회원 138명의 이름과 준회원격인 「찬성원」 54명의 이름이 실려 있는데, 찬성원 가운데에는 安昌浩의 이름도 보인다. 찬성원은 배재학당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서 협성회의 취지에 찬동하여 가입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 安昌浩는 서울의 救世學堂(구세학당: 원두우학교)을 졸업하고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여 독립협회의 평양지회 결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9명의 편집진, 韓國政府의 각 부 연상시켜
 
 
  「협성회회보」의 발행에 대해 아펜젤러가 발행하던 영문잡지 「코리언 리포지터리」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는 것은 주목된다.
 
  〈새해 들어 서울에 또 하나의 새로운 週刊新聞이 나타났다. 배재학당의 협성회는 200여 명의 회원들 사이의 유대를 더욱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소형의 주간신문을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에서 발행되는 모든 신문들이 외국인의 지원과 감독을 받고 있으나, 이 신문은 오로지 한국인의 손에 의해 발행되었다. 이 신문의 이름은 「협성회회보」이다. 신문은 모두 4면으로서 규격과 모양은 「대한크리스도인회보」와 비슷하다. 1면에는 일반적인 사안과 당면 문제에 대한 편집자의 논설을 싣고, 2면과 3면에는 국내외 뉴스, 그리고 4면에서는 주로 사회의 관심사를 다루었다. 편집진은 아홉 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韓國政府의 각 부를 연상시킨다>3)
 
  이 기사에서 언급된 편집진 아홉 명이 누구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협성회회보」에는 이승만과 함께 崔炳憲(최병헌), 辛龍鎭(신용진), 이익진, 吳兢善(오긍선), 洪正厚(홍정후), 김만식이 기명논설을 썼는데, 이들은 다 편집진이었을 것이다. 회보의 총책임자는 물론 협성회 회장이었고, 창간 당시에는 李益采(이익채)가 회장이었다. 회장과 별도로 신문을 전담하는 會報長을 두고 梁弘默(양홍묵)이 회보장을 맡았다. 이들을 합하면 모두 아홉 명이다. 이 무렵 정부의 대신이 아홉 명이었는데,4) 「협성회회보」 편집진이 아홉 명이라고 해서 「코리언 리포지터리」가 정부의 각 부를 연상시킨다고 한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협성회회보」 창간호의 「논설」은 학생신문답게 먼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서 「회보」 발간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우리가 지금 배운 학문이 넉넉해서 전국 동포를 가르치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오늘날 천은을 입어 학교에서 몇 해씩 공부를 하는 고로 혹 깨달아 아는 것이 더러 있는지라. 우리 배운 대로 유익한 말이 있으면 전국 동포에게 같이 알게 하고, 또한 우리의 작은 정성으로 전국 동포를 권면하여 서로 친목하고 일심으로 나라를 위하고 집안을 보호하여 가자는 주의라.…〉5)
 
  이러한 구절은 협성회 회원들이 얼마나 엘리트 意識과 使命感에 차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협성회회보」는 協成會의 기관지이기는 했으나 편집체제와 내용은 완전히 一般綜合紙였다. 실제로 발간 취지도 일반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음은 다음과 같은 「논설」로도 짐작할 수 있다.
 
  〈한 번 발간하기에 십여원씩 밑져 가며 이 회보를 발간하는 것은 전국 동포의 이목을 열어 내외국 형편이 어떻게 될 줄을 대강 알게 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가 일심 협력하여 우으로 임금과 나라를 받들고 아래로 우리 동포의 집안들을 보호하여 가자고 발론하여 시작한 것이러니 …〉6)
 
  이러한 발간취지는 「독립신문」의 그것과 흡사한 것이었다. 한글전용을 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체제도 「독립신문」과 똑같이 1면에는 「논설」, 2면과 3면에는 「내보」와 「외보」를 싣고, 4면에는 협성회 소식인 「회중잡보」를 실었다. 이 「회중잡보」도 협성회의 당시 사회적인 비중으로 보아서 일반에게 뉴스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7) 그런데 「코리언 리포지터리」가 「협성회회보」를 한국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최초의 신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독립신문」의 발행인 徐載弼이 美國市民權을 가진 사람이고 한국정부의 지원을 받아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말일 것이다. 이승만은 「협성회회보」를 발행한 일과 관련하여 자서전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守舊派 政權 아래 8년 동안 新聞 없는 時代 겪어
 
 
  〈나는 몇몇 청년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신문을 시작했는데, 「협성회회보」는 한국사람들만으로 제작되는 신문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것이었다. 작은 신문이기는 했으나 나는 그 지면을 통하여 自由와 平等이라는 위험한 사상을 나의 힘을 다해서 역설했다. 아펜젤러씨나 그밖의 사람들이 내가 急進的인 行動을 계속하다가는 목을 잘리게 될 것이라고 여러번 충고해 주었으나 그 신문은 친러파 정부와 러시아 公使館의 威脅으로 생겨난 여러 가지 재난과 위험을 겪으면서도 계속 발간되었다〉8)
 
  이처럼 李承晩은 「협성회회보」를 완전히 자기가 주동해서 발행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는 친러파 정부와 러시아 公使館의 위협과 그에 따른 재난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명기하지 않았다.
 
  「협성회회보」가 창간될 때에는 서울에서 네 가지 신문이 발간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1895년 2월17일부터 발행하고 있던 「漢城新報」, 1896년 4월7일에 徐載弼이 창간한 「독립신문」, 그리고 기독교신문으로 1897년 2월2일에 아펜젤러가 창간한 「죠션크리스도인회보(The Christian Advocate)」(12월8일자 제45호부터 「대한크리스도인회보」로 改題)와 두 달 뒤인 4월1일에 언더우드가 창간한 「그리스도신문(The Christian News)」이 그것이었다. 일본 정부의 보조를 받아 발행되던 「漢城新報」는 대판 네 면 가운데에서 세 면은 한글, 한 면은 일본어로 발행하고 있었는데, 이 신문은 한국의 국체를 모독하는 글을 싣는가 하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고 있는 고종을 비웃는 글(동요)을 실어 한국 정부와 국민들을 격분시키기도 했다. 또한 이 「漢城新報」는 明星皇后(閔妃) 弑害를 모의한 일본인들의 비밀 본거지가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근대적 신문의 효시는 1883년(고종20) 10월1일(양력 10월31일)에 정부기관인 博文局에서 발행한 「漢城旬報」였다. 朴泳孝, 兪吉濬 등 개화당의 노력으로 탄생한 이 신문은 비록 정부가 발행하는 것이기는 했으나 國內外의 時事를 비롯하여 西洋의 新文化를 소개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이듬해에 일어난 甲申政變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다가 1885년 12월21일(양력 1886년 1월25일)에 속간되면서 열흘에 한 번씩 발행하던 것을 1주일에 한 번씩 발행하게 되어 제호도 「漢城周報」로 고쳤다.
 
  그러나 「漢城周報」도 발간된 지 2년 반 만인 1888년 6월6일(양력 7월7일)에 재정난으로 폐간되고, 그 뒤 수구파의 득세 속에서 8년 동안이나 신문 없는 암흑시대가 계속되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창간된 일본인들의 「漢城新報」가 얼마나 왜곡된 영향을 끼치고 있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독립신문」이 창간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독립신문」의 인기와 영향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서울의 官僚와 知識人들 사이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고 시골 장터에서까지 널리 읽혔다. 郡守가 장터에 사람을 모아놓고 글 잘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장꾼들에게 「독립신문」을 읽히어 들려주는 일도 있었다.9) 그리하여 한 부가 최소한 200명에게 읽혔다고 뒷날 徐載弼은 술회했다.10)
 
 
  「회보」 창간에 40전 기부해
 
 
  「협성회회보」는 이러한 「독립신문」을 의식하면서 제작되었다. 그런데 「독립신문」이 정부로부터 4400圓의 보조금을 받아 발간된 것11)과는 대조적으로 「협성회회보」는 순전히 회원들의 출연금과 유지들의 찬조금으로 발간되었다는 것은 특기할만하다. 「협성회회보」 창간호는 제호 바로 밑의 「논설」란 앞에 본문보다 훨씬 큰 2호 활자로 〈이 회보는 매 토요일에 한 번씩 발간하고, 파는 처소는 배재학당 제일방이오 값은 매장에 엽전 너 푼씩이니 사 보시기를 바라오〉라는 「광고」를 내고, 또 「회중잡보」란에는 〈1897년 12월30일까지 협성회에서 의연금 수입한 금액이 138원 11전이며 지출된 금액이 86원 7전으로서 현재 52원 3전 8리가 남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협성회는 기부금을 계속 모금했는데, 「협성회회보」 창간호에서 제12호(1898년 3월19일)까지 「회중잡보」란에는 기금 기탁자의 이름과 금액이 매호마다 기록되었다. 금액은 적게는 4전에서부터 많게는 2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1원 50전에서 2원까지의 비교적 액수가 큰 돈은 회원보다는 주로 협성회를 동정하는 찬성원이나 정부관료 등이 희사했다. 이승만은 40전을 기부했다.12)
 
  창간 때부터 논설과 그밖의 기사를 열심히 쓴 이승만은 「협성회회보」 3월5일자(제10호)에 「고목가」라는 시를 기고했다. 어려서 어머니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그의 詩作의 재능과 함께 時局觀을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Song of an Old Tree’라는 영문 제목까지 달아 놓은 것도 흥미있다.
 
  〈일. 슬프다 저 나무 다 늙었네
 
  병들고 썩어서 반만 섰네
 
  심악한 비바람 이리저리 급히 쳐
 
  몇백 년 큰 나무 오늘 위태
 
  이. 원수의 땃작새 밑을 쪼네
 
  미욱한 저 새야 쪼지 마라
 
  쪼고 또 쪼다가 고목이 부러지면
 
  네 처자 네 몸은 어디 의지
 
  삼. 버티세 버티세 저 고목을
 
  뿌리만 굳박혀 반근 되면
 
  새 가지 새 잎이 다시 영화붐 되면
 
  강근이 자란 후 風雨不巍(풍우불외)
 
  사. 쏘아라 저 포수 땃작새를
 
  원수의 저 미물 나무를 쪼아
 
  비바람을 도와 위망을 재촉하여
 
  넘어지게 하니 어찌할고〉13)
 
  이 詩는 뒤이어 여러 신문이나 잡지에서 유행하는 愛國詩의 효시였다. 그러나 「협성회회보」나 그것을 계승한 「매일신문」, 「독립신문」 등 당시의 신문에는 李承晩의 이 詩말고는 게재된 것이 없다. 이 詩에서 이승만은 大韓帝國을 고목에, 친러파 관료들을 땃작새(딱다구리)에, 러시아의 威脅을 비바람에, 獨立協會나 協成會와 같은 개화파 인사들을 포수에 비유했다.14) 러시아의 위협에 직면하여 조국의 운명은 생각하지 않고 저들의 앞잡이가 되어 날뛰는 관료들을 제거하고 대한제국의 기반을 굳건히 해야 한다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뒤에 이승만이 옥중에서 「제국신문」에 기고한 한 논설의 끝 부분에 이 古木歌를 인용하고 있는 것은 적이 의아스럽다. 「제국신문」의 논설은 〈고인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쪼고 쪼는 땃작새야 다 썩은 고목을 쪼고 쪼지 마라 일조에 풍우가 이르러 그 나무가 쓰러지면 너희가 어디서 깃들려고 하느뇨 하였으니, 짐승을 빗대어 한 말로 족히 사람을 가르치더라〉라고 끝맺고 있는데,15) 자신이 지은 시를 인용하면서 〈고인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이라고 했다면 아무리 修辭라고 하더라도 어이없는 작위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말 그대로 이 詩의 원전이 따로 있었는지 모른다.
 
 
  러시아의 絶影島 조차요구 비판한 최초의 論說
 
 
  「협성회회보」 1898년 3월19일자(제12호)에 실린 「논설」은 이승만이 기명으로 집필한 최초의 논설이었다. 내용은 러시아가 요구하고 있는 釜山 絶影島의 조차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三國干涉 뒤에 러시아는 절영도의 租借를 요구해 왔는데, 그것은 不凍港(부동항)을 얻기 위한 전통적인 남하정책의 일환인 동시에 일본의 大陸侵略을 저지하기 위한 거점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절영도는 1885년에 이미 각 외국 상민의 거류지로 내정된 뒤로 일본이 자국함대의 석탄 저장고로 사용하고 있었다.
 
  절영도 조차문제가 다시 거론된 것은 俄館播遷(아관파천)을 계기로 러시아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면서부터였다. 1897년 8월에 러시아 공사 웨베르(K. Waeber)는 한국정부에 절영도 조차를 요구했고, 웨베르의 후임으로 온 스페이에르(A. Speyer)도 10월에 같은 요구를 거듭해 와서 친러파 정부는 이를 허여하려고 했다.16) 그러나 이 요구는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한국민중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다. 1898년 2월21일에 國權守護와 內政改革을 강력히 촉구하는 상소를 올린 독립협회가 가장 먼저 문제 삼은 것도 이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였다.
 
  일주일 뒤에 열린 독립협회의 통상회는 임원 개선을 한 다음 새로 提議에 선출된 鄭喬(정교)로부터 절영도 조차문제에 대한 보고를 듣고, 그의 제안에 따라 이 문제에 대한 정부의 방침을 묻는 공한을 이튿날 외부에 발송했다. 독립협회는 러시아의 요구를 거절하기 위해서는 이미 허여된 일본에 대한 석탄고 기지도 철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3월 7일에 열린 독립협회의 특별회는 決死의 열의에 차 있었다. 이날 독립협회는 절영도 일본 석탄고 기지의 철거를 요구하는 공한을 외부에 발송했다.
 
  이승만의 논설은 이러한 상황에서 집필된 것이었다. 이승만은 논설에서 러시아가 요구하는 절영도의 조차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미 일본에 절영도 안에 석탄 저장고를 짓도록 허락했으므로 러시아에도 허락해야 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고 다음과 같이 논박했다.
 
  〈대저 대한정부에서 대한 땅을 가지고 임의로 하는 권리가 있은즉,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아니 주는 것이 정의에 고르지 못하다고는 할지언정 경계(經界:옳고 그름이 분간되는 한계)에 틀리다고 할 수는 없는지라. 또한 전에 어찌하여 일본에 땅을 좀 빌려 주었다고 동맹제국을 다같이 대접하자면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일본 제국을 다 공평히 빌려 주어야 할 터이니 삼천리 강산이 몇 조각이나 남겠으며, 겸하여 그 후에는 세계 각국이 다 토지를 바라고 대한과 통상약조를 청할 터이니, 누구와는 약조하고 누구와는 아니하면 또 공평치 못하다 할 터인즉, 동서 칠십여국을 무엇을 가지고 고루 정답게 대접하리오.…〉
 
  또 땅을 아주 할양하라는 것이 아니라 조차하자는 것이므로 괜찮지 않느냐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재치 있는 비유로 비판했다.
 
  〈땅을 아주 주는 것이 아니라 빌리는 것인즉 관계치 않다고 하니, 이는 전국을 다 주어도 빌리는 것인즉 관계치 않다 하는 말이라. 만일 남이 나와 정있다고 내 물건을 달라는 사람은 내 친구가 아니라 곧 나를 꾀어 물건을 탈취하자는 도적이라. 내것이 다 없어져서 더 가져갈 것이 없기까지만 정다운 친구이니 그런 친구는 없느니만 못한지라.…〉
 
  그리고 연전에 일본에 조차해 줄 때에는 말이 없다가 러시아가 요구하자 이를 문제삼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느냐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연전에는 우리가 적연(寂然)히 몰랐고 지금인들 정부에서 특별히 백성에게 광고하여 우리를 알게하여 준 것은 아니로되, 요행히 황천이 묵우(默祐:말없이 도움)하심을 힘입어 국중에 신민이 생긴 후로 그 중에서 새로 배운 것도 많거니와, 첫째 내 나라 정부 시세와 국중 소문과 외국 형편을 소상히 알아 상하 원근이 정의를 상통하여 각히 이산(離散)한 마음이 적이 합심할 만하게 된지라.…〉
 
  그래서 문제를 삼게 된 것이므로 불공평 문제와는 관계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국민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우리가 특별히 국은(國恩)을 남보다 더 입어 독히 충성이 갸륵하다는 것이 아니라, 일을 알고 본즉 진실로 애닯고 원통한 중 당초에 우리가 내 나라 일을 남의 일보듯 하는 까닭에 이런 일이 생겼은즉, 다만 말로만 시비할 뿐 아니라 장차 목숨을 결단코 이런 일을 눈으로 보지 않기로 작정할지라. 그런즉 우리가 암만 말하여도 실효가 없으니 말하는 우리나 말 아니 하는 남이나 조금치도 다른 것이 없다 할 듯하나, 말만 하여도 국중에 백성이 있는 것을 보임이요, 또한 전국 백성이 우리와 같이 일심으로 한 마디씩 반대할 만하게 되었으면 당초에 남의 토지를 달라고 할 리도 없거니와 설사 달라고 하더라도 그 동안 대한 일천이백만명 백성 중에서 무슨 거조(擧措:무슨 일을 꾀하거나 처리하기 위한 조치)가 있을는지 모를지라.…〉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훈계조의 말로 논설을 끝맺었다.
 
  〈그런 고로 지금 우리가 내 물건 달라는 친구를 시비함이 아니라 이 백성 중에 몰라서 아는 체 못 하는 자와 알고도 모르는 체 하는 자에 죄와 책망이 더 큰지라. 우리는 바라건대 우리 동포들은 무론 모사하고 대한 일이라 하거든 다만 내 나라 일로만 알 것이 아니라 내 집안 일로 아시고 각자 생각가는 대로 서로 모여 쓸데없는 공론과 시비라도 좀 하여보시오.〉17)
 
  大韓의 일이라 하거든 「내 나라 일」로만 알 것이 아니라 「내 집안 일」로 여기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그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國家보다는 家門을 훨씬 더 소중히 생각하는 일반적인 가치관을 의식한 말일 것이다.「협성회회보」에 게재된 모든 논설들이 모두 조금은 훈계조이기는 했으나 그 중에서도 이승만의 이 문투는 유별나다. 우리는 이러한 문투에서 이른바 대중 강요자형 정치가18)로 성장하고 있는 그의 풍모의 편린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적 우월감에서 자칫하면 페단티즘에 빠지기 쉬운 젊은 나이에 이처럼 쉬운 말로 대중을 설득하는 문장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李承晩의 또 다른 재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앞서 3월10일에는 독립협회 주최로 종로에서 러시아인 度支部顧問 및 敎鍊敎官의 해고와 절영도 조차요구를 거절할 것을 촉구하는 대규모의 萬民共同會가 열렸고 이승만은 이 집회에서 연설을 했는데, 위의 논설은 아마 이때에 한 연설의 내용이었을 것이다.19)
 
 
  구독자에게 배달도 처음
 
 
  협성회는 「협성회회보」의 발행과 보급에 매우 열성적이었다. 「협성회회보」 1월 15일자(제3호)의 「회중잡보」에는 〈회원은 회보를 친히 찾아다 보고 그외 회보 보는 사람에게는 갖다 주기로 작정되었더라〉는 기사가 눈에 띄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구독자들에게 배달까지 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회보제작을 맡은 임원들은 매 수요일 오후 6시30분에 모임을 가졌고 회보는 토요일의 토론회에 맞추어 발행되었다. 수요일의 모임은 기사마감과 다음호 편집회의를 위한 모임이었을 것이다. 이 모임에 빠지는 사람에게는 벌금 30전을 물리고, 세 번을 빠지면 회원에서 제명하기로 결의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은 이승만을 비롯한 「협성회회보」 제작진이 얼마나 열성적이었는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1월30일자(제5호)부터는 「광무 이년 일월 이십륙일 농샹공부 인가」라고 제호 바로 밑에 정부의 인가를 받은 정식 신문임을 밝히고 있다.
 
  「협성회회보」가 사회적으로 큰 호응을 얻자 협성회는 마침내 야심적인 日刊紙 발행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협성회회보」를 창간하고 석 달도 되지 않은 때였다. 협성회는 3월19일의 토론회에서 「일주일 간에 한 번씩 내는 회보를 매일 한 번씩 발간하자고 작정」 했다.20) 그리하여 「협성회회보」는 4월2일자로 발행된 제14호를 마지막으로 하고, 제15호 발행 날짜인 4월9일부터 우리나라의 첫 일간지인 「매일신문」(당시의 표기는 「일신문」)이 창간된 것이다. 그때까지 「독립신문」은 주 3회 발행되고 있었다. 「매일신문」은 창간호 「논설」에서 창간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 협성회 회원들이 일심 합력하여 금년 정월 일일부터 매 토요일에 일차씩 회보를 발간하여 지나간 토요일까지 십사호가 났는데, 대략 본 회중 사무와 내외국 시세 형편이며 소문 소견에 학문의 유조할 만한 것을 기재하여 국가 문명 진보에 만분지 일이라도 도움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회원들의 극진한 성의로 지금 이 회보가 거의 천여 장이 나가니, 우리 회보 보시는 이들에게 감사함을 치하하는 중, 일주일에 한 번씩 내는 것을 기다리기에 매우 지리한지라. 회원중 유지각하신 몇몇 분이 특별히 불석신고(不惜辛苦)하고 열심으로 주선하였거니와 병(竝)하여 회원들이 일심으로 재력을 모아 오늘부터 매일 신문을 내는데, 내외국 시세형편과 국민에 유조한 말과 실적한 소문을 많이 기재할 터이니…〉21)
 
  그러면서 이 「논설」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일간지를 발행하게 된 것을 다음과 같이 자부하고 있다.
 
  〈대범 서양제국서는 국중의 신문 다소를 가지고 그 나라 열리고 열리지 못함을 비교하거늘 돌아보건대 우리나라에 신문이 얼마나 되느뇨. 과연 부끄러운 바라. 만행으로 「독립신문」이 있어 영자로 발간하매 외교상과 나라 권리 명예에 크게 관계되는 영광이라. 그외 「한성신보」와 두세 가지 교중(敎中) 신문이 있으나 실상은 다 외국사람의 주장하는 바요, 실로 우리나라 사람이 자주하여 내는 것은 다만 「경성신문」과 우리 신문 두 가지뿐인데, 특별히 매일신문(일간신문)은 우리가 처음 시작하니 우리나라 사천년 사기(史記)에 처음 경사라, 어찌 신기하지 않으리오. 아무쪼록 우리 신문이 문명 진보에 큰 기초가 되기를 우리는 간절히 바라노라〉22)
 
  그러면서 「논설」은 이러한 일간지를 발행하는 자신들의 포부를 〈우리 회원이 일심 충성하는 지극한 충성의 간담을 합하여 이 신문상에 드러내노라〉23)하고 패기에 찬 말로 천명했다. 이 「논설」은 이승만이 직접 집필한 것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의 주장을 많이 반영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어 4월12일자(제3호) 「논설」은 두 면에 걸쳐 신문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이 「논설」은 〈신문이라 하는 것이 나라에 크게 관계가 되는 것으로 세 가지 목적이 있으니 첫째 학문(學問)이요, 둘째 경계(經界)요, 셋째 합심이라…〉고 전제하고 그 세 가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는데, 첫째의 학문이란 신문의 啓導(계도)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고, 둘째의 경계는 批評과 告發의 기능, 셋째의 합심은 國民的 統合의 기능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이승만을 비롯한 협성회 간부들이 신문의 기능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투철했는지를 말해준다.
 
 
  〈새 韓國의 실질적인 탄생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이 「매일신문」의 창간 경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는 것은 「협성회회보」의 논지와 관련하여 아펜젤러 등 배재학당의 경영진과 협성회 간부들 사이에 알력이 없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나는 배재학당에서 다른 학생들과 「협성회회보」를 시작하였고, 그 주필이 되었다. 작은 학생 신문이 정부고관들을 비판하게 되자 곧 세상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아펜젤러 교장은 우리들에게 논설을 검열받으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 신문으로는 발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독립정신이 강한 柳永錫과 나는 학교를 나와서 한국 최초의 일간지를 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우리더러 외국의 보호를 받지 않고 그런 신문을 발간하면 위험하다고 했으나 「매일신문」은 아주 호평을 받게 되어, 徐載弼 박사는 우리 신문 때문에 자기의 신문(독립신문)을 팔 수 없다고까지 하게 되었다〉24)
 
  올리버와 徐廷柱는 다 같이 이때의 일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으나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 「협성회회보」의 비판을 못마땅하게 여긴 정부가 아펜젤러와 알렌 공사를 통하여 압력을 행사하고 그래도 듣지 않자 그 신문을 폐간시켰다는 등의 내용이 그것이다. 이는 「매일신문」을 발행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이승만의 과장된 기억에 따른 것일 것이다. 그만큼 이승만은 「매일신문」 창간한 일을 생애를 두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올리버가 「매일신문」의 발행과 관련하여 〈그(이승만)의 주제는 政府와 社會의 改革을 위한 정열적이고 반복적인 요구였다. 이 작은 신문은 새 韓國의 실질적인 誕生이었다. ──그것은 곧 이승만의 정치경력의 참된 시작이었다〉25)고 적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이승만은 귀국한 직후인 1945년 10월23일에 열린 全朝鮮新聞記者大會, 11월28일에 貞洞禮拜堂에서 있었던 임시정부영수 환영회 등에서 50년 전에 「매일신문」을 발행했던 일을 자랑스럽게 회고하고 있다.26)
 
  그런데 배재학당 안에 있는 三文出版社의 활판을 이용하여 주간으로 찍어내던 「협성회회보」를 학교를 나와 일간지로 발행하면서 어떻게 「협성회회보」의 발행 예정 날짜에 맞추어 「매일신문」을 창간할 수 있었는지는 퍽이나 궁금한 일이다. 협성회가 일간지를 발행하기로 결정한 것이 3월19일인데, 20일 뒤인 4월9일에 「매일신문」이 다른 인쇄시설을 이용하여 창간되었다는 것은 그 전에 별도의 준비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위에서 본 대로 이승만은 자서전 초고에서 柳永錫과 함께 학교를 나와서 「매일신문」을 발행했다고 했는데, 이 무렵 유영석은 협성회 회장이었다. 유영석은 「협성회회보」를 창간한 1월부터 「협성회회보」와는 별도로 일간신문 발행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內部 主事를 역임하고 독립협회에 참여하면서 以文社라는 인쇄소에 관여하고 있던 李鍾一의 회고록인 「沃坡備忘錄」(옥파비망록)에 유영석이 찾아와서 신문발행을 제의했다는 기록이 보인다.27)
 
  이 「비망록」에 따르면 이종일과 유영석은 이문사 관계자인 李鍾冕(이종면), 李鍾文(이종문), 張孝根(장효근) 등과도 신문발행 문제를 논의했다. 이문사는 元山港 지사 겸 德源군수를 역임한 재력가 金益昇(김익승)이 일본에서 수입한 활판인쇄기를 가지고 1896년 말경에 설립한 인쇄소였다. 이 이문사와 협성회의 합작으로 「매일신문」의 발행이 가능했던 것이다.28) 이문사에서 인쇄시설과 함께 300환의 운영자금을 「매일신문」에 투자했다는 기술도 있다.29) 뒷날 「제국신문」은 「매일신문」을 창간할 때에 유지 인사들이 300원을 연조하여 그 돈으로 이문사 활판을 세내었던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30) 그리고 李承晩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이때에 활판인쇄기를 가지고 있던 金益昇은 重慶臨時政府 副主席이었고 解放 뒤에 立法議院 의장이 된 金奎植의 四寸이었다.31)
 
  이러한 경위를 거쳐 어렵게 이문사의 활판인쇄기를 확보한 협성회 임원들은 남대문 안 싸전 도가하던 집을 빌리고 인쇄기를 옮겨 「매일신문」을 발행하게 된 것이었다.
 
  「협성회회보」가 「매일신문」으로 바뀌면서는 협성회와는 별도로 신문사 조직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내 경영과 제작 주도권 문제와 관련한 사내 분규가 일어나 제작진의 변동이 잦았다. 창간되고 사흘 뒤인 4월12일자(제3호) 「매일신문」의 「협성회 회중잡보」란에는 〈이 신문 사장은 본회 회장이 예겸할 줄로 작정되었더라〉고 하여 협성회 회장이 「매일신문」 사장을 겸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매일신문」 창간 당시의 협성회 회장은 柳永錫이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5월14일(토)에 열린 협성회 통상회의는 李承晩을 회장, 梁弘默을 부회장으로 선출하고, 협성회의 기금 60원을 매일신문사로 넘겨주기로 의결했다.32) 그런데 李承晩이 협성회 회장이 되었으므로 당연히 社長을 겸해야 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5월21일자 「매일신문」에는 편집인 崔廷植, 저술인 李承晩, 발행겸 인쇄인 柳永錫이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이 이상하다. 최정식은 협성회의 「찬성원」이었으나 獨立協會 활동에도 열성을 보인 과격한 성품의 사람이었다. 그랬다가 1주일 뒤인 5월27일자에야 회장인 이승만이 社長과 記載員(記者 내지 主筆)을 겸한다는 기사가 실렸다.33)
 
 
  러시아와 프랑스의 利權要求 비판
 
 
  이승만이 협성회 회장이 되고 나서 사흘 뒤인 5월16일자 「매일신문」은 1면 전면과 2면에 걸쳐 러시아와 프랑스가 韓國政府에 利權을 요구한 외교문서의 내용을 폭로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國家機密과 국민의 알 權利의 마찰이라는 언론의 본질적인 논제의 하나가 한국 언론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요구는 목포와 진남포 조계지에 인접한 사방 10리 안의 땅을 섬들까지 빼지 않고 사겠다는 것이었고,34) 프랑스의 요구는 평양의 석탄광산을 채굴하여 京義線 철도 부설공사에 사용하겠다는 것이었다.35) 프랑스는 이미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획득해 놓고 있었다.
 
  「매일신문」은 이러한 사실을 폭로하면서 기사 끝머리에 다음과 같은 선동적인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 말을 들음에 치가 떨리고 기가 막히어 분한 마음을 억제할 수 없는지라. 우선 기재만 하거니와 이는 참 대한 신민의 피가 끓을 소문이라. 대소 인민 간에 대한의 신민된 이들이야 이런 소문을 듣고 잠시인들 어찌 가만히 앉았으리오. 우리 동포들은 일심으로 발분(發憤)하여 속히 조치할 도리를 생각들 하시오.〉
 
  이러한 폭로와 선동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매일신문」의 이 기사는 李承晩이 취재하여 쓴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문제에 대한 獨立協會의 격렬한 反對運動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이 기사가 보도된 것과 같은 날인 5월 16일에 독립협회는 회의를 소집하고 이승만, 鄭恒謨(정항모), 박치훈 세 사람을 총대위원(대표자)으로 지명하여 外部에 사실의 전말과 그에 대한 대책을 묻는 강경한 편지를 써 보냈다.36)
 
  이 기사는 당장 외교문제로 비화했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이권요구 사실은 「漢城新報」에도 보도되었는데, 그것은 일본인들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었다. 러시아公使 마튜닌(N. Matunine)은 그날로 「매일신문」과 「漢城新報」를 첨부한 조회공문을 외부에 보내어 外交機密이 누설된데 대하여 항의하면서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요구했고,37) 프랑스 公使 플랑시(V.Collin de Plancy)는 관련자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조회공문을 보냈다.38)
 
  그리하여 外部에서는 이튿날 「매일신문」의 사원 한 사람을 소환했다. 이때에 외부에 소환되었던 사원이 누구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그 사원은 이승만이었을 것이다. 전날 독립협회의 총대위원으로 外部를 방문했던 이승만은 「매일신문」 사원으로서 다시 外部에 소환되어 간 것이었다.
 
  외부의 관리들은 이승만에게 「매일신문」이 정부가 외국과 비밀로 공문 거래하는 일을 신문에 기재하여 반포함으로써 중대한 公事가 부질없이 누설될 염려가 있다고 항의했다. 양국 공사관에서 조회한 내용이 신문에 보도된 데 대해 양국 공사가 무수히 힐문하므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외부관리들의 이러한 지적에 대해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반박했다.
 
  『大臣이 외국사람이 아니고 外部가 외국관청이 아니거늘 나라 일을 外國 公領事와는 몰래 의논하면서 그 백성을 모르게 할 이유가 어디 있소? 이같이 어려운 때에 나라를 위해 일을 하면서 이만한 일을 어렵다고 하면 설령 남이 군사를 내어 나라를 침노하면 國家를 위해 의리로써 죽으려는 생각이 어떻게 나겠소? 또한 신문 때문에 괴로운 일이 있다고 나를 불러가지고 걱정으로 말씀하시니, 우리가 新聞을 나라를 위하지 말고 外國을 도와 말을 해야 옳단 말이오!』
 
  그러자 외부의 관리들은 한발 물러섰다.
 
  『우리가 「매일신문」을 책망하자는 것이 아니라 당장 두 공사관에 회답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의논하고자 불렀을 뿐이오』
 
  이승만은 『이렇게 말하면 될 것 아니오』하고 외부의 관리들에게 설유조로 말했다.
 
  『우리는 大韓臣下요 신문기자는 대한의 백성인즉 大韓土地는 신하와 백성이 같이 관계되는 일이니, 우리가 新聞社에 알렸든지 신문사에서 탐지하여 냈든지 다 내 나라를 위하여 하는 일이니 臣民 간에 자기 나라를 위하여 하는 일을 貴公使가 말라고 할 권리가 없다, 하고 말이오!』
 
  젊은 李承晩의 이러한 설유조의 반론을 듣고 있는 外部 관리들의 표정이 어떠했을지는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매일신문」 5월20일자 「논설」은 이 사원 소환 사실을 보도하면서 위의 대화내용까지 소상히 소개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고 있다.
 
  〈(외국 외교관들이) 아무리 나라를 위하더라도 남의 땅을 공문을 가지고 사려함도 공법(公法)에 보지 못한 말이오, 백성이 저희 나라를 위한다고 벌주라고 하는 것도 공문 거래상에 못할 말이라. 지금 대한에 관인과 백성이 이만치라도 열려 가는 모양이니, 외국친구들은 대한을 좀 달리 대접하여 교제상에 서로 정의있게 지내어 가기를 우리는 힘써 바라노라〉39)
 
  러시아 公使는 19일에 다시 「매일신문」이 러시아 士官을 모함했다면서 18일자 「매일신문」을 첨부하여 항의하는 조회공문을 외부에 보냈다.40) 「매일신문」은 5월7일자, 11일자, 18일자 세 차례에 걸쳐 元山에서 있었던 러시아 士官의 행패와 이를 규탄하는 주민들의 동향을 잇달아 보도했었다. 5월7일자 기사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원산항에서 러시아 사관이 대한 사람 둘이 자는 것을 죽인 까닭에 항구 백성 수천명이 감리영을 에워싸고 원수갚아 달라고 소동이 대단하다고 전보가 왔다니 우리 듣기에 이런 놀라운 일이 없는지라. 다시 탐문하여 자세히 속보하려 하거니와 그 항구 백성들은 참 동포의 의를 이같이 생각하고 일심으로 보수(報♥)하려 함은 진실로 고마운 일이라. 들으니 감리사가 그 소동된 백성들을 정돈하려고 매우 애를 쓴다니, 이 일을 속히 조처하여 백성의 마음들만 상쾌하게 하여 줄 것 같으면 소동은 자연 정돈될러라〉41)
 
  또한 러시아 公使가 새로 문제삼은 18일자 기사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러시아 사관 둘이 하사와 병정 약간 명과 통사(통역) 등을 데리고 함경북도로부터 들어온단 말은 이미 기재하였거니와, 또 들은즉 그 사관들이 원산항에 이르러 감리영(監理營)에 방 하나를 빌어 있는데, 저희 나라 국기를 꽂음에 감리사가 말하기를 남의 나라 공해에 국기를 함부로 꽂는 것은 공법에 마땅치 않은 일이라고 금단하여도 그냥 꽂음에 그 일로 서울 있는 러시아 공사한테 조회하였더니, 해당 공사도 그 일이 마땅치 않은 줄로 말하여 그 사관들이 지금은 감세관리의 집에 나와 있는데, 국기는 여전히 꽂고 있음에 그 주의를 알지 못할 일이라고 한다더라〉42)
 
  한편 협성회는 5월23일에 특별회의를 소집하여 프랑스 공사가 기재원의 처벌을 요구해온 문제를 논의한 뒤 梁弘默 등 다섯 사람을 총대위원으로 선정하여 외부 대신에게 편지를 써보내기로 결의했다.43) 이에 따라 양홍묵 등은 25일에 외부 대신 趙秉式에게 편지를 보내어 만일 「매일신문」기재원이 죄가 있거든 依律懲治(의률징치:의법처단)하고 죄가 없으면 프랑스 공사에게 죄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어 양국 교제상 體禮(체례)에 서로 손상이 없게 하라고 촉구했다.44)
 
  러시아와 프랑스의 公使들과 韓國政府 사이의 조회 공문은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오갔다. 프랑스 공사는 외교공문이 신문에 게재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앞으로는 공문용어를 漢文으로 번역하지 말고 프랑스어로만 사용하자고 제의하기도 했다.45)
 
  한국정부와 은밀히 교섭하여 이권을 챙기려 했던 열강에게 「매일신문」은 여간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신문」이 이때의 상황을 〈외국 공영사도 이 무세(無勢)한 종이조각을 꺼리기를 군사 몇만 명보다 어렵게 여기고…〉46)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정부와 러시아 및 프랑스는 마침내 당초의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언론과 독립협회의 외교적 승리였다.
 
 
  한국 최초의 언론법 新聞紙條例 제정
 
 
  이때의 러시아 公使의 항의 조회에는 신문을 규제할 법을 제정하라는 요구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10월에 이르러서는 日本 公使 가토 마스오(加藤增雄)도 주한 외교사절 대표자격으로 外交文書를 신문에 보도하지 못하게 하라는 조회를 外部에 보내왔다. 그리하여 신문관계법의 제정문제는 한국정부 안에서 논의가 계속되다가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난 직후인 1899년 초에 한국 최초의 언론법인 新聞紙條例47)가 제정되었다. 말하자면 李承晩이 러시아와 프랑스의 비밀 외교문서를 폭로한 것이 新聞紙條例를 제정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신문지조례는 시행되지 않은 채 폐기되고, 1907년에 가서야 흔히 「光武新聞紙法」으로 일컬어지는 新聞紙法이 제정되었다.
 
  「매일신문」이 일간으로 발행된 것은 다른 신문에도 큰 자극이 되어 「독립신문」도 7월1일부터 일간으로 발행되었고, 뒤이어 8월10일에는 「제국신문」이, 9월5일에는 「皇城新聞」이 일간 신문으로 창간되어 마침내 한국에도 일간 신문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곧 사내 분규로 「매일신문」사의 사장 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승만이 사장과 기재원을 겸임하기로 되었다는 보도가 나가고 사흘 뒤인 5월30일자(제44호)와 31일자(45호) 「매일신문」에 연달아 協成會에 긴급한 일이 있어서 31일 오후 4시에 부회장 梁弘默의 집에서 특별회의를 개최한다는 공고가 났다.48) 그리고 6월4일자(제49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 전 화요일 특별회에 회원들이 모여 난상히 의론하고 매일신문사를 본회 회원중으로 고본금(股本金)을 수합하여 회사로 조직하고 사장은 양홍묵씨요, 기재원은 최정식 이승만 두씨를 인용하고, 회계는 유영석 박신영 두씨로 정하고, 간독(看督)은 현제창 현덕호 두씨로 작정되다〉49)
 
  말하자면 협성회 회장과 「매일신문」 사장 자리가 분리된 셈이었다. 그리고 협성회 회원들 사이에서 고본(주식)을 모아 신문사를 회사 체제로 개편한 다음 사장에 양홍묵을 선출하고 기존의 직책 이외에 회계와 간독을 추가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장 겸 기재원이었던 이승만은 기재원으로서 제작에만 관여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특별회의는 양홍묵의 개인 집에서 열린 것으로서 정상적인 회의였다고는 볼 수 없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기존 제작진의 입장은 7월7일자(제77호) 「매일신문」에 실린 장문의 「샤중고백」에 표명되어 있다. 이 「고백」은 活版과 會計의 책임을 맡은 유영석의 부탁으로 기재원 최정식이 內部大臣으로부터 13도에 구독을 권유하는 公札(공찰)을 받아냈고, 이에따라 신문 발행부수가 1000여 장이 늘어나자 〈몇몇 사람이 나서서 본회를 배반하여 신문회사라 칭하고 사장이니 간독이니 내어 그 사업하여 놓은 것을 은근히 그 권리를 앗으려 하는 까닭에〉 분란이 생겼다고 말하고 있다. 협성회 회장이 겸하는 사장직을 양홍묵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탈취했다고 비난한 것이다.
 
 
  〈기재원 이승만씨가 유고하여…〉
 
 
  그러나 이튿날 신문에는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근일에 기재원 이승만씨가 유고하여 최정식씨로 잠시 대리하였더니〉 허위 사실을 기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신문」은 협성회 회원이 회사를 조직하여 발행하는 것이 규칙인데 유영석과 최정식이 〈회원 밖의 사람을 부동하여 본사 제원(諸員)을 도리어 내어 보내고 신문을 독(獨)히 주장하여 발간하려 하니〉 본사 규칙에 위배되므로 解任한다고 했다.50) 그런데 이보다 앞서 6월 23일자에 기재원 최정식이 물러나고 尹夏榮(윤하영)이 그 후임이 되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기존 제작진과 새로 구성된 임원들 사이의 마찰이 신문사 안에서 계속되고 있었던 것 같다.
 
  유영석, 최정식과 함께 「매일신문」의 제작에 열중했던 이승만이 내분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7월8일자(제78호) 기사에 〈기재원 이승만씨가 유고하여…〉라고 하고 있는 대목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알 수 없다. 내분은 經營權과 新聞製作의 주도권을 둘러싼 싸움이었는데, 以文社 쪽과 연계되어 있는 李承晩, 柳永錫, 崔廷植 등이 양홍묵 그룹을 신문제작에서 배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던 것으로 짐작된다. 위의 「샤중고백」은 〈우리 몇몇 사람이 이 일을 주장하여 수삭을 지내는 바 한 달에 몇백원씩 밑져 들어가는 고로 한 사람도 찾아와 걱정하는 것을 볼 수 없이 남의 일 보듯들 하니〉 하고 양홍묵 그룹을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양홍묵 그룹이 신문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 협성회 회장인 李承晩이 崔廷植하고만 의기투합하여 배재학당의 같은 교사이면서 아홉 살이나 연장인 부회장 梁弘默을 신문제작에서 소외시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타협과 양보를 하지 않고 따라서 반대자나 도전자를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同志들 사이에 크고 작은 분란을 야기시키고 그 자신에게도 많은 고통과 不利益을 초래하는 李承晩의 자기 중심적인 행동의 첫 사례였다.
 
  1897년 7월에 독립협회의 委員으로 선임되었던 양홍묵은 1898년 3월에는 새로 마련된 司法委員 서기에 선임되는 등으로 독립협회 활동에도 열성을 쏟고 있었다. 그리하여 7월16일에 열린 협성회 통상회의는 〈매일신문사를 다시 조직한 일로 임원을 다시 선정했다〉면서, 사장 1인, 총무원 1인, 기재원 2인, 회계 2인으로 정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새로 선임한 사람들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51)
 
  이승만은 회장으로서 마땅히 이때의 통상회의를 주재하는 입장에 있었는데, 회의에 참석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다시 1주일 뒤인 7월23일의 통상회의에서는 회장 이승만을 黜會(출회:제명) 조치하고, 부회장 양홍묵은 의원 사임했다. 새 회장에는 韓致愈(한치유), 부회장에 尹昌烈(윤창렬)이 선출되었다.52) 이승만과 양홍묵은 「매일신문」 내분의 양쪽 책임자로서 인책된 것이었을 것이다.
 
 
  「일일신문」에서 「제국신문」으로
 
 
  「매일신문」의 내분은 마침내 신문사의 분립을 가져왔다. 역사적인 일간지로 창간을 한 지 석 달 만의 일이었다. 「매일신문」에서 해임된 유영석과 최정식이 이문사로부터 세내었던 주자와 기계 등의 인쇄시설과 「매일신문」의 사옥을 장악하고 7월10일경부터 「일일신문」이라는 신문을 발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승만도 「일일신문」 제작에 참여했을 것이다.53) 이들이 인쇄시설과 사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처음에 이문사로부터 인쇄시설을 임대할 때에 협성회 회장이던 유영석과 서기이던 김연근의 명의로 임대했기 때문이다.
 
  「일일신문」의 발간에 대해 「독립신문」은 〈일일신문이 또 발간이 되었으니 세상에 유익할 일을 우리는 기약하노라〉 하고 보도하고 있다.54) 한편 「매일신문」은 7월9일부터 휴간하고 사옥을 전 선혜청 앞 균역청 도가였던 집으로 옮겨 18일부터 속간했다. 뒤이어 「매일신문」과 협성회가 주자와 기계를 소유주 金益昇으로부터 사서 가져가 버리자 「일일신문」 쪽에서 소송을 제기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7월22일에 열린 재판은 「일일신문」의 승소로 끝나 주자와 기계는 「일일신문」이 도로 찾아왔다.55)
 
  그리하여 「매일신문」은 8월21일부터 열흘 동안 다시 정간했다가 사옥을 남대문 안 大平洞(대평동)의 전 西署(서서)였던 집으로 옮겨 8월10일부터 속간했다. 인쇄시설을 되찾은 「일일신문」은 그러나 몇 호 발행되지 못하고 중단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 인쇄시설을 이용하여 「제국신문」(당시의 표기는 「뎨국신문」)이 창간되었기 때문이다.
 
  「제국신문」은 「매일신문」이 속간된 8월 10일에 창간되었다. 「제국신문」을 처음 준비한 사람들은 「매일신문」 창간에도 참여했던 以文社그룹이었는데, 이들 新興商工業者들은 4000~5000원의 자본56)으로 경영을 맡고 독립협회에 참여하고 있던 李鍾一, 李承晩, 柳永錫 세 사람이 편집을 맡는 형태로 출발한 것이었다. 以文社 명의로 신문발간 인가를 받은 다음 사장은 李鍾一이 맡았고, 李承晩은 主筆로서 주로 「논설」을 집필했다.57)
 
  「제국신문」은 창간사격인 「고백」에서 다음과 같이 발간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본사에서 몇몇 유지한 친구를 모아 회사를 조직하여 가지고 새로 신문을 발간할 새 이름을 제국신문이라 하여 순국문으로 날마다 출판할 터이니, 사방 첨군자(僉君子)는 많이 주의들 하여 보시오.
 
  대개 제국신문이라 하는 뜻은 곧 이 신문이 우리 대황제 폐하의 당당한 대한국 백성에게 속한 신문이라 함이니 뜻이 또한 중대하도다. 본래 우리나라 대한이 개국한 지 사천여년 동안에 혹 남에게 조공도 하고 자주도 하였으나, 실로 대한국이 되고 대황제 존호를 받으시기는 하늘 같으신 우리 황상(皇上) 폐하께오서 처음으로 창업하신 기초라. 우리 일천이백만 동포가 이같이 경사로운 기회를 즈음하여 나서 당당한 대한제국 백성이 되었으니 동양반도국 사천여년 사기에 처음되는 경사라.…〉
 
  대한제국의 선포를 경축하는 뜻으로 제호를 「제국신문」으로 삼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면제작 방향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그동안 국중에 신문이 여럿이 생겨 혹 날마다 발간도 하며, 혹 간일(間日)하여 내기도 하며, 혹 일주일 동안에 한두 번씩 내기도 하는데, 그중에 영어신문이 하나이오 국한문으로 섞어서 내는 것이 하나이오 일어로 섞어 내는 것도 있으되 그 중에 국문으로 내는 것이 제일 긴요할 줄로 믿는 고로 우리도 또한 순국문으로 박일 터인데, 논설과 관보와 잡보와 외국 통신과 전보와 광고 등 여러 가지를 내어 학문상에 유조할 만한 말이며 시국에 진적(眞的)한 소문을 들어 등재하려는 바, 본사 주의인즉 신문을 아무쪼록 널리 전파하여 국가 개명에 만분지 일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특별히 값을 간략히 마련하고 날마다 신실히 전하여 보시는 이들에게 극히 편리하도록 주의하오니…〉58)
 
 
  庶民層과 婦女子들 읽게 신문값 싸게 매겨
 
 
  이처럼 「제국신문」의 주된 발행목적도 「독립신문」이나 「매일신문」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국민 계몽에 있었다. 다른 신문들과 마찬가지로 한글전용을 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특히 신문값을 다른 신문에 비하여 싸게 매긴 것은 庶民層과 婦女子들에게까지 읽히겠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뒷날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된 뒤에 「제국신문」이 다음과 같이 특별히 한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한글전용이 오직 널리 읽히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음을 말해 준다.
 
  〈제 나라 글을 숭상하지 아니하고 남의 나라 글을 배우되 제 나라에 글이 없는 고로 인민생활상에 제일 필요되는 내 나라 역대 사적이 없어서 중원(中原:곧 中國) 역사부터 가르치고 배운즉 … 그런 고로 자기 나라는 소홀히 알고 남의 나라 위하는 사상이 팽창하여 사람마다 독립사상이 없고 의뢰심만 남아서 남에게 의뢰하기를 좋아하다가 오늘날 이 지경이 된 것은 확실한 사실이로다〉59)
 
  「독립신문」의 창간 때와 마찬가지로 「제국신문」에도 배재학당 출신의 한글연구가 周時經(주시경)이 잠시 참여했으나 이 무렵의 주요 한글신문 제작이 오직 주시경의 주장에 따른 것만은 아니었다. 서정주는 「매일신문」을 창간할 때에 李承晩이 친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전용을 고집하여 실현시켰는데, 그것은 〈民主主義 革命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지한 일반 민중이 깨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60) 물론 이 말도 과장일 것이나 이승만이 한글전용 주장자였던 것은 사실이었다.61)
 
  그런데 「제국신문」의 창간호가 어차피 경쟁지일 수밖에 없는 「독립신문」이나 심지어 「매일신문」에 대해서조차 우호적인 「광고」를 게재하고 있는 것은 흥미있다. 「독립신문」에 대해서는 〈우리 대한에 매우 긴요한 신문이니 많이 사다들 보시오〉 라고 했는가 하면, 「매일신문」에 대해서도 〈그 동안 몇 호 정지되었더니 요사이 회사를 다시 조직하고 오늘부터 신문이 다시 발간되었는데, 요긴한 소문과 유익한 말이 많더라〉라고 복간 사실까지 알리면서 구독을 권하고 있다. 「제국신문」의 이러한 태도는 「매일신문」이 8월12일자부터 23일자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근일에 「제국신문」이 새로 났는데, 우리 「매일신문」과는 도무지 상관이 없으니 혹 신문 보시는 군자들이 「제국신문」을 「매일신문」으로 그릇 아실 듯하기로 자에 광고하노이다〉는 社告를 내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는 「매일신문」 쪽에서 「제국신문」의 창간을 얼마나 못마땅하게 여겼던가를 말해준다.
 
  이승만은 「제국신문」의 주필로서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매일신문」에서 해임되고 「일일신문」 창간에 참여했던 崔廷植은 1898년 8월 초에 獨立協會에서 행한 연설이 문제가 되어 구속되었으므로 「제국신문」 창간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예리한 논리와 기발한 비유와 절묘한 풍자로 독자들을 설득하고 선동했다. 서정주는 이승만이 「매일신문」을 편집하면서 밤잠도 자지 않고 날마다 논설을 한 편씩 썼다고 적고 있으나,62) 그것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제국신문」을 편집하던 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제국신문」이 창간되고 나서 2주일이 채 되지 않아 이승만이 日本人들의 신문 「漢城新報」와 벌인 논쟁은 그의 언론활동의 백미였다. 논쟁은 「제국신문」 8월16일자 기사에서 비롯되었다. 한국 병정 하나가 군복을 입은 채 일본인 전당포 주인에게 손찌검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길을 가던 사람이 분함을 이기지 못해 그 이유를 캐묻자 일본인 전당포 주인이 그 사람에게까지 욕설을 퍼부었는데, 이러한 사실을 일본경찰에 고발했으나 아무런 조처도 없었다는 것이었다.63)
 
  이어 8월29일자에는 한 일본인이 한국사람을 칼로 찌른 사건과 관련하여 여러 한국사람이 일본경찰소에 끌려가서 매를 맞고 갇혔다는 기사가 실렸다.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전날 저녁 8시에 水橋(수교: 수표교) 앞에서 장사하는 일본인 집에서 한 일본인이 배를 깎고 있는데, 옆에 앉았던 한 한국사람이 침을 잘못 뱉어 일본인 옷에 떨어졌다. 일본인이 배 깎던 칼로 침뱉은 사람을 찔러 유혈이 낭자하자 사람들이 지소에 가서 신고했다. 그러나 巡檢은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인 집앞에 수백 명이 모였다. 칼질한 일본인은 그 집안으로 숨었고, 달려온 日本巡査는 한국 사람들을 해산시키려 했다. 일본순사들과 한국인들 사이에 소란이 벌어지고, 많은 사람이 日本警察에 연행되었다. 警務廳에 가서 호소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사람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며 헤어졌다―.64)
 
  李承晩은 「대한 사람 봉변한 사실」이라는 장문의 기사로 이 사실을 상세히 폭로했다. 모두 네 면의 지면 가운데에서 1면 머리부터 두 면 반에 걸친 이 기사는 다음과 같이 한국인들이 韓國警察에 항의하는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 나라가 위태하니까 한데 모여 저희 끼리나 보호하려는 것을 어찌 헤쳐서 각기 따로 가서 남에게 매맞고 칼질 받으란 것이니 장차 나라를 어찌 하잔 말이오, 왜 백성들을 업신여기려 하오, 왜 백성들 연설 못 하게 하오, 백성들이 모여 저의 몸을 보존하고 나라에 힘이 생기면 외국사람에게 방해로울까 그리하오, 순검이 백성들이 낸 돈으로 매삭 칠팔원씩 먹고 이 백성 보호하려는 것이 직책이 아니라 백성을 약하도록 만드는 것이 직책으로 아오, 하며 말하기를 우리가 이런 일을 밤낮 모여서 의론하여야 쓸 터이니, 이 나라 경무청에서 또 잡아 가두더라도 내일 다시 모여 의논들 하자고 하고 울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헤어졌으니, 백성들은 모여서 생명들을 차리시오〉65)
 
 
  〈그림 그린 것이 아니라 사진 박은 것이다〉
 
 
  「제국신문」이 연달아 일본인들의 행패를 폭로하자 「漢城新報」가 「제국신문」을 비판하고 나섰다. 「漢城新報」는 9월11일자에서 위의 「제국신문」 기사는 〈기자 이승만이 그날 신문 채울 말이 없어서 스스로 꾸며 한 폭의 그림을 그렸다〉고 비방했다. 日本人에 의한 구타사건은 있지도 않았으며, 조그만 일을 침소봉대하여 게재했다는 것이었다.
 
  적반하장격의 공격에 대해 이승만은 두면이 넘는 장문의 「논설」을 통하여 통렬히 반박했다. 그는 「漢城新報」가 자신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여 비난했으나 이런 일로 비난을 받는 것은 〈나라를 위하여 대단한 영광으로 아노라〉라고 응수하고, 또 그날 신문 채울 말이 없어서 스스로 꾸며 한 폭의 그림을 그렸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스스로 그림 그린 것이 아니라 적확한 사실을 비추어 사진 박은 것으로 우리는 생각하노라〉라고 위트 있게 받아넘겼다.
 
  이승만의 이 「논설」은 이 무렵의 그의 일본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글이기도 하여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그는 먼저 「漢城新報」에 대해 비꼬는 말로 시작했다.
 
  〈우리가 「한성신보」에 대하여 감사함을 치하할 계제가 없어 항상 서어(♥:서먹한 것)함을 면치 못하더니 지금 이런 좋은 기회를 만나 한 마디 치하함이 없지 못하겠기로 대강 말하거니와, 이 「신보」가 우리나라에 설시된 지 다섯 해 동안에 긴요한 소문과 양국 교제에 관계되는 말이며 개명에 유조(有助)한 사건을 들어 국중에 보고하여 주었으매 우리가 깊이 감사히 여기노라〉
 
  그러고 나서, 그러나 이 신문에 〈두어 마디 변론함을 마지못할 일이 있도다〉라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본월 십일일 「한성신보」 중에 하였으되 성내에서 발간하는 신문 중에 일본사람에게 소간한 사건을 간간 그 사실을 잃고 혹 붓으로 희롱하여 타국 관청의 행위를 손상코자 하는 바, 팔월 십육일에 발간한 「제국신문」에 회동 벽문 일인의 전당집에서 대한(大韓) 병정을 무수히 구타하였다 한 말은 결단코 구타한 사실은 없는 것을 「제국신문」에 짐짓 내었다 하며 무수히 발명(發明:잘못이 없음을 밝힘)하고, 또 그 아래 말하였으되 이런 조그마한 일을 바늘로 기둥을 만들어 기재하였다고 하였으니, 당초에 바늘도 없었으면 무엇으로 기둥을 만들었으리오. 이것만 보아도 바늘만치라도 구타한 사실이 있는 것은 가히 짐작하겠도다〉
 
  그리고 「漢城新報」가 무슨 마음으로 일본경찰을 시비하느냐고 한 데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반박했다.
 
  〈우리가 일본관리를 시비할 것도 없거니와 설사 시비를 하였다 하더라도 본래 신문이라 하는 것은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통 세계에 어떤 사람이든지 지위와 권리를 거리끼지 않고 혹 실수와 그른 행위하는 자는 평론하는 권리가 다 같이 있는 고로, 근일로만 말하여도 팔월 십구일과 이십삼일 「한성신보」에 경부철도사건을 인연하여 대한정부를 모두 시비하였으니, 이것은 또한 무슨 뜻인지. 원청강 일본 신문은 대한정부를 시비하는 권리 있고 대한신문은 독히 일본관인을 시비하는 권리 없을 리는 만무한 줄로 우리는 확실히 믿노라〉
 
  그러고는 위의 사건과 관련한 「漢城新報」의 주장의 모순점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지난달 이십구일과 삼십일 「제국신문」에 기재한 바 대한사람을 봉변한 사건에 대하여, 수교에서 배 사먹던 일인이 대한 사람이 침을 뱉어 무례히 함에 놀라 우연히 물리치려 하다가 가졌던 칼에 다쳐 약간 피가 흘렀다 하였으니, 그것은 매우 소상한 듯하나, 그 아래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이 성군 작당하여 일본영사관 앞에 모여 크게 작경(作梗:못된 행실을 부림)하려 하는 것을 위급히 여겨 일본 경찰관이 그 격동하는 자들을 잡음에 무리가 점점 흩어졌다고만 하였고 그 사람들을 잡아 들여다가 어찌 하였단 말은 없으니 그 말을 좀 자세히 들었으면 좋을 듯하나, 그날 우리 신문에 그 사람들을 잡아들여다가 무수히 때렸다고 하였거늘 그 말은 발명치 아니하였으니 더 듣지 아니하여도 소상히 짐작할 일이오〉
 
 
  日本 外交官들에게 「일본 하등인들」의 경거망동 단속 촉구
 
 
  그러면서 「漢城新報」의 오만한 태도를 이렇게 꾸짖었다.
 
  〈또 하였으되 일본 사정을 모르는 고로 일본영사의 행동에 대하여 시비할 뿐더러 이따금 이웃 나라 관인과 관청을 향하여 외람되이 조롱하고 꾸짖는다고 하였으니, 어느 날 몇 호 신문에 어느 일본 관인을 무슨 일로 꾸짖었는지는 자세히 설명치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스스로 깨닫기 어렵거니와, 을미년 납월분에 「한성신보」에서 우리나라 대황제 폐하께 대하여 무례한 말로 크게 실례한 까닭에 우리나라 신민들이 그 신문을 아니본 일이 있었는 줄은 세상이 거반 아는 바이니, 이는 대한 사정을 자세히 알고 한 일인지. 우리는 일본에 대하여 이같이 심하게 한 적도 없거니와 근자에 두 나라 교제가 점점 친밀하여 가는 터인즉, 구태여 적은 허물을 인연하여 피차 틈이 나게 되는 것은 본사에서 진실로 원치 아니하는 바로라〉
 
  그러면서 이승만은 논설의 결론으로 韓-日-淸 3국의 友好關係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일본 하등인들」의 경거망동 때문에 그러한 큰 목적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日本 外交官들은 거류 자국민을 단속하여 양국 백성들이 〈한 나라 사람같이 친밀히 지내게〉하라고 「漢城新報」 아닌 일본 외교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점잖게 타이르고 있다.
 
  〈대한과 일본과 청국은 서로 친밀히 지낼 수밖에 없는 형편인데, 이 형편을 일본에서 더욱 밝게 깨닫고 힘써 주선하여 아무쪼록 대한 인민이 속히 개명하여 세계에 동등 백성이 되기를 일심으로 바라는 터이기로 … 설사 일본 사람들에게 조금 관계되는 일이 있더라도 대한 백성이 되어 일호라도 이전 수치를 면하고 남과 동등 권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동양 삼국이 함께 바라는 공번된 큰 일이오, 아래 백성들의 잠시 격분한 일로 정의를 손상하는 것은 사사 조그마한 일이라. 연래로 일본 하등인들이 그 큰 목적을 잃고 대한 백성들을 혹 무례히 대접한 일이 바히 없었다고는 못할 터이라.
 
  이런 행위가 없어지지 않고 본즉 백성끼리 항상 울분한 마음을 품어 교제가 손상할 염려가 있는 중 지금은 대한 백성들도 차차 이런 행위를 받지 아니할 생각들이 생기는 터인즉, 일본 외교관원들이 더욱 그 아래 백성들을 단속하여 이런 폐단이 막혀 한 나라 사람같이 친밀히 지내게 하는 것이 동양 삼국에 큰 목적을 생각하는 의리로 믿고 바라노라〉66)
 
  이 글에서 李承晩이 「漢城新報」가 발행된 지 5년이 되었다고 한 것은 착오이다. 위에서 본대로 「漢城新報」가 창간된 것은 1895년 2월이었으므로 이때는 3년 반쯤 된 때였다.
 
  이 무렵 한국에서는 정치적으로는 러시아가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나 경제적으로는 일본이 여전히 韓國市場을 지배하고 있었다. 1896년 현재 한국에 있는 外國商社 258개 가운데에서 210개가 일본상사였다.67) 따라서 韓國에 와 있는 외국인 가운데서도 日本人이 1898년 현재 1만5062명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淸國人은 2530명, 그밖의 나라 사람들은 220명에 지나지 않았다.68) 그리고 이때에 와 있던 일본인 가운데에는 이승만의 말마따나 「하등인들」이 많아 한국인들과 곧잘 마찰을 빚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신문과 논쟁을 벌인 이 글에서도 우리는 李承晩이, 가령 러시아에 대해서와는 대조적으로, 日本에 대해서 기본적으로는 友好的인 인식을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新聞의 機能을 두고 두번째 論爭
 
 
  이승만의 반박에 대해 「漢城新報」는 연달아 두 차례나 「제국신문」을 비난했다. 이승만은 「제국신문」 21일자 「논설」을 통하여 이를 다시 반박했다.
 
  이 제2차 논쟁은 사실 여부에 대한 논란보다는 언론의 본분에 관한 논쟁이었다. 「漢城新報」는 「제국신문」이 사실보도를 넘어 여론을 선동하고 있다고 비난했는데, 이에 대해 이승만은 〈본래 신문이 국민의 개명(開明)을 주장함인즉 자기 뜻을 나타내어 시비를 분석하게 하는 것이 가장 귀한지라〉 하고 계도의 기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漢城新報」는 이승만이 신문의 비평의 기능을 춘추필법에 비유하여 강조한 것에 대해 〈記載人이 孔夫子 같은 성인이뇨?〉라면서 〈망령되고 僭濫(참람:분수에 맞지 않게 과함)하다〉고 비판했는데, 이에 대해 이승만은 이는 한문에 병든 말이라고 일축했다. 두루 알다시피 「春秋」는 孔子가 편찬한 것으로 전해지는 고대 중국 魯(노)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며, 춘추필법이란 「春秋」와 같이 엄격한 비판적 태도로 사실을 기술한다는 뜻으로 흔히 쓰는 말이다. 李承晩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이 반박 「논설」을 마무리하고 있다.
 
  〈「논설」은 소견을 베푸는 것이라 하였는데, 근래 「한성신보」에 논설 보기가 매우 드무니 아마 소견을 다 베푼 모양이요, 「잡보」는 사실을 곧 기록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근래 일본친구의 다치는 말을 잘 볼 수 없으니 이는 마치 이로운 말만 들리고 해로운 말은 아니 들린다는 속담과 흡사하고, 또 우리는 우리보다 용렬한 자에게 비하면 좀 낫다 하였으니 이는 을축년에 난 아이가 갑자년에 난 아이보다 한 살 덜 먹었다는 말과 같은지라, 이것이 다 자미로운 말이 아니뇨. 이는 다 일시 웃음거리 말이어니와 「한성신보」는 대한과 일본 사이에 한낱 신문이니 관계가 더욱 큰지라. 이 신문이 양국 교제에 매우 주의한다 함은 크게 감사히 여기노라〉69)
 
  李承晩의 이러한 비유법과 풍자는 그의 특출한 예지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李承晩은 「제국신문」이 창간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으므로 이 무렵의 「제국신문」의 논설은 바로 독립협회의 갖가지 민권운동의 기본정신이 표명된 것이었다.70)
 
  이 땅의 일간신문의 효시가 된 「매일신문」은 그해 12월에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되고 1899년 1월에 李承晩이 투옥된 뒤에도 계속 발행되다가 1899년 4월 초에 褓負商(보부상)들의 모임인 商務公社로 경영이 넘어가 4월14일부터 경제와 산업문제를 다루는 「商務總報」로 발간되었다. 이 신문사의 社長은 아이러니컬하게도 獨立協會 탄압에 앞장섰던 吉永洙였다. 그러나 이 신문은 일반의 지지를 받지 못하여 곧 없어지고 말았다.
 
  吉永洙는 한국 언론사상 처음으로 新聞을 告發하여 裁判을 받게 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1898년 7월에 「대한황성신문」(「皇城新聞」의 전신)이 경기도 果川郡廳의 관리 金聲均의 투서로 郡守 吉永洙의 비위사실을 폭로했었는데, 길영수는 그것이 사실무근이라고 하여 漢城裁判所에 訴를 제기하고 공판날에 果川郡 주민 수백명을 서울로 데리고 와서 재판소 앞에서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대한황성신문」쪽에서는 주필 柳瑾이 재판정에 출두했는데, 길영수의 요구로 柳瑾은 투서한 사람이 金聲均임을 밝히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을 보도한 「매일신문」의 「논설」은 취재원를 보호하지 못한 「대한황성신문」 주필 柳瑾에 대해 〈이렇게 투서한 사람의 성명을 경선(經先:경솔)히 발설하고 보면 종금 이후로 투서통이 비기가 쉽고 투서하려는 사람들이 각 신문사를 다 일반으로 알까 저어하노라〉하고 신랄하게 비판했다.71) 그것은 한국 언론사상 취재원 보호 논란의 효시이기도 했다.
 
  한편 「제국신문」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다가 제호의 연원이 된 大韓帝國과 운명을 같이하여 1910년 8월2일에 폐간되었다. 李承晩은 뒤에서 보듯이, 옥중에 있으면서도 2년 3개월 동안이나 비밀히 「제국신문」의 논설을 써서 내보냈는데, 출옥하고 나서도 석달 뒤에 美國으로 떠날 때까지 「제국신문」 제작에 관여했던 것 같다. 그것은 그가 떠날 때에 「제국신문」이 〈본사 사원 리승만씨가 미국으로 떠났다〉고 하고 또 이를 보도한 「대한매일신보」도 〈제국신문」 주필하던 리승만씨〉라고 하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72) 李承晩은 또 미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 「제국신문」에 항해도중의 견문기를 「편지」로 적어 보내고 있다.
 
 
  나라 일으키려면 서울에 큰 신문사를 설립해야
 
 
  이승만이 이 무렵에 쓴 것으로 여겨지는 「請設大報館(청설대보관: 큰 신문사를 세울 것을 청함)」73)이라는 논설은 그가 「나라를 일으키는 방책」으로서 신문을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었고 또 신문제작과 관련된 식견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갖추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74)
 
  드물게 한문으로 된 이 논설은 「어떤 고명한 인사」의 물음에 대해 응답하는 문장으로 되어 있다. 그는 지금 한국의 형편이 「사람들이 섶을 안고 불 속에 누운 것」보다 더 위험한 상태인데, 그 이유는 첫째로 外交를 닦지 않는 것이고 둘째로는 民心의 준동이라고 지적하고, 그러한 난국을 타개하는 계책은 서울에 큰 신문사를 설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울에 큰 신문사를 속히 설립하여 런던, 워싱턴, 페테르부르크, 베를린, 파리, 上海, 東京의 여러 신문들의 요긴한 기사를 옮겨서 보도하고 그것을 매일 乙覽(을람: 초저녁 임금의 독서)에 올리며, 大小 官員들도 구독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경향의 백성들에게 전파함으로써 〈정교(政敎) 중에 마땅히 變革해야 할 것과 習俗 중에 응당 고쳐야 할 것을 알게 해야〉관과 민이 힘을 합쳐 開明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원칙론뿐만 아니었다. 이승만은 필요한 제작비의 명세까지 자세히 계상하고 있다. 매월 주필과 찬성원 2人 300元, 東文(한문) 번역인 20원, 訪事人(방사인:취재기자) 3인 45원, 인쇄인 20원, 채자인 2인 20원, 機管所轉輪人(기관소 전륜인) 2인 20원, 傳播人(전파인: 배달부) 4인 24원, 재단인 1인 10원, 外報와 전보비 150원, 종이값 및 인쇄비 150원, 하인 2인 12원, 잡비 15원, 활판값 1500원, 신문사 수리와 기구비 100원 등이다. 그러면서 그는 월급항목의 합계는 786원이고 활판과 필요한 기구비가 1600원이므로 반년도 예산은 많아야 6000원 내외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액수는 실제로 「독립신문」이 정부로부터 4400원의 보조금을 받아 창간한 것이나 「제국신문」이 4000~5000원 규모의 자본금으로 시작한 것과 크게 차이가 없다.
 
  이 논설은 또한 보급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장밋빛 전망을 하고 있다.
 
  〈서울에서 360여 郡에 특별히 명하여 해당 각지의 地方官으로 하여금 都市와 農村에 게시하여 구독을 권장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민간에서 널리 보급하여 혹 1백 소 혹 몇십 소 이상을 달성한 사람이 있으면 장려비를 주거나 명호를 덧붙여 주는 것을 條例로 정해야 합니다. 民間에 장려하여 기어코 널리 보급하게 되면, 반년이 지나지 않아서 크고 작은 고을을 평균잡아 매 고을에서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이 무려 100명에 달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해년도 내의 수입으로 넉넉히 지출하고 다소 여유가 있을 것이며, 이듬해부터는 매월 수입이 9360원을 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 돈으로 學校와 圖書館을 세우고 泰西(西洋)의 서적을 번역하여 권하고 가르치면 3년을 넘지 않아서 큰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나라를 일으키는 방책으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이처럼 李承晩의 政治經歷은 言論活動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언론활동의 내용은 自由와 民權을 위한 투쟁이었다. 李承晩의 의욕적인 언론활동은 그 자신을 民權運動의 젊은 지도자로 확고한 위치에 올려 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 日刊紙時代를 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역할을 한 것이었다.
 
  그의 언론활동은 1898년 한 해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언론활동의 경험은 뒤이은 옥중생활과 독립운동의 전 과정에서 이승만이 무엇보다도 언론을 통한 선전활동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열성을 기울이는 바탕이 되었다.
 
  1898년은 또한 獨立協會의 民權運動이 절정을 이룬 해였는데, 독립협회의 급진 과격파로서 萬民共同會를 극한투쟁으로 몰아가는 李承晩의 저돌적인 모습을 우리는 다음호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9)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1) 첫 萬民共同會의 연사와 총대위원
 
  1898년 3월10일 오후 2시에 종로 네거리에서 이 나라 최초의 근대적 大衆集會가 열렸다. 이날짜 「독립신문」은 〈오늘 오후 두 시에 종로에서 유명한 유지각한 이들이 좋은 연설을 한다고 뜻있는 군자들을 청하였다더라〉는 예고기사를 싣고 있다. 이 집회는 徐載弼, 李完用, 尹致昊 등 독립협회 간부들이 은밀히 준비한 것이었는데,1) 미국 생활의 경험이 있는 이들은 미국 대중집회의 격식과 효과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날의 집회에 독립협회 간부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培材學堂과 京城學堂의 젊은 교사와 學員들을 연사로 내세우기로 했다.
 
  李承晩은 玄公廉(현공렴), 洪正厚(홍정후) 등과 함께 이 역사적인 대중집회의 연사로 선정되었다. 李承晩과 홍정후는 배재학당 대표였고, 현공렴은 경성학당 대표였다. 현공렴은 開化派 史學者 玄采(현채)의 아들로서 일본에 유학한 뒤에 경성학당에 다니면서 光武協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을 맡고 있었다. 협성회 간부 李承晩이 독립협회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집회에는 주최 쪽이 기대한 것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독립신문」과 鄭喬(정교)는 이날 모인 군중이 1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했고,2) 집회를 참관한 외국 사람들도 8000명에 가까운 인파로 추산했다.3)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군중이 모인 것이었다.
 
 
  백목전 다락 위에서 연설
 
 
  집회는 먼저 米廛(미전)의 쌀장수 현덕호를 회장으로 선출했는데, 그것은 일반대중의 참여를 과시하기 위한 배려에서였을 것이다. 연사들은 白木廛(백목전) 다락 위에서 연설을 했다. 집회의 목적은 외교 현안인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철수시키자는 여론을 조성하고, 이 집회의 이름으로 그러한 주장을 담은 메시지(편지)를 정부에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연사들은 대한이 자주독립국임을 강조하고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고문관의 철수를 역설했다.4) 청중들은 박수로서 『옳소(可)』라고 하면서 〈사람마다 대한이 자주 독립하는 것을 원하는 것〉을 표시했다.5) 이어 대회는 외부대신에게 보내는 회중의 일치된 뜻을 밝힌 편지를 채택하고 李承晩, 현공렴, 張鵬(장붕) 세 사람을 총대위원(대표)으로 선출하여 그들의 이름으로 이 편지를 외부에 전달하도록 했다.
 
  대회는 큰 성공이었다. 독립협회가 이 집회를 계획할 때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이 「民會」라고만 했었으나, 모인 사람들이 1만여 명이 되었다고 하여 이날 이후로는 대중집회를 가리켜 「萬民共同會」라고 일컫게 되었다.
 
  이날의 집회는 질서정연했고 연사들의 연설 기조도 침착했다.6) 그리고 외국인들도 많이 참관했는데, 개중에는 러시아 공사 스페이에르(Alexis de Speyer)도 공사관원들과 함께 그 자리에 나와 있었고, 배재학당 교장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등 미국인들도 와서 지켜보았다. 이날의 집회는 정부와 서울의 외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독립협회의 간부들은 대회가 질서정연하게 진행된 것에 만족했다.7)
 
  외부대신 閔種默(민종묵)은 이튿날 세 총대위원 앞으로 〈공동한 의론을 알았으며 러시아 고문관과 사관을 보낼 일은 탁지부와 군부의 소관이요 또한 정부에서 어떻게 의판하기를 기다릴 것이라〉는 답장을 보냈다.8) 李承晩은 이 답장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12일에 종로 네거리에 나가 붙였다.
 
  그런데 이날 이틀 전에 만민공동회가 열렸던 자리에 독립협회와는 관계없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만민공동회가 다시 열리고 있었다. 남촌 사는 사람들이 나서서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때와 같은 취지의 연설을 했고, 또 북도 사람 네 명과 시위대 사관 두 명이 반대연설을 하려다가 시민들에게 제지당하기도 했다.9)
 
 
  러시아人 財政顧問과 軍事敎官 철수
 
 
  1898년은 독립협회의 自主民權運動이 절정을 이룬 해였다. 독립협회는 朝鮮이 淸國으로부터 獨立한 것을 기념하여 迎恩門 자리에 獨立門을 세우고 그 주변에 獨立公園을 조성할 것을 사업목적으로 하여 1896년 7월2일에 결성된 사업단체였으나, 실제로는 徐載弼 등 개화파들이 처음부터 이 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당을 목표로 하여 결성한 政治結社였다.
 
  독립협회는 서재필의 계몽적인 講演會에 이어 1897년 8월29일부터는 배재학당의 協成會와 같은 토론회를 정례적으로 개최함으로써 정치결사로서의 협회의 역량을 배양할 뿐만 아니라 자주민권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급속히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1898년에 접어들어서는 上疏(상소)와 정부 각부에 보내는 편지와 萬民共同會라는 대중집회를 통하여 열강의 이권침탈 저지와 의회설립 요구 등의 運動을 강력히 전개했다.
 
  3월10일의 만민공동회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협회의 회원수도 급속히 늘어났고, 公州, 平壤, 大邱, 宣川, 義州, 木浦, 仁川 등 각지에 지회가 설립되었다.10) 정부는 독립협회의 주장대로 3월12일에 러시아에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의 철수를 요구했고, 17일에는 러시아 정부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통보해 왔다.11) 뿐만 아니라 절영도 석탄기지 租借(조차) 요구도 철회하고, 3월1일에 설립한 한러은행도 철폐했다.
 
  독립협회는 승리감에 넘쳤다. 러시아의 이러한 조치는 때마침 러시아의 극동정책이 한국문제보다도 만주문제에 「모험적 진출」을 도모하던 때였기 때문이었는데,12) 이러한 기묘한 사정이 독립협회로 하여금 자신들의 역량을 과대평가하게 만들었다.
 
 
  徐載弼의 재출국 막기 위한 萬民共同會 주도
 
 
  3월10일의 만민공동회 이후로 독립협회의 소장파 활동가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 李承晩은 「매일신문」을 펴내는 데 열중하면서도 독립협회의 대중운동의 향도 역할을 하게 되었다. 4월30일에 崇禮門(숭례문: 남대문) 안에서 열린 서재필의 在留(재유)를 요청하는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 회장 尹致昊의 동의도 받지 않고 열린 것이었는데, 李承晩은 이 대회에서도 주동적인 역할을 했다.
 
  그 동안 독립협회가 대중적 기반을 확대해 가면서 자주독립을 강조하고 열강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며 고급관료들의 무능과 부패를 고발하는 운동을 강력히 전개하자, 친러 수구파 정부와 러시아, 일본 등 열강은 서재필을 해고하여 추방함으로써 독립협회의 활동을 저지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러시아 재정고문과 교련사관이 해고되어 출국하게 되자 정부는 외국인고문 해고를 빙자하여 4월에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하고 출국을 요청했다.
 
  독립협회는 4월25일에 그러한 조치는 부당한 일이라고 극력 반대하면서 서재필의 再雇騁(재고빙)을 요청하는 편지를 정부에 보냈다. 그러나 정부는 사흘 뒤인 4월28일에 〈서재필은 이미 해고되었으므로 在留 여부는 본인의 의사에 달린 것〉이라고 사실상 거절하는 답장을 보내왔다. 정부와 계약한 서재필의 임기는 7년10개월이나 남아 있었는데, 정부는 알렌 공사와의 교섭 끝에 서재필이 출국조건으로 요구한 남은 임기 분의 급여 가운데 「독립신문」을 창간할 때에 대여해 준 3000원과 가옥 구입 대금 1400원을 공제하고 2만4400원을 지급했다.13)
 
  숭례문 안 만민공동회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열린 것이었다. 이날의 만민공동회는 정부에 서재필의 재고빙을 요청하는 편지를 다시 보냄과 동시에 서재필에게도 재유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로 결의하고, 李承晩과 함께 崔廷植(최정식)과 鄭恒謨(정항모)를 총대위원으로 선출했다. 이들이 서재필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는 뒷날의 서재필의 政治生命과 관련하여 매우 주목할 만한 다음과 같은 구절로 끝맺고 있다.
 
  〈지금 각하의 가고 머물음은 각하의 自由의 權에 달린 바이오며, 각하가 이 부모 나라를 버리고 어느 곳으로 가서 천고에 썩지 않을 이름을 세우고자 하십니까. 어차어피에 각하의 총명과 재덕으로 반드시 깊이 헤아리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만일에 각하가 고집하여 마음을 돌이키지 못할 지경이면 우리 2000만 동포 중에 반드시 慷慨激昻(강개격앙)하는 자가 있어서 각하가 단지 일신만 위하여 꾀하며 衆議를 돌아보지 않은 것이라 할 것입니다. 하물며 오늘 우리의 공동회가 특별히 각하의 行轅(행원)을 만류하려 하오니 오직 각하는 세 번 생각하시오〉14)
 
  서재필은 이 민중집회에 감격했으나, 정부가 재고빙을 하기 전에는 재유할 수 없음을 시사하는 답장을 5월2일자로 李承晩 등 총대위원 앞으로 보내고 5월14일에 다시 고국을 떠났다.
 
 
  利權讓與 반대를 위한 투쟁에 앞장
 
 
  수구파 정부가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로 서재필이 출국한 뒤에도 독립협회의 자주 민권운동은 오히려 더 활발히 전개되었다. 5월16일에 李承晩이 주재하던 「매일신문」과 일본인 신문인 「漢城新報」가 러시아와 프랑스가 한국 정부에 이권을 요구한 외교문서를 폭로하자 독립협회는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외부대신에게 보내기로 하고 그 기초위원 겸 총대위원으로 이승만, 정항모, 朴治勳(박치훈) 세 사람을 선정했다.15) 그 편지의 다음과 같은 사뭇 명령조의 문투는 이제 독립협회가 정부로서도 그 요구를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두려운 정치단체가 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대저 이 나라의 土地는 先王의 강토요 人民의 생업하는 땅이라. 貴大臣의 고명하신 식견으로 마땅히 참작하여 판단하실 터이겠으나, 본 회에서도 이 일에 대하여 부득불 참예하여 들을 義가 있기로 이에 仰哺(앙포)하오니, 照諒(조량)하시어 즉시 자세히 회답하시기 바랍니다〉16)
 
  이때의 러시아의 요구는, 지난 號(「李承晩, 日刊紙시대를 열다」)에서 보았듯이, 목포와 진남포 조계지에 인접한 사방 10리 안의 땅을 섬들까지 빼지 않고 사겠다는 것이었고 프랑스의 요구는 평양 근교의 석탄광산 채굴권이었는데, 독립협회의 격렬한 압력으로 정부는 그 요구를 거절했고 러시아와 프랑스도 계획을 철회했다. 독립협회는 이보다 앞서 2월28일에는 러시아의 絶影島(절영도) 조차 요구를 반대하는 편지를 외부에 보내어 정계에 큰 충격을 주고 러시아로 하여금 그 요구를 철회하게 한 적이 있었다.
 
  또한 일본도 6월29일에 乙未年(1895)과 丙申年(1896) 두 해 동안 한국에서 의병에게 살상당한 일본인의 손해배상으로 9만 7146원의 배상금을 지불할 것을 한국 정부에 요구해 왔다.17) 이에 독립협회는 7월16일에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일본에 대한 京釜鐵道 부설권 양여를 항의하고, 일본인 피해자 배상금 요구를 규탄하면서 이를 어떻게 조치할 것인지 묻는 편지를 외부에 발송했다. 외부대신 서리 兪箕煥(유기환)은 이러한 중대한 문제는 외부에서 독단하지 않을 것이며 정부에서 회의를 해서 조치하겠다고 회답했고, 결국 정부는 배상금 지불을 거절하는 답장을 日本公使에게 보냈다.
 
  정부와 독립협회 사이의 공방은 갈수록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정부는 종로에서 첫 萬民共同會가 열리고나서 며칠 지나지 않은 3월15일에 황제의 특명으로 李原兢(이원긍), 池錫永(지석영) 등 독립협회 회원 네 명을 갑자기 구속했고, 鄭喬(정교)도 체포하려 했으나 이것을 미리 안 정교는 도피했다.18) 지석영 등의 죄명은 『마음가짐이 陰秘(음비)하고 민심을 煽惑(선혹)한다』는 애매한 유언비어 유포 혐의였는데, 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새 법률에 위배되는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독립협회는 특별회의와 토론회를 잇달아 열어 정부의 횡포를 강력히 규탄하고 항의 편지를 보내는 등의 투쟁을 벌여 결국 6월29일에 이들을 석방시켰다. 그러나 語逼至尊(어핍지존:말로써 임금을 꺼리게 함)의 불경죄로 8월에 체포된 과격파 崔廷植(최정식)은 끝내 석방되지 않았다.
 
  이 무렵에 독립협회의 초대 회장이었던 안경수의 政變(정변) 미수사건이 일어났다. 안경수가 경무사를 지낸 金在豊(김재풍), 이충구 등과 함께 7월9일에 친위대 병력을 동원하여 高宗을 폐위시키고 황태자를 옹립하려고 모의했다가 적발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내부대신 朴定陽이 체포되고, 안경수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 사건을 빌미로 그 동안 失政과 貪虐(탐학)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어있던 의정부 참정 趙秉式(조병식)은 독립협회 회원들을 안경수의 도당으로 몰아 협회 지도자들을 살해하고 독립협회를 해산시켜 황제의 신임을 얻으려 획책했고,19) 격분한 독립협회는 7월17일에 조병식에게 사직을 권고하는 편지를 보낸 것을 시작으로 그의 파면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여 마침내 황제는 7월21일에 조병식을 면직시켰다.20)
 
 
 
 
  (2) 外國人 傭兵部隊 설치와 金鴻陸
 
  毒茶事件 파동
 
  9월 들어 느닷없는 일이 벌어졌다. 高宗이 황실을 호위할 외국인 용병부대를 설치하기 위해 비밀리에 上海에서 외국인 30명을 데려온 것이다. 高宗이 法部 고문인 미국인 그레이트하우스(Clarence R. Greathous)와 함께 황실을 호위할 외국인 용병부대의 설치를 계획한 것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改革勢力이 친위대의 지지까지 받아 불안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高宗이 황실을 호위하는 한국인 순검 등을 신임하지 않고 항상 불안해 하고 있는 것을 기화로 張鳳煥(장봉환), 朱錫冕(주석면) 등이 그레이트하우스의 건의라면서 궁내부대신 徐載純(서재순), 군부대신 沈相薰(심상훈), 탁지부대신 閔泳綺(민영기) 등의 동의를 얻어 高宗에게 외국인 용병부대의 설치를 상주한 것이었다. 高宗은 이를 받아들여 그레이트하우스, 장봉환, 주석면 세 사람을 上海에 밀파했고, 이들은 퇴역군인 등의 외국인 30명(영국인 9명, 미국인 9명, 독일인 5명, 프랑스인 5명, 러시아인 2명)을 모집하여 仁川을 거쳐 9월15일에 서울에 당도했다.21)
 
 
  「제국신문」 논설로 外國人部隊 설치 비판
 
 
  독립협회는 9월17일에 급히 특별회의를 열어 외국인을 고용하여 황실을 보호하는 것은 나라의 수치임을 논의하고 각부에 총대위원을 보내어 항의질문을 하기로 결의했다. 李承晩은 宮內府에 보내는 총대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이 무렵 李承晩은 李鍾一과 柳永錫과 함께 8월에 창간한 「제국신문」의 주필로서 신문제작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19일자 「제국신문」은 장문의 「논설」로 외국인 용병부대 설치를 비판했다. 이 논설의 다음과 같은 시니컬한 문장은 주필 李承晩이 高宗을 얼마나 경멸하고 있었는가를 보여 준다.
 
  〈임금이 그 백성을 믿지 못하여 외국 사람을 청하여다가 대궐을 보호하는 일이 세계에 나라되고서야 어디 있으리오.…
 
  우리는 생각컨대 … 새로이 대소관인들과 지방관들이며 병정 순검까지도 모두 외국의 학문 있고 개명한 사람들을 청하여 사무를 맡겨 나라이나 개명하게 만들고 백성 교육이나 시켜 탐학이나 면하게 할 도리가 있으면 오히려 나을 듯하도다. 이것은 세상에 사람이 할 일이 아닌즉 그 후에는 세계에서 야만으로 대접할 터이니, 야만이야 누가 책망인들 하며 삼강오륜이 있고 없는 것을 누가 부끄러이 여기리오. 참아 절통하여 하는 말이니 짐작들 하여보시오〉22)
 
  정부 대신들은 항의방문한 독립협회 총대위원들에게 외국인 용병 반대 奏請(주청)을 하겠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18일 오후가 되도록 정부에서 구체적인 통보가 없자 독립협회는 외부 문앞에서 항의집회를 열고 외국인 용병을 즉각 추방하라고 요구했다.
 
  집회는 이튿날에도 다시 열렸다. 이에 정부 대신들도 이 계획을 철회할 것을 高宗에게 주청했다. 마침내 高宗도 독립협회의 압력에 굴복하여 20일에 외국인 용병부대 설치계획을 포기했고, 외국인들은 1년치 급료 840원씩을 받고 9월 27일에 上海로 돌아갔다.23)
 
 
  高宗과 皇太子에 아편 탄 커피 올려
 
 
  외국인 용병부대 설치문제와 때를 같이하여 발생한 金鴻陸(김홍륙) 毒茶事件(독다사건)은 다시 한번 정국을 뒤흔들었다. 김홍륙은 러시아 공사관 통역으로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 때에 고종의 측근에서 러시아 세력을 업고 온갖 전횡을 자행했고 환궁한 뒤에도 갖은 농간을 부렸던 사람이데, 독립협회의 국정감시로 정사에 간섭하지 못하게 되었고, 高宗도 8월25일자로 그를 해임하여 海島로 귀양을 보내게 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김홍륙은 그의 심복 孔洪植(공홍식)에게 아편 한 냥쭝을 주어 高宗이 마시는 차에 타게 했고, 공홍식은 하수인을 시켜 9월11일에 고종과 황태자에게 아편을 탄 커피를 올렸다. 고종은 구토를 하고 황태자는 인사불성이 되는 큰 위난을 당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심문하면서 경무사 閔泳綺(민영기)는 죄인을 잔악하게 고문하고, 9월24일에 열린 中樞院은 의관 34명의 이름으로 신법을 개정하여 이미 폐지된 拏戮法(나륙법: 대역죄와 같은 큰 죄를 지으면 그 자손들도 연좌하여 사형에 처하던 형법)과 連坐法(연좌법)을 부활시킬 것을 정부에 요구하는가 하면, 법부대신 겸 중추원 의장 申箕善(신기선) 등은 이를 주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독립협회는 9월25일의 통상회의에서 반역사건을 규탄하고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촉구하면서도 한편으로 죄인을 악형으로 고문한 사실과 중추원의 나륙법과 연좌법 부활 기도는 국민의 生命과 財産의 自由를 침해하는 것이며 신법을 개악하는 것이라고 결의하고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것은 독립협회가 그만큼 정치적으로 성숙해 있었음을 말해 준다.
 
  독립협회는 10월1일에 중추원 문앞에서, 이튿날에는 高等裁判所 문앞에서, 6일에는 다시 고등재판소 문앞에서, 그리고 7일에는 高宗이 거처하는 慶運宮의 仁化門 앞에 나아가 상소를 올려 악법의 부활기도를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高宗과 수구파 각료들은 독립협회의 요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독립협회는 仁化門 앞에서 대회를 해산하지 않고 시대착오적인 악법의 부활 기도에 찬성하는 수구파 7대신(申箕善, 李寅祐, 沈舜澤, 尹容善, 李載純, 沈相薰, 閔泳綺)의 규탄과 전면적 개각요구로 투쟁을 확대하기로 했다.
 
  독립협회는 8일에 인화문 앞에서 연좌농성을 하면서 7대신의 탐학을 낱낱이 들어 규탄하고 그들의 파면을 요구하는 두번째 상소를 올렸다. 이 철야투쟁은 이내 광범위한 민중의 호응을 얻어, 서울 시내와 전국 각 지방에서 보내 온 의연금이 600여 원에 이르렀다.24) 독립협회는 밤에는 50명의 대표를 남겨 인화문을 떠나지 않게 하고 낮에는 다시 모여 민중대회를 열면서 그들의 요구를 승낙하는 高宗의 批答(비답)을 기다렸다.
 
  高宗이 7대신에게 경고는 하되 교체는 않겠다고 하자 독립협회는 인화문 앞에서 집회를 더욱 확대하면서, 10일에 다시 7대신 파면과 전면개각을 강력히 요구하는 세 번째 상소를 올렸다.25) 인화문 앞 농성에는 각 학교 학원들과 철시를 한 시전 상인들도 참석하여 날이 갈수록 규모가 더욱 커졌다.
 
  경무청에서는 강제로 시전을 열게 하려 했으나 상인들은 지금은 전과 달라 관인의 무례한 압제를 받지 않겠다면서 이를 거부했다.26)
 
 
  改革派 內閣 탄생시킨 「平和的革命」
 
 
  독립협회와 시민들의 강경한 개각요구와 집회의 대규모화 추세를 도저히 막을 수 없음을 안 高宗은 마침내 10일과 12일에 걸쳐 7대신을 모두 면직시키고, 독립협회가 신임하는 朴定陽을 署理議政事務(서리의정사무), 閔泳煥을 군부대신 등으로 하는 새 각료를 임명했다. 그것은 10월1일부터 열이틀 동안 궁궐을 에워싸고 철야시위를 벌인 끝에 쟁취한 승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민중의 힘으로 改革派內閣을 성립시킨 획기적인 일이었다. 독립협회 회원들과 시민들은 12일 저녁에 만세를 부르면서 해산했다.27) 각국의 외교관들도 이러한 사태에 경탄했다. 미국 공사 알렌이 「평화적 혁명(a peaceful revolution)이 이루어졌다」고 본국 정부에 보고하고 있는 것은 그 대표적인 보기일 것이다.28)
 
  그러나 高宗과 수구파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닷새 뒤인 17일에 高宗은 독립협회의 규탄을 받고 물러난 趙秉式을 의정부 贊政으로, 21일에는 역시 독립협회의 비판을 받고 물러난 前 의정부 參政 尹容善(윤용선)을 수반인 의정부 議政으로 다시 기용하여 개혁파와 일부 수구파의 절충내각을 구성했다. 그리고 20일에는 독립협회의 토론은 정치문제 이외의 것에만 한정하며 그 집회는 독립관에서만 허용하고 離次集會(이차집회: 원래 정한 장소를 떠나서 집회를 여는 것)는 금지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이보다 앞서 독립협회는 7월 초순부터 집회장소를 서대문 밖의 독립관에서 도심의 명동 掌樂院(장악원)으로 옮겼는데, 8월3일에 독립협회원의 연설을 문제삼아 장악원 집회소의 사용을 금지하자 大廣橋(대광교) 북쪽의 지전도가로 사무소를 옮겨 집회를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高宗의 이러한 조칙은 독립협회와 시민들의 인화문 앞 상소시위의 결과를 부인하려는 저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에 독립협회는 22일부터 경무청 문앞에 나아가 待罪(대죄)형식의 항의농성을 시작했다. 이미 정한 장소가 아닌 곳에서 집회를 열어 칙명을 위반했으므로 처벌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독립협회는 言論과 集會의 自由를 강력히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들은 〈독립협회는 …直言으로 죄를 지었으나 한 명이 죽으면 열 명이 그 뒤를 잇고, 열 명이 죽으면 백, 천 명이 그 뒤를 이을 것〉이라고 단호한 결의를 보였다. 이에 대해 高宗은 〈언로를 열고 어려움을 責하여 진보할 것은 이미 定算이 있으니〉 물러가서 기다리라는 批旨(비지)를 내렸다.29)
 
 
  解散하려는 군중 붙들어 言論自由 받아내
 
 
  24일에 속개된 집회에서 회중은 상소문과 高宗의 비지를 읽었다. 회중이 해산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李承晩이 회중 앞으로 나아가 해산을 막으면서 대죄투쟁을 계속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전후의 황제 조칙이 한두 번으로 그친 것이 아닌데, 그 봉행하는 것을 보지 않고 물러나는 것이 어찌 죄가 없다 할 수 있겠소이까. 그러하니 계속 대죄하여 본회의 言路를 인허받은 뒤에 물러나는 것이 가하오이다』30)
 
  李承晩의 이러한 선동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제의에 따라 독립협회는 철야 대죄농성을 계속하기로 하고 더욱 공격적인 내용의 상소를 다시 올렸다. 드디어 高宗은 정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言論의 自由를 허락한다는 비지를 내렸고, 독립협회 회원들은 25일 오후에 만세를 부르며 나흘 동안의 대죄농성을 풀고 해산했다.
 
  高宗이 언로를 열 정산이 있다고 한 것은 中樞院을 새로 개설할 것을 시사하는 말이었다. 이 때는 한편으로 改革派官僚들과 독립협회 간부들 사이에 중추원을 개편하여 議會를 설립하는 문제를 두고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3) 議會設立 직전에 守舊派의 모함으로 좌절
 
  독립협회가 추진한 民權運動의 궁극적인 목표는 의회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1898년에 들어와 본격적인 政治鬪爭을 벌이게 되면서 議會設立運動도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다. 4월3일에 열린 독립협회의 제25회 토론회는 「의회원을 설립하는 것이 정치상에 제일 긴요함」을 주제로 삼아 회원들과 국민들에게 의회 설립의 필요성을 계몽했고, 4월30일자 「독립신문」은 장문의 「논설」로 의회를 설립하는 것이 皇帝와 內閣과 人民에게 얼마나 유익한 것인가를 자세히 설명했다.
 
  독립협회는 7월3일에 윤치호 등의 이름으로 의회 설립을 정식으로 제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문은 한문전용의 관습을 깨뜨리고 역사상 처음으로 국한문 혼용으로 작성한 점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31) 그러나 이 상소에 대하여 高宗은 『분수를 벗어나서 妄言(망언)하지 말라』고 비답했다. 독립협회는 高宗의 이러한 비답을 무시하고 7월12일에 다시 상소하여 洪範(홍범:갑오경장 때에 선포한 개혁정책 14개조)을 실행하고, 賢臣(현신)을 更選(갱선)하며, 민의를 博採(박채)할 것을 거듭 주장했다.
 
  독립협회의 의회 설립 구상은 甲午更張때에 내각의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다가 유명무실해진 중추원을 개편하여 의회를 설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처음부터 下院을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독립협회 회원을 중심으로 하여 上院을 개설한 다음에 점차로 하원까지 개설하자는 것이었다.32)
 
  독립협회의 의회 설립 운동은 10월 들어 仁化門 앞의 철야상소 시위로 7대신이 해임되고 朴定陽 내각이 성립되면서 급진전되었다. 협회는 10월13일에 박정양에게 편지를 보내어 의회 설립에 대한 정부와의 연석회의를 제의했고, 정부는 이 제의를 받아들여 이틀 뒤에 연석회의가 열렸다.
 
 
  皇國協會에서 下議院 설립 주장
 
 
  그러나 협의는 시작되자마자 곧 중단되었다. 16일에 皇國協會 회원들이 박정양 집으로 몰려가서 황국협회도 民會인데 왜 정부는 독립협회만 상대하여 협의하느냐고 항의하면서 그의 사임을 요구했기 때문이다.33) 황국협회란 독립협회에 대항하기 위해 궁정 수구파가 주동이 되어 褓負商(보부상: 봇짐장수)들을 회원으로 하여 6월30일자로 갑작스럽게 조직한 단체였다. 회장은 법부의 민사국장 李基東이 맡았고 황실에서 경비조로 1000원을 하사했다.
 
  그렇게 결성된 황국협회는 이 무렵에 갑자기 下議院 설립을 주장하고 나왔다. 황국협회가 「民撰議員(민천의원) 設立建白書」를 제출했고 政府로부터 아직 民度가 유치하여 不可하다는 회답을 받았다는 일본 쪽의 기록이 있으나,34) 「承政院日記」나 「日省錄」 등 당시의 공식문서에는 그러한 사실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16일에 황국협회 회원들이 박정양의 집으로 몰려가서 항의하는 가운데 『본 회에서 下議院을 설치할 것을 청하였는데 무슨 구애되는 일이 있어서 허락하지 아니하시오』하고 물었고, 이에 대해 박정양은 『政府와 中樞院이 自在한즉 인민 사이의 불편한 일이나 國計(국계)상의 유익한 일은 마땅히 의논하여 행하는 것이고 또 관제에 없는 하의원을 허락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대답하고 있다.35)
 
  이는 황국협회의 결성 자체가 급작스러웠던 것처럼 독립협회의 上院 성격의 의회원 개설운동에 대항하기 위한 의도에서 급작스럽게 나온 주장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시기에 전국 규모의 보통선거를 통하여 下院을 구성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국협회는 이때 이후로는 하의원 개설문제를 거론하고 있지 않다. 高宗이 독립협회에 활동제한 조칙을 내린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民選議官 25명은 獨立協會에서 선거하기로
 
 
  경무청 앞 철야 대죄농성이 진행되는 동안 高宗은 다시 마음을 바꾸어 10월23일에 의정부 贊政 朴定陽을 參政으로 승진시키고 중추원 의장에 韓圭卨(한규설), 부의장에 윤치호를 임명하여 이들로 하여금 중추원 관제를 개정하게 했다. 독립협회는 24일에 새로운 중추원 관제 개정안을 정부에 제출했는데, 이 안에는 議官 50명 가운데 官選과 民選을 25명씩으로 하고 민선 25명은 독립협회가 회원 중에서 투표로 선출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이에 대해 정부는 황국협회도 동등하게 처우해야 한다면서 민선 의관 25명 가운데에서 17명을 독립협회에 허락한다는 高宗의 조칙을 내렸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이에 반대하여 그럴 바에는 민선의원 전원을 황국협회에서 선출하게 하라고 정부에 통고했고, 황국협회는 단독으로 중추원을 운영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不能(불능)」이라는 대답을 보냈다.36) 그리하여 정부는 독립협회에 민선의원 전원의 추천을 의뢰할 수밖에 없이 되었다.
 
  독립협회는 역사적인 의회원의 개설을 앞두고 官과 民이 공동으로 國政改革의 대강을 결의하는 대규모의 대중집회를 열기로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회 설립에 의한 立憲政治의 대중적 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37) 독립협회는 경무청 앞 철야 대죄농성을 풀고 돌아온 이튿날인 10월27일에 광교 사무소에서 회의를 열어 28일에 종로에서 官民共同會를 개최할 것을 결의하고 현직 및 전직 고급 관료들과 각계 각층에 초청장을 발송했다. 그러나 그러한 중대한 결정을 하면서 정부관료들과 사전에 아무런 협의도 하지 않은 것은 독립협회의 오만이었다.
 
  10월28일에 열린 종로의 대회장에는 3000~4000명쯤 되는 군중이 모였다.38) 하오 1시가 되자 독립협회 간부들이 도착하여 대회가 시작되었다. 李承晩도 이 대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대회장으로 선출된 윤치호는 대회 진행 도중에 다른 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民主政治나 共和政治에 대한 언급이나 관료들과 외국인을 비방하는 연설은 하지 못하게 하는 등으로 高宗과 정부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의구심을 사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회중은 길고 열광적인 환호성으로 윤치호의 제의를 통과시켰다.39)
 
  그러나 정부관인들은 대회에 참석하지 않은 채 『原定處所(원정처소)에서 개최하면 참석하겠다』고 전해 왔다. 독립협회는 『이번 대회는 독립협회의 토론회가 아니라 官民이 서로 모여 국정과 민생문제를 상의하자는 본의이므로 독립협회의 離次開會(이차개회)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장소문제로 밤중까지 몇차례 연락이 오가다가 이른 새벽녘에 이르러 의정부 참정 박정양과 찬정 李鍾健(이종건)이 와서 대회의 목적을 듣고 귀가시키라는 황제의 특명이 있었다면서 해산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회중은 정부 관인의 참석을 요구하며 밤을 새웠다.
 
 
  官民共同會에서 「獻議六條」 채택
 
 
  이튿날 독립협회는 정부에 다시 대관들의 참석을 요망하는 편지를 보냈고, 정부쪽에서도 독립협회의 주장을 받아들여, 하오 2시에 이윽고 역사상 처음으로 官民共同會가 열렸다. 정부가 태도를 바꾼 것은 윤치호가 입궐하여 高宗을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두세 명을 제외한 모든 대신들을 비롯한 관인들과 황국협회, 順成會(북촌에 거주하는 부인들 모임), 황국중앙총상회 등 각종 사회단체, 각 학교 학도들, 시전 상인들, 승려, 맹인, 宰設軍(재설군: 백정) 등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초청을 받고 참석했다.
 
  대회는 오후 3시경에 개회했다. 먼저 대회장 윤치호가 경과를 보고했다. 이어 정부대표 박정양이 등단했다.
 
  『어젯밤 이곳에 와서 勅語(칙어)를 전하고 돌아가 상주하자 인민이 노천에서 날을 보내니 오늘이라도 정부 대신들이 일찍 나아가서 참석하여 그 利國便民(이국편민)의 방책을 들으라 하셨소이다. 그러니 협의 후 모두 해산하면 곧 입궐하여 협의내용을 상주하겠소』
 
  만세와 박수소리가 잇따랐다.
 
  회중에서 누구든지 나와서 연설을 할 수 있었다. 모두들 머뭇거리고 있는데 朴成春(박성춘)이라는 백정이 나와서 연설을 했다. 대신들 앞에서 백정이 연설을 한다는 것은 일찍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 몰각합니다. 그러나 忠君愛國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에 이국편민의 길인즉 관민이 합심한 연후에야 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둘러처져 있는 차일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차일에 비유하건대 한 대의 장대로 받친즉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로 합한즉 그 힘이 매우 공고합니다. 원컨대 관민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國祚(국조)로 하여금 만만대를 누리게 합시다』40)
 
  백정은 갑오경장 때에 천민신분에서 해방되었었다. 회중은 이 백정의 연설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어 몇 사람이 의견을 개진한 다음 11개조의 의안이 상정되었고, 먼저 6개조를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이것이 유명한 「獻議六條(헌의육조)」인데, 그 내용은 1) 專制皇權(전제황권)의 공고화, 2) 외국에 대한 이권양여나 조약체결 등은 각부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으로 날인, 3) 전국의 財政과 租稅는 度支部에서 관장하고 豫算 決算은 人民에게 공개, 4) 모든 중범죄도 公判을 하되 피고의 자백이 있어야 시행, 5) 勅任官(칙임관)은 황제가 정부의 과반수 동의를 얻어서 임명, 6) 章程(장정)의 실천이었다.
 
  6항의 장정 실천의 촉구는 갑오경장 이후로 새로 제정한 法律과 각 부의 章程을 정부가 제대로 실천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석한 대신들도 모두 이 「헌의6조」에 「可」자를 적어 서명했다.
 
  이어서 중추원 의장 한규설과 박정양이 대회를 치하하는 연설을 했다. 대신들은 「헌의6조」를 『황제에게 상주하여 내일 하오 1시까지 회중에 반포하겠다』고 약속하고 돌아갔다. 회중은 기쁨에 넘쳐 만세를 부르며 해산했고, 50명만 남아 밤을 새웠다.41)
 
 
  官民共同會 해산 막아 中樞院 신관제 공포케
 
 
  이튿날 독립협회는 사무소에서 회의를 열고 중추원 민선의관 25명을 독립협회에서 내게 된 경과보고를 들은 다음 중추원 관제의 개정이 공포되는 대로 25명 의관의 선거를 실시할 것을 논의했다. 「헌의6조」의 공포 여부를 알려 줄 시한인 하오 1시가 지나자 독립협회는 총대위원을 정부에 보냈다. 그리고 오후 8시에 관민공동회를 종로에서 속개하고 「헌의6조」의 재가를 기다렸다.
 
  정부는 「헌의6조」는 모두 마땅히 실시할 것이고 그밖에 몇 조항을 첨가하여 조칙으로 공포하고 관보에 올릴 터이니 추운 날씨에 밖에 있지 말고 해산하여 기다리라는 뜻을 전해왔다.
 
  회중은 돌아가 기다리기로 하고 50명만 남아 밤을 새웠다. 高宗은 31일 새벽에 30일자로 「헌의6조」의 공포와 함께 「詔勅五條」를 내렸는데, 조칙은 첫조항에 〈(갑오경장으로) 諫官(간관: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원)을 폐지한 뒤로 言路가 막히어 상하가 勸勉警勵(권면경려)의 뜻이 없기로 중추원 장정을 정하여 실시할 것〉을 규정했다. 그것은 중추원 개편을 실질적인 의회개설로 생각하는 독립협회의 견해와는 상당한 간극이 있는 내용이었다.
 
  농상공부 대신 金明圭(김명규)가 나와 「헌의6조」가 재가되고 그것에 더하여 「조칙5조」까지 내린 것을 알리자 회중은 이를 환영하고 만세를 불렀다. 이때에 李承晩은 군중 앞에 나아가 군중을 제지하면서 외쳤다.
 
  『무릇 국사에 매번 조칙이 있어서 정부가 조치하도록 하여도 그 실시를 본 적이 없소이다. 이는 우리가 강력히 諫(간)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러니 본회는 경솔히 해산할 것이 아니라 대신들이 만일에 이를 실시하지 않으면 爭論(쟁론)하여 그 실시를 보는 것이 옳을 것이외다』42)
 
  회중은 李承晩의 주장에 찬동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해산하지 않고 관민공동회를 더 계속하게 되었다. 이처럼 李承晩은 이제 대중집회의 선동가로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관민공동회는 이튿날도 속개하여 「헌의6조」의 실시를 위한 정부의 조치를 기다렸다. 그 다음날인 11월2일에 공동회는 총대위원 3명을 선정하여 정부에 「헌의6조」를 조속히 실행할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고, 정부에서도 고무적인 회답을 보내왔다. 그리하여 관민공동회는 엿새 동안의 집회를 마치고 오후 4시에 해산했다.
 
  드디어 11월4일에 11월2일자로 된 中樞院新官制가 공포되었다. 이날 공포된 신관제에 따르면 中樞院은 〈法律과 勅令의 제정과 폐지 또는 개정에 관한 사항들을 審査議定하는〉 機關이었다. 그것은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國民代表가 참가하는 근대적인 立法機關이 탄생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날 정부는 독립협회에서 25명의 의관을 선거하여 그 명단을 보내 달라는 편지를 보내왔고, 독립협회도 이튿날(11월 5일) 독립관에서 중추원 의관 선거를 한다고 공고했다.43)
 
 
  『國體를 共和政으로 바꾸려 한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의회 설립의 기회는 자신들의 입지에 위협을 느낀 수구파들의 악랄한 모함으로 말미암아 이틀 만에 어처구니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중추원 신관제가 공포된 바로 그날(11월4일) 밤에 궁중에 머물던 의정부 찬정 조병식은 군부대신 서리 유기환, 법부협판이자 황국협회 회장인 이기동 등과 밀모하고, 잡배들을 시켜 광화문 밖과 성내 몇몇 요소에 독립협회 쪽에서 작성한 듯이 꾸민 익명서를 몰래 내다 붙이게 했다.44) 尹致昊의 회고에 따르면, 익명서의 내용은 朝鮮王朝는 이미 쇠퇴했으므로 만민공동하여 尹致昊를 大統領으로 선출하면 정부와 시민이 모두 승복하고 국민이 각성하여 開明進步를 이룰 것이라는 것이었다.45)
 
  이 익명서는 당연히 경무청에 발견되어 황제에게 보고되었고, 趙秉式 등은 高宗에게 독립협회가 다음날(5일) 독립관에서 대회를 열어 朴定陽을 大統領, 尹致昊를 副統領, 그밖의 독립협회 간부들을 각부 대신과 협판으로 선출하고 國體(국체)를 共和政으로 바꾸려 한다고 무고했다.
 
  高宗은 이렇게 상식으로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중대한 일을 확인해 보려고 하지도 않고 격앙해서 즉각 독립협회 간부 20명에 대해 체포령을 내렸다. 그것은 의회원 설립에 의한 皇權의 견제를 우려하던 高宗의 배신적인 기습이었다. 11월4일 밤부터 5일에 걸쳐 부회장 李商在를 비롯한 간부 17명이 체포되었다. 20명 가운데에서 체포되지 않은 세 사람은 회장 윤치호와 崔廷德(최정덕)과 安寧洙(안영수)였다.
 
  윤치호는 5일 새벽 다섯시쯤에 일어나 독립협회에 배정된 중추원 의관 선거의 준비를 하다가 순검들이 자기 집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보고 비밀리에 만들어 둔 뒷문으로 탈출하여 아펜젤러 집으로 피신했다. 관민공동회에 참석하여 「可」자로 서명한 朴定陽 등 대신들은 이날로 파면되고, 조병식이 의정부 참정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날 독립협회를 비롯한 민간단체의 일체 해산을 명하는 조칙이 내렸다. 조병식 등 수구파들은 독립협회 지도자 20명을 일거에 체포하여 구명운동을 할 겨를을 주지 않고 사형에 처해버릴 계획이었으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윤치호를 체포하지 못하여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高宗의 독립협회에 대한 이러한 탄압 뒤에는 러시아와 일본의 지원도 있었다.46) 이때의 배신감을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오늘의 관보는 독립협회의 해산과 「헌의6조」에 서명한 대신들을 면관시킨 칙령을 공포했다. 이것이 國王이라니!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배신적인 어떤 비겁자라도 大韓의 大皇帝보다 더 천박한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정부는 친일노예 兪箕煥과 친러노비 趙秉式의 수중에 있다. 러시아인들과 일본인들이 이 사건에 개입해서 의심할 여지없이 모종의 알짜 이권을 위하여 그들의 노예들을 지원하고 있다.…〉47)
 
  그런데 李承晩은 4일 오후에 윤치호를 만났던 것 같다. 이날 李承晩이 배재학당의 수업을 마치고 독립신문사에 들렀을 때에 윤치호는 입궐하라는 통지를 받고 불안해 하고 있었다고 한다.48)
 
  또한 윤치호의 이날짜 일기에 따르면 그는 밤 9시경에 입궐했는데, 高宗은 독립협회의 중추원 의관 선거방법 등을 묻고 나서 윤치호가 독립협회 사무실에서 잠을 자는지를 물었다.49) 한편 윤치호의 공식전기는 이날 밤 高宗은 『너 요사이 어디서 자느냐?』 하고 묻고, 『나가다가 조병식을 보고 가거라』 하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50)
 
 
 
 
  (4) 밤새워 萬民共同會 이끌다
 
  보부상패의 습격받아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독립협회 회원들과 서울시민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李承晩은 梁弘默과 함께 급히 아펜젤러 집으로 윤치호를 찾아갔다. 세 사람은 서둘러 대중을 동원하기로 합의했다.51) 이승만과 양홍묵은 학도 사오십명을 이끌고 협회 간부 17명이 구금되어 있는 경무청 앞으로 갔다. 뒤이어 배재학당을 비롯한 여러 학교의 학도들과 중앙총상회 상인들, 贊襄會(찬양회:부인회) 회원들 등 많은 시민들이 몰려왔다.
 
  군중들은 집회를 열고 17명 구속인사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들은 17명을 석방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도 함께 체포하라고 주장했다. 회중은 경찰의 제지를 무시하고 강경한 연설을 번갈아 가며 강행했다. 밤이 되어도 회중은 해산하지 않고 철야 농성을 시작했다. 화톳불의 불빛이 대낮 같고, 장국밥 300그릇을 보내는 사람 등 많은 시민들이 음식과 금품 등을 보내어와서 회중의 사기는 드높았다.
 
 
  敬善이 집회장에 나와 『너는 6대독자』 강조
 
 
  이때부터 李承晩의 급진 과격파의 진면목이 남김없이 드러난다. 그는 이때의 일을 자서전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萬民共同會가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나의 선친이 오셔서 나더러 『너는 6대독자』라고 강조하셨다. 때때로 아펜젤러 교장은 구석에 서서 만민공동회의 상황을 구경하곤 했는데, 그는 배재의 학도들이 이 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그때에 별의별 풍문이 나돌았다. 정부가 병정들을 보내어 우리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共同會가 해산되도록 할 것이라느니, 또는 정부는 나에게 높은 官職을 주어 회유할 것이라느니 등등 걷잡을 수 없는 말이 돌았다. 실제로 高永根(고영근)과 金宗漢(김종한)이 밤중에 내밀히 나를 만나러 배재학당에 나타났었다.
 
  화톳불이 밤새도록 타오르고 있었고, 나는 계속 연설을 해야 했다. 제일 힘들 때는 동트는 새벽이었다. 그때는 사람들이 얼마 되지 않았고, 모두들 지쳐 있었으며, 춥고 졸렸다〉52)
 
  예기치 않은 민중의 기세에 高宗과 수구파들은 당황했고, 정부 안에서는 수구파와 개혁파 사이에서 치열한 공방이 은밀히 전개되었다. 신문들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일을 연일 자세히 보도했다. 조병식 등 수구파 각료들은 「독립신문」, 「皇城新聞」, 「제국신문」, 「매일신문」이 모두 독립협회와 관계가 있다고 해서 폐간을 검토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법부에서는 회중 전원을 체포하라고 경무청에 지시했으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11월7일 아침에 구속된 17명이 경무청에서 고등재판소로 옮겨지자 회중도 공동회장을 재판소 앞으로 옮겼다. 경찰의 힘으로 회중을 해산시키기가 어렵게 되자 조병식 등 수구파는 군대를 동원할 것을 획책했다. 그러나 그것은 외국 공사들의 반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농성 나흘째인 8일부터 차가운 겨울비가 내렸다. 그러나 회중은 흩어지지 않고 철야농성을 계속했다. 이날 밤 공동회는 익명서 사건은 모함이며 회중은 被囚人(피수인) 17명과 생사를 같이하겠다는 상소를 올렸다. 찬비에 옷을 흠뻑 적시면서도 해산하지 않는 회중과 이에 호응하는 시민들을 보고 구경하러 나왔던 외국인들도 감탄했다. 外國公使들은 외부를 방문하여 만민공동회에 대한 지지와 동정을 표시했다.53)
 
 
  구속했던 協會간부 17명 전원 석방
 
 
  高宗은 다시 태도를 바꾸었다. 10일 오후 5시경에 『민원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아서 奏達(주달)하라』면서 한성부 판윤 鄭益鎔(정익용)을 공동회장에 보냈다. 회중은 1) 모함을 일삼는 대신들의 忠逆(충역)을 밝힐 것, 2) 「헌의6조」와 「조칙5조」를 즉각 실시할 것, 3) 독립협회를 부활시킬 것을 요구했다.54) 하오 7시에 高宗은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소장 韓圭卨(한규설)을 불러들여 17명의 재판을 끝낼 것을 지시했고, 이어 열린 재판에서는 17명에게 각각 「笞(태) 40」이 선고되었다. 극형을 각오했던 피고인들에게 그것은 뜻밖의 가벼운 형벌이었으나 李商在를 비롯한 피고인들은 큰 소리로 불복을 외쳤다. 한규설은 입궐하여 판결 결과를 보고하고 『형을 면한다』는 특명을 받았다. 석방된 17명이 만민공동회 회중 앞에 모습을 나타내자 회중은 서로 붙들고 울며 만세를 불렀다.55) 趙秉式과 閔種默(민종묵)은 해임되고 兪箕煥은 주일공사로, 李基東은 수원지방 參俓(참경)으로 전임되었다.
 
  17명이 석방된 뒤에도 회중은 해산하지 않고 대회장을 재판소 앞에서 종로로 옮겨 철야농성을 계속했다. 공동회는 12일에 다시 상소를 올려, 1)독립협회를 모함한 대관 5명(趙秉式, 閔種默, 兪箕煥, 李基東, 金禎根)을 재판에 회부할 것, 2)「헌의6조」를 즉각 실시할 것, 3)독립협회를 부활시킬 것, 4)정부대관을 임명할 때에는 백성들이 可하다는 사람만을 쓸 것, 5)조병식과 민종묵이 집권한 이후의 對外關係文書를 공개해서 인민의 의혹을 풀 것을 요구했다.56) 외교문서의 공개 요구는 공동회를 이끌었던 이승만과 양홍묵이 尹致昊의 의견에 따라 강력히 주장한 것이었다. 윤치호는 앞에서 본 일기에서처럼 수구파들이 만민공동회를 탄압하는 데 지원을 얻기 위해 비밀히 외국에 이권을 양여하지 않았나 의심했던 것이다.57)
 
  한편 정부는 이날 시행도 해보지 않은 중추원 신관제를 다시 개정해서 공포했는데, 그 주요 내용은 議官 반수를 民選으로 한다는 규정을 고쳐 전원을 官選으로 하고, 민선 의관은 당분간 독립협회에서 선출한다는 규정을 삭제한 것이었다.
 
 
  보부상들 집결에 法庭 텅 비어
 
 
  공동회 열흘째인 14일부터 형세가 갑자기 달라졌다. 그 동안 수구파들은 보부상패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분쇄할 준비를 은밀히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날 이기동의 통문을 받은 보부상들이 동대문 밖에 집결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부상들은 목화송이를 꽂은 패랭이를 쓰고 몽둥이를 들고 집결하고 있었다. 집결의 표면상의 이유는 민간단체 해산령으로 독립협회와 함께 해산된 황국협회의 부활과 「商務規則」의 인가를 요구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독립협회가 주도하는 만민공동회를 폭력으로 분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에게는 高宗의 密勅(밀칙)으로 탁지부에서 경비가 지급되었다.
 
  독립협회는 보부상의 내부사정을 잘 아는 高永根을 만민공동회 회장으로 추대하여 급박한 사태에 대비했다. 고영근은 원래 황국협회의 부회장이었으나, 황국협회가 궁중 수구파의 폭력단체가 되는 것을 보고 이를 탈퇴하고 만민공동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李承晩이 자서전 초고에서 高永根과 金宗漢이 밤중에 배재학당으로 자기를 찾아왔었다고 한 것은 고영근이 황국협회에 관여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만민공동회의 상소시위와 高宗의 모호한 답지가 되풀이되었다. 만민공동회는 15일에는 대회 장소를 종로에서 경운궁의 仁化門 밖 侍從院(시종원) 앞으로 옮겼는데, 그것은 보부상패를 의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16일에 만민공동회가 처벌을 요구하는 조병식 등 다섯 명에 대한 체포령이 내렸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실제로는 형식적인 조치였다. 조병식과 민종묵은 러시아인 집과 프랑스인 집으로 각각 피신했고, 이기동은 우선 피신했다가 보부상들이 행동을 개시한 19일에 스스로 나타나 옥중에 앉아서 보부상 패를 조종하는 형국이었다.
 
  이들 수구파들은 앞에서 본 익명서와 같은 수법으로 각국 공사관에 만민공동회 총대위원 윤치호 등의 이름으로 거짓 편지를 보내어 공동회가 어떤 거사를 할 터인데 간섭하지 말아 줄 것을 요청하는 것처럼 꾸미는 한편,58) 高宗에게는 만민공동회가 대궐을 둘러싸고 반드시 프랑스 革命(당시의 표현은 「法國民變」)과 같은 난을 일으킬 것이라고 모함하는 상소를 밤낮으로 올렸다.59)
 
  농성 13일째인 17일에 공동회 회중은 각부 대신과 협판 등이 공동회에 나와 함께 국사를 논의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정부는 모든 관원에게 공동회에 가는 것을 엄금했다. 그러면서 공동회에 편지를 보내어 중추원 의관 50명 전원을 관선으로 하기로는 되었으나 회중에서 30명을 선출해 보내면 그 가운데에서 25명을 임명하겠다고 말했다. 분격한 공동회는 총대위원을 보내어 『우리 회는 1인 아닌 半身도 선출하여 보낼 수 없다』고 통고했다.60)
 
  각 도에서 줄을 이어 서울로 모여든 보부상들은 19일부터 농상공부 앞에서 집회를 열고 과천군수 吉永洙를 十三道負商都班首(십삼도 부상 도반수)로 추대하고 김옥균 암살자 洪鍾宇(홍종우) 등을 두목으로 삼아 조직을 정비했다. 이들은 상무규정 인가장의 발급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이윽고 高宗의 특명으로 인가장이 발급되었는데, 그것은 사실상 황국협회가 부활되고 보부상들에게 폐지된 특권을 허용한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보부상들의 사기가 충천하게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61)
 
  이튿날 보부상들은 도반수 길영수를 옹위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집결장소를 동대문 밖에서 종로로 옮겼다. 그들의 위협에 눌려 재판소에서는 판사 검사들이 모두 사의를 표명하여 法廷이 텅 비는 한심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62)
 
 
  李承晩의 생애에서 가장 극적인 하루
 
 
  11월21일. 만민공동회의 철야시위가 17일째 되는 날이었다. 漢城府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告示를 했다. 드디어 보부상들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이날은 李承晩의 생애에서 가장 극적인 하루였다.
 
  이날 새벽 2시에 만민공동회의 요청에 따라 회장에 나온 의정 서리 金奎弘 등 정부 대신들은 보부상의 혁파와 만민공동회의 피격 방지를 거듭 약속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종로의 보부상 패는 아침 일찍 홍종우의 격렬한 선동 연설을 들은 다음 2000여 명이 길영수와 홍종우의 지휘 아래 두 패로 나뉘어 고함을 지르며 인화문 밖의 만민공동회를 습격했다.
 
  李承晩은 회중이 동요하지 않도록 연단에 올라가서 연설을 계속했다.
 
  『우리가 여기 進伏(진복)하여 풍찬노숙하는 것이 옷들을 탐하는 것이오이까 밥을 탐하는 것이오이까! 다만 한다는 일이 모두 나라를 위하고 동포를 사랑함이외다. 지금 들은즉 못된 간세배가 부상패를 불러 우리 만민을 치라고 해서 부상패들이 지금 목전에 당도하였소이다. 우리가 죽더라도 忠愛(「忠君愛國」)하는 의리는 가지고 죽을 터이니, 신민의 직분에 죽어도 또한 천추에 큰 영광이오이다!』63)
 
  이 때에 큰 몽둥이를 든 길영수의 지휘에 따라 보부상들이 공동회장을 둘러쌌다. 경운궁 주변을 지키던 병정과 순검들은 처음에는 보부상들을 제지하는 체했으나 짐짓 밀리고 말았다. 아무 방비 없는 공동회 회중은 보부상 패의 몽둥이에 맞아 이내 부상자가 속출했다. 어떤 사람들은 바로 옆 프랑스 공사관의 담을 넘어 피신하기도 했다. 길영수를 보자 격분한 李承晩은 그를 붙잡고 큰 소리로 외쳤다.
 
  『너도 명색이 국록을 먹는 신하요 너도 소위 대한의 백성이 아니냐! 네 어찌 간세배와 부동하여 부상패를 모집하여 충애하는 우리 만민을 친단 말이냐!』
 
  그러면서 그는 머리로 길영수의 가슴을 들이받으며 『나부터 죽여라!』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길영수는 히죽이 웃고는 몸을 빼어 좌충우돌했다. 누군가가 李承晩을 꽉 껴안고 『이승만씨, 진정하고 빨리 달아나시오』하고 말했다. 주위를 살펴보자 李承晩은 보부상들 속에 혼자 남아 있었다. 그는 가졌던 작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보부상들이 계속 밀려오는 쪽으로 나아가 그들이 길을 막아 놓은 작대기를 발로 차버리고 배재학당 쪽으로 걸어갔다.
 
  배재학당 앞길로 나서며 李承晩은 땅을 치며 울부짖었다. 이때에 이승만의 아버지 敬善이 나타나 아들을 안고 같이 통곡했다. 어떤 사람이 李敬善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아들을 그런 위태한 데 다니게 하오?』
 
  그러자 이경선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 자식이 만일에 悖戾(패려)한 일을 하게 되면 아비된 도리에 마땅히 엄금하려니와 당당한 충애의 의리로 나라를 위하고 동포를 사랑하여 다니는 것을 어찌 금할 수 있소!』
 
  이 광경을 보도한 「독립신문」의 기사는 〈李承晩씨의 충애에 열심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 부친의 당당한 의리는 세계에 더욱 드문 줄로 공론이 있다더라〉하고 덧붙이고 있다.64)
 
 
  『李承晩이가 吉永洙에게 맞아 죽었다』
 
 
  高宗과 수구파는 이것으로 만민공동회가 해산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의 기습에 성공한 보부상들이 궁중에서 보내온 백반과 고깃국으로 아침을 먹고 의기양양해 있을 때에, 소문을 듣고 정동 골목길에 모인 군중들이 돌팔매로 반격을 시작했다. 돌팔매에 쫓긴 보부상들이 英國公使館으로 피해 들어가자 공사는 이들을 내쫓았다. 보부상들은 서대문쪽으로 밀렸다. 서대문을 지키던 파수병들은 보부상들만 통과시키고 뒤따르는 군중은 막아서서 뒤쫓지 못하게 했다.
 
  李承晩은 배재학당으로 들어가자 기절하고 말았다.65) 보부상 패에 쫓겼던 사람들이 배재학당으로 몰려왔다. 金瑗根(김원근)이 눈물을 흘리면서 뛰어 들어오더니 『李承晩이가 길영수에게 맞아 죽었다』하고 외치며 통곡을 했다. 李承晩도 자서전 초고에서 〈그날 오후 신문도 내가 길영수에게 덤벼들었다가 그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보도했다〉고 적고 있으나66) 현존하는 당시의 신문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몸을 추스린 李承晩은 배재학당에 모인 군중들과 함께 종로 쪽으로 걸어갔다. 종로에서 다시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이때에 모인 회중의 수는 인화문 앞 집회의 곱절이나 되었다. 李承晩과 양홍묵 등이 등단하여 정부가 보부상을 동원하여 회중을 습격했다고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李承晩이 연설하는 것을 보자 사람들은 그가 죽지 않은 것을 알고 놀랐다. 어떤 사람은 그가 얼마나 상했는가 보려고 그에게 다가와서 만져보기까지 했다. 흥분한 회중의 일부는 보부상 패가 몰려 있는 서대문 밖으로 밀려갔으나 병정들이 총포로 위협하여 통과시켜 주지 않았다.
 
  高宗과 수구파는 낭패했다. 고종은 경무사 閔丙漢(민병한)과 한성부 판윤 李根鎔(이근용)을 만민공동회에 보내어 회중을 회유하며 해산을 종용했다. 그러나 격앙된 시민들이 돌팔매로 응수하는 바람에 경무사는 황급히 민가로 피해 숨어야 했다. 이때에 나무를 팔고 돌아가던 나무장수들이 만민공동회가 습격당했다는 말을 듣고 격분하여 이기동의 집을 부셔버렸고, 흥분을 이기지 못한 회중의 일부도 다투어 달려가 조병식 등 보부상 패를 조종하는 대관들의 집을 때려부셨다.
 
  각 학교는 문을 닫았고, 학도들은 모두 공동회로 몰려왔다. 공동회에 참가하지 않은 시민들도 의연금과 음식 등을 보내어 공동회를 격려했다. 군부는 병력을 풀어 高宗이 기거하는 경운궁 앞을 엄중히 경비했고, 정동 큰길은 통행이 통제되었다.
 
 
  18일 동안의 철야투쟁 끝에 獨立協會 부활 얻어내
 
 
  격정의 긴 하루가 지나고 날이 밝자 이른 아침부터 더 많은 시민들이 종로로 모여들었다. 서대문이 열릴 시간이 되자 회중은 보부상을 반격하러 그쪽으로 몰려갔다. 보부상들은 마포로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거의 빈손인 회중으로서는 몽둥이로 무장한 보부상들을 이길 수 없었다. 신기료 장수 金德九(김덕구)가 사망하고 부상자 10여 명이 생기고 시민들은 패퇴했다.
 
  그러나 서울 시내는 병정들과 순검들마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지지하여 제복을 벗는 등 혁명 전야와 같은 분위기였다.67) 高宗은 각국 공사들을 입궐시켜 궐내에 머물게 하면서 民會에 대한 각국의 대책 사례를 묻고 무력 진압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각국 공사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았다. 高宗은 尹致昊를 불러들여 공동회를 해산시킬 것을 종용했으나 李承晩 등 흥분된 과격파들이 이끄는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는 것은 이미 윤치호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高宗은 마침내 독립협회의 부활과 商務社(보부상들의 단체)의 폐지를 칙령으로 승낙했다. 만민공동회는 18일 동안의 격렬한 철야 투쟁 끝에 승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일시적인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 이날 정부는 외국인에게 의뢰하여 국체를 훼손하는 자를 처벌하는 「依賴外國致損國體者處刑例(의뢰외국 치손국체자 처형례)」라는 법령을 서둘러 공포했다.68)
 
  대궐에서 하룻밤을 보낸 각국 공사들은 23일 아침에 대궐에서 나오는 길로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여전히 통일된 견해는 나오지 않았다. 일본 대리공사 히오키(日置)는 각국 공사들이 병력동원을 권고하게 하려고 획책했으나 뜻은 이루지 못했다.69)
 
  정부는 보부상들에게 한성부 판윤 李啓弼(이계필) 등을 보내어 보부상이 혁파되었으므로 퇴거하라는 칙유를 전했다. 그러나 보부상들은 종로의 만민회가 퇴거하지 않았다면서 듣지 않았다. 만민공동회는 잠시 먼저 해산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고 尹致昊 등이 중심이 되어 무려 다섯 시간 동안이나 토론한 끝에 23일 오후 8시를 기해 이틀 동안 해산하기로 했다. 이날 高宗은 朴定陽, 閔泳煥 등 만민공동회의 지지를 받는 인사들을 주축으로 하여 각료를 개편하고 尹致昊를 한성부 판윤에 임명했다. 그러나 보부상패는 여전히 해산하지 않고 마포에 집결해 있었고, 吉永洙는 가마를 타고 몰래 입궐하기까지 하는 판국이었다.
 
  정부가 약속을 이행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26일 아침부터 군중들이 다시 종로로 모여들었다. 사태가 다시 심각해지자 高宗은 자기가 직접 나서서 사태를 수습해 보려고 시도했다. 高宗은 하오 1시에 경운궁의 敦禮門(돈례문) 軍幕(군막)에 친림했다. 이 자리에는 각국의 외교관들과 그들의 부인들도 초대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 참관했다.
 
  高宗은 먼저 공동회 대표 200명에게 독립협회의 부활 등 공동회의 요구조건을 대체로 허락하면서 해산을 친유했다. 다만 『독립협회는 앞으로 국내의 文明進步에 관한 일만을 토론할 것이며, 정부의 조치에 대한 말참견을 불허한다』고 했다. 공동회 대표들은 만세를 부르고 나와서 해산했다. 高宗은 오후 4시에는 또 보부상 대표 200명을 불러 모호한 약속을 하면서 역시 해산을 권유했다. 보부상들도 만세를 부르고 나와서 해산했다.
 
  이튿날인 27일은 독립협회가 부활되고 나서 처음 맞는 일요일이었다. 감격에 넘치는 통상회의가 열렸다. 이날의 회의에서는 마포에서 보부상 패와 싸우다가 희생된 신기료 장수 김덕구의 장례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하는 문제 등과 함께 협회의 토론회를 정상화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다음 토론회는 주제를 「信과 義를 튼튼히 지키는 것은 본국을 다스리는 데와 외국들을 사귀는 데 제일 요긴함」으로 정하고, 右議(우의)에 李承晩과 장태환, 좌의에 李商在와 方漢德을 선정했다.70) 부활된 독립협회의 첫 토론회에서 李承晩이 부회장 李商在와 동격의 토론자로 선정되었다는 것은 신진 소장파인 李承晩이 이제 독립협회 안에서도 지도적 위치를 확보했음을 말해 준다.
 
 
 
 
  (5) 中樞院議官에 선임되었다가
 
  제일 먼저 파면돼
 
  高宗과 정부는 11월29일에 기정 방침대로 의관 전원을 관선으로 하여 中樞院을 성립시켰다. 선임된 議官 50명은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계열이 17명, 황국협회 계열이 16명, 전직 관료와 都約所 등 高宗의 직계가 17명으로서 수구파가 3분의 2 의석이 되도록 배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 의관들에게는 연봉 360원을 지급하기로 했다.71)
 
  이 때에 李承晩도 從九品의 의관으로 선임되었는데,72) 독립협회 계열의 17명 가운데에서는 일본에 유학했던 스물두 살의 漢城義塾 교사 卞河進(변하진) 다음으로 가장 젊었다.73) 李承晩은 스물네 살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일방적인 중추원 의관 선임은 시국을 수습하는 데 전혀 효력을 나타내지 못했다. 17명의 독립협회계 인사 가운데에서 만민공동회 의장 高永根과 尹夏榮, 玄濟昶(현제창) 세 사람은 아예 의관직을 받기를 거부했다. 이들 말고도 李南珪(이남규) 등 전직 관료 네 사람도 授勅(수칙)을 하지 않았다. 일반 국민들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신문들도 「관보」나 「잡보」란에 간단히 보도하고 있고, 「皇城新聞」은 중추원이 「옛날의 言官」이라고 해설했다.74)
 
  독립협회는 정부의 일방적인 중추원 의관 선정 발표에 대해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렇게 설치되는 중추원이 협회가 당초에 주장한 의회와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어서 특별한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헌의6조」 등 정부가 약속한 사항을 빨리 실시하게 하는 것이 주된 운동목표가 되고 있었다.
 
 
  장례형식 빌어 대규모 시위행진
 
 
  12월1일에 거행된 신기료 장수 김덕구의 장례식은 그러한 독립협회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그것은 장례식의 형식을 빈 대규모의 대중시위였다. 「독립신문」의 다음과 같은 기사는 독립협회가 이 장례식을 얼마나 대대적으로 준비했는가를 말해 준다.
 
  〈명정에다 「대한제국 의사 김공 덕구지구(大韓帝國義士金公德九之柩)」라 써서 상여 앞에 높이 들고… 각 학교 기호와 각 동리 기호는 의기 있게 특별히 들었는데, 동서양 각국의 점잖은 손님들도 김씨가 忠義(충의)에 죽은 것을 모두 흠애하여 다 와서 보며… 勅奏判任官(칙주판임관)들이며 각 학교 학도들이며 각처 士農工商(사농공상)하는 이들이 서로 다투어 몸소 상여를 메고 전후좌우로 벌여 서고, 또 두 분은 상여 위에 앞뒤로 올라서서 요령을 흔들며 충의 두 글자로 노래를 지어 애국가 일체로 소리를 높이 질러 서로 화답하고 나아가는데, 동양 각국 만고 史記(사기)에 처음 있는 일이라. 그 충의로운 기운과 영화로운 광채는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더라〉75)
 
  시위운동의 희생자를 「義士」라고 호칭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약속한 사항을 실시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보부상들이 성내 각처에서 집회를 열고 독립협회 간부들을 암살할 것이라는 풍문이 떠돌기조차 했다. 이에 독립협회와 시민들은 12월6일 오후부터 종로에 모여 다시 만민공동회를 열고 철야 상소시위를 재개했다. 9일과 10일에는 기독교들도 만민공동회에 참가하여 합세했다. 그러나 高宗은 알렌공사와 아펜젤러에게 압력을 넣어 기독교도들을 철수시켰다.76)
 
  만민공동회가 재개되자 조병식, 민영기 등 수구파들은 高宗에게 독립협회가 기어이 共和政治를 실현하려 한다고 모함했고, 高宗은 길영수와 홍종우 등에게 비밀리 명을 내려 보부상 패를 다시 소집하게 하는 한편 시위대로 하여금 경운궁 호위를 더욱 강화하도록 했다.77)
 
  공동회는 보부상패의 습격에 대비하여 庸泮村(용반촌:성균관 부근의 마을), 왕십리, 안암동 등지의 빈민 1200여 명을 고용하여 군기사 참정을 지낸 田圭煥의 지휘 아래 몽둥이를 들고 경비하게 했다. 이러한 경호인들의 비용과 회중의 식비 등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의연금만으로는 부족하여 공동회는 부채를 지기 시작했다. 서울의 대상인들에게 半강제적으로 빌린 돈을 비롯하여 25일에 강제해산되기까지 17일 동안에 무려 6000원의 부채를 졌다.78)
 
  공동회는 勅敎(칙교)가 여러 번 있어도 정부에서 그것을 이행하지 않으므로 각부대신과 고관들을 공동회에 참여시키자면서 13일부터 대회장소를 종로에서 光化門의 六曹(육조) 앞으로 옮겼다. 만민공동회가 갈수록 과격해지는 것을 우려한 高宗은 15일 밤에 尹致昊를 한성부 판윤으로, 그리고 자신의 측근인 장연군수 金永準을 경무사로 임명했다. 김영준은 이튿날 공동회 사무소로 자신과 면담할 대표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李承晩이 대표로 선정되었다. 그가 대표로 선정된 것은 중추원 의관에 선임된 것과는 관계없이 재개된 공동회에서도 여전히 선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김영준은 李承晩에게 보부상 패는 반드시 잡아들여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하겠으며, 그 대신 만민공동회가 3일 안으로 육조 앞에서 개회하지 않으면 일이 모두 잘 될 것이나 그렇지 못하면 모든 일이 낭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상소를 하는 경우에도 몇사람만 모여 올리라고 했다. 그러나 공동회에서는 金永準이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킨 뒤에 탄압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판단은 李承晩의 선동에 의한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회중은 경무청 앞으로 몰려가서 집회를 열고 金永準의 사임을 촉구했다.79) 이튿날 李承晩은 李建鎬 등과 함께 다시 김영준을 찾아가서 그의 사직을 권고하는 등으로 사태를 극한상황으로 몰아갔다.80)
 
 
  탄압의 빌미가 된 11명의 大臣任用 적임자 추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대한 결정적인 탄압의 계기가 된 것은 12월18일에 있었던 중추원의 대신 임용적임자 추천 결의였다. 高宗은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중추원을 개원하여 만민공동회의 요구사항을 논의하게 했다. 중추원은 15일에 개원하여 高宗의 요청에 따라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를 부의장에 선출했다. 이튿날 속개된 중추원이 「헌의6조」와 「조칙5조」를 빨리 실시할 것을 촉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날 중추원이 정부고관에 임용할 인망있는 인재 11명을 정부에 천거하기로 의결하고 투표까지 한 것은 자신들의 묘혈을 판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투표한 결과 閔泳駿(민영준), 閔泳煥, 李重夏, 朴定陽, 韓圭卨, 尹致昊, 金宗漢, 朴泳孝, 徐載弼, 崔益鉉, 尹用求가 선정되었는데, 추천자 11명의 수는 당시의 대신급 직위의 수에 맞춘 것이었으므로, 사실상 이들로 擧國內閣을 구성할 것을 제청한 셈이었다. 이 11명이 당시에 보수파와 개혁파를 망라한 유능하고 인망 있는 인물들인 것은 사실이었으나, 불행하게도 李承晩 등 주동자들은 권력투쟁에서의 자신들의 힘의 한계를 고려할 줄 몰랐던 것이다.
 
  이 11명 가운데 박영효와 서재필을 포함시킨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 공식적으로 대역 죄인으로서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를 포함시킨 것은 무모했다. 이 제의를 한 사람은 독립협회 출신 의관 崔廷德이었는데, 李承晩은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1895년 7월에 두 번째로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와 그 일파는 독립협회가 강력한 정치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한 1898년 9월경에 시모노세키(下關)에 집결하여 국내정세를 주시하면서 독립협회에 의연금을 보내는 등으로 제휴를 도모하고 있었다. 이들은 10월에 일본으로 망명해 온 안경수와 함께 자체 내에서 조달한 거액의 자금을 국내에 밀송한 뒤에 그 자금으로 독립협회의 젊은 열성회원들을 포섭하고 있었다.
 
  李承晩도 崔廷德, 魚瑢善(어용선) 등과 함께 박영효의 심복인 이건호와 李圭完(이규완)에게 포섭되어 은밀히 박영효의 귀국운동을 전개하는 데 동참하고 있었다.81) 만민공동회에서의 李承晩의 과격한 행동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뒷날 李承晩이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자괴하는 듯한 말로 술회하고 있다.
 
  〈몇몇 망명객들이 일본에서 돌아와 서울장안의 일본인 거주지역에 살면서 돈을 물쓰듯 썼다. 나는 당시에 너무 어리고 천진난만해서 그들의 돈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는 생각을 못했는데, 뒤에 그들이 미국영향 밑에 있는 한국 지도자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려고 애를 썼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大東合邦論을 주창하는 사람들과 여러 번 비밀회견을 한 일이 있다〉82)
 
  李承晩이 쓴 모든 글에는 기회 있는 대목마다 자기과시적인 내용이 적혀 있는데, 위의 문장과 같은 자기 반성적인 서술은 극히 예외이다. 대동합방론이란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앞장섰던 이른바 大陸浪人의 선구자인 다루이 도키치(尊井藤吉)가 지은 책이름으로서, 일본의 한국병합을 추진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준 주장이다.83)
 
 
  신임 全南觀察使에게 현상금 내걸어
 
 
  무모했던 것은 중추원 의관들만이 아니었다. 중추원의 결의에 대해 만민공동회는 朴泳孝를 소환하여 재판에 회부한 다음 죄가 있으면 다스리고 없으면 징계를 사면해서 敍用(서용)하게 하자고 주장하면서 朴炳應(박병응) 등 13명을 고발위원으로 선정했다.
 
  이 무렵 항간에는 박영효가 皇帝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大統領이 되려 한다는 풍문이 나돌기도 했다.84) 그러나 박병응이 위원직을 사퇴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박영효의 귀국에 대해서는 만민공동회 안에서조차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실제로 박영효의 귀국을 언급한 이후로 공동회의 회중은 크게 줄어들었다.85)
 
  그러자 공동회는 더욱 과격해졌고, 그런 공동회를 이끄는 李承晩도 더욱 과격해졌다. 20일에 종로에서 열린 공동회에서 李承晩은 보부상 패의 謀主(모주)는 閔泳綺(민영기)라면서 그를 잡는 데 현상금 1000원을 걸자고 제의하여 채택되었다. 그것은 法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한 행동이었다. 사흘 전에 전라남도 관찰사로 임명된 민영기는 이 소문을 듣고 궁궐로 도망쳐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86)
 
 
  軍隊動員으로 萬民共同會 해산
 
 
  드디어 高宗은 12월23일에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때의 군대동원에는 외국 공사들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특히 일본 공사 가토는 자국의 明治維新 초기의 보기를 들면서 군대동원을 강력히 권고했다. 高宗은 이어 25일에는 조칙으로 만민공동회를 불법화시켰다.
 
  독립협회를 이미 허락한 이상 만민공동회를 여는 것은 불법이라는 것이 이유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독립협회를 해산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독립협회 자체도 사실상 해체되어 31일로 예정되었던 통상회도 무산되고 말았다. 이어 지방의 지회들도 해산되었다.
 
  해가 바뀌어 1899년 1월초에 尹致昊는 부친 尹雄烈(윤웅렬)의 주선으로 德源府使 겸 元山監理가 되어 서울을 떠났고, 남은 간부들은 체포되거나 피신했다. 李承晩은 다른 젊은 의관 네 명과 함께 맨 먼저 1월2일자로 중추원 의관에서 파면되었다. 그는 곧 피신했는데, 이때에 400여 명의 중견회원들이 때를 전후하여 체포되었다고 한다.87)
 
  1896년 7월에 결성된 독립협회가 2년 반 동안 전개해온 일련의 開化運動과 自主民權運動은 열강의 利權侵奪을 저지하고 近代的民主主義思想에 입각한 市民的大衆運動의 원형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그토록 역점을 두었던 議會開設運動도 실현되기 직전에 좌절되고 운동의 중심체인 독립협회 자체마저 존속할 수 없을 만큼 현실적으로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것은 어쩌면 이 나라의 政治文化의 특징으로 일컬어지는 「회오리바람」88)의 한 전형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실패는 다른 많은 요인과 함께 李承晩으로 대표되는 젊은 급진 과격파들의 모험주의적인 행동에 기인한 점이 많았다.
 
  그 자신이 「고목가」에서 노래한 것과 같이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던 大韓帝國의 自主獨立을 지키면서 近代國家로 만들어 나가는 운동을 이끄는 데 필요한 사려 깊은 판단력과 신중한 행동은 스물네 살의 청년 李承晩에게는 너무나 벅찬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獨立協會가 思想的인 면에서나 人脈의 면에서 뒤이은 愛國啓蒙運動과 民族獨立運動의 원류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때에 李承晩이 보여 준 대중조작의 힘은 그에 대한 전설적인 명성의 근거가 되었다.●
 
 
 
  1) 「尹致昊日記(五)」 1898년 3월10일조, 國史編纂委員會, 1975. 2) 「독립신문」 1898년 3월12일자 「잡보」 ; 鄭喬, 「大韓季年史(上)」, 國史編纂委員會, 1957, 182쪽. 3) The Independent, March 12th, 1898 ; The Korean Repository, March 1898, rep. vol.5, p.114. 4) 「독립신문」 1898년 3월15일자 「잡보」. 5) 鄭喬, 앞의 책, 182쪽.
 
  6) The Independent, March 12th, 1898. 7) 「尹致昊日記(五)」 1898년 3월10일조. 8) 「독립신문」 1898년 3월15일자 「잡보」. 9) 위와 같음. 10) 愼鏞廈, 「獨立協會硏究」, 一潮閣, 1976, 106∼112쪽. 11) 「露士官-顧問官의 撤收 및 韓國大使特派를 拒絶하는 照覆」,「舊韓國外交文書 제17권 俄案(1)」, 高大亞細亞問題硏究所, 1967, 1898년 3월17일조,;「尹致昊日記(五)」 1898년 3월 18일조. 12) ベ·ア·ロマ-ノフ著 山下義雄 譯,「滿洲に於ける露國の利權外交史」1934, 原書房影印本, 1973, 243∼291쪽 참조.
 
  13) 「外部中樞院來去案: 外部編(第1冊)」 光武 2년 3월24일조 및 3월25일조 ;「度支部來去案: 外部編(第15冊)」 光武 2년 4월28일조 및 4월29일조. 愼鏞廈, 앞의 책, 310쪽에서 재인용. 14) 鄭喬, 앞의 책, 188∼189쪽 ;「매일신문」 1898년 5월3일자;「독립신문」 1898년 5월5일자. 15) 「독립신문」 1898년 5월19일자, 「잡보」. 16) 「매일신문」 1889년 5월17일자 ; 「독립신문」 1898년 5월19일자. 17)「暴徒義兵으로 因한 日人被害賠償請求」,「舊韓國外交文書 제4권 日案(4)」, 高大亞細亞問題硏究所, 1968, 1898년 6월29일조. 18) 「독립신문」 1898년 3월29일자 ; 「尹致昊日記(五)」 1898년 3월16일조.
 
  19) 鄭喬, 앞의 책, 207∼208쪽. 20) 「독립신문」 1898년 7월22일자, 「별보」. 21) 鄭喬 앞의 책, 236∼238쪽 ; The Independent, September 17th, 1898. 22) 「제국신문」 1898년 9월19일자, 「론설」. 23) The Independent, September 29th, 1898.
 
  24) 鄭喬, 앞의 책, 248쪽. 25) 「皇城新聞」 1898년 10월11일자, 「別紙」. 26) 「독립신문」 1898년 10월13일자, 「잡보」. 27) 「독립신문」 1898년 10월13일자, 「잡보」. 28) 「駐韓美國公使館報告」(Communications to the Secretary of State from U.S. Representatives in Korea; H. N. Allen) No. 152, 1898년 10월13일조. 29) 「中樞院一等議官尹致昊等疏批旨」, 「承政院日記」 光武 2년 9월9일(양력 10월23일)조. 30) 鄭喬, 앞의 책, 272쪽.
 
  31) The Independent, July 7th, 1898 ; 「尹致昊日記(五)」 1898년 7월3일조. 32) 「尹致昊日記(五)」 1898년 8월2일조 및 「독립신문」 1898년 7월27일자, 「하의원은 급치않다」 참조. 33) 「독립신문」 1898년 10월18일자. 34)「韓國ニ於ケル紛擾事件槪要差進ノ件」, 日本外務省編,「日本外交文書(제31권 제2책)」, 國際聯合協會, 1954, 441쪽. 35) 「皇城新聞」 1898년 10월18일자 ; 鄭喬, 앞의 책, 263쪽. 36) 鄭喬, 앞의 책, 276쪽.
 
  37) 尹致昊, 「獨立協會의 活動」, 「東光」 1931년 10월호 참조. 38) 「제국신문」 1898년 10월 29일자 ;「獨立協會大臣排斥ニ關スル詳報ノ件」, 「駐韓日本公使館記錄(12)」, 1898년 11월8일조, 國史編纂委員會, 1995, 511쪽. 39) 「독립신문」 1898년 10월29일자, 「별보」. 40) 鄭喬, 앞의 책, 282쪽. 41) 鄭喬, 위의 책, 282∼83쪽.
 
  42) 鄭喬, 같은 책, 285쪽. 43) 「독립신문」 1898년 11월5일자, 「잡보」 ;「舊韓國官報」 1898년 11월3일자 및 11월4일자. 44) 위와 같음. 45) 尹致昊,「獨立協會의 始終」,「新民」1926년 6월호, 59쪽. 46) [獨立協會示威運動ニ關スル件],「駐韓日本公使館記錄(12)」1898년 11월 16일조, 443∼46쪽 ;「尹致昊日記(五)」 1898년 11월5일조.
 
  47) 「尹致昊日記(五)」 1898년 11월5일조. 48) 徐廷柱,「李承晩博士傳」, 三八社, 1949, 161쪽. 49) 「尹致昊日記(五)」 1898년 11월4일조. 50) 金永羲編,「左翁尹致昊先生略傳」, 基督敎朝鮮監理會總理院, 1934, 123쪽. 51) 「尹致昊日記(五)」1898년 11월5일조. 52) 李庭植譯註, 「靑年李承晩自敍傳」, 「新東亞」 1979년 9월호, 430쪽. 53) 「독립신문」 1898년 11월11일자, 「잡보」.
 
  54) 「皇城新聞」 1898년 11월11일자 「別報」;鄭喬, 앞의 책, 313쪽. 55) 「독립신문」1898년 11월12일자 「션고방」 ; 鄭喬, 앞의 책, 315∼16쪽. 56) The Independent, November 17th, 1898, ‘Molayo’s Report’. 57) 「尹致昊日記(五)」 1898년 11월11일조. 58)「독립신문」 1898년 11월16일자, 「별보」 ; 11월18일자, 「잡보」 ; 11월19일자, 「잡보」. 59) 鄭喬, 앞의 책, 330쪽. 60) 「皇城新聞」 1898년 11월18일자, 「雜報」 ; 鄭喬, 앞의 책, 331쪽.
 
  61) The Independent, November 22nd, 1898, ‘Molayo’s Reports’. 62) 鄭喬, 앞의 책, 337쪽. 63) 「독립신문」1898년 11월28일자,「잡보」. 64) 위와 같음. 65) 鄭喬, 앞의 책, 338쪽. 66) 앞의, 「靑年李承晩自敍傳」, 431쪽.
 
  67) The Independent, November 24th, 1898, ‘Molayo’s Reports’. 68) 「日省錄」光武 2年 12월 9일(양력 11월22일)조; 鄭喬, 앞의 책, 345쪽. 69) 「使臣會議ニ於テ本官質問一件ニ關スル件」, 「駐韓日本公使館記錄(12)」 1898년 12월13일조, 455∼56쪽. 70) 「독립신문」1898년 11월29일자,「잡보」. 71) 「독립신문」 1898년 12월12일자, 「관보」. 72) 「官報」 1898년 12월2일자, 「敍任及辭令」. 73) 朱鎭五,「19世紀 後半 開化改革論의 構造와 展開―獨立協會를 中心으로」, 延世大學校 博士學位論文 「부표3」 참조.
 
  74) 「皇城新聞」 1898년 12월5일자 「論說」. 75) 「독립신문」 1898년 12월2일자 「별보」. 76) 「負商投書에 따른 基督敎人의 抗議에 關한 解明」,「舊韓國外交文書 제11권 美案(2)」, 1898년 12월12일조. 77) 鄭喬, 앞의 책, 368쪽. 78) 「尹致昊日記(五)」 1898년 12월27일조. 79) 鄭喬 앞의 책, 380∼81쪽. 80) 위의 책, 387쪽.
 
  81) 「尹致昊日記(五)」 1898년 12월27일조. 82) 앞의 「靑年李承晩自敍傳」, 432쪽. 83) 韓相一,「日本帝國主義의 한 硏究―大陸浪人과 大陸膨脹」, 까치, 1980, 26∼33쪽. 84)「尹致昊日記(五)」1898년 12월 27일조; 菊池謙讓,「近代朝鮮史(下)」, 鷄鳴社, 1939, 528쪽. 85)「尹致昊日記(五)」1898년 12월27일조. 86)「皇城新聞」1898년 12월 20일자,「雜報」 ;「독립신문」1898년 12월 20일자,「잡보」 ; 鄭喬, 앞의 책, 396∼7쪽. 87) 獨立協會,「獨立協會沿歷略」,「創作과 批評」 1970년 봄호 참조. 88) Gregory Henderson은 한국 정치의 역학을 사회의 모든 활동적인 요소들이 中央權力을 향해 치닫는 거센 회오리바람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Korea : The Politics of the Vortex, Harvard Univ.Press, 1968).

연재 손세일의 비교평전-이승만과 김구(10)
 
한국민족주의의 두 종류
 
 

 


 세 차례의 신문이 끝난 뒤에도 金昌洙에 대한 최종 판결은 빨리 내려지지 않았다. 판결을 재촉한 것은 日本이었다. 3차 신문이 끝난 지 이틀 뒤인 1896년 9월12일에 인천 일본영사대리 하기하라 슈이치(萩原守一)는 감리 李在正의 조회에 대해 金昌洙를 〈大明律 人命謀殺人條(인명모살인조)에 의해 斬(참)으로 처단하는 것이 가하다〉는 의견을 법부에 올릴 것을 요청했다.1) 이튿날 李在正은 법부에 金昌洙는 「照律裁處(조율재처)」하고 李化甫는 석방할 것을 건의하는 보고서를 올렸다.2) 이에 앞서 金昌洙는 감리에게 李化甫는 무관하므로 즉시 석방하라고 강력히 요구했었다.
 
  법부의 답변이 지연되자 李在正은 10월2일 오전에 다시 金昌洙 안건을 조속히 처리하고 李化甫는 즉시 석방할 것을 요청하는 전보를 보냈다. 법부는 당일로 답전을 보내어 李化甫의 석방을 허락했으나 金昌洙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침도 내리지 않았다.3)
 
  李化甫는 이튿날로 석방되었다. 그는 옥문 밖에서 金昌洙를 찾아와 『말씀을 잘해주어 무사히 석방되었습니다』하고 치사하고 작별했다.
 
 
  푸른 수의 등에 罪名 써붙여
 
 
  이무렵 인천감옥은 인천 內里(지금의 中區內洞)에 있었다. 감옥 바로 뒤쪽으로는 내리교회가 있고, 내리 마루에 감리서, 왼쪽에 경무청, 오른쪽에 순검청이 있었다. 감옥은 순검청 앞에 있었는데, 그 앞에는 노상을 감시하는 2층 문루가 있고 감옥 주위에는 높은 담장이 쳐져 있었다. 담 안에는 평옥 몇 칸이 있었는데, 방들을 반으로 나누어서 한쪽은 미결수와 강도, 절도, 살인 등의 죄인을 수용하고, 다른 한쪽은 민사소송범과 경범위반과 같은 잡범을 수용했다.
 
  형사 피고의 기결수에게는 푸른 옷을 입혔고, 윗옷 등쪽에 「강도」, 「살인」, 「절도」 등의 죄명을 먹으로 써놓았다. 감옥 밖으로 일하러 나갈 때에는 좌우 어깨와 팔꿈치를 한 쇠사슬로 묶고, 2인 1조로 등 뒤에 자물쇠를 채워 간수가 인솔하고 다녔다.4)
 
  갑오경장 이후로 근대적인 감옥제도가 도입되면서 감옥규칙이 많이 개선되기는 했으나, 실제 운영면에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죄수를 신문할 때에는 여전히 고문이 증거 확보의 합법적인 수단으로 허용되었고, 기결수와 미결수는 차별없이 같은 대우를 받았다.
 
  「독립신문」이 한성재판소를 가리켜 〈백성의 시비를 법률을 가지고 재판을 아니하고 백성의 가죽을 벗기는 데〉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저간의 사정을 짐작하게 한다.5) 또한 범죄를 확증할 만한 증거나 증인도 없이 피의자를 체포해 와서는 미결수로 가두어 두고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다 보니까 미결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1개월 징역에 해당하는 사건의 범죄자를 미결상태로 몇개월씩 가두어 두는가 하면 100냥 가격의 소송으로 1000냥의 식비를 소비하게 하는 등으로 민원이 자자했다.6)
 
  1898년 8월에 법부에서 감옥서의 죄수들을 조사했을 때에 죄명도 모르고 증거도 없는데 재판도 받지 못한 채 갇힌 지 1년이 넘는 수감자가 10여 명이나 되었다는 사실7)은 이무렵의 행형제도의 실상이 어떠했는지를 말해 준다. 이러한 형편은 인천 감옥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金昌洙는 법부의 처결을 기다리면서도 다른 죄수들을 보살피고 또 그들과 같이 어울렸다. 당시 인천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은 대강 100명 가까이 되었다. 이들 가운데 수시로 드나드는 民事訴訟事件 피의자 말고는 대다수가 절도, 강도, 사전꾼(화폐 위조범), 사기, 살인 등을 저지른 징역수들이었는데, 이들은 열에 아홉이 문맹이었다.
 
 
  『仁川監獄署는 仁川監理署學校』
 
 
  金昌洙는 그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겠다고 자청했다. 그러나 정작 그 제의를 수락한 죄수들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배운 것을 뒷날 요긴하게 쓸 생각보다는 金昌洙에게 날마다 진수성찬으로 들어오는 私食을 얻어 먹는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배우는 시늉만 하는 죄수들이 많았다.
 
  花開洞 기생 서방으로 曺德根(조덕근)이라는 죄수가 있었는데, 그는 娼妓(창기)를 중국에다 팔아넘긴 죄로 10년 징역형을 받고 복역하고 있었다. 그는 「大學」을 배우다가 〈사람이 나서 8세가 되면 누구나 「小學」에 입문한다〉는 뜻의 〈人生八歲 皆入小學〉이라는 구절을 소리 높여 크게 읽다가 「皆入(개입)」이라는 말을 잊어버리고 「개 아가리 소학」이라고 하는 바람에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지기도 했다.8)
 
  「大學」의 이 구절은 정확하게는 〈사람이 나서 8세가 되면 바로 왕공에서 서민의 자식에 이르기까지 다 소학에 들어가 …(人生八歲 則自王公以下 至於庶人之子弟 皆入小學)〉라는 것인데, 글을 처음 배우는 죄수들에게 「大學」을 교재삼아 가르쳤다는 것은 아무리 다른 교재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무모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大學」은 淳泳이 사다가 차입해준 것이었는데, 이때에 金昌洙의 수중에 책이라고는 「大學」 한 권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四書의 하나인 「大學」은 孔子의 손자 子思(자사)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책으로서 논어와 함께 朝鮮의 儒學者들에게 가장 널리 읽혔던 儒學經典이다. 金昌洙가 별생각없이 「大學」을 교재로 하여 죄수들을 가르칠 생각을 한 것은 아마 어려서 서당에서 글공부를 할 때에도 한문 문장을 외우는 것으로 시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뒤에서 보듯이(다음호 「基督敎人이 되어 獄中傳道」 참조) 李承晩도 옥중에서 어린 죄수들과 政治犯들을 가르치는 일에 열성을 쏟는데, 두 사람의 이러한 행동은 이무렵까지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선진 외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특이한 일로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다만 李承晩은 金九와 달리 「가갸거겨…」를 써놓고 한글부터 가르친 것이 흥미 있는 대조를 이룬다.
 
  처음에는 어설프게 시작한 金昌洙의 죄수들 교육은 그러나 지속적으로 진행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金昌洙 자신의 인격적인 성숙과 학식 및 사상의 진전에 따라 내용도 더욱 충실해져 갔던 것은 다음과 같은 「독립신문」의 기사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인천항 감옥서 죄수 중에 해주 김창수는 나이 이십 세라. 일본 사람과 상관된 일이 있어 갇힌 지가 지금 삼년인데, 옥 속에서 주야로 학문을 독실히 하며 또한 다른 죄인들을 권면하야 공부들을 시키는데, 그 중에 양봉구는 공부가 거의 성가(成家:학문이나 기술이 한 경지를 이룸)가 되고 기외 여러 죄인들도 김창수와 양봉구를 본받아 학문 공부를 근실히 하니, 감옥 순검의 말이 인천 감옥서는 옥이 아니요 인천감리서 학교라고들 한다니, 인천항 경무관과 총순은 죄수들을 우례(優禮)로 대지하야 학문을 힘쓰게 하는 그 개명한 마음을 우리는 깊이 치사 하노라.>9)
 
  梁鳳九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金昌洙는 글공부를 열심히 하는 그와 친숙해져서 탈옥을 같이하게 된다. 金九는 위와 같은 기사를 본 것이 「皇城新聞」이었다고 기억했으나 이는 착오이다. 「皇城新聞」은 그가 탈옥한 뒤인 1898년 9월5일에 창간된 신문이다.
 
 
  억울한 罪囚위해 代書해줘
 
 
  문맹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 말고도 金昌洙는 억울하게 갇혀 있는 사람들의 송사를 代書해 주었다. 그는 그들의 사연을 듣고 무료로 소장을 써주었다.
 
  갑오경장 이후 새로 도입된 소장제도 때문에 法律에 무지한 일반백성들의 피해는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었다. 갑오경장 이전에는 특별한 규정이 없이 흰 종이에 내용을 적어서 제출하기만 하면 되었으나 갑오경장 이후에는 재판소 이름이 적힌 印札紙(인찰지)를 사용하지 않은 소장이나 군수 또는 지방재판소의 판결을 거치지 않고 고등재판소에 곧바로 올라온 소장은 해당 재판소에서 모두 퇴각시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예전같이 흰 종이에 소장을 써온 무지한 백성들의 피해가 많았다. 이렇게 되자 소장을 직접 쓰지 못하는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돈을 받고 영업하는 代書所가 생기기 시작했다. 글과 법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은 자연히 이런 대서소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를 악용한 대서소가 법부의 공식허가를 받았다고 하면서 소장을 써주는 代價를 과다하게 받는 등 횡포가 심했다.10) 「독립신문」은 이러한 대서소의 폐단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경향간 사는 인민들이 명원할 일이 있어 소지를 정(呈)하려면 각기 소회를 새 격식대로만 스스로 써서 정하면 좋을 터인데, 어찌하여서 서울서는 소장 쓰는 대서소라고 법부 관허를 맡아 가지고 고등재판소와 한성재판소에 소장을 정하려고 하는 인민들에게 소장들을 써주고 소장 써준 서가(書價)라 칭하고 돈을 많이 토색질들을 하는지, 고등재판소에서 소지 대서소의 큰 폐단 되는 줄을 알고 대서소들을 일병 혁파할 줄로 말들을 한다더라.〉11)
 
  당시 서울의 대서소가 이런 형편이었으므로 인천과 같은 개항장의 사정이 어떠했는지는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결국 억울한 일로 감옥에 들어온 일반 백성들은 법률의 횡포에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金昌洙가 무료로 대서를 해주자 감옥 죄수들은 여간 기뻐하지 않았을 것이다.
 
  金昌洙가 써준 소장 덕에 더러 소송에서 이기는 경우도 있었다. 죄수들 가운데에는 감옥 바깥에 연락하여 대서 비용을 써가면서도 효과가 없는 경우가 허다했으나 金昌洙와는 서로 상의해서 써 가지고 인지만 사다 붙여 제출하면 되었으므로 우선 편리했다. 또한 돈 한 푼 받지 않고 성심껏 소장을 써주기 때문에 金昌洙가 소장을 써주면 거의 다 승소한다고 과장되게 전해져서 그는 옥 안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관리의 대서까지 해주기도 했다. 대서뿐만 아니라 金昌洙는 백성을 어려움에 빠뜨리고 돈을 강탈하는 사건이 있으면 상급 관리에게 고발하여 관련자를 파면시킨 일도 있었다. 이 때문에 간수들은 金昌洙가 두려워서 죄수들을 함부로 학대하지 못했다.12)
 
 
  罪囚들과 어울리며 소리 배워
 
 
  金昌洙의 옥중생활 가운데에서 흥미 있는 것은 죄수들과 어울려 소리를 배운 것이었다. 그는 시골에서 나고 자랐으나 농군들이 일하면서 부르는 「김매는 소리」나 「목동 갈까보다 소리」 같은 노동요 한마디 불러 본 적이 없었고, 기껏 詩나 풍월을 읊조린 것이 고작이었다.
 
  당시 인천 감옥에는 야릇한 규칙이 있었다. 야간에 잠을 재우면 다른 죄수들이 잠든 틈을 타서 도주하는 죄수가 있었기 때문에 낮잠은 허락하는 대신에 밤중에는 잠을 재우지 않았다. 그리하여 밤새도록 죄수들에게 소리나 옛이야기 같은 것을 시켰다. 金昌洙에게는 이러한 규칙이 적용되지 않았으나 다른 죄수들을 다 그렇게 다루었으므로 金昌洙도 자연히 밤에 오래 놀다가 잠자리에 들게 마련이었다. 덕분에 시조나 타령 같은 것을 자주 듣게 되어 소리의 운치를 알게 되었다. 특히 조덕근에게서 여러 종류의 시조와 여창지름, 남창지름, 赤壁歌(적벽가), 가세타령(선유가), 개구리타령 등을 배웠다.13)
 
  金九가 시골에서 태어나 농군들과 같이 생활하며 성장했으면서도 「김매는 소리」 하나 익힌 것이 없었다는 것은, 서울의 양반 서당에 다니면서 서당 청지기를 졸라 혼자서 몰래 소리를 배운 李承晩의 경우와는 흥미있는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언제 사형집행이 있을지도 모르고 기약도 없는 옥중생활을 하면서 문맹의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 대서를 해주고 또 그들과 어울려 소리를 배우고 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金九의 大衆表出者型指導者(대중표출자형지도자)14)의 바탕을 느낄 수 있다.
 
 
  「독립신문」 보고 死刑判決 소식 알아
 
 
  판결도 없는 옥중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한 어느 날 金昌洙는 옥중에서 자신의 사형소식을 알리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백범일지」는 〈하루는 아침에 「皇城新聞」을 읽어 보니, 京城, 大邱, 平壤, 仁川에서 아무 날 강도 누구누구, 살인 누구누구 등과 함께 인천에 있는 살인 강도 金昌洙를 교수형에 처한다는 기사가 나 있었다〉고 비교적 소상히 적고 있다.15) 그러나 그것은 「독립신문」 1896년 11월7일(음력 10월3일)자 「잡보」란의 다음과 같은 기사를 말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번에 각 재판소에서 중한 죄인 여섯을 명백히 재판하야 교(絞)에 처하기로 선고하였는데, 장명숙, 엄경필, 한만돌이가 무리들을 체결하야 가지고 각각 몽치와 칼을 가지고 각처로 다니면서 재물을 탈취한 죄로 한성재판소에서 교에 처하기로 하고, 그전 인천재판소에서 잡은 강도 김창수는 자칭 좌통령이라 하고 일상(日商) 토전량양(土田讓亮)을 때려 죽여 강에 던지고 재물을 탈취한 죄로 교에 처하기로 하고……〉16)
 
  그런데 金昌洙는 자신에 대한 사형판결 기사를 보고도 전혀 마음의 동요를 느끼지 않았다고 했다. 이때에 자신이 그처럼 태연할 수 있었던 것은 청계동에서 高能善으로부터 들은 朴泰輔(박태보)와 三學士에 관한 이야기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金九는 설명하고 있다.17) 金九의 이러한 태도는, 뒤에서 보듯이 재판도 받기 전에 아버지 李敬善에게 세 번씩이나 유서를 쓰면서 불안해 했던 李承晩의 경우와는 퍽 대조적이다.
 
  金昌洙의 사형집행 기사가 난 신문이 배포된 뒤로 감리서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어 인천항 사람들이 金昌洙에게 「산 조문」을 하러 감옥으로 몰려왔다. 오는 사람마다 金昌洙를 보고 『마지막으로 보러 왔소』라든가 『우리는 金碩士가 살아 나와서 상면할 줄 알았는데, 이것이 웬 일이오』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金昌洙는 조문온 사람들을 오히려 위로하여 보내고 「大學」을 외우면서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들에게 사식을 손수 들여넣어 주는 곽씨부인의 태도도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金昌洙의 사형집행 사실을 곽씨부인이 모르게 했기 때문이었다.
 
  이무렵 인천감옥의 사형 집행은 오후에 죄수를 끌고 나가 牛角峴(쇠뿔고개)에서 교살하는 것이었다. 金昌洙는 아침밥과 점심밥도 잘 먹고 사형집행을 기다렸다. 동료 죄수들의 마음 아파하는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었다. 金昌洙에게서 음식을 얻어먹던 죄수들과 글을 배우던 감옥 제자들, 그리고 소송에 대한 지도를 받던 여러 죄수들이 얼마나 애통해 하며 울던지, 金九는 그들이 〈과연 제 부모 죽을 때에도 그렇게 애통해 할지 의문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은 〈성현의 말씀에 마음을 가라앉혔다가 성현과 동행할 생각으로 「大學」만 읽고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18)
 
  이윽고 교수대로 끌려나갈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예정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金昌洙는 또 한 끼 저녁밥을 먹었다. 옆사람들이 金昌洙는 특수 죄인이기 때문에 아마 야간 집행을 하려는가보다고들 했다.
 
  저녁이 되자 사람들의 발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나더니 옥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옳지. 지금이 그때로군!』
 
  마침내 金昌洙는 마지막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을 바라 보는 동료 죄수들은 마치 자기가 죽으러 가기나 하는 듯이 벌벌 떨었다.
 
  안쪽 문이 열리기도 전에 감옥 뜰에서, 『金昌洙 어느 방에 있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천만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아이구, 이제 金昌洙는 살았소! 아이구, 우리 감리 영감과 감리서 전 직원과 각 청사 직원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밥 한 술 먹지 못하고 金昌洙를 어찌 차마 우리 손으로 죽인단 말이냐 하고 서로 말없이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탄하였소. 그랬더니 지금 大君主 폐하께옵서 집무실에서 전화로 감리 영감을 불러 계시옵고, 감리 영감은 金昌洙의 사형을 정지하라는 親勅(친칙)을 받잡고 밤중에라도 감옥에 내려가 金昌洙에게 알려 주라는 분부를 내리셨소. 오늘 하루 얼마나 상심하셨소』
 
 
  「國母報讐」 죄목이 승지 눈에 띄어
 
 
  金九는 자신이 목숨을 건지게 된 데에는 기적 같은 우연이 작용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사형은 형식적으로라도 왕의 재가를 받아 집행하는 것이므로 법부대신이 사형수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문서를 가지고 조회에 들어가서 왕의 親監(친감)을 거쳐야 했다. 그런데 이때에 입시했던 승지 한 사람이 각 죄수의 심문서를 뒤적여 보다가 「國母報讐(국모보수)」 넉 자가 눈에 띄어 이상하게 여기고, 이미 裁可(재가) 수속을 끝낸 안건을 다시 꺼내어 高宗에게 보였다.
 
  내용을 본 高宗은 즉시 어전회의를 열고 논의한 결과 이 사건은 외국과 관련된 일이기는 하나 일단 생명이나 살리고 보자 하여 高宗이 직접 전화로 사형집행 정지를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백범일지」는 〈여하튼 大君主(李太皇)가 親電한 것만은 사실이었다〉고 명기하고 있다.19)
 
  그러나 「백범일지」의 위와 같은 서술에는 사실과 다른 점이 있다.
 
  우선 통신수단의 문제이다. 金九는 자신의 사형집행 정지령이 내린 날을 〈서울에서 仁川까지의 전화 가설공사가 완공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궁내부에 처음으로 전화시설이 마련되어 外衙門 등 중앙의 각 아문과 함께 인천과의 사이에 전화가 개통된 것은 1년도 더 뒤인 1898년 1월18일의 일이다. 그리고 한성과 인천사이에 오간 통화 내용 가운데에서 공식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열흘 뒤인 1월28일 하오 3시에 영국 범선 세 척이 입항할 것이라고 인천감리가 外衙門에 보고한 것이 최초였다.20)
 
  사형집행 정지령이 내린 날짜 역시 문제이다. 金九는 신문에서 자신의 사형집행기사를 읽은 것이 7월27일이었고, 高宗이 인천감리에게 사형집행 정지를 명령한 것은 8월26일이었다고 확언하고 있다.21) 그러나 앞에서 본 대로 3차 심문이 있었던 날이 9월10일이었고, 법부에서 金昌洙를 포함한 한성부 강도죄인 張明叔(장명숙) 등 11명에 대한 絞刑(교형)을 高宗에게 건의하는 보고서를 상주한 날짜는 10월 23일(음력 9월17일)이었다.22) 이 보고서는 시행일을 10월28일로 예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다시 「독립신문」에 보도된 것은 11월7일(음력 10월3일)자였다.
 
  따라서 金昌洙가 자신의 사형집행 사실을 신문기사를 통하여 보고 안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독립신문」에 보도된 11월7일 직후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高宗이 사형집행정지를 명령한 날짜가 「백범일지」의 또다른 부분에 적혀 있는 대로 음력 윤 8월이었다고 하더라도 시간적으로 동이 뜬다. 따라서 高宗이 황급히 전화로 인천감리에게 金昌洙의 사형집행 정지를 지시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런데도 金九가 어떻게 위와같이 기억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강화된 君主權으로 잦은 감형과 사면령
 
 
  金昌洙의 사형집행이 高宗의 칙명에 따라 정지된 것은 물론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관파천 이후 高宗이 빈번히 시행했던 정치사면령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國王은 중요 범죄에 대한 최종 판결권을 가지고 있었다. 1896년 4월에 반포된 「刑律明禮(형률명례)」에 따르면 국사범을 유형에 처할 때, 특별법원의 범죄자로서 역형 이상을 선고했을 때, 사형을 선고했을 때에는 반드시 국왕에게 상주한 뒤에 그 재가를 거쳐서 집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甲午更張 이전에는 사형수를 처결할 때에 국왕에게 세 차례 보고하는 제도가 있었으나 이때에는 한 차례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국왕의 판결권은 갑오경장 뒤로 한동안 폐지되었다가, 아관파천 이후의 군주권 강화를 위한 일련의 舊制度 부활의 일환으로 부활된 것이었다.23) 高宗은 강화된 君主權을 바탕으로 하여 잦은 감형과 사면령을 실시했다. 특히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형집행 중인 죄수를 사면하는 정치사면이 잦았다.24)
 
 
  죄수들은 발목에 채워진 차꼬 두드리며 노래 불러
 
 
  감리서에서 내려 온 주사는 金昌洙에게 이런 말을 들려 주었다.
 
  『우리 관리들뿐 아니라 오늘 전 항구의 객주 32명이 긴급회의를 하고 通文을 돌리는 것을 보았는데, 항구 안에 있는 집집마다 몇 사람씩이든지 되는 대로 우각현에 金昌洙의 교수형을 구경가되 각 사람이 엽전 한 냥씩 준비하여 가지고 오라 하였소. 사람들이 돈을 가지고 오면 거기서 모인 돈으로 金昌洙의 몸값을 쳐주고, 부족한 액수는 32객주가 담당하고 金昌洙를 살리자고까지 하였소. 그러나 지금은 천행으로 살았고, 아마 며칠이 못 되어 궐내에서 恩命이 계실 터이니 아무 염려 마시고 계시오』
 
  밤에 옥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벌벌 떨던 죄수들은 이러한 소식을 듣고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신골방망이(짚신 삼을 때에 쓰는 방망이)로 자신들의 발목에 채워진 차꼬를 두들기며 온갖 노래를 다 부르고, 푸른 바지저고리 바람으로 춤도 추고 우스꽝스러운 몸짓도 하면서 밤을 지새웠다. 그것은 마치 푸른 옷 입은 배우들의 연극장과 같았다.25)
 
  죄수들은 金昌洙가 정말로 異人(이인)이라면서 경탄했다. 사형을 당할 날인데도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하게 행동한 것은 필경 金昌洙가 선견지명이 있어서 죽지 않을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관리들 중에도 그렇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곽씨부인은 밤에야 감리가 알려 주어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곽씨부인 조차도 아들을 異人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곽씨부인은 金昌洙가 海州監營에서 인천으로 이송될 때에 같이 바닷물에 빠져 죽자고 하자 자기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단호히 말했던 일을 기억하고, 아들은 자기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순영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상감의 친칙으로 金昌洙의 사형이 정지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날 영결을 고하러 면회왔던 사람들이 이제는 축하 면회를 오느라고 옥문에 줄을 이었다. 그리하여 金昌洙는 아예 옥문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며칠 동안이나 손님 응접을 했다. 사형정지 전에는 金昌洙의 젊은 의기를 애석히 여기는 사람들이 찾아왔었으나, 이때에 찾아 온 사람들 가운데에는 장차 金昌洙가 영달하게 될 줄 알고 미리 아첨하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관리 가운데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고, 인천항내의 인사들 사이에서도 그런 빛이 보였다.26)
 
 
 
 
  金昌洙의 첫 번째 옥중생활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新書籍을 읽고 西洋文物에 눈을 뜬 사실이다. 金昌洙가 신서적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시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서 「大學」을 열심히 외웠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金昌洙가 신서적을 알게 된 것은 사형집행 정지령이 내린 1896년 11월 중순 이후였을 것이다.
 
  金昌洙가 투옥되어 있던 仁川은 서양문물과 신사상을 수용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開港 이후부터 上海와 日本 등지를 운항하는 서양 상선이 거의 모두 인천에 기항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서양인들이 인천에 진출했다. 1883년에 「仁川濟物浦各國租界章程(인천제물포 각국조계 장정)」이 체결됨에 따라 각국의 조계가 들어서고, 이에 따라 외국 상인들이 인천에 거주하면서 합법적인 무역활동을 하고 있었다.27) 그리하여 구미 각국에서 들어온 외국인 거주자나 여행자들과 서양선교사들을 통하여 새로운 문명과 서적들이 소개되었다. 또한 조선 상인 가운데에도 외국으로 장사하러 나갔다가 신간 서적을 들여오기도 했다.
 
 
  감리서 직원의 권유로 新書籍 읽어
 
 
  매일 「大學」을 읽고 외우고 있는 金昌洙에게 어느날 감리서 직원 한 사람이 신서적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문을 굳게 닫아 걸고 자기 것만 지키려는 구지식 구사상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가 없소. 세계 각국의 政治, 文化, 經濟, 道德, 敎育, 産業이 어떠한지를 연구해 보고, 내 것이 남의 것만 못하면 좋은 것을 수입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 이 나라와 백성의 살림살이를 유익되게 하는 것이 時務(시무)를 아는 영웅의 할 일이오. 한갓 排外思想(배외사상)만으로는 이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오. 그러니 昌洙와 같이 의기 있는 남자는 마땅히 신지식을 구하여 장래 국가에 큰 일을 하여야 하오』
 
  이런 말을 하고나서 그는 金昌洙에게 「世界歷史」, 「地誌」 등 중국에서 발간된 책들과 국한문으로 번역된 책들을 가져다 주었다.
 
  개항기에 신서적은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開化派 知識人들에게 보급되었다. 초기에는 외국을 방문한 정부관료나 상인들이 외국 여행길에 들여 왔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는 이들과 평소에 친분관계가 있거나 서로 뜻이 통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어 유통될 뿐이었다. 그러나 이들말고도 국내에 들어오는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서 많은 신서적들이 보급되었다. 선교사들은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조직적으로 신서적을 번역하여 보급했다. 중국에 거주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상해에 中國聖敎書會, 大英聖書公會, 美華書館, 廣學會 등의 출판사를 설립하고 기독교 관계 서적뿐만 아니라 서양에서 간행된 신간들을 번역하여 소개했다.
 
  특히 1887년에 영국선교사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이 설립한 광학회는 티모시 리처드(Timothy Richard)가 주간으로 취임한 뒤에 많은 기독교 관계 서적과 서양의 신간서적들을 번역하여 소개했다. 그리하여 광학회에서 발행한 책을 흔히 「광학회본」이라고 불렀다.28)
 
  신서적의 가장 광범위하고 대중적인 보급은 新聞社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당시의 신문들은 역사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여 주었고, 또 그와 관련된 출판사업도 활발하게 했다. 「皇城新聞」은 역사 지리와 제도 및 실학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漢譯된 서양 서적이나 일본 서적의 번역 간행에도 힘써서, 1899년에는 玄采(현채)가 번역한 「中東戰記」와 「美國獨立史」를, 1900년에는 「法國革新戰史」와 「淸國戊戌政變記」를 출간했다.
 
  이들 외국 역사서는 혁명과 전쟁을 주로 다루었는데, 외국의 개혁사례를 통하여 한국의 富國强兵과 改革을 강조하고자 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현채가 「中東戰記」의 발문에서 스스로 힘을 길러야 할 것을 강조한 「自修自强」을 주장한 것 같은 것은 그 대표적인 보기였다.29)
 
 
  義理는 유학자들에게서 배우고 制度는 西洋것 채택해야
 
 
  개항장의 감리서는 신서적의 보급과 유통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皇城新聞」은 〈서적의 간행을 각 신문사에 광고하여 모든 백성들이 알 수 있게 하고, 몇 백 질은 신문사에 보내어 판매케하고, 또 몇 백 질은 각 港口 監理署에 보내어 판매케 하여 모든 사람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함이 좋을 것이다〉30)하고 신서적의 보급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金昌洙가 감옥 안에서 신사상과 문화를 소개하는 각종 서적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환경 때문이었다.
 
  金九는 감리서 직원들이 이따금 와서 자기가 신서적을 탐독하는 것을 보고는 매우 좋아하는 기색이었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감리서 직원들이 그에게 開化思想을 주입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金九는 이때에 자기는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孔子의 말대로 신서적을 열심히 읽었다고 했다. 이렇게 신서적을 탐독한 것이 그의 人生觀과 世界觀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金昌洙는 『죽을 날이 당할 때까지 글이나 실컷 보리라』는 심정으로 손에서 책을 놓을 사이 없이 열심히 글을 읽었는데, 이 때에 신서적을 읽고 깨달은 것을 「백범일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달은 것은 고선생이 전에 조상께 제사지내면서 「維歲次 永曆 二百 몇 年…」이라고 쓴 축문을 읽던 것이나 安進士가 洋學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다지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義理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文化와 制度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31)
 
  근대적인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金昌洙가 감옥에서 읽은 몇 권의 책으로 모든 思考와 價値觀까지 송두리째 변화되었다고 보기는 물론 어렵다.
 
  그것은 〈義理는 유학자들에게서 배우고…〉라는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서양의 先進文物을 적극 수용하는 것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수단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한 점에서 그의 思想的轉換은 李承晩이 근대적인 학교교육과 기독교를 통하여 새로운 사상과 서양적인 가치관, 특히 美國式民主主義에 대한 이해와 신념을 뚜렷이 갖게 된 것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 金九는 이때의 자신의 내면적 변화과정을 다음과 같이 실감나게 적고 있다.
 
  〈전에 청계동에서 오로지 고선생만을 하나님처럼 숭배하고 있던 때에는 나 역시 斥倭斥洋(척왜척양)이 우리의 당연한 천직이라 생각하였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禽獸(금수)라고 여겼던 것이다. … 고선생은 오직 우리나라에만 한 가닥 밝은 맥이 남아 있고, 세계 각국이 대부분 被髮左♥(피발좌임:머리털을 풀어헤치고 옷을 왼섶으로 입음. 곧 야만이라는 뜻)한 오랑캐들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泰西新史」 한 책만 보아도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가 우뚝 선 원숭이에서 멀지 않은 오랑캐들로 여겼던 西洋人들은 도리어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는 좋은 法規가 사람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높은 갓을 쓰고 넓은 요대를 두른 仙風道骨(선풍도골)의 우리 탐관오리들은 오히려 그와 같은 오랑캐의 칭호조차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32)
 
 
  舊韓末 思想界를 휩쓴 「泰西新史」
 
 
  金昌洙에게 西洋文化에 대한 첫 접촉은 그만큼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가 감옥 안에서 「泰西新史」와 함께 다른 어떤 책들을 읽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金九는 「泰西新史」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泰西新史」는 이무렵의 新知識人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었다. 이 책의 인기는 李承晩이 옥중생활을 할 때에 작성된 한성감옥서의 「獄中圖書目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옥중도서목록」에는 舊韓末 新知識人들과 政治犯들이 감옥 안에서 빌려 읽은 책목록이 적혀 있는데, 1903년 1월부터 1904년 8월까지 20개월 동안 장부에 기록된 한문서적 가운데에서 「태서신사」(35회)는 「童夢先習」(36회) 다음으로 가장 많이 대출된 책이었음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다.
 
  「泰西新史」는 영국인 로버트 맥킨지(Robert Mackenzie:馬懇西)가 1892년에 런던에서 출판한 「19세기:한 역사 (Nineteenth Century : A History)」를 영국인 선교사 티모시 리처드가 한문으로 번역하여 1895년 5월에 「泰西近百年來大事記」라는 제목으로 上海에서 출판한 책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泰西新史攬要」라는 이름으로 1897년 5월에 학부 편집국에서 重刊했고, 이 책은 다시 「태셔신사」라는 이름으로 한글로 번역되었다.33)
 
  「泰西新史」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시작하여 프러시아-프랑스전쟁(1870∼71)까지의 100년 동안의 19세기 유럽사를 다룬 방대한 분량의 개설서이다. 원본은 3권 2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한문본으로 번역했을 때에는 각 장을 독립된 체제로 분리하여 24권(8책)으로 출판했다. 이 책이 어떤 목적으로 번역되었는지는 역자 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이 글은 어두운 집의 등불이요, 희미한 나루에 한쪽의 뗏목이니, 질정하여 말하면 또 백성 구하는 좋은 약이요, 나라를 보전하는 견고한 성이며 가난함을 부자되게 하는 보배요, 청국을 개화하여 새 세계를 만드는 기계니, 정병(精兵) 십만과 전선(戰船) 천 척으로 가히 비할 바 아니라.〉34)
 
  그러면서 이 서문은 청국의 당면한 개혁 과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또 극히 한 요긴한 일이 있으니 중국이 금일에 곧 학교의 제도를 고치지 아니하고 다만 중국의 고서만 읽고 자칭 대국이라 하여 타국을 업신여기면 타국의 좋은 법을 배우지 못할 뿐 아니라 마침내 중국의 본래 있는 좋은 일도 잃어버릴 것이오. 대저 일언이 폐지하고 만 가지 병과 만 가지 악이 다 타국사정 모르는 데서 생기는 것이니, 만일 타인과 같이 신법을 행하여 모르는 것을 변하여 아는 데로 나아가면 중국을 구하는 기틀이 전혀 이에 있을지라. 오호라, 어찌 살피지 아니하리오….〉35)
 
  「泰西新史」는 특히 敎育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유럽이 부강한 원동력이 교육이라면서 富國强兵策의 핵심이 「敎育入國」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泰西新史」의 내용은 한국 정부와 신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신문에서도 국가의 부국강병을 위한 기초로서 교육의 역할을 강조할 때에는 「태서신사」를 인용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정부는 「태서신사」의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태서신사」는 「公法會通」, 「西遊見聞」, 「中日略史」, 「俄國(러시아)略史」, 「尋常小學」, 「大韓地圖」, 「小地球圖」와 함께 학부에서 공립학교 교재로 사용할 것을 권장한 대표적인 책이었다.36)
 
  신문들은 「태서신사」의 중요성과 의의를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1899년 7월29일자 「皇城新聞」의 「論說」은 서양의 선진문물을 배우고 時務를 이해하기 위해서 「泰西新史攬要」를 읽을 것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있다.37) 특히 11월5일자 기사에서 아래와 같은 11개의 시사문제를 제시하면서 〈이 문제는 「泰西新史」를 먼저 읽은 뒤에 하나 하나 대답함이 가하다〉는 주석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 흥미 있다.
 
  1. 프랑스가 어떤 까닭으로 크게 혼란하며 나폴레옹 황제는 어떤 영웅인가?
 
  2. 英國은 어떤 이유로 흥성하여 세계 일등국이 되었으며, 정치의 옳고 그름이 우리나라에 비하면 어떠한가? 숨기지 말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함이 가함.
 
  3. 印度國은 어떤 까닭으로 영국의 속국이 되어 지금까지 자주치 못하는가?
 
  4. 프러시아-프랑스전쟁에서 프러시아는 왜 승리하였으며 프랑스는 왜 패배했는가?
 
  5. 오스트리아 황제 페르디난드는 왜 遜位(손위)했으며 지금은 그 나라 정세가 어떠한가?
 
  6. 이탈리아국 史記에 나폴리왕 페르디난드 2세가 그 백성을 포학하다가 각국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였으니 그 정형과 옳고 그름이 어떠한가?
 
  7. 러시아가 정치와 땅을 개척할 때에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屬地(속지)국민을 얻을 수 있었으며, 그 나라와 좋은 外交關係를 맺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이것은 러시아 약사를 잘 읽고 조목조목 대답함이 가함.
 
  8. 突厥國(돌궐국:터키)은 어떤 나라이며, 그 정치의 옳고 그름을 말함이 가함.
 
  9. 美國은 세계 가운데에서 敎化(교화)와 여러 정형이 어떻다고 할 것인가?
 
  10. 新政이 흥한 뒤에 세계가 이전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11. 우리 大韓은 어떤 정치를 해야 세계 일등국이 되며, 또 구습을 고치지 않으면 장차 어떤 지경에 도달할 것인지 자세히 著論(저론)함이 가함.38)
 
  이러한 설문으로도 「泰西新史」가 얼마나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皇城新聞」의 이 설문은 국제관계 속에서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泰西新史」를 읽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이를테면 독서 캠페인이었다.
 
 
  죄수들 교육에도 新知識 반영
 
 
  어려서 궁색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남달리 향학열에 불탔고 지방을 여행하면서도 교육상황을 관심 있게 관찰했던 金昌洙는 「泰西新史」의 내용 중에서 특히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에 큰 감명을 받았던 것같다. 감옥 안에서도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쳤던 그가 출옥한 뒤에 신교육운동에 열성적으로 헌신하는 것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다(제17장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참조). 그리고 「泰西新史」를 읽고 깨우친 신지식은 그가 죄수들을 가르치는 데에도 반영이 되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泰西新史」는 풍부한 내용면에서나 대중성면에서 신지식을 갈구하던 당시의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읽힐 만한 책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한국인의 입장에서 특별히 괄목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 책의 내용은 국제정치에서의 제국주의적 입장과 기독교적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의 개혁과 발전상을 상세히 서술하고, 영국의 인도침략이 인도의 계몽과 발전에 끼친 긍정적인 요인들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은 것이 그 보기이다. 또한 프랑스역사 서술에서는 가령 프랑스혁명의 내용과 의미보다는 나폴레옹이 끼친 영향과 의미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그리고 서유럽문명의 발전에 미친 基督敎의 영향을 강조하면서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여러나라들이 富國强兵하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金昌洙는 「泰西新史」말고도 당시 개화파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읽혔던 萬國公法에 관한 책도 아마 읽었을 것이다. 그가 1차 신문 때에 『만국공법의 조항 어디에…』 운운하면서 입회한 일본인 순사 와타나베(渡邊)를 꾸짖었던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萬國公法에 관한 서적을 읽었을 가능성은 없다.
 
  공법개념과 관련한 위정척사파의 주장은 1896년 2월25일에 유학자 崔益鉉(최익현)이 일본의 明成皇后(閔妃)시해를 비판하면서 올린 유명한 상소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상소문은 당시 衛正斥邪派(위정척사파) 유생들에게 널리 회자되었는데, 상소문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金昌洙가 일본 순사를 꾸짖으며 한 말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臣이 듣자옵건대 각국이 通和(통화)하는 데에는 이른바 公法이라는 것도 있고 또 조약(條約)이라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같은 公法과 條約 속에 과연 이웃나라의 역도들을 도와 다른 나라 君主를 위협하고, 다른 나라 國母를 시해할 수 있다는 글이 있는지 臣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그같은 것이 없다면 이른바 公法이나 條約들은 어떤 곳에 써야만 마땅하겠나이까.〉39)
 
  이러한 최익현의 상소문을 金昌洙가 심문을 받기 전에 읽었거나 전해 들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崔益鉉도 安重根도 萬國公法 강조
 
 
  당시 만국공법 이론은 신지식인들의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무렵에 소개된 만국공법 관련 서적은 「萬國公法」, 「公法會通」, 「公法便覽」의 세 종류였는데, 세 권 모두 중국에서 활동하던 미국선교사 윌리엄 마틴(William Martin)이 번역한 것이었다. 미국의 법학자 헨리 위튼(Henry Wheaton)의 「만국공법」은 1864년에, 미국 법학자 울시(Theodor D. Woolsey)의 「공법편람」은 1877년에, 독일의 법학자 블룬출리(Johannes C. Bluntschli)의 「공법회통」은 1880년에 한문으로 번역되었다.
 
  이 세 권의 책 가운데에서 1890년대 이후의 신지식인들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블룬출리의 책이었다. 그것은 大韓帝國을 선포한 뒤에 高宗이 皇帝를 칭할 수 있는 법적 근거로 인용되었고, 乙巳勒約(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에는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법적 근거로 이용되기도 했다.40) 또한 그것은 1899년 8월에 선포한 대한제국 헌법전인 「大韓國國制」를 만들 때에 그 용어나 체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41) 이런 점에서 金九도 블룬출리의 「공법회통」을 읽었을 개연성이 없지 않다. 뒤에서 보듯이 李承晩은 옥중에서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는데, 李承晩이 읽은 책 가운데에도 「태서신사람요」와 「공법회통」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하여 만국공법 이론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華夷的(화이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世界秩序의 원리를 이해하거나 일본의 침략행위를 비판하는 데 중요한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漢城旬報」는 창간호 서문에서 새로운 시대에는 만국공법을 아는 것이 시무자의 급선무임을 강조했고,42) 乙未事變 이후에는 위정척사파들도, 崔益鉉의 상소문에서 보듯이, 만국공법 개념을 원용하여 일본을 비판했다.43)
 
  뒷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安重根이 법정의 최후진술에서 『나는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어 잡혀 온 것이라 확신하므로, 나를 國際公法에 의해 처우해 주기 바란다』44)고 하여 만국공법에 따른 처우를 요구하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그러나 19세기의 유럽 공법은 본질적으로 기독교적인 윤리관에 바탕을 두고 유럽의 세계팽창을 합리화하는 법적 도구였다.45)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강의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위험에 직면해 있던 朝鮮의 지식인들이 만국공법 이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또 그것에 따른 국제적 협조에 희망적인 기대를 걸었던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형집행이 중지된 金昌洙가 막연한 옥중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그에 대한 석방운동이 전개되었다. 金九가 일생을 두고 그 호의를 잊지 못했던 극적인 인물 金周卿(김주경)이 나타난 것이었다.
 
  하루는 감리서 주사가 의복 한 벌을 가지고 와서 金昌洙에게 주면서 말했다.
 
  『강화에서 온 김주경이라는 사람이 이 의복을 지어다가 감리 사또에게 드리면서 金昌洙에게 분부하여 입게 하여 달라는 청원을 했으니, 이 옷으로 갈아 입고 있다가 김주경이라는 친구가 면회오거든 보시오』
 
  주사가 돌아가고 나서 얼마 뒤에 과연 김주경이라는 사람이 면회를 왔다. 나이는 마흔 살쯤 되어 보이고 얼굴이 단단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그는 金昌洙를 보자 별 말을 하지 않고, 다만 『고생이나 잘 하시오. 나는 김주경이오』하고는 돌아갔다. 저녁 사식을 가지고 온 곽씨부인도 김주경이 찾아왔더라는 말을 했다.
 
  『아까 강화 계신 金虞候(김우후)라는 양반이 네 아버지와 나를 찾아오셨더라. 우리를 보시고 네 의복만 자기 집에서 지어 왔다면서 우리 양주 의복하라고 옷감을 끊어 주시고, 돈 200냥을 주시면서 필요한 데 쓰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금방 가시면서 열흘 뒤에 다시 찾겠다고 하고 가시누나. 네가 보니 어떻더냐? 밖에서 듣기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더라』
 
  김주경이 金昌洙를 면회온 것은 간수 가운데 우두머리 격인 崔德萬(최덕만)이 김주경을 찾아가서 金昌洙의 이야기를 자세히 했기 때문이었다. 최덕만은 김주경의 집에 계집종으로 있던 여자의 남편이었다. 金昌洙는 최덕만에게 김주경의 내력과 인격을 자세히 물어보았다.
 
  김주경의 자는 卿得(경득)으로서 본래 강화 관아의 吏屬(이속)이었는데, 뒤에 虞候(우후)의 벼슬을 지낸 유명한 인물이었다. 김주경은 성품이 호방하여 초립동 시절에도 글읽기를 싫어하고 套錢(투전)을 일삼았다. 한 번은 그의 부모가 그를 벌 주기 위하여 며칠 동안 곳간에 감금했었는데, 그는 들어 갈 때에 투전목 하나를 감추어 가지고 들어가서 갖혀 있는 동안에 투전에 대한 여러 가지 묘법을 연구했다.
 
  곳간에서 나온 김주경은 서울로 올라가서 자기만이 알 수 있는 표시를 한 투전목을 몇만 개나 만들어 가지고 강화로 돌아왔다. 김주경은 그 투전목을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어 고깃배마다 들어가서 팔게 했다. 그리고 자기는 그 고깃배들로 돌아다니면서 투전을 하여 수십만 냥의 돈을 땄다.
 
  김주경은 이렇게 딴 돈으로 강화와 인천 각 관청의 하급 관속들을 매수하여 자신의 뜻에 따르게 하고, 또 원근에서 용기와 지략이 있다는 자들을 자기 수하로 만들어 놓고는 어떠한 세도 있는 양반이라도 비리만 저지르면 직접 간접으로 혼을 내주었다.
 
  경내에 도적이 생겨서 포교가 범인을 잡으러 나왔다가도 먼저 김주경에게 물어보아서 그가 잡아 가라면 잡아 가고 자기에게 맡기고 가라면 그냥 돌아갔다.
 
  당시 강화에는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큰 인물이 둘 있었는데, 양반으로는 李健昌(이건창)이요 상놈으로는 김주경이라고 했다. 이 두 사람은 강화유수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丙寅洋擾(병인양요) 뒤에 대원군은 서양의 침입에 대비하여 강화에 3000명의 別武士(별무사)를 양성하고 섬 주위에 포루를 쌓아 鎭撫營(진무영)을 세웠는데, 대원군이 김주경의 인품을 알아보고 그에게 包糧監(포량감)의 중임을 맡겼다.
 
  金昌洙를 면회한 다음 김주경은 최덕만의 집에 들러 음식을 먹으면서 말했다.
 
  『金昌洙를 살려내어야 할 텐데. 지금 政府大官들은 모두 눈에 구리 녹이 슬어서 돈밖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불가불 금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쉽게 방면치 못할 것 같다. 내가 집에 가서 가산 전부를 팔아 가지고 와서 金昌洙의 부모님을 모시고 서울에 가서, 어느 때까지든 金昌洙를 석방시키도록 주선을 하겠다』
 
  그는 金昌洙의 석방운동을 위해 자기의 재산을 다 들일 각오를 한 것이었다.
 
 
  韓圭卨 집 찾아가서 金昌洙 석방 간청
 
 
  열흘 남짓 지나서 약속대로 김주경이 왔다. 그는 淳泳 내외 가운데에서 한 사람만 동행하자고 하여 곽씨부인과 함께 서울로 갔다. 서울에 도착한 김주경은 법부대신 韓圭卨(한규설)을 찾아가서 金昌洙를 석방시켜 줄 것을 간청했다.
 
  『대감께서 책임 있게 金昌洙의 충의를 표창하시고, 조속히 방면토록 해야 옳지 않겠나이까. 폐하께 비밀히 주청이라도 하셔서 장래에 허다한 충의지사가 생기도록 함이 대감의 직책이 아니겠나이까!』
 
  「백범일지」는 이때에 한규설은 속으로 김주경의 말에 감복했으나 日本公使가 金昌洙 사건이 국제문제가 될까 염려하여 대신들 가운데 이 사건을 高宗에게 진언하는 사람이 있으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위험한 지경에 빠트릴 흉계를 꾸미고 있기 때문에 옳은 일인줄 알지만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고 말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다른 문헌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김주경은 욕을 퍼붓고 한규설의 집을 나왔다. 김주경은 공식적으로 청원을 하자고 하여 제1차로 법부에 청원서를 올렸다. 그는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각 관청을 돌면서 청원서를 올렸으나 모두 이리 미루고 저리 미루고 하여 결말이 나지 않았다.46)
 
  김주경은 일여덟 달 동안이나 金昌洙의 석방운동에 온 힘을 기울했다. 그동안 순영 내외는 번갈아 가면서 인천과 서울을 오르내렸다. 이때에 순영내외가 法部에 올린 청원서 가운데에서 1898년 2월에 올린 두 가지가 현재 奎章閣에 보존되어 있다. 하나는 곽씨부인이 올린 것이고 또하나는 淳泳이 올린 것인데, 곽씨부인의 청원서는 「金召史」의 명의로 되어 있고, 순영의 청원서는 이름이 「金夏鎭」으로 되어 있다.47) 「召史」는 姓자 밑에 붙여서 「홀어미」의 뜻으로 쓰는 말이다. 두 청원서는 시간적으로 보아 마지막 것이었던 것같다.
 
  두 사람은 청원서에서 자기네 아들이 國母報讐의 義理로 변복한 日本人을 죽였는데도 강도로 다루는 것은 억울하다면서 공정하게 판결하여 석방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법부의 답변은 간단했다. 곽씨부인이 올린 청원서에 대해서는 18일자 題旨(제지)로 『사정이 비록 딱하나 죄가 王의 결정사항에 관한 것이므로 용납할 수 없다』고 답변했고, 淳泳의 청원서에 대해서는 『마땅히 참작할 것이니 물러가 기다리라』고 답변했다. 순영의 청원서에 대한 法部의 제지에는 날짜가 「1일」로만 적혀 있는데, 그것은 3월1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에 淳泳 내외가 청원서에 자기네 아들이 「7대독자」라고 하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관리들의 동정심을 사기 위해서 그러한 거짓말을 했을 것인데, 아마 그것은 간큰 김주경이 그렇게 주장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淳泳 내외는 이보다 앞서 곽씨부인 명의로 인천감리에게 청원서를 올렸었다. 이때에 인천 감리는 『그 義가 가상하고 민망하기 그지 없으나 法部의 결정사항이라 본관이 임의로 다룰 수 없다』고 답변했었다.
 
  이처럼 金昌洙에 대한 석방운동은 아무런 성과없이 끝나고 김주경의 재산만 바닥이 나고 말았다.
 
 
  『조롱을 벗어나야 정말 좋은 새이며…』
 
 
  마침내 김주경은 석방운동을 단념하고 金昌洙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내용은 보통 위문편지였으나, 單律(단율) 한 수가 적혀 있었다.
 
 
  脫籠眞好鳥(조롱을 벗어 나야 진정 좋은 새요)
 
  跋扈豈常鱗(통발을 뛰어 넘어야 예사 물고기가 아니리)
 
  求忠必於孝(충은 반드시 효에서 구할지니)
 
  請看倚閭人(청컨데 애타게 기다리시는 모친을 생각하시오)
 
 
  그것은 김주경이 金昌洙에게 탈옥을 권유한 것이었다. 詩를 읽은 金昌洙는 곧 답장을 썼다. 그동안 자신의 석방을 위하여 온 힘을 다해 준 정성에는 지극히 감사하나, 한때 구차스럽게 살기 위하여 生命보다 중한 光明을 버릴 수 없으니 과히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金昌洙의 석방운동에 실패한 김주경은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재산이 동이 난 것을 보고 새로 동지들을 규합했다. 그 무렵 강화에 官用船이 세 척 있었는데, 김주경은 그 가운데 한 척을 탈취하여 해적 활동을 하려고 도모했다. 그러나 그 모의가 강화군수에게 발각되어 김주경은 도망치고 말았다. 그는 분풀이로 자신의 일을 방해한 군수가 상경하는 도중에 습격하여 실컷 두들겨 패주고는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잠적했다.48)
 
  그뒤에 순영은 서울에서의 소송자료 전부를 강화로 가지고 가서 李健昌에게 보여 주고 방책을 의논했다. 그러나 이건창 역시 탄식만 할 뿐이었다. 이렇게 하여 金昌洙의 석방운동은 아무런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죄수들이 脫獄시켜 달라고 간청
 
 
  김주경의 탈옥 권유를 거절했던 金昌洙가 탈옥을 하려고 마음먹게 된 것은 같이 있는 죄수들의 간청 때문이었다고 「백범일지」는 적고 있다. 그러나 金昌洙의 탈옥이 김주경의 석방운동이 무위로 끝나고 나서 한 달도 채 안 된 때였음을 감안하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金昌洙 스스로도 「국모보수」의 대의를 무시당한 채 기약없는 사형수 생활을 언제까지나 감내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감옥에는 앞에서 본 대로 金昌洙가 소리를 배운 기생서방 조덕근과 절도 재범으로 10년형을 받고 몇 달이 되지 않은 열예닐곱 살의 姜伯石(강백석)과 3년형의 梁鳳九 등이 있었다.49) 그밖에 절도죄로 3년형을 받았다가 만기를 거의 채우고 출옥일이 보름밖에 남지 않은 강화 출신의 黃順用이란 자도 있었다. 그는 감옥 안에서 죄수 감시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金昌洙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기들을 한 손에 몇 명씩 움켜쥐고 공중으로 날아서라도 능히 구해 줄 재주가 있는 것처럼 믿고 있는 듯했다. 이들은 이따금 金昌洙에게 다가와 자기들을 탈옥시켜 줄 것을 간청하거나 간혹 은근히 그런 뜻을 비추었다. 어느 날 조덕근이 金昌洙를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했다.
 
  『김서방님이야 언제든지 상감께서 특전을 내리시기만 하면 나가서 귀하게 되시겠지요. 저도 김서방님을 모시고 근 2년이나 고생을 했습지요. 그렇지만 김서방님만 특전을 입어 나가시는 날이면 간수의 포학이 비할 데 없이 심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어찌 10년 기한을 다 채우고 살아 나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불쌍치도 않으십니까? 그동안 가르침을 받아 國文 한 자 모르던 것이 이제는 國漢文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만일 살아 세상에 나간다면 죽을 때까지 일생의 보배가 되겠지만 여기서 죽는다면 공부한 것을 무엇에 쓰겠습니까?』
 
  「皆入小學」을 「개아가리 소학」하며 건성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했던 까막눈이 조덕근이 國漢文 편지를 쓸 수 있게 된 것은 金昌洙의 죄수들 교육이 꽤 성과를 거두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金昌洙는 근엄한 태도로 조덕근에게 말했다.
 
  『나는 죄수가 아니냐? 피차에 어느 날이고 동시 출옥이 안 되면 그 섭섭한 마음이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나?』
 
  『김서방님이 아직은 우리 더러운 놈들과 함께 계시지만 내일이라도 영광스럽게 감옥을 나가실 분이 아니십니까? 저를 살려 주시면 結草報恩(결초보은)하겠습니다』
 
  조덕근은 말뜻을 분명하게 하지 않았다. 어떻게 들으면 국왕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서 나간 뒤에 권력으로 자기를 구해 달라는 것도 같고, 또 어떻게 들으면 金昌洙가 출옥하기 전에 힘으로 자기를 구해 달라는 말로도 들렸다. 金昌洙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자기도 모르게 金昌洙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가 탈옥을 결심하게 되는 과정을 「백범일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왜놈들 즐겁게 하기 위해 옥에서 죽을 수 없다』
 
 
  〈나를 무한정 놓아 주지 않는 데도 옥에서 죽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당초에 내가 왜놈을 죽인 것이 우리 國法에 범죄행위로 인정된 것이 아니다. 왜놈을 죽이고 내가 죽어도 한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내 힘이 부족하여 왜놈에게 죽든지, 忠義를 몰라 주는 조선 관리들이 죄인으로 몰아 죽이더라도 한이 없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지금 大君主가 나를 죽일 놈이 아니라고 인정하신 것은 윤 8월26일에 電勅(전칙)한 사형 정지 한 가지 일로 족히 증명할 수 있다. 또한 이때 이후 감리서로부터 경성 각 관아에 올린 제지를 보아도 나를 죄인이라고 적시한 곳은 없다. 김경득이 그같이 자기 전 재산을 탕진해 가며 내 한 목숨 살리려 한 것도 그렇고, 인천항내 인사들이 한 사람도 내가 옥중에서 죽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없을 것임은 분명히 알 수 있다. 나를 죽이려 애쓰는 놈은 倭仇(왜구)인즉, 내가 왜놈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옥에서 죽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 아닌가!〉50)
 
  金昌洙는 깊이 생각한 끝에 마침내 탈옥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조덕근을 보고 은밀히 말했다.
 
  『조서방이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한다면 살려 줄 도리를 연구하여 보겠네』
 
  조덕근은 마음 깊이 감동하여 무엇이든지 하라는 대로 복종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죄수 네 사람을 데리고 탈옥을 한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일 수 없었다. 金昌洙는 우선 조덕근으로 하여금 집에서 돈 200냥을 가져다가 은밀히 몸에 감추어 두게 했다. 그날로 조덕근의 집에서 白銅錢(백동전) 200냥을 감옥으로 가져왔다.
 
  다음은 탈옥을 쉽게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었다. 金昌洙는 우선 감옥 안에서 영향력이 있는 황순용을 이용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金昌洙는 황순용이 강백석을 男色으로 지극히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조덕근에게 먼저 강백석으로 하여금 황순용을 조르게 했다. 이 계책은 적중했다. 황순용이 金昌洙에게 강백석을 탈옥시켜 달라고 간청해 왔다. 그러나 金昌洙는 황순용이 조바심을 내게 하기 위해서 짐짓 그를 엄중히 꾸짖었다.
 
  『네가 출옥할 기한도 멀지 않았으니 사회에 나가서 좋은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출옥도 하기 전에 범죄할 생각을 하느냐? 백석이는 어린 것이 重刑을 받아 나도 불쌍히 여기지 않음이 아니나 피차 囚人(수인)의 처지로 무슨 도리가 있겠느냐?』
 
  그러고 나서는 황순용이 거듭 자신에게 부탁하게 하라고 조덕근을 부추겼다. 황순용은 『제가 백석이의 징역을 대신이라도 지겠습니다. 백석이를 살려만 주신다면 죽을 데라도 사양치 않겠습니다』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했다. 金昌洙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황순용의 다짐을 단단히 받아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황순용이 밀고라도 하는 날이면 큰 낭패를 겪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너는 단지 더러운 정으로 백석이를 살렸으면 하는 생각이 있나 보구나. 그러나 그 마음이 내가 백석이에게 대해 그 어린 것이 필경 옥중혼이 될 것을 불쌍히 생각하는 것만 할는지가 의문이다. 또 설사 내가 백석이를 살려 주마고 허락하고 살려 줄 수속을 한다면 너는 그것을 순검청에 고발하여 나를 망신시키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만일 내가 백석이를 살리려다가 실패하여 점잖지 못한 모습만 드러나게 되면, 오늘까지 관리들의 경애를 받아왔던 것이 다 헛일이 되지 않겠는가? 백석이를 살리려다가 도리어 백석이를 죽일 터이니, 살고자 하는 백석이보다 살리려는 네 마음을 믿을 수 없다』
 
  그러자 황순용은 별의별 맹세를 다했다. 마침내 金昌洙는 절대복종하겠다는 황순용의 서약을 받고 그들을 출옥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金昌洙가 그 자신은 결코 도주하지 않고 자기들 내보내 줄 것으로 믿는 모양이었다.
 
  金昌洙는 淳永을 면회오게 하여 대장간에 가서 한 자쯤 되는 三綾槍(삼릉창)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순영도 金昌洙가 무슨 일을 벌이는 줄 짐작하고 그날 저녁으로 새 옷 속에 쇠창을 싸서 들여보내 주었다. 순영으로서는 김주경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서 온갖 방법으로 아들의 석방운동을 해 보았으나 허사였던 것을 생각할 때에 아들의 마지막 결단은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날 저녁에 곽씨부인이 사식을 넣어 줄 때에 昌洙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 밤 감옥에서 나갑니다. 아무때나 자식이 찾을 때를 기다리시고 부모님은 오늘 저녁으로 배를 타시고 고향으로 가십시오』
 
  『네가 나오겠니? 그럼 우리 둘이는 떠나마』
 
  이렇게 하여 순영 내외는 그날로 인천을 떠났다.51)
 
 
  아편쟁이 看守를 매수하여
 
 
  그날 오후에 金昌洙는 당번 간수를 불러 돈 150냥을 주면서 자기가 오늘 저녁에 한턱 낼 터이니 쌀과 고기와 모주 한 통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전에도 이따금 그렇게 한 적이 있었으므로 간수는 별 의심없이 받아들였다. 金昌洙는 그에게도 유혹적인 말을 빠트리지 않았다.
 
  『그대가 오늘 밤 당번이니 50전어치 아편을 사 가지고 밤에 실컷 먹소』
 
  매일 밤 간수 한 사람씩 감옥에서 밤을 보내는 규칙이 있었는데, 그날의 당번 간수는 아편쟁이였다. 그는 성품과 행동이 고약하여 죄수들에게 특별히 미움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金昌洙가 계획적으로 그가 당번인 날을 택했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날 밤 감옥 안은 때아닌 잔치가 벌어졌다. 50여 명의 징역수와 30여 명의 잡범들은 그동안 주렸던 창자에 고깃국과 모주를 실컷 먹고 마셨다. 흥이 오를 즈음에 金昌洙는 간수더러 도적죄수칸에 가서 소리나 시켜 듣자고 말했다. 간수는 생색이나 내듯이 외쳤다.
 
  『김서방님 듣게 너희들 장기대로 노래를 불러라!』
 
  명령이 떨어지자 죄수들은 노래를 하느라고 야단들이었다. 간수는 자기 방에서 아편을 실컷 피우고는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가무러졌다. 金昌洙는 이방 저방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노래를 듣는 척하다가 슬쩍 마루 밑으로 들어갔다. 그는 깔아놓은 벽돌을 창끝으로 들추고 땅을 파서 마침내 옥 밖으로 나왔다. 감옥 밖으로 나온 그는 담 밑으로 가서 담장을 넘을 줄사다리를 매었다. 줄사다리를 매어 놓고 나자 문득 마음속에서 갈등이 생겼다.
 
  『조덕근과 같은 도둑들을 데리고 가려다가 무슨 일이 날지 모르니 이 길로 곧 가버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 자들은 결코 나의 동지가 아니다. 굳이 구해내어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 않다. 사람이 賢人君子에게 죄인이 되어도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부끄러운 마음을 견디기 어렵거든, 하물며 저와 같이 더러운 죄인의 죄인이 되고서야 죽을 때까지 그 부끄러움을 어찌 견디랴!』
 
  결국 그는 나온 구멍으로 다시 들어가서 천연스럽게 자기 자리에 앉아 조덕근 등 네 명을 눈짓으로 내보내고 마지막으로 자기가 나왔다. 이처럼 용의주도한 탈옥준비와 아울러 「죄인의 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위험한 상황에서도 죄수들과의 의리를 지키는 행동에서 우리는 스물세 살의 청년 金九의 지도자의 자질을 느낄 수 있다.
 
  감옥 밖에 나오자 뜻밖의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앞서 나온 네 명이 담을 넘지 못하고 담 밑에 앉아서 벌벌 떨고 있었다. 金昌洙가 한 사람씩 담 밖으로 넘겨 보내고 마지막으로 담을 넘으려고 할 때였다. 별안간 담 밖에서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경무청과 순검청 쪽에서 비상을 알리는 호각소리가 울렸다. 옥담 밖에는 용동마루 쪽으로 판자 울타리가 쳐져 있었는데, 먼저 나간 네 명이 이 판자 울타리를 넘다가 그만 소리를 내고 만 것이었다.
 
  옥문 밖에서는 순검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金昌洙는 아직 담 밑에 서 있었다. 다른 죄수들을 넘겨 주기는 쉬웠으나 혼자서 한 길 반이 넘는 담을 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줄사다리를 타고 넘는 것이 제일 수월한 방법이었으나,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었다. 문 밖에서도 옥문 여는 소리가 나고 감방에 있던 죄수들도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 보았다. 마침 죄수들이 물통을 메는 데 쓰는 한 길쯤 되는 몽둥이가 눈에 띄었다. 金昌洙는 그 몽둥이를 이용하여 몸을 솟구쳐 담꼭대기를 손으로 잡고 뛰어 내렸다. 담장을 넘은 그는 누구든지 앞길을 막는 자가 있으면 처치해 버릴 생각으로 쇠창을 손에 쥐고 곧바로 정문인 三門으로 나갔다. 삼문을 지키던 파수 순검도 비상소집에 들어간 때문인지 인적이 없었다.52)
 
  이렇게 하여 1896년 5월11일에 체포된 이래로 1898년 3월20일까지 약 2년 동안 계속된 金昌洙의 첫 번째 옥중생활은 끝이 났다.
 
 
  淳永이 아들 대신 1년 동안 옥살이
 
 
  오랜만에 맛보는 신선한 새벽공기였다. 3월의 싱그러운 봄 기운이 自由의 몸이 된 金昌洙의 허파 속으로 스며 들어왔다. 「백범일지」에는 탈옥한 날이 3월9일(음력)이라고 적혀 있으나, 당시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이날은 3월21일(음력 2월29일) 새벽 1시경이었다.53)
 
  淳泳 내외는 仁川을 떠나 海州집에 도착하자 마자 뒤쫓아온 인천순검에게 체포되었다. 곽씨부인은 곧 석방되었으나 순영은 1년 동안이나 아들대신 옥살이를 해야했다. 그리하여 곽씨부인은 1898년 12월과 이듬해 3월에 남편의 석방을 탄원하는 청원서를 법부에 제출했다.
 
  청원서에서 곽씨부인은 아들의 행동이 忠義烈士라고 칭하면서도 석방하지 아니하여 아들이 부득이 탈옥을 한 것인데, 남편을 대신 구속하여 1년이 되도록 判決도 하지 않고 가두어두는 것은 억울하다고 호소했다.54)
 
  法部 刑事局은 이 문제를 논의한 끝에 昌洙 대신에 순영을 가두어 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1899년 3월에 淳泳을 석방했다.55) 金昌洙는 탈옥한 뒤 도피생활을 하다가 1년이 지나서야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다.●


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11)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1) 朴泳孝 쿠데타 陰謀事件과 탈옥 실패
 
  李承晩은 1899년 1월9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이날 尙洞病院의 미국인 의사 셔먼(Harry. C. Sherman)과 함께 진고개의 일본인 거류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別巡檢(별순검)들에게 붙잡힌 것이었다.
 
  獨立協會가 해산된 뒤에 李承晩은 남대문 앞에 있던 미국선교사들이 경영하는 감리교 병원단지에 피신해 있으면서 비밀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인 거류지에 피신해 있던 全德基, 朴容萬, 鄭淳萬 등과 더불어 「靑年會」의 이름으로 「皇帝는 나이가 많으시니 皇太子에게 양위해야 한다」는 내용의 격문을 만들어 서울 장안에 뿌리게도 했다고 하는데,1) 李承晩이 그런 일을 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李圭完, 黃鐵 등이 朴泳孝의 사주를 받아 도모한 쿠데타 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된 행동이었을 것이다.
 
 
  박영효의 쿠데타 陰謀事件에 연루된 혐의로 구속돼
 
 
  박영효 추종자들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한 박영효의 소환과 敍用(서용)운동이 좌절되자 高宗을 폐위시키고 義和君(의화군)을 황제로 추대하는 쿠데타를 기도했다. 이들의 계획은 먼저 姜盛馨(강성형)과 姜浩善이 친위대 正尉(정위) 申昌熙와 副尉(부위) 李敏稷(이민직)을 끌어들여 그들의 부하 병졸 150명과 자객 30명을 동원하여 고종을 景福宮으로 옮기고 새 정부를 조직한 다음, 박영효를 귀국시키고 平壤으로 천도하여 외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이었다.2)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다. 정부는 시위대 제3대대장이던 李根(이근용)을 시켜 쿠데타 관련자들을 일망타진했다. 새로 警務使에 제수된 이근용은 신창희와 이민직 등 옛 부하장교들로 하여금 사건을 고발하게 하고 1월6일에 주모자 윤세용, 강성형 등을 체포했는데, 李承晩이 체포된 것은 강성형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었다.3)
 
 
  日本으로 亡命할 수 없는지 타진
 
 
  경무청으로 연행된 李承晩은 강성형과 대질신문을 받았다. 그런데 강성형은 『내가 처음 심문을 받을 때에 民會 회원과 同謀하지 않았느냐고 윽박지르며 물었소. 그런데 나는 늘 李承晩이란 이름을 들어왔기 때문에 위협이 두려워 그의 이름을 댄 것이오』라고 하면서 당초의 진술을 번복했다.4) 이 진술에 근거하여 경무사 이근용은 李承晩이 李圭完과 접촉한 사실만을 확인한 채 이틀 뒤인 11일에 法部大臣 李道宰(이도재)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첨부하여 윤세용과 강성형과 함께 李承晩을 법부에 이송했다.5)
 
  〈…李承晩은 일단 규완을 찾아가서 他國에 의지할 수 있는가를 묻고 여기서는 오래 머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쓰는 바를 헤아리기 어렵다. 盛馨과 대질신문을 하는데 이르러서는 실제 사실이 없기 때문에 꾸며서 만든 것이거니와, 일부러 반역자의 이름에 오르내리는 사람을 찾아가서 거취를 상의한 것은 매우 어리석고 괴이하다.…〉6)
 
  이근용의 보고서는 이때에 李承晩이 일본으로 亡命하는 문제를 李圭完과 상의했음을 시사하는 것이어서 매우 주목된다. 「독립신문」도 李承晩이 강성형의 허위자백으로 체포된 것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경무청에서는 李承晩씨가 죄 없는 줄은 알았으나 칙령으로 잡은 고로 임의로 놓지 못하고 곧 고등재판소로 넘겼다 하더라〉7)하고 보도했다.
 
  그런데 李承晩을 만난 적이 없고 다만 그의 이름을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짓 진술을 했다고 한 강성형의 말이나, 또 그 말만으로 경무청에서 李承晩이 무고하다고 단정했다는 것이나 다 같이 적이 의아스럽다. 쿠데타 계획이 실패하자 이규완은 일본으로 도피했는데, 강성형이 이규완의 매부8)라는 점을 감안하면 강성형이 비록 李承晩을 직접 만나지는 않았을지라도 이규완을 통하여 李承晩이 쿠데타 모의에 가담하고 있었던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李承晩을 왜 특별히 보호하려고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경무청은 李承晩이 이규완을 만나서 일본으로 망명하는 문제를 상의한 것까지 확인하고서도 그를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서둘러 법부로 이송했는데, 이 점도 석연하지 않다. 그것은 아마 李承晩의 체포에 대한 미국인들의 강력한 항의와 석방요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美國公使가 李承晩 석방 요구
 
 
  李承晩이 체포되자 그와 동행했던 셔먼과 李承晩에게서 조선어를 배우던 梨花學堂의 女宣敎師 등은 그가 미국인의 통역으로 동행했음을 내세워 알렌 公使에게 그의 조속한 석방을 교섭해 줄 것을 요청했고, 알렌은 1월17일자로 외부대신 朴濟純(박제순)에게 공문을 보내어 李承晩을 즉시 석방해 달라고 요구했다.9) 그러나 박제순은 1월24일자로 알렌 공사에게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석방할 수 없다고 회답했다.10)
 
  여러 차례에 걸친 교섭에도 불구하고 李承晩의 석방이 어려워지자 알렌은 경무청 고문관 스트리플링(A.B. Stripling)에게 편지를 보내어 李承晩을 특별히 보살펴주도록 부탁했다. 일찍이 總稅務士 署理로 雇聘(고빙)되었던 영국인 스트리플링은 이때에 경무청 고문관으로 자리를 옮겨 있었다.11) 그는 옥중의 李承晩을 자주 찾아와서 李承晩이 부당한 고문을 당하지는 않는지를 감시했고, 그 때문에 李承晩은 다른 죄수들보다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이때에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렸더라면 李承晩은 오래지 않아 석방되었을 지 모른다.12) 아펜젤러는 李承晩이 「풀려나올 바로 그 무렵에」 탈옥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다고 그의 日記에 적고 있다.13)
 
  李承晩은 조속한 석방을 기대하면서도 알렌 公使가 스트리플링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을 특별히 돌보아주도록 부탁한 것을 겸연쩍게 여겼다. 그는 자서전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美國公使와 경무청의 고문관은 내가 고문을 당하거나 부당한 형벌을 받을까 염려하여 매일 (감옥으로) 나를 보러 왔다. 나는 이런 일은 獨立精神에 위배되는 일이므로 그들의 간섭을 싫어했다. 그러나 미국공사는 皇帝가 外國使臣들을 증인으로 세우고 우리의 안전을 보장했던 것이므로 그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14)
 
  알렌이 매일 감옥서를 찾아왔다는 말은 물론 과장일 것이다. 그리고 황제가 외국사신들을 증인으로 세우고 신변의 안전을 보장했다는 말은, 전년 11월26일에 황제가 만민공동회를 親諭(친유)하여 해산시킬 때에 외국사신들을 그 자리에 초빙했던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李承晩이 어떻게 미국공사의 석방요구를 「간섭」이라고 생각했는가는 다음과 같은 당시의 신문 기사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어느 신문에 李承晩씨 일로 미국공사가 편지한 일에 대하여 말하기를 李承晩씨가 편지 사연을 듣게 되면 부끄럽겠다 하였으나, 감옥서에 갇힌 사람이 주선한 것도 아니오, 편지하는 것 알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은 즉 앙불괴 부부작한 일이오, 미국사람이 통사(통역)로 끌고 가다가 잡힌 고로 유아지탄이라고 편지가 있은 모양인데, 종종 이런 편지 있는 것이 전국이 다 부끄러운 일로 아노라〉15)
 
  아무리 호의에서라고 하더라도 미결수의 석방을 요구하는 것은 외교관례에 어긋나는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李承晩 자신이나 신문이 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은 自主獨立의 국권 수호가 강조되던 시대상황에서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선교사들은 이러한 반응에 거리끼지 않았다. 아펜젤러가 발행하던 「대한크리스도인회보」가 다음과 같이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은 이때의 외국선교사들의 태도를 짐작하게 한다.
 
  〈대한 법률이 도무지 대중이 없어 유세(有勢)한 사람은 나라에 해로운 일을 할지라도 충신이라 칭하고 무세한 사람은 충애하는 목적을 가졌어도 역당이라 칭하야 무죄히 죽는 지경에 이르니, 어찌 애통할 곳이 아니리오. 그런즉 이승만씨의 원억(寃抑: 원통한 누명을 써서 억울함)한 것을 타국 사람이 간섭하는 것은 대한 법률이 밝지 못한 까닭인즉 대한 정부에 부끄러운 일이지 이승만씨에게는 조금도 부끄러운 것이 없을 듯하더라〉16)
 
 
  『백구야 훨훨 날지를 마라…』
 
 
  李承晩이 수감된 감옥서는 西小門 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판결문과 「高宗實錄」에는 그가 감옥서 안 병원에 수감되어 있었다고 했고,17) 李承晩은 그 방이 하나밖에 없는 온돌방으로서 비교적 점잖은 죄수를 수감하는 곳이었다고 상기하고 있다.18) 이러한 우대는 스트리플링의 배려에 의한 조치였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감방에는 李承晩에 앞서 이미 유죄판결을 받은 徐相大라는 사람이 수감되어 있었다. 강원도 杆城(간성) 군수였던 그는 乾鳳寺(건봉사)의 승려가 頑悖(완패)한 짓을 하자 그 승려를 잡아 다스린 적이 있었는데, 그 일로 재판이 벌어져서 법부대신 趙秉式(조병식)이 그 승려로부터 뇌물을 받고 재판하는 바람에 억울하게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15년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이었다.
 
  李承晩은 수감되기 전에는 서상대와 일면식도 없었다. 그는 서상대와 함께 고독한 나날을 보내다가 먼저 수감되어 있던 독립협회의 동지 崔廷植(최정식)과 함께 있게 해달라고 스트리플링에게 부탁하여 세 사람이 한 감방에 있게 되었다.
 
  李承晩과 의기투합하여 「매일신문」을 만들었던 과격파 최정식은 1898년 8월에 이른바 語逼至尊(어핍지존: 말로써 임금을 꺼리게 함)의 불경죄로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하고 있었다. 8월5일에 독립협회는 화폐발행을 관장하는 度支部 典♥局(전환국) 국장 李容翊이 惡貨를 남발하여 물가가 폭등하자 그를 고발할 것을 논의했었는데, 이 때에 崔廷植은 이용익의 행위가 高宗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하니 그를 고발하자면 高宗을 증인으로 삼는 결과가 될 것이라면서 고발을 반대했었다. 그러나 그 말 자체가 어핍지존의 불경죄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19) 독립협회는 高宗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최정식을 제명하고 한성재판소에 한 차례 공개재판을 청원했을 뿐 그 이상의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20)
 
  최정식은 白鷗타령을 잘 불렀다. 울적한 밤이면 『백구야 훨훨 날지를 마라…』하고 구성지게 목청을 뽑곤했다.21)
 
  이들 세 사람이 脫獄을 하게 되는 경위가 매우 이례적으로 判決文에 기록되어 있다. 판결문에 따르면 탈옥을 주동한 사람은 최정식이었다.
 
  최정식은 李承晩에게 다음과 같이 탈옥을 권유했다.
 
  『당신과 나 두 사람이 民會 중에서 저명한 사람인데, 장차 앉아 죽기를 기다리려 하오?』
 
  『나는 罪犯이 없소. 어찌 죽기를 기다리리오』
 
  『시국 형편이 전일과 다르니 당신은 깊이 헤아려 살아날 방략을 도모함이 옳을 것이오』
 
  『죄가 있으면 마땅히 감처(勘處:죄를 심리하여 처단함)할 것이요, 죄가 없으면 석방이 될 터이거늘 달리 살기를 도모할 방도가 있단 말이오?』
 
  『어리석으이. 시세를 헤아리지 아니함이 어찌 그리 심한고. 만일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후회해도 쓸데없으리다. 지금 계책은 옥문을 도망하여 나가는 것만한 것이 없소』
 
  그리하여 李承晩도 탈옥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22) 「高宗實錄」 역시 최정식과 서상대가 李承晩에게 탈옥할 것을 권유도 하고 협박도 하여 같이 탈옥하게 되었고, 서상대가 최정식 집에 묵고 있는 崔鶴周(최학주)로부터 권총 두 자루를 들여왔다고 적고 있다.23)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사실과 다르다.
 
 
  기다리는 民衆 이끌고 鐘路에서 共同會 다시 열기로
 
 
  李承晩이 탈옥을 결심한 것이 최정식의 회유 때문이 아니었던 것은 그 자신이 자서전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외세의 도움을 받지 않고 다시 뛰쳐나가 민중운동을 시작하려고 했다. 수 천명의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가 다시 나서서 그들을 부르기를 원하고 있었는데, 나는 周商鎬(周時經의 원명)로부터 시국정세를 듣고 있었다. 우리는 민족주의자 군중이 감옥문 밖에서 나를 맞이하여 종로로 달려가서 군중대회를 다시 열기로 결정했다. 권총이 들어왔다. 어느 날 오후에 崔廷植과 徐相大와 나는 감옥을 뛰쳐나왔다. 두 사람은 감리교 주택지대로 뛰어갔으나 나는 아무도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 것을 보고 너무 실망하여 쓰러져버렸다. 나는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서로 약속한 시간에 대한 착오가 있어서 바깥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 때에 우리가 나갔던 것이다〉24)
 
  독립협회가 해산된 지 한 달이 지난 뒤였고 사회 분위기도 朴泳孝 쿠데타설과 관련하여 獨立協會에 냉담해져 있었으므로 만민공동회가 다시 열릴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때인데도 李承晩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은 잘못된 정보에 따른 판단착오였을 것이다. 혹은 주시경이 군중동원을 기도했다가 여의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때의 일에 대해서 올리버의 전기는 위와 같은 감옥서 밖의 상황을 李承晩이 최정식과 서상대에게 알려주었다고 했고,25) 서정주의 전기는 李承晩이 한층 더 적극적으로 〈徐相大, 崔廷植을 달래어〉 같이 탈옥해서 다시 만민공동회를 모아 협회를 부흥하기로 굳게 맹세한 다음 주시경에게 부탁하여 권총을 반입했다고 적고 있다.26)
 
  매켄지(F.A. McKenzie)도 〈李承晩과 그의 동료 한 사람은 정부 반대운동을 일으키고자 석방되기 전에 감옥에서 탈출했다. 그러나 그들의 친구들은 잘못 알고 도와줄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곧 다시 체포되고 말았다〉27)라고 비슷한 서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들을 종합해 보면, 탈옥을 주도한 사람은 李承晩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李承晩의 탈옥과 관련하여 윤치호가 그의 일기에 〈李承晩은 지각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다〉28)라고 비평하고 있는 것은 李承晩이 탈옥하기 전에 독립협회 간부들과 협의했던 것은 아니었음을 말해 준다.
 
  주시경은 최정식의 집에 묵고 있는 崔鶴周를 통해 권총 두 자루를 비밀리에 들여보냈는데,29) 주시경이 그처럼 쉽사리 권총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무렵 서울에서 권총의 암거래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었고 치안당국이 그것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실제로 이 무렵 독립협회의 저명인사들은 호신용으로 권총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30)
 
 
  권총 들고 도망하다 친위대 군인에게 체포돼
 
 
  세 사람은 1월30일에 탈옥했다. 권총은 李承晩과 최정식이 나누어 가졌다. 오후 5시경에 이들은 감옥 문을 벗어나서 서소문 쪽으로 뛰었다. 그러나 맨 뒤에 섰던 李承晩은 감옥 문 앞에서 스트리플링과 실랑이를 벌이느라고 일행에 뒤처져서 때마침 훈련에서 돌아오던 시위대 제2대대 행렬과 마주쳤다. 李承晩은 뒤쫓아오던 간수들의 고함소리를 들은 병사 崔永植에게 붙들리고 말았다.31)
 
  앞서 달려간 崔廷植은 간수가 순찰 중이던 병정 및 순검과 함께 추격해 오자 쫓아오던 간수를 향해 권총을 쏘아 어깨를 맞추고 서상대와 같이 배재학당 담을 넘어 달아났다. 뒤따라 간 스트리플링이 들어가서 두 사람을 인계할 것을 요청했으나 배재학당에서는 미국공사에게 말하라면서 거절했다. 두 사람은 스트리플링이 미국공사에게 연락하기 위해 순검을 부르러 간 사이에 배재학당 인쇄소의 유리창을 넘어 도망쳤다.32)
 
  경무청에서는 두 탈옥수를 체포하기 위해 미국공사관을 상대로 교섭을 벌였다. 경무청 관원이 漢城判尹의 공문을 가지고 미국공사관으로 갔다. 그러나 알렌은 外部大臣의 공문을 가지고 오면 받겠으나 이 공문은 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또 서울에 있는 미국인 집을 다 수색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어느 집이든지 지정을 해 가지고 오면 수색을 허락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2월3일에 경무청 관원들이 외부대신의 공문을 가지고 다시 가서 미국인 순사 한 사람과 같이 배재학당과 아펜젤러의 집을 수색했으나,33) 그때는 두 사람이 이미 양장한 여자로 변장하고 서울을 빠져나간 뒤였다.
 
 
  (2) 죽음의 공포 속에서 하나님에게 기도
 
  李承晩은 칼을 뽑아 든 병정들에게 둘러싸여 남대문 안의 시위대 병영으로 끌려갔다. 병영에서 대기하고 있는 동안에 한 병정이 李承晩에게 물 한 그릇을 떠다 주면서 눈빛으로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는 경무청으로 이송되었고, 경무청에서는 당장 심한 고문이 가해졌다. 심문의 초점은 권총의 출처였다. 이에 대해 李承晩은 『최정식이가 사람을 시켜 들여왔는데 도망할 때에 防身之策을 하자고 한 일이다』하고 책임을 도망간 최정식에게 떠넘겼다.34)
 
  李承晩은 자서전 초고에서 이 때에 자기를 고문한 사람이 「박들북」(Park Dul Puk: 徐廷柱의 전기에는 「박돌팍」)이라는 皇國協會 사람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는 나와 가장 적대적인 정적의 한 사람이었는데, 황실에 연락하여 황제로부터 전화로 고문을 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35) 「박들북」이란 아마 어떤 인물의 별명일 것이다. 徐廷柱는 「박돌팍」이 警務使였다고 했으나36) 이때의 警務使 이근용은 황국협회와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李承晩이 자신에 대한 「박들북」의 잔인한 고문이 高宗의 뜻이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그가 얼마나 고종을 증오하고 있었는가를 시사해 준다.
 
 
  고문 후유증으로 손가락 부는 버릇 생겨
 
 
  李承晩이 탈옥을 주도했다는 증거를 잡지 못한 경무청은 심문을 만민공동회 때의 일로 확대했다. 李承晩의 진술에 따라 이튿날 延洪植 등 「매질꾼」 다섯 사람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전년 11월21일에 황국협회가 만민공동회를 습격했을 때에 만민공동회 회장 高永根으로부터 매일 「일원전 한푼씩」의 일당을 받고 동원된 행동대였다. 이들은 李承晩과 함께 법부로 넘겨졌다가 모두 곤장을 맞고 풀려났다.37)
 
  처음 고문을 당하던 날의 일을 李承晩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그들은 나를 캄캄한 방에 눕혀 놓았는데, 나는 그 다음날 아침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때에 나는 감옥으로 다시 끌려가기 전에 얼마나 죽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나에 대한 적의를 마구 뿜어내는 성난 동물들 같았다. 족쇄, 수갑, 형틀……〉38)
 
  법부로 이송되자 李承晩은 형사국 마당에서 『어느 날에나 죽이는고?』라고 말하고, 또 고등재판소로 내려가다가는 황토마루에서 관아들이 있는 쪽을 바라보면서 『十衙門을 마지막 보는구나』 하고 비장한 심정을 토로했다.39) 그는 자기가 사형을 당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李承晩이 다시 수감된 감방은 온돌방이 아닌 흙바닥의 을씨년스러운 중죄수 감방이었다. 李承晩의 목에는 큰 칼이 채워지고 손은 뒤로 묶이고 발에는 차꼬가 채워졌다. 처음 며칠 동안 李承晩은 매일 끌려나가서 고문을 당했다. 고문은 잔인했다. 무릎과 발목을 묶은 뒤 두 다리 사이에 주릿대를 끼워 警吏(경리) 두 명이 힘껏 틀었고, 세모난 대나무 조각을 손가락 사이에 단단히 묶어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록 비틀기도 했으며, 마루 위에 엎드려 놓고 대나무 몽둥이로 살이 해어지도록 때렸다. 이때에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李承晩은 뒷날 흥분하거나 초조할 때면 손가락을 후후 부는 버릇이 생겼다.40)
 
  李承晩이 기독교에 입교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잔혹한 고문을 당하면서 『나는 이제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만 있으면 다른 세상에 갈 터인데, 저 외국사람들이 나에게 말해 준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세상의 감옥에 가 있게 될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는 배재학당 예배실에서 『네가 너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용서하실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말이 떠오르자마자 그는 목에 채워진 칼에 머리를 숙이고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 주시고, 나의 나라를 구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다.41)
 
  그는 성경이 읽고 싶어졌다. 얼마 뒤에 셔우드 에디(Sherwood Eddy)가 조그마한 영어 「신약(New Testament)」 한 권을 몰래 들여보내 주었다. 李承晩은 그 「신약」을 열심히 읽었다. 몸이 부자유스러운 李承晩을 위해 그가 성서를 읽을 때에는 죄수 한 사람이 파수를 서고 또 한 사람은 책장을 넘겨 주었다고 한다.42) 사전 없이도 영어 성서를 읽었다는 것은 비록 내용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더라도 이때에 이미 李承晩의 영어실력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말해 준다. 李承晩은 성서를 읽으면서 마침내 〈나의 마음속에 드리운 그 안위와 평안과 기쁨은 형용할 수 없었다〉43)고 할 만큼 마음이 안정되었다.
 
  배재학당에 입학할 당시에 어머니 김씨부인이 아들을 보고 행여 「天主學꾼」이 되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하자 『저는 그들이 하는 말을 믿기에는 너무도 총명합니다』라고 말하면서44) 기독교인이 될 가능성을 단호히 부인했던 그가 이제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절박한 심리상태에서 영혼의 구원을 바라며 예수를 찾은 것이다. 이렇듯 李承晩이 기독교도가 된 동기는,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西洋의 文物을 습득하는 방편으로 기독교에 입교하는 金九나 그 밖의 다른 개화파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서 특기할 만한 일이다.
 
 
  「제국신문」에 李承晩 처형 슬퍼하는 詩 실려
 
 
  李承晩의 체포와 재판의 추이에 대해서는 신문들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가 다시 수감된 지 보름이 지난 2월17일자 「제국신문」은 「잡보」란에 蔡圭象(채규상)이라는 시위대 제1연대 1대대 병정이 기고한 詩 형식의 글을 실었다.
 
  〈불쌍하다. 불쌍하다. 이승만씨 불쌍하다.
 
  위국단심 일편으로 만분지일 보답타가
 
  시운이 불행하여 어망홍리(魚網鴻離)되었구나.
 
  세궁하고 역진하여 배심월옥 도주타가
 
  자취기화(自取其禍) 되었으니 애닯고 가석토다.
 
  십아문(十衙門)아 잘있거라 다시 볼 날 어느 때냐.
 
  …………………………………
 
  십목소시(十目所視) 보는 바에 정세가 가긍하여
 
  반 모슬총(毛瑟銃: 모제르총) 잠깐 잡고 두어 자 기록하나
 
  피눈물이 솟아나서 어불성설 되는구나.
 
  그 몸 대신 속할진대 이내일신 허하겠소〉45)
 
  황실의 호위를 담당하는 시위대 군인이 탈옥죄로 재수감된 죄수를 동정하는 글을 실명으로 기고했다는 사실은 그 내용과 더불어 주목할 만하다. 李承晩은 같은 방의 죄수가 審問을 받으러 나갔다가 검사의 방에서 훔쳐온 신문에서 이 기사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46)
 
  李承晩의 첫 공판은 3월18일에 열렸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재판을 받으러 끌려가는 것을 보려고 기다리던 복녀는 순검에게 뺨을 맞았고, 복녀의 남편은 李承晩을 가마에 태워서 재판소에 데려갔다가 데려왔다.47) 재판장은 만민공동회가 「五凶」의 한 사람으로 규탄했던 법부대신 兪箕煥(유기환)이었다.
 
  李承晩의 재판에 대해 「皇城新聞」은 〈풍설을 들은 즉 이씨가 一律(死刑)을 면키 어렵다 하나 기왕의 조칙 중에 미결수는 판결에서 減一等하라 하셨으니 법관들이 조칙대로 시행할 지경이면 이씨의 縷命(누명: 한가닥 목숨)을 보존할 듯 하다더라〉 하고 보도했다.48) 기사에서 말하는 조칙이란 전년 11월26일에 高宗이 만민공동회와 황국협회 대표를 불러 親諭(친유)할 때에 만민공동회의 진정에 따라 내린 사면령과 이해 3월19일자로 황태자의 탄신일을 경축하여 반포된 사면령을 뜻하는 것이었다.49)
 
  그러나 謀反죄인은 제외했기 때문에 李承晩이 쿠데타 陰謨에 가담한 사실이 밝혀진다면 감형대상에 포함되기는 어려웠다.
 
  언제 사형장으로 끌려나갈지 모르는 암울한 감방생활이 계속되었다. 李承晩은 아버지에게 올리는 유서를 써 가지고 있다가 어느 날 사형을 당하게 된 줄 알고 옆에 있던 중죄수에게 그것을 맡겼다. 그러나 그 중죄수가 먼저 사형을 당하게 되어 그는 이승만의 유서를 지닌 채 형장으로 끌려갔다.50)
 
  이 무렵 李承晩은 감옥에서 아버지에게 보내는 유서를 세 번 썼고 敬善은 두 번이나 아들의 시체를 거두어 가기 위해 감옥서 문 앞에서 밤을 새웠다.51) 李承晩 자신도 자서전 초고에서 〈어떤 늙은 죄수가 비밀히 감옥 속으로 들여온 신문을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주었다. 지난 밤에 李承晩이가 사형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며칠을 두고 내 시체를 찾으려고 감옥서 문 앞에 왔다 가셨다〉라고 적고 있다.52) 그러나 현존하는 당시의 신문에는 그러한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朴氏夫人이 仁化門 앞에 엎드려 上疏
 
 
  李承晩이 사형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자 오달지고 괄괄한 성품의 박씨부인이 남편의 구명운동에 나섰다. 박씨부인은 3월 23일에 상소문을 직접 써가지고 仁化門 밖에 나아가 엎드렸다. 앞의 「皇城新聞」에 李承晩의 재판기사가 난 지 사흘 뒤의 일이다. 이 사실을 보도한 당시의 신문은 〈부인이 남편을 위하야 상소하는 뜻은 뉘 장하다 아니하리오〉53)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박씨부인이 이틀 동안을 인화문 앞에 엎드려 통곡하자 궁에서 순검이 나타나서 말했다.
 
  『칙임관 외에는 상소를 못하기로 향일 관보에 장정(章程)이 났고 상소할 만한 일이 있으면 중추원으로 헌의하면 중추원에서 회의하야 의정부로 통첩하면 의정부에서 상주하는 것이어늘, 여기서 백날을 있을지라도 격식이 틀려 그 상소를 받아들이지 못하겠으니 중추원으로 가시오』54)
 
  간수가 말한 장정이란 이 무렵 빈번한 상소를 제한하기 위하여 칙임관 이상만 직접 상소를 할 수 있게 하고 일반인은 중추원에 헌의하거나 재판소에 제소하도록 한 조치를 말한다.55)
 
  상소를 올릴 수 없자 박씨부인은 法部에 남편을 조속히 재판해 줄 것을 청원했다. 그러나 이것마저 여의치 않자 중추원에 다음과 같은 헌의서를 제출했다.
 
  〈본인의 남편이 본디 가세가 청빈하여 외국인의 집으로 다니며 고용을 하다가, 연소 몰각한 탓으로 망령되이 민회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횡리지액(橫罹之厄)을 당하야 죄수가 되었더니, 남의 꾀임을 듣고 월옥 도주하려다가 또 망사지죄(罔赦之罪)를 범하였은 즉, 무죄 방송하기는 본인의 헤아리는 바가 아니오나 조속히 판결 방송하야 팔순 시모와 청년 여자의 무의무탁하야 노상으로 유리하여 고생함을 면하게 하여 주소서〉56)
 
  그러나 중추원에 제출한 이 헌의도 거부되었다. 박씨부인이 헌의서에서 「팔순 시모」라고 한 것은 물론 시부 李敬善을 지칭한 것이었다. 시모 김씨부인은, 앞에서 보았듯이, 3년 전인 1896년 7월에 사망하고 없었다. 그리고 이때에 경선은 쉰여덟 살이었다.
 
 
  「脫獄從犯」으로 종신형에 곤장 100대
 
 
  李承晩의 두 번째 재판은 4월10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함께 탈옥했던 崔廷植이 5월8일에 체포됨에 따라 재판이 늦어져서 7월10일에야 平理院에서 열렸다.57) 서울을 벗어난 崔廷植은 진남포로 숨어 일본으로 탈출하려고 기도하다가 묵고 있던 여관집 주인의 밀고로 체포된 것이었다.
 
  5월30일자로 司法制度가 바뀌어 高等裁判所가 平理院으로 개편되고,58) 공교롭게도 황국협회의 만민공동회 습격을 지휘했던 洪鍾宇가 7월7일부로 재판장으로 부임해 있었다. 이때의 재판 상황에 대해 李承晩은 자서전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의 정적이던 洪鍾宇가 평리원의 재판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자기 앞에서 나의 형틀을 제거하도록 명령했다. 홍종우는 황국협회의 회장으로서 나의 가장 큰 정적의 하나였는데, 재판장이 되어 나의 사건을 판결하는 자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된 일인지 나의 생명을 살리려고 온갖 힘을 써 주었다. 참으로 인생의 야릇한 역전이었다.…
 
  그(崔廷植)와 내가 재판을 같이 받게 된 날 나는 몸이 몹시 쇠약해서 몸을 가눌 수 없는 처지였다. 그는 활기 있게, 그리고 웅변조로 나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웠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방어할 기력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너무 말을 많이 하다가 나에 대한 진술 중에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 따라서 판사는 다음날 그를 추궁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그가 전날 한 말에 걸려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물적 증거로 나의 권총이 제출되었는데, 나는 한 방도 쏘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재판장 홍종우가 나의 부친에게 나를 살려주기로 결정했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는 소식은 퍽 뒤에 들었다〉59)
 
  이 글로 미루어 보면 崔廷植은 李承晩이 탈옥을 주도했고 권총을 쏜 것도 李承晩이었다고 강력히 주장했던 것이다. 이튿날의 판결에서 최정식은 탈옥하다가 제지하는 간수에게 총을 쏜 죄로 교수형을 받았고 李承晩은 脫獄從犯(탈옥종범)으로 인정되어 사형을 면하고 笞(태) 일백과 종신형에 처해졌다. 판결문은 다음과 같다.
 
  〈…(崔廷植의) 어핍지존한 일은 증빙이 確的(확적)하지 못하고 李承晩이가 姜盛馨의 口招(구초)에 난 일은 죄 있는 情跡(정적)이 없으나, 두 죄범이 옥을 벗어나 도망하다가 최정식이가 방포하야 사람을 상한 모든 사실은 피고 등 陳供(진공)과 여러 證參(증참: 증인으로 현장에 참석함)으로 더불어 명백한지라. 피고 최정식은 大明律에 죄를 범하고 도망하다가 잡는 것을 막고 사람을 몰아 傷하는 律에 비추어 絞(교)에 처하고, 피고 李承晩은 같은 조에 隨從(수종)이 된 자의 율에 비추어 笞 일백, 징역 종신에 처한다〉60)
 
 
  韓圭卨이 감옥에 있는 李承晩에게 편지
 
 
  이처럼 판결문은 최정식이 어핍지존한 혐의나 李承晩이 朴泳孝 쿠데타 陰謀에 가담한 사실은 무혐의로 처리했다. 그러나 만일에 李承晩이 쿠데타음모에 가담했던 사실이 그대로 밝혀지고 탈옥도 그가 주도했던 것이 인정되었더라면 그는 아마 死刑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李承晩에 대한 판결에는 그의 석방교섭을 벌였던 알렌 공사와 외국인 선교사들의 활동이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61)
 
  李承晩의 재판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은 高宗과 개화파들로부터 함께 신망을 받고 있던 韓圭卨의 도움이다. 한규설과 李承晩의 친분관계가 언제부터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李承晩은 옥중에 있을 때나 옥에서 나와서 미국으로 떠날 때에도 한규설의 도움을 받았다. 이 시기에 李承晩이 한규설로부터 받은 한문 편지가 열 통이나 보존되어 있어서 두 사람의 각별한 친분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한규설은 李承晩이 체포되기 직전인 1898년 12월까지는 法部大臣, 고등재판소 재판관 등 중책을 맡고 있었고, 李承晩이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宮內府 특진관으로 있었다.62) 이러한 한규설이었으므로 李承晩이 死刑을 면할 수 있도록 재판에 영향을 미쳤을 개연성은 있다.
 
  李承晩의 재판이 계류되어 있는 동안 독립협회의 잔존세력이 벌인 폭력투쟁도 李承晩의 재판에 어떤 작용을 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6월 초부터 한 달 남짓 동안 서울거리를 온통 공포분위기에 몰아 넣었던 이때의 폭력투쟁은 진고개의 일본인 거류지에 숨었던 高永根, 崔廷德, 林炳吉 등이 주도한 것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李承晩과 행동을 함께 했던 과격파들이었다. 보부상 단체 상무사의 대표인 참정대신 申箕善, 중추원 의장이 되어 있던 趙秉式, 독립협회 회원이었으나 변절자로 지탄을 받던 의주군수 方漢德, 그리고 朴定陽 등 고관들의 집이 잇단 폭탄테러로 큰 피해를 입었다.63)
 
  경무청에서는 순검을 늘려 순찰을 강화하고 병정들까지 투입하여 밤 二更(밤 9시부터 11시 사이)부터 통행금지를 실시하고,64) 매 10戶를 1統으로 묶어 1통마다 순검 1인씩을 배치하여 순찰을 하게 했다. 이러한 삼엄한 경계는 6월22일 경 임병길 등 주모자들이 체포될 때까지 계속되었다.65) 이들이 체포되면서 순검과 병정들은 평상시의 임무로 복귀했으나, 심야 순찰은 각 궁을 중심으로 보부상패에 의해 계속되었다.
 
  사형이 집행되던 날 최정식은 교수대로 끌려가면서 李承晩을 보고 말했다.
 
  『李承晩씨, 잘 있으시오. 당신은 살아서 우리가 같이 시작한 일을 끝맺으시오』66)
 
  李承晩의 태형 집행을 맡은 간수는 공교롭게도 李承晩 일행이 탈옥할 때에 최정식이 쏜 총에 다리를 맞은 金允吉이었다. 李敬善은 그에게 돈을 주어 매질을 아프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태형 집행 준비가 되었을 때에 입회하러 온 판사는 시작하라고 명령을 하고는 문을 닫고 가버렸고, 간수는 『하나, 둘, 셋…』 하고 세면서 몽둥이를 들었다 놓았다 할 뿐이었다. 행형이 끝났을 때에 李承晩의 몸에는 아무 상처도 나 있지 않았다.67) 그것은 李敬善이 쥐어준 돈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李承晩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펜젤러가 李承晩 집에 쌀과 장작 보내
 
 
  李承晩이 투옥되자 당장 문제가 된 것은 박씨부인의 호소대로 가족의 생계였다. 이 무렵 李承晩의 가족들은 南署의 長洞에 살고 있었다.68) 우수현에 살던 그들이 언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李承晩의 판결문에 주소가 漢城府南署長洞으로 되어 있다. 李承晩이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박씨부인은 살림을 줄여 昌信洞, 新設洞, 樓下洞 등의 변두리를 전전했고, 그러면서도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새벽마다 남편의 사식을 마련해 갔다고 한다.69)
 
  이러한 李承晩의 가족들을 돌보아 준 것도 외국 선교사들이었다. 아펜젤러는 李承晩의 가족에게 담요와 쌀과 장작을 보내주었고, 옥중의 李承晩에게는 옷을 차입해 주었다.70)
 
  李承晩에 대한 구명운동은 꾸준히 전개되었다. 의정부 議政 尹容善은 李承晩을 직접 간접으로 도와주었고, 1899년 11월 중순에는 이른바 六犯(음모, 살인, 강도, 절도, 간음, 사기)을 제외한 모든 죄수는 칙령에 따라 석방한다고 발표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조치에 따라 李承晩이 곧 석방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계획이 실행되기 전에 尹容善이 議政에서 물러남에 따라 李承晩의 석방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71) 다만 12월13일과 22일에 잇달아 減一等씩의 특사를 받아 李承晩의 형기는 종신징역에서 10년으로 단축되었다.72) 이때의 두 차례의 특사는 莊獻世子(장헌세자: 뒤주에 갇혀 죽은 思悼世子)를 莊祖(장조)로 追尊(추존)하게 된 데 따른 것이었다.
 
 
  새 監獄署長의 배려로 번역 작업
 
 
  李承晩이 옥중생활을 통하여 인격적인 성숙과 학문의 진전을 성취하는 데에 큰 계기가 된 것은 확정판결이 있고 나서 7개월 뒤인 1900년 2월4일에 金永善이라는 개명한 관리가 監獄署長으로 부임한 일이었다. 金永善은 수감된 정치범들의 처우를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자유를 허락했고, 특히 李承晩에게는 학문에 관한 책을 무엇이든지 번역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뿐만 아니라 그 번역작업의 사례로 「남의 이목이 두려울 만큼」많은 돈까지 지급하여 李承晩으로 하여금 그 돈으로 밖에 있는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게 해 주었다.73)
 
  金永善에 대해 李承晩은 자서전 초고에서 〈金永善이 간수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나에게 특별히 친절했다〉고만 적고 있을 뿐이고,74) 그가 어떤 인물이며 왜 李承晩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李承晩의 처조카인 朴貫鉉의 말로는 金永善이 嚴妃의 사람이었고 李承晩의 장모 李씨가 엄비의 침모로 입궁했다가 壬午軍亂 때에 사망한 관계로 엄비가 李承晩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75) 한편 李承晩의 말을 토대로 하여 저술된 올리버의 전기는 엄비가 李承晩이 집필한 「제국신문」논설의 애독자였다고 적고 있다.76)
 
  또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韓圭卨이 金永善에게 李承晩을 잘 대우하도록 당부했을 가능성이다. 한규설이 李承晩의 특사 문제를 여러 방면으로 알아본 것이 그가 옥중의 李承晩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나 있는데, 날자 미상의 한 편지에는〈(감옥)서장을 만나 이야기를 했소.… 그가 혹시 염두에 둘지. 바라건대 안심하시오〉라고 씌어 있다.77) 법부대신을 지냈고 현직 궁내부 특진관인 한규설의 말을 판임관 6급인 한성감옥서장이 소홀히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새로 부임한 간수장 李重鎭도 李承晩에게 친절했다.
 
  李承晩은 金永善의 후의로 몇 종류의 책을 번역했다. 그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것은 5월에 시작하여 넉 달 동안 작업한 「中東戰記本末」 번역이었다. 그러나 애써 번역한 책들은 좀처럼 출판도 되지 못하고 李承晩은 울적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그에게 온 정열을 쏟아 자신의 뜻을 피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1901년 1월경부터 「제국신문」의 논설을 써 내보내게 된 것이 그것인데, 이는 경영이 어려워진 「제국신문」을 혼자서 만들다시피 하고 있던 李鍾一이 비밀리에 李承晩에게 부탁한 것이었다.78) 「제국신문」논설 집필은 1903년 4월17일까지 27개월이나 계속되었다.
 
  이처럼 옥중에서 일간 신문의 「논설」을 장기간 집필한 사실은 세계의 言論史에서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李承晩의 논설 집필이 중단된 것은 「제국신문」의 경영권이 1903년 1월부터 군부의 참서관으로서 代辦砲兵局長인 崔岡(최강)에게 넘어갔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때에 崔岡은 황실로부터 2,000원의 內帑金(내탕금)과 함께 이전 廣文社의 가옥과 인쇄시설을 하사받았다.79)
 
 
  아펜젤러가 죽자 하루 반을 울며 단식
 
 
  李承晩에 대한 외국 선교사들의 석방운동은 확정판결이 있고난 뒤에도 계속되었다. 李承晩과 친분이 있던 선교사들은 그를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다 해주었다〉.80) 그 결과 1900년 겨울에는 高宗이 언더우드(M.G. Underwood) 목사에게 가까운 기회에 李承晩을 사면하여 석방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이들 선교사들은 李承晩이 늦어도 高宗 탄신 50주년 경축 특사에는 포함될 것으로 기대했다. 정부는 1901년 9월7일에 그 경축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하면서 恩赦令(은사령)을 내려 六犯 이외의 죄수들을 모두 사면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李承晩은 제외되었다.
 
  마침내 아펜젤러를 비롯하여 에비슨(O.K. Avison), 벙커(D.A. Bunker), 헐버트(H.B. Hulbert), 게일(J.S. Gale)의 다섯 사람은 1901년 11월9일에 연명으로 내부협판 李鳳來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선교사들이 이봉래 앞으로 편지를 보낸 것은 그가 이들 선교사들에게 高宗의 李承晩 석방 약속을 전달했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의 편지는 문면은 정중했으나 高宗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 대한 항의였다. 그들은 李承晩이 한국인 환자의 치료를 위해 왕진가던 미국인 의사를 도우려 동행하다가 체포되었음을 다시금 상기시키면서 조속한 석방을 촉구했다.81) 그러나 정부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황실과 교분이 있는 이들 미국인 선교사들의 청원마저 묵살되자 李承晩에 대한 선교사들의 석방운동은 주춤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해가 바뀌면서 석방운동의 핵심 인물이던 아펜젤러가 뜻밖의 사고로 사망함으로써 李承晩은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아펜젤러는 1902년 6월11일에 목포에서 개최되는 성경번역위원회의 회합에 참석하러 가던 도중에 그가 탔던 배가 다른 배와 충돌하여 침몰하는 바람에 익사하고 말았다.82) 李承晩은 은사의 비보를 듣자 하루 반을 내리 울고 단식을 했을 정도로 깊은 슬픔에 잠겼다.83)
 
  이 무렵 李承晩은 서소문 옥사에서 서린동에 새로 지은 종로 옥사로 이감되었다. 종로 옥사는 갑오경장 때에 左右捕盜廳을 폐지하고 警務廳을 설치하면서 종전의 典獄暑를 監獄暑로 개칭하여 경무청에 소속되게 하고 西小門 안으로 옮김으로써 폐옥이 되었던 것인데, 1901년 5월부터 청국에서 들여온 벽돌로 외벽을 쌓는 등 대대적인 개축을 하여 1902년 4월에 준공 한 옥사였다.84) 그러나 감옥서의 운영실태는 크게 개선된 것이 없었다.
 
 
 
  (3) 監獄署學校와 書籍室
 
  李承晩의 옥중활동 가운데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옥중에 학교를 만들어 죄수들을 가르친 일이었다. 李承晩은 1901년 초에 감옥서장 金永善에게 刑政의 개혁을 건의하는 「寄本署長書(기본서장서)」라는 건의서를 제출했다. 한문으로 된 이 장문의 건의서는 李承晩의 서양 선진 제국의 형정에 관한 지식과 함께 한국 형정 개혁에 관한 구체적인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무릇 감옥을 설치한 것은 사실 백성 가운데 불량한 자로 하여금 개과천선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泰西(西洋)의 옥정을 살펴보건대 仁愛寬恕(어짐, 사랑, 관용, 용서)의 제 조항 밖에도 별도로 지극히 선한 한 가지 조항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 한국이 마땅히 빨리 본받아 시행해야 할 일입니다.… 백성으로서 法律을 위반하는 일은 태반이 직업을 잃어 의지할 곳이 없는 자들로부터 나오는데, 이것 역시 敎化가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백성 위에 있는 사람은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그 죄만을 미워하여 죄과에 따라 오직 법으로만 다스리려 합니다.…〉
 
  이처럼 그는 교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몇 가지 형정 개혁방안을 말하고 나서 결론적으로 감옥 안에 학교를 개설할 것을 건의했다.
 
  〈바라건대 각하께서는 이러한 정황을 가엾게 여기시고, 겸하여 學校를 세워 學問을 권장하는 훌륭한 뜻을 본받으십시오. 특별히 한 칸의 방을 허락하시어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을 골라서 한 곳에 모아 수업을 받게 하고, 아울러 등에 불을 켜는 것을 윤허해 주십시오. 필요한 火具는 모두 자력으로 준비하고 주야로 권면하여 切磋(절차: 연마)의 보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겸하여 심심풀이하는 방편으로 삼고 또한 책을 번역하고 물건을 만들어 비용에 충당하겠습니다.…〉85)
 
  이러한 李承晩의 건의에 따라 1902년 8월에 감옥서 안에 학교가 개설되었다. 옥중학교의 설립 경위와 운영 실태에 대해서는 李承晩 자신이 감리교단에서 발행하던 잡지 「신학월보」에 기고한 「옥중전도」라는 감동적인 신앙고백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우선 옥사의 한 칸을 치우고 각 칸에 수감되어 있는 아이들 수십명을 불러다가 「가갸거겨…」를 써서 읽혔다. 더러는 웃기도 하고, 더러는 흉도 보고, 또 더러는 책망도 했다. 그러나 李承晩은 이러한 일에 개의치 않고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한글을 모두 깨우쳤고 「東國歷史」와 「明心寶鑑」을 어려서부터 배운 아이들 못지 않게 익혔다. 각자의 희망에 따라 英語와 日語도 가르쳤고, 산술은 加減乘除(가감승제)를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찬송가 너댓 가지는 「매우 들을 만하게」 불러
 
 
  글을 가르치는 것과 동시에 그는 전도에도 힘써서 아이들은 「신약」을 열심히 읽고, 아침 저녁 기도는 저희들 입으로 하며, 찬송가 너댓 가지는 「매우 들을 만하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성과에 대해 李承晩은 〈어린 마음이 장래에 어떻게 변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믿을 만한 사람은 이 중 몇 아이만한 사람이 많지 못할지라〉 하고 자부하고 있다.86)
 
  이 시대까지도 한국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 미성년범죄자를 별도로 다루는 제도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오히려 부모나 가까운 친척 대신에 징역을 사는 어린 代囚(대수)들도 있었다. 시카고에 세계 최초로 소년재판소가 설치된 것은 1899년의 일이며 한국에서는 1923년에 처음으로 소년교도소가 설치되었다.
 
  영어를 큰 소리로 따라 읽고 찬송가를 합창하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하는 아이들과 이들을 가르치는 李承晩의 열성적인 모습은 절망적인 감옥 안의 분위기를 크게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소년죄수들이 공부하는 것을 보고 성인죄수 가운데서도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李承晩은 감옥서의 협조를 얻어 다시 성인반을 개설하여 聖經, 英語, 地理, 文法 등을 가르쳤다. 이들 어른 죄수들은 거의가 漢文은 말할나위도 없고 다른 外國語를 배운 경험이 있는 政治犯들이었으므로 학업의 성취도 빨랐다. 이 무렵 한성감옥서에 수감된 죄수들은 350여 명쯤 되었는데,87) 이들 가운데에서 40명 가량이 정치범이었다.88)
 
  감옥서장 金永善도 매우 협조적이었다. 그는 토요일마다 大廳(대청)에서 都講(배운 것을 시험하는 것)을 받아 우수한 사람에게는 종이로 상급을 주고 못하는 사람에게는 벌로 절을 시켰다.
 
  이 감옥학교에는 李承晩과 함께 다른 敎師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李承晩과 같이 배재학당에서 공부했던 申興雨였고, 다른 한 사람은 독립협회 간부로 활동했던 梁起鐸이었다. 신흥우는 1901년 11월23일에 수감되어 3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복역했고, 양기탁은 1901년 무렵에 구속되어 종신형을 받았다가 1903년 무렵에 석방되었다.89) 신흥우는 어른반을 맡아 가르쳤고, 양기탁은 아이들반을 맡아 가르쳤으며, 李承晩은 두 군데를 다 맡아 가르쳤다. 李承晩은 가끔 여러 주제에 대해 강의를 했는데, 그 내용은 주로 미국의 정기간행물에서 읽은 민주주의에 관한 것들이었다.90)
 
 
  『감옥학교는 西洋의 開明한 나라에도 없어』
 
 
  金九와 마찬가지로 李承晩 역시 같이 수감되어 있던 죄수들을 가르칠 생각을 했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朝鮮朝의 전통적인 교육열에 기인하는 것이겠으나, 세계의 刑政史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李承晩의 이러한 열성은 그를 지원하는 외국 선교사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한 사정은 신흥우의 아버지 申冕休(신면휴)가 쓴 「獄中開學顚末」이라는 글에도 잘 나타나 있다.
 
  〈며칠 전에는 외국사람들이 옥중에 학교가 설립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기뻐하면서, 西洋의 開明한 나라에도 그러한 일이 없다고 하면서 서적과 식품을 많이 가지고 들어가서 여러 학생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하고 극구 찬양도 하고 갔으니…〉91)
 
  그러면서 신면휴는 李承晩이 어려서 자기에게 배울 때에도 才明이 있었음을 강조했다. 또한 당시의 신문은 옥중학교의 개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감옥서장 金永善씨가 人民의 敎育이 無하야 근일에 犯科處役한 자가 甚多(심다)함을 개탄하야 月前부터 감옥서 내에 學校를 설립하고 죄수를 교육하는데, 교사는 李承晩, 梁義宗(梁起鐸의 初名. 宜鍾이라고도 썼다)씨요 교과서는 개과천선할 책자요, 英語 算術 地誌 등서로 열심 교도하는 고로 英人 벙커씨가 매 일(일요일) 일차씩 와서 교과를 贊務(찬무)하고 서책을 다수 공급하므로…〉92)
 
  감옥서 안의 학교 소식은 밖에서도 큰 관심거리가 되어 많은 내외국 사람들이 연조를 해 왔다. 제물포에 사는 어떤 사람은 익명으로 「제국신문」에 지폐 2원을 보내면서 감옥서학교의 학비에 보태라고 했다. 李承晩은 이 일과 관련하여 〈이원으로 보태어 아이들에게 의복을 고쳐 입히니 참 감동할 만한 일이라〉 하고 적고 있다.93)
 
  영국인 벙커가 서책을 다수 공급했다는 말은 이 기사가 나기 3주일 전에 벙커 목사가 한성감옥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넣어준 종교서적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감옥에서 크리스마스 축하행사 열어
 
 
  1902년 12월25일에 감옥서 안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축하행사가 열렸다. 그리고 특히 흥미 있는 것은 이날의 행사 비용을 감옥서 간수들과 죄수들이 함께 추렴했다는 사실이다. 다과를 준비하고, 관민 40여 명이 모여 설레는 분위기 속에서 축하 예식을 올렸다.
 
  이날 감옥을 찾아온 벙커 목사는 모인 아이들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며 매 일요일마다 와서 이들을 가르치겠다고 약속했다. 이때부터 그는 약속대로 일요일마다 감옥에 와서 아이들이 공부한 것을 문답도 하고 성경도 가르쳤다. 이날 벙커 목사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종교서적 150여 권을 가지고 왔었는데,94) 이것이 기본이 되어 감옥서 안에 서적실이 마련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서적실을 꾸리기 위해서는 우선 책장이 있어야 했다. 李承晩은 〈사백냥 돈을 들여 책장을 만들고…〉라고 적고 있는데,95) 그것은 李承晩 자신이 책장을 직접 만들었다는 뜻이다.96) 李承晩은 손재주가 좋아서 옥중에 있으면서 반닫이 같은 간단한 가구를 만들어 朴씨부인에게 내보내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97)
 
 
  책장 직접 짜서 書籍室 만들어
 
 
  책장이 마련되자 李承晩은 여기 저기에 부탁하여 책들을 수집했다. 李承晩이 〈성서공회에서 기꺼이 찬조하여 50원을 위한하고 보조하기를 허락하여 각처에 청구하야 서책을 수합함에, 지어 일본과 상해에 외국 선교사들이 듣고 서책을 연조한 자가 무수한지라〉98)라고 썼듯이, 서적실을 가장 적극적으로 도와준 것은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과 상해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선교사들이었다.
 
  처음 서적실을 개설할 때에는 장서 수가 250여 권 정도였으나 개설한 지 2년이 못 되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때의 監獄署圖書貸出簿가 보존되어 있어서 서적실에 어떤 책들이 비치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도서대출부는 마치 금전 출납부와 같은 대장에 1903년 1월17일에서 1904년 8월31일까지 20개월 동안 죄수들과 간수들이 언제 누가 무슨 책을 대출해가고 또 언제 반납했는지를 적고 있고, 끝에 「監獄署書籍目錄」이라고 하여 서적실에 비치되어 있던 책 523권의 목록이 실려 있다. 성서를 비롯한 기독교 관계서적이 대부분이었으나, 4분의 1 가량은 정치, 경제, 법률, 역사, 과학에 관한 책과 개인전기 등이었다.99)
 
  李承晩은 서적실이 마련되는 1903년 1월 중순부터 유길준의 아우 兪星濬과 함께 서적실에서 기거하면서 서적실 운영을 담당했다. 한성감옥의 감방 수는 모두 20칸이었고, 일련번호가 붙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大廳直房」,「學堂」,「書籍室」과 같은 기능별 방을 비롯하여 「東 1간」,「外東 2간」 등의 별채도 있었다. 물론 「女間」은 따로 있었다. 李承晩은 5월 중순에 「서적실」에서 7간으로 옮겼다가 11월 말부터 이듬해 여름 출옥할 때까지 「학당」에서 지냈다.100)
 
  서적실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가는 개설되고 처음 15일 동안에 책을 본 사람이 무려 268명이고, 2월 한 달 동안에 249명이 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101)
 
 
  콜레라에 걸려 죽어나가는 환자들 돌보아
 
 
  李承晩의 「옥중전도」가운데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혈육의 연한 몸이 오륙년 역고에 큰 질병이 없이 무고히 지내며, 내외국 사랑하는 교중 형제 자매들의 도우심으로 하도 보호를 많이 받았거니와, 성신이 나와 함께 계신 줄을 믿고 마음을 점점 굳게 하여 영혼의 길을 확실히 찾았으며, 작년 가을에 괴질이 옥중에 먼저 들어와 사오일 동안에 륙십여 명을 목전에서 쓸어내일 새, 심할 때는 하루 열일곱 목숨이 앞에서 쓰러질 때에 죽는 자와 호흡을 상통하며 그 수족과 몸을 만져 곧 시신과 함께 섞여 지내었으되 홀로 무사히 넘기고, 이런 기회를 당하여 복음 말씀을 가르치게 됨에 기쁨을 이기지 못할지라. …이 험한 중에서 이 험한 괴질을 겪으며 무사히 부지하여 있는 것이 하나님의 특별히 보호하신 은혜가 아니면 인력으로 못하였을 바이오…〉102)
 
  이것은 1902년 9월에 옥중에 콜레라가 번졌을 때의 이야기다. 감옥서학교가 개설되고 한 달쯤 지난 때였다. 8월에 러시아의 沿海州 일대에서 발생한 콜레라는 함경도 일대를 거쳐 서울에까지 침범하여 엄청난 희생자를 내었다. 매일 200∼300명의 시체가 水口門과 西小門으로 나가는 참상이 벌어졌다.103) 도성이 이러한 형편이었으므로 위생상태가 열악한 감옥서 안에서 희생자가 더 많이 났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李承晩은 초인적인 노력으로 환자들을 간병하고 시신을 거두었다. 그는 애비슨(Avison) 의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애비슨은 감옥서를 방문하여 환자들을 치료하려고 당국에 허가를 신청했으나 왠지 허락을 받지 못했다. 李承晩은 애비슨에게서 약을 구해 가지고 그의 지시대로 환자들에게 먹였다.104)
 
  이 무렵에 한성감옥서에 수감되었던 金亨燮은 이때의 처절한 상황을 자세히 적어 놓았다. 감옥서 당국은 콜레라 환자들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고열 때문에 목이 마른 환자들에게 물도 주지 않았다. 간수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가망없어 보이는 환자들을 밖으로 옮겨놓는 것뿐이었다. 간수들은 환자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환자들의 발을 가끔씩 차보곤 했다. 움직이지 않는 환자가 있으면 죽은 것으로 보고 인부를 시켜 감옥서 문 앞으로 옮겼고, 쌓인 시체는 밖으로 실려나갔다.105)
 
  李承晩이 콜레라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던 것은 죽어가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한다는 깊은 신앙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무사했던 것은 물론 그의 타고난 건강 때문이었을 것이나,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특별히 보호하신 은혜」라고 믿었던 것이다.
 
  李承晩은 콜레라 환자들을 보살핀 일을 韓圭卨에게 자세히 알렸다. 그것은 아마 감옥서의 형편에 대한 한규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그가 관계 요로에 자기의 특사문제를 교섭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李承晩의 편지에 대해 한규설은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괴질이 유행해서 들리는 바가 날로 놀랍고 참담하오이다. 나는 兄의 생각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소이다. 방금 兄의 편지를 받고 기쁘기 짝이 없소이다. 그리고 편지에 자세히 쓰신 敎示는 감회를 이길 수 없구려. 지금 내가 분발하려 하지만 하나는 事力이 미치지 못하고 다른 하나는 내 형편이 그렇게 하기가 어렵소이다. 금년 여름 이후로 들어앉아 있으니, 내 형편을 이해해 주실 줄 믿소이다.…〉106)
 
  李承晩이 감옥에서 적어 놓은 여러 가지 문서 가운데에는 英文으로 된 「감옥서 사망자 기록(Obituary of Kam Ok Su) 1902」이라는 것이 있다.107) 이 문서는 1902년 1월부터 1903년 1월까지 감옥서에서 죽은 사람들의 상황을 간략히 적은 것인데, 콜레라가 한창이던 1902년 9월12일자에는 「여자 죄수 1명, 두 살짜리 딸을 남기고 죽음」, 「하루아침에 모두 10명, 콜레라로 죽음」 등의 사항을 그때그때 적고 마지막에 「하루에 17명 죽음」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12월21일자에는 「모두 84명」이라고 적고 있다. 李承晩의 집계로는 콜레라가 침입했던 1902년에 죽은 죄수가 84명이었다는 말이다. 사망자를 이렇게 꼼꼼히 적어놓은 동기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것은 죄수들의 죽음에 대한 李承晩의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죽음은 종교적 思惟(사유)의 근본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李承晩의 행동은 그가 인간의 삶과 죽음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영혼은 영생한다는 기독교의 원리를 체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李承晩의 人脈이된 「獄中開化黨」
 
  콜레라는 날씨가 추워지면서 수그러들었다. 그런데 李承晩이 이때에 성심성의로 콜레라 환자들을 돌본 것은 그 자신의 신앙에도 새로운 경험이 된 것 같다. 李承晩은 선교사들이 차입해 주는 영문잡지 「아우트룩(The Outlook)」과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를 애독하고 있었고, 특히 「아우트룩」의 어떤 기사는 저녁에 눈을 감고 암송할 정도로 정독했다.
 
  「아우트룩」은 뉴욕에서 발행되던 비종파적인 종교 주간지로서 한창일 때에는 12만 5000부가 나갈 만큼 미국의 지식인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 그것은 그 잡지의 편집인인 브루클린의 플리머스(Plymouth) 조합주의 교회의 목사 애보트(Lyman Abott)의 영향 때문이었다. 노예해방운동의 선두에 서기도 했던 애보트는 미국의 지식인 독자를 상대로 사회구원의 신학사상을 역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메시지는 유교적 세계에서 자라난 동양선비들의 구미에도 꼭 맞는 것이었다.108)
 
  李承晩은 「옥중전도」에 이어 출옥할 때까지 다섯 편의 논설을 「신학월보」에 기고했는데,109) 이들 논설을 통하여 그가 강조한 것은 기독교의 사회구원이었다. 그는 개인구원의 주장에 대해서는 〈충군애국이 무엇인지, 세상을 건지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다만 제몸 하나와 제 영혼 하나의 구원얻는 것만 제일이라 할진대 이는 결단코 하나님의 참 이치와 예수의 근본 뜻을 알지 못한다 이를지라〉 하고 단호하게 반대했다.110) 이러한 주장은 李承晩이 애보트의 종교사상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를 말해 준다.
 
 
  『병인이 있어야 의원이 쓸 데 있느니라』
 
 
  흥미있는 것은 李承晩이 성서의 모든 말씀 가운데 가장 감동되는 것이 〈병인이 있어야 의원이 쓸 데 있느니라〉라는 구절이라고 한 점이다. 이 말은 稅吏와 罪人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고있는 예수를 보고 비난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비유적으로 나무란 예수의 말로서, 정확하게는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쓸 데 있느니라〉111)라는 구절이다.
 
  李承晩은 성서의 어떤 구절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는데, 위의 구절은 「신학월보」에 기고한 다섯 편의 논설 가운데에서 두 번이나 인용하고 있다. 그것은 李承晩이 콜레라 환자들의 간병을 통하여 자기의 소명이 병자들과 같은 한국의 민중을 구원하는 의사의 역할임을 더욱 절실히 의식하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일 것이다.
 
  李承晩으로 하여금 죽음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한 것은 콜레라 환자들의 죽음만이 아니었다. 자기의 유서를 지닌 채 처형된 중죄수와 『당신은 살아서 우리가 같이 시작한 일을 끝맺으시오』라고 하면서 교수대로 끌려가던 崔廷植의 모습을 그는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뒤에도 그는 많은 정치범이 처형되는 것을 보았다.
 
  高宗 양위음모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했다가 1900년 2월에 귀국하여 자수한 뒤 석 달쯤 복역하다가 처형당한 초대 독립협회 회장 安♥壽(안경수)와 그와 함께 활동했다가 같이 처형당한 갑오경장 때의 경무사 權瀅鎭(권형진)의 죽음도 보았다. 두 사람은 정식 재판도 없이 처형되었는데, 이때에 감옥서 안에 게시되었던 방문을 李承晩은 그대로 베껴서 간직했다.112)
 
  朴泳孝를 귀국시키기 위한 거사 자금 마련을 위해 활동하다가 1901년 8월에 체포되어 처형당한 河元泓(하원홍) 등 아홉 명의 죽음도 보았다. 革命一心會를 조직하여 義親王 옹립을 모의하다가 1902년 5월에 체포되어 2년 가량 복역한 뒤에 처형되거나 옥사한 張浩翼, 趙宅顯, 金鴻鎭, 權浩善 등 무관들의 죽음도 보았다. 장호익은 세 번째 내리치는 칼소리가 날 때까지 계속해서 만세를 불렀다.
 
 
  40명 이상 基督敎에 入敎시켜
 
 
  사형장은 감옥서 안에 있었다. 李承晩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죄수들도 있었다. 李承晩은 그들에 대해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가서 편안히 돌아가시오』라고 말을 해주는 것뿐이었다〉라고 적고 있다.113) 사형수들이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李承晩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아마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는 그만큼 열심히 죄수들을 돌보고 전도했던 것이다. 그는 감옥서의 관원들을 포함하여 40명 이상을 기독교에 입교시켰다.114) 간수장 李重鎭도 입교시켰다.
 
  李承晩이 옥중생활을 하는 동안 이런저런 죄목으로 한성감옥서에 투옥되었다가 기독교인이 되어 나간 정치범도 많았다. 의정부 총무국장과 參贊(참찬)을 지낸 독립협회 부회장 李商在, 승지와 법부협판을 지낸 李源兢(이원긍), 경무관을 지낸 金貞植, 개성군수를 지낸 洪在箕, 강화 진위대 장교인 柳東根과 洪正燮 등은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쿠데타음모에 관련된 혐의로 1902년 6월에 투옥되었다가 1904년 3월과 8월에 석방되었는데, 석방된 뒤에는 게일 선교사가 시무하는 蓮洞敎會에 나가기 시작하여 뒷날 한국 교회운동의 중심적 인물들이 된다.
 
  이밖에 부여군수를 지낸 이상재의 아들 李承仁과 兪吉濬의 동생 兪星濬도 李商在 등과 같은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1904년 3월에 이승인은 석방되고 유성준은 유배되었다.
 
  1904년에는 제국신문 사장 李鍾一, 상동청년회의 주요 멤버였고 뒷날 上海臨時政府를 이끄는 李東寧, 한성재판소 검사보였고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열사」로 추앙받게 되는 李儁, 회령군수를 지낸 안경수의 양자 安國善 등이 투옥되어 李承晩과 동지적 유대를 맺었다. 이밖에도 李承晩의 「청일전긔」 역술을 도운 鄭淳萬, 李承晩의 「독립정신」 원고를 어렵게 미국으로 반출하고 李承晩의 아들 泰山을 미국으로 데려가기도 한 절친한 동지였다가 뒷날 독립운동 방략문제로 적대적 관계가 되는 朴容萬 등도 李承晩과 옥중생활을 같이했다.
 
  이들은 함께 신약성서를 연구하고 서적실에 있는 기독교서적을 열심히 빌려 읽으면서 신앙생활을 함께했다. 그것은 이 나라에서 官吏와 兩班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는 최초의 일이었다.115) 천주교와는 달리 주로 서민과 하층계급의 민중들 사이에 전파되던 개신교를 李承晩과 외국선교사들의 열성적인 전도의 결과로 마침내 관리와 지식인 등 양반계층에서 받아들이게 된 것은 교회사적으로도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116) 「獄中開化黨」이라고 불리게 되는 이들은 뒷날 독립운동 과정에서 李承晩의 중요한 人脈이 된다.
 
  李承晩은 옥중에서 얻은 신앙과 열성적인 전도활동을 통하여 사회와 민중의 구원을 위한 소명의식을 한층 더 강하게 느꼈다. 그는 성서 속의 예수의 형상에서 자신의 사고와 행동의 준거를 찾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 자신의 삶도 인류를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117) 그러한 의식은 「옥중전도」의 첫 부분을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고 있는 데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 중에 내가 홀로 특별한 인기를 얻어 내외 국문의 여러 가지 서책을 얻어 주야 잠심(潛心: 마음을 가라앉혀서 깊이 생각함)하며, 같이 있는 친구들을 간절히 권면하야 가르치매, 몸 이르는 곳에 스스로 문풍이 생기더라〉118)
 
  이러한 문장은 감옥생활에서 체득한 기독교적 소명의식과 유년기 이래의 특별한 우월감이 절묘한 융합을 이루어 그가 더욱 자기중심적인 인간형으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함께 수감생활을 했고 함께 감옥 학교에서 가르쳤던 申興雨는 李承晩이 「포용성」이 부족한 것이 결점이라고 지적했다. 옥중에서 두 사람은 자주 말다툼을 했는데, 李承晩은 자기의 주장에 반대하는 것을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같은 방에 있다가 자기가 방을 옮겨야 할 때도 있었다고 신흥우는 회고하고 있다.119)
 
 
  눈길 끄는 두 장의 獄中寫眞
 
 
  이 무렵에 李承晩이 다른 죄수들과 같이 찍은 사진 두 장이 보존되어 있다. 선교사들이 찍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 사진들은 기독교인이 된 李承晩이 감옥을 변화시키면서 그의 마음이 얼마나 평온했는지를 보여준다.
 
  한 장은 1903년에 강원달, 洪在箕, 兪星濬, 李商在, 金貞植, 安明善, 金麟, 柳東根, 李承仁, 그리고 아버지 대신 복역했던 한 소년과 함께 벽돌 옥사를 배경으로 하여 찍은 것이다. 김린과 유동근이 죄수복을 입지 않고 의관을 정제한 모습이 눈에 띄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귀했을 사진을 찍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李承晩은 다른 죄수들과 달리 쇠사슬을 두 어깨와 가슴에 묶고 한 손에 삿갓을 벗어든 중죄수 복장을 하고 다른 죄수들과 조금 떨어져서 왼쪽 끝에 서 있다.
 
  어떻게 李承晩 혼자 이런 모습으로 사진을 찍었는지 알 수 없다. 뒷날 李承晩은 미국에서 「독립정신」을 간행하면서 이 사진에서 자신의 모습만을 잘라내어 「본 책 저술할 때에 본 저술가 리승만 본 형태」라는 설명을 붙여 수록했다.120) 뿐만 아니라 이 사진은 3·1운동이 나고 李承晩이 漢城政府의 執政官總裁로 발표된 뒤에 시카고의 한 한인교포가 만들어 유포시킨 우편엽서에도 사각모를 쓰고 가운을 입고 찍은 프린스턴 대학 졸업식 때의 사진과 나란히 실려 있다.
 
  출옥하던 해에 같이 성경공부를 하던 옥중동지들과 아들 泰山과 함께 옥사 입구에서 찍은 또 한 장의 사진에 보이는 李承晩의 모습은 비록 몸은 수척해 있으나 마치 시골 개척교회 전도사와 같은 순수하고 온유한 표정이다. 李承晩의 머리는 약간 왼쪽으로, 아들 태산의 머리는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다른 사람들과 달리 부자가 다 나막신을 신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1899년 1월에 체포되어 1904년 8월에 석방되기까지 무려 5년 7개월 동안의 囹圄(영어)생활을 하면서 李承晩이 어떤 學習을 했고 그것을 통하여 그의 학문적 수준과 思想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우리는 다음호에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孫 世 一
  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 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 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 「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에 政界에 투신하여, 11·14·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會通商産業委員長, 國民會議 정책위 의장, 원내총무, 韓日議員聯盟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 「韓國戰爭勃發背景 연구」, 「金九의 民族主義」 등이 있고, 著書로 「李承晩과 金九」, 「人權과 民族主義」, 「韓國論爭史(編)」, 譯書로 「트루먼 回顧錄(上, 下)」, 「現代政治의 다섯 가지 思想」 등이 있다.
 
 
  1) 徐廷柱, 「李承晩博士傳」, 三八社, 1949, 178쪽. 2) 法部編, 「司法稟報」 제23책, 光武 4년 1월24일조, 質稟書 제7호;「高宗實錄」 卷40, 光武 4년 2월9일조: 朴泳孝의 쿠데타 陰謀事件에 대해서는 尹炳喜, 「第二次日本亡命時節 朴泳孝의 쿠데타 陰謀事件」, 「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下)」, 一潮閣, 1994, 1678∼1707쪽 참조.
 
  3) 鄭喬, 「大韓季年史(下)」, 國史編纂委員會, 1957, 2∼3쪽. 4) 위의 책, 3쪽. 5) 「제국신문」 1899년 1월12일자, 「잡보」. 6) 法部編, 「司法稟報(乙)」 제14책, 光武 3년 1월11일조, 報告書 제2호. 7) 「독립신문」 1899년 1월13일자, 「별보」. 8) 法部編, 「司法稟報」 제23책, 光武 4年 1月24日條 質稟書 제7호. 9) 鄭喬, 앞의 책, 12∼13쪽. 10) 高麗大學校 亞細亞問題硏究所編, 「舊韓國外交文書 第11卷: 美案(2)」, 高麗大學校出版部, 1967, 482∼483, 485쪽;「매일신문」 1899년 1월27일자, 「잡보」. 11) 金賢淑, 「近代西洋人顧問官硏究, 1882∼1904」, 梨花女子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8, 부록 참조. 12)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New York, Dodd mead and Company, 1960, p.45. 13) 아펜젤러의 1899년 12월28일자 日記, 이만열 편, 「아펜젤러― 한국에 온 첫 선교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5, 415쪽. 14) 李庭植 譯註, 「靑年李承晩自敍傳」, 「新東亞」 1979년 9월호, 432쪽. 15) 「제국신문」 1899년 1월25일자 「잡보」.
 
  16) 「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9년 2월1일자, 「내보」. 이 무렵의 외국선교사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任善和, 「선교사의 독립협회와 대한제국 인식―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중심으로―」, 「全南史學」 제14집, 2001. 6, 67∼93쪽 참조. 17)「官報」1328호, 1899년 8월1일자, 「司法」;「高宗實錄」 제39권, 1899년 8월27일조. 18) 徐廷柱, 앞의 책, 180쪽. 19) 法部編, 「起案」 제63책, 光武 2년 8월7일조, 訓令漢城裁判所 제63호, 愼鏞廈,「獨立協會硏究」, 一朝閣, 1976, 323쪽 참조. 20) 「독립신문」 1898년 8월10일자, 「잡보」. 21) 徐廷柱, 앞의 책, 181쪽. 22) 「官報」 1328호, 1899년 8월1일자, 「司法」; 金炳華, 「近代韓國裁判史」, 韓國司法行政學會, 1974, 576∼577쪽.
 
  23) 「高宗實錄」 제39권, 1899년 8월27일조. 24) 앞의 「靑年李承晩自敍傳」, 432쪽. 25) Robert T. Oliver, op, cit, p.46. 26) 徐廷柱, 앞의 책, 182쪽. 27) F.A. Mckenzie, Korea’s Fight for Freedom, 1920, Ams Press, New York, p.74. 28) 「尹致昊日記(五)」 1899년 1월30일조, 206쪽. 29) 鄭喬, 앞의 책, 13쪽; 앞의 「靑年李承晩自敍傳」, 432쪽. 30) 鄭喬, 앞의 책, 12쪽. 31) 위의 책, 13쪽. 32) 「매일신문」 1899년 1월31일자, 「잡보」;「皇城新聞」1899년 2월1일자, 「雜報」. 33) 「매일신문」 1899년 2월6일자, 「잡보」. 34) 「제국신문」 1899년 2월4일자, 「잡보」. 35) 앞의 「靑年李承晩自敍傳」, 433쪽.
 
  36) 徐廷柱, 앞의 책, 285쪽. 37) 「매일신문」 1899년 2월3일자, 「잡보」; 鄭喬, 앞의 책, 14쪽. 38) 앞의 「靑年李承晩自敍傳」, 433쪽. 39) 「매일신문」 1899년 2월4일자, 「잡보」. 40) Robert T. Oliver, op, cit, p.49. 41) 앞의 「靑年李承晩自敍傳」, 439쪽. 42) 같은 글, 433쪽. 43) 같은 글, 439쪽. 44) 같은 글, 437쪽.
 
  45) 「제국신문」 1899년 2월17일자, 「잡보」. 46) 徐廷柱, 앞의 책, 190쪽. 47) 앞의 「靑年李承晩自敍傳」, 433쪽. 48)「皇城新聞」 1899년 3월20일자, 「雜報」. 49) 都冕會, 「1894∼1905年間 刑事裁判制度硏究」, 서울大國史學科 博士學位論文, 1998, 184쪽. 50) 徐廷柱, 앞의 책, 193쪽. 51) 文讓穆, 「독립정신」 서문, 「梨花莊所藏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一)」, 延世大學校 現代韓國學硏究所, 1998, 18쪽. 52) 앞의 「靑年李承晩自敍傳」, 433쪽. 53) 「제국신문」 1899년 3월25일자, 「잡보」;「독립신문」 1899년 3월25일자, 「잡보」. 54) 「제국신문」 1899년 3월27일자, 「잡보」. 55) 「官報」 1899년 1월6일자. 56) 「매일신문」 1899년 3월30일자, 「잡보」. 57) 「독립신문」 1899년 4월11일자, 「잡보」. 58) 金炳華, 앞의 책, 82쪽;「독립신문」1899년 6월 6∼23일자, 「재판소개정건」.
 
  59) 앞의 「靑年李承晩自敍傳」, 433∼434쪽. 60) 「官報」1899년 8월1일자, 「司法」;「독립신문」 1899년 8월2일자, 「선고서」. 61) 高珽烋, 「開化期 李承晩의 思想形成과 活動(1875∼1904)」, 「歷史學報」 109, 1986, 44쪽. 62) 安龍植編, 「大韓帝國期官僚史硏究(Ⅰ∼Ⅳ)」, 延世大學校 社會科學硏究所, 1995, Ⅰ의 808∼809쪽, Ⅱ의 969쪽, Ⅲ의 744쪽. 63) 「독립신문」 1899년 6월10일자, 12일자, 13일자, 14일자, 15일자, 「잡보」. 64) 「독립신문」 1899년 6월15일자 「잡보」. 65) 「독립신문」 1899년 6월26일자 「잡보」. 66) 앞의 「靑年李承晩自敍傳」, 434쪽. 67) 위와 같음. 68) 「독립신문」 1899년 3월25일자 「잡보」. 69) 李承晩의 처조카 朴貫鉉 증언. 「人間李承晩百年 (31)」, 「한국일보」 1975년 4월25일자.
 
  70) 李承晩이 아펜젤러에게 보낸 1899년 12월18일자 편지. 이만열 편, 앞의 책, 4∼6쪽. 71) 李承晩이 아펜젤러에게 보낸 1900년 2월6일자 편지. 이만열 편, 위의 책, 416∼417쪽. 72) 「官報」1899년 12월19일 및 12월 30일자, 「司法」. 73)「寄本署長書」, 「獄中雜記」,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二)」, 42쪽. 74) 앞의 「靑年李承晩自敍傳」, 434쪽. 75) 「人間李承晩百年(36)」, 「한국일보」1975년 5월3일자 ; 李恩秀, 「朴承善의 家系 및 平生」, 「李恩秀手記」, 鄭秉峻, 「李承晩의 獨立路線과 政府樹立運動」, 2001년 서울大學校 博士學位論文, 31쪽 註75 참조. 76) Robert T. Oliver, op. cit, p.59∼60. 77)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八)」, 288쪽. 78) 「제국신문」1907년 6월7일자 사설, 「본사의 행복과 본기자의 해임」. 79) 崔起榮, 「大韓帝國期新聞硏究」, 一潮閣, 1991, 29쪽. 80) F.A. Mckenzie, op. cit, p.75. 81) 『Letter to Ye Bong Nai』, 「獄中雜記」,「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二)」, 80∼81쪽.
 
  82) 이만열 편, 앞의 책, 453∼454쪽. 83) 「朝鮮日報」1934년 11월 27일자, 「조선신교육측면사: 배재교 50년 좌담회」. 84)韓國內部警務局 「顧門警察小誌」, 1910, 240쪽; 中橋政吉,「朝鮮舊時の刑政」, 治刑協會, 1936, 115∼116쪽. 85) 「寄本署長書」, 「獄中雜記」,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二)」, 42∼46쪽. 86) 이승만, 「옥중전도」, 「신학월보」 1903년 5월호, 185쪽. 87) 「皇城新聞」 光武 6(1902)년 12월3일자,「雜報」,「囚懲査案」에 따르면 미결수 140여 명, 기결수 205명이었다. 88) 서정민, 「구한말 이승만의 활동과 기독교(1875∼1904)」,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7, 47∼50쪽.
 
  89) 申興雨, 「李承晩を語る」, 「思想彙報」16號, 1938. 9, 285쪽 ; 鄭晉錫, 「항일언론 대한매일신보와 梁起鐸」,「雩崗梁起鐸全集(3)」, 동방미디어, 2002. 90) Robert T. Oliver, op. cit. p.64. 91) 전택부, 「人間 申興雨」, 基督敎書會, 1971, 401쪽. 92) 「皇城新聞」1903년 1월 19일자,「雜報」. 93) 앞의 「옥중전도」, 186쪽. 94) Robert T. Oliver, op. cit. p.64. 95) 앞의 「옥중전도」, 188쪽. 96) 李商在의 손자 李鴻稙이 曺惠子에게 한 證言. 97) 李承晩의 조카 沈鍾喆의 부인이 曺惠子에게 한 證言. 98) 앞의 「옥중전도」, 188쪽.
 
  99) [監獄署書籍目錄]에는 한문책 222종 338권, 국문책 52종 165권, 영문책 20종 20권의 책 제목이 적혀 있다. 李光麟 「韓國開化史의 諸問題」, 一潮閣, 1986, 217~238쪽 참조. 100)「監獄署圖書貸出簿」 참조. 101) 앞의 「옥중전도」, 188쪽. 102) 위의 「옥중전도」, 187∼189쪽. 103) 「제국신문」 1902년 9월20일, 25일, 26일자. 104) 앞의 「靑年李承晩自敍傳」, 434쪽. 105) 市川正明編,「日韓外交史料(제10권)」,「金亨燮大佐回顧錄」, 原書房, 1981, 233쪽. 106) 「韓圭卨이 李承晩에게 보낸 편지」,「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八)」, 292∼293쪽. 107)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二)」, 124∼126쪽.
 
  108) 이정식 지음 권기붕 옮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청년시절」, 동아일보사, 2002, 113쪽. 애보트가 이승만의 종교사상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109∼124쪽 참조. 109) 「옥중전도」1903년 5월호, 「예수교가 대한 장래의 기초」 1903년 8월호, 「두가지 편벽됨」1903년 9월호, 「교회경략」 1903년 11월호, 「대한교우들의 힘쓸 일」1904년 8월호. 110) 이승만, 「대한교우들의 힘쓸 일」, 「신학월보」1904년 8월호, 226쪽. 111) 「마태복음」 9:12,「마가복음」 2:17,「누가복음」5:31. 112)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二)」, 11쪽.
 
  113) 앞의 「靑年李承晩自敍傳」, 436쪽. 114) 위의 「靑年李承晩自敍傳」, 434쪽; 이광린 저, 「올리버 알 에비슨의 생애」,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2, 131쪽. 115) 李能和,「朝鮮基督敎及外交史(下編)」, 新韓書林 影印本, 1968, 203∼204쪽. 116) 서정민, 「교회와 민족을 사랑한 사람들」, 기독교문사, 1990, 112쪽. 117) Oliver, op. cit.



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
 
李承晩의 옥중생활(2) - 讀書와 詩作과 著述
 
 

 


 (1) 英文雜誌 암기로 英語 숙달
 
 
  스물네 살에서 스물아홉 살에 이르기까지의 5년 7개월 동안의 囹圄(영어)생활은 젊은 급진 과격파 李承晩에게 새로운 人生修業, 특히 효율적인 學問習得의 기간이었다.
 
  우선 李承晩은 감옥에서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다. 그것은 밖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더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셔우드 에디가 넣어준 영문 「신약성서」를 목에 칼을 찬 채 다른 죄수들의 도움을 받아 읽은 것을 비롯하여 확정판결이 난 1899년 7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李承晩은 뒷날 〈옥중의 지루한 세월(동안)…… 천금 광음을 허송하기 애석하야 내외국 친구들의 때로 빌려주는 각색 서책을 잠심하야 고초와 근심을 적이 잊고자〉 했다고 적고 있다.1) 이무렵 감옥서에서는 죄수들, 특히 李承晩이 읽는 책의 내용이나 시간 등에 대해 특별한 규제는 하지 않았다.
 
 
  「所覽書錄」에 읽은 책 적어 놓아
 
 
  이때부터 이듬해 2월까지, 곧 새 감옥서장 金英善이 부임할 때까지 읽은 책과 정기간행물들의 목록을 李承晩은 「所覽書錄」(읽은 책 목록)이라는 글에 자세히 적어 놓았는데,2) 그 내용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소람서록」에 따르면 李承晩은 이 기간 동안에 「新約」, 「泰西新史攬要」, 「中東戰紀」, 「公法會通」 등 漢文, 國漢文, 국문 등 東洋語로 된 책 19권과 英文新約聖書를 비롯한 영문서적 19권, 「萬國公報」(한문), 「신학월보」 등의 중국 및 한국 잡지와 London Times, Japan Tribune 등 수십 종의 영문 신문 잡지를 읽었다.
 
  또한 지난 호에서 살펴 본 「감옥서 도서대출부」에 따르면 李承晩은 1903년 1월부터 이듬해 8월에 출옥할 때까지 감옥서학교를 운영하는 바쁜 일과 속에서도 「소람서록」에 적힌 책들 말고도 많은 책을 서적실에서 대출해다 읽었다. 이 무렵에 같이 옥중생활을 했던 金亨燮이 〈(이승만)씨는 유명한 篤學家(독학가: 독실하게 학문을 닦는 사람)로서 감옥에 있으면서도 순시도 손에서 책을 놓는 일이 없었다〉3)고 적고 있는 것은, 李承晩이 얼마나 독서에 열심이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소람서록」이나 「감옥서 도서대출부」를 통하여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李承晩이 국문과 한문 등의 동양 서적이나 정기간행물보다도 당시에 영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 발행되는 주요 신문이나 미국에서 발행되는 잡지 등 영문 정기간행물들을 애독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는 옥중은 말할 것도 없고 옥 밖에 있는 일반 지식인들보다도 훨씬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국내외 정세에 정통해 있었다.4)
 
 
  기독교관계 서적과 歷史書 탐독
 
 
  기독교에 입교하여 傳道에 열성을 쏟고 있던 李承晩이 聖書를 비롯한 기독교관계 서적을 탐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신약성서」를 가장 열심히 읽었고, 그 다음으로 자주 읽은 기독교 서적은 번연(John Bunyan)의 유명한 「天路歷程(Pilgrim’s Progress)」이었다.
 
  주목되는 것은 李承晩이 여러 가지의 역사관계 서적을 탐독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특히 「泰西新史攬要」(1897)와 「中東戰紀本末」(1897)의 두 한역본과 스윈튼(William Swinton)의 「萬國史略(Outlines of World’s History)」(1874)과 그리피스(William Eliot Griffis)의 유명한 「朝鮮史記(顔處士國; Corea: The Hermit Nation)」(1882)를 애독했던 것 같다.5) 「태서신사람요」가 어떤 책이었는가는 金九가 옥중에서 그 책을 읽고 사상적 전환을 하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는 앞에서 자세히 살펴보았다(「月刊朝鮮」 2002년 5월호 참조).
 
  「중동전기본말」은 上海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 알렌(Young J. Allen. 중국이름 林樂知)이 중국인 낙방거사 蔡爾康(채이강)과 함께 편술한 淸日戰爭史論으로서 淸末의 개혁운동, 특히 1899년의 戊戌政變(무술정변)을 주도한 康有爲(강유위)와 梁啓超(양계초) 등에게 큰 영향을 준 책이었다. 李承晩은, 뒤에서 보듯이, 이 책을 「청일전기」(당시의 표기는 「♥일전긔」)라는 제목으로 국문으로 번역했다.
 
  李承晩이 읽은 책 가운데에는 이 무렵 지식인 사회에서 널리 읽히던 블룬츨리(Johannes Bluntschli)의 「公法會通」(1880)을 비롯하여 「約章合編」 등 국제법 관련 책들도 포함되어 있다. 公法에 대한 관심과 기대는 다른 개화파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李承晩도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옥중에서 집필한 많은 논술에서 公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李承晩은 兪吉濬의 「西遊見聞」(1895)도 읽었다. 李承晩이 이 책을 읽었다는 것은 유길준의 개혁사상과 함께 그가 일본에 머물면서 추진하고 있던 변혁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뜻한다.6) 李承晩은 1902년에 투옥된 유길준의 동생 兪星濬과 친교를 맺으면서 그의 권유에 따라 국민계몽서로 「독립정신」을 집필하는 것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다.
 
  「소람서록」은 李承晩의 「獄中雜記」의 하나이다. 李承晩은 감옥서 안에 있는 동안 미제 노트북과 그 밖의 다른 종이에 한문, 국한문, 영문으로 적은 온갖 종류의 길고 짧은 기록들을 남겼다. 이 기록들은 새로 제정된 대한제국의 관제, 주요 국제조약문, 세계각국의 인구와 歲出入 통계 및 주요 지도자들의 이름, 韓淸定界碑의 내력 등의 역사 자료, 외국선교사들이 자신의 석방을 건의한 편지의 사본, 자신이 한문으로 집필한 각종 건의서와 논설 등 40가지에 이른다.7)
 
 
  손가락 굳어지도록 붓글씨 연습
 
 
  한성감옥서는 또한 李承晩에게 중단했던 붓글씨를 다시 연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어릴 때에 동네 사람들이 둘러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붓글씨를 쓸라치면 사람들은 『야, 그 도령 잘 쓴다』하고 감탄했었는데, 배재학당에 들어가고부터는 붓글씨를 연습할 기회가 없었다. 그랬던 것이 감옥서에 들어와서 金英善 서장의 허락을 받아 붓글씨를 다시 연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붓글씨 연습은 아주 자연스럽게 詩作으로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李承晩은 옥중에서 지은 자작 漢詩 142수를 「替役集」이라는 제목으로 엮어 놓았다. 「替役」이란 『징역살이를 대신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詩作 활동은 囹圄의 고통과 비애를 달래는 행위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李承晩은 궁색한 집안살림을 혼자서 꾸려 나가면서 성심성의로 옥바라지를 하는 아내에 대한 애틋한 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懷人」
 
  莫敎閨裏歲華流
 
  其奈鏡鸞孤影遊
 
  獨鳥頻驚羈枕月
 
  歸鴻遙帶故園秋
 
  每因思苦歌蓮曲
 
  幾度愁添上柳樓
 
  欲問他鄕憔悴意
 
  人間離別恨難收
 
  「임생각」
 
  세월아 아낙 위해 머물러 다오
 
  짝 잃은 원앙을 어찌하자고.
 
  외로운 새라 달밤에 자주 놀라고
 
  고향 가을 가득 실은 먼 기러기.
 
  그릴 제는 연꽃 따는 노래 부르고
 
  버들보고 시름한 적 몇 번이던고.
 
  타향살이 이다지도 초라할손가
 
  이별이란 인간 치곤 못할 일이야.8)
 
 
  이런 조강지처였음에도 불구하고 해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대통령 재임 때에는 박씨부인의 존재조차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게 했던 것은 李承晩의 인간적인 불행이었다.
 
  옥중에 갇힌 사람들에게 歲暮를 맞는 것만큼 처연한 일은 없다. 특히 아버지에 대하여 남다른 자책감을 가지고 있던 李承晩으로서는 쓸쓸히 세밑을 보낼 李敬善을 생각하면 감회가 착잡했을 것이다. 李承晩이 아펜젤러에게 보낸 1900년 2월6일자 편지에서 〈저는 책을 읽고 약간의 詩를 지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잊을 수 없는 오직 하나의 사실은 저의 연로하신 아버지와 모든 가족들이 겪는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9)라고 하고 있는 것은 가족들에 대한 李承晩의 심정이 어떠했는가를 말해 준다.
 
 
  「獄中歲暮」
 
  談懷夜夜抵晨鷄
 
  却感流光憶舊
 
  人與蟄蟲深處穴
 
  歲從逝水急過溪
 
  臘梅酒熟思供老
 
  新絮衣來戀見妻
 
  屈指今冬餘十日
 
  三年驥繫閑蹄
 
  「옥중의 세밑」
 
  밤마다 긴긴 사연 닭이 울도록
 
  이 해도 거의로다 집이 그리워.
 
  사람은 벌레처럼 구멍에 살고
 
  세월은 시냇물처럼 따라가누나.
 
  어버이께 설술을 올려보고파
 
  솜옷을 부쳐 준 아내 보고파.
 
  헤어보니 올 겨울도 여나믄 날 뿐
 
  삼년을 매어 있는 천리마라오.10)
 
 
  李承晩은 물론 가족을 그리는 詩만 지은 것이 아니었다. 자연환경의 변화에 대한 감상, 대한제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우국충정, 감옥서 생활의 스케치,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動植物, 곤충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다. 죄수들을 괴롭히는 빈대와 이를 소재로 한 詩도 지었다.
 
 
  「蝎」
 
  暖如醉客冷飢僧
 
  下地上天便入升
 
  走遍粉壁光金散
 
  獵到松床勢土崩
 
  蚊親遠不通秦晋
 
  ♥族殘如附楚
 
  君家苗裔多陰福
 
  子百孫千共繼繩
 
  「빈대」
 
  따뜻하면 기운 펴고 차면 오물고
 
  천장으로 바닥으로 오르내리네.
 
  하얀 벽을 돌고 돌아 아롱을 찍고
 
  마루 틈을 헐어보면 몰키어 있네.
 
  모기와는 연이 멀어 혼인 안 되고
 
  벼룩이나 이쯤은 곁방살일세.
 
  네 집은 어찌하여 복 많이 받아
 
  백 아들 천 손자 대를 잇느냐.11)
 
 
  빈대가 우글거리는 것을 백 아들 천 손자로 대를 잇는 복받은 현상으로 비유한 것은 평소에 李承晩이 독자로 이어지는 자기네의 고독한 혈통을 의식하고 있는 데서 착상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뒷날 李承晩은 대통령 재임 때에 경무대 안방을 청소하던 禹부인이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부른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하고 무심코 동요를 흥얼거리자 『그 복많은 개구리는 팔자가 좋구먼』 하고 말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12)
 
  李承晩은 처음에는 혼자서 한시를 지었으나 뒤에 수감되는 죄수들 가운데에서 兪星濬과 전 侍從이었던 白虛 李裕馨, 그밖에 林炳吉, 李基東, 尹春景, 金世鎭, 兪鎭九, 鄭白南 같은 한시 동호인들을 만나 詩作을 즐겼다.13) 兪星濬은 李承晩이 교교한 달빛이 철창으로 들이비치는 밤이면 등불을 치우고 입으로 詩를 지어 자기에게 들려주었다고 적고 있다.14)
 
  李承晩이 옥중에서 지은 한시 가운데 죄수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작품은 「靑衣赴役(청의부역: 푸른 수의를 입고 옥살이를 하다)」라는 제목의 七言詩였다.
 
  士入窮途悔讀書
 
  三年♥做官餘
 
  鐵絲結伴新情密
 
  藁笠逢人舊面疎
 
  從古英雄衣有♥
 
  而今客子食無魚
 
  時來神物終當合
 
  寧死壯心不負初
 
  선비가 어려운 길에 들어서니 배운 것이 한스럽다.
 
  벼슬이 빚어 낸 삼년 옥살이.
 
  쇠줄에 함께 묶이니 새롭게 정들지만
 
  용수를 쓰고 보니 옛 친구도 낯설구나.
 
  옛부터 영웅의 옷에는 이가 있었고
 
  지금의 인물은 고기 없이 밥먹는 신세.
 
  때가 오면 모두가 뜻대로 되리
 
  죽을망정 처음 생각 변할 리 있으랴.15)
 
 
  이 詩는 李承晩 자신의 자서전 초고나 올리버의 전기에는 「사립봉인구면소(蓑笠逢人舊面疎)」라는 詩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아마 李承晩은 이 구절이 잘 된 것이라고 스스로 만족해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英文 문장 외우며 英語 공부
 
 
  李承晩의 옥중 학습 가운데에서 매우 주목되는 것은 英語에 숙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같이 수감생활을 했던 申興雨는 李承晩이 옥중에서 영어를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서양인들과의 교섭에 조금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고 적고 있다.16) 申興雨의 회고에 따르면 외국 선교사들이 넣어준 「아우트룩」(Outlook) 등 영문잡지들이 李承晩의 영어교과서였다. 李承晩은 또 붉은 물감을 몰래 들여와서 잉크를 만들어 낡은 잡지에 영어 쓰기연습을 했고, 눈을 감고 잡지에서 읽은 문장을 외우기도 했다. 그는 몇 년이 지난 뒤에도 이때에 영문잡지에서 외운 문장을 단어하나 틀리지 않고 암기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사전에 있는 영어단어들을 모두 외우려고 했다.17)
 
  이처럼 李承晩은 서당에서 한문문장을 외우던 방식으로 영어를 공부했는데, 이는 李承晩뿐만 아니라 개화기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영어 학습방법이었다. 英語는 말할 나위도 없고 영어로 배우는 다른 과목의 경우에도 학생들은 문장을 통째 암기하기가 예사였다고 한다.18) 옥중학습을 통하여 李承晩의 영어실력이 얼마나 향상되었는가에 대해서는 李承晩이 출옥한 다음날 그를 방문했던 尹致昊가 무엇보다도 그의 영어실력이 향상된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4시에 6년 가까이 투옥되었다가 어제 석방된 李承晩을 방문했다. 그는 훌륭한 청년이다. 감옥에 있는 동안에 그는 영어가 크게 향상되어 영어로 말할 수 있고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19)
 
  尹致昊는 일찍이 에모리大學에 유학했고, 中國에서 영어교사 노릇도 한 적이 있었다.
 
 
  英日同盟 協約文 번역문 보고 英譯하기도
 
 
  그가 얼마나 열심히 영어공부를 했고, 또 그 영어수준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특이한 자료 하나가 보존되어 있다. 1902년 1월30일에 英日同盟協約이 체결되었을 때에 그 내용을 보도한 일본인 신문 「漢城新報」의 호외에 실린 국한문의 협약문 번역문을 보고 李承晩이 영어로 옮겨 놓은 것이 그것이다. 李承晩이 무슨 목적에서 이러한 번역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영어번역문은 그의 국제정세에 대한 관심과 아울러 영어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흥미 있다.
 
  李承晩이 옥중에서 영어를 열심히 공부한 것은 출옥한 뒤의 자신의 장래에 대한 강한 의욕 때문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李承晩이 한국 기독교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기를 바랐던 외국 선교사들도 그에게 미국유학을 위한 준비로 영어에 숙달하도록 권유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李承晩의 야심은 기독교의 지도자가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나라를 변혁시키는 데 자신을 바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목적을 달성시키는 데 영어는 필수불가결한 수단이 될 것이었다.
 
  열성적인 노력을 통하여 숙달된 영어실력은 李承晩으로 하여금 뒷날 美國의 유수한 대학의 정규 교육과정을 짧은 기간 안에 마칠 수 있게 했을 뿐 아니라 그의 일생을 통하여 외교활동의 효율적인 무기가 되었다.
 
 
  (2) 歷史書 탐독과 「청일전기」 번역
 
 
  李承晩의 옥중활동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집필활동이었다. 그가 맨 먼저 착수한 것은 번역작업이었다. 李承晩은 번역작업이 〈평생에 원하던〉 일이었는데, 金英善 감옥서장이 부임하면서 그것이 가능해졌다고 말하고 있다.20)
 
  李承晩은 처음 「萬國史記」21)를 한문으로 번역하기 시작했다가 알렌의 「中東戰紀本末」을 번역하는 것이 더욱 긴급하다고 판단되어 도중에 바꾸었다고 했다. 그리고 「中東戰紀本末」도 내용이 너무 번거롭고 분량이 많아서 〈긴요한 것을 뽑아〉 번역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미 柳槿(유근)과 玄采(현채)가 역시 중요한 부분을 발췌해서 國漢文으로 번역하여 「中東戰紀」라는 제목으로 두 권으로 출판한 것이 있었는데, 李承晩은 이 책도 참고하면서 순 국문(한글)으로 새로 번역한 것이다.
 
 
  淸日戰爭의 중요성 인식하고
 
 
  한문 원본도 보급되어 있고 국한문 번역본도 나와 있는데도 이 「中東戰紀本末」을 번역하는 일이 긴급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은 李承晩이 淸日戰爭의 결과를 그 만큼 중요시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서전 초고에서 〈淸日戰爭은 우리나라로 하여금 동양의 구세계는 현대문명의 광범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22)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淸日戰爭과 관련된 포고, 조약문, 전쟁 상황과 외교 교섭의 경위, 전보문, 신문기사 등 각종 자료와 편자들의 논평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한국인들이 읽고 깨우쳐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李承晩은 번역을 하면서 원본에 없는 여러 가지 내용을 함께 적어 보태기도 했다. 그것은 주로 한국 지배층의 부패와 무능과 아울러 민중의 몽매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전쟁의 원인」이라는 항목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대개 이 싸움으로 인연하야 대한독립이 세계에 들어났은즉 이 싸움이 아니된 것보다 낫다고 할 듯 하나, 실상을 생각하면 독립을 이렇게 광포(廣布)한 것이 진실로 일본의 영광이요 대한의 수치라.… 대한 신민들이 이것을 분히 여겨 내 나라 독립을 우리 손으로 빛내어 보기를 일심할진대 이 수치를 한번 씻어볼 날이 있을 터인데, 이것을 분히 여길 줄 알자면 먼저 그 속을 알아야 될 터이니 아무쪼록 이런 책을 많이 보아 외국 형편과 내 나라 사정을 자세히 공부하는 것이 급선무라…〉23)
 
  그리하여 빨리 개혁을 해야 한국도 萬國公法이 보장하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떳떳이 참여할 수 있고 그것만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라고 그는 역설했다.
 
  李承晩은 1900년 4월4일(음력)에 번역작업에 착수하여 석 달 만인 7월6일에 끝냈다. 제목은 「청일전기」라고 붙였다. 감옥서장이 허락한 일이었고, 또 나중에 그로부터 번역 작업의 수고비를 받기까지 했으나, 번역하는 동안에는 여간 고생스럽지 않았다. 종이가 없어서 영어신문지에 글을 적어야 했고, 또 밤이면 초를 구해다가 석유통에 넣어 옥관들이 보지 못하게 하고 謄書(등서)를 했다고 한다.24) 왜 그렇게 해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같이 수감생활을 하던 鄭淳萬이 등서작업을 거들었다. 이렇게 작성된 원고를 玄采가 가져다가 출판할 목적으로 다시 정서를 했다. 그러나 출판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李承晩은 이 책의 출판을 위하여 애를 많이 태웠다. 한문에 익숙한 이른바 뜻있는 군자들을 상대로 쓴 「新譯戰紀附錄」이라는 한문 논설에서 李承晩은 「부탁하는 말씀」이라면서 「청일전기」의 인쇄 및 출판에 필요한 자금지원을 요청하고 있다.25) 그리고 이 논설과는 별도로 「청일전기」500질을 두 종류로 만들 경우의 인쇄비를 각각 계상한 견적서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26) 그러나 「청일전기」는 끝내 출판되지 못하고 말았다.
 
 
  번역한 지 17년 만에 하와이에서 출판
 
 
  이 원고는 李承晩이 출옥한 뒤에 玄采에게서 찾아 보관하고 있다가 1917년에 하와이에서 자신이 주관하는 태평양잡지사에서 출판했다. 번역을 끝내고 17년이 지나서였다. 이 때에 쓴 서문에서 李承晩은 한국역사에서 갖는 청일전쟁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 역사에 제일 큰 난리는 임진왜란이요 한인들이 제일 통분히 여기는 전쟁도 임진왜란이라. 일본이 수천년 동안을 조그마한 섬 속에 갇혀서 대륙에 발을 붙이고저 하는 욕심을 대대로 길러서 임진년에 한번 시험하다가 실패한 후 3백년 동안을 다시 예비하야 갑오전쟁(甲午戰爭: 청일전쟁)에 그 욕심을 이루었도다.
 
  그런즉 임진란보다 더 큰 난리가 갑오전쟁이요 한인에게 더욱 통분히 여길 바가 갑오전쟁이라. 이 전쟁에 한국이 잔멸을 당하였고 이 전쟁에 한국이 독립을 잃었은즉, 오늘날 한국의 당하고 앉은 것이 곧 갑오전쟁에 된 것이라.〉27)
 
  李承晩은 「청일전기」말고도 여러 가지 책을 번역했다. 「소람서록」의 아래 부분에는 「譯著名錄」(번역 또는 저술한 책 목록)이 적혀 있는데, 그것은 투옥되고 나서 1902년 6월18일까지 작업한 책들의 이름이다. 번역서로는 「中東戰記」(「청일전기」)말고도 「萬國史略」,「主僕問答」,「監理敎略史」,「英文法」이 있고, 저서로는 「替役集1卷 律詩」, 한문으로 쓴 「算術」,「摘珠採璧」이 있다. 그러나 이 책들 가운데에서 현재 보존되어 있는 것은 「청일전기」와 「替役集」뿐이다.
 
 
  (3) 2년 3개월 동안 「제국신문」 논설 집필
 
 
  李承晩은 자신이 번역 작업을 한 동기에 대해 〈이따금 세상 형편을 따라 어리석은 창자에 울분한 피가 북받침을 억제할 수 없어서〉28)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러한 심경에서 번역해 놓은 원고가 출판이 되지 못하자 마음이 더욱 울적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그에게 뜻밖에도 「제국신문」의 「논설」을 집필할 기회가 주어진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1898년 8월에 「제국신문」이 창간될 때에 그 논설을 주재했던 李承晩으로서는 그야말로 감옥서에 갇힌 몸으로 「창자에 북받치는 울분한 피」를 분출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李承晩이 「논설」을 집필한 2년 3개월 동안의 「제국신문」가운데 17개월치가 낙질되어 있어서29) 李承晩이 집필한 논설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남아 있는 신문만으로도 우리는 20대 후반의 李承晩의 폭넓은 관심과 그와 관련된 학문과 사상의 정도, 그리고 특유의 문장력을 살펴볼 수 있다.
 
  필요한 자료나 참고문헌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 감옥 안에서 200자 원고지로 열 두서너 장 분량의 논설을 매일 써내보낸다는 것은 여간 벅찬 작업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李承晩은 이 논설 집필에 무엇보다도 보람을 느꼈던 것 같다. 「논설」은 당연히 無記名이었으나 신문을 주관하던 李鍾一을 비롯하여 옥 밖에 있는 친구들이나 외국인 선교사들, 그리고 옥중동지들을 통해 李承晩이 「제국신문」의 「논설」을 쓴다는 사실은 당시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申興雨는 李承晩이 「논설」을 쓰자 「제국신문」의 구독자가 늘었고 정치적 압력으로 집필을 중단하자 구독자가 줄었다고 말했다.30)
 
 
  몽매한 民衆 계몽과 부패한 관리 질타
 
 
  그의 「논설」은 기본적으로 몽매한 민중을 계몽하고 부패하고 무지한 대소 관인들을 질타하는 훈계조의 메시지였다.
 
  李承晩은 먼저 민중이 구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했다. 구습 가운데에서 가장 시급히 고칠 일의 하나가 혼인풍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장 자유 결혼을 해야한다고는 주장하지 않았다. 〈대한 동포들도 별안간 서양사람과 같이 남녀가 오래 상종하야 학문과 지식을 피차에 자세히 안 연후에 저희 임의대로 부부의 약조를 정하라는 것은 아니로되〉, 설혹 부모가 주장하더라도 첫째 일찍 혼인하지 말 것, 둘째 문벌의 고하와 가세의 빈부를 보지 않을 것, 셋째 신랑과 신부의 재덕을 자세히 알아보고 작정하라고 권고했다. 그리고 서북도에서는 어린 여자아이를 파는 습속이 있다면서 이를 맹렬히 비판했다.31)
 
  제일 중요한 것은 미신을 타파하는 일이었다. 봄이 되어 남산에 올라갔다가 「괴상한 일」 두 가지, 곧 방울을 흔들며 굿하는 무당패와 경쇠를 흔드는 판수패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보았다면서 〈소경따라 못 보지 말고 광인따라 미치지 말라〉고 李承晩은 경고했다.32)
 
  미신풍습이 한국의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큰 병폐였던 것은 흔히 지적되는 대로이다. 그것은 외국인의 눈에도 기이하게 비쳤다. 이 무렵에 한국을 여행했던 비숍은 한국의 샤머니즘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서울 당국에 따르면 1897년 1월 현재 서울에 매월 평균 15달러를 버는 무당이 1000명이 있다고 한다고 적고 있다.33)
 
 
  콜레라 환자 돌보면서 콜레라 계몽논설 써
 
 
  나라가 진보하기 위해 시급히 고쳐야 할 또 하나의 「악습」은 공중위생이었다. 李承晩은 서울 장안에 사는 사람들이 대로변에서 어른 아이 없이 얼굴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을 마주보면서 대소변을 본다고 개탄하면서, 청결은 자기나 자기 가족뿐 아니라 나라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34)
 
  옥중에 콜레라가 발생했을 때에 환자들을 돌보고 시신을 치우기에 여념이 없으면서도 그는 콜레라에 대한 논설을 썼다. 그는 사람들이 콜레라의 유행을 두고 天災니 귀신의 소이라느니 하여 부적을 붙이고 豫防逐邪(예방축사)하는 것말고는 피하는 도리가 없다면서 도리어 심상히 여긴다고 개탄하고, 콜레라가 얼마나 무서운 전염병인가를 감옥서 안의 실정을 들어 설명했다. 그러므로 동리와 도로와 거처, 의복, 음식을 정결하게 하고 서양약을 구하여 예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부디 요사한 말 믿어 하늘 재앙이나 귀신의 벌로 알지 말지라〉 하고 강조했다. 李承晩의 이러한 말에서 우리는 당시 사람들의 콜레라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운명론적인 것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35)
 
  李承晩은 문명개화를 위해서는 한국인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개혁해야 한다고 되풀이하여 역설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폐단을 말하자면 어둡고 완고하다, 원기가 없고 나약하다, 용맹스러이 하고자 하는 일이 없다 하는 것이라 할 터이나, 그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은 운수라 하는 것을 믿음이라. 이것을 믿는 마음 때문에 백 가지 중 하나도 될 수 없으니 실로 깊이 걱정하는 바로라.〉36)
 
  따라서 이러한 사고방식을 개혁하지 않고는 문명개화와 부강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국문(한글)학교 설립 제안도
 
 
  이러한 민중의 의식개혁은 교육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李承晩이 「제국신문」의 논설에서 가장 빈번히 다룬 주제도 교육문제였다. 다른 주제를 다루는 논설에서도 기회있을 때마다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가령 李承晩의 「옥중잡기」에 있는 「美國興學新法(미국의 교육을 일으킨 신법)」이라는 장문의 한문문서는 미국 교육제도의 연혁과 현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미국정부의 정책문서인데, 그것은 李承晩의 서양근대교육에 대한 관심과 지식을 짐작하게 하는 한 보기이다.37) 그는 젊은이들을 많이 외국에 유학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敎育問題와 관련하여 李承晩이 국문(한글)학교를 개설하는 것이 급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그는 언론활동을 할 때에도 국문 전용을 실천했고, 「청일전기」 번역 등 옥중의 집필활동도 국문으로 했다. 물론 「제국신문」은 국문전용 신문이었다. 그는 국문학교에서 가르칠 만한 책으로 「초학언문」, 「국문독본」, 「국문사민필지」, 「심신초학」, 「국문산술」의 다섯 가지 책을 들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국어문법인데, 근일에 周商鎬(周時經)가 국문 문법책을 한 권 써놓았으나 아직 발간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누구든지 이 책을 발간하여 놓으면 큰 사업이 될지라. 유지하신 이 중 의논하고자 한다면 정동 배재학당으로 가면 만나리오〉하고 안내까지 하고 있다.38)
 
  또한 그는 국민의식의 개혁은 언론창달에 달린 것이라고 되풀이하여 강조했다. 李承晩은 〈백성의 개명되고 못된 것은 그 나라에서 서책이 많고 적은 것과 신문의 잘되고 못되는 것을 보아야 가히 알지라〉라면서 신문을 많이 보아서 견문을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39)
 
 
  基督敎國이 되어야 한국정치 고쳐져
 
 
  李承晩은 한국인의 의식 개혁은 기독교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에 따르면, 文明富强의 근원은 敎化道德에 있는데, 도덕은 첫째로 개인차원의 도덕, 둘째로 국가차원의 도덕, 그리고 〈온 세상이 다 화하야 일체로 착한 사람과 즐거운 처지가 되기를 주장하는〉 도덕, 곧 인류의 보편적 도덕이 있다. 이 세 번째의 세계를 포함한 도덕이 크고 훌륭한 敎化인데, 〈서양 부강한 나라들의 인민이 敎會를 설립하고 세상에 전도하는 본의〉가 그 때문이라고 李承晩은 강조했다. 그러므로 퇴락한 한국의 政治風土를 고치기 위해서는 기독교로 敎化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이었다.40)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美國을 이상국가로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은 그가 같은 무렵에 「신학월보」에 기고한 논설들에 더욱 자세히 표명되어 있다.41) 李承晩은 한국 언론사상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논설을 쓰기도 했다.42) 감옥서 안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경축예식이 열리기 전날의 일이었다.
 
  이러한 改革과 敎化를 통해서만이 근대 자본주의사회에 적합한 인간형이 탄생될 수 있었다.
 
  李承晩이 일(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그는 『시간이 곧 돈』이라는 서양속담과 일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친구가 물으면 으레 『하는 일 없이 논다』고 대답하는 것이 점잖은 행셋본으로 생각하는 한국인들의 고루한 풍습을 대비하면서, 부지런히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그는 〈저마다 먹고 입고 쓰는 것 외에 날마다 몇푼씩 만들어 놓을 것 같으면〉 몇십년이 안 가서 자기 집뿐만 아니라 국가가 부요해 질 것이라고 貯蓄의 중요성을 일깨우기도 했다.43)
 
  그리고 옛날에는 農業이 천하의 큰 근본이라고 했으나 지금은 商業이 천하의 근본이라고 이렇게 강조했다.
 
  〈대저 오늘날 세계 큰 싸움과 다툼이 이익과 권세 까닭인데, 이익과 권세는 장사에서 더 큰 것이 없은 즉, 우리나라에서도 문명 개화한다는 것은 나중 일이어니와 당장의 급선무로 나라가 정부를 안돈하고 백성들이 집안을 보존하려면 아무쪼록 장사길을 널리 열어서 해마다 항구에 들어오는 돈이 나가는 것보다 몇천 배나 되게 하기를 바라노라.〉44)
 
 
  國富의 관건은 通商에 달려
 
 
  곧 國富의 관건은 通商에 달렸다는 것이었다. 李承晩은 통상이 가져다주는 이익으로 다섯 가지를 들었다. 첫째로 각국이 그 나라 상업과 관계있는 곳에는 戰爭을 없게 할 것이므로 평화를 누리는 이익이 있고, 둘째로 나에게 있는 것과 남에게 있는 것을 서로 바꾸어 각국이 다 귀천을 평균하므로 다 같이 이익을 보게 되며, 셋째로 이익을 일으키면 그것으로 남의 재물을 들여와 내 나라 땅과 인재를 배양하여 빈한한 나라가 문명을 창조하며, 넷째로 각 항구에 稅納이 늘고 그로 말미암아 鐵路, 윤선 등 모든 사업이 흥성할 것이므로 지게꾼, 모꾼 등의 새 일자리가 생긴다는 것이었다.45)
 
  李承晩은 會社 설립과 운영의 요령을 미국의 몽고메리 와트社의 보기를 들어 자세히 설명하기도 했다.46)
 
  물론 농업을 완전히 배제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李承晩은 오히려 製造業보다 農業에 주력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全 국토의 72%가 쓸 줄을 몰라 버려두는 땅이라면서 그러한 땅을 개발하여 곡식보다는 〈큰 돈이 생기는〉 축산, 임업, 면화, 담배, 과실 등의 생산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商業的營農을 권장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5년 뒤부터 큰 이익이 생길 것이라고 그는 전망했다. 李承晩은 造林에 대해서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나무를 심는 데는 소나무보다 잡목을 심어야 하고 잡목 가운데서도 세계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값이 비싼 참나무, 호도나무, 밤나무, 단풍나무, 피나무를 많이 심어야 한다고 말했다.47)
 
  李承晩은 이러한 「굉장한 일들」은 오직 財物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으므로 모든 국민이 財政의 확장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오활한 풍속에 젖어〉 총명 있고 학식 있는 사람들이 『점잖은 사람이 어찌 재물을 알리오』하고 子姪이나 친구 가운데 재정에 관심 있는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꾸짖어 재물을 모르게 한다고 힐책하고, 『엽전 한 냥 수효를 헤아리지 못해야 참 점잖은 재상이다』는 속담을 들어 재정을 소홀히 하는 정부 관원들을 비판하면서, 모두가 꿈에서 깨어 정신을 차리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역설했다.48)
 
 
  韓國에는 立憲君主制가 더 적합해
 
 
  그러나 이러한 문명 부강한 나라는 결국 政治의 改革에 의해서만 달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
 
  李承晩은 세계 각국이 시행하고 있는 政治制度는 專制政治, 憲法政治, 民主政治의 세 가지라고 설명했다.49) 전제정치는 〈일국의 흥망과 만민의 화복이 다 한 사람에게 달린〉 제도로서 〈이 부귀를 다투는 세계에서 독립을 유지하기에 크게 위험한〉 제도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민주정치는 백성이 주장하는 정치로서 〈전국이 일제히 의논하야 다 가라대 가하다 한 후에야 미루어 임금(대통령)을 세우고 오히려 또 폐가 생길까 염려하여 혹 팔구년, 혹 사오년을 한하고 한될 때마다 추천하야 임금을 세우고 나라를 다스리므로〉 전혀 백성에게 달린 정부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민주국가는 날마다 문명 부강으로 나아가 〈세상이 점점 그 정치 밑으로 들어가는 고로〉 美國의 형세가 英國을 점점 능가하고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러나 민주정치는 백성이 개명한 뒤에야 가능한 것으로서 〈백성이 어두운 나라에서 혹 망령되이 행하려 하다가는 일국이 크게 어지러운 법이니〉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당장 실시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러한 보기로 그는 남아메리카 제국의 경우를 들었다. 따라서 한국의 처지로서는 憲法政治, 곧 立憲君主制를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李承晩은 헌법정치를 이렇게 설명했다.
 
  〈헌법정치를 세계 각국이 가장 좋다 하나니, 이는 상하에 공평도 하거니와 백성이 여간 어두워도 과히 낭패가 없고, 임금이 설령 성현이 아니라도 일정한 법률만 준행하면 나라에 위태할 염려도 없으며, 겸하야 이전 완고한 법에 젖은 백성과 지금 새 법률에 화하는 인민을 일체로 다스리기에 심히 합당한지라. 지금 세계에 가장 많이 행하며…〉50)
 
  李承晩의 이러한 설명은 만민공동회 때의 행동에서 느낄 수 있는 급진적인 사상이 많이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李承晩이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동경을 단념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는 「미국 인민의 권리」라는 논설을 무려 다섯 회에 걸쳐 연속으로 내보내면서 미국의 三權分立제도와 국민의 권리를 헌법조문을 하나하나 들어가며 자세히 설명했다.
 
  흥미 있는 것은 링컨 대통령이 게티스버그 演說에서 말한 유명한 민주주의의 정의, 곧 흔히 「人民의, 人民에 의한, 人民을 위한」정치라고 번역되는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는 점이다.
 
  〈그 정부의 세 가지 본의가 있나니, 일은 백성이 세운 정부요, 이는 백성을 위하야 세운 정부요, 삼은 백성이 행하는 정부라.〉51) 이 문장은 「독립정신」에서는 〈일은 백성이 하는 것이요, 이는 백성으로 된 것이요, 삼은 백성을 위하야 세운 것이라〉는 표현으로 다듬어진다.52)
 
  이처럼 李承晩은 백성이 권리가 있는 나라는 흥하고 권리가 없는 나라는 망한다는 이치를 미국의 정치제도를 빌어 역설한 것이다.
 
 
  「논설」난에 번역문 싣기도
 
 
  李承晩의 민중계몽 캠페인은 가지가지의 새로운 知識을 소개하는 작업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李承晩은 필요한 내용을 번역하여 「논설」난에 게재하기도 했다. 번역문은 「지구론」,「달의론」 등 천문에 관한 이야기에서부터 서양의 유명 인사가 淸國이나 韓國을 여행하고 적은 기행문, 「中東戰紀本末」의 저자 알렌 선교사가 天津靑年會 결성식에서 한 연설문과 아시아 정세를 논평한 글, 日本신문에 실린 日本人들의 韓國進出을 권장한 내용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리고 이러한 번역문은 그 글의 앞이나 뒤에 번역하는 취지를 간략하게 써붙였다.
 
  李承晩이 심혈을 기울여 집필하는 「논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형편은 그의 주장과는 반대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콜레라 환자들을 치다꺼리 하느라고 심신이 지치기도 했던 그는 1902년 가을에 접어들면서는 더욱 비분강개해졌다. 그는 「충심이 변하면 역심이 나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논설」에서 울분에 찬 자신의 심경을 직설적으로 토로했다.
 
  〈슬프다. 사람되고 제 집안 잘되기 원치 않는 자가 어디 있으며 신민되어 나라 잘되기 원치 않는 자가 어디 있으리오. 본 기자도 불행히 이 나라의 한낱 신민이 되어 목숨을 버리고라도 이 나라 일이 조금 되어가는 구석을 볼까하야 이 되지못한 신문장을 가지고도 날마다 말한 바가 혹 간절히 감동할 만하게도 하여 보았고, 혹 흉과 비방같이도 하여 듣고 부끄러운 생각이 날 만하게도 하여 보았고, 통분 격발하야 사람의 피가 끓고 두발이 일어나게도 하여 보아, 백 가지로 시험치 않은 일이 없으매, 그 중에 과격한 말도 있고 혹 남이 못할 위험한 말도 없지 않았으나, 듣는 당자도 코웃음하며 옆의 구경꾼도 귀 밖으로 돌리니, 통히 이 천지에는 이 나라를 위하야 애쓸 사람도 없고 일할 사람도 없은즉, 다른 천지에서 이 나라 일할 사람과 걱정할 사람이 생긴 후에야 되어도 되고 말아도 말지라. 홀로 쓸데없는 빈 말로라도 주야 애쓰는 놈이 도리어 어리석고 미련한 물건이로다.…〉53)
 
 
  大韓帝國의 멸망 경고
 
 
  그러나 李承晩은 「논설」 집필을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의 필봉은 더욱 신랄해졌다. 그는 대한제국이 이대로 가다가는 망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그는 外國公使들에게 휘둘리고 있는 정부의 무능과 몇몇 관리들의 전횡을 질타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직까지도 우리가 대한백성이니 조선사람이니 하나, 실상 속으로는 어디 속하여 가게 될지 모르고 있는 중이라. 어찌 통곡할 일이 아니며, 기막힐 일이 아니리오.
 
  통히 말할진대 지금은 다시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니, 영원히 이대로 말아버리는 것이 옳은가, 한번 악이나 써보다가 마는 것이 나을까, 이는 시각을 더 대지 말고 급히 생각하여 한번 시험할 일이로다.〉54)
 
  李承晩은 英-日同盟협약이나 러-일비밀협약 등으로 대표되는 급박한 국제환경을 심한 풍파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국민의 각성을 촉구했다.
 
  〈우리가 감히 두려움을 무릅쓰고 소리를 높이 질러 전국의 꿈꾸는 이들을 깨우고자 하노니, 우리가 이 심한 풍파를 당하여 이 위태한 배를 다 같이 타고 있어 목숨과 재산의 위태함이 시각에 있는지라. 저 어둡고 서투른 선인들이 어찌할 줄을 모르는 중이니 우리들이 깨닫고 힘을 들여 붙들다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 후에는 거의 후한이나 없을지로다.〉55)
 
  이 글은 「독립정신」의 「총론」이 되었다. 그는 또 나라의 형편을 큰 집에 불이 난 것에 비유하면서, 사람들이 힘을 모아 함께 불을 끌 생각은 않고 서로 다투기만 한다고 질책하기도 했다.56)
 
  李承晩은 나아가 敗亡한 나라들의 비참한 실상을 설명하는 논설을 잇달아 썼다. 「패망한 나라들의 당한 결실」이라는 논설에서는 英國의 식민지가 된 印度, 淸國의 학정에서 벗어나기는 했으나 日本의 식민지가 되어 무고한 백성들이 원통하게 피를 흘리는 臺灣, 러시아에 나라를 빼앗긴 폴란드의 세 경우를 보기로 들어 설명했다. 李承晩은 특히 폴란드의 비참한 상황을 자세히 적고 있는데, 이는 이 무렵의 李承晩의 러시아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여 주목된다.57) 패망한 나라의 국민들이 당하는 핍박을 설명하고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맺었다.
 
  〈우리가 감히 사실을 숨기지 않고 당돌히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심한 듯하나 지금이 어떤 때이뇨? 형편이 이미 다 기울어진지 오랜지라. 이때 말 한마디 못하다가 이만한 말도 할 계제가 없게 된 후에는 이만 충분(忠憤)한 말이나마 어디서 들어보며 할 사람은 어디 있으리오. 창자에 가득한 피를 한 조각 종이에 토함이로다.〉58)
 
  그러나 이처럼 비분강개한 李承晩의 질타는 경영난에 허덕이던 「제국신문」이 1903년 1월에 주식회사로 확장되고 경영진이 바뀌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제국신문」의 「논설」은 애국심에서 쓴 「독약」
 
 
  李承晩이 논설집필을 중단하면서 마지막으로 쓴 「기자의 작별하는 글」이라는 문장은 2년 넘어 심혈을 기울인 그동안의 작업에 대한 소회와 함께 집필을 중단하는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다.
 
  「논설」의 다음과 같은 문장은 李承晩이 새로 바뀐 경영진의 요구로 「논설」 집필을 중단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본래 본 기자는 흉중에 불평한 마음을 품은 자라. 진실로 이 세상과 합할 수 없어 일신에 용납할 곳이 없는 자라. 입으로 나오는 말이 다 사람의 귀에 거슬리며 붓끝으로 쓰는 말이 다 남의 눈에 거리끼는 바니, 이는 불평한 심사에서 스스로 격발함이라. 어찌 억지로 화평히 할 수 있으며, 화평히 할 수 없은즉 어찌 세상과 합할 수 있으리오. 불평한 말이 세상에 합치지 못하고 다만 저 혼자 스스로 상하는 바나, 그러하나 지금 우리나라 민심을 볼진대 다 병의 근원이 죽을 지경에 이르러 혈맥까지 통할 수 없는 모양이니, 여간 순한 약으로는 기운을 통해 볼 수 없는즉 불가불 심한 말로써 독약을 삼아 기운을 충발해 보는 약밖에 좋은 처방이 없는 줄로 여기는 바라. 이 뜻으로 간간 불평한 의논이 많음인즉 이는 실로 면할 수 없는 바요, 겸해 본 기자는 항상 몸으로써 환란 위험함을 자처하는 터인 고로 위태하고 어려운 곳은 항상 사양하지 않고자 하나니 어찌 일호라도 용납함을 구하리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혹 긴절한 의견이 있으면 간간이 글자를 적어보낼 기회가 있을지 혹은 어려울지…〉하고 「논설」 집필을 중단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59)
 
  그가 「죽을 지경」에 이른 우리나라 민심을 일깨워 보려는 애국심에서 쓴 「독약」은 그러나 고종이나 정부관리들에게는 여간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4) 英韓辭典 편찬하다 「독립정신」 집필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정열적으로 「제국신문」의 「논설」을 집필하던 李承晩이 본의 아니게 붓을 놓게 되자 여간 섭섭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적극적인 성품의 그는 실의에 빠지지 않고, 이내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그것은 英韓辭典을 편찬하는 작업이었다.
 
 
  「논설」 중단 사흘 뒤 英韓辭典 만들기 시작
 
 
  李承晩이 영한사전 편찬작업을 시작한 것은 놀랍게도 「제국신문」에 마지막 「논설」이 나간 지 사흘 뒤의 일이다. 왜 하필 영한사전을 편찬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지, 준비는 언제부터 했는지는 그 자신의 자서전 초고에나 그 밖의 그의 전기들에도 설명이 없다. 그것은 아마도 외국 선교사들의 권유와 아울러 자기도 영어공부를 하면서 영어사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무렵에는 外國語學校 등을 통하여 영어 교육이 상당히 보급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전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英語學校만 하더라도 제대로 英文學者 하나를 배출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60) 따라서 사전을 이용하여 영문서적을 제대로 번역해 낼 수도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日本이나 中國에 비해서 크게 뒤떨어진 것이었다. 日本에서는 최초의 본격적인 英日辭典이라고 할 수 있는 堀達之助他編 「英和對譯袖珍辭書」가 1862년에, 최초의 日英辭典인 미국인 헤븐(J. C. Hephurn)編「和英語林集成」이 1867년에 출판되어 있었다.61) 李承晩은 옥중에서 아펜젤러와 에비슨이 넣어준 「웹스터 영어사전」(Webster’s English Dictionary)와 「和英辭典」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는데, 그가 가지고 있던 「和英辭典」이란 아마 헤븐의 「和英語林集成」이었을 것이다. 이 사전은 수록어휘 2만 단어에 부록으로 1만 단어의 英和辭典이 붙어 있는 꽤 본격적인 사전으로서 1900년대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물론 한국에도 몇몇 선교사들이 주로 서양인들의 한국어 습득을 위해 만든 간단한 영어사전류가 있었다. 1897년에 요코하마에서 발행된 게일 목사의 「韓英辭典」(A Korean English Dictionary), 1890년에 발행된 언더우드의 「英韓-韓英辭典」(A 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 in Two Parts, Korean-English & English-Korean), 1891년에 발행된 스콧(J. Scott)의 「英韓辭典」 등이 그것이다.62) 李承晩은 이러한 사전들도 입수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李承晩博士는 독실한 基督敎人이다』
 
 
  李承晩과 영어사전과 관련하여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1928년에 博文書館에서 발행된 金東成著 「鮮英辭典」(The New Korean English Dictionary)에 “Dr. Syngman Rhee is a devout Christian”(李承晩博士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다)라는 예문이 있다는 사실이다.63) 金東成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특파원으로서 1921년의 워싱턴 軍縮會議에 참석하여 李承晩을 인터뷰한 기사를 「東亞日報」에 보도하기도 했었는데, 이러한 예문은 日帝의 검열 아래에서 보여준 지식인들의 抵抗의 한 보기였다.
 
  李承晩은 영한사전 원고의 표지에 “The Transcript of an English-Korean Dictionary”, 곧 「영한사전 수필본」이라는 뜻의 영문 제목을 적었고 본문의 ‘A’항이 시작되는 앞면 속표지에 다시 “A New English-Korean Dictionary by Amogai”, 곧 「아무개 지음, 신영한사전」이라는 뜻의 제목을 붙였다.
 
  그는 이 사전원고를 美製 노트북 세 권에 나누어 적었다. 첫째 권은 510쪽으로서 각 장의 양면에 검은색 연필로 내용을 빽빽이 적었는데, ‘A’항부터 ‘Discourage’항까지의 단어 4970개를 알파벳 순서대로 배열했다. 둘째 권은 모두 438쪽으로서 검은 색 연필, 붉은 색 잉크, 검은 색 잉크 등으로 썼고, ‘Discourager’로부터 ‘Exuberant’까지의 단어 2809개가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셋째 권은 모두 111쪽으로서 ‘Exuberantly’로부터 ‘Fichu’까지의 단어 454개를 붉은 색과 검은 색 잉크로 적었다. 따라서 이 미완성의 영한사전에는 ‘A’부터 ‘Fichu’까지의 총 8233개 단어가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어단어 하나 하나에 한문과 한글로 뜻을 풀이하고 있어서, 말하자면 이 사전은 「英漢韓辭典」인 셈이다.64)
 
  이 영한사전은 李承晩이 옥중에서 벌인 작업 가운데 가장 야심적인 것의 하나였다. 만일에 이 「新英韓辭典」 편찬작업이 완성되었더라면 이 사전은 우리나라의 영어교육과 학문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전 편찬작업은 완성되지 못하고 말았다.
 
  李承晩이 「英韓辭典」 편찬작업을 중단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그러나 필연적인 것이라고 전망했던 러-일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었다. 李承晩은 러-일전쟁이 발발하는 것을 보고 〈비록 세상에 나서서 한 가지 유조한 일을 이룰 만한 경륜이 없으나〉 〈감개 격분한 눈물을 금치 못하야〉 사전 편찬하던 일을 중지하고 급히 「독립정신」을 썼다고 말하고 있다.65) 그러나 이 말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
 
 
  兪星濬의 권고로 「독립정신」 집필
 
 
  李承晩 자신의 말에 따르더라도 「독립정신」의 집필 동기는 위의 서술과는 다르다. 李承晩은 자서전 초고에서 자기가 「독립정신」을 쓰게 된 것은 같이 囹圄生活을 하면서 의기투합했던 兪星濬의 권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 유성준은 함께 詩作도 하고 申興雨가 출옥한 뒤에는 그 대신 함께 감옥서 학교를 맡아 죄수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유성준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모든 改革運動이 실패한 원인은 운동의 지도자들이 민중을 敎育하고 啓蒙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면서 민중을 계몽하는 책을 쓰라고 李承晩에게 권했다는 것이다. 그는 日本에 亡命해 있는 자기 형 兪吉濬이 돌아와 政權을 잡게 되면 〈독립운동에 관한 여론을 일으키기 위해〉 정부예산으로 李承晩의 책을 발간하여 보급시키도록 하겠다면서 집필을 권했다고 했다. 그리하여 비밀리에 「독립정신」을 썼다고 李承晩은 적고 있다.66) 그것이 사실이라면 李承晩은 1903년경부터 책을 쓸 준비를 했던 셈이다. 그리고 특히 주목되는 것은 朴泳孝와는 또 다른 쿠데타 계획을 하고 있던 兪吉濬이 곧 귀국하여 政權을 잡을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러-일전쟁의 불가피성과 日本의 승리를 예견하고 있던 李承晩이 유길준이 일본의 비호 아래 귀국하여 개혁정부를 구성할 것으로 전망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제국신문」의 「논설」 토대로 넉 달 만에 탈고
 
 
  李承晩은 러-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2월19일부터 「독립정신」을 쓰기 시작하여 넉 달 남짓 만인 6월29일에 탈고했다. 그런데 「독립정신」은 완전히 새로 쓴 책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내용은 「제국신문」에 썼던 「논설」을 뼈대로 하고 「신학월보」에 기고한 글들과 자기가 번역해 놓은 「청일전기」의 내용 등을 취합하여 가필한 것이었다. 새로 써넣은 부분이 절반 가까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67) 일실된 「제국신문」이 현재 남아 있는 분량보다 더 많은 것을 감안하면 「독립정신」에 포함된 「제국신문」의 「논설」 내용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李承晩은 처음에는 「독립정신」의 주지를 선언문이나 성명서처럼 〈한 장 종이에 장서를 기록하여〉 몇만 장을 발간하려 했다고 말하고 있다.68) 그만큼 그는 민중에게 자신의 주장을 주지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끊을 수 없는 말이 연속하는지라〉 책으로 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희망은 「독립정신」의 여러 대목에 피력되어 있다. 「서문」에서 그는 이 책에서 地名과 人名을 많이 쓰지 않고 쉬운 말로 〈고담소설같이 보기 좋게〉 서술한 것은 人民이 보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고, 특히 백성편을 향하여 많이 이야기하는 것도 〈대한의 장래가 전혀 아래 인민들에게 달림이라〉고 천명했다. 그는 또 「마음 속에 독립을 굳게 함」이라는 항목에서는 〈이 책을 기록하는 뜻은 천언만설(千言萬說)로 소리를 높이 질러 전국 동포들에게 일심으로 합력하야 대한제국의 독립권리를 보전하야 거의 다 끊어진 생맥을 이어 영원 무궁케 만들기를 원함이라〉고도 했다.69) 그러나 논설집같이 구성되어 있는 「독립정신」이 「제국신문」의 논설들을 토대로 하여 적은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고 있다.
 
 
  美國은 「인간의 극락국」
 
 
  李承晩이 민중에게 고취시키고자 한 것은 한마디로 근대 國民國家(nation states)의 이데올로기인 내셔널리즘이었다.70) 되풀이하여 애국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그때문이었다. 그것이 곧 「독립정신」이었다.
 
  李承晩은 근대 국민국가의 본을 美國에서 찾았다. 그는 미국을 가리켜 〈이런 나라는 참 즐겁고 편안하야 곧 인간의 극락국이라 할지라〉71)하고 선망해 마지 않았다. 李承晩은 미국이 독립전쟁을 어떻게 용감하게 치렀고, 그 결과 미국인들이 어떤 권리를 누리게 되었는가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미국독립선언서 전문을 소개하고, 선언서에서 〈가장 주장되는 뜻인즉 모든 사람이 다 동등으로 났다 함이라〉72)하고, 人間의 平等權을 강조했다. 그는 또 南北戰爭을 소개하면서 〈사람같지 않게 생긴 야만 흑인들의 권리를 위하야 저희나라의 같은 동포끼리 전쟁을 일으켜서…. 자유권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나라에서들은 곧 이런 사적을 보면 도리어 미친 사람이라 이를지라. 어찌 인애와 의리가 지극하야 사람의 생각밖에 뛰어나는 일이 아니리오〉73)하고 노예해방의 의의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노예해방 이후로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노예제도를 폐지했는데, 오직 청국과 한국만이 종(노예) 부리는 풍속을 폐지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미국 흑인들에 대한 위와 같은 표현은 李承晩이 세계의 人種을 문명개화인, 반개화인, 야만인의 세 종류로 구분하는 데서 보듯이,74) 그의 인종적 편견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門戶開放政策으로 상징되는 이 시기의 미국의 東아시아政策의 본질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韓國의 발전 가로막는 中國
 
 
  淸國과 한국이 세계에 뒤떨어져 있는 것은 종 부리는 풍속을 폐지하지 않고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李承晩은 한국이 근대적 국민국가로 발전하는 데 가장 저해되는 나라가 淸國이라고 말했다. 淸國과의 오욕의 역사는 丙子胡亂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병자호란 때에 끌려가서 모진 악형 끝에 〈오랑캐를 꾸짖기를 그치지 아니하다가〉 죽은 三學士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면서, 300년 동안 이른바 朝貢을 하는 〈더러운 욕〉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李承晩은 말했다. 그의 이러한 역사인식은 朝鮮朝儒生들의 崇明排淸(숭명배청) 사상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金九가 衛正斥邪派의 입장에서 三學士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開化派 李承晩도 三學士의 행적을 높이 평가한 것이었다. 李承晩은 갑오경장 뒤에도 오욕의 역사를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수구파들을 맹렬히 비판했다.
 
  〈갑오 이후까지도 청국을 배반하고 독립국이 되는 것이 의없는 일이라 하여 대청 연호를 없이하고 건양(建陽)이나 광무(光武) 연호를 대신하는 책력은 보지 않는다는 무리까지 있었으니, 도학을 숭상한다는 무리들의 독한 해가 이렇듯 심한지라. 진실로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리로다〉75)
 
  李承晩은 중국인은 中華思想이라는 〈교만방자한 생각〉에 젖어 외국인에 대해 잔혹하고, 그러면서도 不正直하고 忠誠心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한국에 대하여 〈어려울 때에는 독립국이라 하다가 편할 때에는 속국이라 하여〉 列强들을 우롱하기 때문에 한국이 안전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청국의 완만 무리함과 조선의 잔약 혼몽함이 더욱이 동양형편을 위태케 할 뿐이라〉고도 적었다.76)
 
 
  西洋文物 受容하여 성공한 日本
 
 
  반면에 日本에 대한 李承晩의 인식은 아주 호의적이었다. 李承晩은 특히 일본이 서구열강의 선진문명을 받아들인 사실을 높이 평가했다. 일본도 처음에는 서양의 통상 요구를 거절했으나 1853년에 美國에 의해 開國한 뒤에 서양의 제도를 모방하여 배움에 힘쓴 결과 동양에서는 유일하게 근대 국민국가를 이룩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었다.77)
 
  李承晩은 1875년에 日本이 朝鮮의 開港을 강요하기 위해 운양호 사건을 도발한 일에 대해서도 〈어두운 이웃나라를 극력하야 깨우쳐서〉 협력하여 서양열강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보전하자는 것이었으므로 〈일본에 대하야 깊이 감사히 여길 바이로다〉78)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듬해 맺은 江華島條約(朝日修好條規)에 대해서도 〈이 약조의 대지가 일본이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대접하야 본래 자주하던 일본국과 평등으로 안다하며… 이때가 곧 조선이 독립권리를 실상으로 회복하던 처음 일〉이라면서 이날을 경축일로 삼았어야 했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에 이 조약이 아니었다면 서양 각국이 결코 그냥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었다.79) 또한 日本은 東아시아로 마력을 뻗치는 러시아의 의도를 간파하고 주야로 백성을 敎育하고 軍事力을 기르는 한편 〈한-청 양국을 깨워 같이 방어하기로 힘쓰고자〉 했다고 격찬하기도 했다.
 
  李承晩의 이러한 일본 인식은 이 시기의 개화파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그것보다 더 호의적인 것이었는데, 그것은 그가 옥중에서 읽은 서양의 신문 잡지의 논지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무렵 美國과 英國은 러시아의 東아시아 進出을 견제하기 위하여 日本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그가 탐독한 「아우트룩」지의 발행인 에보트(Lyman Abbott) 목사도 日本은 삶의 터전을 韓國으로 팽창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80)
 
 
  〈東洋 천지를 임의로 호령하려는〉 러시아
 
 
  李承晩의 이러한 일본 인식은 러시아의 팽창정책에 대한 비판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囹圄의 몸이 되기 전에도 러시아의 각종 利權要求에 대한 반대운동에 앞장섰던 그는 옥중에서 「제국신문」의 논설을 쓰면서도 東아시아로 세력을 뻗쳐오는 러시아에 대한 경계와 비판을 계속했다.
 
  李承晩은 러시아를 가리켜 〈자초로 풍기가 열리지 못하야 지금껏 야만스러운 풍속이 많이〉 남아 있고 과거에는 〈더욱 괴악한 사건이 많은〉 나라였다고 전제하고, 근대국가를 만들려고 노력한 표트르 1세(Pytr I.)의 치적을 소개한 다음, 그의 비밀유언에 따라 러시아의 기본정책이 영토확장이라고 설명했다.81) 그리하여 〈러시아 사람의 정치주의가 전혀 남의 토지를 빼앗기를 위주〉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82) 이러한 러시아 인식은 英國을 비롯한 西洋 여러나라들의 러시아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는 서양에서 공개되어 물의를 빚은 표트르 1세의 유언을 입수하여 옥중잡기에 남기기도 했는데,83) 「독립정신」의 서술은 이 유언을 기본으로 하여 설명한 것이었다. 따라서 러시아가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하는 것도 〈그 서울에서 군사를 파송하야 아시아주 동방 끝에 나오기를 지척같이〉해서 〈동양천지를 임의로 호령하고자 함이라〉라고 설명했다.84) 李承晩은 청국이 러시아에 대해 얼마쯤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자 러시아가 〈해마다 청국지방을 누에가 뽕잎 먹듯 하야 들어오되 청인은 그 지경을 분간하지 못하고〉 그대로 있다고 한탄하기도 했다.85)
 
 
  『러-일전쟁은 자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
 
 
  러-일전쟁은 양국이 국가의 명운을 건 總力戰이었으며, 그 결과는 국제정치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한국은 日本의 이른바 「保護國」이 되어 버렸다.
 
  李承晩은 러-일전쟁이 발발하기까지의 두 나라에 대한 열강의 정책과 전쟁의 추이, 그리고 일본의 승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우리 대한은 장차 일본의 권명하는 찬조를 얼마쯤 받을지라〉86) 라고 한국이 일본의 영향 아래 놓일 것까지 내다보면서도 이를 비판하거나 경계하는 말을 하고 있지 않는 것은 이상할 정도이다. 오히려 그는 러-일전쟁이 한국이 자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면서 〈이번에 당한 기회를 또 좋은 줄로 알지 못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아닌 경고를 하고 있다.87)
 
  그러나 「독립정신」은 뒷부분으로 갈수록 日本에 대한 호의적인 인식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마지막 장인 「일본 백성의 주의」라는 글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일본 백성의 주의하는 바는 관계가 우리에게 더욱 핍근하니, 이는 일본 백성이 각국의 경위와 학문이 매우 진보되었으며, 외교상에 지정을 잘 닦아 세상공론을 돌리기 쉬우며, 모든 이익상에 세력을 늘리기로 말하여도 우리가 여간한 기초를 세워가지고는 비교하여 볼 수 없으며, 더욱이 그 수단이 간교하야 여간한 지혜로는 그 농락에 빠지지 않기 어렵고 한번 빠진 후에는 벗어나기 어려운지라. 저러한 인민들이 장차 우리 어두운 인민과 친근히 간섭이 되면 능히 그 범위에 벗어날 자 몇이나 되겠느뇨.〉88)
 
  李承晩의 일본에 대한 인식의 이러한 변화는 글을 쓴 시점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올리버는 「독립정신」의 본문 47개장과 부록(「후록」) 가운데 옥중에서 쓴 것은 34개장이고 나머지 13개장은 출옥한 뒤에 쓴 것이라고 적고 있다. 새로 쓴 부분은 뒤쪽의 러-일전쟁의 배경과 전쟁의 전개과정 및 그 결과를 논한 부분이라는 것이다.89) 李承晩은 1904년 8월에 출옥하여 11월에 미국으로 건너 가는데, 그는 미국에서 「독립정신」을 출판하기에 앞서 뒷부분의 원고를 새로 쓰기도 하고 초고를 고쳐 쓰기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朴容萬이 트렁크 바닥에 숨겨 美國으로 가져가
 
 
  일단 완성된 원고는 옥중에 있는 鄭淳萬, 李東寧 등에게 읽혀 의견을 들은 다음 먼저 출옥해 있던 朴容萬에게 내보내어 검토하게 했고, 朴容萬은 다시 李商在에게 가져가서 검토를 부탁했다. 李承晩은 이들 옥중동지들의 의견을 참작하여 다시 내용을 손질했다.
 
  李承晩은 「독립정신」이 빨리 출판되어 그가 기대한 독자들, 곧 〈아래 인민〉들에게 널리 읽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희망과는 달리 이 책은 국내에서 출판되지 못했고, 그가 도미하여 프린스턴대학 재학 때인 1910년 2월에야 로스앤젤레스에서 출판되었다.90) 원고를 미국으로 가지고 간 사람은 朴容萬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큰 트렁크 밑바닥에 숨겨서 가져갔다.
 
  李承晩은 미국에서 「독립정신」을 출판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던 것같다. 그것은 이 책에 수록된 많은 사진과 지도 등의 도판을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독립정신」에는 맨 앞장에 실려 있는 가운을 입은 자기 사진을 비롯한 82장의 사진과 6대주의 지도를 포함한 31장의 그림이 수록되어 있다. 자신의 모교인 하버드대학과 프린스턴대학의 건물사진도 있으나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된 희귀한 사진들도 많다. 이 사진들은 모두 李承晩이 대학에 다니면서 수집한 것이었을 것이다. 또한 책 뒷부분에는 이 책의 출판을 위해 大東新書館을 설립한 27명(사진 없이 명단만 5명)의 유지들의 사진이 중죄수 복장을 하고 찍은 이승만의 옥중사진과 함께 게재되어 있다.
 
  올리버는 「독립정신」이 한국인들에게 기여한 것이 톰 페인(Tom Paine)과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저술들이 미국의 독립에 기여한 것과 같았다고 적었는데,91) 이러한 과장된 평가는 李承晩으로부터 「독립정신」을 출판할 때의 그의 의욕이 그랬었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적은 것일 것이다. 이 책의 독자들은 당시에 하와이 농장에서 일하는 농업노동자들이 대부분인 재미교포들이었고, 국내에는 거의 유입되지 못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독립정신」에 대한 소문은 국내와 다른 지역의 동포들에게도 알려져서 李承晩의 명성을 더욱 높이는 데는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5) 실력자 李址鎔의 주선으로 석방돼
 
 
  李承晩은 열성으로 죄수들을 가르치고 傳道하는 한편으로 독서와 집필활동에 몰두하면서도 자신의 赦免(사면)과 석방문제에 여간 집착하지 않았다. 「秋夜不寢」이라는 한문 수필에 보이는 〈임금님의 敎書도 다소 늦어지나보다〉92)라는 구절은 그가 일찍부터 高宗의 사면 조칙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李敬善이 法部에 청원서 올려
 
 
  李承晩 보다도 더 초조하고 불안해 한 것은 李敬善이었을 것이다. 1901년 9월에 고종탄신 50주년 경축 특사로 六犯 이외의 죄수들이 모두 사면될 때에 高宗이 언더우드에게 약속한 대로 아들도 출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그는 李承晩이 특사에서 빠졌을 뿐만 아니라 그해 11월에 영향력 있는 선교사 다섯 사람이 연명으로 내부협판 李鳳來에게 항의편지를 보낸 것에 대해서도 별다른 반응이 없자 그는 여간 낙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물심 양면으로 지원해 주던 아펜젤러가 1902년 6월에 뜻밖의 사고로 사망하고 나서는 李承晩 가족의 불안과 고초는 더욱 심각해졌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李敬善은 1903년 5월11일에 法部에 청원서를 올렸다. 그는 청원서에서 〈本人은 자식이 있으면서 자식 없는 홀아비가 되었고, 그 妻는 남편이 있으면서 靑孀(청상)이 되었으며, 千字文을 읽으면서도 아비를 부르지 못하는 孫子는 아비가 있으면서도 고아가 되었다〉고 한탄하고, 자식의 罪는 六犯 밖인데 그보다 더 중한 死刑, 終身刑 죄인들은 사면의 혜택을 입었는데도 아들은 그렇지 못했다면서 석방해 줄 것을 탄원했다.93) 李承晩의 죄목이 오직 판결문대로 「탈옥 종범」이었다면 李敬善의 말대로 그것은 분명히 六犯 밖이었으므로 당연히 사면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李承晩은 좀처럼 사면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韓圭卨과 閔泳煥에게 救命運動
 
 
  李承晩도 여러 경로를 통하여 사면 운동을 벌였다. 앞에서 본 대로 韓圭卨이 옥중의 李承晩에게 보낸 여러 통의 편지는 李承晩이 그에게 얼마나 집요하게 구원을 요청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李承晩의 사면문제는 정부로서도 그다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같다. 선동가 李承晩이 출옥한다면 또 어떤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韓圭卨은 李承晩이 부탁할 때마다 상황을 알아보고 그때 그때 옥중의 李承晩에게 알려주었다. 다음과 같은 편지에서 우리는 한규설의 李承晩에 대한 애정을 짐작할 수 있다.
 
  〈여러 차례의 풍상을 어떻게 감내하고 계시오. 나도 염려하는 마음이 풀리지 않소이다. 그러던 차에 편지를 받으니 위안이 되고 기쁘오이다.
 
  부탁하신 일은 자세히 보았소이다. 마음에 새겨 두고 기회가 있는 대로 주선해 보리다. 그러나 이런 주선을 할 힘이 내게 있는 것같지 않구려. 오직 나라를 위하는 일념으로 이렇게 내게 애정어린 설명을 해주어 나의 꽉 막힌 소견을 열어주시니 오직 감축할 따름이오.
 
  이 글을 보시는 즉시 불에 던져버리시오.〉94)
 
  그러나 이무렵 韓圭卨은 자신의 말대로 李承晩을 사면시킬 수 있을 만한 영향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李承晩은 일찍이 독립협회에 관여하기도 했던 閔泳煥에게도 자신의 구명을 부탁했다. 閔泳煥도 李敬善을 통해 답장을 보낼 만큼 李承晩에게 호의적이었는데,95) 閔泳煥이 李承晩에게 보낸 편지는 현재 보존되어 있지 않다.
 
 
  먼 친척뻘인 李址鎔이 日本公使와 협의해
 
 
  李敬善은 조정의 실력자인 李址鎔(이지용)에게 아들의 사면문제를 간곡히 부탁했다. 이지용은 興寅君 李最應의 손자이며 完永君 李載兢의 아들로서 高宗의 從姪(종질)이었다. 따라서 李承晩의 집안과는 먼 친척뻘이 되는 셈이다. 그는 1900년 9월에 宮內府 特進官으로 임명된 이래로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궁내부 협판, 궁내부 대신 서리, 의정부 贊政, 군부대신 서리, 警部大臣 서리, 법부대신 서리, 외부대신 서리 등의 요직을 거쳤고, 러-일전쟁이 나자 법부대신과 평리원 재판장, 육군 참장, 헌병사령관 등을 겸임했으며, 2월23일에 韓日議定書를 체결할 때에는 외부대신으로 韓國을 대표하여 日本公使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함께 조약문에 서명했다. 그리고 뒤에는 親日의 길을 걷게 된다.
 
  李址鎔이 李敬善의 부탁을 받고 나서 그에게 회답한 날짜 미상의 편지가 7통이나 보존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李敬善이 보낸 선물을 돌려 보낸다는 내용의 것도 있다.96) 궁색한 李敬善이 아들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음을 알 수 있다. 이지용이 法部에 李承晩의 사면문제를 적극적으로 종용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편지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일간에 어디 출입하셨다는 말씀을 듣고도 바빠서 회답이 늦었습니다. 귀체가 만강하십니까. 저는 그대로 늘 분주하게 다니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뜻은 일간에 여러 차례 法部大臣에게 이야기했고 또 司理局長에게도 부탁했고, 다시 미력을 다해서 주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罪狀이 과연 신중히 다루어야 할 일에 속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득이 여의치 못하니 심히 송구하고 한탄스럽습니다.〉97)
 
  이지용은 또 法部大臣이 〈이 罪人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으므로〉 방면자 명단에 포함시킬 수 없다고 말하더라는 말을 전해 주기도 했고,98) 法部가 아닌 「모처」에 누차 부탁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도 전하고 있다.99)
 
 
  존스 목사가 李承晩에게 편지
 
 
  李敬善은 평소에 李承晩을 지원하고 있는 외국 선교사들도 찾아다닌 것같다. 감리교 선교사 존스(George Heber Jones) 목사가 李承晩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는 외국 선교사들이 李承晩의 사면문제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지난 일요일에 부친을 만나 황제께서 얼마 전에 발표하신 사면령에 당신을 포함시키시지 않았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슬픈 심정입니다. … 그러나 부디 낙담하지 마시오. 하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을 도우실 것입니다. 나는 황제께서 당신을 완전히 사면하실 것과 당신이 출옥하여 한국을 기독교 나라로 만들기 위한 우리의 노력을 돕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100)
 
  이러한 편지에서도 우리는 외국선교사들의 李承晩에 대한 기대가 한국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지도자가 되는 것이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어린 아들 泰山이 편지 날라
 
 
  韓圭卨이나 閔泳煥이 李承晩에게 보낸 편지나 李址鎔이 李敬善에게 보낸 편지는 그대로 李承晩에게 전달되었다. 심부름을 한 것은 그의 어린 아들 泰山이었다. 泰山은 편지를 가지고 오다가 감옥서 문을 지키는 순검에게 들켜 순검이 편지 내용을 읽어 본 일도 있었다.101) 이러한 사실은 이 무렵의 감옥서 경비가 얼마나 허술했는가를 말해 준다. 아니면 감옥서 문을 지키는 순검까지도 李承晩에 대해 특별한 예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이 무렵 泰山은 감옥서에 와서 자고 가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감옥서 안의 아이들과 곧잘 싸우곤 했다. 李承晩은 敬善에게 山이녀석이 아이들하고 싸워서 자기가 매우 두들겨 패주었으나 그래도 말을 잘 안 듣는다고 걱정하는 편지를 보내고 있다.102) 그것은 李承晩이 옥중에 있는 동안에 7대독자 泰山을 敬善이 응석받이로 키웠기 때문일 것이다.
 
 
  새 政府 등장으로 사면기대 밝아져
 
 
  韓日議定書가 체결된 직후인 1904년 3월에 高宗은 하야시 公使의 요구도 참작해서 중망 있고 개혁 성향이 있는 관료들로 政府를 새로 구성했다.103) 韓圭卨과 尹用求가 의정부 찬정, 閔泳煥이 내부대신(뒤이어 학부대신) 등에 새로 임명되었다. 外職으로 나가 있던 尹致昊도 다시 외부협판에 기용되었고, 朴定陽은 이미 1월에 탁지부대신에, 李址鎔은 2월에 법부대신에 임용되어 있었다. 이는 李承晩의 사면 전망을 밝게 하는 것이었다. 뒷날 李承晩은 이때의 일과 관련하여 〈1904년에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에 韓國改革黨은 잠깐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 그들이 한 일 가운데 한 가지는 나를 석방해 주는 일이었다〉고 적었다.104)
 
  3월12일에 平理院에서는 李源兢, 李商在, 洪在箕 兪星濬, 金貞植, 李承仁, 安明善 등 이른바 改革黨事件과 관련된 정치범들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었고, 이들은 4월27일에 모두 석방되었다.105) 그러나 이때에도 李承晩은 제외되었다. 오랫동안 獄苦를 같이 치르고 같이 성경공부를 하며 국가의 장래를 같이 걱정하던 이들 옥중동지들이 출옥한 뒤에 혼자 남은 李承晩이 느꼈을 고독감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비록 그때까지도 「독립정신」의 집필에 몰두하고 있기는 했지만.
 
 
  美國 公使에게 석방교섭 말도록 편지
 
 
  7월 들어 감옥 안팎에는 주한 미국공사 알렌(H. N. Allen)이 주한 일본공사관과 대한제국 外部에 교섭하여 李承晩을 보호해 줄 것과 되도록이면 그를 석방해 줄 것을 요구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소식을 들은 李承晩은 곧 알렌 公使에게 공개편지를 썼다.
 
  〈…각하께서 생을 위해 日本公使에게 보호를 요청하기도 하고, 또 外部에 석방도 요청했다는 소식이 누차 신문지상에 게재되었습니다. 생의 사사로운 분수에 비추어 감사함을 이기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생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청탁한 바가 있어서 그런가 하는 의혹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생의 염원을 저버린 것이요, 또한 각하의 公人으로서의 체통을 훼손하는 일이 됩니다. 하물며 한국 죄수의 보호를 이웃나라의 공사에게 넌지시 부탁하는 것은 우리 한국의 독립을 존중히 여기시는 본의에 위배되며, 귀국과 우리나라의 友誼를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생은 차라리 억울함을 품고 달갑게 죽을지언정 이 일만은 참으로 원하지 않는 바이오 또한 차마 할 수도 없습니다.〉106)
 
  이 시기의 신문들이 남아 있지 않아서,107) 누차 신문에 보도되었다는 李承晩의 주장은 확인할 수 없다.
 
 
  李址鎔이 하야시에게 사전양해 구해
 
 
  한편 申興雨는 李承晩의 석방과 관련하여 〈日本公使 林權助씨는 한국 정부 관계자와 李承晩의 석방문제로 교섭한 결과 무기징역이 7년으로 (감형)되어 석방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108) 그는 1903년 봄에 출옥했었다.
 
  이때는 하야시 公使가 韓國의 內政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한 때이기는 했으나, 그가 한국 정부에 대해 李承晩을 특정해서 석방을 종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李址鎔이 하야시에게 사전양해를 구했을 개연성은 있다. 앞서 본 李敬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지용이 누차 부탁했다는 「모처」도 하야시 公使를 지칭하는 것인지 모른다.
 
  물론 알렌 公使도 하야시에게 李承晩의 일을 부탁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무렵 알렌은 전년에 워싱턴에 가서 테오도어 루스벨트 大統領과 극동문제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온 뒤로 의욕을 잃고 있는 때였으므로 다른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李承晩의 사면문제를 두고 종전처럼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李承晩이 석방되는 데에는 이지용의 힘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침내 1904년 7월8일에 高宗은 李承晩 등 정치범을 포함한 죄수들에 대해 특사조칙을 내리고 8월 초에 이들의 석방을 재가했다.109) 李承晩은 8월7일에 징역수 140명, 사형수 10명, 미결수 78명과 함께 출감했다. 수감된 지 5년 7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제 그는 만 스물아홉 살이 되어 있었다.
 
  李承晩의 오랜 옥중생활은 참기 어려운 고초를 동반하는 것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그로 하여금 가장 중요한 人格形成期에 집중적인 學問習得과 傳道活動과 계몽적인 논설집필을 통하여 감옥 밖의 환경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을 지도자의 수업을 집중적으로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것을 두고 李承晩 스스로 「깨달음」과 「감사함」이었다고 한 것110)은 썩 적절한 표현이었다.●

연재 孫世一의 비교 評傳- 李承晩과 金九(13)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1) 방랑길에서 실감한 班常의 모순
 
 
  金昌洙(金九)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늦은 봄 안개가 자욱한데다가 인천은 연전에 서울 구경을 왔을 때에 한번 지나쳤을 뿐이어서 길이 생소했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밤에 밤새도록 바닷가 모래밭을 헤매고 나서 동이 틀 때에 살펴보니까 기껏 달아났다는 것이 감리서 뒤쪽 龍洞 마루턱이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수십 보 저쪽에서 순검 한 명이 칼소리를 제그럭그리며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또 죽었구나 하고 숨을 곳을 찾다가 길가의 어떤 가겟집 아궁이를 가려 놓은 긴 판자 밑에 급히 몸을 숨겼다. 순검의 흔들리는 칼집이 그의 코끝을 스칠 듯이 지나갔다.
 
  아궁이에서 나오자 훤하게 날이 밝아오고 천주교당의 뾰족탑이 보였다. 金昌洙는 그곳이 동쪽일 것으로 짐작하고 그 방향으로 걸어갔다. 한참 걸어가다가 무턱대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서 도움을 청했다. 金昌洙는 주인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감리가 비밀리에 석방해 주었으나 이런 몰골을 하고는 대낮에 길을 갈 수 없으니, 날이 저물 때까지 집에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주인은 매정하게 거절했다. 다시 花開洞(화개동) 방향으로 가다가 맨상투바람에 두루마기만 걸치고 아직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는 모꾼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식전 막걸리 집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金昌洙가 붙잡자 그는 깜짝 놀라며 『누구시오?』 했다. 金昌洙는 모꾼에게 자신의 이름과 석방된 사연을 말해 준 다음 길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모꾼은 반갑게 승낙하고 이골목 저골목 후미진 길로만 걸어서 화개동 마루터기까지 동행해 주었다. 그는 동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리로 가면 水原 가는 길이고 저리로 가면 始興으로 올라가는 골목이니 마음대로 갈 길을 정하시오』
 
  거기에서 모꾼과 작별했는데, 金九는 너무 급한 나머지 미처 그의 이름도 묻지 못했다고 「백범일지」에 적고 있다.1)
 
  이때에 金九가 전혀 알지 못하는 집주인에게나 길가는 모꾼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도움을 청한 것은 재판과정을 통하여 인천 사람들에게 자기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길가 방석솔 밑에 숨어서 위기 모면
 
 
  金昌洙는 시흥 가는 길을 택했다. 서울로 가기로 한 것이다. 그의 행색은 누가 보든지 도둑으로 알기 십상이었다. 머리는 감옥에서 장티푸스를 앓아서 머리털이 전부 빠지고 새로 난 머리카락을 꼭대기만 노끈으로 졸라 매어 솔잎상투를 틀고 수건으로 동인 채였고, 옷차림은 두루마기도 없이 바지저고리 바람이었다. 옷으로만 본다면 가난한 사람의 옷은 아니었으나, 새로 입은 옷에 보기 흉하게 흙이 묻어 있어서 자기가 보기에도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인천항 5리 밖에 이르자 해가 떴다. 바람결에 들리는 것은 온통 호각소리였다. 산에도 사람이 희끗희끗 보였다. 金昌洙는 이런 행색으로 계속 길을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산 속에 숨더라도 반드시 수색을 당할 것이므로 그것도 불가능했다. 생각 끝에 그는 虛則實實則虛(허술한 것이 오히려 실속 있고, 실속 있게 한 것이 오히려 허술하다는 뜻) 격으로 차라리 큰길 가에 숨으리라 작정하고, 큰길 가에 드문드문 심어 놓은 방석솔(가지가 옆으로 넓게 뻗은 소나무) 밑으로 두 다리를 디밀고 들어가 반듯이 누웠다. 드러난 얼굴은 솔가지를 꺾어서 가렸다. 순검과 간수들이 떼를 지어 그가 숨어 있는 솔포기 앞을 지나갔다. 그들의 주고 받는 말을 통해서 曺德根은 서울로, 梁鳳求는 배로 달아난 것을 알았다.
 
  『김창수는 어디로 갔을까? 김창수는 잡기가 어려울걸. 과연 장사야. 김창수는 잘했지, 갇혀 있기만 하면 무엇 하나』
 
  마치 바로 앞에 숨어 있는 金昌洙를 보고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았다.
 
  순검들은 부근 산기슭을 모두 수색한 모양이었다. 황혼녘이 되어 아침에 지나갔던 순검들과 간수 金長石 등이 발부리 앞을 지나서 인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서야 金昌洙는 솔포기에서 나왔다. 전날 이른 저녁 밥을 먹고 난 뒤로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터라 하늘이 빙빙 돌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花柳거울 주고 죽 한 그릇 얻어 먹어
 
 
  金昌洙는 근처 동네의 어떤 집에 들어갔다. 자기는 서울 靑坡사람인데 황해도 연안에 가서 곡식을 옮겨 오다가 北城浦 앞에서 파선을 당했다고 말하고, 밥을 좀 먹여 달라고 청했다. 주인은 죽 한 그릇을 주었다. 이때에 金昌洙는 어떤 사람이 정표로 준 花柳거울을 호주머니 속에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을 꺼내어 그집 아이에게 주었다. 그러면서 하룻밤 묵어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주인은 거절했다. 주인은 金昌洙의 몰골을 보고서 수상히 여겼던지 집에 들이기를 꺼려했다. 이 화류거울은 시가가 백동전 1냥이었는데, 그것은 쌀 한 말 값도 더 되는 돈이었다. 결국 죽 한 그릇을 쌀 한 말을 주고 사먹은 셈이 되고 말았다.
 
  『저기 저집 사랑에는 나그네들이 더러 자고 다니니, 그 사랑에나 가서 물어 보시오』
 
  그러면서 주인은 나가달라고 말했다. 金昌洙는 할 수 없이 그 집으로 가서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가만히 동네를 살펴보니까 한가운데에 디딜방앗간이 있고 그 옆에 볏짚단이 있었다. 그는 볏짚단을 안아다가 방앗간에 펴고 하룻밤을 보낼 잠자리를 준비했다. 방앗간에 볏짚단을 베고 누워서 「孫武子」와 「三略」을 소리내어 외우자 동네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거지도 글을 읽는다!』
 
  『그사람 거지가 아닌가 보데. 아까 큰 사랑에 와서 하룻밤 자고 가자고 청하던 사람이다』
 
  金昌洙는 흥겨운 생각이 들었으나, 張良이 흙다리 위를 조용히 걸었던 故事에 비하면 자신의 오늘의 처지는 보잘것없다고 여겨져, 미친 사람 모양으로 욕설을 함부로 하다가 잠이 들었다. 張良의 고사란, 漢나라 高祖의 참모였던 張良이 일찍이 下♥(하비)에 숨어 살 때에 흙다리에서 黃石公이 떨어뜨린 신을 주워다 주고 그에게서 병서를 받았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서는 자신의 거지 흉내가 張良이 신분을 감추는 것에 비하면 어림없다고 생각하여 미친 시늉을 했다는 뜻이다.
 
  金昌洙는 새벽 일찍 일어나서 좁은 길을 골라 걸으며 서울로 향했다. 벼리고개를 향해 걸어가다가 어떤 집 문 앞에서 아침밥을 구걸했다. 活人署(조선시대에 서울의 병인을 구호하는 임무를 관장하던 관서)의 걸인배들이 집집마다 여나믄 명씩 몰려다니며 크고 힘찬 소리로 고함 지르듯이 힘차게 구걸한다는 말을 고향에 있을 때에 들었던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렇게는 못하고, 기껏 『밥 좀 주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으나 아무런 기척이 없었고 그 집 개가 어지러이 짖어대는 바람에 주인이 머리를 내밀었다.
 
  『걸식을 하려면 미리 시켜야지, 그렇지 않았으니 무슨 밥이 있겠느냐?』
 
  『여보, 밥 숭늉이라도 좀 주시오』
 
  金昌洙는 하인이 갖다주는 숭늉 한 그릇을 마시고 일어섰다.
 
 
  하대한다고 書堂訓長 나무라
 
 
  金昌洙는 큰길을 피해서 시골 마을로만 걸었다. 이 동네에서 저 동네를 가는 마을사람 모양으로 인천과 부평 등지의 여러 郡을 지나갔다. 이삼년 동안 좁은 감옥 안에서만 웅크리고 생활하다가 넓은 세상에 나와서 가고 싶은 곳을 마음껏 활개치며 가노라니까 심신이 상쾌했다. 그는 감옥에서 배운 시조와 타령을 흥얼거리면서 길을 갔다.
 
  그날로 서울 楊花津 나루에 당도했다. 날은 저물고 배는 고팠으나 주머니에는 뱃삯 한푼 없었다. 동네 書堂을 찾아가서 선생과 만나기를 청했다. 그런데 서당 선생은 金昌洙가 나이도 젊고 의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을 보고 초면에 하대를 했다. 金昌洙는 정색을 하고 서당 선생을 나무랐다.
 
  『당신이 남의 사표가 되어 가지고 마음이 이처럼 교만하니 어찌 아이들을 잘 가르칠 수 있겠소? 내가 일시 운수 불길하여 길에서 도적을 만나 이 모양으로 선생을 대하게는 되었으나 결코 선생에게 하대를 받을 사람은 아니오』
 
  그러자 서당선생은 金昌洙에게 사과를 하고 내력을 물었다. 金昌洙는 仁川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벼리고개에서 도적을 만나 의관과 짐을 모두 빼앗기고 서울로 가는 길인데, 날도 저물고 주리기도 하여 예절을 알 만한 선생을 찾았노라고 둘러댔다. 그러자 서당선생은 함께 있을 것을 승낙하고 토론을 하며 하룻밤을 지냈다. 이튿날 아침밥을 먹은 뒤에 서당선생이 편지를 써서 학동을 시켜 나루 주인에게 전했다. 그 덕에 金昌洙는 뱃삯 없이 양화나루를 건넜다. 그것은 탈옥수 金昌洙의 능란한 임기응변이었다.
 
 
  옥중 동료들의 人情과 背信
 
 
  金昌洙가 서울로 가는 목적은 별것이 아니었다. 그는 인천감옥에 있으면서 여러 곳의 사람들을 만났었는데, 그들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고 또 같이 탈옥한 曺德根도 만나볼 생각이었다. 金昌洙는 감옥에서 사귀었던 南營羲宮(남영희궁) 청지기를 찾아갔다. 그는 배오개 유기장 등 대여섯 사람을 모아서 인천 앞바다에 배를 띄우고 백동전 私鑄(사주)를 하다가 모두 체포되어 1년 남짓 동안 金昌洙와 함께 옥살이를 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출옥할 때에 金昌洙에게 생전에 잊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면서 출옥하거든 꼭 연락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었다.
 
  金昌洙가 남대문을 들어서서 남영희궁을 찾았을 때는 벌써 초저녁이었다. 청지기는 찾아온 사람이 金昌洙임을 알자 『아이구머니, 이게 누구요!』 하면서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예전의 감옥 동료들을 모두 불러 모아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 그들은 金昌洙의 행색이 초라한 것을 보고, 제각기 추렴하여 옷과 갓을 새로 마련해 주었다. 서너 해 만에 망건을 쓰자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고 「백범일지」는 적고 있다.2)
 
  金昌洙는 며칠 동안 그들과 어울려서 잘 놀다가 曺德根의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조덕근은 金昌洙를 피했다. 金昌洙가 자기보다 중죄인임을 알고 있는 조덕근은 만나서 이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제서야 金昌洙는 새삼 자신이 퍽도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탈옥할 때에 혼자서 달아날 수도 있었으나 조덕근의 애걸하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들어가서 그를 구해 주지 않았던가. 金昌洙는 자신을 피하는 조덕근의 행실을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고 자책했다. 그런데 조덕근은 金昌洙가 서울을 떠난 직후인 1898년 4월 초에 붙잡혀서 인천감옥에 재수감되었다.3) 같이 탈옥한 다섯 사람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잡힌 것이었다. 다시 투옥된 曺德根은 이듬해 1월에 탈옥하려던 동료 죄수들의 계획을 간수에게 고발하고 자신은 화를 면하기도 했다.4)
 
  金昌洙는 며칠 동안 이사람 저사람에게서 성찬을 대접받으면서 쉬었다. 金昌洙가 그들에게 팔도강산 유람이나 하겠다면서 작별하려 하자 그들은 노자를 추렴하여 한짐 지워주었다.5)
 
  그런데 그가 서울에 잠시 머물렀던 1898년 3월 하순은 이 나라 역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때였다. 1896년 4월에 결성된 獨立協會의 자주민권운동은 이무렵에 이르러 근대적 대중집회인 萬民共同會로 발전하고 있었다. 3월10일에 열린 최초의 만민공동회에서 李承晩이 극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 이러한 사실은 「독립신문」 「제국신문」 등 당시의 신문에 자세히 보도되고 있었는데, 「백범일지」에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적이 의아스럽다.
 
 
  忠武公 李舜臣의 기념비 찾아
 
 
  여비를 마련한 金昌洙는 그날로 銅赤江(동작나루)을 건너서 삼남지방으로 향했다. 탈옥수의 방랑길이 시작된 것이다. 마음이 매우 울적해진 그는 僧房 뜰에서부터 폭음을 시작하여 밤낮을 계속해서 마셨다. 그리하여 果川을 지나서 겨우 水原의 烏山 장터에 이르렀을 때에는 한짐이나 되던 노자가 모두 동이 나고 말았다.
 
  金昌洙는 오산 장터 서쪽 동네에 사는 金三陟(김삼척)의 맏아들을 찾아갔다. 김삼척은 전에 三陟領將을 지낸 사람인데, 그 큰아들이 인천항에서 장사를 하다가 실패한 관계로 인천감옥에서 金昌洙와 한달 동안 같이 고생한 적이 있었다. 그는 金昌洙를 몹시 존경하여 출옥하면서 뒷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해 두었었다. 金昌洙는 김삼척의 여섯 아들들과 어울려서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며칠을 보냈다.
 
  며칠 뒤에 金昌洙는 약간의 노자를 얻어서 다시 길을 떠났다. 牙山(아산)을 지나다가 배암밭 동네(현재 현충사가 있는 아산시 염치읍 白巖里)에 들어가서 그곳에 있는 忠武公 李舜臣(이순신)의 기념비를 구경했다. 金昌洙가 일부러 배암밭 동네까지 들어간 것은 이순신에 대한 관심때문이었을 것이나, 「백범일지」에는 이순신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없다.
 
  아산에서 公州를 지나 恩津 江景浦에 있는 孔鍾烈을 찾아갔다. 公州에서는 임진왜란 때에 맨 먼저 僧兵을 일으킨 高僧 靈奎(영규)의 비를 보고 〈많은 느낌을 받았다〉고 「백범일지」는 적고 있다.6) 공종열은 마침 부친 孔中軍의 상중이었다. 공종열은 사람됨이 영리하고 학문도 어느 정도 있어서 일찍이 운현궁 청지기를 지냈고, 趙秉式(조병식)의 마름으로서 강경포에서 물상객주를 경영하다가 금전관계로 살인 소송에 걸려들어 여러 달 동안 인천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金昌洙와 친하게 지냈었다. 그런데 강경포는 인천에서 아침 저녁으로 오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이 때문에 각 사랑마다 사방으로 왕래하는 객지 사람들이 드나들어서 金昌洙의 비밀이 발각될 우려가 있었다. 그리하여 공종열은 金昌洙를 자기 부인 방에서 묵게 했다.
 
 
  과부와 간통한 상노의 자식 내다 버리게
 
 
  공종열의 집에서 며칠을 쉬고 있던 어느 날 밤이었다. 사방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유난히 달이 밝은데, 공종열의 어머니 방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金昌洙는 가만히 일어나 앉아 창문 유리로 마당을 내다보았다. 그 순간 갑자기 칼빛이 번쩍했다. 자세히 살펴보니까 공종열은 칼을 들고 그 어머니는 창을 끌며 군사를 동원했다. 金昌洙는 행여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옷을 차려 입고 앉았다. 얼마 뒤에 공종열이 어떤 청년의 상투를 끌고 들어왔다. 그는 하인을 불러모아 두레집을 짓고 거기에 그 청년을 거꾸로 매어달았다. 그러고는 열 살 안팎의 사내아이 둘을 불러서 방망이 한 개씩을 쥐어 주면서 말했다.
 
  『너희들의 원수이니 너희들 손으로 때려죽여라』
 
  그러다가 孔鍾烈은 金昌洙가 있는 방으로 들어와서 이렇게 말했다.
 
  『형이 매우 놀랐을 터이니 미안하오. 그러나 형과 나 사이에 무슨 숨기고 꺼릴 일이 있겠소. 내 누님 한 분이 두 아들을 데리고 과부로 혼자 살면서 수절하다가 내 집 상노놈과 간통하여 얼마 전에 해산을 하고 죽고 말았소. 그놈을 불러 「네 자식을 데리고 먼 곳으로 가서 기르고 내 앞에 보이지 말라」고 하였소. 그런데 그놈이 천주학을 하여 신부의 세력을 믿고 내 집 곁에 유모를 두어 내 집안에 수치를 끼치는 것 아니겠소. 형이 나가서 호령하여 그놈이 멀리 달아나도록 하여 주오』
 
  金昌洙는 어느 모로 보나 孔鍾烈의 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는 마당으로 나가서 달아맨 것을 풀어 주고 그 자의 죄를 하나하나 열거하며 꾸짖었다. 孔鍾烈은 그 청년에게 오늘 밤 안으로 아이를 내다버리고 멀리 떠날 것을 명령했다. 집안이 이렇게 소란스럽게 되자 金昌洙는 자신의 신분이 탄로날 것이 염려되어 날이 밝는 대로 떠나겠다고 말했다. 孔鍾烈은 자기 매부 陳宣傳이 무주읍에 살고 있는데, 그집이 부자일 뿐만 아니라 그곳이 한적한 곳이니 그리로 가서 세월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면서 소개편지를 써주었다.7)
 
  이튿날 아침 孔鍾烈의 집을 출발한 金昌洙는 강경포를 채 벗어나기 전에 거리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을 보았다. 모여든 사람들은 새벽에 갯가에서 어린 아이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지금은 그 소리가 끊긴 것으로 보아서 아마 그 아이는 죽은 모양이라고들 말했다. 그 말을 듣자 金昌洙는 천지가 아득했다.
 
  『오늘 살인을 하고 가는 길이로구나. 그 자가 밤에 내 얼굴을 대하면서 심히 무서워하더니, 공종열의 말을 곧 내 명령으로 생각하고 제 자식을 안아다가 강변에 버리고 도주한 것 아닌가!』
 
  가뜩이나 울적하던 참이었는데 아무 죄 없는 어린 아이를 자기의 말 한마디로 죽게 했다는 자책감에 金昌洙는 무척 서글픈 심정이 되었다. 이때부터 金昌洙는 三南地方을 방랑하면서 그 지방의 심한 班常의 신분차별을 체험한다. 이때에 金昌洙가 체험한 것은 일찍이 淸國에 가면서 咸鏡道地方을 여행한 것과 함께 그가 우리나라의 실상을 직접 견문하는 값진 기회가 되었다.
 
  金昌洙는 孔鍾烈이 시키는 대로 무주로 갔다. 가는 길에 錦山에서는 임진왜란 때에 義兵 700명과 함께 戰死한 의병장 趙憲의 敗績遺址(현재의 七百義塚)를 둘러보았다. 무주읍에 사는 진선전의 집을 찾기는 했으나 구구하게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은 마음을 더욱 우울하게 할 뿐이었다.
 
 
  金亨鎭을 찾아 南原으로
 
 
  드디어 金昌洙는 무전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왕 三南地方을 돌아다닐 바에는 南原의 金亨鎭을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형진의 매부 崔君善이 全州 남문 안에서 한약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먼저 남원 耳洞8)의 김형진의 고향을 찾아갔다. 동네에 들어서자 그는 김형진이 사는 곳을 물었다. 그러자 동네사람들은 놀라고 의아해 하면서 김형진을 찾는 까닭을 물었다. 金昌洙는 서울에서 알게 되어 지나는 길에 들렀다고 말했다. 동네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김형진이 이 동네에서 대를 이어 살기는 했으나 연전에 東學에 가담했다가 집안이 몰락하여 식솔들을 이끌고 도망간 뒤로는 소식이 끊겼다고 했다.
 
  김형진이 동학에 가담했었다는 말은 전혀 뜻밖이었다. 같이 청국을 다녀오고 온갖 위험을 함께 겪으면서 金昌洙는 김형진에게 자신의 일생에 대해서 빠짐없이 다 털어 놓았었다. 그런데도 김형진은 자신의 내력을 숨기고 비밀로 했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金昌洙는 김형진이 여간 섭섭하지 않았다. 그는 전주로 가서 김형진의 그 뒷일을 알아보기로 했다. 김형진은 金昌洙와 헤어진 뒤인 1897년에 崔時亨으로부터 金溝接主로 임명되었는데,9) 그에 앞서 동학농민전쟁 때에 어떻게 활동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南原을 출발한 金昌洙는 任實을 지나서 全州로 향했다. 임실에서 전주로 가는 길에 芳峴(방고개)10)이라는 고개를 넘을 때의 일이었다. 金昌洙는 우연히 풍채가 부잣집 주인 같아 보이는 마흔 남짓의 중늙은이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혼자서 나귀를 타고 가다가 고개 밑에서부터 나귀에서 내려서 걷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길동무가 되어 서로 인사를 했다. 그는 임실 읍내에 사는 文之來11)라고 했다. 서로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고개 마루에 당도했다.
 
  고개 위에는 주막이 서너 채 있었고, 주막 근처에는 보부상 수십 명이 쉬고 있었다. 문지래가 고개 위에 도착하자 주막 주인이 나와서 五衛將(오위장) 영감 오시느냐고 반가이 맞으면서 들어가 술이나 한잔 하시라고 권했다. 그는 사양하다가 金昌洙에게 같이 쉬어가자고 말했다. 문지래는 주막 주인의 특별한 환대를 받는 처지인 것 같아서 金昌洙는 그의 권유를 사양하고 혼자서 고개를 넘었다. 서산 마루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金昌洙는 급히 걸어서 완주군 上關의 한 주막에 들어갔다. 저녁밥을 먹고 앉아 담배를 피울 때쯤해서 급보가 전해졌다. 해지기 직전에 고개 위에 30여 명의 강도가 나타나서 행상들의 재물을 약탈했는데, 문지래는 취중에 그 강도들을 보고 호령하다가 강도들의 도끼에 찍혀 죽었다는 것이었다. 金昌洙는 가슴이 섬뜩했다. 만일에 문지래의 권유대로 술자리를 같이 했더라면 그의 목숨도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문지래는 임실의 서리배로서 그의 동생이 閔泳駿(민영준)의 신임을 받는 청지기임을 빌미로 위세를 부리다가 인근 사람들의 인심을 잃은 탓에 이번에 화를 만난 것이었다.12)
 
 
  全州장 구경하다가 金亨鎭의 동생 만나
 
 
  전주에 도착한 金昌洙는 崔君善의 한약국을 찾아가 자신이 김형진의 친구임을 밝히고 김형진이 사는 곳을 물었다. 최군선은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김형진 말씀이오? 김형진이 내 처남인 것은 사실이나, 내게는 지기 어려운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자기는 벌써 황천객이 되었소』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최군선을 찾아간 金昌洙는 슬픈 감회를 참을 수 없었다. 최군선의 태도가 너무 불친절하여 더 이상 물어볼 생각도 나지 않았다. 金昌洙가 全州까지 간 것은 金亨鎭을 찾기 위한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金亨鎭이 東學에 가담했었다는 사실은, 비록 본인으로부터 직접 듣지 못한 점은 섭섭했을 것이나, 그로하여금 김형진에 대해 더욱 동지적인 우정을 강하게 느끼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일찍이 東學농민군의 선봉으로서 海州城공략에 앞장섰던 그가 東學農民軍의 勝戰地였던 全州에 와서도 그것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뿐만 아니라 三南地方을 여행하면서 임진왜란 전적지에 대해서는 특별한 감회를 느꼈다고 적으면서도, 정작 동학농민전쟁의 현장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그 점은 매우 의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군선과 작별한 金昌洙는 그날이 마침 전주 장날이었으므로 장터로 가서 장구경을 했다. 그는 이리저리 다니다가 白木廛(백목전)에 가서 포목 換買(환매: 돈대신 물품을 주고 다른 물품을 사는 것)하는 것을 구경했다. 시골 농사꾼으로 보이는 어떤 젊은이가 포목을 환매하는 것을 우연히 보았는데, 용모가 김형진과 너무도 흡사했다. 김형진보다는 젊어 보였으나, 말하는 것과 행동거지가 꼭 김형진 같았다. 다만 김형진에게는 文士의 자태가 보였으나 그 젊은이는 농사꾼 같아 보이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金昌洙는 그사람이 일을 다 보고 돌아가려 할 즈음에 물었다.
 
  『당신 김서방 아니시오?』
 
  『예, 그렇지라오마는 당신은 뉘시오니까?』
 
  『노형이 김형진씨 계씨가 아니오?』
 
  젊은이는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했다. 金昌洙는 계속해서 물었다.
 
  『나는 당신 면모를 보고 김형진씨 계씨임을 짐작했소. 나는 황해도 해주에 사는 金昌洙요. 노형 백씨 생전에 혹시 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소?』
 
  그러자 그 젊은이는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말을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과연 그랬습니까? 내 형 생전에 당신께 관한 말씀을 들었을 뿐 아니라, 별세하실 때에도 창수를 생전에 다시 못 보고 죽는 것이 유한이라고 했지라오. 제 집으로 가십시다』
 
  金昌洙는 그를 따라 金溝 院坪으로 가서 조그마한 집으로 들어갔다. 젊은이가 자기 어머니와 형수에게 金昌洙가 찾아온 것을 말하자 집안에 곡성이 진동했다. 이날은 김형진이 죽은 지 열아흐레째 되는 날이라고 했다.
 
  金昌洙는 靈筵(영연)에 들어가서 절하고 예순 노모와 서른 과수에게 인사를 했다. ♥아홉 살 쯤 나 보이는 아들 孟文(맹문)은 아직 철을 몰랐다. 장에서 만났던 젊은이는 김형진의 둘째 아우였는데, 그에게도 아들이 하나 있었다.
 
  金昌洙는 金亨鎭의 집에서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닌 옛벗을 생각하며 며칠을 묵고 다시 木浦를 향해 떠났다.
 
  金九는 이때에 全州에서 목격했던 일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백범일지」에 적고 있다. 전주에서는 營吏와 使令이 신분이 다른 것 때문에 서로 원수처럼 생각하여 鎭衛隊(진위대) 병정을 모집할 때에도 영리들이 혹시 사령이 입영될까 염려하여 자기네 자식들과 조카들을 전부 병정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머리에는 상투를 그대로 두고 그 위에 모자를 높직하게 만들어 쓰고 있었다.13) 이러한 사실은 三南지방의 班常의 심한 알력과 함께 갑오경장 이후에도 지방 관리들의 기강이나 軍紀가 얼마나 해이해져 있었는가를 말해 준다.
 
 
  金堤 萬頃平野의 「美風良俗」
 
 
  金九는 〈三南地方의 양반의 위엄이나 속박이 심하기는 하나 그런 가운데에도 약간의 美風良俗이 없지 않다〉14)면서 그 보기로 金堤(김제) 萬頃(만경)평야를 지나면서 본 모내기 광경을 소개하고 있다. 농사꾼들은 아침에 일을 시작할 때에 「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쓴 司命旗를 들고 장구를 치며 들에 나가서 기를 세웠다. 모를 심을 때에 선소리꾼이 북을 치고 農歌를 인도하면 남녀 농사꾼들은 손발을 흔들고 춤을 추며 일을 했다. 논 주인은 탁주를 논두렁 여기저기에 동이째 내다 놓고 마음대로 마시게 하고, 행인이 지나가면 다투어 술을 권했다. 농사꾼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는 현직 감사나 수령이라도 말에서 내려 인삿말을 건넨다고 했다.
 
  또한 대개의 농업 노동자들에게는 조직이 있어서 논 주인이 일꾼을 살 때에는 그 지방 조직의 有司(유사: 우두머리)와 교섭하는 것이었다. 그 때에 미리 의복, 품삯, 휴식, 질병 등에 대한 조건을 정하고, 실제 감독은 유사가 맡아서 한다고 했다. 일꾼이 게으름을 부려도 논 주인이 마음대로 다루지 못하고 유사에게 말해서 징계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金九는 光州 역말이라는 동네를 지나면서 들은 말로는 그 동네에 가구수가 몇백 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동네에 동장이 무려 일곱 사람이나 일을 본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는 西北地方에서는 보지 못한 특이한 풍습이라서 인상깊었다고 적고 있다.
 
  光州에서 木浦로 향하던 길에 金昌洙는 咸平 李進士의 육모정에서 보름 가량 머물렀다. 이때의 일을 金九는 뒷날 국사원본 「백범일지」를 펴낼 때에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나는 함평의 이름난 육모정(六角亭) 이진사 집에 과객으로 하룻밤을 잤다. 이진사는 부유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육모정에는 언제나 빈객이 많았고, 손님들에게 조석을 대접할 때에는 이진사도 손님들과 함께 상을 받았다. 식사는 주인이나 손님이나 일체 평등이요 조금도 차별이 없었고, 하인들이 손님들에게 대하는 태도는 그 주인에게 대하는 것과 꼭같이 하였다. 이것은 주인 이진사의 인격의 표현이어서 참으로 놀라운 규모요 가풍이었다.〉15)
 
  육모정은 萬頃郡守를 지낸 李東範 진사의 정자였다. 주위로 원형의 못이 있는데, 그 못 안에 연꽃이 많아서 蓮亭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육모정에는 침실, 식당, 응접실, 독서실, 휴게실 등이 있었다고 한다.16)
 
  金昌洙는 이진사 집에서 하룻밤만 쉬고 떠나려고 했으나 더 묵어가라고 붙드는 이진사의 정성에 감동되어 보름이나 묵게된 것이었다. 이진사의 사랑에는 함께 지내던 과객이 대여섯 사람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이진사 집에서 손님 노릇을 한 지가 8, 9년이나 된 사람도 있었다. 손님이 일을 하면 주인이 가난해진다는 미신이 있어서 손님들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주인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평생 과객이었던 「홍초립」과 「박도포」
 
 
  이곳 풍습으로는 양반이 아니고는 아무리 큰 부자라도 사랑문이 밖으로 열리게 달지 못했다. 또한 과객이 주인을 찾아 숙박을 청하면 첫 대면에 묻는 말이 『간밤에는 어디서 유숙하였소?』라는 말이었다. 만일에 유숙한 집이 양반의 집이면 두말하지 않으나, 中人의 집에서 잔 것 같으면 그 과객의 부주의를 타일렀다. 또한 만일에 常人이 과객을 맞아 재워주게 되면 양반이 사사로이 잡아다가 형벌을 주는 등 괴악한 습속이 많았다.
 
  金昌洙는 이 지방에서 과객으로 유명한 洪草笠(홍초립)과 朴道袍(박도포)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홍초립은 초립동이 시절부터 과객으로 살다가 죽었고, 박도포는 늘 도포만 입고 과객행세를 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주인이 응대를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발악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진사의 육모정에서 보름을 묵은 金昌洙는 다시 길을 떠나려고 했다. 이때에 金昌洙를 자기 집으로 청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金昌洙보다 나이가 많은 장년의 선비로서, 육모정에 놀러 와서 날마다 金昌洙와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었다.
 
  金昌洙는 그 선비의 뜻을 물리칠 수 없어서 저녁밥을 먹으러 그의 집으로 갔다. 그런데 그 선비의 집은 초라한 단칸방이었다. 부인이 개다리 소반에 주인과 겸상으로 저녁상을 들여왔다. 주발 뚜껑을 열고 보니까 밥 같지는 않은 무엇인가가 담겨 있었다.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자 맛이 쓰기가 곰의 쓸개와 같았다. 그것은 쌀겨와 팥으로 만든 겨범벅이었다. 그 가난한 선비는 金昌洙가 이진사 집에서 날마다 흰 밥에 좋은 반찬을 먹는 것을 보았는데도 안되었다는 말도 없고 미안하다는 빛도 없이 흔연히 먹으면서 金昌洙에게도 권했다. 그 선비의 높은 뜻과 깊은 정에 감격한 金昌洙는 겨범벅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17)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金九의 겸허한 심성을 느낄 수 있다.
 
  金昌洙가 목포를 찾아간 것은 같이 탈옥한 梁鳳求(양봉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목포는 개항한 지 얼마되지 않아서 그때까지 官舍건물도 완성되지 않았을 정도로 모든 것이 엉성해 보였다. 金昌洙는 지게를 지고 노동자로 변장하고 양봉구를 만났다. 양봉구에게 인천소식을 물었다. 曺德根은 다시 잡혔는데, 눈 한 개가 빠졌고 다리가 부러졌다고 했다. 탈옥할 때에 당직이었던 간수는 아편중독으로 감옥 안에서 죽었고, 金昌洙 자신에 대한 소문은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양봉구는 인천과 목포 사이에는 순검들이 내왕하기 때문에 오래 머무를 곳이 못 된다고 말하고, 金昌洙에게 약간의 노자를 건네주면서 목포를 떠나라고 했다.18)
 
  목포를 방문할 때까지만 해도 金昌洙는 감옥에서 생활을 같이한 사람들과 그들이 소개해 주는 사람들을 찾아서 이동했다. 그러나 목포를 떠나면서부터는 감옥 동료들을 찾아다니는 일이 없어졌다. 그리하여 이때부터는 낯설고 물선 고장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兩班의 낙원은 三南, 상놈의 낙원은 西北』
 
 
  木浦를 떠나서 海南으로 간 金昌洙는 尹씨 집안 사랑에 유숙했다. 해남에서 가장 세력이 큰 양반은 尹씨와 李씨 두 성씨였다. 尹씨는 유명한 「五友歌」의 詩人 尹善道와 선비 화가 尹斗緖의 후손이 되는 사람들이다.
 
  밤이 저물었는데, 사랑문 앞 말뚝에 어떤 사람을 묶어 놓고 심한 매질을 하고 있었다. 주인이 추상 같은 호령을 했다.
 
  『네 이놈, 죽일 놈, 양반이 작정하여 준 품삯대로 받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대로 올려받다니!』
 
  벌을 받는 사람은 극구 사죄를 했다. 金昌洙는 주인에게 물었다.
 
  『양반이 작정한 품삯은 얼마이고 상놈이 제 마음대로 올려받으려 한 것은 얼마나 되오?』
 
  『내가 금년에는 동네 품삯을 계집년은 두 푼, 사내놈은 서 푼씩 정했는데, 저놈이 어느 댁 일을 하고 한 푼 더 받았기 때문에 징계하여 다스리는 것이오』
 
  金昌洙는 다시 주인에게 물었다.
 
  『길가는 행인들이 주막에서 먹는 음식값도 한 끼에 최하가 대여섯 푼이오. 하루 품삯이 밥 한 상 값의 반도 못 되면 혼자 살림도 유지해 나가기 어려운데 식구들을 데리고 어찌 살 수 있겠소?』
 
  주인은 주저없이 말했다.
 
  『가령 한 집에 장정이 년놈 합하여 두 명이라 하면 매일 한 사람씩이라도 양반집 일을 안할 때가 없고, 일을 하는 날은 그놈의 집 식구가 다 같이 와서 밥을 먹소. 품삯을 많이 지불하여 상놈 집에 의식주가 풍족하게 되면 자연히 양반에게 공손하지 못하게 될 것 아니오? 그래서 그같이 품삯을 작정해 주는 것이오』
 
  金昌洙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자신이 해주에서 겪은 상놈천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때의 소감을 金九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상놈으로 해주 西村에 태어난 것을 늘 한탄했으나, 이곳에 와서 보니 양반의 낙원은 三南이요, 상놈의 낙원은 西北이로다. 내가 海西 상놈이 된 것이 큰 행복이다. 만일에 三南 상놈이 되었다면 얼마나 불행하였을까?〉19)
 
  三南에서는 특히 백정에 대한 차별이 심했다. 金九는 〈경상도 지방의 班常간에는 다른 지방에 없는 특수한 풍습이 있다〉면서 그곳의 백정에 대한 차별을 소개하고 있다. 그곳에서는 屠牛漢(도우한:소 잡는 백정)은 망건을 쓰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들은 맨머리에 패랭이를 쓰고 다녀야 했다. 백정은 패랭이 밑에 대나무 테를 둘러 대고 거기에 끈을 매어 썼다. 그러한 행색으로 길을 가다가 길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길 아래로 내려서서 『소인 문안드리오』하고 인사해야 했고, 행인이 지나가고 나서야 제 갈 길을 갔다는 것이다.
 
  반상의 구별이 그처럼 엄했으나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다. 정월 초승과 팔월 중추절에는 마을과 마을 중간에 나무기둥이나 돌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에 동아줄을 매고 각기 자기 마을로 기둥 끝이 향하여 눕도록 경쟁하는 놀이를 했다. 이때에는 남녀노소와 반상의 구별 없이 흥겹게 서로 어울려 논다는 것이었다.
 
 
  애독하던 「東國史略」을 정표로 주어
 
 
  海南을 떠난 金昌洙는 康津의 古今島(현재는 완주군 고금면)로 갔다. 고금도는 古今鎭이 있던 곳으로서, 옛것을 숭상하는 도덕군자가 많은 곳이라고 해서 그런 지명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에서 金昌洙는 李舜臣 장군의 戰蹟을 둘러보고, 특별한 감회에 젖기도 했다. 金九가 三南地方을 방랑하면서 李舜臣의 연고지나 義兵들의 유적지를 특별히 찾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는 莞島를 돌아보고 長興을 거쳐 寶城으로 갔다. 보성의 松谷(현재는 得粮面 三亭里 深谷부락)을 방문했을 때에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5월 하순이었다. 안동 金씨의 집성촌인 이 마을은 큰길에서 보면 산으로 둘러싸여 밖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마을에 들어서면 넓고 따뜻하여 옛부터 좋은 은둔지나 피난지로 전해진다. 金昌洙는 훈장인 金廣彦을 찾아가서 松都에 사는 종친 金斗昊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정처없는 사람이니 아무일이나 하며 머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광언은 양반 차림의 金昌洙가 이야기를 잘하고 글도 잘해서 깍듯하게 대접했다고 한다.20)
 
  金昌洙는 金廣彦의 집에서 40여 일 동안이나 머물렀다. 삼남지방을 방랑하는 동안에 한 곳에서 가장 오래 머문 것이다. 아마도 마을 사람들이 그를 종친으로 친절하게 대접해 주었기 때문에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편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특히 자신과 동갑인 宣桂根(선계근) 내외와는 격의없이 지냈다.21) 金昌洙가 떠나려 하자 이별을 아쉬워한 선씨는 부인 安씨가 손수 만든 붓주머니를 정표로 선물했고, 金昌洙는 답례로 평소에 애독하던 「東國史略」을 선물했다.22)
 
  이 책은 지금도 宣桂根 후손들이 보존하고 있다. 그런데 탈옥하여 정처없이 방랑하는 金昌洙가 「東國史略」을 가지고 다니며 애독했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東國史略」이란 한국의 고대사를 春秋大義論에 입각하여 준엄한 역사비평을 한 책으로서 1403년에 王命으로 편찬된 이래로 여러 종류가 간행되었다. 金昌洙는 이 책 속표지에 이별을 아쉬워하는 漢詩 한 수를 남겼다.
 
 
  離別難 離別難
 
  離別莊處花樹開
 
  花樹一枝分絶半
 
  半留宗家半行帶
 
  生今天地逢何時
 
  捨此江山去亦難
 
  四員同遊至餘月
 
  齟齬惜別而去也
 
  日後見此或可思
 
  餘否耶遺此表情
 
  悠悠而去也
 
  宗人 金斗昊23)
 
  이별이란 이별이란 참으로 어렵구나
 
  이별하는 곳에 꽃이 핀다.
 
  꽃나무 한 가지 꺾어 절반씩 나누어
 
  한 가지는 종가댁에 남겨두고 한 가지는 가지고 간다.
 
  넓은 천지에 살아서 언제나 만날지
 
  이 강산을 버리고 떠나기도 또한 어렵구나.
 
  달포가 넘게 한가히 놀고 지내다가
 
  석별을 아쉬워하며 덧없이 떠난다.
 
  먼 훗날 이것을 보면 혹 생각날까 하여
 
  이 글을 정표로 남겨두고
 
  멀리 멀리 떠난다.
 
  종문 사람 김두호
 
 
  金九는 이때의 정을 못내 잊지 못하여 귀국한 뒤에 지방순회를 할 때에 송곡리를 찾는다. 마을 사람들도 이때의 金九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여 마을 입구에 「金九先生隱居碑」를 세워서 오늘날까지 기념하고 있다.24)
 
  보성을 출발한 金昌洙는 和順, 同福, 淳昌, 潭陽25)을 지나서 河東의 雙溪寺에 이르렀다. 장흥과 보성 등지를 여행하면서는 콩잎을 따서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콩잎은 여름철에는 따서 바로 국도 끓여 먹고, 또 뜯어 말려서 三冬에 먹기도 하며, 소나 말에 실어서 장에 내다 팔기도 한다고 했다. 또한 화순, 순창, 담양 일대를 지날 때에는 난생처음으로 무성한 대밭을 보았다. 金昌洙는 열 살 남짓 될 때까지만 해도 대나무가 1년에 한 마디씩 자라는 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쌍계사에서는 유명한 七佛亞字房을 구경했다. 쌍계사 칠불암(현재는 칠불사)은 金首露王의 아들 일곱 형제가 成佛한 곳이라고 전해지는데, 여기에는 「亞」자 모양의 특이한 온돌방이 있다.
 
 
  (2) 麻谷寺에서 중이 되어 靈泉菴으로
 
 
  金昌洙가 삼남지방을 돌아서 鷄龍山의 甲寺에 도착한 것은 가을이 깊어가는 8, 9월 무렵이었다. 절 근방에는 감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고, 탐스럽게 익은 붉은 감이 저절로 땅에 떨어지곤 했다.
 
  갑사에서 점심을 먹던 金昌洙는 東鶴寺(동학사)로부터 와서 점심을 먹는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한 사람을 만났다. 金昌洙가 인사를 건네자 그는 공주에 사는 이서방이라고 했다. 그는 金昌洙에게 遊山詩(유산시)를 들려 주기도 했는데, 읊는 詩나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 무척 비관적인 사람인 듯했다. 초면에도 말이 잘 통했다. 金昌洙는 자기는 개성에서 성장하여 장사에 실패하고 홧김에 강산 구경이나 하자고 떠나서 근 1년을 南道를 돌아다니다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얼버무렸다. 그러자 이서방은 다정하게 麻谷寺가 40리밖에 안 되니 구경이나 하고 가자고 말했다.
 
 
  冬至賀禮 때에 혼자 웃은 徐花潭
 
 
  金昌洙의 귀에는 마곡사라는 말이 매우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어릴 때에 그의 집에 「東國明賢錄」이라는 책이 있었던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 그 책에 있는 내용이라면서 순영이 소설처럼 들려 주던 이야기 가운데에서 花潭(화담) 徐敬德(서경덕)에 관한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대궐의 冬至賀禮(동지하례)에 참례한 서경덕이 혼자서 크게 웃었다. 이를 본 임금이 서경덕에게 물었다.
 
  『경은 무슨 일로 무리 가운데에서 혼자 웃는고?』
 
  서경덕이 대답했다.
 
  『오늘 밤 마곡사 상좌승이 밤중에 죽을 끓이려고 불을 때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해 죽솥에 빠져 죽었사온데, 다른 중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죽을 퍼먹으며 희희낙락하는 것을 생각하니 우습사옵니다』
 
  이 말을 듣고 임금은 곧 撥馬(발마)를 놓아 하루 밤낮 쉬지 않고 300여 리를 달려 마곡사로 가서 사실여부를 조사하게 했는데, 과연 그것이 사실이더라는 것이었다.26) 그런데 현존하는 「동국명현록」에는 위와 같은 서화담의 일화는 없다. 「동국명현록」은 死六臣, 生六臣, 三學士, 5賢 등 우리나라 역대 현인들의 인명과 종묘배향 인물, 조선 역대공신, 8도 서원, 8도 산성의 명칭을 간단히 기록하고, 끝에 宋時烈과 관련된 축문을 적은 작자 미상의 인명록으로서, 출간연대는 英祖 이후로 추정되는 책이다. 또한 서화담 문집에도 그러한 일화는 없다. 서화담은 벼슬을 단념하고 오랫동안 수도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특이한 일화를 많이 남긴 것은 두루 알려진 일이다. 위의 일화는 아마도 金九가 어릴 때에 다른 책에서 읽었거나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일 것이다.
 
  金昌洙는 이서방과 같이 마곡사를 향했다. 이서방은 홀아비로 몇 년 동안 私塾(사숙)의 훈장을 지냈고, 지금은 마곡사로 가서 중이나 되어 일생을 편안하게 지내려 한다면서 金昌洙에게도 함께 중이 되기를 권했다. 金昌洙도 얼마쯤 그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이야기만 하며 걸었다.
 
  층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泰華山(태화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마곡사는 643년에 慈藏律師(자장율사)가 창건한 절이다. 지금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로서 인근 지역의 여러 寺庵을 관장하는 충청남도 일대에서 가장 큰 절로 이름이 높다. 태화산의 支脈에 둘러싸인 마곡사의 산수 형세는 태극형이라고 하여 「擇理志」나 「鄭鑑錄」 등의 秘記에는 전란을 피할 수 있는 十勝之地의 하나로 꼽힌다. 1902년에는 宮內府 소속으로 寺社管理署(사사관리서)가 설치되고, 大韓寺刹令을 반포할 때에 충청남도에서는 유일하게 전국 16개 中法山 사찰의 하나로 지정되었다.27)
 
 
  저녁 안개가 절을 자물쇠로 채운 듯 둘러싸
 
 
  하루 종일 걸어서 마곡사 앞 고개에 올라서자 때는 황혼이었다. 온 산 가득히 단풍으로 붉은빛이 도는 늦가을의 정취는 갈 곳 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더욱 스산하게 했다. 멀리서 저녁 예불을 알리는 인경소리가 마치 일체 번뇌를 버리라는 소리 같이 들렸다. 이때의 처연했던 심정을 「백범일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저녁 안개가 산 밑에 있는 마곡사를 마치 자물쇠로 채운 듯이 둘러싸고 있는 풍경을 보니, 나같이 온갖 풍진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자의 더러운 발은 싫다고 거절하는 듯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저녁 종소리가 안개를 헤치고 나와 내 귀에 와서 모든 번뇌를 해탈하고 입문하라는 권고를 들려주는 듯했다.〉28)
 
  머뭇거리는 金昌洙에게 이서방이 다시 한번 다그쳐 물었다.
 
  『노형, 어찌 하시려오? 세상사를 다 잊고 나와 중이 됩시다』
 
  『이 자리에서 노형과 결정하면 무엇하겠소. 일단 절에 들어가 봐서 중이 되려는 사람과 중을 만들려는 사람 사이에 의견이 맞아야 할 것 아니오』
 
  『그건 그렇겠소』
 
  이윽고 두 사람은 몸을 일으켜 마곡사를 향해 걸어갔다. 계곡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金九는 이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더러운 세계에서 깨끗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世間(속세)에서 出世間(속세를 벗어남)으로 걸어간다.〉29)
 
  두 사람이 처음 도착한 곳은 解脫門(해탈문)을 들어서서 왼쪽에 위치한 梅花堂(매화당)이었다. 매화당을 지나서 두 사람은 다시 조그마한 다리 하나를 건넜다. 金九는 이때에 <크게 소리쳐 흐르는 내 위에 걸린 긴 다리를 건넜다>고 했는데, 그 다리는 國師峰으로부터 남쪽으로 흘러 내려온 麻谷川이 절 옆을 돌아 흘러가는 지점에 놓인 極樂橋(극락교)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두 사람이 극락교를 건너서 들어간 곳은 절의 종무소로 사용되는 尋劒堂(심검당)이었다. 대머리 노승 하나가 그림폭을 펼쳐 놓고 보고 있다가 두 사람을 보자 인사를 했다. 이서방은 노승과 구면이었다. 그 승려는 抱鳳堂(포봉당)이라고 했다. 이서방은 金昌洙를 심검당에 두고 다른 방으로 갔다.
 
 
  자기의 상좌되기를 권하는 老僧
 
 
  얼마 있다가 金昌洙에게도 밥상이 나왔다. 저녁밥을 다 먹고 앉아 있으려니까 머리가 하얗게 센 노승이 들어와서 金昌洙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金昌洙는 자기는 개성에서 출생했는데,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도와줄 만한 가까운 친척 하나 없는 혈혈단신으로서 강산 구경이나 하려고 집을 나와서 떠돌아다닌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노승은 자신의 속세의 성씨는 蘇씨요, 익산 사람으로서 머리를 깎은 지 사오십 년 되었다면서, 金昌洙에게 은근히 자기의 상좌가 되기를 권했다. 그러나 金昌洙는 겸손한 태도로 사양했다.
 
  『나는 본래 학식이 모자라고 재질이 둔한 자입니다. 노대사께 누가 될 것 같아 망설여집니다』
 
  그러자 노승은 더 간곡하게 권했다.
 
  『당신이 내 상좌만 되면 고명한 대사에게서 佛學을 배우고 익힐 수 있을 거요. 장래 큰 講師가 될지도 모르니 부디 결심하고 삭발하시오』
 
  金昌洙는 그날 밤을 마곡사에서 묵었다. 이튿날 보니까 이서방은 이미 삭발을 했다. 그는 달걀처럼 반질반질한 머리를 하고 金昌洙를 찾아와서 말했다.
 
  『노형도 주저마시고 삭발을 하시오. 어제 찾아왔던 荷隱堂(하은당)은 이 절에서 재산이 갑부인 寶鏡大師(보경대사)의 상좌요. 그러니 후일 노형이 공부를 하려 하더라도 학자금 염려는 없을 것이오. 내 노형의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가 나와 보고서 매우 마음에 든다고 나더러 속히 결정하라고 권하라고 합디다』
 
  金昌洙는 하룻밤 사이에 淸淨法界로 들어서서 만 가지 생각이 다 재로 돌아가버린 기분이었다. 그는 중이 되기로 결심했다. 얼마 뒤에 師弟 扈德三(호덕삼)이 면도칼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호덕삼이 削髮嗔言(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金昌洙의 상투가 모래 위에 툭 떨어졌다. 그러나, 〈이미 결심은 했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30)고 술회하고 있는 데서 보듯이, 金九의 심정은 착잡했다. 이처럼 이때의 金九의 삭발은 절망을 잊기 위한 일종의 충동에서 나온 것이었다.
 
  법당에서 종이 울리고, 香積室(향적실)에서는 供養主가 불공밥을 짓고, 각 암자로부터 가사를 입은 승려들이 모여들었다. 金昌洙 등 입문자를 위한 법례가 열린 것이었다. 金昌洙는 검은 장삼에 붉은 가사 차림으로 대웅보전으로 인도되었다. 곁에서 덕삼이가 부처님에게 절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은사 하은당은 金昌洙의 법명을 圓宗(원종)이라고 명명하고 불전에 고했다. 受戒師(수계사)는 龍潭(용담)이라는 점잖은 승려였는데, 그는 경문을 낭독하고 五戒(오계)31)를 일러주었다. 예불 절차가 끝난 뒤에 원종은 보경 대사를 비롯하여 절 안에 있는 나이 많은 대사들에게 차례로 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僧拜(승배)를 연습하고 「眞言集」과 「初發心自警文(초발심자경문)」 등 불가의 간단한 규칙을 배웠다.
 
 
  짐승이나 벌레에까지 마음을 낮춰야
 
 
  중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기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고 했다. 사람에게는 말할 나위도 없고, 심지어는 짐승이나 벌레에까지 자기 마음을 낮추지 않으면 지옥의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전날 밤에 金昌洙를 찾아와서 자기 상좌가 되어 주기를 청할 때에는 그렇게도 공손하던 하은당의 태도부터 완전히 바뀌었다. 『얘, 원종아』라고 스스럼없이 부르고, 『생긴 것이 미련스러워서 고명한 중은 될성싶지 않다. 얼굴이 어쩌면 저다지도 밉게 생겼을꼬! 어서 나가서 물도 긷고 장작도 패거라!』 하고 명령하는 것이었다.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서 받아보지 못했던 충격적인 수모였다. 이때의 심정을 「백범일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망명객이 되어 사방을 떠돌아다니던 때에도 내게는 영웅심과 공명심이 있었다. 평생의 한이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평범한 양반에게 당해 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하는 생각도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그러나 중놈이 되고 보니, 이상과 같은 생각은 허영과 야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佛씨 문중에서는 추호도 용납할 수 없는 악마와 같은 생각이었다. 만일 이런 따위의 악한 생각이 계속해서 마음속에 싹트고 자랄 때에는 곧 護法善神께 의뢰하여 물리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32)
 
  원종은 이때에 자신의 신분상승의 욕망이 얼마나 부질없고 허영에 찬 것이었는지를 깨달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깊은 解脫을 통하여 佛家에 귀의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피생활 끝에 느낀 일종의 허무주의적인 심리상태의 발로였다. 그러한 자신을 돌아보며 원종은 〈하도 많이 돌아다녔더니 나중에는 별세계 생활을 다 하겠다〉33)는 생각이 들어 혼자서 웃다가 탄식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장은 순종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장작도 패고 물도 긷고
 
 
  그날로 불가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원종은 장작도 패고 물도 길었다. 하루는 앞내에 가서 물을 길어 오다가 물통 한 개를 깨뜨렸다. 하은당이 어찌나 야단을 쳤던지 보다 못한 보경당이 탄식을 했다.
 
  『전에도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다 하여 상좌로 데려다 주면 못 견디게 굴어서 다 내쫓았는데, 금번 원종이도 잘 가르치고 바로 이끌어만 주면 장래에 제 앞가림은 하겠는 걸, 또 저 모양으로 하니 며칠이나 붙어 있을꼬!』
 
  이 말을 듣자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원종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승려들의 평소생활대로 예불을 올리고 「千手經」 등을 외웠다. 龍潭스님은 원종에게 「普覺書狀(보각서장)」을 가르쳐 주었다. 용담스님은 佛家의 학식뿐만 아니라 儒家의 학문에까지 두루 통달해 있었다. 그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밝아서 여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덕망 있는 스님이었다. 「보각서장」은 看話禪(간화선: 公案禪)의 독창적인 전개로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친 중국 宋나라 때의 유명한 승려 普覺禪師(호는 大惠禪師)가 사람들에게 써보낸 글을 모아서 그의 제자인 慧然과 淨智가 공동으로 편집한 책인데, 불교의 진수가 담겨 있어서 불교학습의 寶典이 되고 있다.
 
  용담의 상좌로 慧明(혜명)이라는 청년 불자가 있었다. 그는 원종에게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다. 용담도 하은당의 성품이 괴팍스러운 것을 알고서 글을 가르치다가 이따금 원종에게 위로하는 말을 해주었다. 용담은 「見月忘指」의 오묘한 이치와 「忍(참을 인)」 자의 뜻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견월망지」란 달을 보되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잊으라는 뜻이며, 「忍」은 칼날 같은 마음으로 성나는 마음을 끊으라는 뜻이라고 했다.
 
 
  遺産이 많을 것이라고 부러움 사
 
 
  정신없이 지내는 동안에 어느덧 승려생활도 반 년 가까이 지나고 己亥年(1899년)의 새해가 되었다. 스물네 살이 되는 새해를 金九는 이처럼 山寺의 중으로서 맞았다. 절에 있는 100여 명 승려들 가운데에는 원종을 매우 행복한 사람으로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원종대사가 지금은 고생을 하지만, 老師와 恩師가 다 칠팔십 세 노인들이니까 그분들만 작고하시고 나면 엄청난 재산이 다 원종대사의 차지가 될 거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원종이 그해 추수상황을 정리한 秋收冊을 들여다보니까, 전답을 부치는 소작인들이 해마다 갖다 바치는 백미만 200여 석이었고, 돈이나 다른 물품만도 수십만 냥의 재산이었다.34)
 
  원래 승려들이 사사로이 전답을 소유하는 일은 佛典에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부터는 그 금지규정을 무시하고 승려들의 사유전답이 합법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승려들은 閑曠地(한광지)를 개간하고 상업활동으로 얻은 자본으로 전답을 사들이고, 부모 또는 法師로부터 전답을 상속받기도 하고, 出家 전에 가지고 있던 전답 등을 통하여 사유재산을 늘려갔다. 이처럼 승려들의 사유재산이 크게 확대되자 조정에서는 불교세력의 성장을 억압하기 위해 승려들의 사유전답이 사찰로 귀속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이 규정에 따라 승려들의 재산은 1657년(孝宗 8년)부터 상좌나 寺刹에 상속되는 것이 금지되고 친족에게만 상속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불교교단이 더욱 번창하고 승려들의 사유재산이 확대되자 조정에서는 1674년(顯宗 15년)에 새로운 分財기준을 마련했다. 이에 따르면 승려친족들의 사유전답은 사촌 이내의 친족이 있을 때에는 상좌와 친족에게 절반씩 나누어 주고, 상좌도 없고 사촌 이내의 친족도 없을 때에는 屬公(속공)하도록 했다.35) 따라서 보경스님과 하은당이 사망하면 그 상좌인 원종이 그들의 재산을 대부분 상속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원종은 그러한 재산을 염두에 두고 승려 생활을 계속할 생각은 없었다. 金九는 이때의 심정을 〈망명객의 임시 은신책으로서든 어떻든 간에 淸淨寂滅(청정적멸)의 道法에만 일생을 희생할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36)고 술회했다. 그만큼 金九는 비록 이름은 圓宗으로 바꾸었으나 世俗의 욕망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世俗의 욕망 못 버린 圓宗
 
 
  圓宗은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렸다. 작년에 인천감옥을 탈출하면서 작별한 뒤로 생사마저 알 수 없는 부모님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기를 구출하기 위해 가산을 다 기울이고 끝내는 몸까지 망치고 만 金周卿의 소식도 궁금했다. 해주 비동의 高能善도 보고 싶고, 청계동의 安泰勳도 다시 만나고 싶었다. 특히 안태훈이 천주교를 믿으려는 것을 대의에 반역하는 행동으로 생각하고 불평을 품은 채 청계동을 떠났었는데, 安泰勳을 다시 만나면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이 수시로 가슴속을 채웠다.
 
  마침내 원종은 어느 날 보경당에게 말했다.
 
  『소승이 이왕 중이 된 이상 중이 응당 해야 할 공부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금강산으로 가서 경전의 뜻을 연구하고, 일생 충실한 불자가 되겠습니다』
 
  보경당은 이미 원종의 속마음을 헤아리고 있었다.
 
  『내가 벌써 추측은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있느냐, 네 원이 그런데야』
 
  보경당은 원종을 붙잡는다는 것이 부질없는 일임을 알고 있었다. 곧바로 하은당을 불러들였다. 두 사람이 한참을 다투다가 마침내 세간을 내어 주었다. 백미 열 말과 함께 가사와 바리때를 챙겨 주었다. 그날로 원종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37)
 
  이때에 떠난 마곡사의 뒷소식을 金九는 뒷날 安岳에서 新敎育運動에 종사할 때에 하기 사범강습회에서 우연히 마곡사에서 같이 있던 慧明을 만나 듣게 된다. 金九가 마곡사를 떠난 뒤에 보경당과 하은당은 석유 한 통을 사서 질이 어떤지를 실험하기 위해서 불이 붙은 막대기 끝을 석유통에 넣었다가 그만 석유통이 폭발하는 바람에 집안에 있던 抱鳳(포봉) 스님까지 세 사람이 한꺼번에 사망했다.
 
  1884년 하반기부터 일본 상인들에 의해 수입되기 시작한 석유는 재래식 植物油를 몰아내면서 조명용으로 크게 각광을 받았다. 특히 미국 스탠다드 석유회사 제품인 「松印」 석유는 품질이 뛰어나서 매연이 없고, 견고하고 운반이 편리한 양철제 석유용기로 만들어져 있어서 다른 제품이 추종할 수 없을 만큼 인기가 높아 압도적인 시장점유율을 차지했다. 이처럼 미국산 석유가 인기가 높자 일본상인들은 그보다 품질이 떨어진 일본산과 러시아산에 미국상표를 도용하여 판매하기도 했다.38) 이 때문에 석유의 품질을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웠다. 아마 마곡사의 승려들도 석유의 품질을 실험하려다가 끔찍한 참사를 당했던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절에서는 총회를 열어 재산을 관리하고 마곡사의 명성을 이어받을 사람은 오직 圓宗뿐이라고 결정하고, 德三을 금강산까지 보내어 圓宗의 행적을 탐문했다. 그러나 끝내 원종을 찾지 못하자 재산은 모두 절의 공유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39) 이는 金九가 마곡사에 머문 것이 반 년도 채 못 되는 기간이었으나, 그의 성실성이 마곡사의 승려들에게 높이 평가되었음을 말해 준다.
 
 
  淳永 내외는 중이 된 아들 보고 눈물 흘려
 
 
  원종은 백미 열 말을 팔아서 노자를 만들어 가지고 서울로 향했다. 며칠을 걸어서 서울에 도착했다. 승려들의 성 안 출입이 금지되어 있던 때였으므로 원종은 성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4대문 밖으로 이 절 저 절 돌아다녔다. 서대문 밖의 새절(지금의 西大門區 奉元寺)에 가서 하루 묵다가 長湍(장단) 華藏寺(화장사)로 은사를 찾아가는 慧明을 만났다. 원종은 자기는 금강산에 공부하러 가는 길이라고 말하고 헤어졌다.
 
  혜명과 작별한 뒤에 경상도 豊基에서 온 慧定(혜정)이라는 중을 만났다. 그는 평양의 강산이 좋다기에 구경가는 길이라고 했다. 원종은 그와 동행하기로 약속하고 송도와 해주 감영부터 구경하고 평양으로 가자고 했다. 부모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해주 首陽山 神光寺 부근의 北菴에 이르러서야 원종은 혜정에게 자신의 사정을 대강 말하고 도움을 청했다.
 
  『텃골 본가에 가서 내 부모님을 비밀리에 방문하여 주오. 안부만 물어보고 내 몸이 건재함을 말씀드리되 내가 지금 어느 곳에 있는 것까지는 말하지 말아 주시오』
 
  혜정을 고향집으로 떠나보내고 나서 궁금하게 소식만 기다리고 있는데, 4월29일 저녁 무렵에 혜정의 뒤를 따라서 淳永 내외가 북암으로 찾아왔다. 혜정으로부터 아들 소식을 들은 순영 내외는 『네가 내 아들이 있는 곳을 알 터이니 너만 따라가면 내 아들을 볼 것이다』 하고 그 자리에서 혜정의 뒤를 따라 나선 것이었다. 그런데 와서 보니 뜻밖에도 아들은 돌중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 식구는 서로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북암에서 닷새 동안 쉬었다가 원종은 다시 중의 행색을 하고 순영 내외와 혜정과 함께 평양으로 떠났다. 가는 길에 순영 내외는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아들에게 들려 주었다. 金昌洙가 탈옥한 뒤에 순영 내외가 구속되었다가 석방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앞에서 본 바와 같다.
 
 
  金剛山 가는 길에 平壤 구경
 
 
  일행이 평양에 도착한 것은 단오 하루 전인 5월4일이었다. 그날은 여관에서 지내고 단오날에는 모란봉에 가서 그네뛰는 광경을 구경했다. 돌아오는 길에 貫洞 골목을 지날 때였다. 원종이 우연히 어떤 집을 들여다보니까 緇布冠(치포관: 유생들이 평소에 쓰는 검은 베로 만든 관)을 쓰고 深袖衣(심수의: 소매가 넓은 옷)를 입은 선비 한 사람이 두 무릎을 개고 꼿꼿이 앉아 있었다. 원종은 말이나 한번 붙여 보리라 하고 『소승 문안드리오』 하고 인사했다. 그 학자는 원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그는 艮齋(간재) 田愚(전우)의 제자인 克菴(극암) 崔在學이었다.
 
  鼓山(고산) 任憲晦(임헌회)의 제자인 田愚는 畿湖學派의 정통을 이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의 한 사람이다. 그는 省齋 柳重敎를 비롯한 華西學派와 자주 교유하며 철저하게 수구적인 자세를 견지했으나 처신의 방법에서는 화서학파와 현격한 대조를 보였다. 그는 화서학파와 같이 의병활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이런 그를 두고 화서학파에서는 『죽음이 두려워 擧義하지 못했고, 禍가 무서워 斥和하지 못했다』40)고 맹렬히 비난했다. 그러나 전우는 이에 개의하지 않고 도학의 중흥을 최대의 과제로 삼아 현실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41)
 
  화서학파인 고능선에게서 배운 金九는 전우의 명성을 알고 있었던 것같다. 그리하여 원종은 마곡사에서 하산하여 상경하던 길에 天安 金谷에 기거하고 있던 간재 전우를 찾아가기까지 했으나, 마침 부재중이어서 만나지는 못했었다. 원종은 그때의 일을 언급하고 극암 선생을 대신 만나게 되어 매우 반갑다고 말했다. 이때에 두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道理 연구에 대한 문답을 몇 마디 나누었다〉42)는 것으로 보아서 학문에 관한 토론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乙巳勒約반대상소투쟁에 두 사람이 함께 참여하게 되므로 이때의 만남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田愚의 제자인 최재학은 스승의 현실불참론과 달리 대표적인 계몽운동 단체인 西北學會에도 참여하는 등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서북 출신인 최재학이 어떤 경위로 기호학파의 정통을 이은 전우의 제자가 되었고, 그랬다가 어떻게 뒷날 다시 개화론자로 전환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성리학적 전통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서북지방 출신의 유학자들이 위정척사론의 문제점을 반성하고 개화론자로 전환하는 경우가 많았던 점43)을 감안하면 그의 사상적 轉回를 이해할 수 있다.
 
 
  崔在學의 주선으로 靈泉菴의 房主가 되어
 
 
  崔在學 옆에 길고 아름다운 수염에 위풍이 당당해 보이는 노인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최재학은 그 노인에게 원종을 소개하면서 원종더러도 그 노인을 뵈라고 했다. 원종은 그 노인에게 합장배례를 했다. 그 노인은 평양 進衛隊 領官 全孝淳이었다고 「백범일지」는 적고 있다. 「백범일지」는 전효순이 뒷날 价川(개천)군수를 지냈다고 했는데,44) 全孝淳은 全孝舜의 오기일 것이다. 全孝舜은 1902년 5월22일에 개천군수에 임명되었다가 1904년 4월13일에 면직되었으나, 이듬해 2월3일에 징계가 풀린다.45)
 
  崔在學이 全孝舜에게 말했다.
 
  『이 대사는 도리가 고상한 중이오니 靈泉菴(영천암) 房主(방주)를 내어주시면 자제들과 외손자들의 공부에 매우 유익하겠습니다. 의향이 어떠십니까?』
 
  이처럼 최재학이 초면인 원종에게 영천암 방주의 자리를 추천했다는 것은 그만큼 원종의 학문과 인품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全孝舜은 쾌락했다.
 
  『지금 옆에서 듣기에도 대사의 고명함은 흠모할 만하오. 대사, 어찌하려나? 내가 최선생님에게 내 자식들과 외손자놈들을 부탁하여 영천암이라는 절에서 공부를 시키고 있는데, 주지승의 성행이 불량하여 술만 먹고 돌아다녀서 飮食諸節(음식제절)에 곤란이 막심하니 대사가 최선생님을 보좌하여 내 자손들의 공부를 도와주면 그 은혜가 크겠소』
 
  그러나 원종은 겸손하게 사양했다.
 
  『소승의 방탕이 원래 중보다 심할지 어찌 아십니까?』
 
  이러한 사양도 아랑곳없이 최재학은 전효순에게 즉시 평양 庶尹(서윤) 洪淳旭(홍순욱)에게 교섭하여 영천암 방주의 差帖(차첩: 임명장)을 받아 달라고 부탁했다. 전효순은 그길로 홍순욱을 방문하여 『승 圓宗으로 영천암 방주를 差定한다』는 첩지를 가지고 와서 원종에게 바로 취임하라고 말했다. 영천암은 평양에서 서쪽으로 약 40리 떨어진 大寶山에 있는 조그마한 절인데, 大同江이 흐르는 넓은 들과 평양을 바라보는 경치 좋은 곳에 있었다.
 
  원종은 그만하면 만족스럽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구걸하기도 황송한 일이었고, 게다가 崔在學과 같은 학자와 같이 지내면 학문에 도움도 될 것 같았다. 당장 의식주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피신해 다니는 본뜻에도 맞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원종은 이를 승낙하고 먼저 혜정과 함께 최재학을 따라 영천암으로 갔다. 원종은 절의 업무를 대충 정돈하고 나서, 방 하나를 정하여 淳永 내외를 거처하게 했다.46)
 
  학생으로는 全孝舜의 아들 炳憲과 錫萬, 사위 金允文의 아들 형제와 장손과 중손 寬浩, 그리고 그밖에 몇 명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전병헌은 뒷날 을사늑약반대 상소투쟁을 할 때에 金九와 함께 참여하게 되는 인물이다. 또 그는 뒷날 王三德으로 이름을 바꾸어 임시정부의 改造派로서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했고, 상해파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다.
 
 
  僧服 입고 고기 먹는 乞詩僧
 
 
  뜻밖의 인연으로 영천암 방주가 된 원종은 곧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 이때의 정황을 「백범일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전효순은 하루 걸러 진수성찬을 절로 보냈다. 산 아래 新興洞에 있는 푸줏간을 영천암의 용달소로 하여, 나는 매일 푸줏간에 가서 고기를 한 짐씩 져다가 승복을 입은 채 드러내 놓고 고기를 먹었고, 염불하는 대신 詩를 외웠다. 종종 최재학과 함께 평양성에 나가서 四崇齋(사숭재) 黃景煥 등 시객들과 율을 짓고, 밤에는 대동문 쪽에 가서 국수를 먹었다. 처음에는 주인이 주는 대로 소면을 먹다가 나중에는 고기로 꾸미한 국수를 그대로 먹었다. 불가에서 소위 말하는 「手把猪頭 口誦聖經(손에 돼지머리를 들고, 입으로 경전을 외운다)」는 구절과 가깝게 되어 갔으니, 평양성에서는 시쳇말로 乞詩僧이라 했다.〉47)
 
  이러한 구절도 金九 특유의 처절한 자기고백의 한 보기라고 하겠다.
 
  원종의 방탕한 걸시승 생활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하루는 崔在學과 학생들이 평양에 나가고 원종 혼자 절을 지키고 있었다. 이때에 대보산 앞 太平市內村에 있는 私塾 훈장이 시인 몇 명과 학동 수십 명을 데리고 靈寺詩會(영사시회: 절에서 시를 읊는 모임)를 연다면서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장만해 가지고 영천암으로 찾아왔다.
 
  시회가 시작되자 마자 房主僧(방주승)을 호출했다. 원종은 공손히 합장배례했다. 詩客 가운데 한 사람이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너 이 중놈, 선배님들이 오시는데 거행이 어찌 이처럼 태만하냐?』
 
  『예, 소승이 선배님들 오시는 줄을 알지 못하여 산 아래까지 내려가 영접을 못하여 매우 죄송하올시다』
 
  『이놈, 그뿐이냐! 네가 이 절의 방주가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예, 서너 달 전에 왔습니다』
 
  『그러면 그 사이에 근처 동네에 계신 양반들을 찾아뵙지 않은 것은 죄가 아니냐?』
 
  『소승이 임무를 맡은 초기라 절의 업무를 정리하느라 인근에 계신 양반들을 미처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그 죄가 막대하나 용서하심을 바라나이다』
 
  이들은 방주승을 혼낼 생각이었으나 원종의 태도가 너무 공손했으므로, 훈장이 한편으로는 원종을 나무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시객을 타일러 조용히 넘어갔다. 원종은 혹시 또 무슨 분란이 생길까 염려되어 마음을 졸였다. 그러나 시객들이 술이 반쯤 취하면서 기어이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술이 거나해지자 훈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시객들은 風軸(풍축: 무리지어 詩를 적는 두루마리)을 펼치고 詩를 짓고 쓰면서 큰 소리로 낭송했다. 원종은 술시중을 들면서 그들이 쓴 詩를 눈여겨 살펴보았다. 글씨부터 촌티가 나는 것을 絶唱이니 得意作이니 하고 떠드는 것이 가소로웠다. 원종은 평양에 와서 최재학을 만나 같이 다닌 뒤로 종종 평양의 일류 명사들과 사귀는 사이에 詩나 글씨에도 얼마쯤 조예를 터득하고 있었다. 원종은 훈장에게 청했다.
 
  『소승의 글도 더럽다 않으시고 시축의 끝자리에 끼워 주실 수 있겠습니까?』
 
  훈장은 특별히 허락했다.
 
  『네가 시를 지을 줄 아느냐?』
 
  『예, 소승이 오늘 여러 선배님들에게 불공한 죄를 많이 저질렀으니 겨우 韻字(운자)나 채워서 사죄코자 하나이다』
 
  이렇게 하여 원종은 훈장과 시객들이 쓴 풍축의 끝자락에 詩를 한 수 적어 넣었다. 聯句(연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儒傳千歲佛千歲
 
  我亦一般君一般
 
  유가 천년이면 불가도 천년이요
 
  내가 보통이면 그대들도 보통이다.
 
 
  圓宗의 짓궂은 심사가 그대로 드러나는 시구였다. 자신들을 조소하는 듯한 詩를 보고 훈장과 시객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중놈이 참으로 오만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저마다 못마땅해 하는 얼굴빛이 역력했다. 바로 이때에 최재학 일행의 몇몇 名流가 도착했다. 그들은 시골 시객들의 풍축을 구경하다가 제일 끝에 있는 「奉硯僧(봉연승: 벼루 심부름하는 중) 圓宗」이라고 적힌 詩에 이르러 「儒傳千歲…」의 구절을 보자 다같이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절간이 들썩거리도록 걸작이니 절창이니하고 야단들이었다. 그 바람에 당당하던 시골 시객들의 호기가 쑥 들어가 버렸다. 이 이야기가 평양 성내에까지 전해져서 그 詩는 기생들의 노래 곡조로 불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원종은 평양에서 「걸시승 원종」이라는 별명으로 통칭되었다는 것이다.48) 金九의 이러한 서술은 이무렵 그는 어쩌면 崔在學 등과 함께 평양의 妓房출입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하게 한다.
 
 
  『충청도 중놈의 버릇은 그러하냐?』
 
 
  원종은 걸시승 생활을 하다가 시골사람들에게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어느 날 원종은 전효순의 편지를 가지고 평양 西村에서 육칠십 리 거리에 있는 葛谷(갈골)을 찾아갔다. 갈골에는 당시 평안도에서 이름 높은 金强齋(김강재) 선생이 살고 있었다.
 
  갈골 못 미쳐 십여 리쯤 되는 곳에 있는 주점 앞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주점 안에서 『이놈, 중놈!』 하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쑥대머리를 한 시골사람 여나믄 명이 큰 술잔에 술을 마시며 한창 흥이 올라 있었다. 원종은 문 앞에 가서 합장배례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썩 나서더니 원종을 보고 물었다.
 
  『이 중놈, 너는 어디 사느냐?』
 
  『예, 소승은 충청도 마곡사에 있습니다』
 
  『이놈, 충청도 중놈의 버릇은 그러하냐? 양반님들 앉아 계신 데를 인사도 없이 그저 지나가고. 에이, 고얀 중놈이로군』
 
  『예, 소승이 크게 잘못했습니다. 소승이 갈 길이 바빠서 미처 생각을 못하고 그저 지나쳤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놈, 지금 어디를 가는 길이냐?』
 
  『예, 갈골을 찾아갑니다』
 
  『갈골 뉘 집에?』
 
  『김강재 선생 댁으로 갑니다』
 
  『네가 김선생을 알더냐?』
 
  『예, 아직 직접 뵙지는 못했고, 평양성내 전효순씨 편지를 가지고 갑니다』
 
  이말을 듣자 방금 말하던 사람이 갑자기 두리번거리기만 하고 말을 못했다. 방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한 사람이 나서서 원종에게 시비걸던 사람을 꾸짖었다.
 
  『이 사람, 내가 보기에는 저 대사가 잘못한 것이 없네. 길 가는 중이 가게마다 다 들러 인사하려면 길을 어찌 가겠나? 자네 취했네. 대사, 어서 가게』
 
  그들은 아마도 전효순이 진위대 영관임을 알고 겁이 난 모양이었다.
 
  원종이 물었다.
 
  『저 양반의 宅號(택호: 이름 대신 벼슬이름이나 고향 등으로 그 사람집을 부르는 것)가 어찌 되시는지요?』
 
  그 중재자가 말했다.
 
  『저 양반은 이 안마을 李軍奴댁 서방님이라네. 물을 것 없이 어서 가게』
 
  軍奴는 군아문에 소속된 종을 말한다. 그 취객은 종의 신분이면서 원종 앞에서 양반행세를 하고 거들먹거린 것이었다. 원종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 웃으면서 그 자리를 물러나왔다. 그리고는 몇 걸음 더 가다가 황혼녘에 농부들이 소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한 사람을 붙들고 이군노 댁이 어딘지 물어 보았다. 농부는 손을 들어 산기슭에 있는 집 한 채를 가리켰다. 원종은 또 물었다.
 
  『이군노 양반이 지금 계신가요?』
 
  『아니오. 이군노는 죽고 지금은 그 손자가 집을 맡아 있다네』
 
  원종은 대단히 우습기도 하고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長髮僧 되었다가 1년 만에 還俗
 
 
  원종은 김강재를 찾아가서 하룻밤을 같이 지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뒷날 원종은 김강재가 江東郡守로 부임했다는 官報를 보았으나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영천암까지 같이 와서 지내던 慧定은 원종의 불심이 갈수록 약해지고 속된 마음만 자라나는 것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원종을 떠나기가 애처로워서 날마다 산 입구까지 갔다가는 차마 떠나지 못하고 울며 다시 절로 돌아오기를 한 달 남짓 되풀이했다. 그러다가 끝내는 원종이 마련해 준 약간의 노잣돈을 가지고 경상도로 돌아갔다.
 
  淳永은 淳永대로 중노릇하는 아들의 모습을 못마땅해 했다. 그는 외아들이 중이 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원종이 중의 행색으로 서도에 내려온 뒤로 순영은 아들이 다시는 삭발을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원종은 長髮僧(장발승)이 되었다. 그러한 원종의 승려생활이 오래 갈 수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원종은 구시월경에 치마머리로 상투를 틀고 양반의 의관을 차려입고 淳永 내외와 함께 海州 텃골로 돌아오고 말았다.49) 평양에 온 지 다섯 달쯤 된 때였다.
 
  이렇게하여 일년 남짓한 金九의 승려생활은 끝이 났다. 이때에 체험한 불교는 金九에게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金九는 도망자의 은신처로서 불교에 잠시 귀의했을 뿐 世俗의 욕망에서 벗어나서 道法에만 정진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는 경전수업에 충실하기보다는 「걸시승」과 같은 방탕한 생활로 자신의 울분을 달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기간에 깨우친 불교의 교리와 佛經의 지식은 그의 일생을 통하여 귀중한 교양이 되었다.●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1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1) 三南의 儒生들과 사귀다
 
 
 
  3년 반 만에 고향에 돌아온 金昌洙는 감개가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근 양반들과 친척들은 김창수가 돌아왔으니까 또 무슨 일을 저지르지나 않나 하고 불안해했다. 작은아버지 俊永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잡아 둘째형 淳永에게 공손히 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준영도 창수에게는 털끝만큼의 동정심도 없었다. 준영은 창수가 識者憂患(식자우환)으로 농삿일에 무성의하다고 미워했다. 그는 창수가 난봉끼가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는 순영 내외에게 창수가 농사를 짓게 하면 자기가 맡아서 장가도 들여 주고 살림도 차려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순영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아들이 비록 지금은 잠시 방황하고 있으나 가슴속에 원대한 뜻을 품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아들에 대한 순영의 이러한 기대가 유년기 이래로 金九의 강한 신분상승 의욕과 抵抗精神을 북돋웠던 것이다.
 
  순영은 말했다.
 
  『창수도 이제는 장성하였으니 스스로 알아서 할 수밖에 없다』
 
  준영은 둘째형의 이러한 태도가 몹씨 불만이었다.
 
  『형님 내외분이 창수놈을 글공부시킨 죄로 온갖 고생을 하셔 놓고도 아직도 깨닫지 못하시오?』
 
  金九는 이때의 일을 술회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작은아버지의 관찰이 사실은 바로 본 것이었다. 만일에 글을 몰랐다면 동학 두령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천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텃골의 순전한 한 농군으로 땅 갈아 먹고 우물 파 마시며 살았을 것이다. 세상을 요란하게 할 일은 없었을 것이 명백했다.〉1)
 
  이처럼 그는 그때까지의 자신의 행적을 「세상을 요란하게 한 일」로 자부했다.
 
 
  농사일에 마음 붙이지 못해
 
 
  김창수는 어쩔 수 없이 준영의 뜻대로 평범한 농군의 생활로 돌아갔다. 겨울을 하릴없이 보내고 봄이 되자 농사일이 시작되었다. 준영은 새벽마다 창수의 집으로 와서 창수의 단잠을 깨워서 밥을 먹이고 들로 데리고 나가 가래질을 시켰다. 김창수는 얼마 동안 순순히 준영의 말에 따랐으나 도무지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어느 날 그는 문득 강화도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화도로 가고자 한 것은 인천감옥에 투옥되었을 때에 자기의 구명운동을 하다가 전 재산을 탕진한 金周卿의 소식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김창수는 몰래 집을 나섰다. 그는 떠나는 길에 스승 高能善과 청계동의 安泰勳 진사를 찾아보는 것이 도리라고 느꼈으나, 아직도 떳떳이 나서서 방문하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을 만나는 것을 단념하고 길을 떠났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 이름은 金斗來라고 고쳤다.
 
  이무렵 안태훈과 그의 일가는 지방 관아와의 충돌로 수난을 겪고 있었다. 안태훈은 1897년에 신천 군수에게 체포되었고, 이듬해 2월에는 빌려준 돈을 받으려다가 해주감영에 투옥된 동생 安泰建을 구하러 갔다가 자신마저 투옥되기도 했다. 안태건은 그 이듬해 3월에 다시 도적으로 몰려서 구금되었다. 그럴 때마다 안태훈은 황해도 지역의 宣敎책임자였던 빌헬름(Joseph Wilhelm) 신부의 도움을 받았다.2) 그러는 과정에서 안태훈은 「海西敎案」의 주모자로 지목되었다. 1900년부터 1903년 사이에 황해도에서 발생한 해서교안은 천주교도와 지방 관아의 충돌에서 시작되어 新舊敎 사이의 분쟁으로까지 확대된 일련의 소송사건이다. 해서교안은 부패한 관리들의 착취와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 선교사들의 무리한 선교활동과 치외법권적인 행동, 新舊敎 사이의 지나친 선교경쟁 등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발생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査♥使(사핵사) 李應翼(이응익)을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게 했다. 그러나 이응익이 조사를 한다면서 천주교 신자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하고 보부상패를 동원하여 행패를 부리자 사태는 오히려 더 심각해졌다. 결국 여러 차례의 소송을 거친 뒤에 1904년에 프랑스공사와 외부대신 사이에 선교조약이 체결됨으로서 사태는 마무리되었다.3) 안태훈은 이러한 해서교안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체포될 위기에 몰렸다가 빌헬름 신부의 도움으로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관리들의 악행에 통분한 안태훈은 밤낮으로 술을 통음했다. 울화병으로 중병을 앓게 된 그는 한번은 병치료를 받으러 청국의원을 찾아갔다가 길에서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던 끝에 1905년 12월에 청계동 집에서 사망했다.4) 金九는 안태훈이 사망하기까지 그를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안태훈의 사망에 대해서는 「백범일지」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
 
  강화도에 도착한 김창수는 김주경의 집을 찾아서 강화성의 南門 안으로 들어갔다. 김주경은 없고 셋째 동생 鎭卿(진경)이 혼자서 김창수를 맞이했다. 진경이 김창수에게 물었다.
 
  『어디 사시는데 우리 형을 그렇게 친숙히 아십니까?』
 
  김창수는 김주경을 찾아온 이유를 꾸며서 둘러댔다.
 
  『나는 延安(연안)에서 살았고 당신 형님과는 막역한 동지인데, 수년간 소식을 몰라 궁금하여 찾아왔소』
 
  진경은 김창수의 말을 믿고 김주경의 행방에 대해 자신이 아는 대로 말해 주었다.
 
  『형님이 집을 나간 지 벌써 3, 4년이 지났는데도 소식 한 장 없고, 집안은 망할 대로 망해서 남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형님이 계시던 집에 들어와서 합쳐 살면서 형수를 모시고 조카아이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김주경의 집에서 동네 아이들 가르쳐
 
 
  김주경의 집은 초가이기는 했으나 처음에는 제법 화려하고 멋지게 잘 지은 집이었는데, 여러 해가 지나도록 수리를 하지 않아 황폐하고 퇴락해 있었다. 그러나 김주경이 앉았던 자리에는 그가 쓰던 둥근 방석이 그대로 있었고, 벽 위에 몽둥이가 하나 걸려 있었다. 그 몽둥이는 김주경이 신의를 어기는 동지를 벌할 때에 쓰던 것이라고 했다. 진경은 몽둥이를 가리키면서 창수에게 여러 가지 지난날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사랑에 나와서 노는 일곱살배기 사내아이 潤泰(윤태)가 김주경의 아들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김주경을 찾아간 김창수에게는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진경에게 지난날의 모든 일을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집을 그냥 떠나오려니까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김창수는 진경에게 말했다.
 
  『내가 형님의 소식을 모르고 가기가 매우 섭섭하니 사랑에서 윤태에게 글이나 가르치고 지내면서 형님 소식을 같이 기다리면 어떻겠는가?』
 
  진경은 매우 감격하여 말했다.
 
  『형장(兄丈)께서 그같이 해주시면 오죽 감사하겠습니까? 윤태뿐만 아니라 둘째형 武卿도 두 아이가 있는데, 다 글 배울 나이가 되었는데도 촌에서 그대로 놀린답니다. 그러시면 둘째형네 조카아이들도 데려다가 같이 공부를 시키겠습니다』
 
  진경이 근처 마을의 무경에게 가서 전후사정을 설명하자 무경도 그날로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아이들을 부탁했다.
 
  그날부터 김창수는 김주경 일가의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윤태에게는 「童蒙先習」을, 무경의 한 아이에게는 「史略」 초권을, 또 한 아이에게는 「千字文」을 정성껏 가르쳤다. 창수의 열성을 보고서 김주경의 사랑에 드나들던 김주경의 친구들과 진경의 친구들도 진경에게 부탁하여 저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 한 달도 되기 전에 큰 사랑방 세 칸에 30여명의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이렇게 학동들이 늘어나자 〈나도 신이 나서 무한한 흥미를 가지고서 아이들을 가르쳤다〉5)고 金九는 적고 있다.
 
  金九의 이러한 성품과 이때의 경험은, 인천감옥서에서 죄수들을 가르친 일과 평양 영천암에서 全孝舜의 자손들을 가르친 일들과 함께, 뒷날 그가 敎育事業에 열성을 쏟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柳完茂라는 양반이 金昌洙 수소문
 
 
  김주경의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지 석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진경이 서울서 온 편지 한 장을 보면서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이 양반은 알지도 못하는 내게 자꾸 편지만 하니 어찌하란 말인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답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또 사람을 보내다니』
 
  김창수가 물었다.
 
  『거 무엇을 그러는가?』
 
  김진경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부평 유씨 柳仁茂(유인무) 혹은 完茂(완무)라고 하는 양반이 몇 년 전에 여기서 30리쯤 되는 촌에서 喪을 당한 몸으로 한 3년 동안 살다 갔습니다. 그 사람이 여기 살 때에 자기는 양반이면서도 형님을 文殊山城으로 초청해 가지고 며칠을 함께 지내면서 술을 마신 적이 있었지요. 그 뒤로 형님이 유씨 댁을 방문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작년에 해주 사람 김창수란 청년이 왜놈을 죽이고 인천감리서에 수감되었는데, 간수 가운데 전에 우리집 여종의 서방이던 최덕만이란 놈이 형님께 찾아와서는 김창수가 인천항을 들었다 놓았다 했고, 감리나 경무관이 꼼짝 못 하게 호령을 했고, 그러다가 교수형을 받게 된 것을 상감이 살려 주어서 죽지는 않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 형님이 우리집 재산을 있는 대로 톡톡 털어가지고 근 1년 동안이나 서울로 가서 김창수를 살리려고 애를 썼지만 될 수 있는가요? 돈만 다 써버렸지요. 형님은 돌아오신 뒤에 무슨 다른 사건으로 피신을 하셨는데, 그 뒤에 들으니 김창수는 탈옥해서 도주했다고 합니다. 유완무가 벌써 여러 번 얼굴도 모르는 나에게 해주에서 김창수가 오거든 자기에게 급히 알려 달라고 편지를 하기에 그런 사람이 온 일이 없다고 회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형님과 평소에 친하던 通津(통진) 사는 李春伯이란 양반이 유씨와도 친한 모양이야요. 유씨 편지에 이춘백을 보내니 의심말고 자세히 알려 달라는 부탁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 김창수는 모골이 송연해지고 여러 가지 의심이 생겼다. 김진경에게 말을 더 시켜 보았다.
 
  『김창수란 사람이 와서 다녀는 갔는가?』
 
  『생각해 보세요. 여기서 인천이 지척인걸요. 그것도 형님이 집에 계시다면 혹 비밀히 올지도 모르지요. 형님도 안 계신데 그런 사람이 왔다손 치더라도 형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비밀히 조사해 보고 안 계신 줄 알면 내 집에 들어올 리가 있는가요? 그 양반이 아무 맥도 모르고 그러는 것이지요』
 
  『그것은 동생의 말이 옳은데, 그러면 어떤 왜놈의 부탁이나 관리의 촉탁을 받고 정탐하려는 것은 아닌지?』
 
  『그것은 결코 아닐 줄 믿습니다. 내가 유완무 그 양반과 만난 적은 없으나 지금 보통 벼슬하는 양반과는 판이하답니다. 유씨에게는 학자의 기풍이 있고, 우리 형님을 의기남아라면서 조금도 반상의 구별을 하지 않고 지극히 존대하더라는데요』
 
  김창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위험이 박두한 것 같기도 했고, 유완무라는 사람의 본뜻을 알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진경에게 수상스럽게 보일까 해서 더 물을 수도 없었다. 겉으로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체했으나 속마음은 몹시 산란했다.
 
  그날 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을 먹고 났을 때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에 마마 자국이 있는 서른 남짓되어 보이는 사람이 서슴없이 사랑으로 들어섰다. 그는 김창수 앞에서 공부하는 윤태를 보고 말했다.
 
  『이놈 윤태야, 그새 퍽 컸구나. 안에 들어가서 작은아버지 좀 나오시라고 해라. 내가 왔다고』
 
  윤태는 곧 안방으로 들어가서 진경을 앞세우고 나왔다. 그 사람은 진경과 날씨이야기 등 수인사를 마치고는 바로 김주경의 소식을 물었다.
 
  『아직 형님 소식은 못 들었지?』
 
  『예,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허, 걱정이로군. 유완무의 편지 보았겠지?』
 
  『예, 어제 받아 보았습니다』
 
  그 말을 하고서 진경은 김창수가 앉아 있는 앞방의 미닫이 문을 닫고는 둘이서만 이야기했다. 김창수는 학동들을 가르칠 생각은 하지 않고 오로지 두 사람의 대화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는 학동들이 「하늘천 따지」를 「하늘소 따갑」이라고 잘못 읽을 때에도 바로 고쳐 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오로지 윗방에서 나누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만 관심을 집중했다.
 
 
  감옥을 깨고 金昌洙 빼내려고 모의
 
 
  진경이 물었다.
 
  『유완무 그 양반 참으로 지각없는 사람 아닙니까? 김창수가 형님도 안 계신데 왜 내 집에 오리라 생각하고 그렇게 여러 번 편지를 하십니까?』
 
  『자네 말이 옳지만 우리가 1년 넘게 김창수 때문에 별별 애를 다 썼다네. 유완무가 남도로 이사를 한 뒤에 서울에 다니러 왔다가 자네 형님이 김창수를 감옥에서 구출하려고 가산을 다 탕진하고 끝내 피신까지 한 것을 알고 우리 몇 사람을 모아서 기어이 김창수를 구출해 내려고 했다네. 법률적인 사면을 구하는 것이나 뇌물을 쓰는 일 등은 자네 형이 다 해보았으니까 이제는 강제로 빼낼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용감한 청년 열세 명을 뽑았지. 그 가운데 나도 들었었네. 열세 명이 모험대를 조직해 가지고 인천항 주요 지점마다 밤중에 석유를 한 통씩 지고 들어가서 열여덟 곳에 불을 지르고 감옥을 깨고 김창수를 구출하자는 방침을 정했다네. 유씨가 나더러 먼저 두 사람을 데리고 인천항에 들어가서 주요 지점과 감옥의 형편과 김창수의 동정을 조사하라고 해서 가지 않았겠나. 인천항에 가서 감옥 형편을 조사해 보았더니 사흘 전에 김창수가 다른 죄수들과 같이 파옥 도주를 했더군. 나는 돌아가서 유씨와 함께 김창수의 종적을 탐지할 길을 연구했네. 한 길은 해주 본향이었으나 기필코 고향으로 갈 턱이 없고 설혹 그 부모에게 통기했다손 치더라도 결코 발설을 않을 것이 아닌가? 게다가 잘못 탐지하다가는 도리어 그 부모를 놀라게만 할 것이 아닌가? 해주 고향을 제외하고는 자네 집인데, 김창수가 몸소 이리 오기는 몹시 어려웠을 터이나, 어느 곳에서 편지한 일이 없었는가?』
 
  말을 다 듣고 나서 진경이 말했다.
 
  『편지도 없었습니다. 편지를 하고 회답을 기다릴 것 같으면 차라리 자기가 직접 와서 알아보았겠지요』
 
  두 사람의 이야기는 거기서 끊어졌다. 진경이 물었다.
 
  『언제 서울로 가시려오?』
 
  『오늘 친구나 좀 찾아보고, 내일은 곧 상경할 참이네』
 
  이춘백은 다음날 아침에 와서 작별할 것을 기약하고 돌아갔다.
 
  두 사람이 주고 받는 말을 듣자 김창수는 유완무란 사람이 참으로 자신을 위해서 그토록 정성을 쏟았다면 만나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자신을 정탐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또한 묘한 계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김창수는 두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춘백이 진경을 보고 하는 말은 서로를 진정한 동지로 믿고 숨김없이 하는 말이 분명했다. 또한 유완무가 김주경의 실패를 알고도 계속해서 자기를 살리기 위한 모험을 계획하고 추진했다는 사실도 믿을 만하다고 느껴졌다. 김창수는 이만큼 알고도 자신이 끝까지 피하거나 종적을 감춘다면 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6)
 
  柳完茂(또는 柳仁茂)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독립운동가 李會榮(초대 副統領 李始榮의 兄)의 아내 李恩淑의 회고에 따르면,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에 이회영이 李相卨(이상설), 李東寧(이동녕), 呂準(여준) 등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는 모임을 가졌는데, 유완무도 그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7) 그만큼 그는 서울의 명사들과 같이 어울릴 정도의 인물이었던 것 같다. 이때의 모임에서 이들은 당시의 정세로는 국내에서 대대적인 운동을 전개하기는 불가능하므로 만주로 건너가서 근거지를 건설하여 장기항전할 것을 논의했다고 한다. 뒷날 金九가 장련에서 신교육운동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 그를 방문한 유완무가 자신의 北間島 이주계획을 알려 주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 그 뒤에 만주로 건너가서 활동한 것으로 짐작되나, 그 뒤의 행적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다.
 
 
  柳完茂 만나러 서울로
 
 
  김창수는 그날 밤은 그대로 자고, 다음 날 아침에 진경과 겸상으로 밥을 먹으면서 물었다.
 
  『어제 왔던 사람이 이춘백인가?』
 
  『예, 그렇습니다』
 
  『언제 또 오는가?』
 
  『아침 먹고 나서 작별하고 서울로 간다니까 조금 있다 오겠지요』
 
  『이춘백이 오거든 내게 인사 소개나 하여 주게. 자네 형님과 평소에 친한 동지라니까 나도 반가운 마음이 드네』
 
  『그럽시죠』
 
  김창수는 결심한 듯이 말했다.
 
  『진경, 자네와 오늘 작별해야겠네. 윤태와 조카아이들과도 아울러 작별일세. 섭섭한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네』
 
  이 말을 듣자 진경은 깜짝 놀랐다.
 
  『형님, 이게 무슨 말씀이야요? 제가 무슨 잘못한 일이 있습니까? 갑자기 작별 말씀이 웬 말씀이에요? 저야 미거한 것이지만 형님을 생각하시고 저를 용서도 하시고 책망도 하여 주셔요』
 
  그제야 김창수는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곧 김창수일세. 유완무란 친구의 추측이 바로 맞았네. 어제 자네가 이춘백과 이야기하는 것을 다 들었네. 자네 생각에 나를 정탐하기 위한 유인책만 아닌 줄 믿거든 나를 놓아주어 유완무란 친구를 가서 만나도록 해주게』
 
  김진경은 이 말을 듣고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형님이 과연 그러시다면 제가 만류를 어찌합니까? 최덕만은 작년에 죽었다고 하지만, 이곳에는 감리서에 主事 다니는 자도 있고 순검 다니는 자도 있어서 종종 내왕이 있습니다』
 
  위험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진경은 학동들에게 말했다.
 
  『선생님이 오늘 본댁에 다녀오실 터이니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거라』
 
  얼마 뒤에 이춘백이 진경에게 작별인사를 하러왔다. 진경은 이춘백을 김창수에게 인사시켰다. 김창수는 이춘백을 보고 자신도 서울 갈 일이 있으니 같이 가자고 말했다. 이춘백은 그저 보통으로 생각하고 그러자고 했다.
 
  『심심한데 이야기나 하면서 같이 가면 매우 좋겠습니다』
 
  김진경이 이춘백의 소매를 끌고 뒷방으로 들어가서 무언가 두어 마디 수군거리다가 나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곧 출발했다. 김창수가 떠난다는 소식에 학동 30여 명과 학부형들이 南門앞 길이 메어지도록 몰려 나와서 배웅했다. 그동안 김창수는 정성을 다하여 아이들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한 푼의 수업료도 받지 않았었다. 그러한 김창수를 떠나보내는 그들의 심정이 못내 서운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남아가 어디에 있든지 만날 수 없으랴』
 
 
  강화를 출발한 두 사람은 그날로 서울 孔德里에 있는 朴台秉(박태병) 진사의 집에 도착했다. 이춘백이 먼저 안사랑으로 들어가서 무슨 말인가를 했다. 그러자 중키보다 조금 작은 키에 햇볕에 그은 가무잡잡한 얼굴을 하고 망건에 갓을 쓰고 의복을 검소하게 차려 입은 생원 한 사람이 김창수를 맞이했다.
 
  『나는 유완무요. 오시느라 고생하셨소. 男兒何處不相逢(남아하처 불상봉: 남아가 어디에 있든지 만날 수 없으랴)이라는 말이 오늘 창수형에게 비유한 말인가 보오』
 
  그러고는 또 이춘백을 보고 말했다.
 
  『무슨 일이고 한두 번 실패하더라도 낙심할 것이 아니니 구하면 얻게 될 날이 있다고 내 전에 말하지 않던가?』
 
  이 말은 이제서야 김창수를 만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으나, 또한 김창수를 만나기 위해서 자신들이 그동안 애를 얼마나 썼는가를 암시하는 말이기도 했다.
 
  김창수는 유완무를 보고 말했다.
 
  『강화 김씨 댁에 있으면서 선생이 이만 사람을 위하여 허다한 노고를 하신 것을 알고, 오늘 비로소 존안을 뵈옵습니다. 세상에는 침소봉대의 헛소문이 많은 탓으로 들으시던 말과 달리 실물은 龍頭蛇尾(용두사미)이오니 놀라시고 매우 낙심하실 것을 예상하여 두십시오』
 
  그러자 유완무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뱀의 꼬리를 붙잡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볼 터이지요』
 
  주인과 손님이 함께 웃었다. 주인 박태병은 유완무의 동서였다. 저녁을 먹은 뒤에 성 안의 유완무 처소로 가서 잤다. 며칠동안 쉬면서 요릿집에 가서 음식을 먹기도 하고 구경도 다녔다. 그러나 「백범일지」에는 이때에 구경한 서울 풍경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유완무는 김창수에게 편지 한 통과 노자를 주면서 충청도 連山 광이다리 앞의 桃林里에 사는 李天敬(이천경)을 찾아가라고 말했다. 이렇게 하여 金九의 두 번째 삼남 여행이 시작되는데, 첫번째 삼남 여행 때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이때의 일에 대해 「백범일지」는 첫번째 여행 때보다 오히려 더 소홀히 적고 있어서 여러 가지 추측을 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관련 인물이나 그 후손들의 방증 자료가 없어서 이때의 일에 관해서도 그나마 「백범일지」의 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유완무의 편지를 받아 든 이천경은 김창수를 반갑게 맞이했다. 매일같이 정성스럽게 음식을 장만하여 극진하게 대접했다. 한가로이 담소를 주고 받으며 이천경의 집에서 달포를 지냈다.
 
 
  地方儒生들 집에서 달포씩 묵으며
 
 
  하루는 이천경이 편지 한 통을 김창수에게 써 주면서 茂朱읍내에서 인삼을 재배하는 李時發을 찾아가라고 했다. 김창수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이시발을 찾아가서 이천경의 편지를 전하고 하룻밤을 묵었다. 김창수는 2년 전에 감옥동료 孔鍾烈의 매부인 陳宣傳을 찾아 무주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를 다시 찾아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것 같다. 「백범일지」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튿날 이시발은 김창수에게 또 편지를 써주면서 知禮郡(지례군: 지금의 경북 금릉군 지례면) 川谷에 사는 成泰英(성태영)을 찾아가라고 했다.
 
  성태영은 자가 能何이고 호는 一舟인데, 조부가 원주 목사를 지냈다고 하여 택호가 成原州였다. 碧棲(벽서)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한 성태영은 구한말 양심적인 대지주로서 젊은 인재를 보살피며 애국적인 사업에 참여했다. 그는 독립운동가 金昌淑의 동지로서 3·1운동 직후에 전국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알리는 「巴里長書」를 제출할 때에 재경유림단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8)
 
  성태영의 사랑에 들어가자 수청방과 상노방에 하인이 수십 명이고, 사랑에 앉은 사람들도 거의가 귀족의 풍채와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성태영은 편지를 보고 김창수를 환영하여 상객으로 대우했다. 그러자 상노 등도 더욱 존경하는 태도로 김창수를 대했다. 김창수는 성태영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나물을 캐고 물가에 나가서 고기를 구경하는 등으로 한가하게 지내면서 古今의 어렵고 의심나는 일을 서로 묻고 대답했다. 그렇게 또 달포를 보냈다.
 
  그런데 金九는 성태영과 서로 묻고 대답한 「어렵고 의심나는 고금의 일」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백범일지」에서 이상스러우리만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문답은 사실은 유완무와 그의 동지들이 金九의 인품과 학식을 시험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유완무가 성태영의 집으로 찾아왔다. 유완무와 성태영은 金昌洙라는 이름이 사용하기가 불편하다면서 이름을 龜(구)로 고쳐 지어 주었다. 그리고 호는 蓮下(연하), 자는 蓮上(연상)으로 행세하기로 했다(이 글에서도 앞으로 金昌洙를 金龜로 쓰기로 한다). 유완무는 다음날 아침에 金龜를 무주읍내에 있는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유완무는 딸을 李忠求의 조카며느리로 시집보냈고, 아들은 漢卿 등 둘을 두고 있었으며, 당시의 무주 군수 李倬(이탁)과도 인척인 것 같았다.
 
  유완무는 지금까지의 일을 김창수에게 설명해 주었다.
 
  『창수 당신이 경성으로부터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매우 의아하셨지요? 내 실정을 말해 주리다. 연산 이천경이나 여기 성태영은 다 나의 동지인데, 우리는 새로 동지가 생겼을 적에는 반드시 몇 곳으로 돌려 달포씩 함께 지내면서 각자 관찰한 것과 시험한 것을 종합해서 어떤 사업에 적당한 자질이 있는지를 판정한 뒤에, 벼슬살이에 적당한 사람은 벼슬자리를 주선하고 상업이나 농사에 적당한 인재는 상업이나 농업으로 인도하여 종사케 하는 것이 우리 동지들의 규정이오. 蓮下는 동지들이 시험한 결과 아직 학식이 부족하니 공부를 더 하도록 하되 서울 방면의 동지들이 맡아 웬만큼 성취하도록 할 것이오.
 
  우선 시급한 것은 蓮下가 출신이 常民계급이니까 불가불 신분부터 양반에게 눌리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오. 그래서 지금 연산 이천경이 소유하고 있는 가택과 논밭과 가구 전부를 그대로 蓮下의 부모가 생활하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겠고, 또 그 고을의 큰 성씨 몇몇만 잘 단속하면 족히 양반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오. 蓮下는 서울에 유학하면서 간간이 부모님을 뵙도록 할 것이니, 지금 곧 고향으로 가서 2월 안으로 부모님 몸만 모시고 서울까지만 오시오. 서울서 연산까지 가는 길은 내가 알아서 하겠소이다』
 
 
  父母를 이사시켜 兩班 만들어 주기로
 
 
  김구는 속으로 적이 놀랐다. 그리고 유안무의 제의에 감격했다. 자신이 상놈 출신이라는 데 심한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는 김구로서는 무엇보다도 부모를 모셔다가 양반 행세를 하도록 해 주겠다는 유안무의 배려가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그날로 김구는 유완무와 동행하여 서울로 출발했다.
 
  그런데 김구는 유완무가 자기 부모를 양반생활을 하도록 해 주겠다는 데 대해서는 자세히 적고 있으나 자신을 서울에서 학업을 더 계속하도록 하겠다는 것에 대해서는 특별한 설명이 없다. 유완무와 그의 동지인 地方儒生들이 김구의 학식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것이 그의 漢文古典에 대한 조예나 인천감옥에서 「泰西新史」, 「世界地誌」 등을 읽고 깨우친 신학문에 대한 이해나 또 당시에 유행하던 萬國公法에 대한 지식 같은 것을 종합해서 내린 결론인지 어떤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유완무의 그 뒤의 행적으로 보아서 이들은 위정척사파들과는 다른 改新儒生들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그들이 김구로하여금 서울에서 더 습득하도록 하겠다고 한 학문이란 新學問을 뜻하는 것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서울에서 다시 강화 長串(장곶)에 사는 朱潤鎬(주윤호) 진사를 찾아갔다. 그는 유완무의 제자였다. 김주경의 집에 들러보고 싶기는 했으나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비밀히 주윤호 집에만 다녀왔다. 주윤호의 집은 바닷가에 있어서 11월인데도 아직 감나무에 감이 달려 있었다. 또한 장곶은 해산물이 풍부한 곳이었으므로 며칠 동안 잘 지냈다.
 
  주윤호는 김구에게 백동전 4000냥을 주면서 유완무에게 전하라고 말했다. 김구는 백동전을 온몸에 돌려 감고 서울로 왔다. 「백범일지」는 그 돈을 노자로 하여 고향으로 향했다고 했으나,9) 유완무가 그 돈을 모두 김구의 여비로 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유완무와 그의 동지들의 조직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유완무, 성태영, 박태병, 이천경, 주윤호 등이 서울뿐만 아니라 삼남지방에 흩어져 있는 儒生들인 것으로 보아서 이들의 조직은 서울과 삼남지방에 걸친 양반유생들의 인맥이었던 것 같다. 이들은 김구를 동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각 지역의 동지들에게 돌리면서 그의 인품과 학문과 경륜을 시험하는 데서 보듯이 일정한 조직원칙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김구의 장래와 부모의 생활대책까지 마련해 주는 것으로 보아서 경제적 기반도 웬만큼 튼튼했던 것 같다. 조선시대에 門中이나 學脈에 따른 친분관계와 다르게 유생들의 이와 같은 특수한 조직이 더러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향으로 떠나기 전날 밤에 김구는 아버지의 꿈을 꾸었다. 순영은 연초에 병이 들었다가 김구가 집을 떠나올 무렵에는 좀 나아 있었다. 그러나 김구는 아버지의 병환이 늘 걱정되어 서울에 와서는 우편으로 탕약보제를 지어 보내기도 했었다. 꿈에 나타난 순영은 아들을 보고 「黃泉」이라는 두 글자를 쓰라고 말했다. 흉몽이었다.
 
  김구는 유완무와 꿈이야기를 나눈 다음 서둘러 길을 떠났다. 그는 걸음을 재촉하여 나흘 만에 海州 飛洞(비동)에 도착했다. 비동을 지나치려니까 문득 高能善이 보고 싶었다. 산중턱에 있는 작은 집으로 옛 스승을 찾아갔다. 거의 6년 만의 만남이었다. 고능선은 기력은 그다지 쇠약해져 있지 않았으나 돋보기를 쓰지 않고는 글을 못 볼 만큼 시력이 떨어져 있었다.
 
 
  6년 만에 찾은 옛 스승
 
 
  김구가 고능선에게 절을 하고 앉아 두어 마디 대화를 시작할 때에 사랑 안쪽 문이 방긋이 열리더니 열 살 남짓 먹은 소녀가 『아이구, 아저씨 왔구나!』 하고 뛰어 들어왔다. 청계동에 살 적에 사랑에 가면 늘 나와서 김구에게 매달리며 업어 달라고 하다가 고능선에게 꾸지람을 듣던 원명의 둘째 딸이었다.
 
  김구가 원명의 맏딸과 혼약한 뒤로는 고능선이 전과 같이 책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김구를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더욱 허물없이 매달리고 온갖 응석을 부렸다. 김구는 마음속으로 무척이나 반가웠고, 또 부모 없이 숙모의 손에 자라는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터라서 퍽 불쌍하게도 여겨졌다. 그러나 아저씨라는 칭호를 듣고 태연히 알은 척하기는 매우 민망스러운 일이었다. 그러한 광경을 보는 고능선도 어떤 감회를 느끼는지 말없이 담벽만 건너다보고 앉아 있었다. 김구도 아무 말대답을 못 하고 눈으로만 그 소녀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서로 아무말없이 지난날의 혼사문제를 추억하고 있었다. 고능선이 김구와의 혼약을 파하고 돌아가자 과부인 둘째 며느리는 아무 댁과 혼인을 하자느니, 아무 댁 자제가 학문도 상당하고 문벌도 비슷하고 재산도 유족하니 거기다 통혼을 하자느니, 김창수는 상놈이고 게다가 집안이 가난할 뿐 아니라 옛날 혼처에서 그같이 괴악을 부리니 그에게 딸을 주다가는 집안이 망할 것이라느니 하고 떠들어댔다. 이에 홧병이 났던지 고능선은 당장 청계동의 미미한 농부인 金士集이라는 사람의 아들로서 역시 농군인 떠꺼머리 총각에게 자청하여 그날로 혼약을 결정해 버렸다.
 
 
  「昭義新編」에 金九를 「義氣男兒」라고 적게 해
 
 
  이윽고 고능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이때에 高能善과 나눈 대화를 아주 자세히 적고 있으나, 일부내용에 중요한 착오가 있어서 꼼꼼히 천착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그 사이에 자네가 왜놈을 죽여 의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네를 평소에 기대하던 나머지 매우 놀라고 탄복하였네. 내가 柳毅菴(유의암: 유인석) 선생에게 자네 이야기를 했네. 선생이 쓰신 「昭義新編 : 續編(소의신편 : 속편)」에 「김창수는 의기남아」라고 讚(찬)하신 것도 보았네. 자네가 인천으로 간 뒤에 毅菴이 의병에 실패하고 平山으로 와서 서로 만나 장래 계획을 의논했는데, 그때 연전에 자네가 西間島를 보고 관찰한 내용을 선생께 보여드렸네』10)
 
  「昭義新編(소의신편)」(8권 4책)은 柳麟錫(유인석) 부대가 서간도로 망명한 뒤에 그의 문하생들이 의병운동 및 위정척사와 관련된 자료를 모아서 1899년에 편찬한 책인데, 1902년에 이를 간행할 때에 「소의신편」을 편찬한 뒤에 나타난 자료를 모아 「昭義續編(소의속편)」(2권)으로 편찬하여 같이 간행했다. 高能善이 본 구절이란 「소의속편」의 「白元龜炳琳錄先生語(백원구병림록선생어)」 편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말하는 것이었다.
 
  〈海西人 金昌洙에 대한 이야기를 듣건대, 金昌洙는 왜인과 같이 주막에서 자다가 왜인이 兪吉濬의 책을 가지고 있고 國語(우리나라 말)를 욕하는 것을 보고는 몇사람을 죽이고, 이름을 벽 위에 붙여놓고 갔다. 뒤에 왜인이 수색하여 인천항 監理司에 가두고 장차 그를 죽이려 했다. 감리관은 그를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은밀히 전갈하기를 공초할 때에 살인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말하라고 했다. 다음날 일본공사가 감리(서)에서 공초할 때에 감리관이 『너는 일본인을 죽였는가?』라고 묻자 『죽였다』고 대답했다. 감리관은 몰래 전갈한 말을 따르지 않는 것에 노하여 크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는 어떤 이유로 일본인을 죽였는가?』라고 하자, 『감리관, 살인죄를 묻는 것은 옳으나 어떤 연고로 죽였느냐고 묻는 것은 옳지 못하다. 살인한 까닭을 어찌 모르는가? 일본은 본래 우리나라의 원수이다. 오늘날 일본이 우리나라에 화를 미치니 복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 마음은 모두 죽이고자 했으나 힘이 없어서 단지 몇 명을 죽였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노하여 일본공사를 가리키며 『내 힘이 미친다면 당장 너를 죽이겠다』라고 말했다. 일본공사가 감리관에게 명하여 감옥에 다시 가두게 했다. 며칠 뒤에 일본공사가 『나는 그가 도둑이 아님을 안다. 그는 의인이다. 의인을 어찌 죽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는 그를 즉시 석방할 것을 명령했다. 이 일을 들음에 다른 사람의 기상을 북돋워 주니 진정 의기 남자이다. 일본공사가 능히 의에 감복할 줄 아니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11)
 
  위의 기록은 김구의 치하포 사건과 재판과정을 과장해서 적은 것이다. 김구가 일본인을 여러 명 죽였다거나, 공초의 주체가 일본공사라거나, 감리사가 김구를 살리기 위해 몰래 사람을 보냈다는 말 등은 모두 사실과 다르다. 그러나 위의 기술은, 「소의신편」이 서울에서 1000질이나 간행되어 국내뿐만 아니라 中國에까지 널리 배포되었던 사실을 감안할 때에, 김구의 무용담이 당시 한국인들 사이에 어떻게 전해졌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뒷날 일제는 「소의신편」을 철저히 압수하여 모두 불태워 버렸다.
 
 
  柳麟錫 義兵部隊 찾아가라고 권유해
 
 
  高能善은 유인석 부대의 활동계획을 들려 주면서 김구더러도 유인석 부대를 찾아가라고 권했다.
 
  『당분간의 형세로는 평안 황해 지방에 발붙일 곳이 없으니, 압록강을 건너서 적당한 지대를 택하여 장래를 꾀함이 상책이라 했다네. 의암도 심히 좋게 여겨 나와 동행하여 전에 자네가 말했던 곳을 면밀히 조사하였네. 그리고 그곳에 의암이 몸소 들어가서, 한편으로는 孔子의 聖像을 봉안하여 여러 사람들의 崇慕心을 증진케 하고, 한편으로는 內地(곧 조선)에서 종군하던 무사들을 소집하여 훈련하는 중이라네. 자네도 속히 선생께 가서 장래의 큰 계획을 함께 꾀함이 어떻겠나?』12)
 
  제천전투 패배 뒤의 유인석의 행적에 대한 고능선의 말이라고 「백범일지」에 적힌 이러한 서술은 사실과 다른점이 있다.
 
  고능선은 유인석이 서간도에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고 하나 유인석은 이 무렵에는 이미 국내에 돌아와 있었다. 1896년 8월에 압록강을 건너간 유인석 부대는 9월에 懷仁縣宰(회인현재) 徐本愚(서본우)에 의해 波猪江(파저강: 渾江) 근방에서 제지를 받고 강제로 해산되었다. 瀋陽으로 간 유인석은 심양현재 賈元桂(가원계)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청국의 원병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유인석은 통화현 五道溝에 들어가서 이곳을 「復古制, 斥倭獨立」의 근거지로 정하고 望國壇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참배하면서 장기전에 대비했다.
 
  高宗의 명으로 1897년에 귀국했던 그는 이듬해 3월에 다시 오도구로 망명했는데, 高能善이 유인석과 그의 문하인 등 동지 71명과 함께 동행한 것은 이때였다.13) 유인석은 그해 10월에 근거지를 부근의 통화현 八王洞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鄕約(향약)을 실시하여 이주 한인들의 교화에 힘쓰면서, 孔子, 朱子, 宋時烈, 李恒老, 金平默, 柳重敎 등의 영정을 모시는 聖廟(성묘)를 세워서 의병들의 정신적인 귀의처로 삼고자 했다. 그러다가 1900년 7월에 중국에서 義和團의 난이 일어나서 중국의 정세가 불안하자 망명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했다.14)
 
  김창수가 고능선을 방문한 것은 1900년 12월 무렵이었는데, 이무렵에 유인석은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講會(강회)를 실시하고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또한 김구가 淸國行에서 돌아와서 고능선에게 서간도 일대의 사정에 관해서 보고한 것을 고능선이 유인석에게 말해주어 유인석이 그곳을 활동 근거지로 삼게 되었다는 말도 사실이 아닐 것이다. 유인석은 서북 지방을 거쳐서 서간도로 이동할 때에 황해도에는 들르지 않았다. 따라서 유인석이 平山에 들렀을 때에 그와 장래계획을 의논했다는 고능선의 말은 착오이다.
 
  따라서 高能善이 압록강을 향해 이동하는 유인석을 특별히 찾아가서 만나지 않은 이상 김구가 살펴보고 온 西間島 지방의 사정을 유인석이 알고 갔을 가능성은 없다. 유인석이 평산을 방문하는 것은 두 번째 망명에서 돌아온 뒤인 1900년 11월의 일이다.15)
 
  유인석의 오도구 정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첫번째 망명 때에 수행한 평산 출신의 門人 兪致慶(유치경)이었다. 유치경은 단발령이 공포되자 평산의 동문들과 대처방안을 논의하다가 유인석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제천으로 가서 합류하여 활동했던 사람이다. 청국군대와의 군사지원 협상에 실패한 유인석이 齊魯 사이의 지역에 정착하려고 하자 그는 유인석에게 오도구 지역이 한인 이주민이 많고 토지가 비옥하여 재기의 근거지로 삼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건의했었다.16)
 
  이 건의에 따라 유인석은 1896년 10월에 오도구에 들어갔고, 그곳에 머무는 동안 오도구가 장기항전을 위한 근거지로서 적합한 지역임을 확인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해 12월에 국내에 있는 동문과 문하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서 서간도로 모일 것을 호소했다.
 
  〈이 땅을 보건대 오랫동안 양국의 경계로 최근 수십 년 사이에 청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國禁이 있어서 들어오지 못했으나 근래에 큰 가뭄으로 말미암아 금지가 불가능하게 되어 이주해 오는 자가 만여 명 이상이고, 나머지 땅에도 수만 호가 수용될 수 있습니다. 토지가 심히 비옥하여 한 사람이 경작하면 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1년을 경작하면 3, 4년을 먹을 수 있습니다. 菽粟(숙속)이 水化와 같고 사람들의 인심이 후합니다. 그들 중에는 왕왕 의기가 있는 자가 있어서 가히 더불어 일을 도모할 만합니다. 그러므로 麟錫은 제공들이 속히 이곳에 오기 바랍니다.〉17)
 
  유인석의 문장 가운데에서 이 지방 토지의 비옥함을 설명한 대목은 〈본래 땅이 비옥하여 잡곡은 무엇이나 비료를 주지 않아도 잘 되었다. 한 사람이 농사를 지으면 열 사람이 먹어도 족할 정도였다〉18)고 한 「백범일지」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이어서 흥미있다.
 
  유인석은 1907년에 연해주 지방으로 세 번째 망명을 한다. 門人 李正奎(이정규)가 만주지역에는 이미 일본의 세력이 미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세력이 미치지 못한 러시아 지역이 의병활동에 더 적합한 곳이라고 한 권유를 받아들인 것이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구가 「백범일지」를 쓸 무렵에도, 비록 高能善의 말이라고 적기는 했으나, 여러 갈래의 무장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고 실제로 치열한 대일항전이 벌어지기도 한 西間島 지방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자신이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의식은 독립운동의 정통성과 관련된 김구의 자긍심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랑캐에게서 배울 것 많고, 孔孟에게서는 버릴 것 많아
 
 
  高能善의 사상은 그러나 이제 김구를 움직일 힘이 없었다. 김구는 그동안 신서적을 읽고 깨우친 세계 사정을 고능선에게 설명했다. 또한 스승이 평소에 강조하던 尊中華攘夷狄主義(존중화 양이적주의: 중국을 높이 받들고 서양세력을 배척하는 사상)가 정당한 것이 아니며, 눈이 들어가고 코가 높은 사람이면 덮어놓고 오랑캐라고 배척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말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그 나라 사람들의 經國大綱(경국대강)을 보아서 오랑캐의 행실이 있으면 오랑캐로, 사람의 행실이 있으면 사람으로 대우함이 옳을 줄 압니다. 우리나라의 탐관오리들은 비록 사람의 얼굴을 가졌으나 금수의 행실이 많으니 그들이 참으로 오랑캐입니다. 지금은 임금이 스스로 벼슬 값을 매겨 賣官을 하니, 그것이 곧 오랑캐 임금이 아니겠습니까? 내 나라 오랑캐도 배척을 못 하면서 어찌 남의 나라 오랑캐를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저 대양 건너에 사는 각 나라에는 제법 국가제도가 잘 갖추어져 있고 문명도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孔孟(공자와 맹자)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지만 孔孟의 법도 이상으로 발달된 법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오랑캐, 오랑캐 하고 배척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 소견에는 오랑캐에게서 배울 것이 많고, 孔孟에게서는 버릴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김구의 이야기를 듣고서 고능선은 말했다.
 
  『자네 개화꾼과 많이 상종하였지? 나도 몇몇 개화꾼을 만나 보았는데, 자네 말과 같더군』
 
  『그러시면 선생님이 보시는 장래 국가대계는 어떠한지 하교하여 주십시오』
 
  『先王의 法이 아니고 先王의 道가 아닌 것은 거론할 필요가 없네. 잘못하면 피발좌임(被髮左♥: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는 뜻으로서, 오랑캐의 복식을 가리키는 말)의 오랑캐가 될 뿐이니 …』
 
  『선생님이 피발좌임을 말씀하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머리털은 곧 血餘(혈여: 한의에서 사람의 머리털과 수염을 약재로 일컫는 말)이고 피는 곧 음식이 소화된 精液(정액)이니, 음식을 먹지 않으면 머리털도 자라날 수 없습니다. 설사 장발이 천자가 되게 길러 위대한 상투를 머리 위에 얹었기로서니 왜놈이나 양놈이 그 상투를 무서워하지 않는데 어찌하겠으며, 綠衣幅巾(녹의복건)을 아무리 훌륭하게 입었다 하여도 그것으로는 왜인과 양인이 숭배하고 무릎을 꿇지 않을 것입니다.
 
  이 나라에서는 학문과 도덕을 공부한 상류층 사람들이 백성을 잔인하게 학대하는 최상의 刀斧手(도부수: 큰 칼과 도끼를 쓰는 군사)들입니다. 진실로 안타까운 것은 온 나라 백성들이 거의 다 일자무식이니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이익을 쫓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자기의 권리와 의무는 모르고 탐관오리와 토호들의 능멸과 학대를 받으면서도 의당 받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탐관오리와 토호들이 자기 백성에게 그러듯이 왜와 서양을 능멸하고 학대한다면 왜와 서양은 멸종되고 그네들이 천하를 다 호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백성의 고혈을 빨아다가 왜놈과 양놈에게 바치고 아첨하면서 자기가 누구보다 출중한 도부수임을 자랑하고 있으니, 필경 이 나라는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계 문명 각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서 학교를 세우고 전국 인민의 자녀들을 교육하여 건전한 2세 국민들을 양성해야 합니다. 또한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국민에게 亡國(망국)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와 興國(흥국)의 복락이 어떤 것인지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구국의 도라고 제자는 생각합니다』
 
 
  외국문물은 당성냥 한 가치도 안 쓰는 스승
 
 
  이처럼 김구는 스승의 구국방도에 맞서 당당하게 자신의 구국방안을 구체적으로 말했다. 김구의 이러한 주장은 그가 고향에 돌아와서 신교육운동에 헌신할 것을 마음먹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고능선은 김구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나라의 운명을 인간의 수명에 비유하면서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도 節義(절의)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朴泳孝와 徐光範과 같은 역적들이 주장하던 것을 자네가 말하네그려. 만고 천하에 끝없이 존속하는 나라가 없고 만고 천하에 장생하는 사람이 없으니, 우리나라도 망할 운명에 당한 바에야 어찌하겠나? 그러나 나라를 구한다면서 왜놈도 배우고 양인도 배우다가 나라도 구하지 못하고 절의까지 배반하고 죽어 지하에 가면 선왕과 선현들을 무슨 면목으로 대하겠나?』20)
 
  서로의 주장은 평행선을 달릴 뿐이었다. 청계동 시절에 고능선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로 그를 하늘처럼 떠받들던 척사론자 김구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김구는 高能善의 집에서는 외국 문물이라고는 당성냥 한 가치도 쓰지 않는 것을 보고는 무척 고상한 일로 여겨졌다.
 
  김구는 하룻밤을 高能善의 집에서 자고, 다음날 하직인사를 하고서 물러나왔다. 이때의 만남이 고능선과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백범일지」는 高能善이 堤川(제천) 동문 집에서 객사했다고 적고 있으나,21) 그는 1922년에 해주 고향에서 사망했다.22)
 
  高能善이 죽은 뒤에 그의 제자들은 高能善의 행적과 남긴 글을 모아서 「後凋集」(5책)을 편찬했는데, 그 책에는 김구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것은 「후조집」이 김구가 上海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때에 편찬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문집 전체에서 제자들의 행적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김구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김구가 평생의 스승으로 존경한 고능선이 김구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후조집」은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국내가 아니라 中國에서 간행되었기 때문에,23) 지금도 희귀본이 되어 있다.
 
 
  허벅지살 베어 아버지에게 구워 드려
 
 
  김구가 텃골 본가로 돌아온 것은 음력으로 1900년 12월의 어느 날 황혼 무렵이었다. 김구가 안마당에 들어서자 곽씨 부인이 부엌에서 나오면서 말했다.
 
  『네 아버지 병세가 위중하여 「아까 이 애는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왜 뜰에 서 있느냐」 하시기에 헛소리로 알았더니 네가 정말 오는구나』
 
  김구는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 아들을 본 순영은 무척 반가워했으나 병세는 정말로 위중한 상태였다. 그러나 가난한 살림으로는 고명한 의원을 불러볼 수도 없었다. 웬만한 시탕(侍湯: 어버이의 병환에 약시중 하는 일)으로는 약효도 없었다. 마침내 김구는 할머니가 임종할 때에 순영이 斷指(단지)한 일을 떠올리고 자신도 단지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마음 아파할 것이 걱정되어 그는 단지 대신 割股(할고)를 하기로 결심하고, 어머니가 없는 틈을 타서 왼쪽 허벅지에서 살 한 점을 베어 내었다. 허벅지살은 불에 구워서 약이라면서 먹게 하고, 흐르는 피는 마시게 했다. 그러나 살점이 너무 작은 듯하여 김구는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베어 내려고 했다.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으나 살점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결국 허벅지 살에 깊은 상처만 내고 말았다. 이를 두고 김구는 〈손가락이나 허벅지를 베어 내는 것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될 수 있으랴〉24)하고 탄식했다고 적고 있다. 김구의 이러한 행동에서 우리는 그의 우악스러운 기품과 극진한 효성을 볼 수 있다.
 
  순영은 열나흘 동안 아들의 무릎을 베고 누어 있다가 마침내 아들의 손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더니 숨을 거두었다.
 
  앞에서 본 대로 김구는 순영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고 성장했다. 「수호지의 영웅」과 같았던 순영은 김구의 가장 큰 존경의 대상이었다. 김구에 대한 순영의 사랑도 특이한 점이 있었다. 그는 常民인데다가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외아들을 농사꾼을 만들지 않고 어떻게든지 공부를 시키려고 갖은 정성을 쏟았다. 과거에 낙방하여 절망하고 있는 아들에게 풍수공부나 관상공부를 하라고 권했고, 아들은 또 그 말에 따랐다. 아들이 東學에 입도할 때에는 아들을 따라 같이 입도했고, 동학운동에 실패하고 좌절한 아들이 스스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할 때에도 아들을 믿고 아무런 반대나 간섭 없이 정신적인 힘이 되어 주었다. 아들이 옥살이를 할 때에는 내외가 仁川에까지 와서 아들의 옥바라지를 했다.
 
  이러한 아버지의 시신을 안고 앉은 김구는 복받치는 설움을 억제할 수 없었다. 순영이 살아 생전에 양반에게서 받던 온갖 멸시와 학대를 면하게 해주고자 했던 김구의 노력은 이제 허사가 되고 말았다. 이때의 자신의 심경을 김구는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적고 있다.
 
  〈아버님께서 운명하시기 전날까지도 나는 평생 친구인 유완무나 성태영을 만나 그들의 주선으로 연산으로 이사했다면, 백발이 성성한 아버님이 이웃 마을 강씨나 이씨에게 늘 상놈 대우를 받아 뼈에 사무치는 아픔을 겪는 일만은 면하게 되셨을 텐데 하고 아쉬워했다. 이제 아주 먼 길을 떠나시고 말았으니 천고에 남을 한이 되고 말았다.〉25)
 
  이러한 고백에서 느낄 수 있는 김구의 양반 콤플렉스는 거의 일생 동안 불식되지 않았다.
 
 
  成泰英은 500리 길을 말을 타고 와서 조문해 주어
 
 
  원근에서 조객들이 찾아왔다. 눈바람이 뼈에 사무치는 추위였다. 김구는 뜰에 빈소를 차리고 조문을 받았다. 독신상주라서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살을 베어만 놓고 떼어내지 못한 허벅지의 고통이 심했으나, 김구는 어머니가 걱정할 것을 염려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찌나 아프던지 그는 조객 오는 것조차 괴로웠고 허벅지살을 벤 것이 후회스럽기까지 했다.
 
  김구는 유완무와 성태영에게 부고를 하고 이사는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서울에 머물고 있던 성태영이 500여 리 길을 말을 타고 와서 조문해 주었다. 그는 마부와 말은 먼저 돌려보내고 김구의 집에서 며칠 묵었다. 김구는 성태영에게 구월산 구경을 시켜주기 위해서 그를 나귀에 태우고 동학농민군 시절에 스승으로 삼았던 월정동의 宋宗鎬26)의 집을 찾아갔다. 貝葉寺(패엽사)에서 동학군을 훈련할 때에 謀主(모주)였던 부산동의 鄭德鉉도 불렀다. 송종호의 집에서 정성껏 장만해 주는 음식을 먹으면서 그동안에 쌓인 회포를 풀었다. 성태영은 구월산의 빼어난 경치를 구경한 뒤에 돌아갔다.
 
  김구는 순영의 묘자리를 직접 골라서 텃골 오른쪽 산기슭에 안장했다. 상중에는 칩거하여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준영 삼촌의 농사일을 도와 주었다. 이런 조카의 모습을 본 준영은 매우 기특하고 다행스럽게 생각하여 김구에게 200냥을 주면서 인근에 사는 상민의 딸과 혼인하라고 했다. 준영은 아버지가 없는 조카의 혼사를 책임지는 것은 삼촌된 자신의 당연한 의무요, 영광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김구는 상민의 딸은 고사하고 정승의 딸이라도 재물을 따지는 혼인은 죽어도 하지 않겠다면서 거절했다. 화가 난 준영은 낫을 들고 김구에게 달려 들었고, 김구는 놀란 곽씨 부인이 가로막는 틈을 타서 도망쳤다.
 
  1902년 새해가 되어 김구는 여기저기 친척들 집에 세배를 다녔다. 長淵(장연) 茂山(무산)의 먼 친척 집에 들렀을 때였다. 친척 할머니는 김구가 나이 스물일곱이 되도록 아직 장가를 들지 못한 것을 보고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는 친척 할머니에게 말했다.
 
  『제 중매는 할 사람도 쉽지 못하고 제게 딸을 주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설혹 있다 해도 제가 장가를 들 마음이 생길 만한 처녀가 있을지도 의문이구요』
 
  친척 할머니는 웃으면서 물었다.
 
  『자네의 뜻에 맞는 처녀란 어떤 처녀인가?』
 
  김구는 대답했다.
 
  『첫째 재산을 따지지 않아야 하고, 둘째 학식이 있어야 하고, 셋째 상면하여 대화를 해보고 서로 마음이 맞으면 결혼하는 것입니다』
 
 
  먼 친척 할머니 중매로 장연 처녀와 약혼
 
 
  스승 高能善의 손녀딸과의 약혼이 깨어진 아픈 상처를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김구가 어떤 일이 있어도 맞선을 보고 자신의 의지로 배우자를 선택하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맞선을 보자는 김구의 주장은 중매가 보편적이던 당시의 풍습으로는 여간해서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친척 할머니는 첫째와 둘째 조건에는 이의가 없었으나 맞선을 보자는 조건에는 매우 난색을 했다. 김구가 물었다.
 
  『할머님 어디 좋은 혼처가 있습니까?』
 
  『내 친정 당질녀(사촌의 딸)가 올에 열일곱인데, 홀어미를 모시고 지낸다네. 약간 학식은 있고, 아무리 가난해도 재산을 따지는 것은 옳지 않게 안다네. 마땅한 남자가 있으면 허혼하겠다는 형님의 말은 들었으나, 어떤 기준으로 사윗감을 고르는지는 알 수 없으니 내가 먼저 알아보겠네. 하지만 자네 말처럼 대면하여 속내를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일일 것 같구먼』
 
  『그렇게 어렵게 생각한다면 저와 혼인할 자격이 없겠지요』
 
  『내가 일찍이 형님한테 자네의 인격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형님이 한번 자네를 데리고 자기 집에 와 달라고 부탁했네. 같이 가보겠나?』
 
  『오늘 가면 처녀를 만나게 해 주신다면 가겠습니다』
 
  이때에 김구의 약혼을 주선한 사람에 대해 「백범일지」는 무산의 먼 친척 할머니라고만 했는데, 그 친척 할머니는 은율 지방의 3·1운동을 주도한 朴景俊(박경준)의 어머니 黃氏였다고 한다.27)
 
  김구는 친척 할머니를 따라서 목감면의 텃골(基洞) 조그마한 오막살이 집에 도착했다. 그 집 늙은 과부댁은 아들 없이 딸만 넷을 두었는데, 위의 세 자매는 모두 시집을 보내고 막내 딸 如玉만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여옥에게는 글은 근근이 국문을 가르쳤을 뿐이고 바느질과 길쌈을 주로 가르쳤다고 했다.
 
  김구는 안방에서 저녁을 먹고 나서 친척 할머니의 소개로 과부댁에게 절을 했다. 인사를 시키기에 앞서 친척 할머니는 김구의 결혼조건을 말해 준 모양이었다. 세 사람은 부엌에서 한참 동안 상의를 하는 눈치였다.
 
  친척 할머니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거의 자네 말대로 되었으나 규중처녀가 어찌 모르는 남자와 대면을 하겠나? 처녀가 병신이 아닌 것은 내가 담보할 터이니 대면은 좀 면해 주게』
 
  『대면은 꼭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만나서 얘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혼인할 생각이 있으면 조건 한 가지가 또 있습니다』
 
  친척 할머니는 웃으면서 물었다.
 
  『조건이 또 있어? 어디 들어보세』
 
  『다른 것이 아니구요. 지금 약혼을 한다해도 제가 탈상을 한 뒤에야 혼인을 할 터이니, 그 동안에는 낭자가 나를 선생님이라고 하고 漢文공부를 정성껏 하다가 탈상한 뒤에 혼례를 올린다는 조건을 이행해야 합니다』
 
  『여보게, 혼인하여 데려다가 공부를 시키든지 무엇을 하든지 자네 마음대로 하면 될 것 아닌가?』
 
  『거의 일 년 동안의 세월을 허송할 필요가 있습니까?』
 
  늙은 과부댁과 친척 할머니는 빙긋이 웃고 무슨 말을 주고 받더니 이윽고 친척 할머니가 처녀를 불렀다. 한두 번 불러도 아무 기척이 없자 과부댁이 친히 불렀다. 처녀는 가만가만 걸어 들어와서 자기 어머니 뒤에 앉았다. 김구가 처녀에게 먼저 인사를 했으나 처녀는 아무 대답을 못 했다. 김구가 물었다.
 
  『나와 혼인할 마음이 있소? 그리고 혼례를 올리기 전에 내게 학문을 배울 생각이 있소? 할머님 말씀은 혼례를 치른 뒤에 공부를 시키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지만은 지금 세상에는 여자라도 무식하고서는 사회에서 용납할 수 없고, 또 여자의 공부는 스물 이전이 적당한데, 일 년 동안이라도 그저 허송하는 것은 옳지 않소』
 
  처녀의 말소리가 김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으나, 친척 할머니와 처녀의 어머니는 처녀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한다고 말했다. 조금은 당돌한 이러한 태도에서 우리는 이무렵 김구의 여성관과 결혼관을 엿볼 수 있다. 인천감옥에서 新서적을 읽고 개화론자가 된 뒤로는 여성과 결혼에 관한 가치관도 크게 바뀐 것이다. 자신의 배우자는 新女性의 소양을 갖추어야 했다. 이렇게 하여 如玉과의 약혼이 성립되었다.
 
  친척 할머니 집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집으로 돌아온 김구는 곽씨 부인과 준영 삼촌에게 약혼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준영은 선뜻 믿으려 하지 않고 곽씨 부인더러 직접 그 집에 가서 처녀도 만나보고 약혼 여부도 알아보고 오라고 했다. 곽씨 부인이 처녀집을 다녀온 뒤에야 비로소 준영은 『세상에 참 어수룩한 사람도 다 있다』 하고 탄식조로 인정했다.
 
  김구는 서둘러 「女子讀本」 같은 책자를 대충 만들고 지필묵까지 준비해 가지고 가서 여옥을 가르쳤다. 이때에 김구가 약혼녀를 가르치기 위해 만든 책자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하다. 친척 할머니와 如玉의 어머니에게 자기가 탈상을 하고 혼인할 때까지 如玉이 漢文을 정성껏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 책자에는 「童蒙先習」과 같은 초보적인 한문교본의 내용과 아울러 신학문의 지식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한 책자를 자기 손으로 만들어 가지고 가서 약혼녀를 가르치는 노총각 김구는 새로운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다.
 
 
  약혼녀 가르치며 新敎育運動 준비
 
 
  이무렵 김구는 집안 일을 돌보는 한편 아버지의 탈상 뒤 신교육운동에 헌신할 결심을 하고 장련, 은율, 문화 등지로 다니면서 禹鍾瑞, 宋宗鎬, 許坤(허곤), 「김선생」, 金泰星(김태성), 張義澤(장의택), 吳寅炯(오인형), 鄭昌極(정창극) 등 신교육운동에 관심 있는 인물들을 만나고 있었다.28) 우종서와 송종호, 허곤은 김구와 함께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했던 구월산의 옛 동지들이었다.
 
  한편 오인형은 농민전쟁 때에 농민군을 토벌하는 데에 앞장섰던 장련의 부호였다. 동학농민전쟁 시기에 적으로 대립했던 사람들이 이처럼 신교육운동을 위해서 손잡고 있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김선생」은 본명이 孫景夏(손경하)로서 원산 사람이었다. 개화파에 가담했던 그는 박영효의 동지들과 여러 해 동안 일본에 머물다가 귀국했는데, 정부에서 체포령이 내리자 구월산으로 피신하여 우종서, 송종호 등의 보호로 숨어살면서 孫泳坤(손영곤)이라는 가명으로 행세하고 있었다. 그는 뒷날 장련 光進(광진)소학교가 설립될 때에 김구와 함께 교사로 활동한다. 같이 광진학교 교사로 활동했던 白南薰은 손영곤의 본명이 金洛現이라고 기억했다. 뒷날 장련 교육운동의 핵심적인 인물이 되는 그는 아이들에게 남의 글인 한문을 그만두고 국문을 가르칠 것을 역설했는데, 장련 청년들은 이러한 그를 열렬하게 지지했다.29)
 
  김구보다 열네 살 위인 장의택은 장련의 선비 집안 사람으로서 구학문에 조예도 있고 신학문에 대한 포부도 해서지방에서 으뜸이었다. 그는 황해도 지방에서는 최초로 큰아들 膺震(응진)을 서울·일본·미국으로 유학시켰는데, 일본에 직접 학비 송금이 되지 않던 때였으므로 배를 타고 인천까지 가서 일본영사관을 통해서 아들의 학비를 송금하는 유명한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다.30) 그리하여 그는 구식 양반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국민에게 신학문 지식을 보급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각오하고 열심으로 활동했다.31)
 
  정창극은 장연군의 首吏(수리: 서리의 우두머리)였는데, 김구 등과 의기투합해서 자주 만났던 것 같다.
 
  김구가 탈상한 뒤에도 서울에 가서 유안무 등과 어울리면서 공부를 하지 않고 고향에서 신교육운동에 헌신할 결심을 하게 된 데에는 이러한 사람들의 설득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봉양과 가사문제도 현실적으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신변에 대한 걱정이 없어졌을 수 있다는 점이다. 三南 地方을 방랑한 것이나 승려생활을 한 것 등은 말하자면 탈옥수의 피신 행각이었는데, 급변하는 정국의 추이에 따라 김구에 대한 한국 정부와 日本 쪽의 추적이나 관심이 이때쯤은 없어졌던 것 같다.
 
 
  약혼녀 시신을 손수 염습해 묻어
 
 
  김구는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으므로 약혼녀의 집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가르칠 형편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틈만 있으면 여옥을 찾아가서 가르쳤다.
 
  탈상을 하자 곽씨 부인은 아들의 혼례준비를 서둘렀다. 김구는 정초에 무산의 먼 일가 할아버지 집에 세배를 갔다. 세배를 하고 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에 여옥이 위중하다는 급한 기별이 왔다. 김구는 깜짝 놀라서 약혼녀의 집으로 달려갔다. 김구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여옥은 병세가 위중한 가운데서도 매우 반가워했다. 병은 長感(장감: 만성감기)이었는데, 약을 쉽게 구하기 힘든 산중이라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여옥은 약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이삼일 만에 죽고 말았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다. 여옥의 죽음은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던 김구에게 또다시 크나 큰 마음의 상처를 안겨 주었다. 그는 여옥을 가리켜 「未婚妻」(결혼하지 않은 아내)라고 표현했는데, 그만큼 如玉은 그가 구상하는 새로운 삶의 반려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김구는 여옥의 시신을 손수 염습하여 남산에 묻어 주었다. 그리고 여옥의 어머니는 金洞의 金允五 집으로 안내하여 기독교를 믿게 했다. 김구는 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러운 소식을 듣고 오던 곽씨 부인을 만나서 모시고 도로 집으로 돌아왔다.32)
 
  금동의 金允五는 장연 지방의 기독교계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1897년 6월에 소래(松川)에서 청년들 25명이 모여 長淵協成會를 결성할 때에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었다.33) 그리고 소래는 우리나라에서 改新敎敎會가 맨 먼저 설립된 곳이기도 하다. 김구가 의탁할데 없게 된 약혼녀의 어머니를 맡길 만큼 김윤오와 친분이 있었다는 것은 이무렵에 이미 그가 기독교 관계 인사들과 가까이 사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탈옥 뒤의 오랜 방황과 뒤이어 닥친 아버지와 약혼녀의 죽음 등 짧은 기간에 거듭된 시련을 고려하면 김구가 기독교에 입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김구가 동학과 불교에 입문하는 동기와 과정은 「백범일지」에 상세히 적고 있으면서, 자신의 일생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친 기독교에 입교한 동기에 대해서는 특별한 설명이 없는 것은 의아스러운 일이다. 「백범일지」는 동학농민전쟁 이래의 동지로서 傳道助事가 되어 있던 禹鍾瑞의 적극적인 권유로 〈탈상 뒤에 예수도 믿고 신교육을 장려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34)고만 간략하게 적고 있다. 전도조사란 오늘날의 전도사와 같은 준교역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했던 우종서가 기독교에 입교한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는 1901년에 은율의 계림리교회를 설립할 정도로 일찍부터 기독교에 입교하여 전도활동에 열심이었다. 그는 1910년에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3·1운동 때에는 배후에서 지원했으며, 1920년에 구월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무장 항일운동 단체 大韓獨立團을 도와 주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35)
 
  그러나 「백범일지」의 다음과 같은 서술은 김구의 기독교 인식과 입교동기를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시사를 준다.
 
  〈평안도는 물론이고 황해도에도 신교육의 풍조는 예수교로부터 계발되었다. 신문화발전을 도모하는 사람은 거의가 기독교에 투신하여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만 지키던 것이 겨우 서양 선교사들의 혀끝으로 바깥 사정을 알게 되었다. 예수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류 이하로서, 실제 학문을 배우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이지만, 선교사의 숙달치 못한 반벙어리 말이라도 문명인이 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 말을 많이 들은 사람들은 신앙심 이외에 애국사상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애국사상을 지닌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교 신봉자임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36)
 
  김구는 1903년 가을에 기독교에 입교했다.37) 그해 11월에 헌트(W. B. Hunt: 한국명 韓衛廉) 목사가 한 달 동안 황해도 지방을 순회하면서 110명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김구도 이때에 세례를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38)
 
 
  西北 地方에서 基督敎가 급속히 전파돼
 
 
  18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수용된 개신교는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1885년부터 1910년까지 우리나라에서 683개소의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 가운데에서 서북지방이 362개소(평북 98, 평남 162, 황해도 102)로서 과반수를 넘어서고 있다.39) 또한 1898년 북장로회의 평양선교 보고서의 통계에 따르면, 전체 장로교인 7500명 가운데에서 평안도와 황해도 교인수가 5950명으로서 전체 교인의 79.3%를 차지하고 있다.40) 특히 황해도는 한국 개신교 최초의 교회인 장연 소래(松川)교회가 설립된 「한국 개신교의 요람」으로 불릴 만큼 평안도 지방과 함께 일찍부터 서쪽 해안선을 중심으로 활발한 선교활동이 전개된 고장이다.
 
  서북 지방에서 기독교가 급속히 전파될 수 있었된 것은 조선왕조 초기부터 오랫동안 지역적 및 신분적 차별을 받아왔던 역사적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 서북 지방은 오랜 기간의 차별대우로 말미암아 정치적으로 소외되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반상차별의 유교적 전통이 약했으며, 활발한 상업활동으로 새롭게 성장한 이른바 「自立的中産層(independent middle class)」41)은 기존질서를 대체할 새로운 이데올로기로서 기독교를 수용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이들은 영혼의 구원이라는 신앙적 차원보다는 기독교를 통하여 나라의 모든 모순을 타파하고 개화를 이룩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42)
 
  선교사 샤프(C. C. Sharp)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그러한 사정을 여실히 설명해 준다.
 
  〈기독교를 찾는 사람 가운데에는 그 중요 동기가 보호와 힘의 획득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좀더 정직한 동기라고 볼 수 있는 것은 … 기독교국이 대개 다 강대국인 것을 보고, 그 고도의 문명과 문화에 끌려 개종하는 것이라 보겠다. 그러나 정신적인 본래의 기독교와 기독교가 가지게 된 힘 그것과의 차이를 이들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영적 이야기를 하면 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만다.〉43)
 
 
  영적 구원보다 社會改革 바라 改宗
 
 
  이처럼 대체로 일반민중은 생명과 재산의 보호를 위한 수단으로 기독교에 입교했고, 지식인들은 문명과 개화의 수단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전후에 기독교인의 수가 급증한 것이 그러한 사정을 말해준다.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불안한 민중들은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교회를 찾았던 것이다. 실제로 전쟁 와중에서 교회는 민중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는데, 그러한 현상은 두 전쟁의 직접 피해지였던 서북 지방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지식인들은 서유럽 여러 나라들이 문명 부강한 것은 기독교를 믿기 때문이라고 보고 한국도 하루속히 기독교를 믿고 개화하여 부강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에 입교하는 사람들은 문명과 기독교를 같은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김구는 물론 이른바 자립적 중산층은 아니었으나 기존질서의 타파를 열망하는 점에서는 이들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입교동기도 죽음의 공포에서 영혼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찾은 李承晩의 입교동기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따라서 일찍이 체험한 동학이나 불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역시 순수한 종교적 차원에서는 김구에게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회운동의 측면에서 김구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는 김구가 열성적인 전도활동과 신교육운동을 통하여 민족운동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기반이 된다.●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15)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1) 다시 帝國新聞 논설쓰며 尙洞靑年學院 설립
 
  李承晩은 자서전 초고에서 〈내가 감옥에서 석방되었을 때에 선친은 무척 기뻐하셨다〉1)고 특별히 적고 있다. 그러나 그의 출옥을 기뻐한 것은 물론 가족들만이 아니었다. 일찍이 독립협회 회장이었다가 外部協辦이 되어 있던 尹致昊가 李承晩이 출옥한 이튿날 그를 찾아갔다가 李承晩의 英語실력이 크게 향상된 것을 보고 「놀라운 청년」이라고 격찬한 것은 앞에서 본 대로이다.
 
 
  培材學堂에서 환영예배
 
 
  李承晩의 출옥을 한국인들보다도 더 기뻐한 것은 그의 옥중생활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면서 석방운동을 벌여온 외국선교사들이었다. 헐벗(Homer B. Hulbert)이 펴내고 있던 월간지 「코리아 리뷰」는 李承晩의 출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5년 너머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줄곧 외국인 친구들의 걱정거리가 되어온 李承晩이 마침내 석방된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외국인 친구들은 李承晩이 오래 전에 석방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지은 죄가 더 크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2)
 
  그들은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출옥한 李承晩이 이제 한국교회를 위해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코리아 리뷰」의 이러한 보도와는 대조적으로 「皇城新聞」은 「제국신문」 사장 李鍾一의 석방기사에 이어 〈연전 獨立協會시에 被囚(피수)하야 징역 15년에 처해졌던 李承晩씨도 蒙放(몽방)되었더라〉고 간단히 사실보도만 하고 있다.3)
 
  며칠 뒤에 배재학당에서 李承晩의 출옥을 환영하는 예배가 열렸다. 오전 11시쯤 에 때아닌 채플 종소리가 울렸다. 학생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 강당으로 모여들었다. 강당에는 벙커(Dalziel A.Bunker) 校長이 낯선 젊은이와 함께 서 있었다. 젊은이는 홑적삼 바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에서는 어떤 위엄이 느껴졌다.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번져갔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승만이다!』
 
  벙커의 소개를 받은 李承晩은 단상에 올라 후배들을 앞에 두고 말을 시작했다. 벅찬 감격에서 우러나는 그의 신앙간증은 젊은 배재학당 학도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학도들은 거의가 李承晩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만일에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감옥에는 여름의 물것, 겨울의 추위밖에는 없었습니다. 밤이면 감방문 사이로 스며드는 가느다란 장명등의 불빛뿐 보이는 게 없었습니다. 한번은 돌림병이 와서 죄수들이 모두 죽어나가고, 나는 겨우 살았으나 탈황증으로 아주 죽을 뻔 했습니다. 이 어려운 가운데 무릎을 꿇고 기도할 양이면 하나님이 오셔서 내 머리에 두 손을 얹으시고 나와 같이 기도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리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무쪼록 살아계신 하나님을 잘 믿고 그와 같이 행하십시오』4)
 
  배재학당에 다니면서도 그때까지 예수를 믿지 않았던 尹聲烈이 기독교에 입교하여 牧師로서 평생을 교회운동에 헌신하게 된 것은 바로 이때에 李承晩의 감동적인 연설을 들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날 그러한 감명을 받은 것은 尹聲烈 한 학생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日本의 한국 황무지개척권 요구 반대운동
 
 
  李承晩이 출옥하고 나서 1904년 11월4일에 미국으로 떠나기까지 석 달 동안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徐廷柱는 李承晩이 출옥하자마자 〈별 휴양할 겨를도 없이 종로에 있는 기독교청년회에 나가 그 총무의 일을 맡아보는 한편, 앞으로 그의 걸어나갈 진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았다〉고 적고 있다. 1903년에 조직된 皇城基督敎靑年會(YMCA)에는 李承晩에 앞서 출옥한 李商在 등 옥중동지들이 대거 가입하여 막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물론 출옥한 李承晩이 옥중동지들을 만나러 그곳을 찾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나, 총무직을 맡아 일을 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황성기독교청년회는 1904년 후반기에 부서별로 한국인 간사들을 임명하면서, 수석간사로는 李承晩의 옥중동지인 金貞植을 임명했다.5)
 
  이승만은 외국선교사들과도 시국문제와 함께 자신의 진로문제를 논의했다. 그는 蓮洞(연못골)교회의 게일(James A. Gale) 목사를 찾아가 그에게서 세례를 받고자 했다. 감리교회 교인인 李承晩이 교파를 떠나 장로교회 선교사인 게일에게서 세례를 받고싶어 한 것은 그만큼 게일과 친숙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일은 이승만에게 미국유학을 강력히 권유하고 세례도 미국에 가서 받으라고 말했다.
 
  李承晩이 출옥하기 직전부터 서울에서는 日本人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저지하기 위해 1904년 7월13일에 조직된 輔安會(保安會라고도 했다)를 중심으로 활발한 반대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러-일전쟁의 개전과 동시에 戰時中立을 선포한 韓國 정부를 위협하여 2월23일에 군사동맹을 골자로 한 이른바 韓日議定書를 맺은 일본은 그것을 근거로 하여 새로운 對韓經營方針을 마련하고 그 일환으로 6월 들어 전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해 온 것이었다.6)
 
  보안회의 활동은 종로네거리에서 대중집회를 개최하는 등으로 독립협회와 萬民共同會의 자주민권운동을 방불케 했다. 이러한 반대운동은 地方에까지 파급되었다. 정부에서는 日本의 항의도 있는데다가 治安문제를 고려하여 해산을 종용했으나 집회는 장소를 典洞의 漢語學校로 옮겨서 계속되었다.
 
  일본은 이러한 상황을 역이용하여 軍事警察을 실시할 것을 일방적으로 한국정부에 통고하고 보안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附日團體인 一進會가 발족한 것은 이러한 와중인 1904년 8월20일의 일이었다.
 
  일본군의 군사경찰 실시로 보안회는 해체된 듯했으나, 집회만 하지 않았을 뿐 9월11일에 協同會의 이름으로 새로 조직되었다.7) 보안회는 회장에 전 중추원 의관 宋秀晩, 부회장에 시종 元世性 등을 내세우고 있었는데, 協同會로 개편되면서는 회장 李相卨, 부회장 李儁 등으로 실제 주동자들이 표면에 나섰다. 이들은 정부의 실력자인 閔泳煥의 내밀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때에 評議長 李商在, 서무부장 李東輝, 지방부장 梁起鐸, 재무부장 許蔿와 함께 李承晩은 편집부장으로 발표되었는데,8) 실제로 李承晩이 協同會 활동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대한 반대운동이 政府大臣으로부터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참여하는 救國運動으로 확대하자 日本은 8월에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철회했다. 그리고 協同會는 일본군의 무력탄압으로 와해되었으나 그 뿌리는 뒤이은 愛國啓蒙運動의 중심세력으로 발전했다.
 
 
  다시 「帝國新聞」의 「논설」집필
 
 
  李承晩이 출옥하고 나서 시작한 일은 옥중의 부자유스러운 상황에서도 심혈을 기울였던 「帝國新聞」9)의 「논설」을 다시 집필하는 것이었다.「帝國新聞」은 軍部의 代辦砲兵局長이기도 했던 사장 崔岡(최강)이 일본에서 도입한 군함 揚武艦의 가격과 관련된 수뢰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됨에 따라 사임하고 1903년 6월에 다시 李鍾一이 사장이 되어 있었는데,10) 李鍾一은 1904년 3월에 필화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李承晩과 같이 석방되었다. 이때에 李鍾一이 李承晩에게 「帝國新聞」의 「논설」을 다시 집필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무렵에 「帝國新聞」은 논설기자(주필)를 구하지 못하여 고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李承晩이 출옥한 뒤의 「帝國新聞」은 일실된 부분이 너무 많아서11) 그가 다시 「帝國新聞」의 「논설」을 집필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출옥한 李承晩이 「帝國新聞」의 「논설」을 집필한 사실은 10월4일자 「좋은 사업들의 성취함」이라는 「논설」에 명백히 드러나 있다.
 
  이 「논설」은 蓮洞교회의 敎育會 사업과 李承晩 자신도 관여하고 있던 尙洞교회의 엡워스靑年會가 주동하여 벌이는 靑年學院 설립사업과 함께 아펜젤러가 사망한 뒤에 배재학당에서 추진해 온 추모사업의 의의를 강조하고 많은 유지자들의 참여를 촉구한 내용이었는데, 글 가운데 자신이 옥중에 있을 때부터 추진된 아펜젤러 추모사업을 설명하면서 〈본 기자가 자유에 있지 못하야 의연히 성명을 드러내지 못하고…〉12)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이 「논설」의 집필자가 李承晩이었음을 입증해 준다.
 
 
  「일본정책에 대한 대강 의견」
 
 
  「帝國新聞」의 논설을 다시 쓰게 된 李承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시국과 관련하여 日本의 對韓정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그의 美國行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올리버는 李承晩이 출옥한 뒤에 옛 동지들을 만났더니 그들은 일본의 對러시아전 승리를 열렬히 반기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동양국가가 서양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 러시아의 봉건적 후진성에 비해 일본은 산업화에 성공한 것 등이 그 이유였다는 것이다.13) 그리고 이보다 앞서 옥중에서 받은 徐載弼의 4월6일자 편지도 다음과 같이 日本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日本은 정의의 편에 서서 모든 文明人들이 존중해야 할 원칙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하고 있소. 나는 하나님이 정의와 문명을 위해 싸우는 나라와 함께 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라오.… 한국이 스스로를 돕지 않고 다른 나라의 도움도 받으려고 하지 않는 한 일본이나 그 밖의 어떤 나라도 한국을 도울 수 없소. 한국이 어린 아이 같은 행동을 계속한다면 틀림없이 다른 나라에 병합되고 말 것이오.〉14)
 
  이처럼 당시의 개화파 지식인들의 日本에 대한 호의와 기대는 러-일전쟁 동안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무렵의 李承晩의 일본관은 「일본정책에 대한 대강 의견」이라는 「논설」에 표명되어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옥중에서 쓴 「독립정신」에 피력되어 있는 것과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다.
 
  일본은 한국정부를 강압하여 또 다시 8월22일에 이른바 韓日協定書(제1차 韓日協約)를 맺어, 2월23일의 韓日議定書에서 규정한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의 약속마저 어기고 한국정부의 財政權과 外交權을 日本에 종속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것은 한국을 保護國으로서 경영했던 顧問政治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논설」은 〈일본이 한국을(에) 대한 정치상 방침을 보건대 아직도 질정(質定:확고하게 정함)한 뜻이 없는 듯하도다〉라고 전제한 다음,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본의 정치는 언제나 미국과 영국의 의견을 토대로 해서 행하여지는데, 지금 일본의 對韓정책은 〈한편으로는 대한을 위한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대한을 그저 둘 수 없다고도 하며, 한편으로는 전쟁 결말을 기다린다고도 하야 이럭저럭하는 중에서 날마다 자기에(의) 취할 이익은 급급히 경영하야 쉬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하고, 이와 관련된 몇가지 풍문을 소개했다.15)
 
  먼저 한국사람들이 지금의 일본을 갑오년(1894년) 이전과 같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잘못이라고 어떤 일본 정치가가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진정으로 호의를 가졌으나… 번번이 그러할 까닭이 없으니〉 너무 바라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어 그는 다음과 같이 흥미 있는 이야기를 적고 있다.
 
  〈어떤 서양친구는 말하기를, 일본 외교가에서들 각국을(에) 대하야 사사로이 설명하기를 일본이 장차 한국을 대접하기를 미국이 필리핀 섬을 대접하듯 하야 백성을 많이 교육시켜 자주하여 다스릴 만치 되거든 독립을 시키겠노라 하였으매, 각국에서 일본 외교가들을 착실히 믿으나 일본사람 중에도 좋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즉, 두루 한국의 염려라 하며…〉
 
  이 이야기는 뒷날 얄타會談에서 루스벨트가 한국에 대한 信託統治 문제와 관련하여 스탈린에게 미국의 필리핀 통치경험을 보기로 든 일을 연상시키는데, 이러한 풍문을 소개하면서 이승만은 이상하게도 별다른 논평을 하지 않고 있다.
 
  16세기 중엽부터 약 350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 아래 있었던 필리핀은 미-스페인전쟁이 있던 1898년에 獨立을 선언했다. 그러나 전쟁에 승리한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이른바 「慈善同化宣言」을 발표하여 1942년 日本軍에 점령당할 때까지 약 40년 동안 필리핀을 통치했는데, 러-일전쟁 무렵에는 필리핀에 대한 식민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주력하고 있었다.
 
  李承晩은 또 다음과 같이 적기도 했다.
 
  〈혹 어떤 친구들은 말하기를, 이렇듯 아름답고 좋은 나라를 남이 와서 임의로 취하야 자기 것같이 만드는 것을 보기에 눈물이 나는지라. 아직은 각국이 아무 말 아니하고 모른 체하나, 그러하나 마침내 의논이 생겨 과히 불공한 일은 행치 못하게 되리라 하는지라.〉
 
  이러한 言說은 李承晩이 이때까지도 日本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거나, 혹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이때는 이미 은밀히 美國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암시적으로만 표현했을 뿐인지 모른다.
 
 
  日本軍憲兵司令部에서 「帝國新聞」을 무기정간시켜
 
 
  이처럼 특별히 눈에 띄게 반일적인 논조는 펴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帝國新聞」은 1904년 10월10일에 駐韓日本軍憲兵司令部에 의해 무기정간 처분을 당했다. 정간 이유는 10월7일자 「논설」의 내용이 〈일본 군사상에 방해요, 한일 양국 교제에 방해요, 치안에 방해되는 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16)
 
  문제가 된 「논설」은 공교롭게도 현재 보존되어 있지 않아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李承晩이 집필했던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것은 5일자의 「남의 다스림을 자취하는 나라」라는 「논설」이 일본인 재정고문의 부임과 관련하여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근일에 탁지고문관(度支顧問官)이 새로이 나왔다는데, 혹은 고문관이 아니라 재무감독이라고도 하며, 혹은 가라대 이름은 고문이나 특별 권리가 있으니 곧 정부의 상전이라고도 하는지라. 대소 관원들이 그 고문관을 무이(無異:다름아닌) 탁지부 주장으로 알아 지금은 아무 것도 우리들의 임의로 할 수 없다 하며, 재정을 정돈한다 하야 혹 심방도 자주 하며 전에 없던 정의도 친근한 모양이라. 실로 가소로운 세상도 많도다.…〉17)
 
  이 「논설」은 그 동안 신문이나 외국인들이 줄기차게 財政改革을 권고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듣지 않다가 이렇게 되었다면서 〈이는 위에 있는 이들이 자기 손으로 일들 하야 남의 상전되기를 억지로 면하고 기어이 종이 되어 굽실거리는 어리석음이어니와…〉라고 지도층을 비꼬았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들에 대해서도 稅金을 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 사용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가 이러한 상황을 맞이했다면서 〈세상에 이만치 어리석고 이만치 하등에 가는 백성의 일이 어디 다시 있으리요〉라고 개탄했다.
 
  이른바 한일협정서(제1차 한일협약)는 日本政府가 추천하는 일본인 한 사람을 韓國政府가 財政顧問으로 용빙하여 재정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그의 의견에 따라 시행하게 하고, 또한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外國人(西洋人) 한 사람을 外交顧問으로 용빙하여 外務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그의 의견에 따라 시행하도록 규정했다.
 
  이에 따라 일본 大藏省主稅局長 출신의 메카다 타네타로(目賀田種太郞)라는 일본인이 재정고문으로, 그리고 일본 외무성 고용원 스티븐스(Durham W. Stevens)가 외교고문으로 용빙되었다. 「帝國新聞」의 10월5일자 「논설」은 이날부로 부임하는 재정고문 용빙에 대한 비판이었으므로 9일자 「논설」은 아마 외교고문 용빙에 대한 비판이었는지 모른다. 실제로 스티븐스 용빙계약이 체결된 것은 두달 뒤인 1904년 12월27일이었지만.
 
  이때의 「帝國新聞」 정간은 우리나라 신문사상 최초의 강제 정간이었으며, 일본이 한국 민간지에 가한 최초의 직접적 탄압이었다.18)
 
  일본 헌병사령부는 10월31일에 정간을 해제했으나 「帝國新聞」은 재정난 때문에 李承晩이 미국으로 떠난 뒤인 11월9일에야 속간되었다.
 
 
  尙洞敎會와 엡워스靑年會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출옥한 李承晩은 尙洞敎會靑年會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靑年學院을 설립하는 일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尙洞敎會는 1889년 가을에 감리교 의료선교사인 스크랜턴(William.B.Scranton)이 남대문 안에 세운 교회였다. 상동교회의 처음 이름은 達城敎會였고, 교인들은 거의가 중류층 이하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19) 상동교회는 1900년에 붉은 벽돌로 현대식 예배당을 신축했는데, 이 건물은 1898년에 세워진 貞洞敎會 건물에 이어 두 번째의 벽돌집 예배당이었다.20)
 
  독립협회가 강제해산된 뒤로 상동교회에는 이른바 尙洞派로 불리는 민족운동가들이 모여들어 이 무렵의 개화파 민족운동의 요람지가 되고 있었다. 교회 지하실의 넓은 공간이 그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李承晩이 투옥되기 전에 高宗을 폐위시키고 義和君을 새 황제로 옹립하여 정치개혁을 실시하려는 계획을 같이 추진했던 全德基, 朴容萬, 鄭淳萬 등은 상동교회 청년회의 중심인물들이었다.
 
  상동교회에는 1897년 9월5일에 한국에서 두 번째로 엡워스靑年會가 조직되어 있었다.21) 엡워스(Epworth)라는 말은 감리교 창설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가 출생한 영국의 지명인데, 그 이름을 딴 엡워스청년회가 1889년에 미국 오하이오州 클리블랜드에서 창설되었다.
 
  청년회의 목적은 청년들의 영적 훈련과 친교 및 봉사를 위한 인격의 수련이었다. 그 뒤로 미국 감리교가 선교되는 지역마다 엡워스청년회가 조직되었고, 한국에서도 1897년의 감리교 제13회 韓國宣敎年會에서 한 조이스(I.W. Joyce) 감독의 권면에 따라, 仁川內里敎에서 시작하여 전국의 감리교회에 엡워스청년회가 조직되어 갔다. 金九도 진남포 엡워스청년회의 총무로 활동하는 것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다.
 
 
  『敬天愛人하는 참 도로 근본을 삼아…』
 
 
  한동안 해체되기도 했던 상동청년회는 1903년에 전덕기를 중심으로 하여 새로 조직되면서 의욕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천민 출신으로서 스크랜턴 목사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기독교인이 된 전덕기는 스크랜턴의 지도로 尙洞敎會의 중심인물로 성장했는데, 이 무렵에는 전도사가 되어 스크랜턴을 대행하고 있었다.
 
  그는 고향의 양반출신 李東寧과 친구 周時經의 영향으로 독립협회에도 참여하여, 李承晩과 함께 활동하기도 했었다.22) 배재학당 때부터 李承晩과 각별한 친분관계에 있던 周時經은 자신이 속한 貞洞敎會보다도 尙洞敎會의 청년회 사람들과 의기투합해서 어울리고 있었다. 李承晩이 출옥하자 이들은 상동청년회의 역점사업으로 청년들의 교육기관 설립을 추진했다. 尙洞靑年學院의 설립이 그것이었다.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한 취지와 경위를 李承晩은 자세히 적어 「신학월보」에 기고했다.
 
  그는 먼저 이 학원이 설립된 것이 하나님이 한국을 버리지 않는 증거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초에 우리는 바라지도 못하고 경영(경험)도 없는 일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이들이 스스로 시작하여 이런 일이 점점 설시(設施)되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정녕 대한을 아직까지도 버리시지 않는 줄 알 것인즉, 우리의 바랄 것이 무궁한 줄로 압니다.〉
 
  이렇게 상동청년학원의 설립이 종교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전제한 그는 이 학원이 다른 官立이나 私立학교와 다른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나라에는 관사립 간에 학교가 한둘이 아니로되 사람노릇 하는 사람이 얼마나 났으며 나라에 유익함이 얼마나 되었소. 지금에 혹 학교에 보내라 하면 곧 버릴 곳으로 보내라는 줄 알게 되었으니, 이는 학교가 그른 것이 아니오 못된 것을 가르쳐 그런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의 재주만 가르치고 마음은 가르치지 못하는 연고이라.… 그러므로 이 학교는 먼저 경천애인(敬天愛人)하는 참 도로 근본을 삼아 마음을 닦고 도를 숭상하며 세상을 위하야 일하는 일꾼이 되기로 작정하야…… 학교 임원들과 각 교사들과 모든 학도들이 다 이 뜻을 위하야 부지런히 힘쓸지라. 장차 군민의 유조한 선비가 많이 생길 줄 기약하노니, 어찌 다른 학교와 함께 비교하오리까.〉23)
 
  곧 상동청년학원이 지향하는 교육방침은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全人敎育이었다. 의욕에 찬 회원들은 자체적으로 모금도 하고 또 각자가 친지들과 유지들에게 도움도 요청했다.
 
  그 결과 멀리 하와이에 유학하는 친구가 어려운 처지에서도 적지않은 돈을 보내오기도 하고 雲山광산의 유지가 돈을 보내오기도 했다.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각국의 외교관과 선교사 등도 호응하여 곧 700여 원이 모금되었다.24) 「연조록」에는 全德基와 朴容萬이 20원, 鄭淳萬은 5원, 가난한 李承晩은 2원을 연조한 사실이 적혀 있다.
 
  그러나 모금한 돈만으로는 교실과 교사진을 확보할 수 없었다. 교실문제는 스크랜턴이 상동교회 구내의 집 한 채를 빌려 기증함으로써 해결되었다.
 
  교사문제는 여자선교사 자격으로 와 있던 스크랜턴의 어머니와 헐벗이 각각 영어와 역사 과목을 맡겠다고 자원하여 웬만큼 어려움을 덜게 되었다. 全德基가 성경, 周時經이 국문을 맡았다. 李承晩은 이 학원의 校長으로 선임되었다.
 
  그가 尙洞靑年會의 의욕적인 사업으로 시작한 청년학원의 校長으로 선임된 것은 그의 신앙심과 교육에 대한 열성 및 감옥학교의 운영 경험 때문이기도 했고 또 그의 지명도가 학원설립을 추진하던 상동파 인사들 사이에서 대표성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尙洞靑年學院의 校長으로 선임돼
 
 
  상동청년학원은 개학도 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李承晩은 그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자부심과 의욕으로 가득 찬 말로 표현했다.
 
  〈개학날이 가까워오니 여러 사람이 자질(子姪)들을 데리고 와서 부탁하며 사람을 만들어 달라 합니다. 만일 사람 아닌 것을 데리고 와서 사람을 만들라 하면 혹 괴이치 않다 하련만은 사람을 데리고 와서 사람을 만들라 함은 이상치 않습니까. 다른 말이 아니라 사람은 사람이로되 다 되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이니, 이는 누구든지 가르치지 못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까.… 지금이라도 나라가 나라 노릇하자면 사람이 먼저 사람노릇을 하게 되어야 하겠고, 사람이 먼저 사람노릇하자면 가르치고 배우는 데 있으니, 대저 학교는 사람을 만드는 곳이요 또한 나라를 만드는 곳이라고도 하겠사외다.〉25)
 
  이처럼 그는 상동청년학원이 지향하는 人性敎育은 곧 나라를 만드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10월15일 오후 2시에 청년학원 개교식이 열렸다. 괴로웠던 옥중에서 감옥학교를 운영했던 李承晩에게는 특별히 감개무량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대문 중문과 대청 안에 청송 홍엽으로 아치를 만들어 세우고 국기를 달았다. 내외국 초청인사들과 학도들이 수백 명이나 되어 좁은 자리에 다 앉지 못했다.
 
  교장 李承晩이 먼저 개회사를 했다.『학교의 대지가 모든 학문을 다 하나님 공경하는 참 도로써 근본을 삼아, 청년으로 말하여도 벼슬이나 월급을 위하야 일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세상에 참 유익한 일꾼이 되기를 작정하자는 데 있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이어 청년회장 全德基가 청년학원 설립경위를 설명하고, 게일, 헐벗, 스크랜턴이 격려사를 한 다음 부교장 박승규와 교사 周時經, 그리고 학생대표로 유희경이 인사말을 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개교식이 끝나고 스크랜턴의 집에서 다과회가 열렸다. 그런데 이 자리에 목원(木原〔?〕)이라는 일본인 목사가 참가해서 축사를 했다.26) 러-일전쟁의 무대가 되고 있던 한국에 일본인 목사가 와 있었고, 또 尙洞靑年學院의 개교식과 같은 뜻깊은 행사에 일본인 목사가 초청되었다는 사실은 이 무렵의 개화파 지식인들의 일본관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일이다. 실제로 청년학원 설립에는 日本人들 가운데에도 연조(捐助)한 사람들이 있었다.27)
 
  李承晩은 청년학원의 운영이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핵심사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청년회가 교회의 주장은 아니오 교회가 청년회의 주장이로되 교회에서 이르지 못하는 곳을 이 청년회에서 미쳐 가서 모든 세상을 다 이끌어 교회에 들어오게 하자는 본의〉28)이므로 英國이나 美國에서 보듯이 청년회는 교회와 국가와 세계에 크게 유조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 이유로는 첫째 운동장과 오락기구 등 레크리에이션의 장소가 되는 것, 둘째 생계의 길을 가르치는 것, 셋째 도덕의 길을 널리 열어 놓는 것의 세 가지를 들었다. 청년학원은 바로 그러한 청년회의 이상을 구현하는 곳이었다. 청년학원의 개교식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당일 광경이 과연 굉장한지라. 주의 영광을 더욱 드러낼 만하니, 이는 우리가 다 감사히 여길 바이어니와, 이 일이 완전히 성립되기는 여러 동포들에게 달렸으니 위의 세 가지를 합하야 말할진대 체육과 지육과 덕육 세 가지를 합하야 교회의 앞길을 한없이 열어 주는 것이니, 이 일이 교회의 근본이라 할 수는 없으되 교회에 제일 유익한 일은 이 일에 지나는 일이 없는지라…〉29)
 
  따라서 학교의 이름을 「청년학원」이라고 한 데 대해서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곧 〈이 학교를 청년학원이라 한 것은 장차 청년들을 가르쳐 인재를 배양하자는 뜻도 합하되 상동교회 엡워스청년회에서 설시하는 학교인 고로 더욱 청년학원이라 하는 것이올시다〉고 그는 설명했다.30)
 
  초대교장 李承晩은 상동청년학원이 개교한 지 3주일 만에 美國으로 떠난다. 그러나 이 청년학원은 그가 떠난 뒤에도 全德基가 담당한 성경교육을 비롯하여, 周時經의 국문교육, 張道斌과 崔南善의 국사 교육, 南宮檍-玄楯 등이 담당한 외국어 교육, 군인 출신 이필수가 담당한 체육과 군사 교육, 그밖에도 音樂, 演劇 등의 예술 교육 등을 통하여 기독교 구국론에 입각한 민족신앙 교육의 산실이 되었다.31)
 
  이처럼 상동청년학원은 외국선교사들이 아닌 한국인들의 힘으로 세운 사립학교라는 점에서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평양의 大成學校와 같은 다른 사립학교의 설립모델이 되었으며, 1905년의 을사늑약을 계기로 하여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일어나는 新敎育運動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기 때문이다.32) 그런 점에서 李承晩은 한국의 민족교육에도 선구적인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33)
 
  (2) 外交文書와 소개장 19통 가지고 美國으로
 
  李承晩이 어떻게 상동청년학원이 개교한 지 3주 만에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李承晩 자신의 기록들도 부정확하거나 과장된 점이 있어 보인다.
 
  李承晩은 자서전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가 서울감옥의 문 밖으로 첫 걸음을 딛고 나왔을 때에 韓國정부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이미 소멸되었고, 승전한 日本軍은 한국의 목을 쥐고 급속히 힘을 더하고 있었다. 일본은 온 세상에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다고 선포하여 서방국가들의 정신적 물질적 지지를 받았으나 그들은 한국을 그들의 손아귀에 집어넣자 그들이 보호한다고 하던 그 생명 자체를 말살하기에 이르렀다. 韓國獨立黨은 그들이 일본에 배반당한 것을 갑자기 인식하고 나를 특사로 미국과 유럽에 보내어 그 나라들의 원조를 구하도록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모든 길을 막아버렸고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해 버렸다. 사실 나는 日本人들에 의해 다시 투옥될 지경에 처해버렸다.〉34)
 
  李承晩이 집필한 「논설」 때문에 「帝國新聞」이 일본군헌병사령부에 의해 정간을 당하기는 했으나 그가 다시 투옥될 위험에 처했다는 말은 과장일 것이다.
 
 
  閔泳煥과 韓圭卨이 高宗에게 건의
 
 
  그러나 閔泳煥과 韓圭卨 등 李承晩을 신임하는 중신들이 高宗에게 그를 미국에 밀파하도록 건의한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李承晩은 민영환과 한규설이 처음에는 자기를 駐美公使로 임명시키려 했으나 日本人들의 방해로 실현되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35) 또 李承晩은 뒷날 다음과 같이 술회하기도 했다.
 
  〈… 외교방면에 국내에서는 어쩔 수 없이 되었다. 그래서 민영환, 한규설, 金宗漢(김종한), 金嘉鎭(김가진)제씨와 상의하고 그중 한 사람이 주미공사의 책임을 띠고 나가서 평화회의시에 해외활동을 미리 준비치 않을 수 없다 하여 그 방법으로 주선하여 보다가, 일사(日使:日本公使)의 조종에 막가내하(莫可奈何:막무가내)임을 각득(覺得:깨달아 앎)하고, 나를 대행하려 하여 보아도 역시 불가능하므로 나를 위탁하여 조용히 도미케 한 고로… 〉36)
 
  일본군의 점령 아래 일본공사의 내정간섭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하는 직접적 외교활동을 벌이기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미국정부에 대해 1882년의 朝美修好條規에 따른 지원을 교섭하고 앞으로 있을 러-일 강화회의에 대비할 사람을 駐美公使館에 확보해 두는 것은 高宗과 한국정부로서는 절실히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먼저 제안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고 李承晩은 적고 있다. 〈그때에 나는 閔公이나 民族黨에서 어느 누구를 해외로 보내도록 하려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서 그럴 수 없었다〉37)는 것이다. 올리버도 李承晩이 민영환과 한규설에게 미국을 방문하도록 설득했다고 적고 있다.38) 독립유지를 위한 지원을 교섭할 밀사 파견이 李承晩의 말대로 그 자신의 아이디어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1907년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르기까지 高宗의 거듭된 밀사파견의 효시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閔泳煥과 韓圭卨은 자기들 대신에 李承晩을 미국에 가도록 권유했다. 민영환은 李承晩에게 가족의 뒷일을 자기가 돌보아 줄 것이며, 李承晩이 워싱턴에 있는 한국공사관에서 일할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李承晩이 「韓國獨立黨」또는 「民族黨」이라고 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개화파 관료들을 지칭한 것이므로, 그의 미국행은 민영환이나 한규설과의 상의에 의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高宗의 부름을 즉석에서 거절
 
 
  이 무렵의 어느 날 李承晩이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니까 궁중에서 온 시녀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황제가 李承晩을 단독으로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나 李承晩은 황제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그에 대한 평소의 증오감이 복받쳐 올라와 즉석에서 거절해버렸다.
 
  그의 이러한 당돌한 태도는 그가 얼마나 고종을 증오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아버지 敬善의 영향도 있어서 어릴 때부터 느껴온 高宗에 대한 적대감과 경멸은 5년 7개월 동안의 영어생활을 통하여 더욱 격렬한 증오감으로 심화되어 있었을 것이다. 뒷날 그는 高宗을 〈4200년 한국의 왕통계승사상 가장 허약하고 겁이 많았던 임금의 한 사람〉39)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李承晩은 고종이 자기를 몰래 부른 것이, 민영환과 한규설이 자기를 밀사로 미국에 보내려는 계획에 대해 〈그 조치에는 찬동했으나 閔公과 韓장군을 믿을 수가 없어서〉 자기를 비밀리에 불러다가 금전 얼마와 私信을 주어 보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高宗이 자신의 권위에 저돌적으로 도전했던 급진 과격파 李承晩을 내밀히 부른 것도 특이한 일이겠으나, 각별한 관심과 호의에 의한 皇帝의 부름을 일축한 것은 美國行의 목적 그 자체와도 모순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이때의 일과 관련하여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황제의 부름을 거절함으로써 얼마나 좋은 기회를 잃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황제를 알현하기를 거부한 것에 대해서 후회해 본 일은 없다.〉40)
 
  이렇게 하여 李承晩은 여러 통의 「外交文書」를 트렁크 속에 숨겨가지고 급히 미국으로 떠났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때에 그가 지니고 떠난 「외교문서」란 閔泳煥과 韓圭卨이 딘스모어(Hugh A. Dinsmore) 하원의원 앞으로 써 준 편지와 민영환이 주미공사에게 보내는 편지였다.41)
 
  딘스모어는 1887년부터 2년 동안 주한미국공사로 와 있던 사람이다. 韓圭卨은 李承晩에게 여비로 50원을 보탰고, 독립협회 회장과 農商工部 大臣을 지낸 金嘉鎭도 李承晩의 여비를 보탰다.42) 한규설은 자신이 喪中(상중)이므로 격식을 갖추지 못하고 노자를 보태니 꺼리지 말고 받아달라는 정중한 편지를 함께 보냈다.43)
 
  그런데 李承晩의 여비조달이 이처럼 개인차원의 구차한 방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미국행이 고종의 「밀사」 임무가 아니라 민영환과 한규설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 관료들의 「밀사」 임무였음을 말해 준다.
 
 
  알렌公使는 소개장 써주지 않아
 
 
  李承晩의 도미 목적은 그러한 「밀사」임무만이 아니었다. 아마 그보다도 더 직접적인 목적은 留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게일, 언더우드, 벙커, 질레트, 스크랜턴, 프레스턴, 존스 등 한국에 와 있던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미국 敎會 지도자들이나 그밖에 도움을 줄 만한 주요인사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추천서를 무려 19통이나 받아 놓았던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추천서들의 필사본이 李承晩이 출발하면서부터 적은 일기인 “Log Book of S.R.”의 머리부분에 첨부되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44) 외국선교사들은 李承晩이 앞으로 한국기독교계를 이끌 지도자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미국유학을 강력히 권유했고, 李承晩은 그러한 권유를 미국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했던 것이다.
 
  李承晩의 요청을 받고 추천서를 써주지 않은 사람은 알렌公使뿐이었다. 그는 李承晩의 미국행 자체를 반대했다. 전년에 휴가로 일시 귀국했던 알렌은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과 만나 극동문제, 특히 한국문제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돌아와서는 견책까지 받고 종전과는 달리 한국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데, 올리버에 따르면 알렌은 李承晩에게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이루겠다는 계획을 잊어버리고 일본의 지배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충고했다.45) 그는 李承晩이 민영환과 한규설의 「밀사」로 미국에 가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외국선교사들이 李承晩의 도미유학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가는 게일이 써 준 추천서에 잘 드러나 있다.
 
  「워싱턴 및 미국 각지의 기독교인 형제들에게」라고 되어 있는 이 편지는 李承晩이 구식 학문과 영어를 비롯한 신식 학문을 함께 공부했고,「매일신문」과 「제국신문」을 창간하여 自由思想을 고취했으며, 그 때문에 투옥되어 7년간의 옥고를 치렀다고 자세히 소개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는 투옥되기 전에 복음에 대해 들었으나 고통스럽고 외로운 처지에서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을 해냈습니다. 곧 자기자신을 버리고 온 정성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동료죄수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게일은 李承晩이 李商在 등 주요인사 40여 명을 기독교인으로 만들고 감옥서 도서실을 설치한 사실을 자세히 소개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었다.
 
  〈이 黃色人은 그가 겪은 슬픔을 훌륭히 그리고 생생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가 자유의 땅 미국에서 白人형제들 사이에서 좋은 친구들을 사귀기를 기원합니다. 그가 그곳에서 공부하고 시찰하고 글을 쓰는 데 3년이 소용된다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그의 용기를 북돋아주시고 도와주시어 그가 한국에 돌아와서 자기나라 사람들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는 신사로 태어났고 학자이며 하나님이 역사하심으로써 나타난 기독교인이므로 아주 훌륭한 친구입니다.〉46)
 
  게일은 이 편지말고도 뒷날 李承晩에게 큰 도움을 주는 워싱턴 커버넌트 교회의 목사인 루이스 햄린(Lewis T. Hamlin)박사 앞으로 따로 편지를 써주는 등 여덟통의 소개장을 써주었다고 한다.47)
 
  李承晩은 신분을 감추기 위해 비밀리에 떠났다고 했으나, 그의 출국은 도하 신문에 보도되었다.「대한매일신보」는 5일자 영문판에서 〈최근에 정간당한 「제국신문」의 주간(‘manager’) 李承晩은 미국을 방문하기 위해 출국했다. 그는 약 3년 동안 떠나 있을 예정이다〉48)라고 했고, 8일자 국문판에서는 〈「제국신문」 주필하던 이승만씨는 미국에 遊歷(유력)하야 실지를 견습할 차로 작 사일에 발정하는데, 往返(왕반:돌아옴)할 기한은 삼개년으로 예정하였더라〉49)고 보도했다.
 
  「皇城新聞」도 5일자로 李承晩이 유람차 美國으로 떠났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李承晩이 집필한 「논설」 때문에 정간이 되었다가 李承晩이 떠나고 닷새 뒤인 11월9일에 복간된 「帝國新聞」에는 李承晩의 美國行에 관한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하와이로 가는 勞動移民과 함께
 
 
  李承晩은 1904년 11월4일 오후 1시에 서울을 떠나 다음날 오후 3시에 제물포에서 오하이오號(S.S. Ohio)를 타고 미국을 향해 출발했다.50) 그의 안주머니에는 옥중동지 金貞植의 보증으로 10월22일에 대한제국 외부에서 발급한 執照(집조:여권)가 들어 있었다. 아버지 敬善과 아들 泰山이 제물포까지 따라와서 눈물어린 배웅을 했다.
 
  그러나 큰 야망을 품고 머리 속에 그리던 이상국가 미국으로 떠나는 그에게 가족과의 이별에 대한 感傷(감상)은 있을 수 없었다. 한성감옥서에서 李承晩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간수장 李重鎭의 동생 李重赫이 그와 동행했다. 동생을 유학보내는 이중진도 두 사람의 여비 일부를 부담했다.
 
  李承晩은 日本의 감시를 의식하여 배의 최하급 선실에 탔다. 배 안은 日本人, 淸國人과 함께 하와이로 계약노동자로 가는 한국인 70여 명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李承晩 일행이 중간기착지인 일본까지 가는 동안 같은 선실에서 함께 생활했다. 그들은 李承晩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여러 가지 도움을 베풀어주었다. 그들은 李承晩이 누구인지 몰랐으나 양복차림의 양반이 너무나 호된 고생을 겪는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제물포항을 떠난 배는 뜻밖의 풍랑을 만나 하룻밤 동안 캄캄한 바다 위를 헤매다가 이튿날 새벽녘에야 겨우 다시 출발하여 6일 오후 6시에 木浦에 도착했다. 李承晩은 혼자 배에서 내려 교회로 가서 선교사 오웬(Owen) 내외와 벨(Bell), 프리스턴(Preston), 김형진 등의 친구들을 만난 뒤에 집에 전보를 치고 편지도 부쳤다. 목포에서 하루를 보낸 배는 이튿날 오후 3시에 다시 출발하여 8일 오전 9시에 釜山에 도착했다. 李承晩은 釜山監理로부터 저녁대접을 받았다.
 
  日本人들의 눈을 피해서 떠나는 처지에서 목포에서는 혼자서 배에서 내려 선교사와 친구들을 만나고 부산에서는 감리에게서 저녁대접까지 받은 것은 외국 교회관계자들은 말할 나위도 없고 부산감리에게까지도 그의 渡美行이 통보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날 저녁 7시에 부산을 떠난 배는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11월10일 오후 3시에 고베(神戶)에 도착했다. 몇몇 한국인 친구들과 선교사 로건(Logan)이 그를 맞이했다. 이들에게도 미리 연락이 가 있었던 것이다.
 
  로건은 목포에서 만난 벨의 사촌이었는데, 李承晩은 로건에게 보내는 주한 선교사들의 소개장을 지니고 있었다. 로건은 주일인 11월13일 오전에 자기가 시무하는 교회에서 李承晩이 강연을 하도록 했고, 강연에 참석한 청중들은 돈을 거두어 그의 여비를 보태주었다.51) 이것은 그가 뒷날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교회에서 신앙간증의 연설을 하고 학자금을 지원받는 방법의 첫 케이스였다.
 
 
  「帝國신문」에 편지 써보내
 
 
  고베에서 17일에 미국으로 향하는 사이베리아號(S.S. Siberia)를 기다리는 동안 李承晩은 「帝國新聞」에 편지를 써 보냈다. 그것은 기회만 있으면 민중을 설득하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알리기에 숙달한 그의 습관의 한 보기였다. 그는 먼저 〈나는 종적이 도처에 남에게 의심을 잘 받는 몸인 고로 떠날 때에 저저(這這:낱낱이 모두)이 작별도 못하고 무심히 왔사오매 두루 죄지은 것 같소이다〉라고 인사말을 적은 다음 木浦와 釜山의 풍경을 설명하면서 지배층을 질타하기를 잊지 않았다.
 
  〈목포는 항구터가 대단히 넓고 산세와 돌이 다 기묘하게 되었으나 아직 항구 모양이 어울리지 못하며, 부산은 개항한 지 오랜 고로 부두와 도로도 많이 수축하고 방장역사도 많이 하는 중이요 집도 많이 지었으며 산천의 형세는 실로 절승하게 되었으나, 가는 곳마다 한심한 것은 그중 높고 좋은 곳은 다 외국인이 거처한 바요 제일 깊고 더럽고 처량한 곳은 다 대한사람들의 처소라. 어찌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은 곳곳이 이러한고. 이는 토지 인물이 남만 못한 것이 아니요, 다만 풍기를 열어주지 못한 연고라. 책망이 위에 있는 이들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나이다.〉
 
  그리고 처음보는 일본 항구들의 아름답고 활기찬 모습과 개탄스러운 한국의 현실을 대비하면서 착잡한 심정을 토로했다.
 
  〈급기 시모노세키와 고베에 이르러 본즉, 우선 산에 수목이 덮여 대한 산천같이 벌겋게 벗겨진 곳이 없고, 한 항구에 각각 큰 화륜선이 여러 십 척씩 들어섰으며, 조그마한 윤선과 풍범선(風帆船)은 그 수가 없는지라. 사방에 기계소 굴뚝은 하늘에 닿은 것이 무수하고, 이편 저편에서 철도는 왔다갔다 하는데 기계통에 김빼는 소리는 쉴새없이 원근에서 서로 응하며, 고베항구에 내리니 전후좌우에 누각도 굉장하거니와 남녀노소의 분주한 모양은 과연 일들 많이 하는 세상이라. 긴 담뱃대 물고 누워서 낮잠자는 사람은 볼 수가 없으며, 산천은 다 기이한데, 심지어 돌 한 개 나무 한 그루라도 기기묘묘하게 꾸며놓았으나 다 견고하고 질박한 풍토가 부족하여 천연한 태도가 보이지 않는지라. 우리 대한 삼천리 금수강산을 우리 손으로 이렇게 꾸며 놓았으면 첩첩이 절승함이 어찌 이에 비하리오.〉52)
 
  그러면서 그는 고베까지 하등운임가 12원이고, 고베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데는 지전 63원이 들며, 그곳에 가서는 또 50원이 있어야 입국이 허용되는데 그 돈은 보이기만 하고 도로 찾는다고 미국까지의 여비를 자세히 설명하고는, 〈진실로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이 이 돈이나 변통하여 가지고 미국에 가서 천역(賤役)이라도 하여 얻어 먹어가며라도〉 공부를 해오면 국가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유학을 적극 권유하고 있다. 그 자신의 각오도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빵으로 끼니 때우며 이민들에게 연설
 
 
  李承晩은 11월17일에 두 장의 배표를 끊어 이중혁과 함께 사이베리아號에 올랐다. 이 배에도 오하이오號와 마찬가지로 많은 한국인 하와이 노동이민자들이 타고 있었다. 그는 이들과 같이 3등 선실에 탔다. 사이베리아號는 요코하마(橫濱)를 거쳐 하와이의 호놀룰루항까지 열흘 동안을 항해했다. 배가 호놀룰루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 李承晩은 다시 「帝國新聞」에 보내는 편지를 썼다.
 
  〈태평양을 지나는 행객 이승만은 배에서 다시 제국신문 독자들을 위하여 두어마디 적나이다〉하고 시작한 편지는 항해하는 동안에 견문한 일을 자세히 적고 있다.
 
  李承晩은 먼저 타고 가는 사이베리아號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탄 배가 미국 우선회사(郵船會社) 사이베리아라는 배인데 재작일은 천여리를 왔나이다. 만일 풍범선 같은 배로 올 수 있을 것 같으면 몇 달이나 될른지 아득하외다. 이 배 길이가 목척으로 오백칠십이척사촌인데 내걸음으로 온발씩 내디뎌 이백오십사보이니 땅에 이만치 재어놓고 보면 얼마나 긴지 아실 것이오. 배 톤수는 일만이천 톤이며 배에서 일하는 사람 수효는 함장 이하로 서양사람이 백여 명이고 청인이 이백여 명이니 능히 삼백여 명 사공이라. 먹고 쓰는 것과 월급은 다 얼마나 되겠나이까. 이 배가 코리아(Korea)라 하는 배와 서로 같고 만추리아(Manchuria)와 몽골리아(Mongolia)라 하는 배 둘은 거의 이보다도 갑절이나 크다 하오니 어떻게 굉장하오니까. 그속 범절이 곧 조그마한 나라 하나라 하겠소.〉
 
  李承晩은 두고 온 한국의 민중들에게 세상이 얼마나 크고 넓은가를 가르치고자 한 것이다. 긴 항해에 지루했던 그는 갑판 위를 직접 걸어서 배의 길이를 재어보기도 했던 모양이다. 이어 배의 상등칸, 중등칸, 하등칸의 광경을 실감나게 적었다.
 
  상등칸은 〈수삼백 명이 모여 함께 음식먹고 놀방을 황홀 찬란히 차려놓고, 풍류방이 또 있는데 과연 편하고 좋게 만든지라〉하고 소개했다. 이 상등칸은 샌프란시스코까지 운임이 400원 가량인데 40여 명이 탔고, 운임이 160원 가량인 중등칸에는 日本人, 청국인, 西洋人이 합하여 30여명이 탔으며, 운임이 70여원 안팎인 하등칸에는 청인 50∼60명, 한국인 29명, 일본인 200여 명이 탔는데, 日本人은 유학생을 포함하여 30명쯤이 미국으로 가는 길이고, 청국인 10여 명과 한국인 둘 말고는 다 하와이로 가는 노동이민이었다.
 
  李承晩은 하등칸의 구차스러운 실태를 소개하면서 여기서도 〈웃사람들 잘못 만나〉 고생하는 동포들에 대한 연민과 울분을 토로했다.
 
  〈하등칸에서 이 여러 사람이 함께 지내노라니 청인의 냄새는 견딜 수 없고, 겸하여 이곳 기후는 대한 육칠월 같아서 사람의 기분은 증울(蒸鬱:찌는 듯한 더위로 답답함)하고 음식은 청인이 주는 것이 비위에 맞지 않아 혹 지폐 십원씩 주고 양요리 명색을 얻어 먹는데, 우리는 간신히 둘 앞에 금전 삼원을 주고 면보(麵:빵)와 차를 얻어 밥대신 지내며, 하등칸이라고는 당초에 사람 대접으로 아니하는 중, 대한 역부(役夫:일꾼)들이라고는 의복도 더욱 추하고 모양도 흉하니 더 창피하나 내게는 다 와서 말도 일러주고 특별히 대접하되 도처에 분한 마음 어떻게 억제하리오. 웃사람들 잘못 만나 이 모양인 줄 매일 연설하고 그 보배로운 상투를 좀 베어버리라 하여 다 듣는 뜻을 표합디다.〉
 
  이처럼 李承晩은 빵으로 끼니를 때우며 가는 이민선상에서도 매일 지배층에 대한 비판과 함께 아직도 상투를 자르지 않은 이민노동자들에게 단발을 역설했던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동포들의 한심한 소식
 
 
  李承晩은 또 개명한 청국인을 만나 나눈 대화도 소개했다. 康有爲, 梁啓超 등 중국의 개혁파 지도자들이 이곳 저곳으로 다니며 해외의 유지들과 연락하여 上海, 香港, 싱가포르, 日本, 하와이 등지에 學校도 세우고 신문 잡지도 발행하면서 開明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고 적고 있다.
 
  그는 梁啓超가 지금 요코하마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배가 요코하마에서 하루를 묵었으니 그때에 알았다면 가서 한번 심방하고 일장 설화를 들어보았을 것을 진작 알지 못하여 이리 한탄하는 중이외다〉하고 아쉬워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유지들이 많이 밖으로 나와 사방에 흩어져서 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康有爲와 梁啓超는 한국의 개화파 지식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인물들인데, 李承晩도 이들의 저서를 읽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요코하마에서 梁啓超를 만나지 못한 것이 여간 아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또 北京에 나가 있는 日本領事가 청국의 지방관에게 공문을 보내어 한국인의 수효를 알려달라고 했다는 말도 적었다. 한국인들이 양복을 입고 다니면서 불법한 일을 하는 것이 일본인들의 짓으로 오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런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가 있는 한국인의 행동거지에 대해 들은 것을 소개하면서 동포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대한사람은 잘하나 세상에 못된 구석으로만 몰리니 더욱 원통한지라. 그러하나 우리가 다 나라를 이 모양 만들어 놓은 고로 도처에(서) 이렇듯 받는 수모를 어찌 억지로 면할 수 있사오리까. 지금이라도 잘들하야 남의 칭찬과 대접을 받을 만치 된 후에야 스스로 나은 처지가 돌아올지라. 들으니 샌프란시스코에 가 있는 대한사람이 몇십 명 된다는데, 혹 양복한 사람도 있거니와 거반이나 상투를 그저 달고 다니며 혹 조선복색도 하고 혹은 양복대신에 청인의 옷을 사서 입고 청인의 촌으로 돌아다닌다니, 이 사람들에게는 옛것이 어찌하여 그다지 버리기 어려우며 일인(日人)에게는 새것 본뜨기가 그다지 속하오니까. 과연 딱한 일이 올시다. 윤선은 흔들리고 자리는 분요한데 생각나는 대로 대강 적으니 혹 유조(有助)할 것이 있기를 바라나이다.〉
 
  이처럼 비통한 편지를 쓰면서 李承晩은 이제 이튿날이면 당도할 새로운 世界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하여 거듭 다짐을 했을 것이다.
 
 
  사탕수수밭 이민노동자에게 4시간 동안 연설
 
 
  사이베리아號는 1904년 11월29일 아침 7시경에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하와이 이민국의 한국인 통역 홍정섭이 李承晩을 찾아와서 현지 동포들이 환영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검역을 마친 뒤에 李承晩은 상륙증을 받아 하선했다. 3등선객 가운데에서 일시 상륙이 허가된 사람은 李承晩뿐이었다. 배는 이튿날 떠날 예정이었으므로, 李承晩이 하와이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하루뿐이었다.
 
  부두에는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의 와드먼(John W. Wadman) 감리사와 尹炳求 목사가 몇몇 동포들과 함께 마중나와 있었다. 尹炳求는 李承晩과 일찍부터 호형호제하면서 친구했던 사람으로서 인천 內里敎會의 존스(George Heber Jones) 선교사의 주선으로 목사가 되어 1900년에 하와이에 갔었다. 李承晩은 누아나 계곡에 있는 한국인 교회로 안내되었다. 그곳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에 李承晩 일행은 기차를 타고 호놀룰루에서 12마일 밖에 있는 에와(Ewa)의 한국인 농장으로 갔다. 하와이의 한국인 동포들은 이틀 전에 이승만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각 지방에 통문을 보내어 사람들을 에와농장으로 불러서 환영회를 준비했다. 약 200명의 한국인들이 모였다.53)
 
  이날은 마침 성찬식 날이었다. 이 성찬식에서 10명의 한국인 신도가 세례를 받았다. 와드먼이 李承晩을 소개했다.
 
  『여기에서의 우리의 사업은 훌륭하게 자라고 있는데, 聖靈의 無線電報가 우리의 형제 이승만씨에게 연락하여 그가 한국으로부터 먼 길을 와서 성찬식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우리는 그와 함께 있고 싶습니다만 그는 지금 미국으로 가는 도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며 그때는 우리가 그를 붙잡을 것입니다』54)
 
  성찬이 끝난 뒤에 李承晩은 연설을 시작했다. 그의 연설은 밤 11시경까지 4시간 동안이나 이어졌다. 켜켜이 쌓인 한을 지닌 이민노동자들 앞에서 李承晩이 얼마나 감개에 차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연설 도중에 〈동포들은 그의 연설에 흥분하여 어떤 때에는 소리를 같이하여 고함을 치고 어떤 때에는 나직하나 뼈에 사무치는 소리로 울었다〉55)고 한다.
 
 
  1902년에 공식 이민 시작
 
 
  한국인이 하와이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 후반부터였다. 그러나 1902년에 공식적인 이민이 시작되기까지 하와이에서 상업과 노동에 종사하고 있던 한국인은 30명 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하와이에서 「설탕혁명」을 일으키고 있던 미국인 사탕수수 농장주들이 한국인 노동자를 하와이로 불러들이려는 구상을 하게 된 것은 이 무렵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들 가운데에서 수적으로 압도하고 있던 日本人 노동자들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56)
 
  뒷날 하와이 동포사회가 의연금 출연 등으로 독립운동의 기지로서 상징성을 갖게 된 역사적인 배경이 여기에 있다. 그리하여 1902년 12월22일에 제1진 이민 121명을 태운 배가 제물포를 떠난 것을 시작으로 1905년 7월 초까지 65차의 선편에 7226명의 이민이 하와이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이주자들은 상인이나 농민,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선비, 정부관리, 군인, 경찰, 목사, 통역, 교사, 승려, 광부, 머슴 등 신분과 직업이 다양했고 따라서 이주 동기도 가지가지였다.57)
 
  李承晩이 하와이에 도착할 무렵에는 4000명 가량의 한국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뙤약볕이 쏟아지는 넓디넓은 사탕수수밭에서 하루 10시간의 고된 노동을 했다. 그들은 처음에 10명 이상의 동포가 사는 곳에는 洞會를 조직하고 洞長과 監察을 뽑아 질서와 친목을 도모해 오다가 1903년 8월에는 정치적 활동을 목적으로 호놀룰루에서 新民會(New People’s Association)를 조직했는데, 洪承夏, 朴允燮, 安鼎洙 등 감리교도들과 함께 신민회를 주동적으로 발기했던 사람이 尹炳求였다. 그러나 신민회는 지방지회 설립과정에서 내분이 일어나 1904년 4월에 해체되고 말았다.58)
 
  李承晩은 이날 저녁 지루한 항해의 피곤도 잊고 그의 온 열정을 쏟아 이민노동자들을 감동시켰던 것같다. 이때에 심어 준 깊은 인상은 뒷날 李承晩이 하와이를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와드먼이 李承晩에게 시간을 일깨워 주었다.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올 랭 사인」 곡조의 愛國歌 합창으로 연설을 마쳤다. 이승만은 저녁을 먹고 윤병구의 집에서 밤을 새워가며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재하는 러-일 강화회의에 대한 대책을 숙의했다.
 
  〈우리는 일본이 한국독립의 친우라고 표방하기는 하나 벌써 그들은 한국을 파괴하고 있다는 데 견해를 같이하였다. 한국은 포츠머스에서 열릴 평화회의에 참석하여야 할 것인데, 일본은 한국이 정식으로 참여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므로 해외에 있는 한국인들이 자기들의 의사를 그 회의에 표명하여야 한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런 합의하에 윤목사는 하와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하기로 하고 나는 워싱턴에 가서 그곳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기로 했다.〉59)
 
 
  제물포 떠난 지 32일 만에 샌프란시스코 도착
 
 
  두 사람은 다음날 새벽 6시 30분에 호놀룰루로 돌아와서 아침을 먹었다. 李承晩은 홍정섭 등의 주동으로 또 한 차례의 연설을 했고, 참석자들은 그의 여비로 30달러를 모아 주었다. 李承晩은 11시30분 경에 배에 올랐으나 배는 거의 1시가 다 되어서야 출항했다. 많은 사람들이 부두에 나와서 모자와 손수건을 흔들어주었다.
 
  사이베리아號는 1904년 11월30일에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엿새 뒤인 12월6일 오전 10시경에 샌프란시스코항에 닿았다. 제물포를 떠난 지 32일 만이었다. 李承晩과 이중혁은 오후 3시에 배에서 내렸다. 부두에는 안정수가 나와서 두 사람을 맞았다. 안정수는 1902년 12월22일에 제1차 하와이 이민단이 제물포에서 출발할 때에 통역으로 미국에 건너간 사람이었다.60) 1899년부터 감리교의 미국인 선교사 존스가 시무하던 仁川 內里敎會의 전도사였던 그는 1902년 봄에 미국인 사업가 데쉴러(D.W. Deshler)가 이민 모집을 관장하기 위해 설립한 東西開發會社(East & West Development Company)의 移民事務에 관여하면서 통역으로 발탁되었었다.61)
 
  두 사람은 메이지(Oisoya Meiji)라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호텔에 투숙했는데, 더블베드가 놓인 방으로서 하룻밤 숙박비로 50센트를 받는 허름한 곳이었다.62) 이틀 뒤에 안정수가 두 사람을 자기 숙소로 데리고 갔다.
 
  다음날 李承晩과 이중혁은 안정수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북쪽 샌 라파엘시로 피시(Fish) 내외를 찾아갔다. 이 무렵 피시의 아들이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李承晩과 이중혁은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잔 뒤에 피시의 안내로 근처의 샌 안셀모 신학교(San Anselmo Seminary)를 방문했다. 李承晩이 내어놓는 추천서를 읽고 난 교장 매킨토시(McIntosh)박사는 李承晩과 이중혁에게 수업료와 기숙사비를 합한 300달러씩의 장학금을 각각 지급하겠고 이곳에서 3년 동안 공부를 마치고 나면 선교사가 되어 귀국할 수 있게 주선하겠다고 말했다. 李承晩은 그림같이 아름다운 푸른 언덕 위의 석조 건물을 바라보면서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 그는 워싱턴으로 가서 해야 할 자신의 사명이 성공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으므로 장학금을 받고 그곳에 머물고 싶은 충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왜 워싱턴으로 가야만 하는지를 털어 놓을 수도 없었다. 그가 지닌 추천서도 그러한 사명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올리버에 따르면 이때에 李承晩이 장학금 제의를 거절하자 피시 내외와 매킨토시 박사는 그들 두 한국인을 감사할 줄 모르는 예의없는 사람으로 여겼고, 그들과 작별하는 李承晩의 심정은 불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63) 그러나 이때에 李承晩이 신학교에 입학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면 굳이 그러한 내용의 추천서를 가지고 매킨토시를 찾아간 이유를 딱히 알 수 없다.
 
 
  申興雨를 만나다
 
 
  李承晩과 이중혁은 며칠 동안 안정수의 집에 묵으면서 샌프란시스코 일대를 관광했다. 15일에는 金門公園 박물관에 한국 동전 두 개를 주기도 했다.64)
 
  이때에 샌프란시스코에는 安昌浩의 주동으로 박성겸, 이대위, 김성무, 장경 등 스무 댓 사람의 동포들이 모여 1903년 9월에 친목회를 조직하고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65) 그들의 절반 가량은 중국인을 상대로 인삼장사를 하는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유학을 목적으로 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李承晩이 특별한 일 없이 며칠 동안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면서도 이들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은 좀 의아스럽다. 물론 그것은 안정수가 연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겠으나, 李承晩이 「帝國新聞」에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한국사람들이 상투를 그대로 달고 다닌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보면 李承晩 자신도 굳이 그들을 찾아 볼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유학을 목적으로 1903년에 샌프란시스코에 왔던 安昌浩는 인삼 행상을 하는 동포 두 사람이 길에서 서로 상투를 잡고 싸우는 것을 미국사람들이 재미있게 구경하는 것을 보고 학업을 포기하고 동포계몽에 나서기로 결심했다고 한다.66) 李承晩이 도착했을 때에는 安昌浩는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리버사이드로 옮겨가고 없었다.
 
  16일에 베일(Vail)씨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까지 가는 차표를 사주었다. 값은 반액으로 53달러 75센트였다.67) 베일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李承晩이 서울에 있는 선교사의 소개장을 가지고 찾아간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가 사준 기차표는 한 장뿐이어서 이중혁은 李承晩과 함께 워싱턴까지 갈 수 없게 되었다.
 
  두 사람은 16일 하오 5시 30분에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밤 12시에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로스앤젤레스 역에는 申興雨가 마중 나와 있었다. 培材學堂 후배이자 감옥 동지인 그는 1903년 초에 출옥한 뒤에 渡美하여 남캘리포니아 대학의 의과대학 예과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신흥우는 李承晩과 이중혁을 한인 미션하우스로 데려가서 묵게 했다. 1904년 3월11일에 문을 연 이 미션하우스는 한인감리교회의 전신으로서 한국인들을 기숙시키며 영어강습과 함께 전도도 하고 있었다.
 
  설립자는 1898년에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왔다가 과로로 병을 얻어 1900년에 사망한 해리 셔먼(Harry C. Sherman)의 부인이었다.68) 셔먼은 李承晩이 체포될 때에 동행했던 바로 그 의료선교사였다. 신흥우는 대학에 다니면서 미션하우스의 전도사일을 보고 있었다.
 
  李承晩은 로스앤젤레스에서 1주일 동안 머물렀다. 처음에는 이틀만 묵고 떠날 예정이었으나 申興雨의 만류로 크리스마스를 함께 지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조국과 자신들의 장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李承晩이 도미한 뒤로 「帝國新聞」은 논설기자를 구하지 못하여 「논설」난에 미국이나 일본에 가 있는 유학생들이나 지방유지들의 「寄書」(기서:투고)를 자주 실었는데, 한 달 남짓한 정간 뒤에 복간된 이튿날인 11월11일자와 12일자 「논설」난에는 申興雨의 奇書가 실려 있다. 「이천만동포에게 부치노라」는 제목의 이 글은 그가 9월 14일자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써보낸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 李承晩의 권유에 따라 쓴 것이었을 것이다. 이 글에서 신흥우는 국내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을 소개하면서 〈나라 일이 남의 일 같아 보이나이까… 그대들 몸을 생각하야 나라를 좀 돌아보시오. 이 다음 남의 노예노릇할 제 후회하여도 쓸데없으니, 지금은 늦었으나 그리하여도 이 다음보다는 이르외다〉69)라고 비분강개하고 있다.
 
 
  旅費 절약위해 혼자서 워싱턴으로
 
 
  李承晩은 미션하우스의 크리스마스집회에서 강연을 하고 다음날 저녁에 이중혁은 로스앤젤레스에 남겨두고 혼자 워싱턴을 향해 떠났다. 둘이 함께 갈 수 있는 여비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李承晩은 그나마 이중혁의 여비에서 약간의 돈을 얻어 가지고 갔다.70)
 
  2주일 동안에 걸친 이때의 여정에 대해 李承晩은 자서전 초고에서 〈나의 첫 대륙횡단 길이었는데, 여러 가지로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71)고만 적고 있을 뿐이다. 일기는 간단한 메모만 했다.
 
  〈12월26일. 오후 8시에 산타 페 선으로 워싱턴으로 출발.〉
 
  〈12월30일. 오전 9시에 시카고 도착. 캠벨공원 장로교회 목사 매징거(Matzinger) 박사를 만나 언더우드 박사의 편지를 전했다. 오후 3시에 펜실베니어 선 기차를 탔다.〉
 
  〈12월31일. 오전 7시 30분에 피츠버그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오후 7시에 워싱턴에 도착. 이날 밤 주미한국공사관과 커비넌트장로교회 목사 햄린 박사를 찾아갔다.〉72)
 
  李承晩이 대륙횡단 열차편으로 워싱턴으로 가고 있을 때에 「帝國新聞」에 그의 기명 논설이 실렸다. 12월29일자와 30일자에 연속으로 실린 「나라의 폐단을 고칠 일」이라는 글이었다.
 
  李承晩은 〈근래에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인종이 걸러서 당초에 어찌할 수 없다 하나 나는 그렇지 않다 하오〉라고 전제한 다음, 그 특유의 논법에 따라 국민을 「상등인」과 「하등인」으로 구분하여 외국인들과 비교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하등인」은 외국 「하등인」에 비하면 師父라고 할 만큼 우수하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하등인」은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는데도 교육을 받은 외국의 「하등인」보다 양순하고 성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반면에 「상등인」은 다른 나라 「상등인」에 비하여 〈천양지판으로〉떨어진다면서, 그 이유는 우리나라 「상등인」들이 받아온 敎育 때문이라고 했다. 李承晩은 전통교육의 폐단으로 다섯가지를 들었다.
 
  그것은 첫째 태고적 옛것을 숭상하는 것, 둘째 虛誕(허탄:거짓되고 미덥지 못함)함을 숭상하는 것, 셋째 인심을 결박하는 것, 넷째 큰 것을 섬기는 주의, 다섯째 이른바 도덕상 주의, 곧 실상이 없고 빈 생각만 숭상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상등인」들이 〈날로 장진(長進:「長足進步」의 준말)할 생각이 어디서 나며, 남과 경쟁할 생각이 어디서 나며, 몸을 버려서라도 세상을 위하자는 생각이 어디서 나겠느뇨〉하고 힐난했다.
 
  이처럼 李承晩은 이때에 이미 資本主義社會의 기본원리인 경쟁의 원리를 이상적 가치로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논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장래 여망은 우리 용준한 평민에게 달렸고 전혀 상등인에게 있지 아니하며, 우리 청년들에게 달렸고 노성(老成)한 이에게 있지 아니한지라. 인민의 상중하 등분을 물론하고 백공기업(百工技業:여러 가지 기술의 일)을 구별치 않고 일체로 실용할 학문을 낱낱이 얻게 하기는 이 만국청년회의 주의같이 광탄하며 긴절한 사업이 없으리라 합니다.〉73)
 
  이러한 문투로 보아 이 「논설」은 李承晩이 만국청년회 곧, YMCA의 어떤 모임에서 한 연설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논설」의 끝머리에 「리승만 유고」라고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써놓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李承晩이 집필한 「帝國新聞」의 마지막 「논설」이었다.
 
 
  수중에는 몇 달러밖에 남아 있지 않아
 
 
  1904년 12월31일 저녁 7시에 李承晩은 드디어 긴 여행의 종착지인 워싱턴에 도착했다. 서울을 떠난 지 56일 만이었다. 그는 기차역 가까이의 펜실베이니아 애비뉴에 있는 마운트 버몬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의 수중에는 몇 달러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방을 정하자 바로 커버넌트 교회의 햄린 목사를 찾아갔다. 李承晩이 얼마나 다급한 심정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날 밤 워싱턴에는 큰 눈이 내렸다.
 
  그는 게일이 써준 소개장에 큰 기대를 걸고 갔다. 게일은 불특정 다수의 교회관계 인사 앞으로 보내는 소개장과는 별도로 햄린에게는 더욱 극진한 말로 李承晩을 소개하는 편지를 써주었다.
 
  〈친애하는 햄린 박사에게
 
  저는 당신에게 서울의 李承晩씨를 소개하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는 자기 나라에서 여러 가지의 경험을 쌓았고 온갖 물불의 시련을 극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 모든 시련을 통하여 정직하고 충실한 기독교인임을 증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政治犯으로 투옥되어 있는 동안에 많은 죄수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했습니다. 지금 제가 시무하는 교회의 중요한 교인들 가운데에는 그가 인도한 사람들이 여럿이 있고, 또 다른 장로교회에도 그가 인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李씨는 몇 달 동안이나 족쇄를 차고 앉아 있었고 또 쇠사슬에 묶인 징역수들의 중노동 작업에도 참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반도의 정직하고 총명한 청년들 가운데에서 가장 앞서 있는 사람이며, 國會나 市民의 집회를 싫어하는 守舊派 정부인사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李씨는 주께서 더 높은 사업을 위해서 부르셨을 때까지는 政治改革運動者였습니다. 저는 그가 석방된 뒤에 각종 모임에서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만, 그는 자기를 다스리는 이(하나님)에 대해 지극히 진실한 간구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서울에 있는 교회 가운데에서 여러 교회 사람들이 그를 얻으려고 애쓰고 있고 또 그들은 그의 사랑을 요구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저는 그의 사랑을 요구할 권리가 가장 없는 사람인데도 그는 저에게 왔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에게 세례를 줄 경우 그에 대하여 더 많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절친한 친구들의 감정을 상할 염려가 있고, 또 그는 지금 미국으로 떠나려는 참이므로 미국에 갈 때까지 참고 있다가 미국에서 가장 원하는 곳에서 세례를 받으라고 권고했습니다. 저는 그가 당신이 계시는 워싱턴에서 세례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당신께서 저에게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그에게 사랑과 도움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는 2, 3년 동안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하고 돌아오고 싶어 합니다.
 
  저는 당신께서 그에게 친절한 말씀을 해주시고 필요할 때에 지도와 충고를 해주신다면 그가 얼마나 고마워할 것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부인께 안부 전해 주십시오.〉74)
 
  햄린 목사는 기대했던 것만큼 친절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李承晩은 친절하기보다는 엄격한 성품의 이 햄린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그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美國社會에 접근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더욱 굳게 믿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孫世一의 비교 評傳 - 이승만과 김구(16)
 
한국민족주의의 두 종류
 

 

평양 예수교회의 겨울 사경회에 참가
<1906년 長連의 光進學校 교사 때에 다른 교사들과 學童들과 함께. 뒷줄 오른쪽부터 金九,崔商崙,白南薰,金明現>

 기독교에 입교한 뒤에 金龜(金九)는 査經會(사경회)에 열성적으로 참가했다. 그는 입교한 그해(1903년) 겨울에 평양 예수교회에서 개최한 겨울 사경회에 참가했다.1) 헌트(William B. Hunt:한국명 韓衛廉) 목사의 순회전도로 황해도에 교인이 급증하자 헌트와 숭실학당 교장 베어드(W. M. Baird)는 이들을 평양에서 열린 대규모의 사경회에 참가시켰다.2)
 
  金九가 어떠한 경위로 평양의 겨울 사경회에 참가했는지에 대해서는 「백범일지」에 전혀 언급이 없다. 다만 초기 사경회의 초점이 성경학습을 통한 기독교 기본교리의 전파와 함께 새로 입교한 신자에게 지도자훈련을 시키는 데 있었기 때문에, 다른 많은 사람들의 경우처럼 그가 사경회에 참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초기 입교자들은 사경회에 참가하여, 지방과 마을에 돌아가서 어떻게 전도하고 가르쳐야 하는가를 배웠다.3)
 
  성경공부에 대한 열성과 적극적인 전도활동은 한국 교회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꼽힌다.4) 한국에 처음 온 캐나다 선교부 스콧(W. Scott) 목사가 〈한국에 처음 온 저로서는 모든 기독교 가정에서 손때 묻은 성경을 보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충격적이었습니다〉5)하고 보고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특성을 여실히 말해 준다. 그리하여 성경은 〈조선교회의 설립과 성장에 가장 기여를 많이 한 단일기구〉6)였으며, 그러한 이유 때문에 흔히 한국기독교를 가리켜 「성경 기독교(Bible Christianity)」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7)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마펫(S. A. Moffett) 목사는 성경과 성경학습이 한국교회의 발전에 미친 역할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물론 성경 그 자체가 모든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복음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요소이다. 그러나 한국의 성경은 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해 온 것이 분명하다. … 성경공부와 성경공부반은 한국교회의 발전에서 가장 독특하고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들 속에서 신앙과 지식의 기초를 놓아 왔다.〉8)
 
  특히 기독교 수용 초기에 한국기독교인들의 성경 공부에 대한 열성은 폭발적인 것이었는데, 그러한 열성은 사경회 모임을 통하여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사경회는 1890년에 언더우드 목사가 7명의 교인을 대상으로 사랑방 성경공부를 시작한 것이 효시였다. 이듬해에 선교회 본부가 성경공부의 원칙을 제정하면서 사경회는 선교지구별로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1904년도의 선교회 보고서에 따르면, 이 무렵의 한국기독교인 가운데에서 60%에 이르는 교인들이 사경회에 참석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사경회는 한국교회의 전통이 되어 일본 점령기에도 계속되었다. 1910년 이후 1929년까지 약 20년 동안에 129만2000명이 사경회에 참석했다.9)
 
  사경회는 흔히 선교 거점지역의 교회나 학교에서 2, 3주일 동안의 단기과정으로 개최되었다. 주로 농한기나 겨울철에 열렸는데, 참가비용은 자비로 부담해야 했다. 이 때문에 멀리서 참가하는 사람들은 쌀이나 돈과 함께 자취할 도구를 준비해 와서 합숙을 하거나 친지들의 집에 묵기도 했다.
 
  사경회에서는 주기도문, 네 복음서, 예수의 생애, 교리문답, 십계명, 사도신경 등 신앙을 위한 기초학습과 함께 천문지리학, 농사법, 아동교육, 건강위생법, 새생활운동 등 일반상식과 실생활에 필요한 내용도 가르쳤다. 하루의 일과는 새벽기도, 오전 성경공부, 오후 일반상식 과목을 공부했으며, 그 다음에는 개인 전도 방법을 익히게 하여 호별방문 전도와 길거리 전도를 실시했고, 저녁에는 전도강연 중심의 집회를 열었다.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
 
  평양의 사경회 열기는 다른 지방의 열기를 압도했다.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던 평양은 관서지방의 기독교인들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다녀오기를 동경하는 곳이었다.10) 평양은 1893년에 장로교 선교가 시작된 뒤로 교세가 급속하게 늘어나 한국 최대의 기독교 도시로 성장했다. 1899∼1900년의 통계에 따르면, 평양의 장로교 교인은 2230명으로서 전국 교인 3690명의 60.4%를 차지했으며,11) 예배당 수도 1901년의 경우 185개 처로서 전체 237개 처의 78.1%나 되었다.12)
 
  평양의 어느 예배당이나 금강산 어느 기도원에서 사경회가 있다고 하면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902년 1월에 개최된 한 사경회에는 400여 명이 모였는데, 이들은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에서뿐만 아니라와 서울과 멀리 전라남도 무안과 목포에서까지 먹을 양식을 짊어지고 찾아온 사람들이었다.13) 감리교에서 발간한 「대한크리스도인회보」는 金龜가 참석하기 이태 전에 평양에서 열린 한 사경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우리 교회에 유익한 것은 성경을 공부 함이라. 이럼으로 지난 해 음력 십이월 이십일 위시하여 사경회를 실시하였는데, 각처 교우들과 본교회 형제 자매 중 공부를 힘쓰는 사람 사십여 인이 목사집에 모여 제제히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아침 아홉 시로 열한 시까지는 「로마인서」를 공부하고, 오후 두 시로 네 시까지는 「요한」 일이삼서와 「디도서」와 「아가서」를 공부하여, 한 달 동안에 하나님의 묵우(默祐:말없이 도움)하신 은혜와 목사의 성실히 가르침으로 형제와 자매들이 마음이 더욱 굳건케 하였사오니 감사하옵니다〉14)
 
  사경회에 한번 다녀오면 성경지식은 말할 나위도 없고 교회에 대한 일반상식을 얻고 신앙이 성장했기 때문에 어느 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리게 되면 너나할 것 없이 참가하여 일종의 유행처럼 되었다.15)
 
  평양 사경회의 그러한 성경학습 분위기 속에서 金龜 역시 얼마나 열성적으로 성경을 공부했을 것인지는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백범일지」 친필본에는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대목이 있다.
 
  〈…그리하여 耶蘇聖書에 肉體는 魔鬼를 服從하고 靈魂은 上帝를 服從한다는 것을 더욱 意味깊게 생각하고…〉16)
 
  이 구절은 「로마서」 7장 25절의 〈그런데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서, 「백범일지」 전체를 통하여 유일한 성경 인용이다. 金龜는 이 성경구절을 감옥에서 모진 고난을 당하던 때를 회상하는 대목에서 인용했는데, 친필본의 원고에는 지우는 줄이 그어져 있어서 그 뒤의 필사본이나 국사원본에서는 삭제되었다. 성경 구절을 썼다가 지운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金龜가 기독교에 입교한 초기에는 종교를 단순한 교육운동의 수단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17)
 
 
  평양 사경회에서 吳舜炯 만나
 
  金龜는 이때의 사경회에서 성경공부와 교육자로서의 기초과정을 익혔는데, 특히 평양에 모인 기독교 지도자들과 신교육 운동가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신교육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데 매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이 겨울사경회에서 長連(장련) 출신의 숭실학교 학생 吳舜炯(오순형)을 만났다. 오순형은 장련의 갑부 吳寅炯(오인형) 진사의 막내동생으로서 1903년 10월에 숭실학교에 입학했었다. 그는 공부는 잘했으나 입학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무렵의 숭실학교는 전교생 70여 명이 모두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기독교적인 교풍이 강했다. 그리하여 오순형도 자연스럽게 기독교에 입교했고 평양 시내에 나가서 거리 전도를 할 만큼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18) 1903년의 겨울 사경회에는 황해도 신자들이 많이 참가했기 때문에 오순형도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이 사경회에 참가했던 것 같다. 오인형과 친교를 맺고 있던 金龜는 오순형과 함께 사경회에 참가하면서 그와도 친숙해졌을 것이다. 두 사람은 사경회가 끝나고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발발하여 일본군이 평양으로 진군하자 장련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金龜는 곧바로 장련의 社稷洞으로 이사했다. 1904년 2월의 일이다.19)
 
  장련은 고려시대의 長命鎭(장명진)과 連豊莊(연풍장)이 합쳐져 생긴 지명으로서 1895년에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郡으로 승격되었다가 1909년에 殷栗郡에 통합되었다.20) 장련은 황해도 북부의 조그마한 소읍이나 文廟(문묘)가 두 개나 있을 만큼 유교적 전통이 강한 고장이다. 그러나 강을 사이에 두고 평안도 삼화군 및 진남포와 인접해 있어서 海州보다도 평양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아왔다. 그리하여 기독교를 비롯한 西洋文化의 수용도 쉽게 이루어졌다.
 
  장련에는 金龜의 재종조부가 살고 있었다. 金龜는 어린 시절 순영 내외가 순영의 병치료를 위해서 각지를 떠돌아다닐 때에 잠시 장련 재종조부의 누이 집에 맡겨진 적이 있었다. 이때에 金龜는 그 집 주인과 함께 구월산에 가서 나뭇짐을 해오곤했다. 그리고 동학농민전쟁 때에 해주성 공략에 실패한 金龜가 농민군을 이끌고 구월산에 은거하면서 만났던 禹鍾瑞, 宋宗鎬, 許坤 등은 장련 출신이거나 장련 가까이에 살고 있었다.
 
 
  吳진사네 사랑에 예배당과 學校 개설
 
  金龜가 장련으로 이사한 계기는 오인형 진사의 호의에 따른 것이었다. 신교육운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오인형은 金龜가 경제적인 걱정없이 교육사업에 전념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그는 사직동에 새로 산 집과 그 집에 딸린 산림과 과수와 20여 마지기의 전답을 金龜에게 내어 주었다. 그리고 농사에 부릴 소도 한마리 사 주었다. 金龜는 곧 해주 고향에서 사촌형 泰洙 내외를 이사오게 하여 농삿일과 집안일을 맡기고 자신은 교회일과 교육활동에 전력했다.21) 동학농민전쟁 때에는 군자금을 대는 등으로 농민군 토벌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22) 오인형이 동학농민군 대장이었던 金龜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오인형이 金龜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한 데에는 오순형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金龜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오순형은 맏형을 설득하여 그의 집 사랑에 예배당을 개설했다. 오순형과 김구는 전도에 열성을 기울였다. 그들은 장터에 나가서 전도했고, 농부들이 일하다가 쉬는 들판에서도 전도했다. 그리하여 곧 40명이 모여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었다.23) 이때의 일을 베어드 목사는 그의 개인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황해도에서 온 학생 오씨는 작년 가을에 초신자로 입학했다. 그는 지방의 부유한 양반집 자제이다. 그는 학교의 일반적인 영향과 가르침에 의해 기독교가 진리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집으로 돌아간 뒤에 고향의 이웃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열심히 전도했다. 러·일전쟁으로 학교에 돌아올 수 없게 되자, 집에 남아서 사랑방에서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길에 나가 장날에 모인 군중들에게 전도했다. 그 결과 한 무리의 신자가 모여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24)
 
  金龜는 오순형과 상의하여 오진사의 큰 사랑에 학교를 열었다. 사실 이 교육사업이야말로 金龜가 일찍부터 꿈꾸어 온,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소규모로나마 실천해 온 사업이었다. 우선 오진사의 큰딸 信愛와 아들 基秀, 吳鳳炯의 두 아들과 吳勉炯의 자녀, 오순형의 두 딸을 학생으로 삼고, 학교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자녀 몇 명을 더 모집했다. 金龜는 방 한가운데를 칸막이로 막고 남녀의 자리를 구별하여 앉혔다. 이 학교가 光進學校였다.
 
  그런데 이 학교의 설립과정에 참여한 白南薰은 이때의 일을 「백범일지」의 술회와는 다르게 회고하고 있다. 학교를 개설한 시기도 1년의 차이가 있으나 구체적인 상황설명은 백남훈의 기록이 훨씬 자세하다.
 
  〈가르쳐야 하겠다는 생각은 간절했으나 건물도 없고 유지할 基金도 없어서 매일과 같이 모여서는 空論과 같은 의논을 거듭한 결과, 예배당(오씨의 사랑)을 교사로 하여 교인의 자녀만이라도 가르치기로 하는 동시에 교회에서 損補(연보:헌금)하기로 결정하고, 4월 어느 주일예배 후에 이에 관한 설명과 동시에 연보를 청하였던 바 300량 가까이 損出(연출)되어 일동은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1905년 9월1일에 장련 예수교회가 설립한 광진학교는 예배당에서 개교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당일에 모인 아동은 10여명에 불과하여 대단히 영성한 느낌이 있었으나 이는 처음부터 예상했던 바이매 시일의 경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교과서는 이때까지도 없는 형편이어서 국문 가르치는 것을 주로 하고 「심상소학」, 「유년필독」, 「동국역사」, 「성경」, 「산술」 등이었다. 金洛現(孫泳坤)씨가 교장이고 내가 교원격이었다.〉25)
 
  광진학교 시절에 金龜와 백남훈이 교사로서 함께 학동들과 같이 찍은 사진이 보존되고 있어서 이때의 사정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사진은 1906년의 것으로서, 현존하는 金龜의 사진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사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학교 교원들인 金龜, 백남훈, 손영곤, 崔商崙(최상륜)의 개성 있는 차림이다. 백남훈은 중절모에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었고, 손영곤 역시 중절모에 양복을 입고 수염을 길렀다. 이들 두 사람은 코흘리개 시골아이들의 선생으로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세련된 멋쟁이 모습이다. 반면에 김구는 짧게 깎은 머리에 물들인 바지저고리를 입고 광대뼈가 불거져 나온 투박스러운, 그러면서도 퍽으나 순박해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최상륜은 망건을 쓰고 흰 두루마기를 차려 입었는데, 그는 원래 열렬한 천주교인이었다가 기독교로 개종하여 장련교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26)
 
 
  머리 깎기 때문에 아이들을 학교 안 보내
 
  학교를 개설하고 나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학생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金龜는 적령기의 아이가 있는 집을 찾아다녔다. 학생모집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머리를 깎는 것이었다. 학부모들은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머리를 깎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金龜는 『아이들의 머리는 깎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아이들을 모아야 했다.
 
  이미 10년 전에 단발령이 선포되었으나 제대로 시행된 것은 아니어서 시골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머리를 깎지 않고 있었다. 이무렵 기독교에 입교하여 머리를 깎았던 백남훈의 회고에 따르면, 장련에는 단발한 사람은 두세 사람밖에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단발한 사람을 일종의 정신이상자로 생각했다고 한다. 누가 머리를 깎으면 『집안이 망했다』고 하여 문중 전체가 심한 비난을 하기도 했다. 기독교에 입교한 사람들은 그 표시로 단발을 행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여간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 가면 머리를 깎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金龜는 단발의 필요성을 설득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했다. 아이들 가운데에는 부모들이 머리를 자주 빗겨주지 않아서 머리에 이와 서캐가 가득 낀 아이들도 있었다. 金龜는 얼레빗과 참빗을 사다두고 매일 몇 시간씩 아이들의 머리를 빗겼다. 점차 학생 수가 늘어나자 수업하는 시간보다 머리 빗기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이렇게 하여 학생들이 확보된 뒤에는 부모들을 설득하여 아이들의 머리를 깎으려 했다.
 
  그러나 그 일은 좀처럼 진전되지 않았다. 김구는 사직동에서 이태 가량 살다가 장연읍으로 이사하여 鳳養學校에서 근무했는데, 이때의 일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孫斗煥에 관한 에피소드를 「백범일지」에 적고 있다. 손두환은 뒷날 臨時政府의 의정원 의원을 역임하는 등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다.
 
 
  초립둥이 孫斗煥의 머리를 깎자 그의 아버지가 울어
 
  손두환은 영특한 학동이었다. 그는 중추원 의관을 지낸 孫昌濂(손창렴)이 늦게 얻은 아들로서 애지중지하는 초립둥이였다. 만약 金龜가 손두환의 아버지에게 아들의 머리를 깎자고 했다가는 도리어 퇴학시키겠다고 할지 몰랐다. 김구는 먼저 두환과 상의했다. 두환은 상투 짜는 것이 괴롭고 초립이 무거워서 머리 깎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어느 날 金龜는 두환의 머리를 깎고 집으로 보낸 다음 그의 뒤를 슬금슬금 따라가 보았다. 상투가 잘린 아들의 모습을 보자 두환의 아버지는 눈물을 비 오듯이 흘리며 분노했다. 그러나 그는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을 차마 심하게 꾸중할 수는 없었다. 결국 金龜에게 모든 분풀이를 할 참이었다. 그런데 김구를 본 두환이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의 마음이 갑자기 변했다. 조금 전까지의 성난 모습은 사라지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도 기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선생님, 이것이 웬일입니까? 내가 죽거든 머리를 깎아 주시지 않고』
 
  金龜는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감님께서는 두환이를 지극히 사랑하시지요? 나도 영감님 다음으로는 사랑합니다. 나는 두환이가 목이 가는데 큰 상투를 짜고 망건으로 조르고 무거운 초립을 씌워두는 것이 위생에 큰 방해가 되기 때문에 아끼고 사랑하는 생각으로 깎았습니다. 두환이 신체가 튼튼해지면 영감님한테서 고맙다는 인사를 듣고야 말걸요』
 
  단발이 얼마나 심각한 문화충돌27) 현상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에피소드이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손두환은 金龜를 더 따르게 되었다. 얼마 뒤에 김구가 安岳으로 자리를 옮기자 손두환은 김구를 따라서 안악으로 유학했다. 손창렴도 아들을 따라와 객지생활을 하면서 아들을 뒷바라지했다.28)
 
  이 무렵 金龜는 장련 공립소학교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장련 공립소학교는 1900년 10월에 전국 각 군에 공립소학교를 설립할 때에 생긴 학교였다. 설립 당시에 학생으로 입학했던 백남훈의 회고에 따르면 교원이 서울에서 온다고 했으나 오지 않아서 한문에 조예가 깊은 許坤을 교원으로 초빙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허곤은 동학농민전쟁 때에 구월산에 머물던 金龜부대에 초빙되었던 학식 있는 선비였다. 개교 당시에 학생은 50여 명이었고, 한문의 실력에 따라 1, 2, 3반의 3년제로 구분하여 가르쳤다. 최고반인 1반에 입학한 백남훈은 1년쯤 배운 뒤에는 배울 교과서도 없고 온다던 교원도 끝내 오지 않아서 1903년 봄에 졸업식 없는 졸업을 하고 말았다.29)
 
  金龜는 허곤의 뒤를 이어 張義澤과 林國承(임국승)과 함께 이 학교에 근무했다. 이 무렵 황해도의 공립소학교로는 해주와 장련에 설립된 두 학교가 있었는데, 해주에서는 그때까지도 四書三經을 가르쳤으나, 장련 공립소학교에서는 교사가 칠판 앞에 서서 산술과 역사와 지리 등의 신식 교과목을 가르쳤다.30)
 
 
  安昌浩의 동생 信浩에게 마음 끌려
 
  전도와 교육으로 바쁜 나날을 보낸 金龜는 여름에 평양에서 열린 사범강습회에 참가했다. 이때의 사범강습회는 성경학습에 중점을 둔 겨울 사경회와는 달리 전문교원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적인 성격이 강했다. 평양 사범강습회에 참가한 金龜는 邦基昌(방기창)의 집에 묵었다. 방기창은 황해도 信川 사람으로서 일찍이 동학접주였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뒤에 평양 널다리골(章臺峴)교회 제1대 장로가 되어 安昌浩(안창호), 한진석 등과 함께 독립협회 평양지회의 지도자로 활동했고, 1907년에는 한국 장로교의 최초의 7인 목사의 한 사람이 된 인물이다. 방기창은 사범강습회에 참가한 여러 사람들을 자기 집에 묵게 했던 것 같은데, 어떠한 연고로 金龜가 방기창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金龜가 장련의 대표적인 기독교 활동가로 알려져 있었으므로 방기창이 다른 지역에서 온 지도자들과 함께 자기 집에 합숙하게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金龜는 방기창의 집에서 청년 교육운동가로 명성이 높은 崔光玉(최광옥)을 만났다. 김구보다 세 살 아래인 최광옥은 숭실학교의 제1회 졸업생이었는데,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그는 교육사업뿐만 아니라 한글연구에도 열성이어서 그가 집필한 「국어문전」이 소학교의 교과서로 사용될 정도였다. 김구는 최광옥으로부터 신교육운동의 이론과 실천방법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최광옥을 만나 〈친밀히 교제하면서 장래 일을 의논했다〉31)는 「백범일지」의 기술은 이때에 두 사람이 나눈 동지적 우정과 포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강습회가 끝나는 날 최광옥이 金龜에게 혼인을 했는지 물었다. 김구는 최광옥에게 여러 차례의 불행했던 약혼실패의 일을 대충 말해 주었다. 그러자 최광옥은 安昌浩의 누이동생인 安信浩(안신호)를 한번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그는 안신호가 사람됨이 매우 활달하고 처녀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하다고 소개했다.
 
  최광옥은 안창호가 세운 계몽학교(뒤에 점진학교로 개명)에서 잠시 아이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32) 그 때문에 최광옥은 안신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안신호는 열네 살 때에 안창호를 따라서 서울에 올라가 貞信女學校에 입학하여 신식교육을 받은 신여성이었다. 정신여학교 재학시절에 성적도 우수하고 성격이 활발하여 모든 면에서 오빠인 안창호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33)
 
  金龜는 안신호를 직접 만나 보고 서로 뜻이 맞으면 혼인하기로 하고, 李錫寬(이석관)의 집에서 최광옥과 이석관과 함께 그녀를 만났다. 이석관은 안창호의 서당 훈장이자 장인이었다. 「백범일지」는 이때의 일에 대해 〈신호를 면대하여 몇 마디 의사교환을 한 뒤에 숙소로 돌아왔더니…〉라고만 적었을 뿐 어떤 말을 주고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이는 如玉을 처음 만났을 때의 상황을 자세히 적고 있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그것은 아마도 안창호의 누이라는 점에서 만나기 전에 이미 웬만큼 호의를 가지고 있었고, 대화의 내용도 자세히 적을 만큼 두드러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숙소로 돌아와 있으려니까 최광옥이 뒤따라와서 어떠냐고 물었다. 金龜는 자신의 뜻에 맞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최광옥은 신호의 뜻도 그렇다면서 金龜에게 이튿날 아주 약혼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오라버님으로 섬기겠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혼담은 뜻밖에도 하루 만에 깨어지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이석관과 최광옥이 함께 金龜를 찾아왔다. 두 사람은 신호가 전날 저녁에 편지 한 통을 받고 밤새껏 고민한 사연을 전해 주었다. 미국 유학을 떠난 안창호가 중국을 거쳐 가면서 上海에 들러 학업 중인 梁柱三(양주삼)에게 동생 신호와 혼인하라고 말했었다고 했다. 이를테면 구두 정혼 비슷하게 해 놓았다는 것이었다. 안창호는 1902년 9월경에 부인 이혜련과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났는데, 이때에 上海에서 양주삼을 만났었다. 평안남도 용강 출신인 양주삼은 미국 선교사의 주선으로 1901년에 上海 中西書院에 입학하여 수학하고 있었는데, 그를 서양 선교사에게 소개한 사람이 바로 안창호였다.34) 양주삼은 안창호를 형님이라고 불렀고, 두 사람은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서신왕래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 가운데에서 3통이 현재 보존되어 있다.35)
 
  그때에 양주삼은 안창호에게 혼사문제는 학업을 마친 뒤에 결정하겠다고 대답했었다. 그런데 안신호가 金龜를 만나고 집에 돌아가자 마침 양주삼에게서 학업을 마쳤으니 혼인 여부를 통보해 달라는 편지가 와 있었다는 것이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공교로운 일이다. 최광옥은 이 때문에 신호가 밤새껏 고민을 하고 있으니까 다시 확정된 의사를 듣고서 떠나라고 金龜에게 말했다.
 
  아침식사를 마친 뒤에 최광옥이 다시 와서 안신호의 결심을 전했다. 신호의 입장으로서는 도의상 두 사람 가운데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양쪽을 다 단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신호는 두 사람은 거절하고 이미 청혼을 받고도 몸이 약한 점을 꺼려서 승낙하지 않았던 金聖澤(김성택)을 택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김성택은 안신호와 어려서부터 한 동네에서 같이 자란 사람이었다. 그는 이듬해인 1905년에 평안남도 江東郡 元灘面 松塢洞교회가 설립될 때에 장로로 장립되었으며, 그 뒤에 진남포에서 목사가 되었다.36)
 
  그런데 「백범일지」의 이러한 서술은 다소 의아스러운 느낌이 없지 않다. 안신호가 자신이 구두로나마 양주삼과 정혼한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金龜와 맞선을 볼 까닭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신호와의 혼담이 깨어진 양주삼은 귀국하지 않고 1905년 10월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하여 한국인 감리회를 설립하고 선교사업에 열중한다.37) 1908년에 張仁煥(장인환)과 田明雲이 대한제국의 외교고문 스티븐스(Durham W. Stevens·한국명 須知分)를 저격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양주삼이 통역으로서 두 사람을 변호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다.
 
  얼마쯤 있다가 안신호가 직접 金龜를 찾아왔다.
 
  『지금부터 오라버님으로 섬기겠습니다. 매우 미안합니다. 저의 사정이 그리된 것이오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金龜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혼담은 깨어졌으나 김구는 신호의 결단력과 도량을 보고 더욱 그녀를 흠모하게 되었다.38) 김구는 이때의 일이 몹시 아쉬웠던 것 같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체념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나 정리상에 매우 섭섭하였다〉39)는 「백범일지」의 표현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이때의 애틋했던 심정이 추억으로 남아 있었음을 말해 준다.
 
 
  崔光玉을 長連으로 초빙해 와
 
  사범강습회를 마친 김구와 오순형은 여름 지도자 사경회까지 남아서 참석했다. 장련으로 돌아올 때에 그들은 崔光玉을 초빙하여 같이 왔다. 이때의 상황은 1904년 9월의 베어드 목사의 개인보고서에 요약되어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들(金龜와 오순형)은 숭실학당을 올해 졸업하고 학교 교사로 있는 최광옥에게 함께 가서 전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최씨는 이를 받아들여 같이 갔는데, 가는 길에 배에 탄 사람들에게 전도를 했다. 이 때에 信川에서 온 두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장련 집에 도착하여 최씨는 저녁마다 사랑방에서 전도하고, 모인 신자들의 믿음을 북돋우었다. 얼마 뒤에 그는 평양으로 돌아왔는데, 오씨의 형 집안 사람 다섯 명이 새로 믿기로 결심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40)
 
  이처럼 金龜와 오순형은 그들의 일에 열성을 쏟았다. 두 사람의 노력으로 1년도 채 안 되어 교세가 확장되고 학교도 점차 발전했다. 주색잡기에 빠져서 방황하던 白南薰을 인도하여 기독교를 믿게 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고 김구는 술회하고 있다.41)
 
  그러나 백남훈의 이야기는 다르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에 입교하게 된 것은 金龜에 끌려서가 아니라 교회를 설립한 오순형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 오순형은 백남훈의 이종형이었다. 또한 자신이 잘못을 뉘우치고 주색잡기를 끊게 된 계기는 아버지의 친구인 朴鳳瑞(박봉서)가 초달을 하면서 일깨워준 충고 때문이었다는 것이다.42) 백남훈이 이 무렵의 김구와의 관계에 대해 이처럼 데면데면하게 적고 있는 것은 해방 이후에 그가 소속한 韓民黨과 金九 중심의 臨時政府(韓獨黨) 세력과의 격심한 알력에 기인하는 점이 없지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郡守 부탁으로 海州 가서 뽕나무 묘목 받아와
 
  교인수와 학생수가 점차 늘어나자 새로 예배당과 학교를 짓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리하여 교인들의 기부금을 모아서 養士業洞의 한 집을 사들여서 교회와 학교를 그곳으로 옮겼다. 이 과정에 대해서 백남훈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 교인도 증가되었으나 예배당을 마련하기에는 아직도 경제의 힘이 연약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언제까지나 오씨의 사랑에서 예배를 볼 수 없으므로 뜻 있는 사람들은 은근히 걱정하였으나 딴 도리가 없다. 교회 임원들은 수차 회합하여 난상 토의한 결과 연보를 걷되 몇 번이든지 될 때까지 하여 보기로 결정하고 1906년 9월 어느 주일예배 후 연보를 청하였더니 천량이라는 놀라운 숫자에 달하여 장내는 기쁨에 넘쳐 피차 손을 잡고 감격의 연발이라. 마침 이때에 養士業洞에 적당한 집이 있어서 곧 매입하기로 계약하였다. 내방 세 칸, 사랑 세 칸, 이것을 ㄱ자로 통하면 당시 예배당으로 적당하였고, 건너방 두 칸은 관리인이 거주하기에 충분하며, 앞마당(양사업동의 타작마당)이 넓어서 학교를 옮겨도 운동장으로 사용하는 데에 지장이 없는 것이다. … 이와 같이 예배당이 따로 있게 되매 학교도 새 예배당으로 옮기게 되었다. 어찌 된 일인지 그후는 아동이 늘어 50여 명에 달할뿐더러 非敎人 가정에서도 아동을 보내게 되어 일종의 전도기관인 느낌이 있는 동시에 그때에 100여 명의 아동을 가르치는 공립학교에 비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는 교육기관이었다.〉43)
 
  金龜의 전도활동과 교육사업이 날로 진전하자 그의 명성이 점차 군내에 알려지게 되었다. 어느 날 金龜는 장련 군수 尹龜榮(윤구영)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 가서 만났더니 윤구영은 지금 정부에서 양잠업을 장려할 목적으로 해주에 뽕나무 묘목을 내려보내고 이를 각 군에 분배하여 심게 권장하라는 공문이 왔다고 말했다.44)
 
  한국의 자연 조건은 養蠶(양잠)에 적합한 지역으로 일찍부터 알려져 왔다. 그러나 조선 초에는 양잠업이 주로 지배층을 위한 官營手工業의 원료수급용으로만 이루어져서 농민의 家內手工業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비단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여 외국으로부터 수입이 급증하면서 정부에서 양잠업을 장려하게 되었다. 그러나 양잠의 생산량이 지방관리들의 인사고과 점수의 기준으로 반영되면서 관리들이 농민들에게 뽕나무 재배를 강제하여 폐단이 늘어났다. 또한 청국산 비단을 선호하는 사회풍조 때문에 국산 비단의 소비가 촉진되지 않자 양잠업은 부진을 면치 못했고, 민간의 뽕나무 재배도 감소했다.
 
  그러나 개항을 전후하여 정부는 조선의 풍토에 적당한 산업으로 잠업을 중시하여, 국민들에게 뽕나무 재배와 명주짜기를 적극 권장했다. 잠업기술을 지도하는 전문서적들을 편찬하고, 「養桑規則」, 「農桑新法」 등을 마련하여 각 도에 시달하고, 잠업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蠶桑公司(잠상공사)도 설치했다.45) 잠상공사는 독일인 메르텐스(A. Maertens)를 고빙하여 경영 및 기술지도를 받았고, 高宗도 경복궁의 영추문 근처를 뽕밭으로 할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의 잠업장려 정책도 재정의 궁핍으로 메르텐스를 비롯한 고용인들의 봉급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못하고, 전문적인 기술자들의 부족으로 성과를 보지 못하고 실패했다.
 
 
  淸國 비단 때문에 양잠업 발전 못 해
 
  1890년대에 접어들어 청국 비단이 대거 수입되자 정부가 직조기계를 발명하고 비단 생산공장을 세우는 등 양잠에 대한 관심이 더욱 고조되었다. 그리하여 1900년 3월에는 農商工部에 蠶業課(잠업과)를 새로 설치하고 기술개발을 추진했다. 새로운 품종의 뽕나무와 뽕나무 종자를 준비하여 1년에 일여덟 차례 누에를 칠 수 있는 양잠법의 보급을 추진했다.
 
  잠업시험장과 인공양잠전습소도 설립했다. 잠업시험장은 1901년 1월부터 양잠의 전습을 개시하여 학도모집 광고를 시작했고, 1904년에 관제개정이 있기 전까지 많은 졸업생을 배출했다. 여기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요원으로 전문관직에 임명되거나 지방으로 파견되어 잠업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를 계기로 각 지방에도 잠업시험장과 잠업회사를 중심으로 양잠을 하는 새로운 지역이 생겨났다. 지방의 잠업시험장 관리는 각부군의 관찰사가 중심이 되어 관할했으며, 정부에서는 각 도·군·면에 勸桑委員 1인을 파견하여 책임지고 관리와 운영을 하게 했다. 그러나 이 역시 재정궁핍으로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잠업과의 운영이 어려워지자 그 업무가 宮內府로 넘어가게 되어, 궁내부는 1902년에 公桑課를 신설했다. 공상과는 잠업의 진흥을 위해 13도 관찰사에게 훈령하여 각 군의 노는 땅 가운데에서 뽕나무 재배에 적당한 지역을 조사하게 했다. 그러나 이때의 뽕나무 재배는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있었다. 황해도는 양잠이 잘 되는 지역은 아니었다. 그 대신에 목화가 잘 되어 다른 지방으로 팔렸다. 1908년의 통계에 따르면 황해도는 양잠 호수와 뽕밭 규모가 함경북도 다음으로 가장 적었다.46)
 
  金龜가 장련군수로부터 해주에 가서 뽕나무 묘목을 받아오라는 부탁을 받은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있었던 일이다.
 
 
  걸어서 海州까지 가서 뽕나무 묘목 가져와
 
  해주에 가서 뽕나무 묘목을 받아다가 심게 하는 일은 군내의 토착 양반들이 영예직이라고 하여 앞다투어 맡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수가 김구에게 이 일을 맡긴 것은 首吏(수리) 鄭昌極이 김구를 적극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정창극은 비록 수리이나 이무렵의 다른 서리배들과는 달리 지극히 儉朴(검박)하여 옷도 노닥노닥 기운 것을 입고, 관에서 정한 요금 이외에는 한푼이라도 공금을 허투루 사용하는 일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郡守도 감히 백성들을 상대로 탐학을 하지 못했다.
 
  金龜는 이러한 정창극의 인품을 높이 사서 일찍부터 그와 교분을 맺고 있었다. 김구는 정창극을 말하면서 〈전국 제일이라는 全州 吏屬(이속)은 천역의 이름으로 재상의 권한을 가졌고, 각도의 이속이 모두 狐假虎威(호가호위:남의 권세를 빌어 위세를 부림)로 양반에 의뢰하여 양민을 도적같이 약탈하는 시대에 정창극은 九牛一毛처럼 귀한 존재라 하겠다〉라고 격찬하고 있다.47)
 
  金龜는 장련군수의 요청이 〈民生産業에 관계되는 지극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정창극은 김구에게 200냥을 여비로 주면서 말했다.
 
  『해주에 가면 관찰부에 농상공부 주사들이 뽕나무 묘목을 가지고 와 있을 터이니, 한번 청해서 연회나 열고, 부족액은 돌아온 뒤에 다시 청구하시지요』
 
  金龜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고 길을 떠났다. 교통 수단은 말을 타든 가마를 타든 마음대로 하라고 했으나 金龜는 걸어서 해주까지 갔다.
 
  해주에 도착하여 金龜는 관찰부에 공문을 전달했다. 다음날 아침 관찰부의 부름에 따라서 들어가자 農商工部에서 파견된 주사가 장련으로 할당된 뽕나무 묘목 수천 그루를 가져가라고 주었다. 그런데 金龜가 뽕나무 묘목을 살펴보니까 묘목이 다 말라 있었다. 담당 관리의 이러한 처사로 미루어 보아 이 무렵 정부의 적극적인 양잠장려 정책에도 불구하고 실무 책임자들이 얼마나 무성의하게 업무를 추진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金龜는 크게 분노했다. 그는 주사에게 묘목을 가져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주사는 발끈 화를 내고 「상부명령 불복종」이니 어쩌니 하면서 협박했다. 金龜는 성난 목소리로 호령하듯 말했다.
 
  『주사는 경성에 살아서 장련이 산골 군임을 알지 못하시나 봅니다. 장련군에도 땔나무는 충분하여 다른 군에 의뢰할 필요가 없거늘, 먼 경성까지 땔감을 구하러 왔겠소이까. 당신이 본부에서 뽕나무 묘목을 가지고 온 사명이 묘목의 생명을 보호하여 나누어 주어서 심게 하는 것이거늘, 이같이 묘목을 말라죽게 해 가지고 위협으로 분배하니 그 책임 소재를 알고자 합니다. 나는 관찰사에게 이 사유를 보고하고 그냥 돌아가겠소이다』
 
  이 말에 겁이 난 농상공부 주사는 金龜를 달래려고 애를 썼다.
 
  『장련으로 갈 뽕나무 묘목은 귀하가 산 묘목으로만 직접 골라서 가져가시오』
 
  이렇게 하여 金龜는 모두 산 묘목으로만 골라 가지고 숙소로 돌아왔다. 묘목에 물을 뿌리고 보호했다가 말 한 필에 싣고 장련으로 돌아왔다.
 
  金龜는 정창극에게 여비를 계산하고 남은 130여 냥을 돌려 주었다. 정창극은 여비사용 대장에 적힌 「짚신 한 켤레에 얼마, 냉면 한 그릇에 얼마, 떡과 馬貸(마대)와 밥값을 합해 총 70냥」이라는 내용을 보고 경탄했다.
 
  『우리나라 관리가 다 김선생 같으면 백성의 고통이 없겠습니다. 박가나 신가가 갔다 왔으면 적어도 몇백 냥은 더 청구했을 것입니다』
 
  金龜의 이러한 정직성과 공금 사용의 절제는 그가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는 성품을 일찍부터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며칠 뒤에 金龜는 농상공부로부터 뽕나무 묘목을 관리하는 種桑委員(종상위원)에 임명되었다. 金九가 「종상위원」이라고 기억한 이때의 직명은 아마 앞에서 본 「권상위원」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金龜가 생전 처음 얻은 관직이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군내 하인들과 노동자들 가운데에는 金龜가 지나는 곳마다 담뱃대를 감추어 경의를 표하는 사람이 있었다.48) 이러한 모습은 이무렵까지도 벼슬아치에 대한 백성들의 경외심이 어떠했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조카를 난봉꾼으로 여겼던 俊永도 놀라
 
  장련 사직동으로 이사한 이듬해 봄에 金龜는 해주 고향에 성묘하러 갔다. 고향을 떠나올 때까지도 金龜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던 작은아버지 俊永을 만나 장련생활을 보고했다.
 
  『사촌형제가 한집에 살면서 사촌형은 농삿일과 집안일 전부를 맡고, 저는 교육에 종사하여 생활이 안정되고 집안이 和樂합니다』
 
  준영은 조카의 말에 의아해했다.
 
  『너 같은 난봉꾼을 누가 도와 주어서 그렇게 사느냐?』
 
  『작은아버지 보시기에는 저의 난봉이 위험하지만, 난봉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도 더러 있는 게지요』
 
  金龜가 이렇게 대답하면서 웃자 준영은 다시 물었다.
 
  『네가 빈손으로 간 뒤에 네 사촌형도 뒤미처 가고, 네 사촌 매부 李用根의 식구까지 너를 따라가서 같이 산다니, 너는 생활 근거를 어떻게 하고 사느냐?』
 
  『제가 長連郡에 몇몇 친구가 있어서 그들이 오라고 청해서 이주했습니다. 친구 가운데 진사 오인형 군은 그 郡의 갑부였던 吳慶勝(오경승) 진사의 장손인데, 아직도 유산을 가지고 괜찮게 사는 처지입니다. 인형 군이 특별히 1000여 냥을 주고 전답과 과수밭이 딸린 집 하나를 사서 내어 주면서 언제든지 내 물건과 같이 사용하며 의식주의 근거를 삼으라 했습니다』
 
  金龜는 오인형이 농사짓는 데 부릴 소도 한 마리 사 주었고, 집안에 필요한 돈은 수시로 그에게서 얻어 쓴다면서 살림살이 내용을 일일이 보고했다.
 
  준영은 듣고 나서 말했다.
 
  『세상에 그렇게 후덕한 사람도 있느냐?』
 
  그는 조카의 말이 미덥지 않았던 것이다. 준영은 金龜가 무슨 협잡이나 하지 않는가 하고 의심했다. 그는 이웃 부호들의 자식들이나 조카들의 못난 행실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본사람에게서 돈 100냥을 빌려 쓰면서 증서에는 1000냥이라고 써주어 일본사람은 그 1000냥을 다 받아내는데, 당사자의 자산이 부족하여 친척들이 대신 물어주는 것을 준영은 자주 보아왔다. 때문에 그는 金龜가 서울도 가고 남도에 왕래하는 것이 혹시 일본사람의 돈이나 얻어 쓰고 다니지 않나 해서 金龜가 어디를 간다고 하면 야단부터 쳤던 것이다.
 
  그해 가을에 준영이 장련으로 金龜네 식구를 보러 왔다. 사직동 집이 집만 좋을 뿐 아니라 추수한 곡물도 자기 집 살림보다 나은 것을 보자 준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오진사를 찾아보고 와서 곽씨부인에게 말했다.
 
  『조카가 다른 사람에게 그같이 신뢰받을 줄은 생각 못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준영은 조카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 그 뒤로 그는 金龜를 매우 사랑하게 되었다.49)
 
 
  柳完茂가 찾아와 北間島로 가자고 제의
 
  어느 날 柳完茂와 강화의 朱潤鎬 진사가 金龜를 찾아왔다. 아버지의 병환을 걱정하면서 황급히 서울을 떠나온 뒤로 柳完茂를 만나지 못하여 소식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유완무는 그동안 北間島에 가서 管理使(관리사) 徐相懋(서상무)50)와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하고 왔다고 했다.
 
  그런데 이때의 간도관리사는 서상무가 아니라 李範允(이범윤)이었다. 그러므로 「백범일지」의 이러한 기술은 유완무가 이범윤을 서상무로 잘못 말했거나 김구가 잘못 적은 것일 것이다. 서상무는 1897년에 西間島 지역 韓人 이주민의 보호와 관리를 위해서 西邊界管理使로 임명된 인물이었는데, 비행이 심하여 韓人 이주민들로부터 오히려 배척을 받았고, 그 때문에 관리정청은 설치된 지 1년도 못 되어 폐지되어 버렸다.51)
 
  그 뒤에 다시 파견한 관리가 이범윤이다. 이범윤은 1902년 6월25일에 間島視察使의 자격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간도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호적을 조사하여 등록했는데, 이때에 등록된 한국인은 2만7400여 호에 10여만 명에 이르렀다. 이범윤은 1년 동안 청국관원들의 한국인 이주민에 대한 온갖 가렴잡세를 상세히 조사하여 정부의 강력한 대책을 촉구했다.
 
  정부는 그의 활동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1903년 10월에 그를 간도시찰사에서 間島管理使로 승격시켰다. 간도관리사로 임명된 이범윤은 鎭衛隊와 邊界警務官들에게 자신의 신변보호를 요청했으나 그들은 무기가 부족하고 상부의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정부의 허가 없이 독자적으로 山砲手와 본국에서 건너온 구한국 군인 및 의병들을 모집하여 私砲隊(忠義隊, 管理兵 등으로 불렀다)를 조직했다. 그리고 이 사포대를 배경으로 청국이 임명한 鄕約을 잡아가두는 등 청국관리들의 횡포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다. 그는 한국인 이주민들에게 청국관리에게 조세를 바치지 말도록 포고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체포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추방했다. 그리하여 청국 관민들은 이범윤을 호랑이보다 더 무서워했다.52)
 
  그러나 이범윤의 활동은 청국과의 외교분쟁으로 발전하여 청국 정부는 한국 정부에 이범윤을 퇴거시킬 것을 요청해 왔다. 1904년 6월15일에 양국 정부 사이에 「韓淸邊界善後章程」이 체결되어 한국 정부가 간도지역에 대한 청국의 관할권을 인정함으로써 국경분쟁은 마무리되고 말았다.53) 이 장정이 체결됨에 따라 사포대는 해산되고, 이범윤에게는 철수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그는 소환에 응하지 않고 부대를 거느리고 沿海州(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54)
 
  유완무가 언제 북간도를 시찰하고 돌아왔는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아마도 그는 이범윤이 간도관리사로 있던 1903∼1904년 사이에 북간도를 다녀온 것으로 짐작된다. 독립운동가들의 해외근거지 계획이 구체적으로 논의되는 것이 1905년의 을사늑약 이후인 점을 감안하면, 그 이전부터 추진된 유완무의 해외이주 계획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북간도에 가서 관리사와 앞으로의 활동계획을 협의한 유완무는 같이 북간도로 갈 국내 동지들을 구하러 일시적으로 귀국했다. 유완무가 金龜를 찾아온 것도 그러한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유완무와 주윤호는 며칠 동안 머물렀는데, 「백범일지」는 세 사람이 〈어머님이 삶아준 밤과 닭고기를 먹으면서, 연일 밤을 세워 품은 생각을 털어놓고 여러 가지 일을 토의했다〉55)고 적고 있다. 그러나 밤을 세워 토의한 「품은 생각」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유완무는 金龜더러 같이 북간도로 가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구축하는 일을 하자고 제의했고, 金龜는 그보다는 국내에서 2세국민을 가르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金周卿은 붓행상으로 큰돈 모았다가 客死해
 
  金龜는 강화 김주경의 일이 궁금하여 유완무에게 그의 소식을 물었다. 그러자 유완무는 탄식하며 알려 주었다. 강화를 떠난 김주경은 10여 년 동안 붓행상을 하면서 수만원의 금전을 모았다고 했다. 그렇게 모은 돈을 자기 몸에 간직하고 다니다가 작년에 延安에서 불행히도 객사했다는 것이었다. 김주경의 아들이 이 사실을 알고 주인을 찾아가서 소송까지 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김주경이 그처럼 부모나 친척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 행상으로 거액의 돈을 모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어떤 큰 계획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다시는 이 세상에서 김주경의 큰 포부와 책략을 알 길이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김주경의 셋째 동생 김진경마저 전라도에서 객사하여,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라고 했다.
 
  金龜는 이때에 헤어진 뒤로 유완무와 다시 만나지 못한다. 다만 뒷날 「백범일지」를 집필할 때에 유완무는 북간도로 가서 白樵(백초)라는 가명을 쓰면서 활동하다가 누구에겐가 피살되었고, 그 아들 한경은 「백범일지」 상권을 집필하던 1929년 무렵까지 북간도에서 살고 있다고 적었다.56)
 
  유완무가 北間島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다. 그러나 그는 그 뒤에도 국내를 내왕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유완무는 1908년 1월에 대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張志淵(장지연)을 만났고, 그해 4월에는 함경도 利原에서 장지연에게 편지를 보냈다. 또한 그는 국민사범학교를 졸업한 趙昌容이라는 청년에게 자신의 명함을 주어서 장지연에게 보내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동행하게 했다.57) 유완무가 함경도 이원에서 장지연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길에 보낸 것일 것이다. 또한 그가 1908년 12월경에는 共立協會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설립 모임에 블라디보스토크 신입회원으로 참가하고,58) 이듬해 1월7일에는 大韓人國民會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지방회 설립대회에 회원으로 참가한 것59)으로 보아서 1908년 12월 무렵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1908년 이전에 북간도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을 것이다. 공립협회는 1905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를 초대회장으로 하여 설립된 韓人단체로서, 미주뿐만 아니라 국내와 연해주와 만주에도 지회를 설치했었다. 그리고 유완무가 피살되었다면, 그것은 1909년 1월 이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沿海州 지역은 서북간도와 함께 해외이주 韓人사회가 가장 먼저 형성된 곳으로서 1911년 무렵에는 이주韓人 수가 20만 명으로 일컬어질 정도였다.60) 특히 연해주 지역은 러시아령에 속했기 때문에 일제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면서 지리적으로 국내와 가까워서 만주와 러시아의 韓人들을 연결하기가 비교적 쉬웠고, 토질도 비옥해서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초기에는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건너간 가난한 이주 농민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을사늑약 이후에는 독립운동을 위한 정치적 망명이 크게 늘어났다. 의병, 애국계몽운동, 신민회, 기독교, 대종교 등 다양한 운동세력들이 모여들어 곳곳에 韓人촌락을 건설하여 연해주 남쪽 지방은 국경의 구분이 서지 않았으며, 마치 한국의 연장지와도 같았다. 이렇게 하여 건설된 것이 新韓村(신한촌)이었다.61)
 
 
  선교사들이 金龜의 결혼 반대
 
  장련에서 생활하는 동안 金龜에게 개인적으로 가장 뜻깊었던 일은 결혼을 한 것이다. 곽씨부인은 장련으로 이사한 뒤로 살림살이 걱정은 없어졌으나 외아들인 金龜가 서른이 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여간 안타깝지 않았을 것이다. 동학농민전쟁이 터지자 아들을 함지박 장수 김치경의 딸과 성혼시키려고 서둘렀던 일이며, 결국 그 일 때문에 高能善의 손녀와 다 된 혼사가 깨지고 말아 아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아들이라도 미안쩍어서 혼인을 재촉하기도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如玉의 장사를 혼자 치렀을 아들의 모습을 상상하면 곽씨부인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을 것이다. 安信浩의 일은 몰랐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곽씨부인은 아들이 처복이 없다고 속으로 탄식했을 것이다.
 
  金龜는 김구대로 여러 차례의 혼담이 이런저런 이유로 깨어지거나 불행하게 끝나서 결혼에 대해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송구스러운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金龜를 중매한 사람은 이웃 信川郡의 謝平洞(사평동)교회 초대 장로 梁聖則(양성칙)이었다. 양성칙은 사평동교회가 설립되기 전인 1893년에 언더우드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교했으며, 사평동교회는 1907년에 예배당을 새로 건축했다.62) 金龜가 어떠한 계기로 양성칙을 알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백범일지」에도 아무런 언급이 없으나, 양성칙이 신천지방의 교회 지도자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가 이웃 장련지방에서 열심히 전도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노총각 金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은 당연하다. 양성칙은 金龜에게 자기 교회에 다니는 崔遵禮라는 여중학생과 결혼하라고 권했다.
 
  최준례는 그 동네에 살던 의사 申昌熙(신창희)의 처제였다. 준례의 어머니 김씨부인은 서울사람으로서 젊어서 남편을 잃고 두 딸을 기르며 기독교를 믿고 있었는데, 준례는 그녀의 둘째 딸이었다. 김씨부인은 濟衆院(제중원: 세브란스병원)이 구랫재(銅峴)에 세워졌을 때에 제중원에 고용되어 병원 안에서 얹혀 살면서 일하다가 신창희를 큰사위로 맞았다. 신창희는 제중원의 의과생으로 공부하다가 사평동으로 이사하여 개업했다. 이때에 준례는 여덟 살이었는데, 어머니와 같이 신창희를 따라와서 함께 살았다.
 
  김씨부인은 준례가 어릴 때에 이웃 동네에 사는 姜聖謨(강성모)라는 사람에게 준례와 혼인할 것을 허락하여 약혼을 한 셈이었으나, 준례는 성장한 뒤에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어머니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교회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선교사 헌트와 쿤스(Edwin Wade Koons:한국명 君芮彬) 등이 강성모와 결혼할 것을 권유했으나 최준례는 한사코 거부했다.
 
  1897년 10월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한 헌트는 재령 선교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황해도의 기독교 선교활동에 큰 역할을 한 선교사였다.63) 쿤스는 같은 미국 북장로 교회에서 1903년 10월에 파견된 젊은 선교사였다. 쿤스는 재령에서 전도활동뿐만 아니라 명신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에도 열성을 쏟았다.64) 그러나 그는 뒷날 〈우리는 한국인들에게 그들의 의무는 일본에 복종하는 것이요, 그렇게 하되 달가운 마음으로 하고, 독립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고 권고했다〉고 고백할 정도로 기존체제를 옹호하고 기독교의 政治化와 社會參與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인물이었다.65)
 
  최준례의 나이는 열여덟 살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뜻에 맞는 남자를 골라서 자유결혼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양성칙은 金龜에게 그러한 준례와 혼인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어릴 때의 억지 약혼으로 말미암아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지니고 있는 金龜는 준례에 대해 지극한 동정심이 생겼다. 그는 사평동에 가서 준례를 만나 보았다. 그리고 곧 약혼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아마도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스스로 뜻에 맞는 남자를 선택하여 혼인하겠다는 준례의 당당한 태도가 金龜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뜻밖의 문제가 발생했다. 金龜가 준례와 약혼을 하려고 하자 강성모가 선교사에게 이 사실을 고발했고, 교회는 金龜에게 준례와의 약혼을 그만두라고 권고했다. 교회뿐만 아니라 金龜의 친구 가운데에도 만류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金龜는 교회와 주변 친구들의 권유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 무렵 신창희는 은율읍에 살고 있었는데, 김구는 준례를 사직동 집으로 데려다가 굳게 약혼을 하고 나서 서울의 敬信學校(경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혼담 다섯 번째 만에 장가들어
 
  선교사들이 金龜와 최준례의 혼인문제에 관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무렵의 교회는 교인들의 결혼을 비롯한 생활상의 문제에 상당한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인들의 혼인문제는 교회의 중요한 관심사항이었다. 이 무렵에 발행되던 기독교 신문들에는 혼인과 관련된 여러 가지 기사가 자주 실렸다. 어떤 교회에서는 결혼의 원칙을 발표하기도 했고, 혼인문제를 주제로 한 연설회나 토론회가 교회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또한 교회는 당사자의 의견을 무시하고 부모끼리 혼인을 결정하거나 조혼을 하는 폐단을 막기 위한 캠페인도 벌였다.66) 1905년에 결정된 규정에는 부당하게 결혼해서 사는 사람에게는 세례를 주지 않고, 축첩이나 이혼뿐만 아니라 이혼한 사람과의 결혼도 금지하며, 어린 나이에 미리 정혼하지도 못하도록 했다.
 
  이와 같은 규정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이 준례에게 강성모와 결혼할 것을 강압적으로 권유했다는 것은 적이 의아스럽다. 강성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밝혀진 것이 없다. 선교사들이 최준례에게 그와 결혼하도록 강력히 권유한 것은 그가 그 지역의 상당한 실력자로서 교회에 많은 공헌을 했거나 독실한 신자였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선교사들은 金龜가 금지 권고를 듣지 않자 책벌을 선언했다. 그러나 金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구식 조혼을 인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것은 교회로서 잘못이고 사회악풍을 조장하는 것이다』라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金龜와 최준례의 견결한 반발에 부딪친 선교사들은 마침내 두 사람의 결혼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쿤스는 혼례서를 작성하여 주고 金龜에 대한 책벌을 사면했다.67) 이러한 金龜와 외국 선교사들과의 반목은, 비록 결혼문제에 한한 것이기는 했으나, 培材學堂에 다닐 때부터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외국 선교사들의 온갖 도움을 받고 그들의 도움으로 미국에 건너가서 어렵지 않게 美國社會에 접근할 수 있었던 李承晩의 경우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렇듯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金龜의 나이 서른한 살 나던 1906년의 일이다.68) 그것은 고능선의 손녀딸과의 약혼 실패 이래 네 번째 만에, 김치경의 딸까지 합치면 다섯 번째 만에 이루어진 혼인이었다.
 
  사직동 생활은 그때까지의 김구의 생애에서 가장 풍성하고 안락한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직동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吳寅炯 진사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金龜가 사직동으로 이사할 무렵에 오인형은 어선업을 시작했었는데, 이태 만에 사업이 실패하여 가산을 몽땅 날리고, 그 일로 말미암아 병까지 얻어서 몸져 누었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농삿일과 집안일을 맡아보던 사촌형 泰洙는 어릴 적에는 일자무식이었으나 사직동에 온 뒤로 金龜를 따라 예수를 믿고부터는 국문에 능통해져서 성경과 그밖의 종교서적을 읽고 강단에서 敎理를 강의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 金龜는 앞으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그 역시 어느 날 뜻하지 않게 교당에서 예배를 보다가 뇌일혈로 쓰러져 그대로 사망했다. 金龜는 사촌 형수를 재혼하라고 권유하여 본가로 보냈다.
 
  金龜는 오인형 소유의 집과 전답 등을 그대로 차지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오인형의 유족에게 그것을 모두 돌려주고 사직동을 떠나서 長連邑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金龜가 愛國啓蒙運動에 글자 그대로 몸을 내어 놓는 것은 이때부터이다.●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17)
 
루스벨트 大統領을 만나다
 
● 李承晩은 아무런 공적 직함이 없는 신분으로 헤이 國務長官과 루스벨트 大統領을 만나서 大韓帝國의 독립유지를 위한 外交交涉을 벌였다. 그 교섭은 물론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나, 이때의 경험은 뒷날 그가 獨立運動方略으로 시시포스의 神話처럼 되풀이 하는 請願外交와 여론 환기 노력의 원형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金九가 國母報讐(국모보수)의 의분으로 변복한 일본인을 살해한 치하포 사건과 대비되는 상징성을 가지면서, 그의 名聲과 權威를 높여주는 근거가 되었다.

딘스모아와 함께 헤이 國務長官만나
<워싱턴의 아이오아 서클에 있던 大韓帝國 公使館. 1층은 공사관으로 쓰고 2,3층은 公館員들의 살림집으로 썼다.>

 李承晩은 1905년 새해를 워싱턴의 호텔방에서 맞았다. 그는 아침에 아이오와 서클에 있는 韓國公使館을 찾아갔다. 3층으로 된 공사관 건물은 큰 방이 9개나 있어서, 1층은 공사관으로 쓰고 2, 3층은 공관원들이 가족들과 함께 살림집으로 쓰고 있었다.
 
  李承晩은 그의 자서전 초고에서 이때에 서기관 홍철수(Hong Chul Soo)를 만났는데, 홍철수는 閔泳煥으로부터 자기가 올 것이라는 것과 자기의 사명에 대해 설명한 편지를 받은 터였다고 적고 있다. 홍철수는 李承晩이 정부와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李承晩이 하는 일을 무엇이건 도와주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1) 그러나 홍철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무렵 주미 공사는 없었고 참사관 申泰茂가 공사대리로 일하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의 서기관은 金潤晶이었다.
 
  李承晩은 전날 밤중에 찾아갔던 햄린(Hamlin) 목사로부터 이날 오찬을 초대받았었다. 그리하여 그는 점심 때에 햄린목사를 교회로 찾아가 그의 집에서 오찬을 함께 했다. 이 오찬 회동을 통하여 햄린은 李承晩을 자신이 돌보아주어야 할 인물로 평가한 것 같다. 그리고 李承晩은 이날 저녁을 공사관에서 공사관원들과 같이했다.2)
 
  李承晩은 몇 안 되는 공사관원들이 심각한 불화에 빠져 있는 사실을 곧 발견했다. 처음 李承晩이 자주 접촉한 사람은 金潤晶이었다. 金潤晶은 申泰茂가 본국으로 소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申泰茂는 嚴妃가 보낸 사람이었다. 엄비가 자신의 소생인 李垠(英親王)이 제위를 계승할 수 있게 하기 위해 美國에 유학 중인 李堈(義親王)을 감시할 목적으로 보낸 것이기 때문에 그가 하는 일은 李堈의 행실을 헐뜯는 보고서를 보내어 高宗의 신임을 잃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申泰茂는 1889년에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外衙門) 주사로 임명된 뒤로 德源監理, 宮內府參理官 등을 거쳐 1900년에 주미공사관 2등 참서관으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李承晩은 그 뒤 몇 달 동안 버지니아州 세일럼에 있는 로노크 대학(Roanoke College)에 다니던 李堈을 워싱턴에서 몇 번 만났다. 李承晩은 李堈이 여자들과의 교제로 돈을 많이 허비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알렌 공사가 高宗에게 그에게 돈을 너무 많이 보내지 말라고 충고한 적이 있다고 적고 있다.3) 李堈은 1901년 3월부터 두 사람의 수행원을 데리고 로노크 대학에 유학하고 있었는데, 대학 근처의 사교계, 특히 젊은 여성층에서 큰 관심과 화제의 대상이 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4)
 
  申泰茂는 본국으로부터 명확한 훈령이 없는 상태에서는 李承晩에게 협조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이미 日本의 감시를 받고 있는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그러한 훈령을 보낼 까닭이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반면에 金潤晶은 자기가 公使대리가 될 수 있다면 모든 힘을 다해서 李承晩의 일에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도미하기 전부터 기독교인이었던 金潤晶은 1897년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매사추세츠州의 마운트 허몬 스쿨을 거처 워싱턴의 흑인학교 하워드 大學을 졸업하고 美國人들의 천거에 따라 1904년에 미국공사관 書記生으로 현지 임명된 사람이었다.
 
  딘스모어 議員에게 閔泳煥과 韓圭卨의 親書 전달
 
  李承晩은 곧 바쁘게 움직였다. 7일에 버몬트 호텔을 나와서 H가 2122의 스미스(H.H.Smith)씨 집 하숙으로 숙소를 옮긴 그는 신정 연휴가 지나고 첫째 주일인 1월8일에 스미스씨네 교회의 아침 성경반과 저녁의 크리스천 면려회(Christian Endeavor Society)에서 연설을 했다. 워싱턴에 도착한 지 1주일 만에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는 白人들 앞에 선 것이었다. 이날의 연설을 시작으로 그는 여러 교회에서 한국의 형편과 기독교 선교 실태를 소개하는 연설을 하고, 학비 지원을 위한 의연금을 받았다. 그것은 햄린 목사와 스미스씨의 소개에 따른 것이었다. 햄린은 또 적은 액수이기는 했으나 개인적으로 돈을 보태 주기도 했다. 2월20일에는 공사관에서 방값으로 6달러를 보내 왔다.
 
  李承晩은 閔泳煥과 韓圭卨의 편지를 가지고 아칸소州 출신 하원의원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를 찾아갔다. 딘스모어는 1887년부터 1888년까지 주한 미국공사를 지낸 인물로서 그의 밑에서 서기관으로 일했던 알렌에 따르면 〈냉정하고 빈틈없는 法律家〉이며 〈양심적인 크리스찬 紳士〉였다.5) 그는 동아시아의 정세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우호적이었다.
 
  딘스모어는 옛 친구들의 소식을 들어 기쁘다면서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와의 면담을 주선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헤이는 매킨리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 있던 1898년에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정책을 제창한 인물이었다. 그의 문호개방정책은 중국에 대한 열강의 통상기회의 균등과 영토보전을 강조함으로써 열강에 의한 중국 분할을 방지했고 이후 오랫동안 미국의 동아시아정책 기조가 되었다. 李承晩은 물론 딘스모어도 이같은 정책기조에 따라 헤이가 親韓的 조치를 취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6)
 
  올리버는 李承晩이 헤이 장관과의 면담 통보를 기다리는 동안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지를 방문했고 1905년 1월15일자 「포스트」지에 일본의 한국점령 기도에 대한 李承晩의 성토기사가 실렸는데, 그것은 미국언론이 李承晩의 주장을 다룬 최초의 기사였다고 적고 있다.7)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社에 보존되어 있는 이 날짜 「포스트」지에는 이러한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조지 워싱턴大學에 「특별생」으로 入學
 
  李承晩은 한편으로 그 자신의 도미 목적인 진학 준비를 서둘렀다. 햄린 목사는 李承晩을, 韓國公使館의 법률고문을 맡고 있던 조지 워싱턴 대학 총장 찰스 니덤(Charles Needham) 박사에게 소개했다. 니덤은 李承晩에게 선교 장학금을 받도록 해주었다. 그것은 매 학기 도서관 이용료 1달러를 제외한 학비 전액을 충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李承晩은 2월에 시작되는 봄학기부터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했다. 알렌 윌버(W. Allen Wilber) 학장은 李承晩의 한국 및 중국 학문에 관한 지식을 인정하여 1년을 월반한 「특별생」으로 등록시켜 주었다.
 
  李承晩이 이처럼 쉽사리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에 수중에 몇 달러밖에 남지 않았던 그로서는 무엇보다도 시급한 숙식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사회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보장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입학수속을 마친 그는 딘스모어 의원에게 헤이 장관과의 면담주선을 독촉하는 편지를 썼다. 딘스모어는 2월16일에 답장을 보내왔다.
 
  〈친애하는 李承晩씨. 어제 아침에 당신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당신을 만나고 나서 나는 바로 유행성 감기에 걸려서 누워있었기 때문에 당신과 약속한 일을 추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방에서 일어나 앉아서 헤이 長官에게 언제 당신을 만나줄 수 있느냐는 문의 편지를 오늘 아침에 쓰고 있습니다. 회신을 받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며칠이 지난 금요일에 李承晩은 연필로 갈겨쓴 딘스모어의 편지를 받았다.
 
  〈헤이 長官의 메모를 동봉합니다. 9시 정각에 오시면 같이 국무부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딘스모어 의원은 의원사무실에서 기다리지 않고 자기 마차를 몰아 아이 스트리트에 있는 李承晩의 거처로 데리러 왔다. 국무부로 간 두 사람은 곧 장관실로 안내되었다. 면담은 30분 이상 계속되었다. 커버넌트 교회의 신자인 헤이 장관은 한국의 서북지방에서 활동하는 미국 선교사들의 동향에 관해 알렌 공사가 보내 온 보고를 받고 감격한 이야기를 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이 지역을 戰爭地域으로 선포하고 전함 1척을 평양으로 보내어 그곳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과 美國人들을 철수시키려 했으나 선교사들은 임무수행을 위해 철수를 거부하고 있었다. 헤이 장관은 한국인들이 선교사들을 사랑하는 것 같아 보인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한국인들이 어떤 反基督敎 운동을 벌이지 않는 한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反基督敎 및 反外勢의 기치를 내걸었던 1900년의 중국의 義和團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헤이 장관은 條約上의 義務이행 약속
 
  李承晩은 그에게 한국이 開港한 이래로 한 사람의 선교사도 아무런 화를 입지 않았음을 상기시켰다. 그러고 나서 결론적으로 말했다.
 
  『우리 한국인들은 장관께서 中國을 위해 하신 일을 韓國을 위해서도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李承晩이 지적한 것은 헤이 장관이 1899년에 발표한 「무역상의 門戶開放政策에 관한 宣言」을 뜻하는 것이었다.8)
 
  헤이는 李承晩이 자신의 문호개방 정책을 거론한 데 대해 기뻐하는 듯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나는 개인적으로나 미국정부를 대표해서 우리의 條約상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할 것입니다』9)
 
  이때에 헤이 장관이 李承晩에게 조약상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이처럼 확실하게 말했는지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헤이 장관은 바로 한 달 전에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으로부터 〈우리는 日本의 의사를 거슬려가면서까지 韓國問題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 韓國人은 자신들의 방위를 위해 一擊을 가할 능력도 없다〉10)는 편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러-日 사이의 講和가 성립되면 韓國은 日本의 保護國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문제로 자신과 대립했던 알렌 공사를 3월에 해임하고 후임으로 모건(Edwin V. Morgan)을 임명했다.
 
  李承晩은 헤이 장관과의 면담으로 크게 고무되었다. 국무부를 떠나면서 딘스모어 의원도 회담결과가 매우 만족스러웠다고 말했다.
 
  李承晩은 閔泳煥과 韓圭卨에게 회담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썼고, 딘스모어는 그것을 외교 파우치 편으로 주한 미국공사관에 보내어 두 사람에게 전하게 해주었다. 李承晩이 閔泳煥과 韓圭卨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미 한국공사관 파우치를 이용하지 않고 미국 외교파우치를 이용한 것은 이 무렵은 이미 스티븐스(Durham W. Stevens)가 외교고문에 취임하여 일체의 외교관련 업무를 장악하고 있어서 편지가 日本人들에게 알려질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헤이 장관이 한국정부의 공식 사절도 아닌 젊은 李承晩을 만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李承晩은 이때의 일을 오래도록 자랑스럽게 기억했다. 李承晩은 헤이 장관이 그 해 여름에 갑자기 사망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약속대로 韓國의 독립은 지켜졌을 것이라고 아쉬워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그의 단견이었다.
 
 
  駐日公使 趙民熙가 니덤 고문에게 高宗 뜻 전하게 해
 
  헤이 장관은 李承晩을 만나기 두 달 전에 이미 高宗의 다른 「밀사」를 만나고 있었다.
 
  1904년 8월22일에 이른바 제1차 韓日協約(韓日協定)이 체결되고 나서 9월30일에 駐日公使 趙民熙는 니덤 주미한국공사관 고문에게, 자기가 워싱턴 재임 중에 헤이 장관과 회견했을 때에 헤이가 韓美간의 우호관계를 고려하여 기회가 있으면 韓國을 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면서, 한국의 독립이 日本에 의하여 위기에 빠져 있으므로 한국의 상황을 루스벨트 대통령과 헤이 장관에게 전하여 한국의 독립과 皇室의 보전을 위해 힘써달라고 부탁했다.11) 趙民熙는 중추원 의관을 시작으로 평안도 관찰사, 법부 협판, 군부 협판 등을 지내고 駐獨公使와 駐美公使를 거쳐 1904년부터 駐日公使로 재임하고 있었다.
 
  趙民熙의 부탁을 받은 니덤은 12월21일에 헤이 장관과 면담했다. 그리고 이튿날 조민희에게 면담 결과를 통보했다.
 
  〈나는 어제 국무장관을 방문하고, 관계 각국과의 기존의 條約關係와 일치하는 범위 안에서 미국 정부가 한국의 안전과 독립의 유지를 위해 東洋 사태의 최종적 조정에 대해 적절한 영향력을 행사해 주기 바란다는 皇帝 폐하의 희망을 구두로 전달했습니다.
 
  국무장관은 정중히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는 韓國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시했는데, 이 사실은 조금은 貴國에 도움이 되리라고 나는 마음으로부터 믿습니다. 交涉이 시작되고, 貴國 주변에서 현재 계속되고 있는 불행한 전투에 講和가 초래되기 까지는 어떠한 友好國도 아무런 일도 할 방도가 없는 것은 명백합니다. 관계 각국 모두에 명예로운 모양으로 東洋에서의 전쟁이 즉시 종결되는 것은 인류의 희망이라고 확신합니다.…〉12)
 
  헤이 장관의 반응은 高宗이 기대했던 것만큼 만족스러운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高宗과 한국정부는 그러한 美國의 「居中調整」에 의해 獨立이 유지되기를 절실히 바랐다. 니덤의 통보는 강화회의가 시작되면 友好國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했다.
 
  李承晩은 물론 니덤이 헤이 장관을 면담했던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그가 조지 워싱턴 대학에 유리한 조건으로 쉽게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한국을 위해 활동하던 니덤이 바로 그 대학의 총장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일본정부는 니덤의 헤이 장관 면담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1905년 6월에 이르러 주미공사관의 서기관 히오키 에키(日置益)가 스티븐스에게 알려 와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李承晩이 헤이 장관을 만나고 나서도 넉 달이나 지나서이다. 히오키는 주한 일본공사관에도 근무했었다. 그러나 李承晩이 헤이 장관과 면담한 사실에 대한 일본정부의 반응은 보이지 않는다.
 
 
  金潤晶을 대리공사로 任命토록 건의
 
  아무튼 이때부터 일본정부는 한국이 비밀리에 전개하고 있는 對美 교섭활동에 대해 경계를 철저히 하기 시작했다. 니덤의 헤이 장관 면담사실을 보고받은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일본 외무대신은 6월14일에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에게 이러한 일은 「대단히 재미없는 일」이므로 한국 황제에게 앞으로 外交는 모두 일반 경로를 거치게 하고, 특히 外交顧問 용빙계약 규정대로 반드시 고문의 자문을 거쳐 시행하도록 상주하라고 훈령했고, 하야시 공사는 곧바로 高宗을 만나서 이와 같은 뜻을 상주했다. 하야시는 또 스티븐스에게도 같은 상주를 하게 했다.
 
  헤이 장관과의 면담으로 고무된 李承晩은 주미공사관을 통하여 좀더 공식적인 對美 교섭활동을 벌이기 위해 申泰茂 대신에 金潤晶을 대리공사로 임명할 것을 閔泳煥에게 건의했다. 그는 金潤晶의 애국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윽고 6월23일부로 申泰茂가 해임되고 金潤晶이 3등 참사관으로 승진되어 대리공사로 임명되었다. 김윤정은 주미공사관의 서기생으로 현지 임명된 지 1년 만에 공관장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때에 김윤정이 대리공사에 임명된 것이 반드시 李承晩의 추천에 따른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李承晩을 미국으로 보낸 閔泳煥과 韓圭卨이 이 무렵 차례로 參政大臣을 역임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그것은 어려운 인사는 아니었다. 김윤정의 대리공사 임명과 관련하여, 미국 국무장관 대리 루미스(Francis B. Loomis)가 6월12일과 14일 두 차례에 걸쳐 김윤정이 대리공사에 임명될 것 같다고 주한 미국 대리공사 패독(Gordon Paddock)에게 타전하고, 패독은 한국정부에 조회하여 사실임을 확인하고 본국에 보고하고 있는 것13)이 눈길을 끈다. 그런데 李承晩 자신은 자기가 閔泳煥에게 김윤정을 대리공사로 임명하도록 추천한 것은 사실이나, 김윤정이 비밀리에 서울에 있는 日本公使에게 접근해서 일본정부가 그의 補職을 승인하도록 노력한 것이 뒤에 일어난 일들로 증명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러나 (이때에) 나는 그가 (대리공사로) 임명된 것은 우리 계획을 절반쯤은 성공케 한 것으로 생각했었다〉14)고 덧붙였다.
 
  李承晩은 金潤晶을 자주 찾아갔다. 그는 공사관 3층의 김윤정의 살림집을 방문하여 식사를 하고 오기도 했다.
 
 
  美國에 온 아들은 남의 집에 맡겨
 
  李承晩의 개인 생활도 정착되어 갔다. 그는 4월23일의 부활절 주일에 햄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15) 태평양 건너 먼 이국 땅에서 눈빛 푸른 미국 사람들과 섞여 세례를 받는 李承晩은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리고 각별한 선민의식과 사명감을 느꼈을 것이다.
 
  6월4일에 아들 泰山이 워싱턴에 왔다. 朴容萬이 미국에 오는 길에 데리고 온 것이었다. 이때에 泰山은 여덟 살이었다.
 
  泰山을 李承晩에게 보낸 사람은 朴씨부인이었다. 朴씨부인은 泰山을 먼저 미국에 보내 놓고, 그것을 핑계삼아 자신도 도미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사전에 시아버지 李敬善과도 상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朴씨부인은 李敬善의 진노를 샀고 자신의 도미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고 한다.16)
 
  한편 李承晩이 미국으로 떠날 때에 朴씨부인과 泰山을 미국으로 데려갈 계획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朴씨부인의 양아들 李恩秀는 李承晩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朴씨를 日本으로 보낼 것을 주선해 놓고 있었다고 말했다. 朴씨부인에게 신교육을 시켜 미국에서 합류할 계획이었으나 나가사키(長崎)까지 갔던 朴씨부인이 가슴앓이로 건강을 해쳐서 석 달 만에 돌아오고 말았다는 것이다. 또한 朴씨부인의 친정조카 朴貫鉉은 朴씨부인이 泰山을 데리고 臺灣까지 갔으나 각기병에 걸려서 귀국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17)
 
  李承晩은 자신이 오래 囹圄生活을 하는 동안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던 어린 泰山이 이역 만리까지 찾아온 것이 여간 반갑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데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태산을 金潤晶의 집에 맡겼다가 이내 워싱턴 시내의 어떤 부잣집에 맡겼다.
 
 
  오션 그로브의 부잣집 별장지에서 여름 보내
 
  李承晩은 1905년 여름부터 조지 워싱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여름방학을 뉴저지州의 오션 그로브에서 지냈다. 그곳은 미국 동부 부자들의 별장지이다. 필라델피아에 사는 부유한 감리교 신자 보이드(Boyd) 여사의 별장이 거기에 있었는데, 李承晩이 감옥에 있을 때에 그를 도왔던 선교사 존스(George Heber Jones)가 그녀에게 李承晩을 소개해 주어 李承晩은 여름방학을 그 별장에 가서 지내게 된 것이다. 조지 워싱턴대학은 여름방학이면 기숙사 문을 닫았기 때문에 아무도 학교에 머무를 수 없었다. 보이드 여사는 뒤에 李承晩을 「폴(Paul)」이라고 부르면서, 겨울 학기 동안에는 1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썼고, 여름방학이 다가오면 하인을 오션 그로브에 보내어 별장문을 열게 했다.
 
  李承晩이 처음 오션 그로브에 간 것은 6월19일이었다. 그는 泰山을 워싱턴에 남겨둔 채 햄린 목사로부터 여비 5달러와 왕복 기차표를 얻어 가지고 갔다.18) 이 때의 일을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직 여름의 피서계절이 시작하기 전이었는데,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캄캄한 밤이었다. 길에서 만난 부인에게 호텔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나서) 어떤 집을 말해주면서 그 집으로 가라고 했다.『그집 부인은 좋은 크리스찬이므로 당신을 반갑게 맞이해 줄 것입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그 집을 찾아가서 스탁스(Starks) 부인을 만났는데, 뒷날 그녀의 友誼는 우리의 활동에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19)
 
  상류층의 별장지에서 밤중에 낯선 동양인이 부녀자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자 그녀가 기겁을 하도록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2) 루스벨트 大統領을 만나 「居中調整」 부탁


 
  포츠머드 러·일 전쟁 강화회의를 앞두고 日本政府는 이 회의에 대표단을 참석시키려는 한국정부의 움직임에 긴장했다.
 
  전쟁 수행 능력의 한계에 도달한 日本은 1905년 5월27일의 東海海戰의 승리라는 유리한 상황을 계기로 6월1일에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러시아와의 講和 알선을 요청했고, 루스벨트는 6월9일에 강화 권고서를 발송하여 양국으로부터 동의를 받자 강화회의를 포츠머스에서 개최한다고 6월26일에 발표했다. 日本은 6월30일의 閣議決定으로 한국의 「自由處分」을 강화의 절대적 필요조건으로 결정했다.20)
 
  한편 일찍이 韓國과 滿洲에서의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日本을 지지했던 루스벨트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압도하게 되자 1898년 이후로 美國領이 되어 있는 필리핀에 대한 日本의 의도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필리핀 확보를 위한 陸海軍을 준비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동해에서의 발틱함대의 패전 직후에 루스벨트는 여름에 필리핀을 시찰할 예정인 육군장관 태프트(William H. Taft)에게 보낸 편지에서 〈체재 중 귀하가 동행하는 上下兩院 의원들이 수빅灣의 방비를 강화할 필요성에 주의를 집중하도록 하기를 절망한다〉21)고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사정을 여실히 보여 준다.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본직인 육군장관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던 태프트는 헤이 국무장관이 1905년 봄부터 중병에 걸려 7월1일에 사망하자 국무장관 대리를 겸했다.
 
  태프트는 7월8일에 上下兩院 의원과 軍將星 등 80여 명의 방문단을 이끌고 필리핀을 향하여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했다. 일행 가운데에는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Alice)와 이듬해 2월17일에 그녀와 결혼하는 下院議員 롱워드(Nicolas Longworth)도 있었다. 여행의 목적은 일행 중의 상하양원 의원들에게 미국이 필리핀 통치에서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이해를 넓히는 일이었다.
 
 
  하와이 교민들이 루스벨트에게 보낼 代表로 선출
 
  일행은 7월14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때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하와이에 사는 한국인들이 대대적인 환영회를 연 것이었다. 1905년에 접어들면서 하와이와 美洲의 韓國人들은 조직을 확대하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친목회는 4월5일에 安昌浩를 회장으로 하는 共立協會로 확대 개편되었고, 하와이에서는 尹炳求 목사 등의 주도로 5월3일에 日貨 배척 등 항일운동과 동포들의 결속을 표방하고 에와친목회가 발족했다. 共立協會와 에와친목회는 7월12일에 연합행사로 호놀룰루에서 특별대회를 열어 루스벨트 대통령 앞으로 한국의 독립 유지를 위한 청원서를 보내기로 결의하고, 그 청원서를 제출할 대표로 尹炳求와 李承晩을 선출했다. 그리고 태프트 일행을 대대적으로 환영하기로 결의했다. 워싱턴에 있는 李承晩을 공동대표로 선출한 것은 그가 美國에 오면서 하와이에 들렀을 때에 밤을 새워 앞으로의 대책을 함께 숙의했던 尹炳求의 제의에 따른 것이었을 것이다.
 
  한국 교민들의 대대적인 환영행사는 워싱턴의 신문들도 대서특필했다. 태프트는 하와이 감리교회의 감독 워드먼(J.W. Wadman)의 소개로 尹炳求를 만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고, 워드맨의 요청에 따라 尹炳求에게 루스벨트를 만날 수 있도록 소개장을 써 주었다. 尹炳求로부터 이러한 사실을 통보받은 李承晩은 그것을 閔泳煥에게 보고했다. 李承晩의 동향이 日本政府에 포착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李承晩의 所在파악 위한 電文 오가
 
  7월14일 새벽에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임시 외무대신을 겸하고 있는 가쓰라 타로(桂太郞) 총리대신에게 믿을 만한 한국 大官이 전하는 극비 정보라면서 다음과 같이 타전했다.
 
  〈지금 모 외국에 있는 李承晩이라는 자를 머지 않아 열릴 平和會義를 계기로 미국에 건너가게 하여 모국 정치가에 대해 지금 한국이 日本으로부터 심한 학대를 받고 있는 정황을 설명하고 열국, 특히 美國의 후의에 의하여 韓國의 獨立을 유지하도록 진력하게 하는 비밀 협의가 궁중에서 이루어졌고, 이를 위해 다액의 비용을 지출하도록 결정했으며…〉22)
 
  이 전문으로 미루어 보면 李承晩이 閔泳煥과 韓圭卨에게 보낸 보고서를 토대로 하여 궁중에서 극비리에 러-일강화회의에 대한 대책이 논의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李承晩은 헤이 장관을 만난 뒤에도 수시로 閔泳煥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었던 것 같으나 확인할 수는 없다. 또한 이 전문은 슬프게도 이때에 이미 일본과 내통하고 있던 「大官」이 있었던 것도 시사해준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가쓰라는 7월16일에 李承晩의 소재를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훈령했고, 하야시는 이튿날 〈李承晩은 예수교 신도로서 작년에 長男을 동반하고 미국으로 가서 현재 그 나라에 체재하고 있는데, 美國 어느 지방에 있는지는 不明함〉23)이라는 답전을 보내고 있다.
 
  이 전문으로 미루어 보는 한은 이때까지만 해도 대리공사 金潤晶이 日本과 내통하여 李承晩의 동정을 일본공사관에 알려 주고 있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같은 날 가쓰라는 또 高宗이 다시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을 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하고 이미 다액의 운동비를 內帑金(내탕금·임금의 개인 자금)에서 하사했다는 서울발 기사의 사실 여부를 급히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하야시에게 훈령했다.24)
 
  이에 대해 하야시는 19일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궁중에서는 이러한 풍설을 부인하나 현재 미국에 있는 李承晩을 시켜, 또는 새로 사람을 파견하여 강화회의의 경과를 탐지하고, 또 韓國의 現狀에 대해 특히 미국의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운동을 하게 하자는 비밀협의를 궁중에서 하고 있는 것은 근거있는 말로 믿어짐. 다만 다액의 운동비를 이미 지출했다는 말은 확실하지 않음.〉25)
 
  하야시는 다시 입궐하여 高宗을 알현하려고 했으나 高宗은 더위를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고, 대신에 참정대신 沈相薰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심상훈은 密使파견 사실을 강력히 부인하면서, 한국이 日本을 젖혀두고 직접 다른 나라에 대하여 운동을 하는 일은 없다고 확언했다.26)
 
 
  「태프트-가쓰라 秘密協定」의 계기 돼
 
  尹炳求의 도착을 기다리는 동안 李承晩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徐載弼을 찾아가서 상의했다. 이 무렵 徐載弼은 펜실베이니어 대학의 해부학 교수로 있었다. 서재필이 청원서를 작성하여 법률전문가에게 법률적인 검토를 받아놓기로 하고 李承晩은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한국정부가 두 사람의 특사를 미국에 파견했고, 그 특사가 미국정부에 대해 韓國의 獨立유지의 보장을 요청하게 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미국의 신문에 보도되고 있었다.27) 가쓰라가 東京을 방문한 태프트에게 비밀회담을 요청한 것은 李承晩의 대미교섭 활동에 관한 하야시의 보고를 받고 며칠 지나지 않은 7월27일이었다. 그러므로 李承晩과 尹炳求의 활동에 대한 정보가 가쓰라로 하여금 태프트를 만나서 한국의 운명에 관한 비밀 협약을 맺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7월15일에 호놀룰루를 떠나 열흘 뒤인 25일에 요코하마(橫濱)에 입항한 태프트 일행은 日本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강화회의를 앞두고 태프트가 일본을 방문한 것에 대해 주미 러시아 대사 카시니(Graf A.P. Cassini)는 격노했으나, 태프트의 일본방문은 루스벨트의 뜻을 반영한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필리핀 총독을 지내어 그 나라에 대한 애착이 있는 태프트로서는 일본으로부터 필리핀에 대한 야심이 없다는 확약을 받고 싶은 심정이 루스벨트보다 강했을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28)
 
  태프트와 가쓰라의 비밀회담은 7월27일 오전에 이루어졌는데, 두 사람은 이때의 합의를 覺書로 작성했다. 그것이 유명한 「태프트-가쓰라 秘密協定」이다. 각서는 1) 필리핀 문제, 2) 極東의 平和維持 문제, 3) 韓國 문제의 세 가지로 되어 있는데, 한국에 관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한국문제에 관하여 가쓰라 백작은 한국은 우리의 러시아와의 전쟁의 직접적 원인이기 때문에 전쟁의 논리적 귀결로서 半島問題의 완전한 해결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日本은 韓國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서 日本이 별도의 對外戰爭에 돌입할 필요가 있는 상황에 다시 처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하여 확고한 조치를 취하는 일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다. 태프트 장관은 백작의 관찰이 정당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하고, 개인적 의견은 韓國이 日本의 동의 없이는 外國과 협약을 할 수 없도록 요구할 정도의 日本軍에 의한 韓國에 대한 宗主權(suzerainty)의 수립은 현 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며 동양의 항구적 평화에 직접 기여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견해를 피력했다.…〉29)
 
  이 조항은 곧 日本이 한국을 保護國으로 만드는 것을 美國이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비밀 각서를 보고 받은 루스벨트는 7월31일에 태프트에게 이를 확인하면서 가쓰라에게 통보하라는 전문을 보냈고, 태프트는 8월7일에 마닐라에서 그 사실을 가쓰라에게 타전했다. 가쓰라는 이튿날 포츠마드에 회담 대표로 가 있는 고무라 외무대신에게 알렸다. 이때 이후의 미국의 對韓政策에서 결정적인 근거가 된 이 「태프트-가쓰라 秘密協定」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것은 그러나 그로부터 19년의 세월이 지난 1924년의 일이다.
 
 
  徐載弼에 부탁하여 「請願書」 만들어
 
  「태프트-가쓰라 秘密協定」의 존재를 알 턱이 없는 李承晩은 루스벨트와의 회견 준비에 흥분해 있었다. 尹炳求가 워싱턴에 온 것은 7월31일이었다. 李承晩은 정거장에 나가서 기다렸다가 尹炳求가 여장을 풀자마자 함께 徐載弼에게로 갔다. 서재필은 李承晩과 약속한 대로 청원서 문안을 작성해 놓고 있었다. 세 사람은 다시 상의하여 마지막 손질을 해 가지고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루스벨트 大統領에게 보내는 하와이 거주 韓國人의 請願書」라는 제목의 이 글은 高宗이나 韓國政府가 아니라 하와이에 거주하는 「8000명의 한국인」이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이 시기의 徐載弼이나 李承晩의 국제정세 인식을 반영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러-일 양국간의 전쟁 개시 이후 곧 우리 정부는 攻守 양쪽의 목적을 위해 日本과 同盟條約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에 따라 韓國全土는 일본인에게 개방되고, 한국정부 및 한국 국민은 한국 내 및 한국 주변에서의 군사작전에서 일본 당국을 지원해 왔습니다.〉
 
  이러한 말로 시작된 청원서는 거의 강압적으로 체결했던 이 조약(이른바 韓日議定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조약을 체결할 때에 韓國人들은 日本이 유럽과 미국의 근대문명의 노선에 따라 政府에 여러 가지 改革을 도입하고 우의에 찬 방법으로 우리 국민들에게 조언하고 권고할 것을 진정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망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日本政府가 한국인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수천 명의 조잡하고 난폭한 日本人들을 한국에 풀어놓아서 그들은 무고한 한국인을 惡虐無道한 방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한국 안의 일본인들이 저지르는 온갖 비행을 日本政府가 인정하고 있다고는 우리도 거의 믿지 않으나, 日本政府는 이러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을 아무 것도 강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청원서는 日本政府에 대한 실망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명했다.
 
  〈우리 한국 국민은 동맹조약을 체결할 때에 日本이 한 약속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되었고, 일본이 우리 국민에게 표명하는 善意를 진정으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지리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商業상의 이유 때문에 우리는 日本과 友好關係에 있을 것을 바라고 있고, 內政改革과 敎育면에서 일본을 우리의 인도자 내지 모범으로 삼기를 바라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희생을 통한 이기적 착취라는 정책의 계속으로 말미암아 日本에 대한 우리의 신뢰감은 동요하고 있고, 한 國家로서의 한국의 獨立을 보전하고 국내정치의 개혁에서 우리를 지원한다는 약속을 일본이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한국에서의 日本의 정책은 전쟁 전의 러시아의 그것과 꼭 같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청원서는 美國에 대한 기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국은 우리 나라에 많은 利害關係를 가지고 있습니다. 美國의 경영 아래 있는 산업, 상업, 종교의 각 분야의 여러 사업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한국의 실정과 일본이 한국에서 월등한 지위에 놓이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를 美國政府와 국민은 알아야 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미국 국민이 페어 플레이를 사랑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正義를 제창하고 있음을 압니다. 또한 우리는 閣下께서 國家와 國家 사이뿐만 아니라 個人과 個人 사이의 일도 공평한 거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계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운명의 이 중대한 시기에 각하께서 우리나라를 도와주시리라는 희망을 품고 우리는 이 청원서를 가지고 각하에게 왔습니다.…〉
 
  청원서는 끝으로 예의 朝美修好條約의 「居中調整」 조항에 따른 미국의 지원을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우리는 韓國이 自治政府를 보전하고 다른 열강이 우리 국민을 억압하거나 학대하지 않도록 각하께서 힘써주실 것을 진심으로 원합니다. 美國과 韓國 간의 조약의 조문에 따라 우리는 美國에 원조를 요청하는 것이며, 지금 이때야말로 우리는 美國의 원조가 가장 필요한 때입니다.〉30)
 
  이처럼 이 청원서는 짜임새 있는 문장으로 된 것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한국의 독립을 보전하기 위해 루스벨트의 정의감을 부추기기에는 너무나 온건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청원서는 루스벨트를 통하여 포츠머드 강화회의에 제출될 것을 전제로, 따라서 日本人들에게도 읽힐 것을 전제로 하고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뒷날 獨立運動 기간 내내 계속되는 請願外交의 효시가 된 문서라는 점에서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公使館은 9개월 동안 經費送金 못 받아
 
  李承晩과 尹炳求가 루스벨트 대통령을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은 재미동포들을 적잖이 고무시켰던 것 같다. 이 무렵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申興雨에 따르면, 7월12일에 호놀룰루에서 한인 특별회의 소식이 전해지자 서부지역의 유학생들은 샌프란시스코에 모여 李承晩을 유학생 대표로 선정했다.31) 한편 李承晩은 루스벨트를 방문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에 샌프란시스코 등지의 한국인들이 운동비 연조로 100달러를 보내 왔다고 적고 있다. 이 돈으로 플록코트와 실크해트 등 외교관 예복을 장만했다. 李承晩과 尹炳求는 金潤晶에게 美國政府에 자신들이 대통령을 만날 수 있도록 편지를 써 줄 것을 부탁했으나 뜻밖에도 그는 이를 거절했다. 본국정부의 훈령이 없이는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때는 이미 金潤晶이 일본 공사관과 긴밀한 연락을 하고 있는 때였다.
 
  김윤정이 대리공사로서 일본 공사관과 연락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공사관의 재정문제와도 관련이 있었다. 한국 공사관은 스티븐스가 외교고문으로 부임한 1904년 12월 이래로 아홉 달 동안이나 본국으로부터 봉급과 공사관 경비의 송달이 없어서 관원들은 심한 곤경에 빠져 있었다. 심지어 귀국 발령이 난 申泰茂가 여비가 없어서 귀국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주미 공사관의 이러한 재정궁핍은 일본인 재정고문과 외교고문 스티븐스가 주미 공사관에 대한 경비 송금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정은 일본의 주미 공사 다카히라 고고로(高平小五郞)가 외무대신에게 한국 공사관의 경비 송금을 알선할 필요성을 강조한 보고서에도 나타나 있다.32) 결국 申泰茂는 일본 미쓰이(三井) 상사를 통해 1000달러를 송금받아 귀국한다.
 
 
  日本公使館이 李承晩 동향을 본국에 보고
 
  李承晩과 尹炳求의 움직임과 두 사람이 金潤晶과 벌인 논쟁에 관하여 주미 일본대리공사 히오키는 임시 겸임 외무대신 가쓰라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李承晩 및 尹炳求 양인은 이곳에 와서 여러 차례 金韓國代理公使를 방문하고…한편으로는 국무부에 韓國獨立 보전을 청원하고 한편으로는 그들로 하여금 大統領과 회견하도록 주선하라고 强請하여 마침내 격론 폭행에 이를 뻔했으나, 대리공사는 정부의 훈령이 없이는 결코 움직일 수 없다고 주장하여 끝내 그들을 물리쳤음. 李, 尹 두 사람은 그 뒤에 이곳을 떠나 뉴욕에 도착하여 지금 대통령을 회견할 목적으로 활동중인 것 같음.…
 
  尹炳求는 태프트 육군장관이 하와이에 기항했을 때에 그곳에서 동 장관으로부터 대통령 앞으로 소개장을 받았다고 하고, 또 宗敎家 등은 그들의 목적에 다소 동정을 보내는 사람도 있어서, 끝내는 대통령을 회견하고 조국의 사정을 진술할 기회를 얻을지도 모름. 그러나 韓國問題에 관한 이 나라 政府 및 人民의 의견은 스스로 정하는 것이므로 새삼스럽게 地位도 없는 靑年書生輩가 잔재주를 부리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됨. 오늘까지는 新聞 등에 그들의 활동에 의한 것으로 추측되는 記事 등이 더러 보임.…
 
  이번에 한국 공사관 書記生으로 임명되어 어제 着任한 李夏榮(당시 법부대신)의 처조카 崔錫俊이 제보하기로는, 새로 몇 명의 韓國有志家들이 같은 배를 타고 미국에 왔다고 함.…
 
  탐문한 바에 따르면, 안에서는 閔泳煥이 전적으로 이 일을 획책하고 밖에서는 徐載弼이 이를 지원하고 있음.…〉33)
 
  이 보고서는 李承晩과 尹炳求가 루스벨트 대통령을 면담하고 난 이튿날인 8월5일에 보낸 것이기는 하나, 이 시점에서는 이처럼 주미 일본 공사관이 李承晩과 尹炳求의 동향을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새로 서기생으로 부임한 崔錫俊이라는 사람도 日本이 보낸 사람이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오이스터 베이에 도착한 李承晩과 尹炳求
 
  李承晩과 尹炳求는 8월2일에 루스벨트를 만나러 오이스터 베이를 향해 워싱턴을 떠났다. 오이스터 베이는 뉴욕시의 동북부에 있는 피서지로서 롱 아일랜드의 북쪽 끝에 위치해 있다. 루스벨트는 오이스터 베이의 새가모어 힐에 있는 여름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뉴욕에 도착한 두 사람은 그들을 지원하고자 기다리고 있던 존스를 밤에 만나 대책을 숙의했다. 이때에 만난 존스가 누구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국에서 李承晩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필라델피아의 보이드 여사를 소개해 주기도 한 선교사 존스는 뉴욕州 모아크 출생이었는데,34) 어쩌면 이 무렵에 휴가나 다른 이유로 뉴욕에 와 있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李承晩은 이때에도 미국인들의 친절한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이튿날 오후 6시 반에 오이스터 베이에 도착한 두 사람은 고급 호텔을 찾았다. 그리하여 옥타곤 호텔이라는 고급 호텔에 들었다. 이튿날에는 루스벨트가 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포츠머드에 와 있는 러시아 대표와 일본 대표를 접견할 예정이었으므로 오이스터 베이는 붐비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곧바로 루스벨트를 찾아가고 싶었으나 예복을 넣은 짐이 도착하지 않아서 여덟 시가 지나서야 마차를 불러타고 대통령 비서실을 찾아갔다. 비서관 로엡(Loeb)은 출타 중이고 임시비서관 반즈(Barnes)가 두 사람을 만났다. 그는 두 사람이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명함을 주고 태프트의 소개장을 보이자 그는 청원서를 보여주면 그 내용을 대통령에게 보고하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청원서를 보여 주었다. 그것을 훑어보고 나서 그는 말했다.
 
  『호텔에 가서 기다리시면, 대통령에게 말씀드려 오늘 밤이나 내일 아침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감사하다고 말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오이스터 베이에는 많은 기자들이 몰려 와 있었다. 그들은 뉴스 거리가 별로 없던 터라 한국에서 온 두 젊은이에게 이례적인 관심을 보였다. 몰려온 기자들이 이것저것 묻는 데 대해 두 사람은 대통령을 만나기 전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기자들은 두 사람에게 대통령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비웃듯이 묻기도 했다. 오이스터 베이에는 각국 외교관들이 루스벨트와의 사전 협의를 위해 몰려들고 있었으므로 기자들은 韓國에서 온, 그것도 외교관 신분도 아닌 이름없는 젊은이들을 루스벨트가 만나 줄 것 같지 않아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말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당신들을 만날 시간이 없을 겁니다. 그러니 몇 달을 머물러 봐도 소용 없을 거예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두 사람의 움직임을 자세히 보도했다. 주미 일본 대리공사가 가쓰라에게 보낸 기밀 보고서의 「부속서」로 첨부한 「뉴욕 트리뷴」의 다음과 같은 기사는 그러한 보기의 하나였다.
 
  〈韓國國民이 대통령에게 보낸 밀사 尹炳求와 李承晩 두 사람은 오늘 저녁 오이스터 베이에서 대통령을 면담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내일 아침에 대통령에게 제출할 청원서를 휴대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극비에 부치고 있다. 尹炳求는 『현재 韓國皇帝는 일반 국민의 이익을 대표하고 있지 않으므로 우리는 황제의 대표가 아님을 분명히 이해해 주기 바란다.… 한국국민은 진실로 미국국민 및 그 정부와의 친선을 갈망하고 있다. 미국은 앞장서서 한국과 修好條約을 체결했으며, 1882년에 체결된 그 조약은 아직도 존속하고 있다. 한국은 미국과 친교를 유지하지 않으면 일-러 양국의 틈바구니에 끼어 파멸의 지경에 빠지리라는 것이 일반 한국국민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미국 대통령이 알선을 해 준다면 대한제국의 영토는 보전되고 국민은 착착 진보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윤병구는 또한 『현재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집행하고 있는 保護權은 조약 원문의 부정확한 해석을 이용한 간계에 따른 것이다』라고 말했다.〉35)
 
  『오후 3시30분에 새가모어 힐로 오시오』
 
  이튿날 아침 열한 시가 되도록 아무 기별이 없었다. 한 기자가 와서 이 청원서는 공사관을 통해서 제출하라고 할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막막한 심정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있는데 비서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두 사람은 달려갔다. 비서관 로엡은 두 사람을 보고 말했다.
 
  『대통령께서 오늘 오후 3시30분에 새가모어 힐로 두분이 오시라고 하십니다. 3시에 떠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36)
 
  플록코트와 실크해트로 정장한 李承晩과 尹炳求는 오후 3시에 새가모어 힐에 도착하여 안내하는 대로 마차에서 내려 대기실로 들어갔다. 집 안은 들고 나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 가운데에는 문무관 복장을 한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러시아의 수석대표 위테(Sergei Witte) 일행이 막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안내인이 와서 두 사람을 한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은 가슴이 조마조마했고 사지가 떨렸다. 이 때에 루스벨트가 안쪽에 있는 방에서 나오면서 문 밖에서 기다리는 외교관들을 보고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이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두 사람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어서 오시오. 반갑습니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면서 두 사람에게도 의자를 권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루스벨트가 어떻게 바쁘게 서두는지 두 사람은 말을 꺼낼 겨를이 없었다.
 
  尹炳求가 청원서를 꺼내면서 말했다.
 
  『우리는 하와이에 거주하는 우리 국민의 청원서를 가지고 각하에게 바치러 왔습니다』
 
  루스벨트는 그 자리에서 청원서를 읽었다. 그가 청원서를 읽는 동안 두 사람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청원서를 다 읽고 나서 루스벨트가 말했다.
 
  『두 분이 내 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러시아와 일본을 초청하여 講和를 논의하도록 권할 뿐이고 다른 간여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대단히 중대하여 이 청원서를 내가 사사로이 받을 수 없고,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다 보았으며, 또 이렇게 두 분을 만났으니까…, 나의 권리가 防閑(방한·하지 못하게 막는 범위)이 있는 줄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각하의 스퀘어 딜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러자 李承晩이 입을 열었다.
 
  『저희는 먼 지방에서 각하의 스퀘어 딜(Square Deal: 공평한 처사나 정책, 공정한 거래 등의 뜻)을 구하러 왔습니다』
 
  李承晩의 이 말은 사전에 여러 사람과 상의하여 준비했던 말이었을 것이다. 「스퀘어 딜」이라는 말은 이 무렵 루스벨트가 大企業과 勞動組合의 대립을 조정하면서 슬로건으로 표방한 말로서, 루스벨트의 국내정책을 상징하는 용어가 되어 있었다.
 
  李承晩의 말에 루스벨트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줄 압니다』
 
  李承晩은 말을 이었다.
 
  『저희가 온 것은 각하께 강화회의에 구태여 간섭을 하시라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기회있는 대로 朝美修好條約에 입각하여 불쌍한 나라의 위태함을 건져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루스벨트는 한국 공사관을 아느냐고 물었다. 두 사람은 대답했다.
 
  『이 일은 공사관에서도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 일은 우리 백성끼리 전국 관민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므로 공사관에서 간여하는 것은 긴요치 않은 줄 알았습니다』
 
  『淸國政府에서도 항의 서한을 공사관을 통해서 보내었으므로 이 청원서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루스벨트는 이 일의 중대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공사관으로 보내어 보겠습니다』하고 일어섰다.37)
 
  李承晩은 자서전 초고에서 이때에 루스벨트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적고 있다.
 
  『만일 당신들이 이 문서를 귀국 공사관을 통해 제출하신다면 나는 그것을 中國의 청원서와 함께 강화회의에 제출하겠습니다. 귀국 공사더러 국무부에 가져다 주라고 하십시오. 국무장관을 만날 수 없거든 아무에게나 내게 보내라고 말하고 맡기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됩니다』38)
 
  태프트가 써준 소개장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루스벨트가 바쁜 일정 속에서도 두 사람을 만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루스벨트가 두 사람을 만난 것은, 그 자신이 면담사실 자체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는데서 보듯이, 어쩌면 위테 백작과 고무라 주타로의 면접에 앞서 잠깐 동안이나마 한국인을 만나는 것이 강화회의를 주선하는 자신의 영향력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회견은 30분 가량 걸렸다.39) 루스벨트는 기분이 한껏 고조되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이때는 루스벨트가 태프트에게 가쓰라와의 비밀협정을 확인하는 전보를 보내고 5일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그러므로 루스벨트가 韓國政府의 공식문서가 아니라 하와이에 사는 민간인들이 대통령인 자기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굳이 公使館을 통해서 제출하라고 한 것은 청원서의 접수를 정중하게 거절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기자들의 축하받으며 워싱턴으로 달려가
 
  李承晩과 尹炳求는 루스벨트의 친절에 진정으로 감사했다. 루스벨트와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서 나오는 두 사람은 흥분과 희망으로 들떠 있었다.
 
  호텔로 돌아온 두 사람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다. 두 사람은 기자들에게 루스벨트와의 대화 내용을 대충 말해 주었다. 尹炳求는 『여러분들의 대통령께서는 대단히 친절하게 우리를 맞아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 國民들을 괴롭히고 있는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우리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에 대해 대통령께서는 매우 관심을 가지시는 것 같았습니다. 대통령을 뵙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하고 말했다.40) 기자들은 회견이 성사된 것을 축하하며, 앞으로의 일이 성공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기자들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두 사람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축하해 주었다. 같은 호텔에 묵고 있던 다른 나라 외교관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초창기에는 우리나라도 승인을 받기 위해 무척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처지에 충심으로 동정합니다. 아무쪼록 성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두 사람은 들뜬 마음으로 방으로 올라가서 짐을 꾸려 가지고 내려와서는 카운터에 숙박비로 20달러짜리 지폐를 놓고 거스름돈도 챙기지 않은 채 역으로 달려갔다. 빨리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호텔 직원이 거스름돈을 전하기 위해 역까지 뛰어 왔다. 뒷날 李承晩은 이때의 호텔 직원의 이러한 행위는 美國人의 정직성과 관용의 전형이라고 회상하곤 했다.
 
  두 사람은 뉴욕을 거쳐 이른 아침에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들은 밤새 기찻간에서 뜬눈으로 보냈으나 아침 신문들에 난 자신들의 기사를 보자 다시 힘이 솟았다. 「워싱턴 포스트」는 두 한국 사절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서 청원서를 제출했고, 이미 그 청원서를 공사관을 통해 공식으로 접수시키기 위해 워싱턴으로 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신문보도에 대해 李承晩은 閔泳煥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는 지금 우리나라 형편에 앉아서 몇 천원, 몇 만원을 각 신문에 주어가면서도 이렇게 될 수 없는 일이라. 초목 같은 무리라도 흥기나는 마음이 없지 못할러라〉라고 적었다.41)
 
  그만큼 그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부했다. 이제 청원서를 金潤晶이 국무부에 제출하기만 하면 한국 독립유지 문제가 포츠머드 강화회의에 상정되고, 루스벨트 대통령은 조미수호조약에 따라 「居中調整」의 역할을 해 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
 
 
 
(3) 日本에 매수된 公館長 金潤晶의 背信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부푼 가슴을 안고 공사관으로 갔다. 李承晩은 청원서와 기사가 난 신문들을 金潤晶에게 건네 주면서 말했다.
 
  『金公使, 이제 公使가 나설 차례입니다』
 
  그러나 김윤정은 긴장된 목소리로 두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
 
  『李선생, 정부의 훈령이 없이는 이것을 보낼 수 없습니다』
 
  李承晩은 끓어오르는 배신감과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모든 희망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김윤정을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金公使, 그게 무슨 소리요. 이 일은 우리가 기왕에 의논했던 바가 아니오. 또 공사가 전에 나에게 말하기를 申泰茂의 자리를 가지면 목이 떨어져도 하겠다고 하지 않았소. 지금 하나님이 大韓을 도우시느라고 뜻대로 되었고, 또한 이것이 공사 알기에도 곧 聖意와 합하며, 民情이 이러하며, 또한 우리 정부 제공들도 다 원하는 바가 아니오. 이 글 가운데 조금도 어디 거리낄 말이 없으며, 또한 대통령이 하라 하는 것이오. 이것은 우리 말만 들을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신문에 났으니 보면 알게 아니오. 또 이 청원서를 바치는 백성이 본국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미국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미국에 있는 韓國公使가 미국에 있는 한국 백성들의 청원을 아니 들을 수 없고, 또한 이 일이 설령 권한 밖의 일이라 해도 미국 軍部大臣이 상관없는 사람이면서도 대통령에게 편지까지 해주는데 어찌 월급이나 벼슬만 돌아볼 수 있단 말이오』
 
  李承晩과 尹炳求는 온갖 말로 오전 내내 金潤晶을 달래고 얼렀으나 소용이 없었다. 끝내는 金潤晶의 가족들까지 내려왔다. 김윤정의 부인 高純迎이 李承晩을 보고 말했다.
 
  『李선생님, 우리 네 식구를 모두 죽인다 해도 정부의 훈령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李承晩은 김윤정의 두 아이들을 보고 말했다. 장남 用柱는 「프랭크」로, 딸 高麗는 「코라」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李承晩은 그동안 이 아이들과도 가까이 하고 있었다.
 
  『얘들아. 너희들은 어려서 지금 너희 아버지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를 게다. 지금 너희 아버지는 너희들의 自由를 팔아먹고 있다. 너희들은 아버지 때문에 노예가 될 것이다. 너희 아버지는 나라를 배반하고 너희들과 너희들 민족을 배반하고 있다. 나는 너희 아버지가 이 公使館을 日本人들에게 넘겨 주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을게다. 그 전에 불태워버리고 말 거야』
 
  이렇게 분통을 터뜨리고 나서 두 사람은 현관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왔다. 온 몸의 힘이 빠져서 걸음을 비틀거렸다.
 
  이튿날 아침에 李承晩과 尹炳求는 다시 공사관을 찾아갔다. 그러나 金潤晶은 문을 걸어 잠근 채 당장 떠나지 않으면 경찰을 불러 두 사람이 공사관에 불을 지르려 한다고 이르겠다고 위협했다. 그는 흑인 경비원에게 그들이 다시 돌아오면 쫓아버리라고 명령했다.
 
  이때에 李承晩이 얼마나 분격했는가는 다음과 같은 말로도 짐작할 수 있다.
 
  〈나의 분한 마음으로는 각 신문사원을 청하야 공관에 (둘)러 앉히고 일장 연설한 후 공관을 폐쇄하며 연놈을 배를 갈라 우리 대한 백성의 충분(忠憤)한 마음을 세상에 드러내고자 하여 움직움직하다가, 여럿이 말리며 더 보아서 하자 하기로 간신히 참기에 과연 어려운 지경을 당하였는데…〉42)
 
  이러한 표현에서 우리는 일찍이 萬民共同會를 극한투쟁으로 몰아갔던 李承晩의 과격파 기질이 이때에 그대로 되살아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金潤晶은 徐載弼의 새 제의도 묵살
 
  李承晩은 니덤과 그 밖의 친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쓰고 또 직접 찾아가서 상의했다.
 
  햄린 목사는 단념하라고 강력히 권고했다. 그는 이 문제는 전적으로 공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外交經路를 통하지 않고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또 1882년의 朝美修好條約은 단순한 形式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미국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일본에 우호적이라는 것도 지적했다. 李承晩은 햄린 목사와의 대화를 통하여 韓國人들이 조약이나 국제적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면 그것처럼 어리석고 순진한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햄린 목사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李承晩은 필라델피아로 徐載弼을 찾아가서 상의해 보기로 했다. 가면서 그는 어쩌면 효과가 있을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徐載弼이 金潤晶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徐載弼은 8월7일에 金潤晶에게 신임국무장관 앞으로 李承晩과 尹炳求를 소개하는 소개장을 써주라고 당부하는 편지를 썼다. 7월1일에 사망한 헤이 장관의 후임으로 일리후 루트(Elihu Root)가 7월19일에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어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청원서가 국무부를 통하여 자기에게 전달될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을 적극 돕는 것은 국가에 대한 公使의 義務이자 루스벨트 대통령에 대한 예의입니다. 公使는 청원서 문제에 공식적으로 개입하지 않아도 됩니다. 소개장은 그러한 목적에 유효하면서도 公使가 청원서 문제에 개입하는 일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公使도 나와 같은 생각이기를 바랍니다.〉43)
 
  徐載弼은 金潤晶보다 다섯 살 위였다. 서재필의 제안은 대리공사의 처지도 배려한 것으로서, 金潤晶이 청원서와 정부 훈령 사이의 딜레마를 해결할 생각만 있었다면 실행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金潤晶은 이 제의도 묵살했다.
 
 
  親知들은 단념하라고 권고해
 
  워싱턴에 돌아온 李承晩은 루스벨트를 회견한 사실과 金潤晶의 태도를 상세히 적은 편지를 8월9일에 閔泳煥에게 보냈다.
 
  李承晩은 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격앙된 말로 김윤정을 비난하면서 그에 대한 인사조치를 요구했다.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다 하고싶어도 못하고 앉은 것을 우리 이 백성들이 사탕수수밭에 농사하여서 먹고 사는 돈을 사오백원씩 모아 외국관민이 일체로 찬조하여 이만치 만들어 놓은 일인 바 우리나라 독립을 보전하자 한 일인데, 소위 공사는 독립 없어지기를 원하는 일이오니까. 대통령의 말이 청국도 행한 일이니 하라 하는 것을 세상에 다 나타내었는데, 어찌하여 정부에서 말린다 하겠소. 이 일하는 백성이 비록 역적이나 강도라도 이 일에 아무 말 없고 아무 뜻 없고 나라 보전하자 하는 뜻이면 일본이나 아라사(러시아) 놈 아니고는 다 도울 바이어늘 하물며 이 놈이 어찌하여 독립 보전한다는 일에 이렇듯 원수로 여깁네까. 실로 우리 나라의 원수는 일인이나 아라사인이 아니오 실로 월급에 팔려다니는 놈들이 우리의 제일 원수라 합네다. 이는 우리의 말이 아니오 이 나라 사람들이 땅을 치며 하는 말이고, 또한 남들의 말이, 그러하므로 너희 나라는 일본이 와서 마음대로 하여야 참 복이라 합네다. 김가를 시각으로 갈거나 소환이라도 시킬 수 없으면 내가 물고 뜯기라도 할 터이며 기가 오르면 보이는 것이 없소이다.〉44)
 
  그리고 이튿날, 곧 포츠머드 강화회의가 요란하게 개막된 8월10일에 李承晩은 徐載弼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친애하는 李承晩씨. 金潤晶이 소개장을 쓰기를 거절한다면 달리 방법이 없을 것 같소.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고국정부가 문제해결에 나서도록 하는 것인데, 그것은 좀처럼 성사될 것 같지 않소. 모든 노력이 실패하면 AP통신을 통해 여러 신문에 모든 것을 공개하는 방법이 있소. 청원서가 왜 공식적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당신들은 공식적으로 전달할 수 없는지를 밝히는 것이오.〉45)
 
  또한 金潤晶에게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던 니덤으로부터는 다음과 같은 편지가 왔다.
 
  〈내 생각에 金潤晶으로서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오직 여러분이 원한다면 그 청원서를 접수하고 그것을 접수했다는 사실과 청원서의 내용을 韓國 外部에 보고하고 훈령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토록 중요한 시기에 그런 중요한 문제를 두고 그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나는 金潤晶이 최선을 다하여 나라에 봉사하려 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46)
 
  니덤은 日本의 압력으로 이미 7월 말에 주미 한국 공사관의 고문에서 해고되었었다. 니덤의 이런 어처구니없는 편지는 모든 일이 끝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皇城新聞」에 사건 경위 자세히 알려
 
  李承晩은 자서전 초고에서 〈그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실상을 완전히 적어서 한국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 뿐이었다〉47)고 말하고 또 〈나는 한국 신문을 위해 긴 글을 썼다〉48)고 적고 있으나, 이 무렵의 국내 신문에는 李承晩의 이름으로 된 글은 보이지 않는다. 몇 달이 지난 1906년 2월에 네브래스카州 커니지방에 있던 朴容萬의 숙부 朴長玹 이름으로 「皇城新聞」 사장 앞으로 보낸 장문의 「奇書」가 4월17일자 「皇城新聞」의 「論說」난에 실렸는데, 어쩌면 그것이 李承晩이 직접 쓴 것인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취지를 살려서 朴長玹이 쓴 것일 것이다. 이 글은 사건의 경위를 자세히 적으면서도 뉘앙스가 좀 다르게 표현되어 있어서 진상과 배경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된다.
 
  〈지난해에 러-日戰爭이 종결되어 兩國大使가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알선으로 포츠머드에서 談判을 열 때에 우리나라가 同盟자격으로 講和使를 특파하야 國際權利를 회복하고 손해배상도 요구할 터이어늘 政府가 壓制 아래에서 정신을 잃고 國權상의 관계를 任地하여 두고 一言半辭도 없으므로, 國內人民이 政府를 권고코저 하다가 성사치 못하고 오직 美國領地인 하와이에 이주한 동포와 미국에 유학하는 學生 등 7천여 인민이 忠愛血誠으로 尹炳求, 李承晩 양씨로 대표를 선정하여 談判地에 파송하야 國權의 위태함을 保全하려고 한 사실은 일반 국민이 다 아는 바이라. 그 두 사람이 워싱턴에 모여 공관 대리공사 金潤晶을 만나서 대책을 협의했으나 자세한 결론은 확정하기 전에 러시아와 일본 대사가 만날 일자가 촉박하므로 講和地로 가니, 신문 기재원과 철도 사무원이며 城市街路의 사람들이 박수갈채하야 成事하기를 축하하며 말하기를 韓國人民의 代表者요 獨立主權의 保全者요 愛國熱誠의 義氣男子요 靑年志士라고 무수히 칭송하며…〉49)
 
  물론 과장된 묘사이기는 하나 이러한 문면으로 미루어 보면 李承晩과 尹炳求는 金潤晶이 청원서를 국무부에 제출하기만 하면 루스벨트가 그것을 강화회의에 회부할 것이고 또 그러면 자신들도 그 청원서의 설명을 위해 회의에 참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다.
 
  이 글은 두 사람이 루스벨트를 만나고 나왔을 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과장해서 적고 있다.
 
  〈滿城士女가 다투어 악수하고 면담을 칭송하며 韓國을 위하야 연방 만세를 부르니…우리 人民의 무량한 福樂과 國家의 영원한 기초가 완전히 회복되는 것이 십중팔구라…〉
 
  그러면서 이 글은 또 金潤晶이 청원서를 국무부에 제출하기를 거절한 것은 李承晩과 尹炳求가 자기와 충분한 상의 없이 오이스터 베이로 간 것이 公使의 權利를 무시한 것이고, 또 이들이 〈白面書生으로 다수한 人民의 代表가 되어 萬國士女의 稱道(칭찬해서 말함)함을 받고 天下英傑이 모인 곳에서 대통령의 총애를 입었으니 그 영예를 시기하는 마음으로〉50) 본국 훈령을 빙자하여 청원서 제출을 거절했다고 적었다.
 
  을사늑약으로 온 국민이 비분강개하고 각처에서 다시 義兵이 일어나기 시작한 상황에서 이러한 기사가 어떤 영향을 끼쳤을 것인가는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金潤晶에 대한 증오는 一生동안 계속돼
 
  포츠머드 강화회의는 한때 배상문제로 교착되었으나 9월5일에 러-日講和條約이 체결되었다. 조약 제2조는 한국문제에 대해 〈러시아帝國政府는 日本이 韓國에서 政治上, 軍事上 및 經濟上의 우월한 利益을 갖는 것을 인정하고, 日本帝國政府가 韓國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指導, 保護 및 監理의 조치를 취하는 데 대해 간섭하거나 방해하지 않을 것을 약정한다〉51)고 되어 있다. 이로써 패전국 러시아는 日本이 韓國을 保護國으로 만드는 것을 용인했다. 또한 포츠머드 회의와 때를 같이하여 8월12일에 체결된 제2차 英-日同盟條約도 日本이 한국에 대해 〈指導, 監理 및 保護〉의 조치를 취하는 것을 英國이 인정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52) 이렇게 하여 마침내 美國과 英國과 러시아는 日本이 韓國을 保護國으로 만드는 데 국제적인 보장을 한 것이었다. 그러한 포츠머드 강화회의를 주선한 일로 루스벨트가 1906년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것은 역사적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李承晩과 尹炳求의 요구대로 金潤晶이 하와이 교민들의 청원서를 국무장관에게 전달했더라도 그것이 강화회의에 제출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한 사정은 9월9일에 귀국하는 日本의 수석대표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에게 루스벨트가 『앞서 淸國政府가 강화회의에 참가하겠다는 희망을 표명해 왔을 때에도 淸國이 돈 한 푼, 兵士 한 사람 사용하지 않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이론상 불가능하며, 요컨대 日本과 러시아 양국의 처분에 일임하는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53)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李承晩은 루스벨트의 외교적인 언사를 곧이곧대로 믿고 金潤晶을 그처럼 증오한 것이었다.
 
  하와이 교민들의 청원서를 제출하기를 거부한 金潤晶은 강화회의도 끝나기 전에 국무장관 대리 루미스에게 터무니없는 정보를 전했다. 그것은 서울駐在 各國公使들이 회의를 열고, 각각 본국정부에 자기들을 소환하고 후임으로 代理公使를 임명할 것을 요구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본국 정부로부터 자기에게 알려왔다는 것이었다. 루미스로부터 사실을 확인하라는 훈령을 받은 모건 주한 미국 공사는 8월30일에 그러한 회의가 열린 적이 없고, 하야시 일본 공사는 서울주재 각국 공사관이 철수할 것을 日本政府가 기대하고 있음을 시사하기는 했으나, 高宗은 韓國이 독립국이라는 표시로 각국 공사관이 서울에 존속할 것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으며, 외부대신 李夏榮은 金潤晶이 루미스에게 말한 내용은 韓國政府의 훈령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보고했다.54)
 
  金潤晶의 이러한 태도는 이때는 이미 그가 日本政府의 하수인이 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李承晩은 金潤晶의 태도를 보고 어떻게 한국 사람들이 저렇게 자기나라를 배반하고 자기 친구들을 배반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느꼈다고 한다. 그는 이때에 한국 사람들이 그처럼 짐승 같은 저열상태에 빠져 있는 한 한국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한국 사람들에게 기독교 교육을 베풀기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적고 있다.55)
 
  李承晩은 金潤晶에 대한 분노를 일생 동안 잊지 않았다. 그것은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1949년에 尹炳求가 작고했을 때에 그에 대한 弔辭의 거의 대부분을 이때의 金潤晶의 배신행위를 규탄하는 데 할애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56) 尹炳求는 1949년에 李承晩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外務部와 公報處의 고문으로 일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사망했다.
 
  드디어 金潤晶은 9월5일자로 본국정부로부터 譴責(견책)처분을 받았다. 이유는 「교섭상 소홀」57)이었으나, 견책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高宗과 閔泳煥 등은 그 이상의 문책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서울에 온 루스벨트의 딸을 王族 이상으로 환대
 
  포츠머드 강화회의가 폐막되고, 며칠 뒤인 9월10일에 李承晩은 閔泳煥으로부터 그와 尹炳求의 노고를 치하하는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그 동안의 비용이라면서 130달러의 송금수표가 들어 있었다.58) 민영환은 皇帝가 자기편에 두 사람의 노력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비밀 경로를 통해 두 사람의 활동자금을 보낼 것을 약속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閔泳煥의 격려편지도 실의에 빠진 李承晩을 일으켜 세울 수는 없었다. 高宗이 비밀경로를 통해 활동 자금을 보낼 것을 약속했다는 말에 대해서도 李承晩은 〈나는 그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59)
 
  포츠머드 강화조약이 체결된 뒤에도 韓國政府, 특히 高宗은 美國의 지원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때마침 태프트와 함께 日本과 필리핀을 방문했던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가 태프트 일행과 헤어져서 韓國을 방문했는데, 이때에 高宗이 보인 환대는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앨리스 일행은 9월19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앨리스는 이전에 방문한 다른 나라 王族 이상의 대접을 받았다. 일행이 지나는 큰길가에는 사람들이 빽빽히 늘어서서 靑紅의 장명등과 성조기를 흔들었다.
 
  도착한 이튿날 高宗은 앨리스 일행을 접견하고 오찬을 베풀었는데, 그는 앨리스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오찬에 참석한 政府 高官들 가운데에는 양복을 처음 입어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앨리스 일행이 韓國에 머무는 동안 高宗은 같이 온 상원의원 뉴런즈(Francis G. Newlands)를 만났는데, 뉴런즈는 高宗에게 國際辯護士를 고용하여 위엄 있는 異議申請을 하라고 권했다. 앨리스 일행은 29일에 기차로 釜山까지 가서, 10월2일에 배편으로 떠나 한국 관광을 마쳤다.
 
  이어 10월 어느 날 閔泳煥을 비롯한 몇 사람의 대신들이 비공식회의를 열고 당면 문제를 논의했을 때에도 예의 韓美修好條約의 「거중조정」 조항이 다시 논의되었다. 한국정부로서 유일한 대책은 미국의 협력을 얻는 것뿐이었다. 회의에서는 열강의 「共同保護」로 일본의 침략을 견제하자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을 담은 皇帝의 친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기로 하고, 密使로 선교사 헐버트(Hormer B. Hulbert)를 선임했다. 高宗도 헐버트를 파견하는 데 적극 찬성이었다.
 
  헐버트는 高宗의 친서가 도중에 日本人들에게 탈취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주한 미국공사관의 파우치 편으로 워싱턴까지 보냈다. 헐버트가 호놀룰루,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피츠버그를 거쳐 워싱턴에 도착한 것은 乙巳勒約(乙巳保護條約, 또는 이른바 제2차 韓日協約)이 강제로 체결된 다음날인 11월17일이었다. 日本政府는 헐버트가 루스벨트에게 高宗의 친서를 전달하고 韓國의 獨立 유지를 위한 美國政府의 「거중조정」을 당부하기 전에 모든 것을 해결해 버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한국에 파견하여 폭압적인 수단으로 조약 체결을 서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헐버트 면접 거절
 
  高宗은 헐버트를 밀파한 뒤 11월12일에 모건 공사에게 루스벨트 앞으로 보내는 친서를 전달해 주도록 부탁했으나, 모건은 그 일에 관여하기를 거절했다.
 
  李承晩은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 헐버트와 가까운 사이였다. 그리고 비슷한 사명을 띠고 워싱턴에 왔는데도 이때에 두 사람이 만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의 「日記」(Log Book)에 따르면 학교로 돌아간 李承晩은 이 무렵에는 여기 저기의 敎會에서 강연을 하고 다녔다.
 
  루스벨트는 헐버트에게 외교사항이므로 국무부로 가라면서 접견을 거절했고, 국무장관 루트는 바쁘다는 핑계로 하루하루 미루다가 모건 공사에게 駐韓美國公使館의 철수를 훈령하고난 다음날인 11월25일에야 헐버트를 만났다.
 
  헐버트는 26일에 高宗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문을 받았다.
 
  〈짐은 총검의 위협과 강요 아래 최근에 韓-日 양국 사이에 체결된 이른바 保護條約이 무효임을 선언함. 짐은 이 조약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결코 동의하지 아니할 것임. 이 뜻을 美國政府에 전달하기 바람. 大韓帝國 皇帝.〉60)
 
  이 전보는 이미 日本의 수중에 놓인 국내의 전신망을 이용하지 않기 위해 사람을 청국의 芝까지 보내어 타전한 것이었다. 헐버트는 이 전문을 국무부에 알렸으나 며칠 뒤에 그와 만난 루트 장관은 美國政府가 이 문제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高宗은 헐버트를 파견한 직후에 대미교섭을 강화하기 위해 또 다시 閔泳煥의 친동생인 주 프랑스공사 閔泳瓚을 미국에 급파했다. 민영찬은 12월11일에 루트와 만나 高宗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閔泳瓚이 루트를 만난 닷새 뒤인 16일에 金潤晶이 外部大臣 임시서리 李完用으로부터 주미 한국공사관의 문서 및 그 밖의 財産을 日本公使館에 이양하라는 훈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루트에게 통보함으로써 모든 대미 밀사교섭은 끝나고 말았다. 루트는 민영찬에 대한 회답을 미루다가 12월19일에 보낸 편지에서 金潤晶의 이 통보가 韓國政府의 공식 통보라면서 閔泳瓚의 요청을 거절했다.
 
  金潤晶은 서둘러 公使館을 日本公使館에 넘겨 주고 귀국했다. 귀국할 때에 그는 미국 서부지역과 하와이의 분노한 교민들로부터 변을 당할 것이 두려워서 신분을 숨겨야 했다. 金潤晶은 귀국한 뒤에 泰仁郡守, 仁川府尹, 忠北道知事 등을 역임하면서 親日派로 일관했다. 李承晩은, 앞에서 언급한 尹炳求에 대한 弔辭에서, 1945년에 자신이 귀국하여 조선호텔에 들었을 때에 金潤晶이 따라와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61)
 
 
  請願外交路線과 여론환기 작업의 원형
 
  李承晩의 대미 「밀사」 사명은, 미국의 「居中調整」을 통하여 大韓帝國의 독립유지를 보장하게 한다는 목적에서 보면, 헐버트 등 다른 밀사들의 경우와 함께,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李承晩의 개인적 능력 밖의 사명이었다.
 
  루스벨트는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外交政策의 기본 사상도 강한 나라는 번영하고 약한 나라는 멸망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1900년 8월에 뉴욕 주지사로서 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에 『나는 日本이 韓國을 손에 넣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을 만큼 일찍부터 日本에 편향적이었다. 그 뒤의 東아시아의 세력관계는 루스벨트로 하여금 더욱 日本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루스벨트를 상대로 朝美修好條約상의 의무를 이행할 것을 촉구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그러나 헤이國務長官을 만난 데 이어 포츠머드 강화회의를 앞두고 루스벨트 大統領을 만나고, 특히 그것을 계기로 美國의 유수한 신문에 韓國問題를 부각시킬 수 있었던 것은, 李承晩 자신의 말마따나 한국정부가 〈몇 천원, 몇 만원을 각 신문에 주어가면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成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李承晩은 루스벨트와의 면담을 계기로 제국주의적 國際政治秩序의 냉엄한 현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에, 그것도 아무런 공적 직함이 없는 신분으로 미국의 大統領과 國務長官을 만났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면에서 큰 경험이 되었다. 사실 李承晩은 이때 이후로 독립운동 기간 내내 미국의 어떤 대통령이나 국무장관도 만날 수 없었다.
 
  이때에 李承晩이 헤이 국무장관과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고 또 그것에 대한 미국 신문의 반응을 통하여 깨달은 것은 뒷날 그가 독립운동 방략으로 시시포스의 神話처럼 되풀이하는 請願外交와 여론 환기작업의 원형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金九가 國母報讐(국모보수)의 의분에서 변복한 일본인 쓰치다(土田讓亮)를 살해했던 치하포 사건과 대비되는 상징성을 가지면서, 그 자신의 名聲과 權威를 높여 주는 근거가 되었다.●



孫世一의 비교 評傳 - 李承晩과 金九(18)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保護條約」 파기투쟁과 民衆啓蒙運動
<「是日也放聲大器」을 집필한 「皇城新聞」사장 張志淵.>

 「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자 金龜(金九)는 진남포 엡워스靑年會 총무의 자격으로 서울에 올라와서 尙洞敎會의 구국기도회, 大漢門 앞 조약파기 상소투쟁, 鐘路 가두연설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그것은 그가 전국적인 규모의 社會運動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民衆의 愛國思想이 박약함을 절감한 그는 長連으로 돌아와서 敎育活動과 民衆啓蒙運動에 온 힘을 쏟는다
 
  일본은 포츠머드 강화조약으로 러시아의 동의를 받아냄으로써 마침내 한국을 「保護國」으로 만드는 데 국제적인 보장을 확보하게 되었다. 강화회의에 참가했던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외상이 귀국한 직후인 10월27일에 일본 정부는 8개 항목의 「韓國保護權實行에 관한 閣議決定」을 했는데, 이 결정에는 〈도저히 한국 정부의 동의를 얻을 가망이 없을 때에는 최후 수단으로 일방적으로 韓國에 대해 保護權을 확립했다는 것을 통고하고〉라는 항목이 들어 있었다.1) 그것은 비록 高宗이나 한국 정부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군사력으로 억압해서 일방적으로 「보호국」으로 만들었다고 선언할 계획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樞密院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日本 天皇의 특파대사로 한국에 파견되었다. 11월9일에 서울에 도착한 이토는 이튿날로 高宗을 알현하고 일본 천황의 친서를 전했다. 그 뒤 1주일 동안 이토는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함께 군대를 시가지에 풀어 시민들을 위협하고 헌병들로하여금 호위라는 명목으로 한국 대신들을 감시하게 하는 등의 준비를 갖추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세 시간 반 동안 高宗 협박
 
  11월15일 오후 다시 高宗을 알현한 이토는 세 시간 반 동안 高宗을 협박했다. 이튿날 이토는 자기가 묵고 있는 손탁호텔로 한국 대신들을 불러 준비해 온 조약案을 설명했고, 하야시는 외부대신 朴齊純에게 일본의 조약案을 전했다. 17일 오전에 하야시는 대신들을 공사관으로 초치하여 그들의 반대의견을 확인한 다음 어전회의를 열 것을 요구했다. 일본군대가 궁궐을 이중삼중으로 포위하고 일부는 궁궐 안까지 침입하여 황제의 어전을 포위하는 등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열린 어전회의에서도 대신들은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러자 이토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일본군 사령관을 대동하고 입궐하여 高宗을 알현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高宗은 접견을 거부하면서 『이는 대신들과 결정할 문제다』라고 말했다. 이토는 高宗의 이 말을 근거로 다시 대신회의를 열게 하여 조약체결의 가부를 물었는데, 참정대신 韓圭卨이 끝까지 반대하자 그를 납치하여 딴방에 감금한 채, 새벽 2시까지 대신들을 협박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학부대신 李完用을 비롯하여 군부대신 李根澤, 내부대신 李址鎔, 외부대신 朴齊純, 농상공부대신 李重顯이 찬의를 표하자 이토는 이윽고 조약이 체결되었음을 선언했다.2) 이것이 흔히 「을사보호조약」 또는 「을사5조약」(일본에서는 「제2차日韓協約」)이라고 일컫는 국제법상 유례가 없는 조약이다.
 
  조약의 내용은 1) 日本 政府는 日本 外務省을 통하여 韓國의 外交關係 및 그 사무 일체를 감독 지휘하고, 외국 재류 한국인과 그 이익도 일본의 외교대표자나 領事로 하여금 보호하게 하고, 2) 한국과 다른 나라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을 실행할 임무는 일본 정부가 맡고,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질을 띤 어떠한 條約이나 약속을 맺지 못하도록 하고, 3) 일본 정부의 대표자로 서울에 1명의 統監을 두어 자유로이 皇帝를 알현할 권리를 갖게 하고, 각 開港場과 필요한 지방에 統監 지휘하의 理事官을 두게 하고, 4) 일본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이 협약의 조항들에 저촉되지 않는 한 계속 효력을 가지고, 5) 일본 정부는 韓國 皇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할 것을 보증한다는 것이었다.3)
 
  다섯째 조항은 한국 대신들의 요구로 추가된 것이었으나, 그것은 허울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하야시 공사는 이 조항은 한국 대신들이 예의 체면론과 高宗에게 생색을 내기 위해 요구해서 넣었을 뿐이라고 비꼬았다.4)
 
  高宗은 이 조약을 끝까지 인준하지 않아 절차상으로는 그것은 조약이 아니라 일본의 일방적인 「선언」이 되고 말았다. 高宗이 미국에 밀파했던 헐버트에게 이 조약을 부인하는 전보를 보낸 것은 앞에서 본 대로이다(「月刊朝鮮」 2002년 12월호, 「루스벨트 大統領을 만나다」).
 
 
  반대운동의 도화선이 된 「是日也放聲大哭」
 
  「보호조약」이 맺어진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각지에서 조약의 무효를 외치고 「乙巳五賊」(을사오적:조약에 찬성한 다섯 대신)의 단죄를 요구하는 조약파기투쟁이 맹렬하게 전개되었다. 파기투쟁의 도화선이 된 것은 신문들이었다. 일본은 민심의 동요를 우려하여 조약 체결 사실을 당분간 비밀에 부쳐두고자 했으나 「皇城新聞」은 11월20일자 기사로 「보호조약」 체결과정에서의 일본의 강압을 자세히 폭로했다. 같은 날 사장 張志淵은 유명한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 이날에 목놓아 哭하노라)」이라는 논설로 다섯 大臣은 말할 것도 없고 참정대신 韓圭卨까지 규탄했다.
 
  〈저번 날 伊藤候가 韓國에 오매 어리석은 우리 백성들이 서로 다투어 말하기를 候는 평소에 東洋三國의 鼎足安寧을 자임하여 주선하던 사람이라, 오늘 한국에 온 것은 필시 우리나라